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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후시대 교회와 신학(제2회 한국조직신학학회, 2007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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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국 조직신학 학회 모임, Danhae Church, 추풍령, 4.27-28,2007]

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주제의 문제의식

  오늘의 주제 ‘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은 다음 세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과제를 추구하려고 하는 신학공동체 의지의 표현이다.
  첫째, 21세기 첫 제너레이션기간(2001-2030)에 한국기독교는 교회활동의 두가지 기본축 곧  ‘예배와 선교’에서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공유한다. 후기산업사회 ․ 포스트모던사회 ․ 생태계 위기사회에 걸맞게 예배와 선교에 있어서 그 양식과 내용이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표현한다.
  신학의 과제중 하나는 영원한 복음진리를 새로운 매 시대마다 재해석 해줘야하는 ‘변증적 사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의 해석학적 과제를 말하는데, 이러한 과제수행에서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정립에서 보다 성숙한 ‘해석학적 관점’이 무엇인가 성찰하고자 한다.
  둘째, ‘성장 이후시대’라는 다소 불명확한 시대설정은  한국교회가 양적 급성장을 이루었던 특정 제너레이션기간(1965-1995)을 신학적으로 분석평가하고, 통전적 복음신학의 관점에서 단점을 고쳐가고 장점을 더욱 살려나가는 신학적 방향제시를 시도한다는 의식을 표현한다.
   신학의 과제중 더 일차적인 과제는 목회현장의 선교내용과 방식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바울이 갈파하는 교회의 ‘머리와 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의  빛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른 복음적 ‘예배와 선교’를 수행하도록 돕는 ‘교회 섬기는 종으로서 사명’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제 수행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궁극적 규범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 의 빛에서 한국 교회의 존재양태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려고 한다.
  셋째,  ‘교회와 신학’이라는 두 핵심어휘의  병렬적 표현은 교회의 목회현장과 신학의 아카데미써클 사이의 심각한 괴리, 불협화음, 상호신뢰부재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진지한 자기성찰의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신학적  아카데미즘이 지나친 전공영역의 ‘전문화’에 칩거하는 현학적 엘리트주의와 자폐증 상태를 극복하고, 신학전공영역의 재유기체화 작업․ 교파신학에서 다양성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정신의 추구가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표현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학이 인문사회과학 및 자연과학과 심층대화를 통하여 진리탐구과정의 다양한 담론들과  ‘통섭’(統攝, concilience)을 추구하는 신학이라야 한다는 과제의식을 표현한다. 물질론적 환원주의 자연과학의 실재관에 맞서고, 생태환경위기의 적생경보 앞에서 21세기 한국신학이  ‘생명과 평화’라는 절박한 주제에 생산적으로 응답하기 위하여 ‘타학문간의 통섭과제’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 말해보려고 한다.
   이상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발제자는 본론 제2장에서 유동식교수의 선교신학을 예로들면서 제1세계 서구신학의 전통적 신학패러다임 곧 ‘텍스트에서 컨텍스트에로’와 제3세계 급진신학의 패러다임 곧 ‘컨텍스트에서 텍스트에로’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동시주체적 해석학의 의미를 검토할 것이다. 다시말해서,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관계를  페리코레시스적 해석학, 역동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보면서, 공격적이고 정복론적 선교신학을 밑바탕에 깔고 진행되어 왔던 교회성장  이후시대, 한국 신학과 선교의 과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제3장에서 우리시대 신학작업의 활성화에 공헌한 ‘예수 세미나’에서 ‘역사적 예수분과’ 책임자였던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예수 그리스도 행위와 존재방식 이해를 참조하면서 지난 30년동안 한국교회의 파편적 교회모습을 재성찰해 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한국 신학계가 서구신학의 비판적 학문연구방법을 본격적으로 소개받은 이후 지난 40년동안(1960-2000) 신학계 그 자체 안에서  발생한 전공신학의 게토화를 반성하고, 신학전공분야 사이는 물론이려니와  신학강의실과 목회강단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야하는 과제를 논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과학의 새로운 세계관 특히 분자생물학과 정보기술공학이 제시하는 물질주의적 환원주의 실재관과 ‘세계화 이념’이 전제로하는 ‘인류의 무한성장의 신화’를 신학적으로나 목회선교적으로 견제하는 과제와 적극적으로 통섭적 신학과제를 ‘신학․과학․예술의 통전’이라는 화두로서  제시 할  것이다.   

2. 복음과 선교 이해에서 해석학적 패러다임전환의 과제

  2.1. 계시적 학문으로서 신학도 인간의 시도이기 때문에 해석학적 과정을 통과함

  현대신학 작업에서 ‘인문학의 꽃’이라고 말하는 해석학의 담론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신학은  모든 신앙적 독단과  독선의 온상이다. 한국 기독교 교세가 국민의 1/4를 차지하고, 국내외에서 신학으로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의 수가 타학문 분과에 비하여 결코 작다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학 및 신앙담론이 일반지성사회에서 게토화되고, 젊은 깨어있는 세대들이  교회강단의 메시지를 외면하는 이유가  ‘종교를 멸시하는 지식인들’ 곧 계몽주의 합리주의자들의 지성의 오만이라고만 탓 할수 있을가? 그런 면이 없다곤 말할수 없다. 슈라이에르맛허가  비판한대로 아직도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설익은 합리주의와 지성의 오만이 ‘복음의 스칸달론’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장님되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냉철하게 오늘의 신학계와 교계를 돌아볼 때,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기독교 진리의 석명에 대하여 한국사회가 일정한 금을 긋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 측에 더 큰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신뢰도가 낮아지고, 교세가 감소되고, 각종 대형집회의 전도사역에 한국민이 맘의 문을 열지않는 이유로서 현상적 이유와 본질적 이유를 구별하여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준우는  ‘21세기 기독교총서’를 발간하는 변에서 최근 한국 기독교 교인증가세의 둔화와 신뢰도 하락의 원인분석을 총체적으로 잘 밣혀놓았다. 마커스 보그 & N. 톰 라이트 공저, 김준우 역, 『예수의 의미: 역사적 예수에 대한 두 신학자의 논쟁  』, 10-13쪽.(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현상적 이유들로서는 한국교회의 교회중심주의, 개인영혼 구원중심, 기복적 신앙, 교회지도자들의 도덕적 신뢰도 상실, 교파난립, 교회 물량주의적 선교행태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심층적인 본질적 기피현상으로서 반지성적 근본주의적 교리신학, 타종교에 대한 독선적 독단적 공격선교, 성경문자무오류성에 근거한 경전의 계시실증적 해석,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을 들수 있겠다. 한국 기독교를 선교의 벽에 부딪히게 만든 여러가지 이유들 중에서 특히 본질적 원인들의 밑바탕에 ‘해석학적 독단’이라는 공통적 근본원인이 있다.
  신학이란, 폴 틸리히가 말한대로, 기독교 교회의  기능으로서 교회의 필요에 봉사해야 하는 학문인데 특히 조직신학적 과제는 교회의 두가지 기본적 요구에 봉사해야 한다:  그 하나는 기독교 메시지를 진술해야 하는 필요성이요, 다른 하나는 매 새로운 세대를 위하여 이 진리를 해석하는 필요성이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Three volumes in one, vol.1, p.3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전자의 임무에 더 역점을 둘 때 케류그마적 신학(kerygmatic theology)이 되고, 후자의 임무에 더 역점을 둘 때 변증적 신학(apologetic theology)이 된다. 그러나, 그 두가지 봉사기능은 분리될 수 없고 항상 동시적으로 수행되는것이고 또 그리되어야 한다.
  틸리히가 말하는 신학의 둘째임무 곧 “매 새로운 세대를 위하여 기독교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우리가 주목하려는 복음의 해명과 전파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해석학적 과제’인 것이다. 문제는 틸리히  자신도 신학자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인 ‘해석학적 과제’를 실천함에 있어서 기독교진리(message)와 인간 상황(situation) 관계에서 ‘상관적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을 제시했지만, 이 말 자체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진리로서 복음적 메시지 자체가 객관적으로 고정된 진리체계가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는 진리이며,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총체적 인간실존의 자기이해 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는 체계적으로 진술해야할 신학의 한쪽 축 곧 ‘기독교진리(복음메시지)’는  성경과 동일시 되거나, 칼빈신학이나 아퀴나스 신학체계처럼 어느 특정시대에 정립되었던 정통신학적 체계와 동일시하는 ‘단순정위의 오류’(the fallacy of simple location)를 범한다. A.N. 화이트헤드, 오영환 옮김, 『과정과 실재』, 269-270쪽( 민음사, 1991)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는 말과 같은 것인데,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이라고  오해한 근대철학의 실체-속성의 이원론적 인식론을 비판한데서 나온 것이다. 궁극적인 단위존재가 다른 존재와의 본질적 연관없이 자기동일성을 갖는다는 근대과학의 오류도 같은 범주의 오류이다. 문창옥 책임연구, 『화이트헤드 철학읽기』, 109-110쪽 참조. (동과서, 2005)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에서 보면  ‘단순정위의 오류’란 생성과 형성중에서만 존재하는 창발적 실재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추상화 시켜버리는 사고의 오류를 말한다. 기독교 복음진리의 영원성이란 것도 항상 관계적이고 상황적이며 해석자 삶의 사건 맥락 안에서만 진리로서 인지되고 생명력을 가지는 것인데, 정통교리체계나 신학체계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보수신학은 항상 신학적 의미에서 ‘단순정위의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신앙적 인식과 체험의 해석학적 과정은 완전 무시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한다.

2.2. 성경축자무오류설이 극복되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 교회의 성장이후시대에, 교회가 전하는 복음선포가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한국인들의 삶의 의미연관구조 속에서 창조적 생명의 떡과 생수로서 기능토록 하기 위하여, 신학자와 설교자는 인간의 정신적 삶과 경전이해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해석학적 과정’을 깊이있고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물론 교회의 강단과 신학교의 교단에서 전하고 논의하는 주제가 하나님․그리스도안에서 계시 ․ 성령의 은혜와 역사하심․은총의 선물등등 초월적 진리와 관려된 실재체험이기 때문에, 단순히 인문학 일반의 해석학적 작업진행 처럼 ‘문서로 고정되어 있는 텍스트를 정신적 이해작업’을 통해서 텍스트의 원저자가 말하려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면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가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째, 초월적 실재의 체험도 인간의 이해가 이뤄지는 해석학적 수면과 접촉할 순간엔 ‘계시적 진리의 빛이 굴절된다’는 원리를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과 신앙의 규범이며 원천인 경전으로서 성경자체는 ‘복음 그 자체’ 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생한 생명의 구원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렌즈’이며 ‘세크라멘트’(sacrament)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갱신은 경전과 정통신학체계 및 교리를 절대화시키는 우상화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렌즈비유는 해석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이해과정을 설명하는데 장점을 갖고 있다. 발제자는 신학작업과 복음선교 과정이 현미경을 통해서 그 표본실재를 명료하게 파악하려는  대물렌즈와 대안렌즈라는 두 개의 렌즈를 통하는 광학적 작용으로 상징된다고 말하겠다. 현미경은 상식적으로 크게 세가지종류로 대별된다. 첫째는 돋보기나 시계수리공이 사용하는 단안경이다. 둘째는 여기에서 은유로서 사용하려는 복합현미경이다. 셋째는 광원으로서 태양광선을   이용하지 않고 파장이 매우짧은 전자파를 이용하는 현미경이다.
  복합현미경의 구조는 대상물 표본물체를 확대하여 명료하게 보려고 이중적 광학장치 곧 대물(對物)렌즈와 대안(對眼)렌즈의 초점을 움직이면서 표본물의 상을 명료하게 확대해보려는 광학장치로서 구성된다. 부수장치로서 집광(集光)렌즈나 조명장치가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광원은 햇빛이다. 복합현미경에의 핵심기능은 대물렌즈에 의해서 만들어진  일차상(一次像)을 더욱 확대하여 표본물의 해상도가 수만배 뛰어난 상(像)을 얻자는데 있다.  복합만원경 은유로서  신학적 해석학이론을 알기쉽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상물 표본은 ‘복음 그 자체’이다. 대물렌즈는 성경에 해당한다.  성경자체가 대상표본 이 아니고 대상표본인 ‘복음’을 명료하게 보려고 노력한 일차적 렌즈 곧 ‘대물렌즈’라고 이해해야  한다. 집광렌즈나 반사경등 조명장치는 18세기 이후부터 발달한 비판적 성경연구방법들이다. 역사비평, 문서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전승비평 등등 신학교육기관 세미나실에서 수없이 많이 들먹거리는 비판적 성경방법론들은 ‘복음자체’도 아니고 일차적 ‘대물렌즈’도 아니고 기껒해야 집광렌즈나 조명장치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복합현미경구조에서  중요한 이차적 렌즈인 대안렌즈를 은유적으로 말하면 해석자의 ‘상황’이다 . ‘상황’은 단순히 정치경제적 ․ 역사문화적인 객관적 조건들의 종합이거나 그 맥락이 아니고 그것들 안에서 형성된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자의 실존적 자기이해 곧 ‘해석자의 선이해(先理解)’이다.
  대물렌즈와 대안렌즈를 거쳐 다소 해상도가 뚜렷하게 증폭되었다고 해서 ‘사물을 보고 이해했다’는 과정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증폭된 빛의 상(像)은 망막에 거꾸로 나타난 후, 시신경과 두뇌신경회로 안에서 복잡한 전자기적․생화학적 전환과정과 이전에 경험된 정보데이터들의 비교검증을 거쳐 ‘대상표본을 파악했다’라는 인식작업이 완료된다.  
  시신경체계와 두뇌구조 안에서 이뤄지는 뇌과학적 설명들은 현단계로서 아직 기초단계에 불과하며 완전한 경험과학적 설명이 사실 불가능하겠지만, 신학적 은유로서 우리는 그 단계를 ‘성령의 내적조명(內的照明)’ 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적 삶의 기억․예견․이해․창조적 영감이 뇌과학자들이 전제하는 분자수준의 물질적 환원주의로서 그 신비의 정체가 모두 해명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뇌과학이 아직 덜 발달되어서가 아니라, 뇌과학이 건드리지 못하는 차원이 다른 생명적 실재가 관계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 정신적 삶의 ‘이해과정’이라는 해석학적 과정을 물리적 광학기계인  현미경에 비유하다보니까 본론에서 많이 이탈되었다. 다시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지금까지 위에서 말하려는  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후의 한국 기독교와 한국신학이 성경을 이해하고 증언하려 할 때, 해석학적 과정에 대한 정직한 수용을 통하고, 특히 대물렌즈․조명보조장치․대안렌즈의 기능과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자는 것이다.
  근대 성경비판적 연구방법을 이단시하고 성경영감설을 강조한 한국 보수신학계와 교회강단은 비유컨데 ‘대물렌즈’만을 가지고 만든 돋보기나 시계수리공이 쓰는 단안경(單眼鏡)이다. 이런 단계에서는 성경자체 또한 렌즈라는 고차적 은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성경말씀 자체가 주는 위대한 변화의 능력, 영적감화, 풍부한 초월적 영감능력에 도취하여 교인들을 영원히 단안경만 착용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이미  교회밖의 세상의 자녀들이 복합만원경을 자유시장에서 구입해 가지고 와서, 해상도가 월등하게 뛰어난 표본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단안경만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해석하는 기존교회의 설교와 신학을 계몽시대 이전시대를 살고있는 문화퇴행적 종교집단의 행태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자의 자녀들이며 포스트모던니즘 물결에서 자유롭게 수영한다고 자부하는 일부 진보적 신학주류에 속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복합만원경 은유에서 언급했던 집광렌즈와 조명보조장치의 정교함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들은 아무리 정교한 복합만원경일지라도  광학기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상표본을 바르고 명료하게 파악하려는 기구이며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집광렌즈나 조명보조장치를 사용하는 목적자체를 망각한 실험실이나 해부학실의 인턴이나 레지던트들과 같은 형국이다. 그들은 의학수련의 과정에서 시체해부 시간에 인체를 조작조각 해부해보듯이 성경을 해부하는 단계에 그치고 만다. 해부학 연구실습 목적이 의사가 되었을 때, 병실로 걸어서 들어오는 살아있는 사람은 치유하려는 목적임을 망각한다. 진보적 신학자들의 성경강해가 학문적일는지 모르지만, 옛사람을 새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영감과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
  한국 기독교의 보수적 캠프나 진보적 캠프가 공통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왔던 분야가  복합만원경 비유에서 언급한 ‘대안렌즈’의 해석학적 기능에 관한 깨달음 이다. 그 기능은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등 감리교 교단의 진보적 일부 신학자들과 제도적 교회밖의  자생적 기독교 사상가들(유영모, 함석헌, 김흥호,이정용)을 통해서 면면히 이어가는 토착화신학․문화신학․동아시아 신학의 흐름이다. 이러한 방외신학의 흐름들 속에서, 대안렌즈의 기능을 해석학적 이해이론으로 정리해낸 신학이 유동식의 풍류신학이다.
  ‘풍류신학’이라는 명칭으로 회자되는 유동식의 문화신학 혹은 토착화신학의 공헌은 두가지이다. 그 한가지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적 구조를 풍류도 영성으로서 밝혀낸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문화신학의 방법론 측면에서 기존의 리챠드 니버의 ‘문화변혁설’이나 ‘포용주의’ 이론 속에 은폐된 서구 기독교 우월의식을 다 털어내 버리고, 복음과 문화 또는 복음과 상황과의 관계를 ‘텍스트와 텍스트’ 혹은 ‘주체와 주체’의 상호대등한 관계로서 해석학적 자리매김을 분명히 정립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체적 문화신학의 열매들은 2000년도 이후 급증하는 추세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예들면 이정배의 논문 ‘다석학파의 기독교이해와 한국문화신학의 모색’  이정배, 「다석학파의 기독교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다석사상연구회주관, 미간행논문.(2007년 3월 12일, 성천문화회관에서 발표)
이 보여주듯이, 길희성,김흡영, 이정배, 박재순,이은선등 많은 한국의 신학자들의 활발한 연구업적물들은 이 분야의 연구미래를 밝게 보도록 해준다. 2000년이후 한국문화신학 분야에서 발행된 단행본들을 몇가지 열거한다.
  김흡영, 『道의 신학 』,(다산글방, 2000); 이정배,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연구』,(대한 기독교서회, 2003);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다산글방,2003); 길희성, 『보살예수: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현암사, 2004); 박재순, 『한국 생명신학의 모색』,(한국신학연구소, 2000); 허호익, 『단군신화와 기독교』,(대한 기독교서회, 2003); 최인식, 『예수와 문화』, (예영컴뮤니케이션, 2007); 한국문화신학회, 『종교문화와 그리스도교』,(한들출판, 1996);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삼인출판, 2002); 김흥호 & 이정배 편, 『다석유영모와 동양사상과 신학』,(솔, 2002); 오정숙,『다석 유영모의 한국적 신학』,(미스바, 2005); 이기상, 『우리말 철학』,(지식산업사, 2003); 심광섭,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다산글방, 2003); 장왕식,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대한 기독교서회, 2002);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 성공회대 신학연구소, 『대화를 넘어 서로 배움으로』,(맑은 울림, 2003);  변선환아키브 동서신학연구소편, 『변선환신학 새로보기』,(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은선,『유교,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지식산업사,2003); 김용옥, 『기독교성서의 이해』,(통나무,2007); 씨알사상연구회편, 『씨알․생명․평화』,(한길사,2007)
서구신학의 훈련을 탄탄하게 받은 한국의 학자들이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유교, 기독교와 무교의 상호비교연구의 대화단계를 넘어서, 한국적 생명신학․풍류신학과 율려사상․미학적 신학․기철학적 한국신학모색과 한글신학연구등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2000년 이후 21세기 한국문화신학의 신학방법론이 제1세계신학의 ‘텍스트에서 컨텍스트에로’이던지, 제3세계 상황적 신학의 ‘컨텍스트에서 텍스트에로’를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극복하고, ‘텍스트와 텍스트의 공주체적 만남’을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20세기 후반기를 지배했던  리챠드 니버류의 ‘씨앗과 토양’의 관계모델인  ‘문화변혁론’이나 제2차바티칸 공의회 선교신학의 기본로선인 ‘포용주의’ 입장을  넘어서서,  생명체와 생명체가 만나는 ‘접목모델’에로 패러다임전환을 이룸으로서, 본격적인 해석학적 한국신학형성단계로 진입했다는 표징인 것이다. 이러한 선교신학적 모델의 패러다임전환 과정에서 유동식의 풍류신학은 하나의 획기적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에 유동식 신학의 한국신학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체현(體現) 해가는 성례전적 신앙공동체

3.1. 예수의 ‘존재와 행위’의 세가지 양태: 영의 사람, 지혜의 교사, 사회적 예언자

  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의 바람직한 형태변화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시공속에서 끊임없이 체현해가는 성례전적 공동체가 되도록 자신을 총체적으로 변모해가는 길에 달렸다. 다시 쉽게 말하면, 신앙공동체로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존재양태중 어느 한가지만 강조하여 불완전하고 왜곡된 모습을 드러내는 지난 30년 모습을 반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현(體現)해 내는 성례전적 실재(the sacramental reality)가 되는 일에 달려있다.  
  종교에 대한 ‘문화교차적 연구’(cross-cultural study)를 시도하는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제시하는 5가지 예수상(gestalt of Jesus)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파편화 되어있는 교회 모습을 통전적 모습으로 전환시켜 바람직한 성장 이후시대의 교회상을 체현해가는데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마커스 보그는  다섯가지 예수상으로서 영의 사람(Spirit person), 치병자(healer), 지혜의 교사(wisdom teacher), 사회적 예언자(social prophet), 그리고 운동의 창시자(movement founder)로서 예수를 제시하였다. 마커스 보그 & N. 톰 라이트 공저, 김준우역, 『예수의 의미』, 104쪽,(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위에서 M. 보그가 제시한 유대인 신비가로서 예수상은 결국 ‘역사적 예수’의 존재와 행위를 규정한 것인데, 보그 자신이 제시한 것처럼 다섯가지 모습을 세가지로 압축하여 영의 차원, 지혜의 차원, 사회정치적 차원의 예수상으로 총괄 할 수 있다. 세가지 예수의 모습은 빛을 통과시키는 광학실험도구 삼면분광기 프리즘에 비유할 수 있다. 삼면분광기 프리즘은 반드시 세면으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어느 한면만을 강조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서 교회 모습을 통해서 ‘진리와 은혜와 생명의 빛 자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체현해 낼 수 없다.   
  첫째면은 영의 차원으로서 예수상인데, 예수는 부활하신 이후에만 아니라, 땅위 역사 안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실때도 그는 영의 사람이었고 병자를 치유하는 초능력의 사람이었다. 예수는 현대 계몽된 지식인 크리스챤과는 달리 하나님에 관한 ‘정통적 신론’을 가르치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을 ‘체험적 실재’(the experiential Reality)로서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동역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는 증언은 부활절 이후교회의 증언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예수자신의 자기증언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한량없이 부어져서 예수는 ‘영의 능력’(the power of Spirit)과 ‘영의 권위’(the authority of Spirit)를 가지고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그러한 영적 현존 안에서 그의 ‘존재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화시켰다.  
 둘째면은 지혜의 교사로서 예수의 존재와 행위의 드러남이다. 예수의 ‘존재와 행위’는 서기관이나 바리세파 사람들, 그리고 전통적 율법학자들의 지혜와는 어딘가 달랐다. 인습적 지혜와 전통적 율법해석과는 전혀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경전말씀의 본래의미를 드러내거나, 심지어 옛경전의 말씀의 문구를 바꾸거나 폐기처분하고 새롭게 진리를 천명 함으로써 청중을 놀라게 했다(마5:21-48). 고향회당에서 가르치심에 민중이 놀라 이르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13:54, 막6:2)라고 탄성을 발했다.
  예수는 지혜의 화신체라 일컬을 만큼 놀라운 지혜가 그의 경구(aphorism)와 비유들(parables)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예수의 지혜의 원천은 축적된 전통으로서 인습적 지혜라기보다는 영의 사람으로서 창조세계의 본래적 목적과 질서를 환히 꿰뚫어보는데서 나온다. 율법의 원래 근본정신을 밝혀내었다. 타성․관습․덧붙인 권위․인위적 존재위계질서를 깨트리고, 지혜(소피아)의 본질적 속성을 신적 속성인 자비(compassion)와 맞닿게 하였다. 예수의 지혜는 율법이 변질되어 하나님의 품과 창조의 중심에서 살지못하도록 하고 도리혀 “움켜쥐고, 통제하고, 지시하고, 소유하고, 집착 함으로써” 매튜 폭스, 김순현역,『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77쪽,(분도출판사, 2006)
창조의 선함과 축제를 즐기지 못하게하는 ‘무명(無明)의 백태(白苔)’  시인 具常의 시, 「말씀의 실상」첫연에 나오는 구절: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를 걷어치워 사물을 바르게 보도록 했다.
  셋째면은 예수의 사회적 예언자로서의 상(像)이다. 예수의 ‘존재와 행위’를 규정하고 드러내는 세가지 형태 중에서, 예언자 전통의 영성을 골수로 이어받고 완성시키는 모습이야 말로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별시켜 그 특유성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다. 기독교는 구약 헤브라이즘의 등뼈라 할수 있는 예언자종교의 완성태이다.  고대나 현대나 인간 삶의 지배체제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힘과 문화종교적 이념들의 야합과 결탁으로 특징지어진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된 근본이유도 단순히 귀신을 쫒아내는 영적활동이나, 지혜의 교사로서 활동 때문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숙정사건’과 로마 가이사의 정치철학 및 그 권력구조를 위태롭게한다는 고발조치에 따른 ‘저항적 동행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권력․금력․궁정신학(rotal theology)이 결탁한 우상에 대한 폭로와 그 해체운동이  발생한다. 기독교 복음은 해방의 복음이요, 자유와 평등이 입맞추는 ‘하나님나라의 대망’운동이다.

3.2.  ‘그리스도의 몸’의 통전성 구현의 실패와  교파적 게토화

오늘 우리의 담론주제인  ‘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위’의 세가지 상을 대응시켜 고찰해보자.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군사혁명으로 시작된 한국 사회의 도시화,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기독교는 세가지 범주별 특색을 나타내면서 1990년대 중반기까지 발전해갔다. 첫째응답의 형태를  ‘사도행전-계시록 중심의 성령적 교회운동’이라 부르기로 한다.   둘째응답 형태를 ‘마태복음-로마서 중심의 성경적 교회운동’이라 부르기로 한다. 셋째응답 형태를 ‘마가복음-야고보서 중심의 사회적 교회운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세가지 유형의 교회운동은 각각 순서대로 ‘영의 사람 예수’, ‘지혜의 사람 예수’, 그리고 ‘사회적 예언자 예수’ 이미지를 대변한다.  

3.2.1. 사도행전-계시록중심의 성령적 교회운동의 빛과 그림자
  첫째응답인 ‘사도행전-계시록 중심의 성령적 교회운동’은, 종교사회학적으로 볼때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급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이 유형의 교회성장이 종교사회학적 이유로서 다 설명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영적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들의 헌신과 노력, 그리고 성령의 시대경륜을 부정하지 않는다. 첫째응답형태의 교회는 해당교회 신도들에게 영적종교로서 기독교가 지닌 역동성․ 집중성․ 자발성 ․동질적 결속성을 부여해주었고, 지난 한세기동안 기독교의 교세증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사회계층의 재편과 사회조직의 재구성과정에서 휘몰아닥치는 냉혹한 도시화의 익명성 및 경쟁사회 속에서 영혼의 자기정체성을 담보해주고,  ‘역사적 시련’을 돌파해갈 수 있는 권능의 신학, 능력의 메시지가 요청되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여 발전한 교회운동이 ‘순복음교회’운동으로서 대표되는 성령운동이요, 각종형태의 부흥회 기질의 대형 은사집회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교회운동은 앞서 살핀 예수의 ‘존재와 행위’를 나타내는 세가지 통전적 상 가운데서 특별히 ‘영의 사람 예수’에 일차적 관심을 가진 기독교 운동이었다. 귀신들린자와 병자의 치유, 각종은사에서 나타난 초자연적 기적, 그리고 영혼․몸․사업이 함께 축복받는 ‘삼박자 축복’이 일반대중 신도들의 호흥을 받게되었다.
  첫째유형의 교회에서 사도행전시대는 아직도 한국사회와 세계사 속에서 생생하게 진행형이었다.  이러한 성령운동의 예배와 선교는 ‘힘(능력,권능)지향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교회성장 위주의 선교신학을 주도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를 도리혀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발전계기와 교회의 성장기회로 환영한다. 극단의 부정적 모습으로 퇴행하면 개인 영혼구원중심, 타계적 신앙, 몰역사의식, 전과학적 문자주의 성경관, 반계몽적 신앙(obscurantism) 행태를 노정한다.
  첫째유형의 한국기독교 교회들은 성경을 ‘불을 질르러 온’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혁명적 마그나카르타’ 로서 읽지않고, 정통교리를 확증해주는 오류없는 계시적 영감의 경전으로 강조한다. 성경비평학은 단죄되고, 인간실존의 사회성과 연대성과 문화적 관계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여성중심의 평신도 지도력이 부분적으로 인정되지만, 가부장적 교권권위주의가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지속된다.
  첫째유형 교회들의  결정적 약점은 ‘하나님의 나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자정신이 요구하는 사회적 정의 ․평등과 자유와 박애의 동시적 추구가 외면되거나 신앙의 비정치화명분으로 침묵된다. 그리하여, 정치적 색깔은 항상 보수적 권위정치를 지지하는 종교집단이 되며, ‘역사의 구원론’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구원론’을 기본적으로 설파하면서도 현실적으론 이 세상 안에서 ‘성공과 부귀’를 축복받은 실증적 표징이라고 강조하는 이율배반적 신앙행태를 노정한다.

3.2.2. 마태복음-로마서 중심의 성경적 교회운동의 빛과 그림자
 196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 교회모습의 둘째유형은 ‘마태복음-로마서 중심의 성경적 교회운동’이다. 이 유형교회의 특징으로서 마태복음과 로마서를 상징적으로 명기하는 이유는, 마태복음이 유대적 기독교공동체를 일차적 대상으로 씌여진 복음서로서 ‘율법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한다는 신앙의 성격과 관련된 은유적 표현이다. 로마서를 명기한 것은 로마서의 기조가 ‘율법과 복음’이라는 대칭구조를 전제로하고 특히 구약성전의 속죄제사 완성태로서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유형을 표현하기 위해서 차용된 것이다.
 둘째유형의 교회들은 한기총에 가입한 교회들이나 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한 교단교회들을 막론하고,  가장 광범한 주류교회로서 항상 ‘성경적이요 복음주의적 신앙임’을 강조하는 교회들이다. 나는 이 둘째유형의 교회들은 그 기본신앙이 ‘지혜자로서 예수 상(像)’을 대변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자는 동양적 노자나 싣달다의 지혜가 아니라, 창조시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 참여한 로고스 지혜자요(요1:1-3),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성육체이신 그리스도(고전 1:24)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혜자 예수는 당시 유대인의 경전 율법과 구약성경을 새롭게 해석해주는 분인데, 둘째유형의 설교․목회․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를 불변적 계시경전으로서 ‘성경’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유형의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役事)와 신도의 성화(聖化)를 강조하지만, 첫째유형에 속한 교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가진다. 몬타누스나 요아킴 피오레, 그리고 토마스 뮌쳐가 강조하는 성령론적 기독교신앙이 초래할 무질서와 혁명성을 항상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령론과 성령은사 및 활동을 ‘성경안에서, 성경말씀이 지시하는 복음적 진리 한계 안에서 유효함’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결국  둘째유형의 한국 기독교교회는 종교사회적으로는 사회중산층을 중심으로하고, 사회안정을 추구하며, 십자가 대속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정통교리를 안전망으로 설정하는 중도보수적 신앙행태를 이룬다. 신앙이란 정치이념을 초월하는것임을 강조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사회주의적 정치경제이념을 편견을 가지고 편리한대로 재단한다.
  둘째유형의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예수의 세 번째 상(像)인 ‘사회적 예언자 예수’이미지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교리적으로 완충지대를 만들거나, 정교분리라는 근대서구사회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성취한 ‘종교와 정치’의 성숙한 역할분담이론을 정치적 책임면제의 신학적 교리로 남용한다. 대부분의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에서는 ‘성서비평학’을 가르치지만, 일단 목회현장에 나가면 ‘성서 축자영감론자’로 변신한다. 둘째유형의 한국교회들에서 목회자와 신도들의 항구적 영적 저수지는 물론 성경이다. 성경은 모든 영감과 지혜와 구원지식(영지)를 얻는 보고이다. 그러나, 이 보물창고를 손상시킬 현대성경비평학 연구결과와 진보적 여성신학이나 해방신학․민중신학․문화신학에는 위험경고 딱지를 붙여놓고 접근을 막음으로써, 신학자와 목회자는  교인들을 ‘순수하고 소박한 교인’으로 보호한다는 후견인의식을 은밀히 갖는다.  
  둘째유형의 ‘마태복음-로마서 중심의 성경적 교회’가 한국 개신교의 운동의 무개중심을 잡아가는 중요한 집단임에는 틀림없지만, 둘째유형교회들은 인류 지구촌문화의 문화종교적 지형이 급변하고 있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돌파․창조적 모험․차이와 다름의 축복․생태여성주의의 의미파악능력에서 결정적 취약성을 노정시키고 있다.

3.2.3. 마가복음-야고보서 중심의 사회적 교회운동의 빛과 그림자
 지난 40년동안 한국 기독교 운동의 세 번째 유형은 ‘마가복음-야고보서 중심의 사회적 교회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 사회참여의 교회들 입장을 나타내는 기호표식이다. 마가복음은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강조하는 마가복음서가 내장하는 갈릴리 민중들의 예수복음운동의 전승모체를 강조한데서 따온 것이다. 안병무, 『민중신학을 말한다』, 안병무전집 제2권; 『갈릴래아의 예수』, 전집제3권; (한길사,1992)
야고보서를 명기하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복음이해에서 바울신학의 칭의론적 대속신앙과 요한신학의 로고스론적 영지적 신학과 대비되어 가난한자들에 대한 깊은관심과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영성은 신약성경 종교로 하여금 헬레니즘의 정신풍토속에 해체당하지 않고 히브리적 경건신앙에 붙잡아 놓는 안전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약 1:27).
  민중신학 제3세대를 대표하는 김진호는 ‘안병무 해석학 시론’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클로스론은 은폐된 고통의 체계에 관한 민중신학적인 비판적 인식론을 이론화하는 안병무의 중요한 비판담론적 틀이다. ‘살림’개념은 오크로스론을, 민주화 이후의 사회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되도록 재활성화하는 매개라고 할 수 있다” 김진호, “안병무 해석학 시론”, 미간행논문. 한국문화신학회 2006년 가을학술대회 발표논문(2006.11.17. 감신 웨슬리 채플)
 
 한국 교회의 세 번째 유형인 ‘마가복음-야고보서 중심의 사회적 교회운동’의 역사는 1970년대 민중신학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국 교회사 초기시절, 북간도 한인기독교운동들 즉 김약연을 중심으로한 명동촌 한인기독교 뿌리에서 돋아난 자생적 사회구원론적 교회운동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서굉일․김재홍 공저, 『규암 김약연 선생』,(고려글방, 1997); 문영금․문영미 공저,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북간도 독립운동과 기독교운동사』,(삼인,2006); 한신대신학연구소, 『한국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연구』45-94쪽, 김주한의논문 「북간도지역의 기독교 민족운동 연구」참조,(한국신학연구소, 2005)
. 3.1만세운동과 중국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국내 기독교 집단은 관서지방의 남강 이승훈․조만식 중심세력과 명동촌 김약연중심의 북간도 민족기독교세력의 역할이 컸다. 그 두 기독교 민족사회운동의 저수지에서 1960-80년대 한국의 기독교사회참여 운동의  두 기둥 함석헌․김재준이 등장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사실 안병무․ 문익환으로 대표되는 민중신학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이 북간도 기독교의 사회역사참여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음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한국교회의 세 번째 유형의 신앙의 원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영성에 뿌리를 둔 것이며, 그것은 신구약성경의 모태라 할수 있는 헤브라이즘의 영성과 역사의식에 뿌리를 두고있는 것이다. 야훼신앙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자유․정의․평등․평화가 함께 숨쉬는 계약공동체 실현을 요구했던 것이다. 가난한자들과 눌린자들에 대한 야훼하나님의 일차적 배려는 기독교신앙으로 하여금, 역사로부터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한, 역사의 구원신앙’을  세계정신사 속에 수혈시켰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인간 공동체의 정치적-사회적 구원문제를 모른체 할 수 없게 추동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한편으로 경제성장이라는 산업화과정을 최단 기간안에 완결하면서도, 정치적 민주화운동을 동시에 추동하여 근대적 시민사회의 실현을 가능케하였던 무수한 시민계층․노동자․예술지식인․언론인․종교인들의 공동노력으로써 쟁취하였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사회구원을 주장하던 역사참여적 기독교 진보세력은 ‘민주화․인간존엄성 쟁취운동의 핵심세력’으로서 역할했다는 사실은 법정재판 기록문서들과 사회운동사들이 증언하는 객관적 사실인 것이다.
  셋째유형의 한국교회운동은 양적으로 다수는 아니다. 민중교회들은 아직도 소수자이며, 오늘날에는 도시빈민교회 운동․외국인 노동자 인권운동․농어촌 생명평화운동․생태여성신학운동․북한동포돕기운동 등등으로  다양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세 번째유형의 교회운동은, 민중신학이 태동하고 발전하던 사회적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운동과 동시에 출현한 민중교회들은 1990년대를 분기점으로하여 새로운 형태변화를 진행중이다. 한마디로 민중교회의 교회론을 재검토하고 ‘그리스도 몸으로서 민중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민중의 일상성과 영성에 주목하며, ‘민중교회연대’를 ‘생명선교연대’로 바꾸어가면서 민중-생명-평화-통일을 유기체적으로 통전시켜 파악하고 있다. 기장선교교육원 설립30주년기념 심포지엄, ‘민중신학교회론’ 자료집(기장총회,2006.4) 참조


  셋째유형의 교회운동이 결여하는 점은 종교성과 사회성, 영성과 노동운동, 교회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속에서 기독교신앙의 자기정체성을 지켜내는 일이다. 첫째유형의 한국교회운동이 셋째유형의 교회운동을 정치운동이라고 비난했던 것처럼, 역으로 후자는 전자를 비난하는 상호매도의 적대의식속에서 지내온것도 지금쯤은 뒤돌아봐야 할 일이다.
  교회의 하나님나라를 앞당기는 복음운동이 ‘그리스도의 몸’을 체현하는 일과 직결된 것이라면,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와 행위’는 영의 사람 예수 ․지혜자 예수 ․예언자 예수의 이미지가 통전된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이라는 역저를 저술한 한국 원로 기독교윤리학자 고범서는  그 책의 결론부분에서 한국 기독교에게 남겨주는 선의의 충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첫째, 기독교 신앙이 사용하는 경전이나  교리의 어휘와 상징들이 초월적(초역사적)궁극적 진리를 전달하는 것임을 철학적 지성과 과학적 지성에 설득하여야 한다. 만약  성경문자주의에 의거한 독단주의를 계속주장하면, 한국 기독교는 비과학적  문자주의(literalism)와 반계몽주의(obscurantism)에 빠질 것이다. 둘째, 개인의 삶이 집단적 사회적 삶과 불가분리적 관계속에서 영위됨을 보다 심층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만약  경건한 개인의 신앙과 삶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선과 특권도 불의한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에 의해서 주어질수 있다는 사회구조적 진실을 외면하면, 기독교인들은 자기기만과 도덕적 위선에 빠지게 될 것이다. 셋째,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이  사회적 정의와 사랑을 주장하기만 하면 쉽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유토피아니즘은  무책임하고 오용될 수 있다. 인간 이성과 의지는 언제나 부패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참회․거듭남․용서의 덕목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겸비한 윤리적 자세가 중요하다. 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끝맺는말 부분참조.882-925 쪽,(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4. 신학내의 통섭, 신학과 타학문분야와의 통섭

4.1. 학문및 전공분야간의 담장 허물기로서 통섭의 바람

  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의 나갈 길을 모색하는 마지막 소주제는 ‘통섭’이다. 최근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고 책제목을 번역한 역자의 변을  들어보면, 통섭(統攝, consilience)은 라틴어 ‘consiliere'에서 유래한데 ‘con'(with, 함께)과 ’salire'(to leap, 뛰어넘다)의 합성어로서 결국 ‘더불어 넘다들다’(jumping together)는 의미를 갖는다. 에드워드 윌슨 저, 최재천․장대익 옮김, 『통섭: 지식의 대통합』, 10-11쪽,(사이언스 북, 2005). 통섭(consilience)은 일치, 통전, 통합이라는 단어보다는 각각의 학문분과가 지닌 특징을 견지하면서도 실재(진리)를 탐구하는 동일한 목적과 탐구과정으로서 서로 학제간의 연구결과를 ‘서로 넘나들면서 총체적 이해를 도모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한다.
 
  17세기 계몽시대 이후로 학문발달은 전문화의 길을 걸으면서, 환원주의(reductionism) 학문방법에 의해서 커다란 지식의 질량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지식의 전문화는 자연과학분야에서 더욱 심화되었고, 그 여파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쳐, 실재(진리) 이해는 파편화되고 특정시각에 고착되어 그 피혜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부터 모든 학문분야에 통합(integration)의 바람이 불게된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이 여러장르에서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감안 할 때, 기독교신학분야에서 전문영역간의 통섭노력이나, 신학과 인접학문간의 학제간 통섭노력은 매우 뒤떨어져 있다고 본다. 우선  현재 한국 신학교육기관에서 전문신학영역은 성서고고학,  신약신학, 구약신학, 교회사, 사상사, 조직신학, 문화신학, 기독교윤리학, 예배학, 설교학, 목회상담학, 종교음악과 예술학 등등으로 세분화되어 각각의 전문영역에 담을 쌓고 소통이 되지 않고 있으며, 신학의 유기체적 성격은 훼손된지 오래인데 ‘아카데미즘의 전문지식’이라는 명분아래 타분야 학자들이 자기전공영역을 언급하면 매우 언짢게 생각하는 경향이 대분분일 것이다.
 신학분야에서 또하나 문제는 교회사 전개과정에서 파생된 교파신학들의 게토화이다.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언급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칼빈신학, 웨슬레신학, 루터신학, 가톨릭신학, 오순절신학, 각각 교파의 교파신학 이외의 에큐메니칼 신학형성에 아주 소극적이다. 교파신학교는 필수 선택과목의 커리큐럼 작성자체가 교파신학 중심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세계는 지구촌화 되면서 종교간의 대화가 피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분자생물학등 자연과학의 도전이 인간의 본성과 구원문제에 관하여 그 나름대로 물질주의적 환원론에 입각한 실재관에서, 그동안 신학이 중요 주제로 삼았던 인간의 본성과 운명, 죄의식과 구원,  도덕의식과 자기초월의 거룩체험, 기억․예견․영감․텔레파시등 정신현상에 대하여까지 언급한다.  최근 시내 서점에 진열된 ‘지식의 통합’에 관려된 저서들중,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철학과 종교 및 과학분야,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가 눈에 띈다. 켄 윌버지음, 조효남옮김, 『감각과 영혼의 만남』,(범양사,1998); 동일저자와 역자, 『모든것의 역사』,(대원출판, 2004); 데이비드 봄, 전일동 옮김,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태두리: 전체와 내포질서』,(민음사, 1991) ; 제랄드 슈레더, 이정배역,『신의 과학:과학과 히브리 창조론의 조화』,(범양출판사,2000) ; 하이젠베르그, 구승희역,『물리학과 철학』,(온누리, 1993) ;테드 피터스 엮음, 김흡영외공역,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동연, 2002) ; 이언 바버, 이철우 옮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김영사, 2000) ; 장회익 지음, 『삶과 온 생명: 새 과학문화의 모색』,(솔, 1998) ; 김용준 지음,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돌베개, 2005) ; 이정배 지음, 『신학의 생명화, 신학의 영성화』,(대한 기독교서회, 1999) ;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통섭: 지식의 대통합』,(사이언스 북, 2005) ; 도정일․최재천 지음, 『대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만남』,(휴머니스트, 2007)
  

  한마디로 유전자에서 문화까지, 과학은 윤리와 종교와 예술의 영역까지 통섭을 시도한다. 그런데도 미래 한국 교회를 이끌고 나갈 젊은 목회자 후보생들은, 그들의 신학적 사고와 총체적 비젼능력을 결정적으로 제약하는 영양가없는 교파신학의 편식만을 강요받는 형국이다. 신학계의 커리큐럼 작성과, 각 교파신학의 학부 및 대학원 생들의 학점교류, 타신학교 교수교류와 초청특강, 교수석좌제 개발, 대학원 공동세미나운영등 파격적인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4.2. 신학분야에서 통섭을 선도하는 바람직한 모색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 신학계에서 지구촌의 사회문화적 기상변화에 응답하는 학문적 활동중, 특히 ‘통섭적 신학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신학써클 그룹으로서 세가지가  두드러진다. 그 신학 써클들은 문화신학영역, 민중신학과 생태여성신학이 합류한 생명신학 영역, 그리고 과학신학영역이다.

 4.2.1. 문화신학
  첫째, 문화신학 분야에서는 본격적인 한국신학 형성 및 동아시아 문화토양에서의 기독교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모색운동을 나타내 보인다. 주로 동양철학과 기독교신학의 통섭 및 예술과 신학과의 통섭, 그리고 한국인의 생명사상과 신학의 조우를 들 수 있다. 우선 유학과 기독교 신학과의 본격적 만남이 시작되고 있다.
 김흡영은 양명학적 인간심성론과 칼 바르트의 신학적 성화론을 회통시키고, 우주․신․인간의 삼태극적 비젼을 가지고 서구신학과 대화하며 생태학적 신학형성의 기초로 삼으려 한다.  김흡영, 『道의 신학』,  제2부 ‘신학과 유교의 만남’, 107-230쪽, 제3부 ‘도의 신학모색’, 292-360쪽.
김흥호의 『양명학 공부(1999)』와 이은선의 『유교, 기독교, 그리고 페미니즘』등은 한국 신학계 의 원로 김하태박사가 예견한 대로, 한국신학이 유교와의 깊은 만남을 통하여 일본 종교철학계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화두로 삼아 세계신학계에 공헌한바와 같은 한국 신학계의 몫이라는 것이 현실화되어갈 조짐이 보인다.  이정용의 『易의 신학(1998)』
  기독교와 불교와의 조우도 변선환교수의 선구적 개척단계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심화단계로 나아가는 단서들이 나타난다. 신옥희의 『일심과 실존』, 길희성의 『보살예수』와 『지눌의 선사상』, 이찬수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의 제3부가 눈에 띈다.
  기독교와 예술과의 만남은 앞으로 한국신학의 성숙을 위하여 무궁한 개발의 장르를 지닌다. 이 분야의 개척적 선구자요 문화신학계의 원로 유동식의 최근의 작품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와 『풍류도와 예술신학』은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선구자적 학문열매이다. 이신(李信)의 초현실주의 예술신학과 김지하의 율려사상에 대한 이정배의 신학적 대화, 그리고 미학적 신학의 출현을 갈망하는 심광섭의 몸짓등이 돋보인다. 심광섭,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제14장 참조,(다산글방, 2003)
   음악세계와 신학과의 대화로서 칼 바르트저,이종한 옮김,『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분도출판사, 1997) ; 레기날드 링엔바하, 김문환옮김, 『하느님은 음악이시다』,(분도출판사, 1988) 두 소책자는 예술신학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표본적 사례를 제공한다.


4.2.2. 생명신학: 생태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합류
  둘째, 교회성장 이후시대 교회와 신학계의 기대할만한 운동은 여성생태신학과 제3세대 민중신학이 합류하는 생명신학에서 출현할 것으로 기대된다. 생태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이 합류하는 근거는 양자 모두 현대사회의 삶의 구조와 가치체계의 새로운 재구성을 요청하는 변혁의 영성을 공유하면서 기존문명에 대한 총체적 이념비판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판이론의 궁극적 가치는 ‘생명과 평화’라는 것이다. 여성생태신학과 민중신학의 연대성의 근거는 대지- 여성-노동-민중을 억압지배하는 왜곡된 현실세계의 메카니즘을 폭로 고발하고, 더 아나가 변혁시키려는 변혁지향적 신학운동이라는 점에 있다.
 생태학 자체가 생물학, 지질학, 기상학, 사회학등 학제간 연구를 전제로하는 것이지만, 21세기 지구촌의 최대과제인 생태환경의 위기와 생물종 멸종위기 앞에서, 생태여성신학의 연구활동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한국의 생태여성신학의 신예학자 구미정에 의하면, 생태여성신학(ecofeminist theology)은 여성과 자연의 죽음위에 건설된 현대서구문명에 대한  총체적 이념비판이요, 대안제시의 창조적 전위신학이다. 한국교회 환경연구소 엮음,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 77-78쪽,(대한 기독교서회, 2006)
그녀의 역저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 윤리』(한들,2005)는 한국 소장신학자들에 의하여 생태여성신학이 본격적인 중심화두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생태여성신학이야말로, 신학과 타학문과의 통섭없이는 연구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왜냐하면, 생태여성신학운동은 자연생태계 메카니즘에 대한 자연과학적 지식, 전통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념비판철학적 소양, 성서와 전통교의에 대한 비판적 새로운 해석학의 제시, 타종교 영성과의 제휴, 해방신학과 신비신학의 통합등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계의 생명신학은 결국 생태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합류라는 큰강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이정배, 『신학의 생명화, 신학의 영성화』,(대한 기독교서회, 1999)는 성장이후시대 한국 교회와 신학의 핵심화두가 ‘생명과 영성’임을 갈파하는 것이다. ; 박재순, 『한국 생명신학의 모색』,( 한국신학연구소, 2000)


4.2.3. 과학신학
  셋째, 교회성장 이후시대 한국교회와 신학이 관심갖고 연구를 집중해야 할 분야는 과학신학 분야이다. 중세기 시대에 종교가 삶의 전영역을 주도했다면, 현대는 자연과학의 시대이다. 놀라운 자연과학의 발달과 기술공학문명의 기술혁신은 유전자 복재기술과 나노과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뇌과학탐구를 통과하여 우주천체물리학에 이른다. 극소세계와 극대세계를 가로지르면서, 삶의 문제를 효능적으로 해결해 줄뿐만 아니라, 인간의 종교관과 실재관의 근본적 혁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문명사적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계의 지도자 집단의 ‘종교와 과학의 관계설정’은 전근대적인 중세기 수준이거나, 고작해야 뉴톤-데카르트 세계관시대에 풍미했던 근대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이언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제시한 네가지 관계이론 곧 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 중에서, 한국 기독교인들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갈등이론단계와 독립이론단계에 머물고 있다.
  아직도 교회의 설교강단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통섭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이론’ 상태이며, 지식인 교계지도자들 대부분도 ‘독립이론’에 머물고 있다. 알고보면, 20세기 신학의 대가들인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창조론,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론적 비신화이론, 폰 라드나  올부라이트의 구약신학도, 모두 ‘독립이론’의 터전위에서 전개된 신학들인 것이다. 독립이론의 특징은 신학과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 영역은 별개의영역이고, 서로 다른 언어아 기능을 가진 것이므로, 서로 간섭하지도 말고 갈등하지말고, 각각 자기언어로 자기업무만을 충실하게 이행하자는 입장이다. 정신과학과자연과학의 연구대상, 연구방법, 실재의 차원이 전혀다르고 독립적이라는 입장이다.
  21세기 한국 신학계에도 과학신학 영역에서 선구적 활동을 하는 신학자들이 있음을 우리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단행본들도 출간되고 있다. 김균진, 『생태학의 위기와 신학』, (대한 기독교서회, 1991) ; 김흡영,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대한기독교서회, 2006) ; 이정배, 『기독교 자연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5) ; 강성열,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 (대한 기독교서회, 2005)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고, 교회를 떠난 젊은 이들을 다시 교회로 모이게 하기 위해선, 뜨거운 가슴만 가지고서도 아니되고, 감상적 복음성가단의 음악선교를 가지고서도 아니된다. 반드시 21세기 신학은  지성과 감성과 덕성이 함께 융합되는 계몽시대이후의 성숙한 영성을 요청하며, 과학인․신비가․예술인이 함께 호흡 할수 있는 과학신학의 활동이 반드시 요청된다.

5. 나아가는 말

  물론 우리는  성경비판학을 설교강단에서 반복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심청전을 창극으로 공연하는 공연장에 참석하는 관객과 청중은 인당수나 동해바다 용왕님이 픽션이라는 것을 알지만, 심청전의 창극을 감동깊게 듣고 공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문자무오설의 독단을 철저히 극복하되, 21세기 성숙한 교인들은  소위말하는 ‘비판 이후의 소박함’(postcritical naivete)의 상태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성숙함이 요청된다.  마커스 보그 & 톰 라이트, 김준우역, 『예수의 의미』, 370-371쪽.

  신학은 실증론적 사실성(factuality)을 진리(truth)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경험론적 환원주의 과학종교의 폭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신학은 과학적 탐구정신과 연구결과를 항시 경청하되, 신학이 과학에게 늘 말해줘야 할 점은 창조계 총체로서 실재(Reality)는 과학적 범주와 방법론이 파악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신비하고 다차원적이며, 하나님․부활하신 그리스도․성령의 임재가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체험할수 있는 실재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환상이나 추상개념이 아니고 실증적 증거들로서 환원시킬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체험적 실재로서 ‘초월경험’임을 부끄럼 없이 담대하게 증언해야 할 것이다.
  떼이야르 샤르뎅의 ‘과학적 현상학’ 이론에 입각한 그의 진화론적 과정신학에 의하면, 진화과정에서 보이는 ‘의식복잡화 법칙’을 말한다. 확산만 무한히 지속하는 생명의 종(種)은 멸종한다. 확산은 반드시 임계점에서 수렴운동으로 전환한다. 수렴운동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구성소들의 복잡화(complexification)가 증대할수록, 이에 상응하여 의식의 집중화(intensification)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고등동물의 두뇌세포들의 구조와 그 관계성이 더욱 복잡화될수록, 반성적 사고능력과 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은 증대되고 심화된다.
 한국 기독교의 현상황도 그와 같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1970-80년대 맛보았던 양적 급성장을 다시 계속하려는 유혹을 절제하고, 내실화되고 영성적으로 더욱더 영글어 가야 할 때이다. 신학은 그 일을 돕는 봉사의 학문이 되어야 할 것인데, 영의 사람 예수, 지혜자 예수, 예언자 예수 상이 통합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로 거듭나야하고, 신학계는 특히 문화신학․생명신학․과학신학 분야에서 더욱 분발해야 하리라고 본다. [2007. 4.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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