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문명사적 의의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I. 제3천년대 시작인 21세기를 기다린 설레던 맘의 아픔

  이 글의 주제를 편집실에서 화두로서 건내주면서, 주제가 너무 크지만 자유롭게 생각하는 바를 써보라는 여유를 허락해 주었다. 문득, 2001년 새해를 기다리던 어리석은 내 맘의 설레임과 기대가 컸던만큼 맘의 상처받음도 컸던 일이 생각났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혜의 말도 듣던 바이고, 인간 본성과 역사가 지닌 ‘자기모순적인 양면성’도 내 전공분야에서 많이 들어왔던 바이다. 그러나, 인간의 일생이 고작 80-90년인데, 한 사람의 생애중에서 1,000년 단위의 밀레니엄(millenium)을 두번 경험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설레임과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마침네 21세기가 동텄다. 그러나 세계사 지평위엔 별다른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 옛날 룸비니에서 샤카무니 싣달다가 탄생하고, 벧들레헴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탄생하던 그 때도, 여전히 가난한 집 굴뚝에선 간신히 아침밥 짓는 연기가 가물거리고, 군대의 말밥국 소리는 여전했던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새로움, 창조성, 연대적인 인류공동체의 비젼 같은 것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도리혀, 21세기 첫해(2001) 9월11일, 뉴욕 쌍둥이 고층빌딩에 태평양 전쟁의 일본 항공대보다도 더 강화되고 ‘집단화된 증오와 폭력의 화신인 21세기 가미가제’ 사건이 터져서, 세상을 온통 전쟁과 폭력, 보복과 증오심의 아수라장으로 변화시켜 버린 형국이다.
  여하튼, 21세기는 인류문명의 존속과 도약이냐, 아니면 파국과 멸망이냐, 양단간 판가름나는 중요한 분명사의 카이로스인 것 만은 확실한 것 같다. 카이로스(kairos)라는 헬라어는 ‘위기와 긴장이 팽팽한 창조적 기회의 시간’이라는 뜻을 지닌다. 줄여말하면, 카이로는 파국을 초래할 멸망의 위기측면과 위기를 돌파하여 새로움을 창발해 낼 창조적 가능성과 의미가 충만한 시간이다. 배가 산만큼 부를 임산부가 산부인과 병원이 없는 들판에서 조산원도 없이 아기를 낳아야 하는 형국이다.
  오늘의 21세기 세계문명과 동아시아나 한국사회도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문명과 사회의 옛 가치관과 삶의 패러다임이 허물을 벗고 새롭게 바뀌어 가는 시기이다. 문명이 털갈이를 하는 시대이다. 나무둥치가 옛 껍질을 한번 밀어내고 새로운 나이테를 그려내면서 진통을 앓는 형국이다. 우주과학시대에로의 돌입, 분자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에 기초한 생명비밀 암호코드의 독해, 디지털 문명의 보편화로 가능해진 유비쿼터스 정보화 문명시대의 실현, 물류와 문화여행 소통이 빈번해진 지구촌, 종교들이 독선적 도그마를 벗어나 대화협력하려는 분위기의 쇄신 등이 20세기 후기부터 활발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요인이외에도 21세기엔 문명발전을 긍정적으로 기대할만한 요인이 많음에도 왜 오늘 지구촌 21세기 문명은 음울한 먹구름이 거치지 않는가? 왜 인간의 맘은 점점 더 황폐화되어 가고, 공격적인 동물적 본능이 강화되어가고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절망과 비관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낙관적으로 21세기를 보려고 한다. 다음 몇가지의 조짐이 나의 기대를 망상이라고만 속단할 수 없게 해줄 것이다. 차거운 얼음장 아래에 이미 봄물이 녹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논밭을 덮은 쌓인 눈 아래에 봄보리 어린 싹들이 죽지 않고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에게 희망을 건다. 생명의 힘은 죽음의 힘보다 강하고, 존재는 비존재보다 더 시원적이며, 역동적 생기론은 정태적 존재론보다도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II. 21세기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과정에서 창조적 전위대들과 그 운동의 공통요소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한 연구』에서 강조한 문명발생의 근본리듬으로서 ‘도전과 응전의 법칙’을 강조한바 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토인비의 문명철학 체계에 많은 반론이나 비판점이 있을지라도, ‘도전과 응전’의 상관관계적 역동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 원리는 인체 내분비의 면역체계로부터 시작해서 자연선택의 생명진화과정과 사회와 역사의 변동을 지배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원리이자 생명의 기초원리 이기도 하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다. 건강이 있는 곳에 언제나 질병의 위기가 있다. 역으로 말해서, 문명의 위기가 극심 할수록 그것에 창조적으로 응전하려는 창조적 소수자들의 용기와 비젼과 지기희생적 헌신활동이 봄날의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필자는 아래의 몇가지 운동이 21세기 문명사적 의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1)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심층대화하기 시작하였고, 계몽정신의 이성과 포스트모던정신의 영성이 맘문을 열고 서로 귀기울이기 시작한 점.

  21세기 초기 오늘의 세계사적 파국이 쏟아내는 문명이 허물어져가는 붕괴의 굉음은 사실 알고보면 당연히 거쳐가야 할 결과적 과정인지도 모른다. 마치 세계 제1차대전이 19세기 서구 브르죠아 문명의 자체모순이 터져나온 유럽 정치사회사적 현상인것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세계열강들이 벌려온 식민제국주의의 모순들이 터져나온 불가피한 현상과도 같은 것이다. 20-21세기 문명사적 혼돈과 고통은 뉴톤-데까르트적 고전적 세계관이 내포한 다양한 요소들이 해체되어가는 진통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원자론적 인간이해․약육강식의 거치른 진화론․자폐증 환자같은 닫힌 국가주의․ 케케묵은 마키아벨리즘의 군주정치 절대론․마지막 조종을 울리는 귀족주의적 궁중무도회․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제도종교와 가부장주의 등등이다. 이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은 이미 20세기 초엽에 인류가 깡그리 청산했어야할 과거 인류라는 종의 발꿈치에 형성된 두꺼운 각질같은 것들이다.
  21세기 인류사회를 선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집단은 무엇보다도 과학자 집단이다. 특히 문명의 이기들을 가치중립적으로 양산보급하는 구세대 과학자집단이 아니라, 과학할동이 인간의 가치활동의 일부이며, 과학연구가 인류문명의 존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자각을 가진 인문학적 과학자 집단들이다. 물론 그들은 사회과학의 내적논리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한마디로 이성과 영성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경청함으로써, ‘생명’이라는 가치를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데 협력해야 한다는 자각이 확대심화해 간다는 사실이다.
  예들면, 한국의 과학자중에서 원로중의 몇분들에 해당하는 장회익교수나 김용준교수는 인문학자 못지않게 전공분야인 물리학이나 화학이외 철학과 종교학 인문학에 깊은 조예를 갖추고 귀중한 글들을 내놓고 계신다. 현대문명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 ‘생태환경 위기’의 극복대책을 강구하는데 있어서도, 인문학적 통찰과 자연과학적 지식의 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가령 장회익교수가 그의 저서 『삶과 온생명』에서 제시하는 생태윤리의 기초지식으로서, 인류를 지구라고 부르는 온 몸의 ‘중추신경계 위치와 기능담당자’라고 강조하는 은유는 상징적 표현기능을 넘어서 현대인들에게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2) ‘위로부터 아래에로’의 문명쇄신운동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번져가는 씨알들의 지혜혁명

  21세기의 중요한 특징은 비영리단체들인 NGO 단체들의 활성화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봄날 들판의 목초들처럼 앞다투어 돋아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1990년이후 마찬가지이다. 몇몇 선구자들의 선도적 설득과 조직활동으로 시작된 시민운동, 씨알운동, 보통사람들의 ‘아래로부터 문명의 해체와 새틀 짜기운동’은 분명 새로운 조짐이다. 그들의 공통 관심과 화두는 무엇인가? 앞도적으로 생명가지존중․평화와 비폭력 운동․ 권위주의 교육과 정치와 종교의 변혁․ 다양성의 존중과 관용정신 ․생명 연대성의 강화 등이다.
  이러한 보통사람들의 자발적 각성과 연대강화는 아주 새롭고도 중요한 새문명 탄생의 조짐들로 보인다. 거기엔 굳어진 권위주의가 생명을 짓누른다는 공통저항정신이 깔려있다. 그 권위의 근거나 실체가 국가권위이거나 제도적 종교와 교육의 권위이거나, 자본시장의 재벌권위구조이거나, 노동조합의 몰인격적 집단화된 힘이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인간과 생명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인간과 생명체들이 그것들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개인의 내면적 해방과 사회의 외면적 해방은 맞물려있다.
  한국사회에서 예를 들면, 최근 연대의식을 강화하고 있는 ‘생명평화결사 운동’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도법스님, 황대권님, 장회익교수, 김지하 시인, 김조년 교수등 알려진 지도자들의 이름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생명평화 결사운동’은 각자가 하나의 ‘등불’이 되어 자신을 밝히고 세상을 밝히자는 운동이다. 무릇 모든 존재하는 것들 특히 생명체들은 라이프니치가 말하는 ‘창없는 단자(單子)’같은 존재가 아니라, 서로 상자(相資), 상보(相補), 상생(相生)하는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창발적으로 발현하는 존재들임을 자각하고 서로 연대를 가지고 살자는 생명살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종파나, 정파나, 이념이나, 파당을 넘어서서 다소느슨한 구조를 가지고 퍼져가고 있다. 사회 곳곳 환경운동단체들과 유기농 농촌운동들, 그리고 크고작은 사회복지활동분야 에서 이름도 없이 묵묵히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면서 일하는 개미군단들이 내일 한국사회와 21세기 새로운 문명 창출의 주역들이라고 믿는다.

(3) 모성원리의 재발견과 여성능력의 참여운동 및 미래사회의 종교성

21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문명현상중 한가지는, 지난 5,000년의 인류문명 체계가 크게보면 ‘가부장적 남성원리 중심의 문화’ 였음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성원리’의 강조 혹은 여성능력의 활성화와 사회문화창조의 참여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좁게보면, 그동안 억눌린 여성인권의 강화운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의미가 여성인권회복의 차원을 넘어선 대단히 중요한 문명원리의 패러다임 전환의 촉구인 것이다.
고대 에집트문명, 그리스 문명, 중국문명, 인도문명, 잉카문명등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터놓은 불교나 기독교나 유교등 고등종교의 경전이 형성될 때에도,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삶 패러다임’의 훈습을 완전히 배재해내지 못하였다는 자각이다. 부성원리나 모성원리가 물론 상보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부성원리가 지배하는 곳엔 힘숭배와 힘집중 강조․ 상명하복의 지배복종관계 ․ 정복과 투쟁의 영웅에 대한 미화 ․ 만물의 순환질서보다는 발전적 상향운동의 강조 ․ 능력에 따른 서열 매기기와 계급구조의 합리화등이 강조되거나 정당화되는 문명의 얼글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동물세계의 사회화를 너무나 닮은 것이다.
모성원리의 강조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역설체험․ 약자를 돌보고 치유하는 긍휼심․상하질서구조가 아닌 원탁과 원무의 융합질서 ․ 맹몽적 발전보다는 현재적 생명가치에의 존중․인간만이 아니라 여타 생명체들과의 공명 감수성․무엇보다도 자비와 사랑과 인애로서 특징 지어진다. 오늘날 황폐해져버린 우리사회 인간성의 회복은 모성원리가 문명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교육현장과 종교계와 심지어 기업과 정계에서까지도 자각하고 생활화하고 제도화 하는 일에 달려있다. 다른 대책은 모두 방편들이고 지엽적인 것들이다. “근본이 바로서면 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고 성현이 말했다.

(4) 인류의 보편적 의식을 ‘우주의식’의 차원으로 업그래이드 시키는 과제

마지막으로 21세기 후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주시대가 더 활발하게 열리게 될 것 같다. 지구촌의 당면한 문제들 즉 인류인구의 10억 이상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문제, 지구생태위기와 전쟁 폭력문제, 지구 자원고갈과 도덕가치의 카오스문제등을 제쳐놓고, 수천억달라를 소비하면서까지 ‘우주개발계획’을 주진해가는 것이 옳으냐의 논쟁이 있다. 분명히 강대국이나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은 문명의 오만과 국가주의 망령들의 경쟁의식, 그리고 지구촌을 포기하고 미래 새로운 식민지를 선점하려는 낡은 가치이념이 엿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우주개발계획’은 더욱 박차를 가해가면서 추진 될 것이다.
상황이 그럴진데, 차라리 인류는 우주시대에 돌입하면서 인류의 보편적 의식을 ‘우주의식의 차원’으로 업그래이드 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다. ‘우주의식의 차원’으로 업그래이드 시킨다는 의미는, 지구촌에서 90세를 살고가는 인간이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시공의 좌표안에서 자기생명을 정위시키고 다시한번 성찰하는 의식의 확대심회를 말한다.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라는 제목의 책은 20세기 안에서도 여러권 집필되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술만 예를 든다해도 철학자 막스 쉘러의 책과 고생물학자요 예수회 신부인 떼이야르 샤르뎅의 작품이 있다.
  허허 막막한 대우주의 구성물질의 원자들이 지구에서 살고있는 들플같은 존재인 나의 신체구성의 물질구조와 동일하다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 발표는 나로 하여금 숙연케 한다. 그리고 우주와 동질감 동체감을 느끼게 한다. 물론 동양문명속에서 살아온 필자는 서울 시외지역에 위치한 북한산자락 도선사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만물동체’(萬物同體) 글귀를 늘상 보고 들으면서 자라왔다. 그러나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듣고선 그 말이 수신교과서의 교훈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모든 육체는 들의 플과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도다”라는 성경의 시편구절도 여러번 읽고 들었지만 사실적으로 실감이 나는 것은 ‘우주의식’과 비례해서 가능한 것이다.
  줄여말하자면, 구상시인의 시작품 「풀꽃과 더불어」의 마지막 시구절처럼 21세기 인류는 ‘우주의식’으로 다시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물욕과 권력욕과 명예욕 이라는 우상의 덫에서 해방된 성숙한 사람으로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문명의 의의 라고 필자는 믿는다.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나는) 이제 여기 존재한다.

                                  -(구상의 '들풀과 더불어' 시중에서)-



- 월간 길벗, 2007년 1월호

2007/02/24 (10:06) from 211.200.189.233' of 211.200.189.233'	Article Number :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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