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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정신은 基長에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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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정신은 基長에 살아 있는가?

김경재 (한신대, 신학)

 진실성과 청빈의 영성이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는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1월27일이 되면 우리는 어느듯 장공서거 12주기를 맞는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잊혀저가는 고인이 있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고인의 인격과 경건한 삶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이 더해가는 고인이 있다.  그러나, 감상적 추모의 정을 넘어서 좀더 골돌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장공을 그리워하며, 장공의 생애와 삶을 기억해야 하는가? 장공이 기장, 한신대,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남기신 큰 공로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에 그 이름이 큰 글자로 기록된 걸출한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공이 우리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는 것은, 선생이 가르치신 신학적 사상과 신앙적 신념을 통해 우리를 바른 복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지도하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공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의 원천은  그 분의 인격적 삶 속에 육화시킨 진실과 청빈의 영성이다. 장공선생은 우리에게 복음적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가를 말과 글로서 가르치신 분이 아니라 평생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아 가려고 애쓰신 구도자요 순례자 이셨다. 본 훼퍼가 말하는 그리스도 '제자직'에 충실하려 하셨고, '그리스도 형상'을 당신자신의 삶 속에 체현하려고 줄곧 외길을 걸어가신 분이셨다.  
  장공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감화력은 그가 그리스도를 맘에 구주로 모신 이후, 한번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고 초지일관(初志一貫), 지성일관(至誠一貫), 행보일관(行步一貫) 하는데서 솟구쳐나온다. 장공선생의 인격이 우러러보이는 것은 세류에 아부하거나 타협하지도 않고, 결과에 신경을 쓰거나 실적주의에 조급하지도 않고, 덤덤하리만치 초연하게 당신이 옳다고 믿으신 자신의 길을 묵묵히 '처음처럼' 끝까지 걸어 가셨다는데 있다. 우리는 일생동안 장공이 달음질 치듯이 바삐 걸어가시는 행보를 본적이 없다. 그렇다고 근엄한 조선조 양반님네들의 거드름 피우는 행보도 아니다. 조선의 농가집 소가 묵묵히 밭을 갈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행보그대로이다. 물질을 죄악시 하는 금욕주의적 청빈도 아니며, 세속의 티끌을 피하여 은둔을 택하는 초세간적 도인들의 삶도 아니다. 살냄세와  땀내음이 나고 욕망이 들끓는 보통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속세 한 복판에 살면서, 지성(至誠)과 청빈의 자세를 조금도 잃지않고 일생을 살고가셨다는데 그의 인격의 위대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장공의 제자이며, 장공이 파지한 복음적 진리깃발아래 모인 신앙공동체이라면, 지금 우리의 모습 속에 장공이 남기신 바로 그 지성(至誠과 청빈의 정신이 바르게 계승되고 있는가 우리를 엄숙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타락했고, 세류에 휩쓸렸고, 결과주의와 실적주의에 안달하고, 명예욕과 물질욕에 침윤당해있다. 심히 부끄럽고 선생님의 사진앞에 부끄러운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 교육기관의 양과 질은 동시에 중요하고 동시에 추구되어야 마땅하지만, 불행히도 그 중 어느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아니될 상황에서는 단연코 "양보다 질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장공선생님의 가르침 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는가?

장공의  '성육신적 영성'을 계승하고 있는가?  

  장공선생의 생애 말년에 기장 여신도회를 위하여 써주신 붓글씨 휘호 중에, 아름다운 난(蘭)을  화선지 왼편에 묵화로 그려넣으시고, 그 오른편엔  生命, 平和, 正義라는 세 어휘를 단아하게 써주신 작품을 남겨주셨다. 우리는 그 작품을 통하여, 80평생을 복음을 위하여 달려갈 길을 초지일관 걸어오신 장공의 마지막 신앙고백의 핵을 읽는다. 도대체 복음의 알짬이 무엇인가를 압축한 그 분의 신앙고백의 표현이라고 읽고 싶다.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일차적으로 생각하고 힘써야하는 일은 생명을 지키고 살려내는 일, 평화를 위해 힘쓰는 일, 그리고 정의가 강처럼 공동체 삶 속에 흐르도록 몸바치는 일, 그 세가지가 성서적 신앙의 알짬이라는 것이다. 특히 위에서 말한 세가지 삶의 목표는 21세기가 동트는 제3천년대의 문명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신앙의 지침서로서 주신것이다.  생명, 평화, 정의는 한반도 통일한국의 내일을 위한 그리스도교회의 비젼이기도 하다.
  타교단의 신학자이신 유동식교수를 비롯한 한국 교회사가들이 증언하는바 처럼, 한국의 교회사및 신학사 속에서 장공 김재준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흐르는 뚜렷한 물줄기를 일컬어 '역사참여적 진보신학 운동'이라고 세상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좀더 깊이 장공의 신학과 신앙을 표현하려면, '역사 참여적 신학'이라는 표현은 소극적 표현이며 그보다는 '역사 변혁적 신학' 또는 '역사 성육적 신학'이라고 표현해야 장공의 신앙과 신학적 신념이 보다 바르게 표현된다. 장공이 역사현실에 참여하고 당신의 성격에도 맞지않은 정치운동의 최일선에 서서 역사 바로잡기에 투신한 것은, 단순히 현실적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그리스도인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Pragmatic Realism) 관점 때문이 아니다.
  장공의 신앙과 신학은 충실하게 종교개혁의 개혁파 신앙로선,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본류에 충실하여 '현실'을 '복음'의 생명력으로 '변혁'시키며, 역사 속에 복음의  생명력을 '성육화'시키려는 입장을 초지일관 견지하셨다. 우리가 진정 장공의 제자들이라면, 장공의 이러한 '성육신적 영성'을 바르게 계승하고 있는가? 오늘 기장이 세계 신자본주의적 경제제일주의에 맞서서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교회와 미래 인류역사및 통일한국의 청사진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가? 물론 거대한 홍수처럼 도도이 흘러가는 "이 세상 풍조'에 맞서서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산다는것"은 바위를 계란으로 치는것 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라는 것을 우리는 감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도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는 삶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고, 교회가 아니며, 그저 세속적 문화가치에 순치된 종교집단이 될 뿐이다.
  우리 기장교단은 지난 1960년대 이후 거의 40년 가까이,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서 골리앗 앞에선 소년목동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싸우면서 증언하고 역사를 복음의 빛으로  변혁해 가려고 몸부림쳐 일해왔다. 그러는 중에, 실수도 있었고, 자만심에도 빠졌고,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키우는 일에 다소 소홀하기도 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한번 모두 확신해야 할 것은 우리교단의 증언과 '성육신적 영성'신학이 복음적이며, 바른 십자가의신학이기에,  절대로 후회하거나 변질시켜서는 않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부족했던점, 소홀하게 맘 썼던 점을 겸손하게 반성하고 노력하자는 것에는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장공의 가르침이나 장공의신학, 장공의 복음해석, 장공의 성육신적  영성이  마치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혹시나 지니는 '실용주의적 현현실주의' 유혹을 우리는 단호하게 극복해내야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무엇이 실용적이고 행복한 것인가를 먼저 묻지않고, 무엇이 진실이고 인간답게 사는 길인가를 먼저 묻는다. 십자가의 목회길은 예수의 '산상수훈'을 '현실'의 척도로서 해석하여 굴절시키는것이 아니라, '현실'을 '산상수훈'의 계명앞에 복종하도록 하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우리자신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장공의 '성육신적 영성'을 자랑하고 그 영성을 긍지를 가지고서 계승해 가는가 라고.

장공의 신학함의 자유정신, 주체적 신앙혼이 계승되고 있는가?

 장공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정신은 복음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 안에서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신앙양심의 자유, 학문탐구의 자유정신은  조선신학교와  기장교단의 형성 초기에나 거론하는 과거지사의 정신이 아니다. 장공의 자유혼은 그의 그리스도신앙 안에서  마틴 루터가 터득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정신과 통한다. 아니,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개혁파 교회 신앙전통의 성령의 은총 신앙 안에서 훨씬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심화된 '자유혼'이다.
 장공은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만이 절대자 하나님이실 뿐,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교리, 신학체계, 교회법, 교의, 상징, 교권등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는 분이다.  장공 안에는 리챠드 니버가 말하는 '철저하고도 일관된 성서적 유일신 신앙' 정신이 흐르고 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화 길로 접어들며, 생명적인  복음을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형태로  경직화 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생동하는 성령의 주권을 신학적 체계나 이론으로서  제약 해버릴 위험이 있다. 장공은 그 자신이 제도적 신학교를 세우고 전통적 신학체계를 가르친 신학자였으나, 그분은 어떤 신학체계에도 충성을 바치지 않았고, 살아계신 부활의 주 그리스도만이  충성의 대상이었다.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에 관해서 배우지말고, 그리스도를 직접 배우라고 경고하시곤 했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을 배우려말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심장, 성령의 능력에 부딪혀 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장공의 저작전집을 보면, 1960년대 중반에 이미  복음과 한국전통문화 종교유산과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지금 우리 기장교단의 젊은교역자들이 지닌 견해보다 훨씬 열려진 생각, 포용적 견해를 피력하고 계셨다.  한국의 전통종교인 불교나 유교나 천도교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함께하셨다고 보시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시면서 동시에 모든 이전 것들을 온전케하시고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천명하셨던 것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21세기 시대, 한국사회와 세계의 선교상황은 문화선교영역을 주목하게 된다. 문화 속에 육화되지않은 복음은 아직 생명의 떡과 생수가 되지 못한체 수입 종교로 남을 위험이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일반이 지니고 있는 한국전통종교에 대한 배타적, 비판적,  정복적 태도를  바르게 선도할 교단이 진보적 교단으로서 基長말고 다른 교단에게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1990년대를 살아가는 장공의  제자들, 오늘 우리들의 신학적 통찰력과 포용력은 지금부터 40년전 1960년대 장공의 견해보다 훨씬 못미치는 후퇴를 거듭하였다.  
  基長의 신학적 상상력이 경직화 되어가고, 신학적 개방성이 협소화 되어가고, 영적 감수성이 둔탁해져서 전통의 한계안에 안주하려 한다면, 과연 우리가 장공의 '구만리 장천'같은 넓고도 높은 우주적 영성, 복음의 자유혼을 바르게 계승해간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장공이 1983년 카나다에서 귀국하신후, '고토를 걸으면서' 강화도 마니산을 오르고, 한국 고대 종교사를 연구하고,  불교사찰들을 방문한 것은 그분의 그리스도 고백신앙이 혼합주의적 상대주의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아니면, 오랜기간동안 외국에 머물었던 한 노인의 국토에 대한 단순한 노스탈쟈였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조선신학교 창립정신, 곧 선교사의 신학을 답습하지 않고 우리 조선인의 주체적 신학추구를  선언한 그 주체적 신학정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장공탄신 100주년이 닥아오기전, 장공 바로알기 운동을 펴 나가자  
  장공은 1901년생이시다. 2001년 9월26일이되면  장공탄신 100주년이 되고, 그 해는 지금부터 불과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서양의 음악가들, 사상가들, 정치가들이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많이 들어보았고 뜻깊은 행사에 참석도 해보았다. 외극 저명인사들 못지않게 우리에겐 장공탄신 100주년이 훨씬 더 의미깊다. 그 준비도 이제 치밀하게 준비해가는 위원회가 총회 안에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장공을 도서관이나 역사박물관에서 끄집어 내어 살아있는 장공의 혼으로 다시 부활시키는 일이다.
   基長人들은 장공에 긴해서 많이 알고있는듯 해도, 놀랍게도 매우 피상적으로 알고있든지 주관적으로 알고있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長空全集이 한정판으로 출판되었지만, 구입독자는 생각보다 훨씬 못미쳐서 출판량의 절반이상이 재고품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 정황을 말해준다. 최근 장공께서 10년이상 초대 당회장으로 시무하셨던 경동교회 50주년 기념선교관 안에 아름다운 '장공채플'이 정성스럽게 지어져 개관된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장공탄신 100주년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 기장이 다시 장공처럼 젊은 청년성을 회복하는 교단이 되기 위해서, 장공 바로알기 운동을 1-2년간 집중적으로 펴나가는 일이야말로  장공을 가장 바르게 추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장공의 신앙과 신학을 교회사 교과서, 도서관 서고,박물관 기념동판으로 남겨놓기에는 장공의  혼은 아직 뜨겁고 싱싱하다.그의 신앙과 신학은 땅에 묻혀있는 박옥과 같다.장공에 대한 바른 추모는 장공 회상이나 그리움을 달래는 일이 아니고, 옥을 캐내어 빛이 나게 딲아 낸 후,  다시 基長의 정신으로 되살려 교단 선교신학의 중심에 다시 자리잡게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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