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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모성성과 가정 생명력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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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모성성과 가정 생명력 회복

김경재
(한신대 교수)

1. 성령체험 은유의 다양성과 그 조화

  현대신학의 성령론은 여전히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적 구조 안에서, 그리고 교회론및 구원론의 맥락에서 논의 되고  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이전 보다 훨씬 더  감성적이고 내제적 초월경험으로서 이야기 된다. 율겐 몰트만의 최근의  저서 <생명의 영>이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신학적 담론 성격이 그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성령의 체험은 다양하고, 성령체험에 관련된 신앙적, 신학적 은유들도 다양하다. 성령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한 불로서, 영혼의 내면을 비추는  진리의 빛으로서, 생명을 움트게하는  단비로서, 갈증을 해소시키고 생기를 돋게하는 솟아나는 샘물로서, 위로하고 치유하고 양육하는 어머니로서,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자유와 쇄신의 바람으로서 은유되었다.
  한국 교회의 성령체험은 성경이 증언하고, 역대 교회성도가 체험한 그 다양한 영체험의 은유들을 균형과 통전성에서 이해하고 건전한 영성함양에 성공하고 있는가? 대답은 매우 우려할만큼 편향적이고, 단편적이고  극단적이어서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 글은 왜 그런 위험수위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직신학적,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조명하여 성령의 모성성을 회복하고 가정의 영성적 생명력 회복이라는 과제와 맺는  함수관계를 성찰하려고 한다.
  방금 위에서 필자는 "성령의 모성성" 이라는 매우 직설적 표현을 사용했지만, 성령이 인간의 양성(兩性) 중 여성성 만을 속성으로 지닌 "여성으로서의 신격적 제3위"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증언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피조물이 지닌 남성신이나 여성신과 같은 성적 존재가 아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창조적 원천이시며, 지탱자이시며, 완성자이시기 때문에 모든 생명이 지닌 남성성과 여성성의 존재론적 지반(地盤)이시므로 은유적으로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어머니 성령이라는 은유의 사용이 상징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여성신학이 정당하게 비판적으로 경고하는 것 처럼, 성부 하나님을 남성신으로 오해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성령을 여성신격으로서만 이해하는 것도 큰 오해이고 탈선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  아들  어머니등 가정 구성원 상호관계성에서 맺는  역활적 은유들은  종교적 상징이지 실체적 명시적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체험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교회전통은 아버지라는 은유를 사용했고, 계시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분리성과 일치적 동질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아들이라는 상징을 사용했고, 하나님체험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치유, 양육, 사랑, 긍휼, 다함없는 무궁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머니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성자-성령 이라는 상징조형 과정 자체가, 당시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문화의 패러다임에 의해, 그 모든 신학적 진술행위에 있어서   해석학적으로 영향받았다는 것은, 인간존재자체가 문화적 존재요 동시에 해석학적 존재이기 때문에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증언하는 모든 하나님 체험과 영 체험의 현상학적 서술과 은유적 표현들은 종교적 상징언어임을 다시한번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동시에 경전이 증언하는 다양한 성령체험의 은유들을 그 조화, 균형,그 통전성에서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영체험에 관한 현상학적 서술은 매우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인 "불"의 이미지로서만  단색화 되어 있다. 그 결과  성령체험이 유연성과 다양성을 결여한체  부성적 권위주의, 타율적  반지성주의, 과잉적 심리반응으로서의 격정주의, 심지어 광신적 열광주의에로 성령운동이 치닫는 탈선적 현상까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개인과 가정과 신앙공동체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성화시키며, 치유능력과  생육능력을 지닌 창조적 역동성으로 성령의 현존이 작동하지 않고, 특수체질을 가진 이상한 종교집단의 특수체험으로 인식되면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력과 도덕적 신뢰감을 상실해 가고 있다. 부흥회와 특별집회는 의례 열광적 도가니 속으로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여, 입신  방언 예언 기사이적등을 실증적으로 체험해야하는 곳으로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다. 수 많은 열광적 부흥집회가 열리고,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하는데 한국 개신교는 점점 사회적으로 도덕적, 영적 신뢰도를 잃어가고 문화변혁의 창조적 에너지로서 더 이상 기대감을 얻지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2. 영체험의 양극성적 은유: 불과 물, 빛과 바람의 상징성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성령체험의 은유적 묘사와 현상학적 표현방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것은 불과 물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체험, 하나님의 영체험의 가장 강렬한 체험적 은유는 불이다. 모세는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출3:2) 체험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동행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출13:21)으로 체험했으며, 시내산에서 계약백성으로서 신체험을 할 때, 그들이 겪는 강렬한 체험은 "불가운데서 내려오시는 하나님"(출19:18)이었으며, "제단의 제물을 불로 태우시는 하나님"(왕상18:38)이 살아계신 하나님 이었다. 신약성경의 원초적 성령체험인 오순절 성령강림에서도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라지면서 나타난 거룩한 불체험"(행2:3)이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탄생시켰으며, 엠마오 도상의 제자에게 부활의 그리스도가 영으로 임재할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다"(눅24:32).
  하나님의 임재체험,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과 성령체험은 불가분리적인데, 여하튼 성경의 사람들이  영적 현존체험을 할 때에 겪는 원초적 체험이 불체험이다. 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불체험으로 경험되는 것일까? 왜 거룩체험을 하는 인간존재는 그 영적 가슴의 중심에서 뜨거운 불을 경험하는 것일까? 그 이유 설명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은 첫째, 태워버리는 힘으로서 부정(不淨)하거나  불의(不義)한 것을 심판하고 태워버리는 하나님의 거룩체험이기 때문이다. 둘째, 불은 태양처럼 모든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고 빛의 근원이며, 매우 강렬한 역동적 힘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거룩한  불"은 피조물을 향하신  무제약적 "긍휼과 사랑의 역설적 표현"이다. 사랑하는 자의 가슴은 불처럼 탄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특히  셈종족의 종교문화 배경에서 불체험은 하나님의  영체험의 제 1차적 상징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영체험의 "불의 상징성"은  신적 거룩성 속에 내포된 부성(父性)의 상징이 되었다.그러한  불이 지닌 상징성의 변용형태가 빛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빛, 영광의 빛 가운데 계신다.
  그러나 성경안에는 하나님의 임재체험, 하나님의 영체험을 물로서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다른 대극적 상징이 있다. 물이 지닌 상징성은 불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체험을 바르게 묘사할 수있는 은유가 된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렘17:13) 이시며, 영의 사람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 속에서 항상 솟아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요4:14)로서 묘사된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성령은 "생명수의 강"(계22:1) 으로서 은유되며 생명나무를 기르고 열매를 밎으며, 그 나무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사람은 누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듬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요3:5) 이라고 에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물은 세례의 물이면서도 사람이 어머니의 모태에서 탄생할 적에 그 안에서 태어나는 포태의 양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시인은 주께서 찾아오셔서 "땅에 물을 데시고, 밭을 단비로 적신다"(시65:10,미6:7)고 노래했다.
  성령의 임재 체험과 성령의 신적 속성을, 물, 솟아나는 샘, 흐르는 강, 내리는 이슬과 단비등으로 은유하는 것은 왜 그러한가?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이 지니고 있는 정화능력, 생명을 움트게하고 육성시키는 생육능력, 신선하게 다함없이 솟아나는 자발성과 그 무궁성, 유연성과 역동성, 평화성과 자기겸허성등을 모두 내포한 상징능력 때문이다. 물이 지닌 이러한 상징성은 부성적 이미지라기 보다는 모성적 이미지 이다. 왜냐하면 모성이 지닌 여러가지 기능적 속성들 곧  생명을 새롭게 잉태하고, 생산하며, 육성하고, 치유하며, 긍휼히 여기고, 자기희생하는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사랑의 속성을 물이 가장 잘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은 성령체험의 모성적 성격을 상징하는 기본 상징이다.
  위에서 살핀바 처럼 성경에서, 성령체험은 불과 물이라는 양극적 대위상징(兩極的 對位象徵)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 양자는 조화와 균형속에서 통적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성령은 불처럼 뜨겁게, 강하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명시적으로 임재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물처럼 부드럽고 온유하게, 이슬비가 대지를 적시듯 조용하고 소리없이, 드러나지 않게 암묵적이고 은밀하게 역사하고 임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만이 다양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하는 방식과 성령체험의 양식도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기질과 성품을 따라서 가장 알맞게 역사하는 것이다. 불처럼 임할 수도 있고, 물처럼 임할 수도있고, 그 양자를 병행시켜 체험하게 할 수도 있다. 빛처럼 임하실 수도 있고 강한 바람처럼 임재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경우이든지 성령체험의 열매로서 결과는 같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그 성령의 열매는 같다(5:22-23)
  성경이 증언하고, 역대 신앙전통이 증거하는 성령임재체험에 관한 이 두가지 임재 패러다임이
그렇게 분명할진데, 한국교회의 단일극성적 불체험으로서의 성령체험 일변도는 여러가지 신학적으로 문제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선 그렇게 되는 여러가지 종교심리학적, 종교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 분석이 있어야 왜 한국 교회가 유독히 "불체험으로서 성령강림"을 강조하게 되는가 밝혀질 것이다. 우선 한민족의 민족적 영성의 원형적 특질이 밝음, 빛, 태양, 불을 흠앙하는 민족인 것이다. 이러한 "불과 밝음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집단적 민족심성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적 영체험은 "불 지향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밝음과 불을 지향하는 한민족의 원초적 집단무의식적 영성은  예술, 건축, 종교의례, 장례예법등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한민족은 사색적인 민족성을 지녔다기 보다는, 감성적인 예술적 재능을 지닌 민족이기 때문에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불지향적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근대200년간 한민족 사회의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등 급격한 사회변동은 사람들의 심성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자극적이게 만들었고, 매우 격정적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성령체험을 불체험 일변도로서 고착시키게 되었고, 불체험으로 편중화시킨 것이다.

3. 자유와 사랑의 생명공동체로서 가정 : 군주적 삼위일체론과 필리오케 교리를 넘어서

  한국교회가 성령체험에 있어서 불체험을 중심상징으로 갖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다.그런데 한국교회의 신앙전통은 서방기독교와 동방기독교 양대 전통중에서 서방기독교 전통에서 그 신앙뿌리를 전수받았다. 그것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항상 "양태론적 군주론"(樣態論的 君主論, modalistic monarchianism)의 경향성을 띄는 삼위일체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론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양태론적 군주론"이란 하나님의 경륜적 자기계시 과정에서 성부-성자-성령은 한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양태로서 성부하나님의 전권적 자기계시 전개과정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 입장의 강점은 삼위의 통일성과 동질성이 강조되지만 삼위의 위격성이 약화되고, 삼위상호간의 "상호침투적 순환과 신적 생명의 사귀임"(perichoresis)의 요소가 경시된다. 그 대신 성부-성자-성령 순서로서  질서지어지는 위계적 질서와 일방적 신적 생명의 운동성이 강조되어 매우 권위주의적 신학과 엄격한 성직위계질서 위에 기초한 교회론이  형성되게  된다.
  교회사에서 삼위일체론이 보다 치밀하게 다듬어져 가는동안 성령의 발현문제(發現問題) 곧 성령이 어디에서부터 나오시는가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방교회는 성부 하나님으로 부터와 성자로부터 발현된다고 고백하게 되었으므로 "성자로 부터도"(필리오케, filioque)라는 단어를 삼위일체 교리문 표현문장 속에 첨가하는 쪽을 지지했었고,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성자와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발현된다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교리적 논쟁의 의미는 삼위의 신적 동질성을 확고하게 정립하려는 동기였지만, 결과론적으로 서방교회는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제한시켜 성자 그리스도, 그 몸인 교회,및 그 말씀인 성경에  성령을  예속시키는 바람직 하지 않은 일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본의와는 다르게, 창조세계 전 영역과 생명의 창조적 과정에서 '생명의 영'으로서 불처럼, 물처럼, 빛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제한시켜  교회론과 구원론의 맥락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 나아가서, 위와같은 군주적 삼위일체론과 필리오케 교리의 승리는 교회의 구조적 역동성을 병들게 하여 매우 권위적이며 상하복종형으로 만들었고, 상호 순환구조적인 사귀임과 사랑의 역동적 충만성이라는 측면을 약화시켰다. 교회의 중심은 성부의 대행자인 남성 신부의 지도하에 놓이게 되고, 성자가 상징하는 로고스중심적 신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로고스 중심의 신학적 발상법은 질서, 합리성, 교리중심주의, 말씀중심주의,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등을 강조하는 신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정통교회 예배안에서  성령운동은 억압되고, 성령의 모성적 기능과 그 상징성은 억압된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론과 로고스 신학적 권위주의는 교회로부터 가정으로 이식되고 가정의 질서를 그렇게 매우 권위적이고 경직된 형태로 구성하도록 작용한다.
  가정이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사귀임과 상호침투라는 생명운동 속에서  출산, 양육,충만, 치유, 사귀임,사랑의 약동으로 형성되어 가야하는데, 권위주의적 가부장중심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게 되면 가정의 생명력은 위기를 맞게 된다. 가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침투와 순환구조적 생명사귀임을 닮아 창조된 창조질서인 것이다.
  가정이란 사회학적 개념으로 인지되는 사회구성의 기초단위 이상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가정은  "사랑과 자유 안에서  신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귀임"을  창조세계 안에서  가장 범례적으로 구현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구조인 것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드러남이요, 그 원형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자유와 사랑, 생명창조와 보존과 치유, 구속과 속량의 대리행위의 기초공동체인 것이다. 그러한 신학적 통찰 안에서 성령의 모성적 속성과 가정의 창조적 생명력의 복원이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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