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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신학과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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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신학과 해석학

김경재(한신대,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왜 세상에는  다양한 철학사조와 다양한 신학운동이 있어 왔는가? 그것은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진리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형태를 띄고 나타날 적엔 언제나 진리를 체험하고 언표하는 구체적 인간공동체가 겪는  삶의 체험과 삶의 표현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체적 인간공동체는 추상적으로 존재하지않고 구체적이고도 독특한 기후 지질 토양의 조건, 역사적 조건과 환경, 언어구조와 문화전통, 생산양식과 경제적 제반조건에 구속당하고 동시에 그것들의 제약조건을  극복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와 구원체험으로서의 종교적 상징체계는  다양하고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지구상의 문화와 종교가 단조롭거나 단색적이지 않고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이 그하나의 이유이며, 또다른 이유는 인간공동체 집단의 삶의 체험과 표현방식에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회철학자 율겐  하버마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과 관심의 영역은 크게 세가지로 범주화하여 대별할 수 있다:
  첫째관심의 영역은 흔히 우리가 자연과학 또는 경험과학의 탐구영역이라고 대별하는 분야이다.  이성(理性)기능 중에서도 '도구적 이성'을 발전시킨다. 이 영역의 관심은 사실성, 이론 정합성, 실증성, 효용성등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둘째관심의  영역은 흔히 우리가 인문과학 또는 정신과학 영역이라고 부르는  삶의 분야이다. 이 분야 연구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적 문화전통이라고 일컫는 역사와 문화전통의  현실세계이다. 이러한 영역에 대하는 인간의 관심은, 역사적-해석학적 학문들을 통하여 역사와 전통 속에 표현되어있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데 관심을 가진다. 인간적인 삶이란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흡수하여가는 창조적  해석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인간의 이성적 활동은 '역사이성'을 집중적으로 구사한다.
    셋째관심의 영역은 흔히 우리가 사회과학 영역이라고 부르는 정치 경제 사회활동의 영역이다. 이 셋째관심의 영역에서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배 피지배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왜곡된 관계, 정치경제적 사회체계와 인간의 생활세계의  갈등관계등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념비판과 사회비판을 통한 해방적 관심에 집중된다. 그리고 '비판이성'이 주도를 한다.
    신학의 학문적 성격은 초월자와의 관계라고하는 계시적 차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학문으로서 존재하는 한  둘째번 관심의 영역 곧 '역사적-해석학적 학문분야'에 속한다. 그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개념은 역사나 전통과의 공주관적(共主觀的) 대화를 통해서 역사와 전통속에 담겨있는 진리의 의미를 '이해'(Understanding)하는 일이다.
   물론  신학의 전공분야를 더욱 세분화 하면, 하버마스가 분류한  삶의 인식의 세가지 영역과 그 각각 영역에 대응하는  방법론적 관심이, 신학 안에도  모두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서학의 문헌비평학이나  성서 고고학분야의 탐구는 거의 자연과학적 탐구방법을 활용해야 풀릴 수 있다.  또 기독교윤리적 관심, 가난한자들의 해방과 인식론적 특권에 관한 주장, 남미의 해방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의 방법론 속에는 하버마스가 말하는바 인간의 세번째 관심과  해방적 관심을 핵으로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두꺼운 중심영역은 그 본질상 역사적-해석학적 관심과 인식을 주로하는 둘째번의 관심의 대상세계이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제는  삶과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소외를 극복하는 구원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2] 한국신학 정립의 기초과정으로서 해석학의 중요성 인식

 한국 개신교 신학계와 목회현장에 한국신학 수립을 위한 한국 기독교공동체의 진지한 학문적 노력은 1960년대 이후 뚜렷한 두개의 선을 나타내 보이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 하나는, 1960년대 중반기에 월간 <기독교 사상>지를 매개로 하여 펼쳐지고 지속되어가는 복음의 "종교-문화적 토착화" 과정이요, 또하나는 1970년대 중반기에 태동하여 주로 <신학사상>지를 매개로 하여 펼쳐지고 지속되어가는 "사회-정치적 토착화"과정으로서 민중신학의 태동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신학적 활동은  한국적 민족공동체 속에 성서적 복음이  외래 서구종교 형태로서가 아니라 보다 "생명의 떡과 생수"로서 육화(肉化)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진지한 신학적 몸짓이었다. 전자는 토착화신학, 문화신학,그리고  종교신학의    형태를 띄고 끈질기게 추구되고 있으며, 적지않는 초기의 열매를 거두어 드리고 있다. 최근 간행된 한국문화신학회 학회활동의 논문집 <한국종교문화와 그리스도,1996,한울>는 그분야 한국 소장학자들의 활기찬 연구활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후자는 민중신학, 정치신학, 한국여성신학의 형태로서 역시 진지한 노력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충실하고 알찬 한국신학이 보다 온전한 형태로 세계신학게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적 토착화신학으로서의 종교문화신학이나, 한국적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나,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그간 보다 충실하게 논의되지 못한 부분이 본격적인 해석학 토론이었다. 해석학은 오늘날 20세기 학문분야에서, 특히 정신과학 분야에서는 피할 수없는 본질적 문제인 것이다.   
  신학이 계시의 학문이며 사도적 전통과 권위에 복종하는 고백과 믿음 안에서의 순종의 학문이라는 독특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학문적 성격이 갖는 그러한 이유를 빌미삼아 "해석학을 비켜 지나가거나 도외시 해서는 아니되며", 계시와 신앙고백적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모든 인문과학의 꽃이랄 수 있는 해석학을 "뚫고 지나가야"한다. 그렇지않으면,  신학은 학문임을 그치고 억측과 독단과 정당성 없는 권위주의의 희생이 되어 현대문명사회에서 하나의 사적인 일거리, 사적인 관심거리로 전락되어 버린체, 인간을 구원하는 생명의 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성숙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다른 어느나라 그리스도인들 보다도 성경을 사랑하고  많이 읽고, 믿음과 생활의 기본원리로서 받아드리고 있다는 사실임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 날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영감과 은혜와 생명의 능력을 받아 살고 있다는 사실, 예배에서 설교를 말하고 들으며 기독교 교육을 시행하며, 회개하고 은혜받아 감격해하는 그 모든 과정이 "경전"과 "사도적 전통" 속에 농축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 구원의 진리가 지닌 "능력과 의미가" 해석학적 과정을 통하여 오늘 여기에서 한국인의 생명속에서 현재화(現在化)하고 육화(肉化)하는 해석학적 사건인 것이다.
   그 사실을 독자가 알던  모르던, 의식하던지 아니하던지  문제가 아니다. "해석학"이라는 용어나 해석학의 여러가지 이론과 법칙들을 이해하거나 못하거나 그런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사도적 전통을 통하여 한국인이 구원의 "능력과 의미"를 체험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학문적 이론으로서의 해석학적 설명 이론보다도 앞서고 "해석학적 사건으로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 교과과정 안에서, 성서신학이나 이론신학 과정 속에서, 신학도들은 "해석학" 또는 "해석학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성서주석학의 기본지식으로서, 본문 텍스트의 바른 "이해의 기술이론"으로서, 신학도들은 해석학에 관하여 많은 말을 들어왔지만, 현대 정신과학 분야에서 일어났던 치열하고도 진지한  철학적  해석학 논쟁이나,  사회과학적 해석학 이론 논쟁의 의미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진보적 신학교육기관에서는  불트만의 "비신화론"을 공부할 때, "전이해"(前理解) 개념이나, 이해와 신앙의 관계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관계성"에 관하여 듣기도하고 독서도 하지만,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가 다른 모든 생물과 구별되어 바로 "해석학적 존재"이며, 해석의 과정속에서 인간의 삶은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자들과 신학도들은 너무나 쉽게 모든것을 성령의 은혜와 감동감화, "성령의 내적증언"이라는 교리에로 도피한다. 그러나 해석학이 말하려는 것은, 해석학적인 이해의 과정이  "성령의 내적증언" 을 대신한다거나, 하나님의  계시적 구원행위의 주권적 선행성(先行性)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 영혼 안에서 성령의 진리조명과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 행동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은혜의 사건이 인간에게 의미있는 능력의 사건으로서 체험되고 이해되기 위하여서 "인간의 해석학적 사건에로의 참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않으면 인간의 인격적, 영적 의미체험은 한갖 기계적 물리사건이 되어버리거나, 악령에 사로잡히는 자기상실의 인간소외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3] 현대 해석학 이론에서  인간 현존재 방식에 대한 통찰들

  우리는  '한국신학' 수립을 위한 해석학적 조명을 시도하기 전에 현대 해석학이론들 중에서 종교신학의 정립에 의미있는  20세기 해석학 이론들의 몇가지 통찰을 개관하기로 하자. 지면의 제한과 우리 논제의 성격상 여기에서 우리들은 현대 해석학 이론의 모든 과정을 고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과, 그에 대한 율겐 하버마스의 비판, 그리고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전환 이론에 국한 하여 살피기로 하자.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왜 종교신학 및 토착화신학 이론은 해석학적 통찰들을 거쳐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며, 하버머스의 비판적 해석학 이론은 신앙 전통과 교회권위가 담지 할 수도 있는  왜곡되고 은폐된 언어성의 비진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제시해 주며,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교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의 구원 상징체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지를 눈뜨게 해주기 때문이다.
 
 1. 슈라이에르맛허로부터 시작해서 빌헤름 딜타이에 이르러 일단 완성되는 '고전적 해석학'은 양자 모두 당시를 풍미하던 자연과학적 학문의 객관성에 대립하여, 정신과학의 학문적 특성과 그인식론적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해석학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그들도  부지중에 자연과학적 진리인식의 도식 곧 '주체와 객체'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양자간을 다리놓으려는 주객구조의 도식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로마서 강해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고전해석학에서는  로마서를 읽는 독자(신자)는 일단 중립적인 관찰자의 입장이 되어가지고, 모든 한국의 역사적 상황 밖으로  나와서서,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려는  자연과학자의 태도처럼 편견이나 선입관을 버리고 중립적인 위치에 자신을 정위하고 객관적으로 바울의 이야기만을 경청하려고 해야 한다.
     이해의 대상인 텍스트 로마서 속에 나타난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독자(신자)는 바울의 마음에 느꼈던 체험과 같은 체험을  '감정이입'을 통하든지  로마서 서신에 표현된 바울의  구원체험 내용을  '추체험' 함으로서 이해가 성립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해자(해석자)가,  본문해석  행위이전에 독립적으로, 가치중립적으로 선재한다는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또한 이해되어야 할 텍스트의 내용은 객관적으로 본문 속에 고정불변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정학하게 알수 있다는 해석의 엄정한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역사주의가 역사적 사실의 객관적 사실성을 재구성을 통해 현재 속에 재생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그러한 소박한 객관주의적 인식론과 역사주의, 그리고 선험적 주체성의 철학적 관념론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2.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통찰을 물려받은 가다머는 하이데거와 같이 무엇을 이해한다는 '이해'의 현상은 자연과학에 대비되는 정신과학의 독특한 진리인식방법론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이해'란  인간존재가 다른 모든 생물학적 존재자나 일반 존재자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이라는 것을 밝힌다. 인간적으로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무엇을 이해하고, 이해되는 바의 것으로서 자기존재의 내용을 형성해가면서 살아가는 해석학적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이해'는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각성상태 속에서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생활속에서 자각되지 않는 상태속에서도 끊임없이 진행된다.
   친구와 대화를나누고, 구멍가게 주인과 잡담을 하고, 신문과 텔레비를 보면서 웃고 분노하며, 소설을 읽고 성경을 읽고 설교 강론을 듣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명곡을 들으며 감상에 젖는등 그 모든 행위가 '이해'의 연속이며, 그 모든 행위동작 속에서는 끊임없이 해석학적 사건이 정신적 삶의 과정으로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3. 가다머는 가치중립적으로 인식대상에 맞서서 선재하는 인식의 주체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해(해석)하기 이전에 모든 형태의 이해(해석)작업 자체를 가능하게 하기도하고, 제약하기도 하는 이해자(해석자)의 '선이해구조' (先理解構造)에 주목 한다.  
     이해자 곧 로마서라는 바울의 편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해석자 한국인 김씨는 수천년동안 흘러내려온 한국문화와 역사가 그에게 준 문화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미 자기와 세계에 대한 어떤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 죽음에 대하여, 의미있는 삶에 대하여, 죄책감정과 심판사상에 대하여, 사랑과 미움과 증오에 대하여, 정의로움에 대하여, 인간다움에 대하여, 공동체에 대하여,  남녀성차별과 그 질서에 대하여, 시간과 영생에 대하여, 그리고 궁극적 실재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등등 해석자 김씨는 어떤 선이해를 가지고 선이해 구조 안에 있다.
     김씨는 로마서 편지 앞에 백지상태로서 대면하지 않고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선이해구조'속에서 텍스트를 대하고 있다.  인간의 '선이해구조'는 고정불변한 상태로 되어있지않고 삶의체험과 대상과의 만남 속에서 언제나 변하는 매우 탄력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선이해구조'는 다른말로 표현하면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체험해가는 해석자의 비고의적 편견(Vorurteil, Prejudice) 이며 관점이다. 인간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자가 아니고 역사적 유한자이므로 이러한 '선이해구조'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선이해구조와 선이해'자체는  새로운 역사적 전통과 새로운 경험지평과를 접맥시키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인간은 언제나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안에 있기 때문에, 일정한 상황속에 유폐된 존재로서는 사물과 진리의 전체성을  통체로 일시적으로 조망할 수 없고 일정한 정신적 시계(視界)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인간 실존방식을 인식론적 "지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평은 결코 고정되어 있거나 폐쇠적인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산에 오르면 전망시계가 더 넓어지듯이,해석학적  지평은 삶 속에서  끊이없이 확대심화 된다. 해석자가 텍스트를 통하여 새로운 전통이 지니는 삶의 지평과 만날 때, 해석자의 마음 속에는 '지평융합'(地坪融合,Verschmelzung der Horizont)이 일어난다.
    한국인 김씨는  로마서를 읽음으로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죄와 심판에 대하여, 사랑과 용서에 대하여, 하나님의 분노와 아가페적 사랑에 대하여, 역사의 진행과 순환과 목적에 대하여 새로운 지평을 만나게 되고, 이전에 자기가 지닌 지평과의 융합을 통하여 버릴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고 융합시킬것은 융합시킨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김씨가 로마서를 읽기전에   그가 지녔던 모든 한국인으로서의 존재와 삶의 지평을 송두리체 폐기처분하고 성경에 나오는 그것들로서 온통 대치하는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지녔던 이 세상 모든 것을 분토처럼 여기고, 이 세상을 못박아버린다는 고백은 그의 철저한 중생과 전환을 인상적인 문학적 표현형식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는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제사, 율법, 하나님의심판,예언자, 약속과 언약들, 양심, 종말, 시간과 영생등등,사울로서의  전이해가 있기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속죄신앙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값없이 주는 복음의 감격이 가능하여 바울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역설같지만, '선이해구조', '선판단', '기존지평', '전통'등은 새로운 지평융합을 가능하게 하고, 삶의 세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해석학적 고리이며 중매자인 것이다. 이것은 해석학적 이해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대화적이며, 해석학적 순환원리가 작동하고 있으며, 그모든 해석학적 이해의 과정은  언어성을 본질로 하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한국의 그리스도인 김씨가 세계와 인생을 보는 마음의 눈에는 여러가지 해석학적 지평들이 융합되어 마치 하나의 커다란 호수처럼, 혹은 잘 삭은 퇴비의 옥토처럼 거름지다. 그의 마음의 밭에는 단군 할아버지 이래로 줄기차게 종교적 영성의 전통으로 내려온 하느님 신앙이 있었는데, 그 하느님은 지고하신분, 밝고 광명정대하신분, 대자대비하신분, 억울한 사람과 지성이 지극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하늘에 계신분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면서도 그 한국인의 전통적 하느님은 너무나 지고하셔서 하늘 저 멀리 어덴가에 존재할 것같은 초월적 하나님 이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을 읽고서 성경에 증언되는 하나님 신앙에 의해 김씨가 믿는 하느님과 성경이 전승하는 하나님신앙이 지평융합을 이루어 보다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이 없고서야 성서가 전하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한 분 하나님"(엡4:6)의   초월성, 내재성, 과정성이 동시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김씨의 마음의 밭에는 불교에서 영향받은 화엄사상도 있고, 유교에서 배운 천명사상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체험안에서 작은 지평들이 융합되어 역사적 인격적 하나님이면서도 이름할 수 없고 텅빔의 충만으로 계시는  無와 空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이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신관을 예로들어 보았지만 구원과 영생, 심판과 용서, 자비와 사랑, 진실과 성실, 의와 공의로움등 모든 중요한 신앙적 개념들도 그렇게 지평융합 되었다.

    6. 김씨의 마음 속에 이뤄지는 삶 체험과 진리체험의  지평융합은 전통과 새로운 전통과의 대화를 통하여 이뤄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언어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은 생각을 한 연후에 언어로 표현하는것 아니라, 사유한다는 행위자체가 언어성 안에서 이뤄진다. 물론 언어는 말로서 하는 구어(口語)와 글로서 하는 문어(文語)와 각종 상징어(象徵語)가 있으며 그것들은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교육과정을 거치고 언어로서 발달하고 체계화해왔던 역사적 과정이 있었지만, 좀더 곰곰이 생각하면 언어성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되는 기초조건이기 때문에 언어없이는 생각도 할수 없고, 다른 의미를 이해 할수도 없으며, 따라서 지평융합 자체도 불가능하다.
   인간이 세계를 가질수 있다는 사실자체가 언어에 의존한다. 모든 이해는 언어라는 매체를 통하여 창출되며, 따라서 그 본질은 언어적이다. 세계가 언어적으로 구성되고 인간의 인식활동 자체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형성되는 한, 모든 의미의 이해는  언어의 독특성과 언어의 문법적 체계에 의하여 그 특유한 사고의 방식과 이해의 방식을 드러낸다. 헬라어, 히브리어, 중국어, 독일어, 한국어는 각각 독특한 언어문법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어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경전의 번역이 가능하면서도, 번역하기 힘든 톡특한 뉴앙스를 가진 어휘들은 해당문화의 언어 속으로 그 의미가 지평융합되면서 의역(意譯) 된다.
  산스크릿이나 팔리어로 본래 기록전승된 원시 불교의 경전들이 중국어로 번역될 때, 이미 중국 인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노장사상의 無, 空, 無爲, 寂定등의 어휘나 개념이  없었으면 불교경전의 중국어 번역이란 불가능하였거나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원시불교의 경전이 원어로부터 중국 한자에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본래 인도종교로서의 불교사상이 중국 노장 사상과 지평융합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하여 인도불교는 중국불교화 된것이다. 중국에서 화엄종을 중심으로한 대승불교가 그리고 선종(禪宗)이  활짝 피어난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본래 하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7.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서는 언어와 전통은 불가분리적이다. 철학적 해석학은 인간경험의 특성과 이해의 문제, 그리고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언어와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비판사회철학자 하버마스는 언어적 전통의 매개를 통해 도달한 인간공동체의 합의된 현실 안에도 사이비 의사소통에 의해 왜곡되고 강제된 요소가 있을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전통들이 진정한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전통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무제한한 토론의 가능성 곧 상호 의사소통이라는 공론화의 가능성이 전통안에서 확보되지 않으면 않된다고 강조한다.
   전통 안에서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인간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종교문화사 속에서 얼마든지 예를 찾아 볼수 있다. 특히 종교가 초기의 영적 생동력을 잃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거나, 인간사회를 비인간화시키는 종교적 관습으로서 역기능하는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중세암흑기의 교권통치사회, 바라문교와 힌두교 사성제의  신분계층적 윤회사상, 신라와 고려말기에 왕권의 시녀로 변질한 사이비 호국불교사상, 조선조 말기 제사문제로 천주교 신자들과 정적들을 박해한 유교적 이데올로기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8. 한국은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인데, 근래에 일부 한국 개신교안에  매우 배타적이고 호전적이며, 타종교 말살정책을 선교의 열정이라고 착각하는  근본주의적 광신주의자들이  발호하여 종교간의 갈등 특히 불교와의 긴장갈등을 유발시키는 불행한 일이 연속되고 있다. 그들의 그러한 배타주의적이고도  정복론적 선교신학이, 넓고 길게 볼 적엔, 한국과 아시아의 기독교 선교의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극단적인 배타주의적 선교신학이 발생하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성경관이 대체로 문자주의적이며, 매우 열광주의적 신앙체험을 가지고 있거나 극단의 교조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에 쇠뇌되거나 유폐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 천도교 유교등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백지상태이거나 매우 편파적이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9.과학사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의하면, 객관적이며 가치중립적이기를 신조로하는 자연과학의 연구에서도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는 일정한 과학적 이론체계의 집성물로서의 틀 곧 패러다임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과학사에 나타난 우주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각양각색의 패러다임들이 있어왔다. 프톨레미 천문학, 갈리레이 역학, 뉴톤의 고전적 물리학, 양자물리학, 최근의 혼돈이론등등에 이르기 까지 그 모든 이론들은 자연을 이해, 설명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일정한 특정 패러다임에 친숙하거나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는 도리혀  다른 자연과학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가 친숙한 패러다임에 매우 집착적이다. 그런 사람은 자연과학자 일지라도 '패러다임전환'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과학적 패러다임사이에는 그 정합성과 이론의 치밀성과 적용범위의 광역성에 있어서 차등이 있고, 그래서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중 최고의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0.   그와 마찬가지로, 일단 한국의 고등종교들, 적어도 불교,유교, 천도교, 원불교, 도교등은 인간 구원체험의 다양한  구원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 "타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단 말인가?"라는 대심문관의 종교재판식 질문은, 매우 기독교 호교론적 열정을가지고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질문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불교신자와 천도교 신자와 유교신자는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질문을 매우 부정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던지는 보수적 기독교인은 자신이 귀의하고 있고 자신이 배우고 체험한 구원관을 표준적 규법으로 삼고서 다른 모든 종교인들도 자기가 규정하고 정의 내린 구원관을 지녀야 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다른 종교전통 안에서는 구원이라는 언어자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의미로서의 종교의 궁극적 목적상태를 언급한다. 예들면 불교의 견성성불 한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한다거나 유교에서 극기복례하여 성인,진인의 상태에 이른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기독교, 불교,유교만 보아도 각각 구원의 상태 곧 구원실재의 유형적 특징이 다르며,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은 다르듯이, 기독교적 구원패러다임과 불교적 구원패러다임은 다르다. 그러나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듯이 기독교에 의하여 중생하고 구원체험을 한 사람과, 깨달음의 해탈과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하여 진여자성(眞如自性)을 회복한 사람의 삶의 행적은 몹씨 친화적이다.
   다시말해서,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자유하고, 사랑하며, 정의를 위해 힘쓰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타자의 생명을 위해 희생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매우 닮거나 통하는 면이 있다. 토마스 쿤이 말한대로 양자물리학이 가장 최근의 과학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로서  밝혀졌다고 해서, 뉴톤물리학은 과학이 아닌것이 아니라, 그것도 훌륭한 한 과학적 패러다임이듯이,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의 복음이 주는 구원 패러다임이  가장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불교의 불자들은 그들의 구원패러다임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양자 구원 패러다임의 섣부른 우월론 경쟁이나 종교비교론적 접근방식은  바람직 하지 않다. 왜냐하면 국화꽃과 장미꽃 중에서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운 진짜 꽃이냐고 묻는것은 의미가 없는 우문이기 때문이다.그런 질문은 우문이 아니라 질문으로서 성립되지 않는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서로를 상보함으로서 온전한 빛의성질을 성명해 내듯이  한국의 가장 위대한 두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 상보적 관계 속에서 서로 배우고 서로의 진리 체험에 의해 서로를 조명하면서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정행(正行)에 협동 할 수 있다.
   단순히 정행의 측면에서만 서로 창조적 협동이나 서로가 서로를 통하여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보다 총체적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이해의 지평을 보다 확대심화시켜줄 수 있다. 유(有)의 존재론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무(無)의 존재론을 강조하는 불교와의 진지한 만남을 통하여 보다 통전적인 하나님 이해, 고백, 신뢰, 체험에서 그렇다.  
 
[3] 한국 교회의 선교의 과제로서 한국 토착화 신학의 쟁점

 한국신학의 정립은 신학자들의 머리나 서재에서 신학적 조립품으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탯집에서 잉태되고 출생되는 것이다. 서구 신학의 전통과 한국종교의전통을 종교적 대화나 비교연구를 통하여 종교신학 혼합주의적으로  재구성한다거나, 번역신학작업으로서도 한국신학이 정립되는 것 아니다. 한국인이 복음의 본질에 부딪혀 그들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받고, 그들의 전통이 말하는 의미와 가치들과 충분하게 지평융합을 이뤄 자기 영혼을 통한 주체적 신앙고백과 신학적 진술과 상징적 종교의례표현을  할 때, 거기에 자연스러운 한국신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한 한국신학의 정립은 생명의 잉태와 출생과 성장과  같은 매우 생명론적이고 유기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신학자들의 심령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진행사항인 것이다. 그러한 창조적 과정에서, 해석학적 통찰과 해석학적 조명은 한국신학 정립에 절대불가결한 기초훈련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해석학이 말하려는 모든 인간 현존재 방식, 이해의 과정, 역사성, 언어성, 이념비판론, 의사소통이론등은  한국신학 정립과장에서 독단적 광신주의와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보편주의를 극복하게 하고,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지켜가면서 매우 열린 개방성을 지닌 신학적 작업을 가능하도록 할 것이다.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은 素石 유동식박사가  지난 세월 발표했던  저술물들의 핵심요지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素石神學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이 개설한 권위있는 "다산기념강좌"에서 1995년도에  행한 일련의 강좌내용이 정리되어 단행본으로 출판된 연구서이다. 이 책은 특히 저자의 독창적 사상이 발표된바 있었던 일련의 책들, 예들면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1975), <풍류도와 한국신학>(1992) 그 3부작이 다시한번 그의 혼의 용광로 속에 부어져서 새로운 구조와 내용으로 재조형된 작품이다. 나는 이 저서가 유동식 신학의 핵심이 요약된  결정적 작품이라고 보고 싶다.
  저자 유동식 박사의 문화신학적 신념은 어쩌면 폴 틸리히의 그것과 매우 가깝다.폴 틸리히가 말하기를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듯이, 유동식은 인간의 "인격과 민족문화사를 통어하는 종교적 意識"을 얼 또는 영성이라 부르고 이 얼이 "종교적 사상전개의 방향과 형태를  통어해 나간다"고 본다.(3쪽) 얼 또는 영성과 종교적 신념 또는 사상과의 관계는 體用關係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상호영향을  미치는 순환구조 속에 있지만, 얼 또는 영성은 체계화되어 있거나 정교한 이론으로 정리되어 있는 그런 따위의 이성적 논리구조나 사상체계와는 다르다.  
  얼 또는 영성은 비유하건데 칼 융의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무의식의 "原型"과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다. 칼 융에 의하면 原型은 "그 자체로서는 비어있는 形態的 要素(formale Elemente)이며,선험적으로 주어진, 여러 관념유형을  산출 할 수 있는 可能性이다". 융이 말하는 原型은 "마치 아직 아무런 물질로도 채워져 있지 않으나 그 構成방향을 이미 결정하고 있는 결정체의 축계(軸系)에 비유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수증기가  눈송이로서 공중에서 결빙되면 그 결정체의 모양을 보고 그것이 어떤 결정체인가를 알지만, 그것은 이미 그런 모양을 만들수 있도록 하는 조건, 즉 軸系를 물분자 속에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原型은 인간의 근원적인 행동유형을 가능하게 하는 先驗的인 조건이다.
  유동식 박사가 말하는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으로서 얼과, 융의 심리학적 原型 개념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유사한 특징이 있다. 심리학에서 자아 意識의 힘은 原型과의 접촉을 통해서 미증유의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창조적 또는 파괴적 일을 할 수 있듯이, 한국의   종교들은 한민족의 영성을 타고 자신을 구현하면서 발현된다. 원형은 이미 그 내용이 결정된 지적관념이거나 윤리적 당위명령 내용이 아니고,  여러관념 유형을 산출 할 수있는 "형태적 요소 또는 가능성" 이듯이, 한국인의 영성이랄 수 있는  풍류도는 무교 그 자체이거나, 더우기 불교나 유교나 동학같은 종교체계가 아니다. 다만 한국의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가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민족 정신의 자연스런 심성에 신토불이 형태로 융합하면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려면 한국인의 영성을  타고서(乘) 나타나야 한다고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그 점을 한국의 종교사에서 증거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동식은  그 점을 밝히고, 한국 종교사를 통하여 논증하려고 한 한국선교신학의 기초 존재론에 해당하고, 한국종교신학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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