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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 장공 신학의 유형적 특징비교와  신학교육에서 그 통전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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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 장공 신학의 유형적 특징비교와  신학교육에서 그 통전의 과제


김경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들어가는 말

『논어』에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있다. 군자란 유가(儒家)에서 보면 이상적인 인간의 완성형에 가까이 이른 사람에 대한 총괄적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이상적인 단계에 도달한 성숙한 인간, 된 사람, 영근 인간, 참 사람, 본래적 인간,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달성했기에 남의 지도자가 능히 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다른 한편, 소인(小人)이란 군자와 대조되는 덜 된 사람, 비본래적 인간, 존경받거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람, 최고수준의 지식인일지라도 기회주의자이거나 이기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대인관계가 개인이거나 공동체이거나 간에, 진정한 군자는 화합하되 무조건 동일화하여 같아지려고 아니하지만, 소인은 같음을 강조하며 동시에 내실은 불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향리 사람들 모두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지지하거나, 반대로 향리 사람들 모두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 대답하기를 두 경우 모두 “가(可)하지 못하다. 차라리 향리의 착한 사람들은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워하는 것만 못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군자화이부동’ 한다는 공자의 말씀이 던져지는 삶의 정황을 살펴보면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은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써, 자기출세 지향적인 아부형의 인간, 패거리문화, 단합과 획일성을 강조하는 닫혀진 이념공동체, 포퓰리즘에 맹목적이며, 쉽사리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타자와의 ‘차이와 다름’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군자화이부동’한다는 공자의 말씀이 던져진 본래 의도와 삶의 자리는 위에서 말한 ‘소인동이불화’하는 일반적 경향을 대조하여 한 말이지만, 발제자는 만약 군자와 군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일가라고 관점을 달리하여 자문해 본다.
본인은 이 글에서 유가적 관점에서 볼 때, 군자(君子)라 이르는 탁월한 교육자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으로서 만우 송창근(1898.10.5-1950.8.?)과 장공 김재준(1901.9.26-1987.1.27)의 관계를 ‘화이부동’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두 분은 한국 기독교계와 한국 사회 정신적 지도자로서 큰 그릇 되심과 공헌은 접어두고서라도, 기장교단과 한신대학교의 교육이념을 터놓은 큰 어른이시다. 기장교단과 신학교육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만우․장공의 영성과 가르침을 그리워하며, 두 어른의 신학교육적 지향성과 인격의 감화와 영성의 통전을 암묵적으로 갈망하고 있다.
본인은 본 연구의 초점을 ‘만우․장공 신학의 유형적 특징과 그 신학교육에서의 통전과제’에 가급적 집중하려고 한다. 만우와 장공의 관계를 뗄래야 뗄 수 없는 ‘형과 아우’ 관계로 말한 장공 자신이 ‘형제관계’라는 표현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옷감을 재봉틀로 박아 옷을 만들고 나면, 두 옷감을 이어붙인 흔적이 나게 마련이지만 만우 형과 아우 자기의 관계는 재봉 흔적도 나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관계처럼 그 친밀함과 불가분리성을 강조했다. “신학교육기관에서 업(業)을 같이하기 전에는 더욱 그러했지만, 동업(同業) 중에도 그러했다”고 술회한다. ‘신학교육기관에서 업을 같이하기 전’이란, 장공이 20세 무렵 함북 웅기 금융조합 서기직이라는 말단 월급장이로서 반도 땅 북쪽 작은 항구에서 박옥(璞玉)같이 묻혀 있을 때, 그를 서울로 불러내서 뜻을 지닌 청년으로 살도록 불을 지폈고, 그 뒤 서울․동경․미국 등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거나 이끌었고, 귀국 후에도 조선신학원 설립에 동참하도록 불러올려오기 전까지 만우․장공 관계를 말한다. 조선신학원의 창립과 정착 발전관계로 동업하는 기간보다 ‘더욱 그러했다’고 장공은 말한다. 한마디로, 만우가 없었더라면 장공이라는 인물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다.
만우․장공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성과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설립육성과 관련하여 두 사람이 맡은 공헌의 성격을 갈파하여 여해(如海) 강원용은 말하기를 “한신의 하드웨어를 마련한 사람은 만우이고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사람은 장공이다”라고 했다. 컴퓨터라는 실재는 하드웨어 없이는 아예 존재하지도 못하는 것이고, 소프트웨어 없이는 철광석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은유’는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만우는 ‘한신호’의 선체(船體)만 짓는 일에 공헌했고 그의 신학교육적․신앙 영성적 영향이나 공헌을 간과해도 좋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한신 안에는 만우․장공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손에 붙잡힌 두 사람’의 혼과 영이 함께 중요하고, 동시에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그리해야 한다. 강원용의 은유가 말하려는 초점은 만우가 일본식민치하에서 받은 조선독립운동 감시 대상자로서 활동제약기간(1919-1945)과 해방직후부터 한국동란기간 납북 될 때까지(1945-1950)의 역사의 격랑기에도 불구하고, 김대현․진정률 장로 등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움직여, ‘한신호’라는 구원의 방주 한 채를 제작하는 탁월한 선각자로서와 그 일의 실질적 추진자로서 만우의 공적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강조이다.
만우가 조선신학교와 한국신학대학에 직간접적 관계를 맺던 기간은 햇수로는 10여년간(1939-1950)이지만, 실질적으로 신학교육의 교수와 학장으로서 직접감화를 학생들에게 끼친 기간은 해방 후 약 5년 간이다. 그에 비하면, 장공이 한신대학과의 직간접 관계는 1940년부터 타계하실 때까지(1939-1987) 거의 50여년 동안이었다. 오늘 우리가 검토하려는 주제는 만우가 한신 역사에 끼친 하드웨어 장착자로서의 면모를 살피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오늘 그의 신학교육적 감화를 회상하고 각종 기념사업 프로그램을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비록 기간적으로 짧았고, 남긴 저술물은 장공의 그것과 비교하여 분량적으로 훨씬 적지만, 만우의 영성이 지닌 불휴의 가치를 우리가 다시 재발견하여 계승 발전하자는 것이고, 그렇게 할 경우에만 장공의 영성과 어우러져 진정한 ‘한신 신학의 영성적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동안 만우의 삶과 신앙, 그리고 신학을 다시 부활시켜 우리들의 귀중한 자산이 되도록 공헌한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오신 여러분들 특히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직을 맡으신 강원하 목사와 만우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주재용 교수의 노력을 감사하며, 성남교회와 기장신학연구소의 봉사노력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대 후학들 대부분은 만우 선생을 직접 뵙지 못한 신세대들이다. 그러나, 만우의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30여편의 만우 선생이 남긴 저술물들을 손에 들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만우와 깊이 동고동락한 장공 자신의 ‘만우 회상기’를 비롯한 여러 편의 그의 글들, 김정준을 비롯한 정대위․강원용․조향록․강원하․김태묵 등 여러분의 생생한 증언들, 그리고 기장과 타교단 신학자들 민경배․유동식․김인서 등의 만우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논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만우 송창근이라는 귀중한 ‘하나님의 종’의 신학과 영성을 복원시켜내기에 충분할만한 문헌자료들을 우리는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오늘 우리는 만우의 영성을 다시 부활시켜, 다시 한번 한신과 기장 더 나아가서 한국 기독교계를 갱신시킬 수 있는 ‘신선한 혈액’으로 수혈해야 할 한국 개신교의 위기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한신교육의 현장에서 그렇고, 기장의 목회현장에서 그렇다. 오늘 발제자는 그러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의무봉’이라고 표현될 만큼 ‘하나’라고 인지되어오는 만우․장공의 신학을 좀더 정밀 분석하여, 두 분 선각자의 신학사상과 영성의 유형적 특성을 밝혀내되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와 독특성’을 조명하여 한신과 한국신학교육 과정에서 통전시켜 가야할 우리들의 사명을 재확인하려고 한다.
포스트모던니즘에서 ‘차이와 다름’은 ‘충돌과 불협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우․장공신학에서 ‘일치와 공통성’ 못지 않게 ‘차이와 특이성’은 보존되어야 하고 그 둘은 더 높은 차원에서 ‘공명과 통전’을 이뤄야 한다. 그럴수록, 한신의 신학교육장은 역동성과 다양성이 살아나며, 복음의 진리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먼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바 대로 만우․장공을 ‘하나’로 결합시키려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다음에 ‘차이와 독특성’을 다음 장에서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2. 만우․장공신학의 유형적 특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만우와 장공은 신학 이념적으로, 기독교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는 영성적 삶 속에서 동질적 요소를 갖는다고 한신인들은 직관적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느끼지만 두 분의 신학과 영성에 독특한 ‘차이와 독특성’이 있음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만우․장공 신학의 ‘차이와 독특성’은 두 사람의 심리적 기질면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는 기본신앙 노선면에서, 신학교육 및 영성훈련의 방법론적인 면에서, 목회현장과 교계에서 난제를 타개하는 임기응변의 처세술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과 세계 혹은 교회와 정치현실의 관계설정과 관련된 신학적 소신이라는 측면에서 온다.


 (1) 심리학적 유형론에서 본 만우,장공의 차이와 일치

만우․장공은 출생지가 함북 경흥군이기에 크게 보면 동향인 ‘경흥 사람’이지만, 만우는 항구도시 웅기(웅상) 사람이요, 장공은 “두만강 국경지대 유폐된 산촌” 오봉동(창꼴) 출생이다. 사람의 기질이 탄생지역의 자연환경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기질적 차이는 항구와 산골마을이라는 자연환경과 유년과 소년시절 가정교육 환경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웅기(웅상)는 항구 도시로써 일찍 기독교가 들어와서 개화운동이 먼저 전해졌고, 만우의 소년시절은 기독교 가정 곧 ‘신문화’에 일찍 접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의식에 있어서 장공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장공의 마을 오봉동은 산골마을이요, 기독교 전파도 늦었고, 세상의 정치사회 변동의 바람도 늦게 촉감되었다. 장공은 현대식 교육에 접하기 전에 유교적 가풍과 가치관에서 동양고전에 더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의 신학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엇보다도 만우․장공의 영성신학의 차이와 독특성은 두 사람의 심리적 기질면에서 부터 유래한다. 칼 융(C.G.Jung)의 심리학적 유형론의 표현을 빌린다면 만우는 ‘외향형’(extroverted type)이요 장공은 내향형(introverted type)이다. 물론 ‘대극의 일치’라는 원리로서 ‘외향형’의 내면에는  ‘내향형’의 성품이 있고, 그 반대도 그러할 것이다. 외향형은 바다가 상징하는 물처럼 ‘동중정’(動中靜)의 기질을 띄고, 깊은 영혼의 중심에는 깊은 고요가 있지만, 겉으로 나타난 바다 수면처럼 역동성, 실천성, 추진력, 과감성, 변화성이 있다. 장공이 묘사한 만우의 성격은 “유머에 능했고, 인정다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고, 애국적이었고 선교사들에 대하여 주체적이었고, 그의 기독교 신학의 꿈은 ‘생생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닌 것” 이었다. 장공은 당신이 존경하는 형 같은 만우 형에 대한 망평(妄評)일런지 모르겠다고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만우의 성격적 기질의 특성을 이렇게 증언한다. “만우에게는 영웅주의(Heroism)가 남아 있다. Hero가 되려면 전술과 전략이 필요하다. 싸움에는 이겨야 한다. 그는 때를 못 만난 Hero였다. 그는 정(情)과 한(恨)이 넘치는 영웅이었다. 그는 때를 못 만난 Hero였다.”
만우에 비하면, 장공의 기질은 ‘내향형’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물보다 산을 연상하게 한다. ‘정중동(靜中動)’의 삶이다. 눌변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외교에 능하지 못하고, 처세술에서 늘 세상 사람보다 뒤진다. 공자 표현으로 말하면 군자는 지자(知者)이자 동시에 인자(仁者)인데, 그 기질적 성격을 총괄하여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장공은 “예와 아니오”를 가려 말할 때를 기다리며, 겉모습은 고요하고 과묵하지만, 맘 속 깊은 곳에는 다정다감이 있고, 시혼(詩魂)이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변절 없는 순애(純愛)가 있다.
만우와 장공이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신앙동지로서 한번도 얼굴을 붉히거나 의견 차이로 대립한 적이 없는 것은 서로를 존경하면서 ‘내향형’과 외향형’의 두 기질을 상보하는 성숙한 ‘화이부동’의 군자들이기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학생을 지도하는 신학교 학사행정이나, 교단과 신학교와의 관계정립의 측면에서 예를 들더라도, 만우는 어떤 학생들의 입학허락이나 졸업유보를 주장하다가도, 장공이 학사행정 집행에서 입학이나 졸업을 시켰을 경우에 아무런 뒷말 없이 장공의 결정을 존중하고 대범하게 수용하는 큰 마음을 장공의 ‘만우 회상기와 인격 증언’ 속에서 읽을 때, 존경의 맘을 금할 수 없다. 신학교와 총회와의 긴장이 심해져갔을 때, 장공이 당시 총회장 L씨의 무책임한 기회주의적 행동이 못마땅하여  총회장에 대한 만우의 지나친 예우를 불평했을 때도, ‘외향형’의 만우는 기회주의적인 총회장에 대한 예우적 차원이라 할지라도 일처리 방법이 달랐다. 장공은 만우 형의 그러한 일처리 방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거나, 신학교육에 있어서 긴장갈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2)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받은 ‘복음주의적 경건신앙’의 영향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가 받은 초기신학교육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만우의 자유로우면서도 성결과 중생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경건의 영성’은, 감수성이 예민하던 20대 무렵, 그가 최초로 서울에 와서 정식 신학생으로 등록하여 3년간 교육받은 피어선 성경학교 시절에 받았던 영향에 있지 않을까 필자는 주목하고자 한다. 강의 시간에 직접 만우 선생의 강의를 들은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날 학생들이 만우 선생님의 신학은 무슨 신학이냐고 질문했을 때, 만우는 칠판에 ‘잡종신학’이라고 쓴 후 교실을 나가셨다는 일화를 전한다. 자신의 신학 성격을 ‘잡종신학’이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만우의 해학적 기지이지만, 농담속에 진담을 담고 있는 답변이다.
자기의 신학을 ‘잡종신학’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깊은 것이다. 첫째, 실지로 만우는 신학수업 편력과정에서 온갖 교파신학의 흐름을 맛보았다. 서울 피어선 성경학교, 일본동양대학 문학과, 청산학원 신학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 웨스턴 신학교, 아일리프 신학교 등 짧게는 반년에서 길게는 3년 이상 기회가 닿는 대로 신학전통의 이 맛과 저 맛을 다 보았다. 일본어와 영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만우가 아니었다. 언어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다재다능한 만우는 보수신학, 경건신학, 성결신학, 개혁신학, 근본주의신학, 자유주의신학 등 다양한 신학조류를 다 맛본 셈이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신학의 한 주류에 자기를 예속시키지 않고 유익한 부분만을 주체적으로 섭취하여 당신의 신학적 영성을 형성했으니 ‘잡종신학’이라는 그의 표현은 그럴듯한 말이다.
둘째, ‘잡종신학’이라는 다소 스스로 폄훼하는 듯한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강원용의 해석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만우는 어느 특정신학의 틀에 박히거나 예속된 신학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신학지상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신학우상화’에 대한 거부이다. 만우, 장공 두 분은 모두 신학교육에 소명을 갖고서 평생을 봉사한 분들이지만, ‘신학’이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지속되어야 할 살아 생동하는 신앙과 본래적 순수 인간성을 경직화시키는 것에 강렬하게 저항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우가 자기신학을 ‘잡종신학’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신학과 영성에는 뚜렷한 색깔이 있다. 민경배는 만우신학의 신학 유형적 특징을 ‘복음주의적 경건주의’ 혹은 ‘근대주의적 경건신학’이라고 표현한다. 만우의 신학과 삶을 가장 포괄적으로 심도 깊게 살핀 주재용은 만우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에의 복종, 십자가 속죄의 복음, 중생의 성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요소를 총괄하면 결국 만우의 신학은 “개혁파신학 전통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필자는 주재용의 판단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만우와 장공이 모두 동일한 ‘개혁파교회의 신앙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왜 유독 만우에게서는 장공보다도 더 강한 경건의 영성, 가슴이 뜨거운 중생체험의 강조, 인류사회와 역사의 변혁보다는 인간영혼의 우선적 변화, ‘경건과 신비와 열정과 엄숙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는 예배’의 강조가 반복되는가? 단순히 만우․장공의 심리적 유형의 차이만이 아니라, 만우의 신앙적 원형이 터 놓이던 시기에 그가 받은 ‘피어선 성경학교’ 시절의 영향을 주목해야 하리라고 본다.
참으로 기이하리만큼 한국 교회사 교과서 속에는 20세기 초, 조선기독교회의 복음화 운동에 큰 공헌을 했던 아더 피어선(Arthur T. Pierson 1837-1911)과 그의 열망과 유언으로 세워졌던 피어선 성경학교(1912) 공헌에 관하여 단 몇 줄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피어선 신학교가 초교파적인 신학교였기 때문에, 교파주의적 색채가 강한 한국 교회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만 것이라고 본다.
아더 피어선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한 세계적인 복음주의자, 명설교가, 동아시아 지역의 복음전파에 힘쓴 자, 특히 성경연구와 전달방법에 크게 공헌한 세계적 인물이었다. 아더 피어선의 조부 아브라함 피어선 2세는 예일대학교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총장도 지낸 명문인사였다. 아더 피어선 목사는 당시 세계적 복음운동 지도자 무디(Dwight Moody),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등과 교제하였고,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요 목회자 챨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의 런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교회 후임목회자가 될 만큼 저명한 설교가였다. 그는 장로교 뿌리에서 자랐으나, 침례교와 복음주의 운동계열과 초교파적 유대관계를 강화했고, 높은 신학적 훈련과 문학적 소양을 갖췄지만, 인간의 내면적 영혼의 변화를 통한 사회구원, 하나님 말씀에 의한 심령의 거듭남,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 권위적 성직 위계질서의 거부 등을 강조했던  매우 열려진 복음주의자로서 특징을 간직한 목회자였다.
피어선 목사의 말년, 그는 극동지역 세계선교여행을 계획하고 일본을 거쳐 당시 조선에 와서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성경강해를 인도하였다(1910.12-1911.1).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피어선이 조선 기독교 신앙인들을 접하고 받은 인상은 그에게 너무나 감동적 이었다. 조선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망과 성경말씀에 대한 조선 기독교인들의 영적 목마름을 그의 피부로 느꼈다. 피어선은 미국으로 귀국한 후 격무와 질병으로 인해 곧 바로 타계했으나, 마지막 조선교회를 성경말씀으로 돕고자 하던 그의 유지가 유족들과 영국 등 세계 여러 나라 신도들의 호응을 받아, 기금이 조성되고 앞서 말한 대로 1912년 조선 땅에 ‘피어선 기념 성경학교’(1912)가 세워진 것이다.
만우가 피어선 성경학교에 학적을 두고 있을 때(1915-1920.3)의 중간기에 피어선 성경학교 건물이 준공되었고(1917), 초대 원장인 미국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A.Hardie, 1865-1945)로부터 2대 원장 언더우드(H.G.Underwood,1859-1916), 3대원장 져다인(J.L.Gerdina,1870-1970), 그리고 4대 원장인 미북장로회 선교사 게일(JamesS.Gale,1863-1950)의 지도력을 다 경험했다. 이것은 비록 만우 선생의 20대 초창기 기초신학 훈련기이지만, 하디․언더우드․게일 등 초기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 중에서도 능력 있고, 순수했고, 복음적 희생정신에 투철했던 인물들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더욱이 앞서 말한 대로 아더 피어선의 복음주의적 경건신앙, 기독교 교리적 신학지식이 아니라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적 말씀에 부딪혀 신적 거룩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변화되는 중생체험에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두는 영성수련의 강조는 만우신학의 기초 토양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우는 경건주의 신앙의 장단점을 이렇게 피력한다. “(경건주의는) 뜨거운 신앙과 진실한 생활, 그리고 윤리적 생활이나 단체적 생활을 중요시한다는 등 일체의 수단과 술책을 떠나 그들의 순진한 생활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우는 성화를 강조하다보면 의인신앙을 소홀히 하여 ‘신앙의 주관주의나 감정주의’에 빠지기 쉬워서 ‘성서적 신앙’에서 이탈하기 쉽다고 경고한다.
만우는 종교적 주관주의, 신인합일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상실의 망아지경을 탐닉하는 신비운동, 도덕적인 불건전성에 빠져들기 쉬운 에로틱한 종교적 감상주의 등을 엄중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기독교의 본질을 도덕적 가치에서만 찾으려는 19세기 릿츌계통의 자유주의 신학도 엄정하게 비판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역사적 계시가 약화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하튼, 만우와 이용도 목사와의 교류, 성결교 계통의 신학기관의 교류, 만우의 성빈사상, 성 프란시스에 대한 흠모, 초기 민족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으면서도 말년에 갈수록 교회의 일차적 사명과 교회의 정치사회적 참여를 구별하려고 했던 ‘정치 기피증’ 등은 그 뿌리가 만우의 초기 신앙 형성기의 그가 받은 영향으로부터 온다. 만우가 청산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르던 해(1926) 이전, 곧 만우의 20대 시기에 집필했던 유고들을 읽어보면, 이 무렵 만우의 영성신학 안에 ‘복음주의적 경건과 성빈의 영성’이 강하게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장공의 신학적 여정 안에도, 성령에 의한 회심의 경험, 성 프란시스의 성빈(聖貧)에 대한 지극한 흠모, 산상수훈 가르침대로 살려는 톨스토이 말년의 ‘영원한 불꽃’에 대한 부러움, 무소유와 빈민촌생활을 실천하는 하천풍언의 사랑의 실천생활에 대한 동경 등 ‘내면적 경건신앙’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한 계기가 조용한 기독교 서적 독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승동 예배당에서 열렸던 장로교회 연합사경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체험을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흥강사의 메시지는 복음주의적 새 사람,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거듭나는 중생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로 영접하는자를 영접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는 자의 생명 속에 직접 말씀하실 것이라는 복음의 초청이었다. 장공은 믿기로 결단한 직후와 그 이후, 그의 심령에 경험한 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옳다! 나도 믿겠다!”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장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

장공의 개종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였고, 성경이 꿀송이보다 달게 느껴지는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깊어갔고, 그래서 그의 개종은 기독교적 교양습득으로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만우와 장공의 영성신학 안에는 ‘영혼 내면의 중생체험’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공통적으로 간직되고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더 분별하여 보면, 만우의 ‘경건신학’ 안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적 신앙이 강하게 강조되는 전형적인 ‘복음주의 경건신학’ 요소가 작동하지만, 장공의 경우는 십자가의 대속적 신앙을 믿으면서도 개종시 회심의 동기가 바울신학의 중심테마인 ‘십자가의 대속신앙’이라기보다 요한신학의 중심테마인 말씀의 화육체이시요 빛과 생명의 담지자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신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난자의 특권과 은혜 곧 ‘진리와 은혜 충만’(요1:9-14) 경험이었다.
장공은 만우처럼 20대 청년부터 장차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는 종으로서 살려는 소명을 아직 받고 있지 않았다. 장공은 만우처럼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지 않았고, 그 대신 ‘중앙 YMCA 일요강좌’, ‘YMCA 영어전수과’, ‘YMCA 잡지실’에서 문학, 철학, 종교, 교양, 시사평론 등의 독서와 어학공부에 더 열심을 냈다.


  (3)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자유인’이 되고 ‘생활신앙인’이 되는데 있음

만우․장공의 두 신앙인이 심리적인 태생적 기질면에서나, 20대초 신앙인으로 개종 동기와 과정에서나, 그리고 기초신학수련 학원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천의무봉’의 신앙동지로 평생 동안 묶어내는 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동향사람의 인간관계라거나, 인간적 신의(信義)라거나,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시절 신앙 동지적 삶을 살아가기로 피차 약속한 평생결의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자유인이 되고, 복음신앙 안에서 자유인은 사랑과 봉사와 정의를 위해 자발적인 생활신앙인이 된다는 신념에 있어서 완전 일치하였다. 이 신념이 또한 한신대학교 건교이념의 주춧돌이 되고 기장신학의 중심핵이 된 것이다.
조선신학교의 건교정신을 말하는 ‘신학교육의 원칙’ 속에 나타난 자유정신은 만우․장공의 심령을 지배하던 복음의 본질이었다. 신앙양심의 자유와 신학학문 연구의 자유는 마틴 루터가 그의 명저『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두 명제로 요약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칼빈은 루터의 칭의론을 받아드리면서, 동시에 『기독교 강요』 제III부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의 원리로서 의인론 못지 않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강조한다. 개혁신앙의 윤리는 ‘십자가 속량신앙과 거듭남’에 바탕을 두고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갈파한 기독교 윤리적 삶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분별하면서 ‘몸으로 산제사,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신앙생활은 ‘생활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만우는 기독교의 복음적 신앙이 형이상학적 종교철학이나, 메마른 교리적 교조신학 체계나, 바리세적인 위선적 도덕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였다.

    신앙이란 산 물건이요 죽은 물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 맛이 있고, 새 힘이 있고, 새 표현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하지 못 할 때에는, 벌써 그 신앙은 병들어 앓다가 죽은 신앙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조선교회를 살펴보면 나는 정통파요, 나는 신비주의파요, 나는 경건파라고 서로들 내세우니.......솔직히 말하자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운동을 생명으로 하는 은총의 신학을, 불완전한 인간의 지력에 의해 산출된 신학의 이론적 체계와 맞바꾸려는 것이 아닌가하여 염려가 됩니다.

만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유방임적 자유도 아니요, 인간 주체적 자유의지에 의한 휴메니즘적 삶의 철학도 아니다. 만우의 복음적 자유혼은 그의 예배신학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근본적인 예배는 지극한 동경과 신비와 열정과 엄숙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결코 설교만 하거나 혹은 설교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예배의 일부분 일지언정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장공은 만우와 같은 맘으로 ‘복음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평생 우리시대의 할례당이나 보수적 정통신학집단과 싸운 사람이다. 장공의 증언을 들어보자.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만나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말함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십자가다......“이제부터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하는 생활내용이다......‘믿음’은 나와 예수님과의 인격관계요, 나와 책이나 나와 교훈이나 나와 학설이나 나와 신조의 관계가 아니다.

만우․장공의 영성신학에서 모두 성 프란시스의 영성을 흠모하는 궁극적 동기도, 그 깊이를 파고들면, 당시 한국교회의 경직화된 교리적 기독교 신앙과 바리세이즘에 절망한 순수한 복음 구도자로서 젊은 영혼들이, 성 프란시스의 청빈과 그리스도에게 순명하는 절대순수의 주님과 사귐의 인격신앙, 청빈하고 빈 마음 속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조명을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봉사하는 프란시스 수도승단의 실천적 생활신앙이 만우․장공의 심령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4) 한국적 신학의 형성과제: 일즉다(一卽多)의 신학과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신학

만우가 쓴 글 중에서 그의 나이 30세 이전, 비교적 그의 청년기에 기고한 논문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파격적인 논문은 1926년 잡지『청년』에 기고한 “침묵의 말씀”이라는 글이다. 이 글은 일종의 종교적 묵상의 글들로써 내적으로는 연관되지만, 서로 다른 소주제가 연속적으로 다루어지는데, 예를 들면 ‘빛이여 내게로 오소서’, ‘하나님의 얼굴’, ‘볼 수 없는 사람’,  ‘하나와 많음(一卽多)’, 그리고  ‘찰나의 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절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만우는 당시 종교계와 신학계가 ‘지껄이는 신조’, ‘듣기만 해도 답답한 특수종교의 신학’, ‘식어진 잿더미 같은 이론형식’, 그리고 ‘개념의 장난판’ 들에게 염증이 나고 피곤하고 싫어서 하나님의 빛을 그리워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그립다고 고백한다. 종교적 시인들의 일시적 인간얼굴과 자연만물 속에서 신의 임재를 느끼는 신비적인 체험, 그러나 찰나적인 해탈감정을 넘어선 영원한 해탈을 앙망한다. 그리고 그가 찾는 영원한 해탈과 생명의 창조자와의 조우를 말씀이 화육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고 고백한다. 그분은 지금은 ‘볼 수 없는 분’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1:3)고 고백을 한다. 그리고나서, 만우는 그의 문학적 표현력과 언어적 한계의 극치까지 치닫고 나아가면서 ‘일즉다’(一卽多)의 신학을 비온 뒤 구름 사이로 빛나는 태양처럼 순간적으로 쏟아낸다.
만우는 우선 ‘하나’(一)는 수학적 하나가 아니며, 추상화되어 넋이 없는 하나가 아니요, 대립상의 하나가 아니요, 고립된 하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도리어 그 하나(一)는 절대의 하나요, 피와 눈물이 있는 하나요, 생명이 약동하는 하나요, 인격적 사귐 가운데서만 직면하는 하나요, 절대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매우 역설적인 ‘대극일치’ 논리로서 하나의 신비를 고백한다. 물론 여기에서 ‘하나’(一)는 만우가 그 얼굴 보기를 그리워하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와 많음의 관계, 일(一)과 다(多)의 관계, 한 분 하나님과 만유 피조물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놀라운 파격성과 급진성(radicality)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절대의 하나 가운데 만유가 살아 있고, 그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귀하게 여김을 받고 그 품 안에서 길러집니다......이리하여 일체의 다(多)는 일(一)로 말미암아 살고 또 다시 다(多)로 말미암아 삽니다. 일(一)은 다(多)를 살게 하고, 다(多)는 일(一)을 살게 합니다. 일(一)을 떠난 다(多)는 생명이 없고, 다(多)를 떠난 일(一)도 생명이 없습니다.

위와 같은 만우의 래디컬한 ‘일즉다’(一卽多)의 종교철학적, 아니 그의 신학적 발언은 그 당시 1920-40년대 장로교의 보수적 신본주의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조선신학계에서는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이단적 사상이며, 현대 21세기 신학에서 소위 범재신관(pan-en-theism)이라고 부르는 일부 진보적 급진적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신관이다. 만우의 이런 파격적 ‘일즉다’(一卽多)의 신학은 필자의 해석이 첨가되어서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만우의 혁명적 주장 속에서 부정 할 수 없게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생활은 죽은 생활이요, 사람이 없는 하나님의 생활 또한 뜻 없는 생활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만우의 ‘일즉다’의 신학이 개혁파신학의 아버지인 죤 칼빈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제1장의 명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관계가 있다.”라는 신익식에 있어서 인간이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인식론적 관계성을 달리 표현한 것인가? 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만우의 발언은 칼빈이 말하려는 신인식에서 있어서 상호관계성을 논하는 것보다 더 래디컬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만우는 인식론적 측면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일과다’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만우의 이러한 파격적인 신학적 사유의 단초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우의 신학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정리한 주재용은 위에서 언급한 만우의 ‘일즉다(一卽多)’의 신학적 영성을 “송창근 영성의 궁극적 경지”이며 모든 신비사상의 특징인 ‘인간과 하나님의 일체(unity)'를 지향하는 바와 공통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만우의 신비적 ‘일즉다’의 영성이 기독교 신비주의의 배경이 되고 있는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에 그 연원을 찾아보려는 암시를 하고 있다.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비사상에 끼친 영향에서 볼 때, 특히 중세 스콜라신학의 영성가 마이스터 엑카르트 영성신학에서 엑카르트 영성신학이 지닌  ‘존재론 구조’ 곧  ‘출원과 환원의 변증법’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신학을 연구한 길희성은 다음같이 말한다.   

   이러한 전통적 창조론에 대하여 엑카르트는 만물을 품고 있는 하느님, 만물의 모태와도 같은 하느님을 말한다. 인간을 비롯한 세계 만물이 신성(Gottheit)의 깊이로부터 출원(出源, exitus)하고 그리로 환원(還源, reditus)하는 창조론을 말하며, 신과 인간의 부정 할 수 없는 근원적 일치를 설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형성된 엑카르트의 이러한 사상은 적어도 하나의 대안적 신앙관으로서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길희성이 위에서 말한바 처럼,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비사상의 맥락 속에서, 만우의 ‘일즉다’의 신학이 연원했다고 이해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만우의 ‘일즉다의 영성신학’은 신플라톤적 신비사상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정신문화의 토양 특히 대승불교의 화엄사상의 ‘일즉다(一卽多)’의 화엄적 실재관 혹은 세계관에서 그가 받은 무의식적 영향이라고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중요한 개념 언어 ‘一卽多, 多卽一’이라는 특수한 용어의 용례자체가 그것을 증거 한다.
한국불교의 근본주류는 대승불교 흐름 중에서도 화엄사상과 선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화엄사상은 법계연기론에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가르치며 하나가 일체요 만유가 일체여서, 우주만물이 서로 융통하고 화해하고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일즉다, 다즉일’의 논리를 강조한다. 이(理, 하나인 본체)와 사(事, 다수인 현상)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바다의 파도와 대양과의 관계같이 비유된다. 파도 없는 바다는 죽은 바다요, 바다 없이는 파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만우의 ‘일즉다’의 영성신학 유래가 어디로부터 왔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근본주의 신학이론과 그 배타적 논리체계 외에는 모든 것을 이단시하는 당시 풍토 속에서 그가 ‘일즉다’의 논리로써 하나님과 피조물, 하나님과 인간의 살아있는 불가분리적 관계를 말하려고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우의 이러한 ‘우리신학’의 씨앗은 훗날 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지만, 21세기 한신신학공동체 우리들의 과제로 남는다. 장공과 만우가 서양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신학만을 복송하는 지극히 피동적인 신학식민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우보다 30여년 더 오래 살으셨던 장공은 만우보다는 더 많이 ‘우리신학’의 형성에 있어서 필요한 기초 터 닦음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장공도 시대가 그에게 맡긴 사명에 충실 하느라고 주체적인 한민족의 그리스도교 신학형성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지 못하고 후학들의 학문적 과제로 남기고 가셨다.


(5) 만우와 장공신학의 중요한 차이: 교회와 세상,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의 관계

우리는 만우와 장공신학에서 많은 공통 지향점과 그들 영성의 특징에서 일치점 및 공명(共鳴)하는 음향을 언급하였다. 그러데, 이제 가장 조심스럽게 두 분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점이 남았다. 우리는 만우․장공 사이가 ‘천의무봉’ 관계라고 확신하면서도 왜 두 분 사이에 서로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 혹은 단순하지 않는 ‘화이부동’의 요소가 있는지를 밝혀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나는 그점이 매우 중요한 ‘차이’이지만 ‘의미 있는 차이’라고 보는데, 복음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 교회와 정치 현실과의 관계, 하나님의 구원사와 세속적 일반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만우는 1920년대 초기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 지상천국 건설에 관심, 예수와 초대복음의 민중성, 사회의 구조적 기능과 환경영향에 대한 인식, 개인과 사회발전의 상호불가분리적 관계성에 대하여 남보다 훨씬 강했다.
소년시절에 이미 민족운동가 이동휘의 지도를 받은 것을 비롯하여, 1920년 남대문교회 전도사로서 수양동우회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조선독립’을 고무하는 운동모의 죄 및 참가죄로 6개월 구속복역도 경험했고, 일제시대 내내 해방될 때까지 정치적 ‘요주의 인물’로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조선신학교 설립이라는 막중한 업무를 장공에게 맡겼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우가 인간적으로 점점 성숙해지면 질수록, 그가 현실정치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몸으로 체험해 갈수록, 만우는 복음과 이 세상, 교회와 현실정치나 역사, 교회의 일차적 구령사업과 교회의 사회참여, 개인 심령의 중생을 통한 인간혁명과 사회구조적 혁명을 구별해야 한다는 확신이 강화되어 갔다. 몇 군데 그의 글 중에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눈여겨보기로 하자.
우선 만우는 “교회를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1924)라는 글 속에서 그의 초기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정리하면 (i)조선교회는 사회화되고 사회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ii)물질계를 심령계와 분리하려 하지 말고, 물질사회를 심령사회에 복종시켜 속히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iii)뜻이 있고, 신앙이 독실하고 유망한 청년을 외국에 유학하게 하여 사회가 갈망하는 교역자를 양성해야 한다. (iv)교역자는 시대가 요구하는바에 응답할 만큼 현대철학, 정치, 자연과학, 문학과 예술 등 현대사조가 변해가는 것을 알아야한다 (v)예배당, 학교, 병원 등의 운영비를 선교사에 의존하지 말고 실업(實業)을 장려하고 과학을 권장하여 경제력을 충실케 해야 한다. (vi)신문, 잡지, 독서실, 출판사 등을 육성하여 기독교 학문을 일으켜야 한다.
만우는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의 기여”(1923) 글 속에서, 1970년대 민중신학의 ‘민중으로서 예수’ 인식에 이미 도달하고 있다. 그점은 실로 놀랄만한 만우의 ‘살아있는 신앙’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민중성을 유대민족 운동이나 정치적 행동과 일치시키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 논문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면 (i)예수는 민중 사이에서 민중을 위하여 생활하신 위대한 인격자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요, 평민이요, 노동자요, 무산자였다. (ii)예수의 사회적 활동의 요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하는 복음이며(눅4:16-21), 마리아의 찬가대로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린 자를 배불리시는 분(눅1:51-53)이었다. (iii)예수는 그의 이상, 설교, 행동 어느 면을 보던지 가난한 자와 학대받은 자들의 위로자였고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비판자였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iv)예수의 사회적 활동은 당시 다른 민중운동에 비해 민족적 차원의 정치성을 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v)예수의 교훈은 한쪽으로 보면 사회적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 교훈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최대의 목적은 인류사회의 개조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다. (vi)예수는 사회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결을 피하시고 사회문제로 제기된 모든 문제를 종교문제로 낙착 지었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배통치가 극렬해지자, 교회와 YMCA 운동 등은 1919년 3.1 이전의 정치적 민족독립운동 형태가 정치적 민족운동과 경제․사회적 민족운동으로 대변화를 하게된다. 그러나 만우는, 당시 조선교회와 기독교 사회운동 기관의 이러한 방향전환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경고를 발하고 있다. 1920년대 초기의 만우의 기독교 사상과는 다른 신학적 관점변화를 1930년대에 보이기 시작하여, 점점 기독교의 본질을 개인구령, 속죄의 복음 전파, 중생의 복음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선장로교회의 대표적 연구지인『신학지남』(1933)에 기고한 논문 “오늘 조선 교회의 사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교회는 결코 사회문제, 노동문제, 평화문제, 국제문제를 말하거나 혹은 인간들의 변변치 않은 지식들을 두루 주워 모은 사상을 논하는 곳이 아닙니다. 땅 위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중생의 복음이 우리교회의 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만우의 신학적 입장의 분명한 노선 곧 교회의 일차적, 아니 본질적 사명은 이 세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개선과 그것들의 창조적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교회에게 위탁한 유일한 보배로운 사명 곧 하나님의 은총과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신앙적 확신은 일제강점기의 비정상적 정치적 한계상황에서만이 아니라, 해방 후 새 나라 건설의 민족적 사명에 임한 상황 속에서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논의점이다. 해방 후 혼란시기에『조선신학보』(1948)에 기고한 “민족의 지대한 요구와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라는 글 속에서 만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족에 대한 진정한 교회의 봉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만이 위탁받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도하는 데 있다. 내 민족이건 남의 민족이건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죄로 타락하지 않은 인생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과정이다. 내 민족, 내 문화도 이 과정 속에 섞여 흐르는 것이다.

만우는 위 논문을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18:36)는 요한복음의 말로써 끝맺고 있다. 우리는 당시 만우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한다. 해방정국에서 들뜬 조선교회는 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들이 ‘민족․정치사업’에 뛰어들어 교회와 목회자로서 본래 사명을 소홀히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가 복음의 권위 이외에 민족․정치이념․문화전통․시대적 가치를 용인하고 교회 안에서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교회의 관심사로 삼을 때, 그리스도의 주권과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고, 그 일차적 사명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한 것이고, 또 사실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만우의 ‘하나님 말씀과 순수복음’을 지키려는 충정을 깊이 이해하고 그러한 신학적 통찰력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만우의 신학적 입장이 진정한 ‘개혁파교회’의 신학적 관점인가? 혹시 그의 초기 신학의 영향인 ‘복음주의적 경건신학’이 칼빈적 개혁교회 신학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하나님 주권의 관철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책임으로써 교회가 지녀야 할 정치․사회적 참여와 책임을 약화시켜 ‘교회주의’나 ‘신앙의 내면화’로 축소될 위험이 있지 않는가 우려하게 된다.
우리는 같은 시기 곧 해방정국(1945)에서 위에서 소개한 만우의 글보다 3년이나 빠른 시기에 장공의 중요한 논문 “기독교의 건국이념” 속에서 만우와 ‘차이’가 분명하게 나는 신학적 입장을 읽게 되는 것이다. 장공의 근본입장을 나타내는 중요한 논문이므로 그 첫 문장을 아래에 다시 인용해본다.

    기독교인의 최고사상은 하나님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래세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 인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부분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이것이 전사회에 침투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래세세계까지 생생발전(生生發展)하여 우주적 대극(大極)의 대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전모인 것이다.

위 글 속에는 분명히 만우의 기독교 이해와 다른 장공신학의 특성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공의 복음 이해, 기독교 이해는 그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특히 복음과 이 세상과의 관계, 혹은 교회와 현실역사 관계를 ‘복음에 의한 세상의 변혁’이라고 파악하는 장공의 관점은 확실히 만우와는 다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는 거대한 역사개혁 또는 갱신운동은 그리스도의 사람인 크리스챤의 본직이다”고 장공은 말한다. 장공은 만우처럼, 교회가 이 세상에 속한 기관이 아님을 충분히 인지하고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역사 안에는 세속사와 구원사의 두 영역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지만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복음과 세상 현실과의 관계, 교회와 역사 현실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책임성 등에 있어서 만우와 장공의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은폐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하거나, 양자택일해야 할 것이라고 염려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도리어 그 문제에 있어서 만우,장공간의 ‘차이’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우리 한신과 기장이 받은 신학적 통찰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각 개인에 따라, 그리고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만우와 장공의 견해 중 어느 한쪽을 일차적 자신의 견해로써 받아드릴 때라도, 다른 한편의 견해를 깊이 인지하는 겸허한 경청의 자세가 요청될 뿐이다. 그런 태도만이 ‘복음주의적 경건신앙’이나 ‘개혁주의적인 역사참여신앙’으로 하여금 비복음적 신앙에로 전락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생활신앙의 안전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 만우․장공 신학의 두 유형적 특징을 신학교육에서 통전해 내는 과제

만우와 장공은 한신이 살아있는 한, 한신신학의 뿌리요 지반이며 원샘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강 물이 아무리 수량이 많고 크고 넓어져도 보기에는 좋지만, 직접 마실 수 없을 만큼 오염되었을 때, 사람들은 한강의 발원지인 어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한강물의 발원지 옹달샘을 찾는다. 한신은 개교 66년을 지나면서 교육시설도 50여년 전에 비하여 풍성해졌고, 교수진도 많아졌고 박사들로 가득차 있다. 일제말 장공선생이 몇 사람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신학교의 명맥을 이어가던 때와 비교할 때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있고, 만우선생이 납북당하기 전 동자동 교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기와 비교하면 우수한 대학졸업의 인재들이 신학을 하겠다고 입학시험 경쟁을 치룬다. 신학교재는 풍성해졌고, 신학 각분과의 학문적 내용도 세계수준에 도달하여 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만우,장공 신학정신이 아예 살아졌거나, 약해져서 거의 “한신신학공동체는 죽었는가?”라는 위기의식이 우리교단만이 아니라 한국 신학계와 대학가의 염려스러운 소문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강물의 발원지로 되돌아가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셔 소생하여야 한다. 만우․장공신학 혹은 신학정신, 혹은 그들의 영성을 신학교육 현장에서 통전하는 과제는 양자를 두루 고루 섞어서 조화를 이루자는 말이 아니다. 무릇 살아있는 생명체는 쉽게 섞이지 않는 법이다. 도리어 각각의 특징을 살려내고, 양자의 공통점을 더욱 확실하게 재학인하고, 양자의 ‘차이’를 귀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알고 교수와 학생들이 자신들의 그리스도인됨과 목회자됨의 형성과정에서 영적 인격체로 재육화 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우선 세 가지 과제와 방법을 제시해본다.


(1) 전문신학지식인 훈련교육형태에서 그리스도 품격형성의 영성훈련 교육체계로 전환

첫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만우․장공의 신학교육 정신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신학지식․성서신학․실천윤리 등의 각종 전문적 지식전수가 일차적 목적이 아니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심장에 접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데 있었다.
대학원 이름도 ‘신학전문대학원’이라고 변경되었으니, 그에 걸맞는 고도의 학문적 교육훈련, 지식전수․목회현장에 적응하는 이론실습이 갖춰져야 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신학교수와 신학도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사람으로서 자기부정, 겸허, 새로운 존재에로의 재탄생의 환희, 성령에 의한 내적 생명의 충만과 권면체험, 복음에 빚진 자라는 자각, 이곳 임마누엘 시공간이 신발을 벗어야하는 ‘거룩한 땅’이요 ‘얍복 나루터’라는 철저한 자각이 없다면, 종교로서 밥을 먹는 전문 직업인 양성소로 전락하고, 성령 없는 죽은 신학 장사놀음이 되고 만다.
한신교육 현장에서 최대의 문제는, 장공관을 새롭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앞서서 보이지 않는 만우와 장공의 정신을 세우는 일과, 교수와 학생과 직원들 맘에 그리스도의 품격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다.  교수와 학생과 직원들 맘에 그리스도 품격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다. 만우와 장공은 신학교육의 목적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 완전히 일치하였다. 교정에 세워져 있는 돌비에 ‘학문과 경건’이라는 모토는 학문을 하되 경건훈련도 하자는 말 뜻이 아니다. 그 둘을 병행하자거나 조화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그 참 뜻은 신학이라는 학문은 영적 경건의 토대 위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뒤돌아보면 한신의 신학교육은 너무나 지식편중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리스도 품격형성을 위하여 채플 횟수를 늘리고, 영성과목을 늘리고, 학년 초의 신앙수련회와 생활관 경건회 집회를 강화하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신학교육의 지향성이며, 맘의 자세이며, 영의 깨어 있음이 중요하다. 고도의 역사비평 강의가 이뤄지는 강의실은 동시에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감격과 말씀에 대한 사랑과 애모가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교수가 목사를 만들어 낸다는 교만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학교수는 성령이 신학도의 심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수태시키고 탄생시켜가는 신비한 제2, 제3 성육신 사건의 과정에서 ‘조산원 역활’로서 겸허한 봉사라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영광이고 최선의 성공인 것이다.


(2) 예배공동체가 살아나야 하고, 예배를 연출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신학교의 예배시간에서 ‘은혜와 진리의 충만 경험’을 하도록 변화되어야 한다.

만우와 장공은 신학교육에 일생을 헌신한 사람이면서도, 교회를 사랑하고 섬긴 목회 지향적 신학자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인식해야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도 아니고 평안도 사람도 아닌 만우는 당시 조선장로교 상징교회인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목회했고, 김천 황금정교회, 서울 성남교회를 섬겼다. 장공은 그 바쁜 조선신학교육의 혁신과업 중에서도 경동교회 당회장을 10여년 감당하면서 강단을 지켰고, 지금 성북교회의 기틀 마련에 큰 몫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모두 ‘교회주의자’를 가장 싫어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였다. 교회를 건물이나 종교적 인간의 집합체로 착각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살아있는 영적 세포들로서 신자 그리스도인의 영성 함양에 주력하였다.
신앙생활과 훈련에서 ‘예배’는 그 중심이다. 신학교육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배가 생명력을 잃고, 감동을 잃고, 형식과 의무 시간으로 변질될 때, 신학교육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한신이라는 신학교육의 장에서 여러 곳이 문제이지만, 가장 시급히 ‘응급치료’를 해야 할 부문이 채플시간이다. 채플참여를 의무화하였다는 것 자체가 신학교육의 ‘사망신고서’를 하나님 앞에 교수단과 학생들이 함께 연서명하여 제출한 셈이다. 채플시간 하나하나의 순서가 만우의 예배론에서 강조하듯이 “지극한 동경과 경건과 신비와 열정과 엄숙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진 복음성가, 제3류의 딱딱한 신학강의조 설교, 학교를 방문한 외래인사들에 대한 예우적 차원의 강당 제공, 그리고 학사업무와 학생회 광고시간으로 오염되어 있다.


(3) 만우의 ‘복음주의적 경건신학’과 장공의 ‘개혁주의적 역사참여신학’은 신학교육의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동시에 살아있도록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보이는 ‘빛의 원무(圓舞)’를 출 수 있다.

만우와 장공의 신학을 한신신학 교육과정에서 살려내는 방법론적 메타포를 나는 물체의 원운동에 있어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팽팽한 균형’으로써 은유하려고 한다. 아는바 대로 물체가 원운동을 할 때 중심으로 쏠리는 힘을 구심력이라 하고, 원운동을 하는 물체에 작용하는 관성의 힘 때문에 원의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보름달 어린이들이 숯이나 나무 조각을 깡통에 넣어 불을 붙여 돌릴 때,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과 균형을 이룰 때라야만, ‘빛의 원무’가 지속될 수 있다. 만우는 신학교육에 있어서, 신학도들이 구심력을 증진시키도록 노력한 분이다. 그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감격적 신앙,중생체험,신률적 성화노력,하나님 말씀만의 강조,교회 본연의 일과 세속적 일의 엄정한 구별요청 등은 모두 신앙의 구심력 증진을 위한 것이리라.
한편 장공은 성육신의 영성을 강조하되 그리스도인의 사회와 역사를 그리스도 형상을 덧입도록 변화시켜야 한다는 역사참여와 문화변혁이론, 우주적 공동체 형성의 비젼, 교회의 정치적 책임 강조 등은 신앙의 원심력 증진을 위한 것이리라.
장공의 원심력을 잊어버리고 만우의 구심력만 강조하는 신학이나 목회는 결국 교회주의와 개인영혼구원이라는 내면적 외딴섬 신학으로 전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 만우의 구심력을 잊어버리고 장공의 원심력만 강조하는 신학은 기독교 정체성의 약화와 구체적 교회성장의 둔화를 초래 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을 평면적으로 보면 몰트만이 말하는 복음의 ‘정체성-의미 관련성의 딜레마’(dilemma of identity-relevance)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면, 만우․장공의 신학적 ‘차이’는 딜레마(dilemma)가 아니라 복음적 진리가 항상 드러나는 형태인 역설(paradox)인 것이다. 양자를 딜레마라고 생각할 때는 항상 진퇴양난의 궁지를 생각나게 하지만, 역설이라고 이해 할 때는 보기에는 모순 또는 불합리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올바른 것을 나타내는 ‘대극일치’의 언설이다. 성서적 진리는 변증법적인 것도 아니고, 딜레마가 아니라 언제나 역설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우, 장공신학은 그 공통점 못지 않게 엄존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위대한 선생의 신학은 후학들인 우리에게 딜레마로써 항상 긴장갈등 상태 안에서 힘겹게 견디어 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 일치로써 ‘생활신앙’과 ‘신학교육 과정’ 안에서 체현되어야 할 것이다. 두 분의 신학과 영성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하는 ‘딜레마’로써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숙한 제자직의 영성 안에서 ‘역설적 일치’로 파악되고, 그러한 ‘역설적 일치’를 체현하는 한신신학이 될 때, 만우, 장공의 신학과 영성은 한신신학교육현장과 기장목회현장에서 올바르게 통전될 것이다.






[장공기념사업회 주최 제10차 정기 연구발표회]

(2006년 6월 15일, 한신대 신대원 효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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