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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두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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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신학(public theology)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두 흐름:
보수적 기독교의 사유화 신앙과 진보적 기독교의 참여의 신앙

Two trends of Korean Christianity on the public theology :
the conservative Church's Religious Privatization  vs.  
the liberal Church's transforming participation

김경재 (한신대 교수)






[1] 논제의 목적과 중심 주제어들의 개념규정   

한국사회의 현실문제에 대한 발언과 미래사회 형성에 참여하는 다양한 정치․사회․ 문화 집단들 중에서 한국 종교계의 목소리는 아시아만이 아니라 이슬람사회를 제외한 세계 여러 국가사회들과 비교할 때,  발언 및 행동의 빈도수나 그 영향력에 있어서 매우  크고 역동적이다. 근대 개화기 이후(1876 이후), 한민족의 사회․문화 변동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을 진진하게 고려함이 없이는 한국 근현대사 서술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민족에게 로마 가톨릭교가 공식으로 전래되어 최초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세기 말(1784) 이었고, 기독교(개신교)는 그보다 100년후인 19세기 말(1884)이었는데,  이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Christianity)는 지난 120년 기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100년간 한민족의 사회․문화변동과 그 형성에 있어서 부정적 의미에서나 긍정적 의미에서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현대국가사회 속에서는, 개인의 종교선택자유, 신앙양심과 고백의 자유, 국가권력이나 외부의 힘이  침해 할 수 없는 지성소 같은 인격체의 신성불가침성, 열린 시민사회에서 종교신념의 포교자유 및 신앙단체 결사의 자유등 매우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문명사회의 공통적 합의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특히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겪은 처절한 역사적 시련과 희생의 대가를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다. 종교개혁이후 발생한 프랑스의 위그노전쟁(1562- 98), 30년전쟁(1618-48), 청교도 혁명(1642-51)등을 거쳐 신대륙에서 미국이 연방헌법(1791)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과 종교행사의 자유를 명기했다. UN 은 ‘세계인권선언문’(1948) 제18조에서 인간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기본선언을 문서로 명기하였다.
  현대사회의 기본조건같이 정립된 ‘정교분리 원칙’의 근본정신은 종교공동체와 국가가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든지, 종교는 이제 개인의 ‘사적 일거리’(private affair)가 되었으므로 사회의 공공문제에 관심하거나 정치사회문제에 관여해서는 않된다는 그런의미가 아니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말하려는 근본정신은 인간의 신앙문제, 양심문제, 사상추구 문제등 인격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삶의 궁극적 관심들’에 해당하는  가치영역에 대하여서 국가가 간섭할 능력도없고 국가의 통제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종교의 자유보장’이라는 목적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 또는 권력기관의 간섭과 통제를 배제하자는 뜻이었다.
 본래 ‘정교분리원칙’의 근본정신과 입법취지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시대 이후 문명사회가 세속화 되어가면서 ‘정교분리원칙’의 근본정신은 약화되거나 변질되어갔다. ‘정교분리원칙'이 말하려는 근본동기는 망실되어 버리고, 종교는 ‘사사로운 개인 관심거리’로 치부되고 더 이상 사회의 ‘공공성에 관련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러한 변화과정의 가장 큰 이유는 모더니즘이후 인류문명사를 지배했던 ‘과학적 합리주의’와  역사적인 현실만을 실재라고 믿도록 추동하는 ‘세속화 과정’이 주된 이유이지만, 최근엔 ‘종교의 다양성’도 그 이유중의 한가지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종교가 현대사회 속에서 개인의 ‘사적 관심거리’로 변질되어갈 뿐만 아니라, 종교가 지닌 공공성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될 때, 종교가 인간의 자기행복과 성공을 획득하려는 수단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하면,  공공적 삶에 대하여 종교인들이 ‘궁극적 실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유화’(privatization)하려는 경향에로 타락하고, 진리에 기초한 진정한 ‘비판적 초월의식’의 상실로 인하여 결국  ‘사이비 종교와 권위체계’에 예속되는 정치이념적 당파성을 노정하고 만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특히 개신교의 교회역사 120년을 통시적으로 조망하면서, 기독교의 공공성에 대한 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기독교계의  신앙운동의 맥과 개인주의적으로 사유화(privatization) 되어가는 보수적 기독교계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종교의 궁극적 과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제2장에서는 왜 종교도 ‘공공성의 문제’를 회피 할 수 없는지를 신학적으로 밝히기 위하여  현대신학과 현대 철학 적 해석학의 생각을 정리할 것이다. 제3장에서 한국 기독교의 두가지 흐름을 ‘공공성에 대한 책임적 참여’를 기준으로하여 통시적으로 고찰 할 것이다. 제4장에서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하여 종교의 현대적 책임과 과제를 언급할 것이다.
  이 논문을 서술해 가기 이전에 먼저 ‘공공의 신학’( the public theology)이란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공공의 신학’ 이란 그리스도인의 ‘공공의 신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공공의 신앙’이란 예언자와 사도적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갈릴리 예수의 복음을 성서적 신앙의 본질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가, 세상현실과의 관계성 정립에 있어서,  역사현실에 대한 책임성과 사회윤리의식을 가지고 세상 한 복판에서 자기초월을 견지하면서, 세계현실을 하나님나라의 비젼을 향해 변혁해가는 신앙을 말한다. ‘공공의’(public) 이라는 한정어는 ‘사적인’( private)이라는 말과 대비되지만 공공성의 실질적 의미는 세상현실과의 참여적 관계성, 공동체적 사회윤리의식,  역사현실의 우상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의 변증법적 긴장과 통일을 강조한다.
  더 쉽게 말하면, ‘공공의 신앙과 신학’이란 예수의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팔복(마5:3-10)을 개인 인간 심령의 내면성의 문제로서만 아니라 사회가 공동체적으로 추구해가야 할 그리스도인 윤리의 ‘마르나 카르타’라고 고백하는 신앙과 신학을 말한다. ‘공공의 신앙과 신학’이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5:13-16, 막 9:50, 눅 14:34-35)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순명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고백적 삶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기능을 다하려는 신앙과 신학을 말한다.
 ‘공공의 신앙과 신학’이란 예수의 하나님나라 비유에서  특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마13:31-33, 막4:30-32, 눅13:18-21)에 주목하면서 세상을 생명과 평화공동체로 변화시켜나가는 겨자씨와 누룩으로서의 ‘크리스챤의 자기정체성’을 각성하는 신앙과 신학을 말한다. 그러므로 ‘공공의 신앙과 신학’은 복음의 능력에 의한 인간 ‘내면의 해방’과 동시에 ‘외면의 해방’을 동전의 앞뒤관계라고 파악하는 신앙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개인심령 내부의 의인․중생․성화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경험과  인간을 죄의 현실로 몰아가는 사회적 역사적 구조악과 불의한 제도를 변혁해감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을 지향해가는  동시적 이중해방운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서, ‘공공의 신앙과 신학’의 개념을 역사․사회학적 개념에 국한하지 않고 존재론적․우주론적 지평에로 확대심화시켜 규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하늘과 땅’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두 질서가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분리되어있지 않고 하나로 통전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대승적 기독교 신앙’을 말한다. 불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 피안의 세계와 차안의 세계, 시공초월의 세계와 시공유한의 세계,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영적인 몸과 육적인 몸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되어서는 아니된다고 믿는 신앙과 신학을 말한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두 질서를 두셨지만, 한 분 하나님이 두 질서의 동시적 주 하나님이시며, 마침네 그 두 질서를  당신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의 날에,  만유를 당신의 ‘영광의 빛’ 안으로 초청하시고 변화시키실 때, 두 질서는 긴장과 모순갈등을 그치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영광의 투명성을 입으면서 모두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12-13, 15: 28, 15:50- 54).
  ‘공공의 신앙’이나 ‘공공의 신학’이라는 어휘는 앞서말한 일본 기독교대학교 연구소에서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중심어휘’가 되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120년사 안에는 그러한 ‘공공의 신앙과 신학’으로 살고간 많은 신자와 신앙공동체 무리가 있었다. 그 것을 제IV장에서 소개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중심의도이지만,  짧게나마 제II장에서 ‘공공의 신학과 신앙’의 신학적 근거를 좀더 밝혀보고자 한다.

II. ‘공공의 신앙’ 기초로서 신학적 이론근거

 ‘공공의 신앙’에 대한 담론은 생명과 인간실존 방식에 대한 신학적 인간학의 조명을 요구한다. 필자는 그 신학적 조명으로서 20세기의 탁월한 개신교 신학자들 폴 틸리히, 칼 바르트, 리챠드 니버, 그리고 본 훼퍼의 지론을 근거로 하여 밝혀보려고 한다.
  폴 틸리히(1886-1965)는 그의 조직신학 제3권 ‘생명과 영’에서 모든 생명체들의 기본적인 세가지운동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세가지 운동은   ‘생명의 자기통전운동’( The self-integration movement of life), ‘생명의 자기창조운동’( The self-creation movement of life),  그리고 ‘생명의 자기초월운동’ ( The self-transcendence movement of life)이 그것이다.
  ‘생명의 자기통전운동’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미분화된 전일적 생기의 가능태에서 현실태에로 구별되어, 차별화된 개체로서, 통일성을 지닌 현실태로서, 자기자신을 향유하려는 운동이다. 아메바로부터 한포기의 풀꽃, 곤충과 동물, 그리고 영장류의 인간에 이르기 까지 모든 존재하는 현실적 생명체들은 끊임없는 형태변화 속에서도 ‘자기자신으로서 통전성’을 유지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이러한 ‘생명의 자기통전 운동’이 생명의 진화 곡선상에서 인간생명현상에 이르러 최고조로 도달할 때, 도덕적 가치세계를 인지하는 ‘인격성’이라는 생명현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인격성과 도덕성 자각으로 꽃피어 난  ‘생명의 자기통전 운동’은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 속에 있는 ‘생명현상’인 것이지 ‘불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현상으로서 인간의 자기통전운동은 ‘개체화와 참여의 양극성’( The polarity of 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의 구조 안에서 끊임없는 쌍방운동 속에 있다. 다시말하면, 한 사람의 개인 인격체가 더욱더 인격적 존재로서 생명을 향유하려면, 그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현실’ 특히 타자적 인격체들과의 사회현실과의 무한한 관계성을 유지함으로서만 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인으로서의 한 인간의 주체성과 내면성이 지닌 존엄함도 자존적이거나  실체론적 의미에서 그리되는 것이 아니고, 귾임없는 타자적 인격체들(이웃형제자매들)과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학에서 본다면, 근대서구철학을 풍미했던 ‘선험적 주체성의 철학’은 거울에 비친 자기얼굴을 타자성으로 착각한 결과물이다. 개인각자가 인격적 존재자로서 독립한 연후에, 사회적 참여나 타자 인격체와의 관계성을 맺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로의 참여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서만 나의 주체적 인격성이 ‘현성’(現成)한다. 그러므로, ‘선험적 주체성의 철학’위에 기초하고있는 근대적 개인주의 신앙이 ‘정교분리’원칙과 신앙의 ‘실존적 결단성’을 명분으로해서 기독교신앙을 ‘사적 일거리’(private affair)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자기기만의 형태에 불과하다.
  폴 틸리히가 해명하는 생명있는 것들의 공통적인  둘째운동은 ‘생명의 자기창조 운동’인데, 이 운동은 생명체가 변화속에서 자기통전성을 추구하되 ‘새로움’을 향유하고 창조하려는 전방 지향성(前方指向性)을 말한다. ‘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은 인간 생명현상의 단계에 이르러 ‘문화창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생명체는 동일한 것의 무한반복을 싫어하고 새로움에 대한 모험과 변화를 통한 창조를 경험하려 한다. 가치창조와 모든 형태 문화예술활동, 정치조직체계와 경제활동, 과학적 발견과 발명 활동들이 그것을 지시한다. ‘생명의 자기창조 운동’은 존재론적 양극성 안에서 움직이는데 ‘형태성과 역동성의 양극성’(The polarity of form and dynamics)이 그것이다.
  인간생명의 창조활동은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창조하고 실현하려는 생명의 역동성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그 역동성은 무질서하거나 임의적인 자유분방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태나 형식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에 규정받는 방식으로서만 진행된다. 창조성의 극치인 예술활동, 언어를 매개로하는 작품활동, 신기술의 개발과 발견을 살펴보면, 새로움의 출현은 옛 형식과 법칙성을 초극하는 가운데  발생하지만, 이전의 형태나 형식에 기초하고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서만 가능하다. 더 정확하게 관찰하면 옛것을 부정하고 초극하는 행위자체가 새로운 형태와 형식을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형태성 없는 역동성이란 맹목적이고, 역동성 없는 형태성이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신앙생활도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최고의 정신현상이자 활동인 점에서 형태성과 역동성의 양극구조를 초탈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보수신앙 단체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일정한 교리적․신학적․종교의례적  형태성을 불변적 진리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신앙행태를 말한다.
  폴 틸리히 조직신학이 말하는 생명있는 것들의 공통적인 세 번째 운동은 ‘생명의 자기초월 운동’인데, 이 운동의 특징은 한계성을 돌파하여 초월하고 초탈하려는 생명의 상승운동이라는 점이다. 인간생명현상에서 ‘생명의 자기초월 운동’은 초월의식의  각성, 무한한 것에 대한  직감정 반응, 숭고하고 거룩한 것에 대한 경외감등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현상’으로 나타난다. 계시종교인 셈족계 종교에서 일지라도,  하나님의 자기계시적 현실성에 대한 인간생명체의 ‘자기초월적 반응능력’이 없이는 신적 계시사건 자체가 무의미하다. 설혹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현실성(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계시에 응답하고 계시를 수용하도록 ‘은총의 덧입히는 선물’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응답성이 소나 말의 그것과 다른 것일 터인즉  해석학적 자기초월자로서의  인간측 분담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생명의 세 번째 운동인 ‘생명의 자기초월운동’은 신비가들의 절대명상 수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 구조를 지니는데 그 틀은 ‘자유와 존재제약성의 양극성’( The polarity of freedom and destiny)이라고 틸리히는 설명한다.  여기에서 존재제약적 숙명(destiny)이란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한계상황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죄책감, 삶 속에서 체험하는 불합리한 고난, 이해 할수 없는 죽음, 선악의 공존 같은 경험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매우 역설스럽게도, 인간의 자유체험이란 절대자의 ‘무한한 절대자유’같은 것이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존재 제약적 숙명들을 초극하는 자기초월의 감정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종교집단이 그 숭고함과 진정한 자유를 상실한 이유는 ‘존재제약적 숙명’을 극복하는 자기초월운동 속에서 ‘자유’를 경험하기를 회피하고, 고난이나 삶의 부정적 힘과의 정면대결을 통한 돌파가 아닌  쉬운 길,  즉 그것들의 회피나 면제보장에 귀기울이는 천박한 종교 ‘싸구려 은총신앙’의 종교가 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적 통찰을 음미한 이유는 ‘공공의 신앙’ 혹은 ‘공공의 신학’이란 어떤 특정 신학이론이거나 특정 종교이데오로기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기 위함이다.  생명의 현실 그 자체를 성실하게 주목하고, 생명의 엄숙한 법칙에 순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생명운동과 그 세가지 생명운동을 존재론적으로 틀지우는 양극성 원리 속에서 인간생명은 창발적으로 영위됨은 인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신앙이란 개인의 지극한 내면세계의 일거리인즉 타인이 관여할 바 아니라는 명분아래, 기독교신앙을 주관주의적 개인신앙 행태(行態)에로나 또는 정반대로 어떤 특정시대 신학적 ․철학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시키는 현대판 ‘우상숭배’를 타파하여 복음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신앙의 공공성이나 ‘공공의 신학’을 운위할 때, 우리는 20세기 또 다른 탁월한 개신교 신학자 Karl Barth(1886-1968)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형상론’(Imago Dei)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적 삶을 산다는 말은  본래적인 인간의 존재방식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회복하여 살아간다는 말이며, 본래적 인간성의 원형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 실재가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고 증언한다(고후4;4, 골1:15). 진정한 신앙적 삶의 존재방식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건강한 삶의 모습인즉 칼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해명하는 ‘하나님의 형상론’은 ‘공공의 신앙’의 타당성을 지지하고 신앙을 ‘사적 일거리’로 이해하는 신앙의 ‘사유화’(privatization)가 얼마나 왜곡된 모습인가를 판명해준다.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론’은 그의 『교회교의학( Church Dogmatics)』제3권 제 10장 ‘피조물’이라는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에 의하면, 참 인간존재의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약의 대상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관계성 속에서 살도록 허락되고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학적 인간학의 기본명제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규정하는데, 인간다움(인간성)의 기본 꼴은 ‘남자와 여자,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만나서 더불어 사귀는 관계성’ 속에 있다. 서로 만나고, 더불어 사귀이며, 서로 자유가운데서 사랑하는 관계적 존재가 인간성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유비(關係類比, analogia relationis)로서 이해하는 바르트의 인간학이다.        성서에서 들리는 창조주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고백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존재양식( 神的存在樣式, the modes of God's Being)은 ‘자유와 사랑안에서 상호충만 상호내주 하시는  페리코레시스적 관계(perichoresis-relationship)이다. 그러한 신적  그 존재양식을 닮아 사람은 ’자유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사귀는 공인간성(共人間性, Mit-menschlichkeit)을 본질적 특징으로 갖는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자유와 사랑가운데 더불어 있음의 존재양식’을 본질로 하는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충분 조건 네가지가 제시된다. 진정한 만남의 존재로서 인간은  ‘대등한 자리에서 서로 마주 바라봄의 관계’, ‘서로 말하고 들음의 관계’, ‘서로 돕고 도움받는 관계’, 그리고 ‘상호 기쁨과 자발성에서 행동하는 관계’가 실현되어야 한다.
   참 인간성 실현의 필요충분조건 첫째로서 ‘대등한 자리에서 서로 마주 바라봄의 관계’는 일체의 신분차별, 인종차별, 성차별의 철폐를 요구하며 인간관계의 상호개방성을 의미한다. 둘째조건인 ‘서로 말하고 들음의 관계’란 언어적 삶의 개방성과 상호소통 및 공주관성(共主觀性)을 요구한다. 권력에 의한 언어의 왜곡이나 정보의 독점이나 언어의 폭력은 인간성의 실현을 저해한다. 셋째조건인 ‘서로 돕고 도움받는 관계’란 상대방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거나 굴종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기본꼴이 상호의존관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넷째조건인 ‘기쁨과 자발성의 관계’란 본래적 인간의 창조모습은 엄숙한 책임윤리나 율법준수라는 당위론에서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사심없는 놀이처럼 신바람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의 신앙’의 신학적 기초로서 칼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을 거론하는 이유는 인간을 단독자로서 파악하는 실존주의 인간학, 힘에로의 의지(Will  to Power)에 기초하여 초극되어야 존재로 파악하는 니체적 초인철학의 인간이해, 집단주의를 추구하는 나치즘이나 북한의 주체사상, 생물학적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현대판 제국주의적 인간이해를 모두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기독교 신앙을 ‘사적 일거리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이다.
  ‘공공의 신앙’을 기초놓을 수 있는 현대신학자중의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한 사람으로서 Richard Niebuhr(리챠드 니버, 1894-1963)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저서중 중요한 두가지 책 『역사의 의미, The Meaning of Revelation』과 『그리스도와 문화, Christ and Culture』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번역자가 한국 현대기독교의 진보적 교단의 사부라 할 수 있는 장공 김재준 목사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리챠드 니버는 그의 형인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와 함께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공공 신앙’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 셈인데, 특히 리챠드 니버의 신학방법은 가치론적․관계론적․계시론적인 세면을 지닌 삼능분광기(三稜分光機, 프리즘)와 같다. 그는 『철저유일신 신론과 서구문명,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관을 ‘철저한 유일신’으로 규정하고, 다신론(Polytheism)이나 사회통합의 문명신이랄 수 있는 일신론(Henotheism)과 분명하게 구별 할 것을 주장했다.  다신론, 일신론, 유일신론이란 신에 대한 숫자개념의 이론이 아니다. 그것들은 ‘만유’(Many)와 ‘하나로서 궁극적 실재’(One)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의 실재관이요 세계관이다. 그 세가지 신관은 원시시대의 다신론으로부터 진화발전해서 유일신론에 이른다는 헤겔적인 진보적 발전사관하고도 무관하다. 현대문명 한 복판에도 세가지 실재관이 공존한다.
  다신론(Polytheism)의 본질은 ‘만유’(Many)를 통일하거나 초월하는 ‘궁극적 일자’(One)를 인정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못하며 추구하지도 않는다. 다신론이란 가치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실재관이다. 다신론의 표어는 ‘만유가 곧 하나'(One as many)라는 것이다. 이러한 다신론적 가치관 및 실재관은 원시부족시대의 정령숭배로부터 현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문명국가에서의 가치상대주의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다.  
  일신론(Henotheism)이란 글자로서는 신이 ‘하나’(One)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 ‘하나’인 신은 ‘만유’(Many)라는 존재질서 계보의 맨위 꼭대기에 위치하는 ‘가장 높은 이’라는 것이다. 존재자들의 위계질서상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지, 질적으로 ‘만유’를 초월하지 못한다. 구약성경의 신관이 발전해가던 초기엔 이러한 일신론적 신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으나, 포로기 이후 유일신관으로 정화되어갔다.
   일신론(Henotheism)은 존재계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가치들과 힘들을 통합하는 최고의 원리 또는 특정실재를 설정하고 그것을 신격화시킨 사회적 통합신, 제국의 신, 국가의 신이다. 정치권력의 최고통치자가 신현(神現, Theophany)으로서 옹립된다. 에집트의 파라호, 일본군국주의시대의 천황숭배, 독일 제3국의 지도자 히틀러, 소비엩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 지도자 동무가 모두 그러한 일신론적 신관의 세속적 형태들이다. 그러므,로 일신론에서 말하는 신이란 ‘만유중의 하나’(One among Many)에 불과하다.  
  유일신론(Monotheism)이란 모세종교나 예언자종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하는 신앙의 대상인데, 흔히 서구문명사에서는 일신론(Henotheism)으로 오해를 받아온 것이다. 진정한 유일신론이란 사도바울의 에베소에 보낸 편지중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엡4:6). 다시말해서 ‘궁극적 일자’(One)는 ‘만유(Many)중의 최고자’가 아니라 질적으로  ‘만유를 초월해 계신이‘(One beyond One) 이다. 그러나, 동시에 만유에게 존재를 허락하고 지탱하며 창조적 삶을 살도록 만유가운데 내주하면서 만유를 통하여 일하는 하나님이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절대신’의 초월성, 내재성, 창조적 과정성이 동시에 고백되는 신관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신도공동체 앞에서는 어떤 절대적 권력이나 가치도 ‘우상화’될때는 저항과 타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러한 리챠드 니버의 기독교적 유일신관은 복음(그리스도)과 문화(세상)와의 상호관계규정을 할 땐, 저 유명한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변혁’( Transformation in Christ)이라는 문화사회선교신학으로 나타난다. ‘복음’(그리스도) 그 자체는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서구문명 그 자체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로 표현되는 세계현실과 이교문화는 부정되거나 파멸되거나 대치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창조적 능력과 의미를 통하여 ‘질적 변화’를 거쳐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인은 책임적인 인격주의를 견지하면서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독교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사사화’(私事化)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공공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지지 할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한국의 암울했던 정치적․역사적 현실상황 속에서, ‘불의하고도 왜곡된 역사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저항과 비판의 신학적 실천운동을 펼쳤던 수많은 진보적 한국 기독교 청년들과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본 훼퍼(D. Bonhoeffer, 1906-1945)를 언급하지않고 지날 수 없다. 그의 순교로 인해 천재성이 빛나는 단편들은 체계적 신학서로서 발전하지 못했지만, 『성도의 교제』, 『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 『창조와 타락』, 『저항과 복종: 옥중서한』등 그의 대표적 저술물들이 거의 모두 한국어로 번역된것만 보아도 그의 영향을 짐작 할 수 있다.
   본 훼퍼의 신학과 신앙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1970-80년대 한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직’(Discipleship, Nachfolge)이 지닌 고귀한 가치와 의미를 각성시켜준 것과, 교회를 제도나 조직체나 전통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보도록 일깨어 준데 있었다.  한국의 젊은 진보적 그리스도 청년들은 기독교윤리의 과제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어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시절, 수많은 진보적 기독학생들이 그들의 몸에 덮어씨우는 수년동안의 감옥행이나 육체적 고문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상화된 권력을 비판하면서 신앙적 저항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 훼퍼로부터 받은 깨달음 이었다. 이 세상 속에서 신적 계명의 구체적 형태로서 본 훼퍼의 네가지  위임론( 노동, 결혼과 가정, 정부, 교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임한 네가지 영역을 통하여 ‘책임적인 공공적 삶’을 살도록 촉구하였던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 신앙집단들의 보였던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등은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한 신앙고백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본 훼퍼가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규명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타자를 위해 고난 받는 책임적 삶을 사는 것이 정상적 삶임을 깨닫게 되었고, 교회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동시대에 앞에서 언급한 ‘공공의 신앙과 신학’ 로선과 는 대립되거나 대조되는 기독교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복음주의 보수신앙’이라는 이름아래 번창해 갔다. 이제 필자는 제 III 장에서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 구성하는 네가지 기본구성소를 언급하려한다. 그리고 제IV장에서 한국 기독교 120년에서 10가지 사례를 추출하여 우리의 주제를 점검하면서  두 흐름 ‘공공의 신앙과 신앙의 사유화’가 어떻게 교차되는가 성찰해보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V장에서  간략한 결말을 맺고자 한다.

III. 한국 기독교사의 네가지 중요구성소 : 신체험의 양극성, 민중성, 역동성, 하나 지향성
                                         
   위에서 살핀 대로 기독교 신앙은 근대 서구의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잘못 발전해온 종교의 ‘사사화’(私事化)와는 달리, 한민족의 경우 기독교 전래는 ‘개인 영혼의 구원’ 못지않게 복음이 사회․문화적 현실을 변혁하는 결과를 동반하면서 강력한 ‘공동체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앙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아래에서 필자는 한국 개신교 역사 120년을 ‘공공의 신앙’과 ‘사적인 신앙’ 이라는 두가지 흐름이 매시기 마다  병존해왔음을 한국 교회사를 통해  예증하고, 향후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이 지향해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개신교사 120년을 시기적으로 단층쵤영하듯이  세밀하게 분류하면서 교회사를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다. 이 논문은 한국 개신교사를 다시 소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역사가 지닌 양면성 곧 ‘공공의 신앙’과 ‘사적인 신앙’이 어떻게 상호 길항작용을 하면서 진전되어 나가는가 살피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운동과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기독교사의 네가지 구성요소라고  간주할 수 있는 구성적 변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 네가지를 신의 양극성, 민중성, 역동성, 그리고 ‘하나’ 지향성 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첫째요소, 한국 개신교의 특성으로서 ‘신의 양극성’이란 한민족의 오랜 종교문화와 한민족의 영성이 성서적 만유 초월적인  유일신론과  해석학적 ‘지평융합’(地坪融合)을 이루면서 형성된 신관의 상반된 두 측면이다. 본래 한민족은 ‘하느님’ 신앙을 지니고 왔었다.   그런데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은 ‘하나(一)와 많음(多)의 변증법적 통일성’을 특징으로 갖는다. 한민족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만유 초월적 주제자이면서도, 스스로 분화하여 만유 속에 내재하면 산신, 해신, 성황당신, 목신, 등등 다신적(多神的)으로 나타난다. 한민족에게  신의  세계 ‘초월성’과 ‘내재성’이 철저하게 이분화되어 있지 않고 양극성적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신의 양극성은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우상화된 정치권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비판적 초월의식’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세적 복락을 갈구하는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으로 타락하기도 한다.
   둘째요소, 한국 개신교의 특성으로서 ‘민중성’은 개화시기에 포교대상이 ‘민중’이었으며, 개신교 운동사의 중심세력 또한 ‘민중’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민중’이라는 개념은  현대적 의미에서  ‘시민대중’이지만, 보다 특징을 강조한다면 민중신학이 말하는데로 “정치적으로는 억압받고, 경제적으로는 수탈당하고, 문화적으로는 소외당한 계층”을 말한다. ‘민중’ 계층는 개신교의 선교초기에 일단 ‘성직자 계층’이나 ‘지식 엘리트 계층’과 구별되면서 단순함, 질박함, 끈질김, 집단성, 수동성을 특징으로 갖는 사회계층이다. 그러나, ‘민중’(民衆)이란 ‘우중’(愚衆)이거나 ‘군중’(群衆)과는 달리 ‘속으로는 깨어있는 역사의식 혹은 시대의식을 지닌 무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노자가 말하는 ‘물’(水)과 같아서 평상시엔 매우 순응적 모습을 보이다가도 역사의 위기엔 변화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여 혼란해진 사회의 질서를 바르게 다시 돌려놓는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인  ‘민중성’이 타락하면 혹세무민하는 거짓지도자들에 끌려 다니는 ‘우중’이나 ‘군중’이 되고 만다.  한국 기독교의 ‘민중성’은 그 양면적 얼굴을 지닌다.
   셋째요소,  한국 개신교의 특징으로서 ‘역동성’은 한민족 민족성의 특징인 ‘풍류도적 기질’에 근거하는데 창조적 약동성, 신명들린 듯한 자발성, 예술적 생기발랄함, 감성적 격정성, 부흥회적 과잉흥분 기질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역동성’도 앞서 언급한 ‘신관의 양명성’이나 ‘민중성’의 두모습처럼  야누스적인 두가지 얼굴을 지니고 역사현실 속에서 교차한다. ‘역동성’이 순기능 모습으로 나타 적엔 1919년 3.1운동, 1970-80년대 인권․민주․통일 지향의 교회운동,  수십명부터 수천명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모이는 새벽기도회 운동, 불과 산업화 한지 40년 최단 시간안에  생명공학 이나 전자공산품 제작 기술혁신에서 세계 최첨단 기술수준으로 도약하는 쾌거를 낳는다. 그러나, 동시에 ‘역동성’이 역기능적으로 나탈 적엔 반지성적 맹목신앙, 주술적 부흥신앙회, 종교적 광신주의 운동, 정파적․종파적  파쟁주의로 나타난다.
   넷째요소, 한국 개신교의 구성적 요소의 특징으로 ‘하나 지향성’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원융회통적 화엄세계’의 실현을 의미하고, 유교식으로 말한다면 ‘대동세계’ 지향을 의미하고,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샬롬이 실현된 하나님 나라’ 지향성을 의미한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통치할 때, 통치수단의 하나로 널리 국민을 쇠뇌시킨 ‘식민사관’이나 ‘조선인의 파당적 기질론’은 과장되거나 날조된 면이 크다. 겉으로보면 “세사람만 모이면 영국인은 대화하고, 일본인은  단결하고, 한국인은 다툰다”는 현상적 시중언어가 회자되지만, 깊이 드려다보면 한국인은 싸우다가도 툭툭털고 하나로 양보해버리는 면이 있다. 그리스도교가 한민족에게 전래되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자기희생적인 아가페’에 접촉하여 수많은 개신교 평신도들중에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전체로서의 하나의 생명을 살려내려는 숭고한 삶’이 주렁주렁 열매로 나타났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간도 명동촌에서 일어난 김약연의 교육구국 운동, 조만식 김구의 독립운동, 김용기․장기려의  생명살리기 운동, 전태일의 분실자살 노동운동,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 문익환의 평양행 통일 촉진운동등은 모두 그러한 ‘하나지향성’의 발로이다.

IV. 한국 기독교 120년사에 나타난 사례분석 10가지 : ‘공공신앙’과 ‘신앙의 사      사화’의 맥

   위에서 필자가 추출해본 한국 기독교운동 저변에서 보이지 않게  한국개신교를 형성해가는 네가지 구성요소를 염두에 두면서, 한국 기독교사 120년 속에서 벌어진 10가지 사례를 들어 ‘공공 신앙 맥’과 ‘사적 신앙 맥’이  어떤경우엔 상호통전되고 , 어떤경우는 상호분렬되었던가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한다.
   필자가 추출해본 10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i) 개화운동과 네비우스 선교정책 (ii) 1907년 대부흥운동과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  (iii) 간도 명동촌 조선인 신앙공동체의 자활운동    (iv) 3.1만세 운동에 나타난 ‘공공의 신앙’  (v) 일제 신사참배강요와 주기철목사의 순교신앙 (vi) 세계냉전시대 기독교의 분열과 정치적 이념의 속박 (vii)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인권․ 민주․평화 통일운동  (viii) 1970-80년대 교회성장론․대형집회․ 순복음 신앙운동  (ix) 조용한 ‘영구혁명’에 투신한  ‘제자직’ 수행자들의 신앙 (x) 종교인연합운동과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운동, 이상 10가지 사례들이다. 이제 각각 사건의 본질을  간략히 개관하고 그 의미를 ‘공공신앙의 맥’과 ‘사적신앙의 맥’이라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그 속 의미를 분별해보기로 한다.

  4.1. 개화운동과 네비우스 선교정책

   동북아 3국 중에서 한국에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착근 할 수 있던 이유중 하나로서  조선과 일본의 수교협정(1876)이 채결된 후  한미수호조약(1882)과 한불 수호조약(1886)등)에 직면하여, 외세 침입과 서양 문물제도에 대한 한민족의 대응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된다. 줄여말한다면, 한민족에게 개신교의 공식적 전래(1885)는 개화시기와 맞물려 있어서,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독교가 전해졌고,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 전도자이자 동시에 조선사회의 개화를 촉진하는 선도자들이어서 조선인의 개화열기가 기독교의 착근을 용이하게 했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Henry G. Appenzeller)가 발행한 주간(週刊)신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1897년 2월간행)와 같은해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목사가 발행한 <그리스도 신문>(1897년 4월간행)의 논설문을 보면, 신문발행의 목적 첫째는 복음전파 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둘째목적은 바로 “학식과 문견을 넓히는” 개화운동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개화란 무엇인가? 선교사들의 견해에 의하면 첫째, 농공상업의 실질적 실용학문의 이론과 기술보급을 통하여 ‘문명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둘째, 법과 정치제도의 정착을 통해 법 앞에 만인의 평등과 공평무사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셋째, 정신적으로 자율적이며 허례허식이나 미신적 세계관에서 해방되고, 인간성을 옥죄이는 전통적 타성과 관습에서 해방되어,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으로 개변하는 것이다.
   개화의 물결은 당시 조선사회의 중상위권출신 자제들 예들면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등 개화파 인사들에게도 전해졌지만,  더많은 숫자인 평민,상인,천민등 중하위권 ‘민중’들에게 ‘개화의 복음’으로 전해졌다. 그들에게 ‘개화’란 단순히 서양문물의 도입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핵심으로 하는 ‘인간에 대한 존엄한  대우’ 였던 것이다. 그러한 초기 기독교의 정황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뉴욕주에서 태어난 화란계 미국인 선교사는 중국 산동성 치푸에서 선교사로서 일하면서 그의 선교경험을 『선교교회의 설립과 발전』(The Plann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이라는 타이틀의 한권 책으로서 출판했는데, 조선에 나와있었던 선교사들은 그 책을 읽고 감명받은 바 컸다.  1890년 6월, 조선 장로교 선교부는 서울로 죤 네비우스( John Nevius)를 초청하여 2주간 선교지에서의 효과적인 선교정책을 주제로 연구협의회를 가진바 있었다.  흔히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3대원칙이라고 알려진 피선교지 지역교회의 ‘자립’(self-support), 자치(self-govering), 자전(self-propagation)을 중심으로한 매우 유익한 선교정책 협의회였다.
   그리고 마침네, 조선에 나와 활동하고 있었던  외국 선교사들은 ‘제1회 선교사 공의회’를 결성소집하고 (1893) 미래 한국 개신교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두가지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하게되었는데, 그 하나는 ‘선교지역의 배정분활 협의’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많이 참조하여  ‘조선교회 선교정책 기본원칙’을 채택하게 된 사건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 선교사공의회에서 채택한 ‘선교정책’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류계급보다는 근로계급을 상대로 전도에 힘쓸 것. 둘째, 자녀들 교육에 영향을 주는 부녀자들과 여성들의 전도에 힘쓸 것. 셋째, 지방의 초등학교를 많이세워 기독교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장차 목회자될 지도자를 육성 할 것. 넷째, 모든 기독교 종교서적은  한글로 간행하고, 성서번역에 힘써 보급 할 것. 다섯째,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도록 지도 할 것. 여섯째, 의료선교는 병원에서 의료시술만이 아니라 환자 가정까지 방문하고, 약처방만이 아니라 사랑의 의료시술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할 것 등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조선교회 선교초기 개화운동과 조선교회 초기 선교정책은 그 뒤 120여년동안 자라나는 한국교회의 성격형성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첫째,  학교교육․교회설립 ․의료선교가 혼연일체가 되어 복음전파가 근대개화운동에 병행하여 역동성과 실효성을 거두게 되었다.  둘째, 포교의 일차대상을 근로대중과 부녀자 및 여성들에게 둠으로서 ‘민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셋째, 한글전용과 성서번역과 보급 운동에 치중한 것은 복음전파와 문맹퇴치와 정신 문화창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넷째,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일환이었던 경제자립과 자립전도 선교정책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수많은  지역교회당 건축비와 전도비 마련에 물적 토대를 갖추게 하였다. 이상이 긍정적 측면은 복음이 그 자체 안에 지니고있는  ‘공공 신앙’의 발로였다.
   부정적 측면으로서는 첫째, 개화정신이 지나쳐 전통문화와의 단절 또는 폐기를 가져와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문화사적으로 고립되게 하였으며 전통종교문화와 갈등관계를 갖도록 만들었다. 둘째, 선교지 배정과 분활정책은 교파분쟁의 씨앗을 심어주게 되었고, 개교회 자립 자전정신은 ‘개교회중심주의’라는 역기능을 조장하여, 역사 속에서 교회전체의 ‘공공의 신앙’ 책임을 약화시켰다.  

  4.2. 1907년 대부흥운동과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

  한국 기독교의 특징중 하나로서 ‘부흥회적 기질’을 자주 언급하는데 그 역사적 시원은 한국 개신교 초기에로 거슬러 올라가고 특히 ‘1907년 대부흥운동’ 사건을 원형으로 한다. 한국교회사가 이영헌은 일제 식민통치하의 3대사건은 대부흥운동(1907), 3.1 독립운동(1919), 그리고 신사참배 강요사건(1935)인데, 각각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인의 내적신앙 각성, 민족의 아픔과 호흡하는 교회의 구국운동, 그리고 정치권력의 우상화에 저항한 유일신 신앙고백이 뚜렷하게 표출되었다고 그 세가지 중요한 사건들의 근본성격을 밝혀준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적 신앙’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영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운동의 시작은 원산에서 모인 선교사들의 경건회로부터 작은 불씨로서 시작되었고(1903)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절정에 도달하여(1907) 전국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로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간 영적 갱신의 성령운동이었다. 그리고, 1920-30년대 길선주 ,김익두목사의 부흥사경회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어 전통종교문화 분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일깨워주었는데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인됨에 대한 자각’이었다. 유교는 ‘수치감’을 가르쳤으나 기독교는 ‘죄책감’을 가르쳤다.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했으나 기독교는 ‘회개와 중생’을 강조했다.
  1907년 1월 평양 장로교 교회의 하나인 장대현교회당에 회집한 수천명의  조선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은 ‘성령의 압도적인 임재체험’을 통하여 거대한 거룩한 바람과 힘의 압도를 경험하고 죄를 자복하고 중생을 경험하며 성령에 충만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된후 조금씩 쌓여져가던 선교사들의 우월의식과 특권의식 그리고 조선기독교인들의 위선적 행동과 적개심이 모두 자복되고 ‘화해와 일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 몸으로서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도 새롭게 형성된 것은 ‘대부흥운동’의 긍정적 측면이었다. 일단 1907년 대부흥운동은 기독교신앙을 인간 영혼의 내면의 깊이에로 심화시킨 점에서 ‘사적인 신앙의 내면화’를 긍정적으로 촉진시킨 셈이다.
  그러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개인적인 기독교 경건운동과 성령운동의  한국적 표현의 사례로서만 볼수 없는 시대사적 정황을 동시에 고찰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이 부흥운동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지만, ‘집단적 심령 대부흥운동’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사적 시대의식’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진보적 교회사가들은 ‘1907년 대부흥운동’을 계기로하여 초기 조선기독교의 공동체적 의식, 민족교회로서의 정치적 민족의식,  정의와 평등에 입각한 역사의식은 약화되고, 한국 기독교의 체질이 개인화, 내면화, 탈역사화, 신비주의화, 정교분리화 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는데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상황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총리를 지낸 일본육군대장 가쓰라 타로(Katsura Taro)와 미국루스벨트 특사 육군장관 테프트(W.H. 테프트)사이에 맺은 ‘가쓰라(桂太朗)-테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조선(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어서 영일동맹조약(1905. 8월)과 포츠머스 조약(1905.9월)을 통해 각각 영국과 러시아로부터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도․감리․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아 조선(한국)식민지배의 절차를 밟아갔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일본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방문)가 와서 ‘한일협상조약’ 즉 ‘을사보호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실제로 한국식민지배를 시작한 해가 1905년이었다.
  조선사회는 비탄과 울분, 힘없는 약소국가로서의 절망감과 더불어 반일감정이 점증하던 시기였다. ‘가쓰라-테프트의 비밀협약’은 미국선교사들의 조선에서의 선교정책에 있어서 초기의 ‘민족 공동체적 역사의식’을  불식시키고, 선교정책 방향을 개인 영혼구원의  내면적 해방에만 전념하도록 변화시켰다. 갑자기 기독교의 ‘공공의 신앙’의 모습은 살아지고 ‘사적인 신앙’ 형태로서 기질 변화가 이루어져가게 된 것이다. ‘영혼구원’을 목표로하는 보수적 근본주의신학의 영향도 있었지만, 한국 교회의 기질변화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서구열강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정치적 밀약의 결과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현실정치의 희생이 된 조선교회는,  ‘정교분리’라는 명분을 내세운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의 기본로선 변화로 인하여,  ‘조선의 정치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 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구령신앙’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오도된 지도를  선교사들로부터 받게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까지도 이어오는 한국 기독교의  ‘정교분리 정책’이라는 허구의식의 뿌리이다.

 4.3. 간도 명동촌 조선인 신앙공동체의 자활운동

 한국 기독교 운동중에서 ‘공공의 신앙’ 표출의 한 독특한 사례로서 조선의 북동쪽 국경을 바로넘어 펼쳐지는 땅,  지금의 두만강과 송화강 사이 기름진 북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독교 신앙공동체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지역중에서 특히 ‘명동촌’(明東村) 이라는 조선인 신앙공동체 마을에서 일제시대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28세 젊은 나이에 순직한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와 평화통일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문익환목사( 1918-1994)가 낳고 자라면서 청소년기를 기독교신앙과 민족주의 신앙을 아우르던 정신적 토양이요 모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동촌 신앙공동체의 정신과 맞닿아 있고 거리로서는 약 20킬로 거리에 있는 용정시는,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운동, 민중신학운동, 기독교 인권운동을 힘차게 추진한 김재준, 안병무, 문동환, 문재린등 진보적 기독교 지성인들의 ‘역사 참여의 신앙’ 뿌리가 형성되었던 은진중학교가 있던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은 조선선교사 공의회에서 선교지역 분활정책에 의거하여 카나다 선교부가 담당한 이후,  병원, 학교, 교회운동을 민중중심적 선교정책을 가지고 매우 독특한 기독교 ‘공공신앙’의 형태가 이뤄지던 곳이었다.  
  조선 땅에서 동북방 함경남북도 지역과 두만강 건너 간도지역은 일찍부터 조선의 중앙정부로부터 유배당하거나, 일본식민정책의 여파로 농토를 잃은 이주 농민들의 농토 개척지대였다. 만주 간도지방은  일본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강요된  ‘한일합방’(1910) 이후엔 조선독립군의 활동요충지였다. 군사전략지역으로서는 일본 관동군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관동군 사령부를 두었던(1906-1945) 지역이기도 하다.      
  명동촌은 현재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일대 북간도 산골마을에 세워진 기독교 신앙공동체로서,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남위언의 가솔이 집단 이주하여 기독교정신으로 일궈낸 독특한 신앙공동체(1889-1945) 였다. 명동서숙(1908, 명동학교로 개칭1909)의 개설, 명동교회의 설립, 간도국민회 조직등 농지개척, 교육, 신앙, 민족운동 네가지가 한 몸처럼 생동하는 신앙공동체 였다. 명동중학은 1919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는 혐으로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리게 되었지만, 기독교 애국청년 1,000 여명을 배출하였고,  명동중학교 소실이후, 김약연은  용정시에 있는 기독교 사립학교 은진중학교 이사장을 엮임하다가 용정시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파란 만장한 개척적 삶을 완결하였다(1942).  
   명동촌 조선인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공공의 신앙’ 성격을 다음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생활신앙이요 실학정신을 존중하여 노동과 예배가 함께 숨쉬는 실천적 신앙이었다. 둘째, 민족정신과 기독교신앙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민족공동체를 살리려는 공공의 현실참여적 신앙이었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관서지방 평양의 조만식이나   정주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과 똑같이 민족운동과 신앙운동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교육과 종교(교회)가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공의 신앙’ 이었다. 신앙은 건실하고 생명적인 것 이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비주의적 동굴생활이나 음침한 폐쇠적 공동체의 은둔생활을 비판하였다. 신앙의 내면은 주체적이고 영적이지만, 공동체적 삶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자유인과 주체적 독립인간을 형성하면서 평화 지향적이지만, 생명을 압살하는 불의한 세력에 대하여서는 경우에 따라  무력적 대응도 회피하지 않는 적극적 신앙이었다.

  4.4. 기미년  3.1 만세운동에 나타난  한국 기독교의 ‘공공의 신앙’

  ‘한일합방’(1910)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실시하되 데라우치 총독의 부임아래  철저한 무단정책을 실시하여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과 ‘조선교육령’(1911) 및  ‘사립학교규칙’(1915)을 공표하여 조선 기독교계의 세력확장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포교규칙에 따르면 교회당, 설교소, 강의소를 설치하거나 유급직원을 임용할 때 총동부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해서 종교계를 감시한 것이다. ‘사립학교 규칙’은 기독교계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성경과목을 제외시키고, 예배의식을 금지하며, 5년 이내에 모든 교사가 일본어만으로 가르치게 하는 규정이었다.
  1919년 3.1일에 발발한 조선독립운동의 규모와 피해에 대하여는 더러 알려져 있지만, 그 사건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치사회 사상의 정신, 종교적 높은 이념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셈이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조선기독교 교세통계는 1920년 1월에 발표한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 의하면 교회수는  2,883 개이며, 교인총수는 355,114명으로 나와있다. 한국의 교회사가 송길섭의 연구논문에 의하면 교회수 3,252 개이며 교인총수는 약 30만명으로 나와있다. 당시 천도교 교세는 기독교의 약 4배였으므로 신도숫자가 약120만명 정도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근대한국사회를 열어가던 개벽의 종교였으며, 민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제휴하였다.
  3.1 독립만세사건으로 총독부가 검거한 전체수감자 총수는 9.059명이었는데 그중 기독교신도는 1,995명, 천도교 신도는 1,363명이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두 종교인 숫자가  전체수감자중 37%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 기독교 교인수가  천도교 교인수의 1/4일에 불과했지만 수감자 총수가 천도교 수감자보다 많았다는 것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는가를 반영한다.  
   3.1운동 발발당시, 조선 땅에는 약 400여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부 적극적으로 조선인의 3.1독립만세운동을 도와준 선교사들을 예외로하면, 대부분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입장은 ‘정치적 중립’이었고 특히 미국선교사들은 ‘가쓰라-테프트 밀약’ 이후 인지라 한국독립운동에 ‘중립적 태도’였을뿐만 아니라  교회당이 만세운동 중심지로 이용되는 것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상황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그리스도인들은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당시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의 ‘공공의 신앙’이  얼마나 현실적 삶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인가를 나타낸다. 선교사들은 간접적 공헌을 했는데, 영문으로 제작되는 선교기관지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고, 일본총독부의 독립운동참가자들에 대한 비인도적인 폭악과 학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3.1 독립선언서’는 천도교대표 손병희등 15명, 기독교대표 이승훈등 16명, 불교계 대표 한용운등 2명 도합 33명이 민족대표이름으로 서명되고,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에서 21,000장이 비밀리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 독립 선언서 초안은 최남선이 기초한 것인데 참여한 민족대표 인사들이 대부분 종교인이며 그들의 ‘공공의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독립선언서의 기본정신은 세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조선독립의 요구는 양심의 발로와 생존권의 정당한 주장이며, 민족자존과 인류평등의 대의를 따른 정당한 행동이며,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위한 역사발전의 순리임을 강조하였다. 둘째, 근대서구 기독교사상을 근저로하는 자유․평등․인권․도의사상을 중심으로하여 민족의 정의․인도․생존․존영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점이다. 이 사상은 천도교의 근대적 인간해방사상과도 직접 상통하여 종교적 힘을 지니게 되었다.  셋째, 감정과 폭력적 수단에 흐르기 쉬운 정치적 독립운동의 일반적 경향을 극복하고   ‘비폭력투쟁’ 방법을 지속할 것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이러한 ‘독립선언서’의 내용은 당시 기독교계 인사들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공공의 신앙’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었고, 한국의 독립이후 한국사회의 역사적 변동 때마다 한국 종교계의 공동대응을 가능케하는 역사적 사건의 ‘원형’이 되었다.   

 4.5. 일제 신사참배 강요정책과  주기철목사의 순교신앙
  
   한국 기독교사 120년동안에 아마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은 일본 총독부가 한국 기독교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시키고 조선반도의 식민지 정책을 일층 강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신사참배’ 강요정책이었다.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계학교가 자진폐쇄 또는 강제 폐쇄당했으며, 200 여곳 교회가 문을 닫았고, 2,000 여명 신도가 투옥되었으며,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교역자 50 여명이 순교당했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 정책에 맞선 한국 개신교의 저항과 훼절을 통해서 국가권력과 종교권위의  상호관계, 국가권력의 우상화와 초월적 신앙의 저항문제를 ‘공공의 신앙’ 문제의 시각에서 일별하기로 한다.
   1925년 일본총독부는 서울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준공하고, 명치천황을 제신(祭神)으로 진좌(鎭座)시키고, 모든 학교와 종교기관의 지도자 및 신도들의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학교기관 및 종교기관의 폐쇄, 선교사들의 추방, 지도자들의 검거투옥을 자행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매큔(G.S. McCune)박사와 숭의여고 교장 스누크(V.L. Snook) 여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자 본국으로 추방시켰다. 일본의 신도이즘을 바탕으로한 ‘신사참배’는 교묘하게 이중성을 지닌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일본군국주의와 천황제를 종교화하기 위해 ‘역대 천황이나 무사들, 전몰장병들의 영을 신사에 모시고’ 국민을 참배하게 하는 것은 종교적 행위임이 분명하였다. 다른 한편 일본군국주의와 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위장함으로서 군국주의 지배하의 전체 신민들의 단결을 획책하며, 그 반대자를 색출하는 이중전략을 세운 것이다.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인가 ‘국가의례’인가를 둘러싸고 견해가 갈렸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바티칸 당국과 감리교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라고 편리하게 해석함으로서 신앙 양심의 고통을 벗어나서 정치현실에  타협적으로 적응해갔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교는 버티다가  평양에서 회집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9)에서 “신사(神社) 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國家儀式)임을 자각하며 신사참배를 솔선 힘써 행할 것”을 가결하고 말았다. 총대 193명의 사이사이에 97명의 일경들의 감시눈초리 가운데서, 이미 신앙 양심을 팔아넘긴 목사들의 선동으로 총회가 진행되었지만 그날로 조선교회의 신앙 양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지만, 신앙 양심을 지키는 신도들과 목회자들은 일사각오 정신으로 이에 저항하였으니 주기철 목사(朱基徹,1897-1944)는 그 가운데 십자가로 물든 한국기독교 신앙양심의 ‘피꽃’이었다. 현대신학사에서 독일 나치즘의 국가주의 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에 저항하여 순교한 독일의 본 훼퍼목사 순교일화가 널리 알려졌지만,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학은  그에 못지않는 현대 기독교 교회사의 일대 주목받아야 할 사건이다. 그 사건은 개인 신앙양심의 발로문제만이 아니라, 현대사 속에서 거듭 국가 또는 정치권력이 자신을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면서 인간 개인과 집단의 내면적 정신세계와 신앙양심문제까지를  간섭지배하려 할 때 발생하는 근본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의 대표적 장로교회인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시무하다가, 신사참배거부와 그것에 대한 비판죄목으로  수감되어 4년동안 가진 고초를 겪다가 감옥에서 순교했다(1944.4.22).
  폴 틸리히는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들과 만남의 문제를 다루는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는 ‘사이비종교들’(pseudo-religions)의 형태로 등장하는 국가주의,  공산주의, 천황주의, 특정이념 절대주의, 지도자 숭배주의 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공공의 신앙’의 진위성은 이러한 사이비 종교나 거의 종교화된 정치적 절대권력과의 대결사건 속에서 그 진위가 판별난다. 사이비 ‘공공신앙’은 이러한 종교화된 권력이나 이념과 야합하여 자신의 안위․존속․ 번영을 누리지만, 참된 ‘공공신앙’은 그것들과 공공연하게 투쟁하여 고난․순교․해방의 길을 걷는다. 주기철목사의 순교신앙은  ‘초월적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고백하고 모든 정치권력의 신격화․ 모든 가치의 성별화․자연물의 신성화를 모두 ‘우상숭배’ 형태라고 규정하는  기독교 신앙고백에서만 나온다.

 4.6. 세계 냉전시대의 한국 기독교의 분열과 정치적 이념에로 속박

 제2차대전의 종언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쏘를 주축으로한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한국에는 주체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 돌연히 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으로 알고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지속하던 애국지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방’은 ‘갑자기 주어진 하늘의 선물’로 감사와 감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언직후, 급격하게 미국과 소련을 양대축으로하는 ‘냉전시대’로 재편되면서, 한국은 세계 냉전시대 정치군사력 대치국면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하여 남한과 북한엔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하여 점령군으로서 미군과 쏘련군이 진주하고, 세계 냉전시대의 최전방 전선인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직접충돌의 ‘완충지대’로서  남북에 각각 친미․ 친쏘 정권이 수립되게 되었다.
  오늘날 남북한 사회에  존재하는 기독교의 성격과 체질형성은 이러한 세계 ‘냉전체제’ 기간에 형성된 ‘해방정국’에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갈등체험, 그리고  불안한 ‘완충지대’의 긴장이 붕괴되면서 발발한 ‘한국전쟁’(1950.6-1953.7)기간동안의 처참한 ‘체험적 공산주의 실체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민족갈등’의 표출만이 아니라, 그 실상은 세계 ‘냉전시대’의 대리전 성격을 지녔기에 3년동안 진행되었던 전쟁 피해는 세계2차대전의 비극에 못지않았다. 통계에 의하면, 양측 군인 전사자수는   한국군 227,748명, 미군 33,629 명, 유엔군 3,194명, 중공군 약 900,000명, 북조선 인민군 약 540,000명이었다.  민간인 사상자를 포함하면 약 450만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명의 이산가족과 한반도 산업시설의 43% 파괴와 주택 33% 파괴를 가져온 대재앙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가는 모든 과정을 여기에서 언급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 안에 형성된 강력한 반공친미적 우파기독교의 정체성과 그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의 기초지식이 언급되어야한다. 해방직후, 북한 사회주의국가 형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에, 북한사회의 기독교세력은 북조선 공산당세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1945년 말 현재, 조만식등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당’(당원수 50만명) 은 쏘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있는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조선공산당’(약 5천명)의 10배 이상이어서, 새로운 근대적 군가건설에 두정당은 협력하되 첨엔 ‘조선민주당’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점령군 쏘련의 지지를 입은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주동이 된   사회주의적 무상몰수 무상분배원칙의 ‘토지개혁’ 단행,  중요 산업기관의 ‘국유화’(1946), 그리고 기독교계통 학교의 몰수 및 ‘공교육체제화’ 정책(1947) 등은 북한 사회에서 기독교의 토대를 급격히 와해시켰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민주당’ 세력도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한경직을 중심으로한 ‘기독교사회민주당’도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을 계기로 탄압속에서 와해되어갔다. 1946년 봄, 쏘련과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지지를 받는 강양욱이 ‘북조선 기독교연맹’을 조직한 이후, 북한의 기독교는 실질적으로 공산주의 국가권력 지배아래서 그 존립의미와 존립가능성을 갖는 종교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46-47년기간, 대규모 수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남하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남한에서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체험적 반공주의자’ 집단이 되어 오늘날 남한 기독교 보수적 성향 곧 친미․반공․친자본주의를 핵으로하는 ‘우파적 기독교세력’의 핵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해방정국 미군정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친미․반공․친자본주의 정치이념을 복음과 혼돈하는 정치종교적 이념집단으로 급속하게 변질되어 갔다. 북한의 초기 사회주의 국가건설 이념이 유물론, 유물사관, 계급혁명이론, 반기독교론, 수령지도자론, 남조선 해방론으로 경도되어 가면 갈수록, 남한의 기독교는 친미․반공주의에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친미정권으로 들어선  이승만 정권의 부패부정과 박정희 군사정권의 인권노동탄압에 대하여 비판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반공이념’이 내면화 되면서  한국 기독교는 분열과 정치이념에로의 예속화가 가속되던 시기였다(1945-1965). 남북한 사회에서 모두 ‘공공의 신앙’은 실종되고 종교는 ‘사적 일거리’로 전락되거나 정권과 결탁된 ‘정권의 하수인’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4.7. 1970-80년대 한국기독교의 인권․민주․평화통일 운동

  한국 개신교는 1960년에 발생한 ‘4.19 민주학생 혁명’과 1961년에 발생한 ‘5.16 군사혁명’ 사건에 접하면서 긴긴 역사의 잠을 깨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후반기 1930년대 이후  해방정국을 거쳐 6.25 동란을 거치는 동안 상실해 버렸던 교회의 역사에 대한 책임, 민족과의 연대성, 기독교신앙의 사회적 참여를 통한 ‘공공의 신앙’에 대한 자각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첫 반응은 1965년 대표적 한국 기독교 교회당이었던 ‘영락교회당’에서 회집된 기독교교인들이 중심이 된 ‘한일굴욕외교 반대집회’로 표출되었는데, 한국 기독교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두 기독교 지도자 한경직목사와 김재준 목사의 연합으로 주도되었다.  
   ‘한일기본조약’(1965)은 제3공화국 박정희 군사정권과 일본정부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 그리고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등 4개 기본협정문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문제는 위에 언급한 중요내용을 포함한 ‘한일기본조약’이 한국군사정부의 정보부장이며 정권제2실세인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사이에 맺은  ‘김-오히라메모’(1962)에 기초하여 비밀리에 급하게 채결되었고, 그 내용이 한국민의 자존심과 인권과 정당한 청구권을 무시한 굴욕적 비밀외교 협약이라는데 있었다.
   열화같은 국민의 반대와 저항을 무릅쓰고 ‘한일기본조약’(1965)이 급히 채결된 내면의 이유는 두가지 였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동북아시아 군사전략의 구상아래서 소련․중국․북한의 사회주의적 공산세력에 맞선 미국․일본․남한의 연대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과의 국가간 ‘한일기본조약 채결’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미국의 요청이었다. 둘째, 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공업화, 산업화, 경재재건 추진할  기본 재정자금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는지라, 그 두 정치군사적 상황이 서로 마주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 기독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집회’를 개최하여 공공연하게 역사적 현실문제에서 부당하고 불의한 정부간의 외교행위를 그리스도의 정의․자유․ 평화의 이름으로 규탄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두가지 흐름중에서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인권․민주․평화통일 운동의 주류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한 교단들이었는데,  세계 에큐메니칼교회운동에 동참하는 진보적 교단들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 로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개인심령의 구원과 더불어 사회적․역사적․전인적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생명의 내면성과 외면성이 동시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는 것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현실 한복판에서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신학을 지지한다. 1970-80년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신학적 입장은 김재준의 『제3일지』를 중심으로 펼친 역사참여적 진보적 신앙운동,  안병무와 서남동을 비롯한 ‘민중신학’운동, 월간지 『기독교사상』과 기도교방송(CBS)을 매체로한  도시빈민․노동․ 사회선교운동, 함석헌의 『씨의 소리』잡지를 통한 기독교 양심세력 인권운동, 그리고 문익환을 중심으로한 ‘통일신학’운동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1970-80년대 한국현실상황은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한 군사독재세력이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반민주 시대요, 경제사회적으로는 노동자․농민의 경제적 희생과 인권박탈을  대가로 하여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던 반인권 시대요, 교육․언론․문화계가 군사정부의 탄압정책과 획일화된 관주도의 통제정책으로 인하여 사상의 자유가 완전 말살되던 시기였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호소하며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사건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쓴 대학생들의  인권․민주화 항의 시위는 지성인들의 참여를 호소하였는데, 실로 이시대에 한국 기독교 진보세력의 역사참여적 신앙고백은 세계교회사 속에서도 놀라운 역동적 모습을 보였다.
   아마 이 시대에 역사참여적․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가장 잘 드러난 두가지 역사적 선언서를 예로든다면 1973년에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 그리고 1976년에 발표한 「3.1 민주 구국선언」이었을 것이다. 이즈음 두드러진 특징중 주목해야 할 것은 인권․민주․평화통일 운동에 한국 진보적 개신교인사들과 가톨릭 사제들 및 신도들과의 연합제휴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교회여성들의 적극적 참여도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수백명의 기독자들이 불의한 독재군사정권에 맞서 살해, 투옥, 악랄한 고문, 직장박탈, 퇴학, 행동감시등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증언하는 진리․자유․인권존엄․평등․화해와 평화를 주장했던 1970-80년대야 말로 기독교신앙이 ‘공공의 신앙’으로 표출될 때 어떤 형태를 지니는가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가 된 것이다.
  
  4.8. 1970-80년대 한국교회 대형집회, 교회성장론, 순복음 성령운동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는 전혀다른 또다른 경향이 공존하고 병행하고 있었다. 그 흐름은 보수적 교회들의 연합체 ‘대한 기독교연합회’(DNCC)' 또는 ‘복음주의 교회연합’ 이라고 부르며 오늘날은 ‘한국기독교 총연합’(한기총)이라고 부르는 그룹이다.
 이 계열의 공통적인 신학적 입장은 첫째, 성서문자적 영감설에 기초하여 성서주의를 표방하고 현대신학의 성서비평학을 수용하지 않는다. 둘째, 기독교의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기초한 개인영혼의 구원이며, 기본적으로 내세적  천국에서의 영생을 의미한다. 셋째, 철저한 정교분리정책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정치사회적 발언과 비판적 저항행위를 교회본질에서  탈선행위라고 비판한다. 넷째, 몰역사적․탈역사적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개인주의적이고, 개교회 중심적이며, 교회성장과 교세확장을 복음의 일차적 과제라고 확신한다. 다섯째, 철저한 반공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치적으론 친미적 입장을 견지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사회참여적 신학을 인본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여섯째, 개신교 정통신학을 보수하는 것을 목적으로하기 때문에,  전통문화나 전통종교에 대하여 적대적이거나 정복적 태도를 취하고 종교간의 충돌을 일으킨다. 일곱째, 성령의 활동은 개인의 심령과 교회 안에서 작동한다고 믿기 때문에, 성령운동의 표징으로서 교회성장과 현세적 물질축복을 강조한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동안 한국 기독교의 외형적 급성장은  통계수치로 살펴보면 교회숫자는 5,011곳 (1960)에서 35,869곳 (1990)으로 무려 615 % 증가했고, 교인수는 623,000 명(1960)  에서 10,312,000 명으로 증가하여 교인수증가율을 1960년대 대비 1,550 % 증가했다. 종교사회학자 이원규는 이시기(1960-1990) 한국 기독교 교세가 급성장을 한 이유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아래와 같이 분석하고 있다. 1970-80년대 보수적 한국 기독교 급성장추세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중요한 원인 분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인의 종교문화적 요소로서 민족성이 가진 역동성은 ‘지성과 이성’보다는 ‘감성과 열정’으로 표출되어 부흥회적 성향의 집단적 종교심을 유발시켰다. 이시기 개교회의 부흥사경회, 기도회모임, 성령운동, 신유운동, 그리고 무교적 기복성과 현실주의는 대중이 쉽게 교회에로 모이게하는 직접동인이 되었다. 이시기 세계적 부흥사 빌리그램등이 초청되어 수십만명 또는 백만명 단위로서  대형연합 종교집회가 자주 개최되어 세계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농촌에서부터 공장취업을 목적으로하여 도시에로 밀려온 수많은 힘없는 군중들은 ‘고독한 불안한 군중’으로 전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대감과 소속의식을 담보해주며 물질적 보상과 축복을 보장해주는 보수적 교단의 신앙집회에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둘째, 교회선교신학적 요인으로서 한국 기독교 초기부터 작용해온 네비우스 선교원리에 기초한 개교회 독립적 교회선교는 개별교회 성장운동을 촉진시켰다. 거기에 더하여  1970년대에 급속하게 소개된 미국 풀러신학(Fuller School)의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과  ‘교회 성장론’(theory on Church growth)의 ‘교세확장성장’ (expansion growth)주의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 마 28:19-20)를 선교표어를 내걸고  기독교 전도에  힘쓰게 하였다. 물론, 전도와 선교전략에서 치밀하고 열정적인 교회목회자들의 노력과 그들의 영적 카리스마가 적지않게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성장신화’(growth myth)와 ‘교회지상주의’는 1990년대 이후 급격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도덕적, 영적 성숙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독교 종파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리는 집단이기주의적 기독교로서 보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전도와 선교의 열정은 반사회적․탈역사적 의식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정치경제적 요인으로서 한국기독교 보수적 교단들의 급성장을 이뤄가던 시기(1960-90) 30년동안 한국사회의 급격한 정치․경제적 사회변동을 학자들은 중요하게 지적한다. 정치적으로 군사구테타로 집권한 군부정치세력이 등장하여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대중적 표어를 내걸고, 한국사회의 공업화, 도시화, 노동집약적 산업정책, 그리고 관주도형의 관료적 경제성장정책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정치억압, 인권탄압, 언론봉쇄, 지성의 침묵은 강요당하고 오로지 정치권력의 집중화, 절대화, 그리고 경제성장 제일주의만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극도의 정치부재와 경제고도성장 정책 속에서 정부가 추구하는 국민경제의 ‘고도성장정책’과  ‘성장제일,무제한 경쟁주의’가 당시 보수적 기독교계의 목회․선교 정책과 일치하였다.  ‘정교분리’와 ‘순수복음주의신앙’을 명분으로 군부독재정권에 대하여 무비판적 동조와 지지의 댓가로  각종 관주도형의 직간접적 후원과 이익을 받아 극우적 정치세력과 한국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사이의  ‘밀월시대’가 반공․친미․신의 축복이라는 관심아래서 진행되던 시기였다.   동일한 시기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 교단의 ‘공공신앙고백적’ 역사참여 신앙운동들은 그들 보수적 기독교단 지도자들에 의하여 인본주의․자유주의․복음적 신앙의 탈선운동 이라고 매도되고 터부시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 보수적 기독교교회들의 신앙형태는 외면적으로는 군중적 대형집회와 대교회 신도들의 동질적 결집과 자기교회 소속감이  두드러지지만, 내면적으로 드려다 보면 그들의 신앙형태는 ‘기독교신앙의 사사화(私事化)’가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복음화’(evangelization)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렸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화’(humanization)에는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 교세확장’운동이 곧 ‘복음의 전파’라고 너무나 쉽게 동일시하고 복음을 ‘십자가의 고난’없는 ‘값싼 은혜종교’로 변질시켰다. 그에 대한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가 1990년대 이후, 진보․보수 구별없이 전체 기독교계로 향해오기 시작하여, 성장의 신화는 둔화되고, 각종 은폐되었던 지도자들의 비리가 법적으로 고발되고 공개되기 시작하여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급락하게 되었다.

  4.9.  조용한 ‘영구혁명’에 투신한 그리스도 ‘제작직’ 수행자들의 생활신앙

  위에서 (2.7 & 2.9) 필자는 한국 기독교회의 두 흐름 곧 진보적 기독교 교회그룹(KNCC, 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과 보수적 기독교 교회그룹(ADEC, Association of Daehan Evangelical Churches)의 서로 대조되거나 상반되기까지 하는 신앙형태를 소개하였다. 흔히 말하기를 전자는 ‘인간화’(humanization)엔 강했으나 ‘복음화’(evangelization)엔 약했고, 후자는 그 반대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를 위에서 말한 두 그룹으로 획일화 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소속된 교파나 교단이 어디든지 불문하고 조용한 ‘복음의 영구혁명’에 복무한 독실한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회에 미친 영향이 참으로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접하여 ‘내면적’으로 자기들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변화받고, 그 복음이 주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써 ‘외면적’으로  사회변혁 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만큼이나마 지탱하는 기독교적 토대라고 생각된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중심으로  생활신앙을 펼쳤던  김용기장로, 청십자 의료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사 장기려박사, 그리고 두레마을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김진홍목사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김용기장로(1909-1988)가 195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 척박 한 땅 1만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독교 신앙을 기본으로한 근로․ 봉사․희생이라는 3가지 교육이념을 가지고 개척한 영농일꾼의 양성학교이다. 1962년엔 ‘가나안 농군학교’로 발전하였고, 1973년엔 ‘가나안 복민운동’을 제창하였다. 그는 1966년 아시아의 대표적 지역공동체 농민운동의 공로자로서 막사이상을 수상하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용기는 “절대 벼슬을 하지 말로, 남들이 싫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며 기독교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육화시킨 개척적 이상농촌운동가 였다.. 김용기 장로는 한국의 절대빈곤 문제, 특히 농촌사회의 빈곤과 도덕적 정신적 패배주의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준 위대한 한국의 달가스였다.    근대화와 공업화의 주체적 시발이었다고 평가되는 제3공화국의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기반과 그 실천적 실험이 김용기 장로의 가난안 농군학교에서 연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정신혁명’ 교육프로그램은 각계 교육수련장이 되었으며, 그의 체험적 농촌운동과 정신혁명과 생활혁명의 동시적 교육방법은 방글라대시와 필립핀등 제3세계 아시아농촌운동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장기려박사(1909-1995)는 일본식민통치기간 신사참배강요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경건한 장로요 교회학교 교사로서 의학박사 였다.  그는 장로교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신앙인으로서 장로였지만, 교리주의적 정통주의자라기 보다 기독교신앙의 순수성을 지켜가는 실천적 ‘생활신앙’의 정통가였다. 일본 무교회 내촌감삼의 성서신앙과 한국의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과 긴밀한 신앙적 유대를 이어간 분이었다. 그는 6.25 동란중 피난대열에 묻혀 남한 땅 부산 항도에 자리를 잡고, 가난한 민초들을 돌보는 ‘인술의 성자’였다. “너희는 이 시대의 세상풍조를 본받지 말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2)는 말씀을 글자그대로  몸으로서, 삶으로서, 실천한 신앙인 이었다. 1975년에 부산 초량역전 앞에 ‘청십자 병원’을 세우고 빈민치료에 심혈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최초로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창설하여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빈곤한 서민들을 도왔다.
  한국동란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어 40여년간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을 그리워하고 잊을 수 없었지만,  모처럼 국내 국외 제자들이 마련한 ‘북한 가족 특별상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이산가족상봉이 남북당국의 협력사업으로 정상화되기 이전에 있었던 장기려박사에 관련된 아름다운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이산가족 1000만  겨레가  혈육을 만나고자 하는 맘과 생이별의 아픔이 누구나 마찬가지일텐데, 사회적 신분이 높다는 특혜를 받아 자기혼자 가족상봉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 한 것이다. 그는 라몬 막사이상 사회봉사상을 받았으나(1979), 명예도 권력도 부귀영화도 모른체 오로지 그리스도예수의 ‘이웃섬기는 제자의 도’를  성실하게 살다가 간 온유, 성실, 겸손, 신의의 크리스챤 의사였다. 그의 삶의 향기가 그의 사후, 온누리에 조용히 퍼져가고 있다.
   세 번째로 살피려는 사례는 김진홍목사(1941-  )가 이끌고 있는 두레공동체와 두레교회이다. 김진홍목사는  현재 60대 중반의 가장 영향력있는 한국 교회지도자 중의 한분이다. 그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의 목회자로서 경력과 실천적 삶의 신앙이 남다르게 특유하고 건전하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비젼 안에는   한국 기독교를 둘로 가르고있는 보수성과 진보성, 복음화와 인간화, 교회성장론과 사회역사변혁론이 함께 충돌하지 않고 통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71년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인권탄압과 노동탄압에 저항하면서 빈민들을 위한 ‘활빈교회’를 개척하였고 투옥당하여 옥중경험까지 하게 된다(1974).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관심과 사회정의 의식에 투철하다. 그러나, 철저한 복음적 신앙훈련과 준비, 노동을 통한 공동체 형성, 인격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목회, 목민신학과 목민목회를 실천한다.  경기도 남양만에 960만평의 땅을 마련하여 개척하면서 교회를 개척하고, 자립경제 공동체를 이루며, 지역사회를 개발하는 ‘두레마을 공동체운동’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의 신념은 살아있는 역동적 교회란 마땅이 신앙공동체이자 생산과 노동과 예배가 통일된 산업공동체이며, 민족과 세계의 미래를 갱신하는 비젼공동체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탁월한 지도력, 창조적인 도전정신, 경건하고 신실한 영성은 남한의 지역을 넘어 중국동북지역, 북한, 그리고 세계에까지 두레공동체의 정신을 펼쳐가고 있다. 그에게서 우리는 ‘내면적’ 복음주의 신앙과 ‘외면적’ 역사참여신앙이 함께 숨쉬는 전형적인 건강한 기독교 운동의 사례를 본다.

 4.10. ‘민족의 화합과 통일위한 종교인 협의회’와 ‘한국종교인 평화회의’ 운동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의 실황을 핵심적으로 파악하려는 사례로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종교인 평화회의’(KCRP, 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는 한국종교인 상호간의 교류와 이해를 증진하며 이웃종교간의 공동과제를 연구하고 실천하여 한반도평화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한국의 대표적 6대종단 협의체로 결성되었다(1985). 결성될 때 참여한 종단은 불교,유교,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였으며 각종단이 파견하는 대표대의원으로 총회를 구성하고 대표적 종단들의 협의아래 임원을 구성하여 운영한다.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라 할수 있는 한국에서, 종교간의 갈등이 세계타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적은 셈이다. 종교간 상호 협력과 대화를 통해 사회의 평화증진에 공헌하고있는 이 협의회는 ‘하나를 지향하는 한민족의 종교심성’의 표출이기도 하다.   
  다른 또하나의 종교인들의 협력기구체는 ‘민족 화합과 통일을 위한 종교인 협의회’(REPECO, Religious People's Council for National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인데, 한국의 대표적인 4대종단의 실천적 성직자들 곧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개신교전국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원불교 사회개벽 교무단이 참여하여 구성하였다(1993).  
  위에서 언급한 두 형태의 종교인 협의회는 종교간의대화와 협력, 북한 식량 및 의료장비돕기, 상호교류 평화운동, 생태계복원과 자연환경살리기 운동, 도시빈민과 노동자 농민 운동, 종교인 공동연합행사등을 펴고 있다. 이러한 종교인들의 평화 협력운동은 남북 정치적 당국자들의 외교․군사․정치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민간단체들의 역활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큰 것이다. 긴장된 남북관계를 완화시켜가면서 대화와 협력관계로 전환시키는 비정부단체들의 활동중 한국 종교인들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은 매우 돋보이는 부분이 되고 있다.

V. 나가는 말

  필자는 한국 기독교의 현황을 분석하되 그리스도교 복음이 지닌 양면성 곧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절대자유인이 되는 ‘내면적 해방’과 절대자유인으로서 세상을 봉사하고 세상을 하나님나라에 걸맞는 자유․평등․평화공동체로 변혁해가는 ‘외면적 해방’이 동시적이며 불가분리적임을 확인하였다.  
   그 양면성이  불가분리적 상태로 통일된 신앙을 기독교의 ‘공공신앙’이라 부르고, 이탈된 신앙을 ‘기독교신앙의 사사화’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공공신앙 또는 공공신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개념구정을 제 I 장에서 좀더 분명하게 규명해보았다. 제 II 장에서 필자는 왜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공공신앙’이라야 하는가에 대해 틸리히, 바르트, 리챠드 니버, 본 훼퍼등  현대신학자들의 지론을 참조하면서 신학적 조명을 해보았다. 제 III 장에서 한국 기독교의 저변에서 작동하는 4가지 구성소를 분석해 보았는데, 충분하게 논구되지 않았지만 신체험의 양극성, 민중성, 역동성, ‘하나’지향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본 논문의 중심부라 할수 있는 제 IV 장에서 한국교회사 사건중 10가지 사례를 선별하여 우리의 논제와 가설을 대입해 보았다.
    이 글의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한국 기독교는 현재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있는데, 그 근본 원인은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하여 신앙의 사사화, 권력화, 물량화, 기복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주류는 이러한 현재한국 기독교의 탈선된 변질모습과는 다른 본래적 전통이 있다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어느 개인이나 신앙집단이 어떤 형태의 신학을 기초로하고 있느냐의 중요성 보다는, 그 개인과 집단이 진정한 복음의 본질에 접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변화된 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충실하는가의 여부에 관계된 것임도 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별력은 그리스도 신앙을 인격 깊이 차원으로  ‘내면화’(interiorization)하는 일과 ‘사사화’(privatization)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므로 혼동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점이다.  복음신앙의 진정한 ‘내면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자유인’으로 탄생하는 필수과정이므로, 그런과정을 거친 개인이나 공동체 라야만  진정한 ‘사회참여신앙’으로서 ‘신앙의 공공성’에 투철 할 수 있는 ‘섬기는 봉사자’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비록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하더라도, 조용한 ‘영구혁명’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펼쳐나가는 남녀 그리스도인들, 곧 바알에게 무릅꿇지 않는 7,000명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며, 한국역사의 미래와 아시아문명의 미래에도 복음은 ‘겨자씨와 누룩’으로서 창조적 변화를 촉매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확신하고자 한다.



"공공신학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두 흐름", <공공철학>시리즈, 제16권, 417쪽-447쪽.( 동경: 동경대학출판회, 2006.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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