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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사회윤리를 지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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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사회윤리를 지향하여

김 경재(한신대, 신학)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현대 기독교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1960년대를 전환점으로 하여  기독교윤리학계에  큰 영향을 끼쳐왔던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설'이 쇠퇴하고 그대신 '생태학적 사회윤리설'에로 전환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밝히면서  그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음미해보려는 것이다.  최근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 부설 연구기관인  '바람과 물 연구소'는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우리 사회의 생명문화와 보다 효과적인 환경운동의  확대심화를 목적으로  연구한 중간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필자는 그 연구보고서에서 많은점을 시사 받았고 이 글에 그 연구결과를 신학적 시각에서 충분히 평가하고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사회가 사회발전단계로 볼 때, 매우 중층적(重層的) 복합사회이기에,   1930-60년대에 걸쳐 서구사회는 물론이고 한국 지성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라인홀드 니버의 '크리스켠 리얼리즘'의 통찰력과 그 학문이론적 가치가 아직도 우리 사회엔 부분적으로 유효하며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치윤리와 집단간의 윤리의식은  아직도  충분히 근대적 계몽주의 합리성을 습득하지못하여 권위주의와 권력의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독교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종교계의  도덕의식도 보수적 개인윤리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한국 기독교계는  인간사회의 윤리적 변화를 아직도 개인들의 회심과 마음의 정화에 두고 있으며, 집단간의 도덕가치 판단근거를  개인의 심성에 맡겨버리고, 구조악과 사회구조적 책임윤리에 대하여 매우 시대착오적인 접근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한편,  환경문제는 세계가 근대사회로 전환한 이후, 세번째로 직면한 거대한 인류사적  과제요  매우 중층적이고도 복합적 요인이 상승작용하여 발생한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첫번째 직면했던 과제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만인의 평등,자유,박애를 이념으로 내건 자유주의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시민혁명 이었고, 두번째 과제는  노동의 소외와 무산계층이 당면한 비인간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 이념의 실험과 그 극복을 이룬 사회주의 시민혁명 이었다. 그런데 세번째 직면한 과제는  자연환경파괴로 야기된  생명의 위기에서 생명가치를 지키고 인류사회를 생태지향적 사회체계로 재구성해 내야만 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세번째 과제는 인류사회의 어느 특정 사회계층만의 문제이거나, 정치 경제 문화중 어느 하나의 국면에 한정 된 문제가 아니라, 전인류의 생존에 관련되고 전체문명의 존폐가 걸린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환경문제의 발생은 근대 이후 자연과 역사발전에  대한 인류의 세계관, 정치경제적 사회구조와 생산소비 메카니즘, 기술과학의 발달과 그에 의존한 삶의 패턴및 교육과정, 인간본성과  종교적 신념등 다양한 요소들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이다.
  필자는 제2장에서는  현대사상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간-자연-초월자와의 새로운 관계모색에  관한 패러다임 전화의 현황과 그 의미를 고찰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종교철학적 탐구는 생태학적 윤리설의 형이상학적 토대로서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제3장에서  생태사회윤리학의 모색을 지향하는 생태윤리와 사회정책적 전환모색을 파악하고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평가하는 것으로서 결론을 대신 할 것이다.
  
[2]동학사상과 과정신학에서  자연, 인간 ,하느님과의 상호관계

   1860년 수운 최재우(1824-1864)의 종교체험 즉  득도와 포교활동으로 시작된 동학운동은 19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혼동과 종교적 혼미 속에서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원형적 형태가 민중의 한을 승화시키고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여 새로운 세상을 이뤄보자는 희망의  의지를  매체로 하여  지표로 분출된 것이다. 안으로는 봉건사회의 적폐를 척결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몰아내며, 주체적으로는 인간의 종교적 영성을 새롭게 갱신하는 일대 사건이라고 말 할수 있다.
  동학의 종교성과 사회 정치적 운동성의 상호관계는,전자가 동학이라는 독수리의 심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독수리의 두 날개인 것이다. 심장에 해당하는 동학의 종교성을 소홀히 생각하면 동학운동은  19세기 말 조선왕조 해체기에 발생하여 실패로 끝난  민중의 봉기혁명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두 날개에 해당하는 운동의 현실성을 감안하지 않는 동학해석은 종교혼합주의 운동으로 끝난 일종의 종교적 관념론으로 전락한다. 그와 같은 양자의 불가분리성을 전제하고서,우리의 논제는 동학의 핵심주문인  "강령주문" 23자중에서 "시천주"의 분석에 집중하려고 한다.
 "侍天主" 三字는 동학 최재우 종교체험의 핵심이고, 동학을 유뷸선 三敎로부터 구별해주는 핵심적 사상이다. 후일 동학이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손병희등 개화된 천도교 지도그룹에 의하여 "시천주"는 "인내천" 사상으로서 더많이 회자되지만, 본래 최재우가 쓴 동경대전 안에는 "시천주"라는 말이 나올 뿐 "人乃天"이라는 말은 없다. "인내천"이 본래 동학 사상의 "侍天主"에 대한 보다 자각된 종교철학적 표현 임에는 틀림없지만, 발전이라고 보아서는 않된다. 만약 "인내천'의 사상이 "시천주"라는 원체험 위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면, 동학 또는 천도교의 사상은 종교철학적으로 세인들의 보다 넓은 호감을 얻을런지 모르나, 종교적 불씨를 잃어버리는 것이요, 그래서 마침네 동양종교의 거대한 범신론적 파도 속에 휩쓸려 버릴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는 것이다.
  수운의 "시천주"사상이 없다면 동학사상은 수운이   유교로부터 물려받은 氣一元的 存在論과, 노장사상의 仙道的 無爲而化사상과, 불교가 가르치는  萬有同根同體 사상과, 무속적 주술치병 술을 종교혼합적 방법으로 혼합시켜놓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종교적 혼합사상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활화산의 산 에너지가 폭발 할수 없다.  결국 동학이 동학이 되는 관건은 "시천주"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앞으로 미래 천도교의 종교로서의 생명력과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운 최재우가 스스로 해설한 "시천주" 三字에 대한 주석적 설명을 좀더 깊이 음미하기로 하자.    첫째, "모신다"는 말의 첫 의미 "내유신령"(內有神靈)이란  몸으로서의 사람 생명 안에 무궁한 우주 생명력이요  至氣이며 하느님이신 천주를  신령한 능력과 의미로서 현존하는 경험을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추상적으로 두되로서 인지하는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다. 동시에 단순한 감정의 흥분상태이거나 심미적 합일감에서 오는 도취가 아니다. 또한 실천이성의 양심의 소리로서 도덕적 지상명법으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수운의 "시천주"에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의 내주를 사람의 몸으로서의 전체생명을 매개로 하여 직증하는  종교체험 현상을 일컫는다. 몸 전체로 체험하는 전일적 시천주 체험은 지성, 감성, 덕성이 혼연일체가 된 전인적 신체험이다.
    둘째, "모신다"는 말의 둘째 의미  "외유기화"(外有氣化)란 위와 같은 신체험이 신앙인의 주관적 ,내면적 ,개인적 체험으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령한 무궁생명력 곧  至氣의 현존이, 나의  생명체 구체적인 몸의  삼투막을 넘다들면서 우주 만물의 생명활동과 연계되고 창생적 활동 속에 있음을 감지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 생성의 창조적 과정이 우주 자연의 무궁한 생명 창생활동과 단절된 일이 아니라, 그것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고 관련되면서 이뤄지고 있음을 직증한다는 경험이다. 이러한 수운 최재우의 시천주 체험은  기독교인들의 성령체험과 대조된다. 본래적 성령체험은 성령의 주관적 소유화이거나 내면화가 아니라 만물의 샬롬 실현을 위한 열려진 존재에로 인간을 변화시키지만, 왜곡된 성령체험에서는 흔히  영 체험자와 성령간의 은밀한 내면적 개인관게에 그치고 마는 단점을 본다. 이러한 잘못된 성령체험의 내면화,사유화, 종교화, 이원화는 수운의 "시천주"체험에 의해볼 때,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다.
   셋째, "모신다"는 말의 셋째의미는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는 것이다. 이구절의 의미는 다소 불명확하고, 그 해석도 다양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각자 알기를 옮기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무엇을, 또는 어떤 사실을 옮기지 아니한다는 말인가.  야뇌 이돈화의 해석에 의하면, 지극한 우주무궁생명 곧 하느님은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고(無事不涉) 명령하지 않는 일이 없는(無事不命)  절대무궁한 "내재적 초월자"이시고  "초월적 내재자"이신 생명의  현실성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그 무궁한 하느님의 생명법도와 뜻에 위반하고 지낸다는 것 자체가 개개 생명체 스스로의 재앙과 질병과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옮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최동희는 이러한 종교적 경험은 체험자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일종의 종교적 황홀경험이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하여 옮겨 질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설명한다.  혹은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러한 무궁한 생명자체 곧 하나님의 현존은 한개의 국한된 유한자가 아니라, 온 우주를 가득 안밖으로 충만하게 체우고 만물들을 창생해가는 생명자체이기 때문에  공간적 장소이동을 전제로하는 옮긴다는 개념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넷째, "시천주" 三字중   마지막 글자 主라는 글자의 의미는 영원무궁한 생명의 활동자 창생자가 단순한 理法이거나 자연의 法則이거나 우주생성의 原理가 아니라 존경과 경외와 기도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인격적 ,초인격적 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운 최재우는 당시 서학의 천주호칭이 감내해야 하는 이단사설로서의 위험부담을 충분하 감지하면서도, 그는 천주라는 하느님 체험의 한문글자표현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문환은 동북아시아 생명관과 세계관의 근본종지를 본질과 현상, 실체와 기능, 체(體)와 용(用), 일(一)과 다(多), 영원과 시간등 이원론적 일원론, 곧 불이론(不二論)에서 파악한다. 생명이란 끊임없는 창조적 활동 가운데서 만물을 생육하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의 근원자로 본다. 생명원천과 생명활동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우주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무도일 뿐이므로 죽어있는 인과율적 세계가 아니라 온생명이요, 한생명이라고 본다. 곧 만유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며 펼처보이며 그 안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원천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는 '大'(브라흐만, 부처)라고 부르고, 율곡의 "기발이승설"에서는 '理'(無極,太極)라고 부르고, 수운에게 있어서는 "하느님"(天主)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역사적 종교를 따라서 이름을 달리 부르게 된 "궁극적 실재"의 다양한 이름일 뿐이다. '大乘', '理乘','侍天主'라고 말 할 때, "탄다","모신다"는 말은 삼라만유의 현상속에 궁극적 실재가 불가분리적으로, 불가혼동적으로 거기에 현존하고 만유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문환은 생명의 첫번째 특징으로서 "생명은 활동가운데 타고(乘) 있는 것" 곧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강조한다: "원효의 大乘起信, 율곡의 氣發理乘, 수운의 不然其然은 불교, 성리학, 동학이라는 역사사회적 상황에서 전개되었으나, 그 지향하는바는 불이(不二)의 철학이며 세계이다. 세 사상가들은 생명의 궁극 원천은 생명활동의 한 가운데서 타고(乘) 있으며, 통하고 있으며,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각기 다른 개념으로  밝혔다"
  오문환은 생명의 본질적 둘째 특징으로서 "생명은 두루 통한다"(通)는 점을 강조한다. 원효의'歸命', 율곡의 '理通', 수운의 '萬法歸一'이 모두 생명의 본질은 두루 통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세번째로 생명의  특징은 우주적 인드라 망처럼 유기체적 네트웍으로 짜여져 있다고 본다. 불교화엄사상은 말 할 것도 없고, 동양사상 전반이 생명이란 통해있는 전일성, 공시성 속에서 서로 공명할 수 있는 것, 불가분리적으로 순환적 침투관계 안에서 서로 중층적으로 통섭하고 원융회통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동양적 생명관에서 인간을 비롯한 개체 생명은 부분이면서 전체이며, 다수 생명이면서 한 생명이므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역설적 통일성 속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생태학적 정의'란 조화, 균형,아름다움, 평화로 상징되는 생명의 충만상태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질서와 불의와 억압과 황폐화로 전환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창조세계로 다시 복권됨을 의미한다. '생태학적 정의"란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된 자연세계가 물신화되거나 마력화되거나, 반대로 도구적 이성에 의하여  죽은 질료적 천연자원의 창고개념으로 전락된 것을 바르게  잡고 그 본래적 권리를 복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앙이 자연을 탈주술화시킨 것은 옳았지만, 근세 기계론적 세계관과 영합하여 자연을 죽어있는 인과율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지배대상의 물질세계로 물상화한 것은 잘못이었다.
   생태학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전통적 세계관을 자연-신-인간의 상호 혼동되거나 분리됨 없는 순환적 내주와 창조적 영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창조세계의 다양성, 순환성, 역동적 생명충만성을 회복하고 구원사 일변도로 치닫던 전통구원신학의 일방성에 균형과 조화를 가미해야 한다. 구체적인 생태학적 윤리를 지향하는 실천적 행동강령을 제시하면서 자연환경을 되살리는 환경운동의 실천모토를 "가까운 곳에서 부터, 그리고 구체적으로"라는 표어를 강조되어냐 하며 동시에  실천적 교육과정이 요청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학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운 최재재우의 "시천주"사상을 일별하였다. 2세교주 해월 최 시형의 "事人如天", "以天食天","養天主,體天主", "向我設位", "物人神 三敬思想"등등은 모두 시천주 사상을 기초로할 때만 의미를 가질수있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 "한살림운동"을 일으킨 장일순의 생명운동과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모두 동학 시천주와 최시형의 생명외경사상 곧 우주 만물이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종교적 사상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 ,하나님이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과정가운데 있다고 보는 이러한 동학적 실재관과 신관은 과정철학 특히 화잇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많은 통하는 점을 갖는다. 우리는 과정사상에서 자연,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아래에서 일별하기로 한다.  
  알프레드 화잇트헤드(1861-1947)의 과정사상을 유기체철학, 신실재론, 신형이상학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영국의 경험론적인 사유전통 곧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며 경험적인 현실을 중시하는 분석적 경험주의 전통에 서면서도, 존재의 통일성, 전일성, 보편적 이념, 그리고 심미적 직관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20세기 양자물리학적 실재관을 철저히 이해하면서 자연 속에 나타나는 새로움, 창조성, 조화, 아름다움, 그리고 유기체적 관계성이 왜 일어나는 가를 설명하려는 새로운 우주론이자, 자연철학이다.그의 유기체 철학 안에는 구체적 현실재와 추상적 보편자가 통전되며, 대륙의 관념론 전통과 영국의 경험론 전통이 통전된다.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정밀한 합리적 분석과 추론의 사유형태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상상력과 형이상학적 관념실재들이 융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들은 "현실재"(actual entities), "영원한 이데아적 형상"(eternal objects), "창조성"(creativity), "영원한 무한 연장실재"(eternal extensive continum), 그리고 "신"(God)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제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하여 화잇트헤드 과정사상중에서 신과 세게현실과의 관련성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째,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과정사상은 성서가 증언하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역사-문화적 왜곡형태인 "유신론적 초월신"(theistic supernatural god)을 극복하여 실재의 창조적 과정속에서 무수한   "현실재들"을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구체화의 원리"로서 현존하는 신 곧 범재신론(pan-en-theism)을 주장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서구 기독교전통에서 생각하는 통속적인 "유신론적 초월신"은 항상 세계를 초월하여 있고,세계에 맞서 있으며, 세계 위에서 군림하고 명령 심판하는 군주적 이미지를 지니고, 세게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악과 고통으로부터는  초연한 신 곧 헬라철학과 구약 예언자들의 도덕신 개념이 결합된 일종의   종교철학적 산물이라고 본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가 전한 갈릴리 복음에서 보여주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은 로마황제를 닮은 "통치자 황제 이미지"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不動의 動者 이미지"도 아니고, 히브리 예언자들이 강조하는 엄격한 "도덕적 상벌자의 인격화"도 아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신은 모든 창조에 앞서있지 않고,모든 창조와 더불어 있다". 화잇트헤드의 신은 "구체화의 원리", "사랑의 유인자", "새로움과 창조성의 원천"이다.
  둘째,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과정사상에서는 만물은 끊임없는 생성과정이요 창조적 과정 안에 있다. 우주 자연의 과정은 무수한 "현실재"들의 물리적 ,정신적 경험과 의미와 힘들이 보다 고도로 복잡하게 유기체적으로 형성되어가는 "合生"(concrescence)과정이다. 현실세계는 끊임없이 무수한 현실재들(actual entities)이 연계(nexus)를 이루어가면서 합생(concrescence)과정을 반복하면서 보다 발달한 조합적 사회(corporate society)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한 알의 씨앗도 무수한 현실재들의 합생적 조합사회이며, 씨앗이 발아하여 잎과 꽃을 피우면, 잎과 꽃 한 송이도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적 사회이며, 살아있는 나무는  더 큰 하나의 유기체적 사회이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이러한 창조적 합생과정 속에 "구체화의 원리"로서 , "창조적 유인자"로서, 생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창조적 개방성의 가능성으로서 현존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형이상학에 있어서  무수한 "현실재들"이 "연계"를 이루면서 보다 고차적인 "합생"을 이뤄가는 과정으로서 이해하는 실재관은 불교적 실재관의 기본을 이루는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Pratityasamutpada, the theory of co-origination)을 연상케한다. 대승기신론의 논지에 의하면 경험적 인식구조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해 있는 眞如(실재, 본질계,형이상학적 실재)와 生滅(현상, 시공현실세계,형이하학적 실재)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별도로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도 유사한데,  신은 根源的 본성(primordial nature)와 果因的 본성(consequent nature)를 지니며, 그 양자는 구별되되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셋째, 신과 세계와의 상호 공속, 상호 의존관계는 화잇트헤드 신관의 특징을 이루며 동학적 신관과 상응성을 갖는다.화잇트헤드에 있어서 신과 세계와의 관계는 이렇다: 신은 영원하고 세계는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 이라면 ,세계는 영원하고 신은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신은 유일무이하신 하나요 세계는 무수한 多로서 그 특징이 들어난다고 말하는것이 참이라면, 세계는 하나요 신은 多로서 현시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세계는 신 안에 내재 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신은 세계 안에 내재 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듯이,세계는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이다. 요컨데, 화잇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 신과 세게는 二元論的 대립구조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兩極性的 상보구조 관계에 있다.신을 "근원적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영원하며 무시무종하며 무제약적이고 절대 순수한 眞如法體에 해당하지만, 신을 果因的 본성의  측면에서 보면 시간적이고 제한적이고 상대적이고 세계의 새로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희비애락에 참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위대한 동반자"(God is  the great companion)이며,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고난의 동반자"( the fellow-sufferer who understands)라고 화잇트헤드는 말한다.
[3]  생태학적 패러다임 轉機와 크리스챤 생태사회윤리학의 모색
  우리는 지금까지  수운과  화잇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안에서 창조적 과정으로서 세계현실과 생명현실을 살펴 보았다.
  자연계에는 "먹이사슬"이 존재하는데 이는 자연적 질서의 일부이면서 역설적으로 자연의 균형과 조화와 평형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윤리의 정의로움을 생명개체간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의미로서 이해 한다거나 , 인간의 가치와 여타 동식물의 가치가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일 수는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폐쇠적으로  닫힌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수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장회익은 태양과 지구라고 부르는 항성-행성계 구조 속에서 매우 정교한 물리 화학적 여건을 갖추고 그 안에서 다양한 유기체적 전일적 생명을 이루며 생존해가는 "온생명"(global life) 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한 하나의 독립된 생명단위라고 말한다. 다시말하면, 전 지구적 생명체로서 전체 생명,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전일적 생명체가 있을 뿐이며,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은 그 유기체구성 과정에서 비교적 취근에 출현한 "중추신경계"에 해당하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므로 "환경위기"라고 말할 때, 환경이라는 어휘자체가 인간을 제외하고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통레이어서 그러한 환경개념의 인식차원에서는 생태계 위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환경"은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둘러사고 있는 주위 여건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유기적 조직체의 다른 전체부분이기 때문이다.
   "온생명"은 지구역사 45억년중에서 적어도 35억년의 생명시간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적 연관구조 속에 있는 생명체이다. 깨어 있는 참사람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 할수 있다. 인간은 그 35억년 생명진화  끝 점에서 피어난 꽃이다. 단일 개체 생명으로 보면 인간의 생존기한은 80-90년에 불과 하지만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생명은 지난 35억년의 생명의 전역사를 지니며, 앞으로도 몇 억년을 더 생존할수 있는 생명이다. 이러한 "온생명"이 생존할수 있는 절대적 법칙은 유기적 온생명체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는 순환의 원리, 절제의 원리, 분여의 원리이다.
    "순환의 원리"란 대자연계의 에너지 유통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름과 밥이 되어주기 위해서 기꺼이, 유기체로서 생물학적 몸과 사용하는 물질적 재화를  자연의 기본구성 원소에로 환원시키고 다시 순환되는 리듬을  거역하지 않는 삶의 철학이다.
    "절재의 원리"란 무한소유적 욕망, 물질적 정신적 영적  탐욕을 스스로 기꺼이 포기하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재화를 향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성공한 인생의 표식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분여의 원리"란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쪽을 체워주고, 모자라는 것은 함께 나눠 쓰고 공유함으로서 생명의 흐름의 氣가 정지하거나 부패하지 않게하는 원리이다.
  고대에서 구원은 인간의 "덧없음과 무상성"으로부터 구원이며, 不死와 영혼의 영생을  목적으로하는 구원이 갈망 되었다. 중세기는 "악마성과 죄의 심판"으로 부터의 구원이 문제였고, 교회의 사죄권과 축성된 세크라멘트가 죄를 해독시키는 구원의 약이 되었다. 근세는 인간이 만든 사회적 환경의 질곡과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었다. 죄는 곧 "소외"였고 구원은 소외로 부터의 해방 곧 화해가 그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있어서 인간의 죄는 "자연으로 부터의 버림받음"이며, 구원은 창조질서의 회복 이며,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지구생명공동체 전체의 진화와 인간의 정신적 영적 성숙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으로 포괄되는 문제들이 각각 유기적으로 연관된 문제들이라는 인식을 보다 명확히 하는 일이다. 경제적 활동의 생산소비 구조를 "순환의 원리"에로 전환시키는 경재윤리적 행위, 정의로운 재화 분배가 평화롭게 이뤄지는  "분여의 원리" 에 따르는 사회공동체 형성, 그리고  "절재의 원리"에 입각한 삶의 양태자체가 정의 문제, 평화문제, 창조질서보존의 문제로서 서로 맛물려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정의 없이 , 전쟁의 억재와 군비경쟁없이 생태학적 윤리사회 실현은 불가능하다.정치, 군사,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국가안보", "국가경제 지표의 성장", "보다 안락한 과학 기술문화의 향유"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온생명"을 파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늘 논제의 잠정적 결론은  자연, 인간, 하나님의 관계성에 대하여 보다 새로운 발상법의 전화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해월 최시형의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명제를 농업생산적 삶의 양식 속에서 수천년간 살아온 아시아적 민중들이 몸으로 체득한 천주경외의 성례전적 표현이라고 충분히 이해하며, 시천주 사상이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하나님 모시고 있는 존재들로서 존경하여 생명경외 사상의 함양에 탁월한 실재관을 제공한다고 평가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세계와 창조주 하나님을 곧바로 일치시키는 범신론적 오류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창조안에 내재하시고 특히 창조적 과정 안에 내재하시되 "창조의 영"으로서 자유하신 주체적인  해방의 영으로서  피조물 가운데 현존하신다고 고백해 왔다. 그러한 기독교 신관은 탁월한 신관이긴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우주및 생명세계와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유신론적 초월신"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항상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의 "내재적 초월성"과 "칭조적 과정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점 때문에 기독교는  과정신학이 말하려는 우주론적 의미를 항상 깊이 음미 할 필요가 있다. 인간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시대에 강조해야 하는 최고의 윤리적 경건은 "생명세계는 하나로 관련되어 있는 거룩한 유기체이다"는 "한 몸 의식"과, 자연-인간-신이 不相雜/不相離의 관계성 안에서 공속적으로 상호관련되어 있다는 "생명외경"사상과,  무한 탐심을 줄여서 작은것이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말 할 줄 아는 "절제의 윤리"임을 다짐하게 된다.
  장회익의 온생명론적 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온생명 속에서 발생한 인간생명현상을  인간 몸의 유기체 구성요소와 비유적으로 대비하여, 지구 온생명체   전체 속에서 인간이라는 생물종은 온생명의  "중추신경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사실적 상징을 가지고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장회익의 온생명론과 인간현상의 중추신경계 유비론은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이 약 50년전 북경에서 쓴 그의 작품  <인간현상>에서 말하려 했던 논지를 한발 더욱 구체화하고 발전시켜낸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논문의  의미는 모든 생태적 환경윤리 창달을 위해 일하고, 생명가치를 중심으로하는 새로운 문명사회 건설을 꿈꾸는 성숙한 지성인 들에게, 섣부른 범신론적 '가이아(Gaia)' 이론이나 단순한 환경 개량론자들의 기술공학적 접근태도를  넘어서서, 건전한 자연과학적 지성에 기초한 새로운 생명가치관을 정립 할 수있도록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 있다.
 구승회는 생명중심주의 입장에 서서 환경윤리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생명중심주의란 생명을 가진 모든 자연존재에 대해 도덕적으로 배려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며, 그러하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생명현상의 파괴는 도덕적으로 허용되어서는 않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환경윤리는 생명가치를 존중하는 자연관에 기초하여 "환경친화적이고 생태지향적인 규범을 설정하고, 그 가능성과 타당성을 연구하는 규범과학"으로  정의한다.
 구승회는 환경윤리 논의과정에서 대두되는 어려운 문제나 독특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우선 꼼꼼히 보여준다. 예들면, '미래세대에 대한 도덕적 의무', '도덕적 배려의 범위와  인간이외 타존재의 도덕적 지위문제', '생물의 종 상호간의 도덕적 우선순위문제'등이다. 환경윤리 담론은 환경윤리의 정립에 관련된 문제가 결코 단순한 낭만적인  감상적 문제가 아닌 것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구승회는   환경윤리의 담론에서 네가지 입장과 그 각각의 장단점을 소개하고, 생명중심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환경윤리 논의에서 대두되는 네가지 입장이란 인간중심주의, 의식(意識)중심주의, 생명중심주의, 그리고 전체론을 말한다.
 구승회는 인간중심주의 환경윤리는 전통윤리의 부분적 수정에 머물거나 전통윤리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환경관리 윤리' 수준에 머물고 만다고 본다. 인간중심주의 입장은 환경윤리 정립에 있어서 "생태주의적 방법"을 거부하고 전통윤리학의 적용범위를 확대하여 환경위기문제에 대처하고자 하는 매우 소극적이고 부적절한 접근방법이 된다. 우리는  '환경주의적 방법'보다는 '생태주의적 방법'의 입장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하며, 생명중심적 환경윤리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생명중심적 환경윤리를 선택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도덕적 배려의 범위를  확대함은 물론이며 오늘날 생태계위기와 자연환경파괴 시대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는데 보다 적절한 윤리적 근거가 된다 확신하기 때문이다.
   생명가치를 담보하고 환경윤리가 실천 될 수 있는  생태친화적인  대안적 사회의 모습이 무었인가 그 밑그림을 그려보이는 것은 책임적 윤리실천을 위하여 중요하다. 모든 환경운동은 마지막에 실천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보다 생태친화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전체 환경운동가들과 사회구성원들에게 비젼을 제시하는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수복은 그의 연구 논문글 "생명가치와 대안적 사회체계"에서 바로 그런 문제를 추구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체계를 유지하려는 '개발주의 세력'과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를 모색하는 '생태주의 세력'간의 줄다리기 21세기에도 지속되어 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후자를 지지하면서 생태주의적 가치를 원리로하는 대안적 사회체계의 실현을 위한 기본적 구성원리를 탐색해야 한다. 생태윤리학자들은  환경문제를 둘러싼 이념적 갈등의 기본인자로서 노동,자본, 생태중심주의,경제성장제일주의 이상 네가지 사회학적 변수가  어떻게 서로 맞물리면서 연결되느냐에 따라 환경문제 해결의 대안적 입장이 갈라진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환경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다섯가지 담론을 심층생태주의, 생태사회주의, 사회생태론, 지속가능한 개발론, 그리고 환경관리주의로서 범주화 할 수있다.
  정수복은 오늘의 환경문제의 요인이 단순한 한 두가지 원인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세계관, 과학기술문명, 대량생산과 소비체계, 불평등한 국제관계, 국내 정치구조와 인성구조, 교육제도와 교육내용등 다양한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물인 만큼, 단순한 환경정책적 대응만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인류사회의 사회체계를 생태중심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생태론자들은  생태친화적인 대안적 사회구성원칙들을 검토하고 '녹색정치원칙' 이랄 수 있는 공통적 세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그 원칙들은  정치권력의 분권화, 민주적 참여, 그리고 전지구적 관점의 견지라는  총괄개념으로 형상화 하였다.
  생태학적 대안사회의 비젼제시와 그 실천적 의지는 "급진적이지만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현실을 변화 시키려는 의지와 행동으로 이어가는 21세기 새인류뮨명의 신휴메니즘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그 점은 라인홀드 니버의 크리스챤 리얼리즘과 서로 통한다. 왜냐하면 크리스쳔 리얼리즘이란 인간 개개인의  내면적 회심과 도덕적 책임의식의 확장을 통해 사회악을 근절시킬수있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이상주의나, 사회복지정책을 통한 이상사회실현을 낙관하는 진보적 낙관주의나, 인간사회를 근본악으로 규정하고 타계적 구원을 대망하는 몰역사적 타계주의 싱앙을 모두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냉철한 현실분석과 인간의 집단이기심의 냉혹성과 동물성을 직시하고 보다 나은 선을 선택하는 책임적 윤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교 윤리의 최고법은 '사랑의 법'이지만 집단간의 윤리적 계명의 실천은 정의를 실현시킴으로 해서 간접적으로 실천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사회생태론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눈뜨는 생태학적 윤리의식은 라인홀드 니버가 파악했던 집단인간의 비도덕적 이기심을 직시하고 "힘의 균형을 통한 사회적 집단간의  상호견제를 통해, 정의를  매개수단으로하여 사랑을 근사치적으로 실천한다"는  크리스쳔 윤리사상을 극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학 체계는 윤리적 행동을 인간상호간의 책임적 관계문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결코 생태계 전체를 윤리적 행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로서  생각하고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학은 지나치게 "역사화한 자연"만을 알았을 뿐이고. 인간의 사회적 역사현실과 사회적 삶도 더 근원적인 자연생태계와 상호 함수 관계속에 있는 하나의 존재방식임을 진지하게 보지 아니했던 것이다. (1997,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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