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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과연 필요한가?(전남대, 한국종교간대화학회, 200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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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
          -  현대사회의 종교무용론에 대한 타당성과 부당성의 고찰 -

                        김경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1] 서론: 논제의 의도와 문제의식

 우리의 주제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는 단순한 듯 들리지만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 것이다.  학술단체 주제로서는 너무 통속적인 표현같이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문명사회 특히 한국사회에서  현실종교의 행태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솔직한 비판의식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는 표제이기도 하다. 정부 통계청이 발행한 『2006 한국의 사회지표』에 의하면, 2005년 현재 남한 인구총수 47,254,000 명중에서 종교인수는 25,091,000명(53.1%)이며, ‘종교없음’으로 응답한 총수는 21,973,000명(46.5%)였다. 통계청, 『2006 한국의 사회지표』, 591쪽.

 주제는 두가지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겠다. 한가지 측면은, 기존의 종교들이  현대문명과 한국사회 속에서 표출하는 사회발전에 대한 ‘역기능’을 사회윤리적 시각에서  비판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또다른 측면은,  본질적인 진실게임의 학문적 시각에서, 도대체 종교가 제3천년기(Third millenium)의 성숙한 인류 문명사회 속에서도 존재할 이유와 타당성이 있느냐는 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 분야 지성인들의 반종교적 비판이론을 반영하고 있다. 전자는 도덕론적 가치론에 관계된 문제의식이지만, 후자는 인간학․진리방법론․문명비판론등에 관련된 복합적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제를 함께 검토하기 전에, 우리의 주제자체가 당연하듯이  전제하고 있는 두가지 개념을 먼저 어느정도 명확하게 해명하고 들어가야 한다. 첫째, ‘종교’라는 어휘를 통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종교개념이 무엇이냐라는 종교본질 규정에 관한 것이다.  둘째, 종교가 필요하다 혹은 불필요하다는 가치판단근거는 종교가 감당해야할 당위적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지금의 종교는  필요치 않다고 판단하는가의 물음이다.
 위의 두가지 개념의 명료화 작업자체가 종교학․종교철학․신학․종교심리학과 종교사회학등 모든 분야에서 논의되는 핵심적 쟁점주제이기 때문에, 제한된 지면에서의 상론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논의를 위하여  아래와 같은 세가지 테제로 단순화 시켜야 하겠다.

  테제 1. 종교란 자기초월의식 단계에 도달한 인간존재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갖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으로서, 그 목적은 자기부정(自己否定)을 매개로하는 자아의 실현과 완성이다.
  테제 2.  종교의 개인적 기능은 ‘궁극적 관심’을 자신이 속한 전통 속에서 실현해감으로써, ‘자기중심적 존재’로부터  변화되어 ‘실재중심의 존재’에로 전환된 성숙한 삶을 살게 한다. 그 변화된 표징은 자유로운 사람․ 봉사하는 사람이다.
  테제 3.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준궁극적 가치를 절대화시키는 우상숭배 경향성으로 부터 문명사회를 해방시켜,  창조적 모험․ 아름다움 추구․ 진리실험과정의 인류 공동체가 되도록 촉매작용을 한다.

 테제 1은 기독교계 종교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유명한 어휘 ‘종교란 궁극적 관심이다’에서 빌려왔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1. pp.11-14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궁극적 관심’에 대한 논문으로서 다음 자료참조. 李俊鶴, 『<그립고 두려운 것>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pp.95-129, “T.S. 엘리엇과 폴 틸리히”(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1)
종교를 ‘궁극적 관심’이라고 본 종교체험의 현상학적 서술은 종교를 ‘신적 , 초자연적 존재’를 전제로 한 ‘나-당신’의 관계구조를 넘어서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세계의 위대한 보편종교들 중에는 인격적․초인격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 대자연과의 하나됨을 지향하는 종교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의 본질 속에는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려는 실존적 몸짓에 근거하고 있다. 적어도 종교의 본질적 목적은 종교를 통하여 의식주 문제를 효과적으로 쟁취하려는 ‘준궁극적 관심’은 아닌 것이다. ‘궁극적 관심’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그의 삶의 근본지향성을 방향지우는 실천적 삶의 걸어감으로서, 자기부정을 통하여 완성에 도달하는 ‘거듭남의 삶’이다.
 테제2는 생존하는 세계적 종교다원론자 죤 힉( John Hick)이 종교목적규정이자 종교의 진정성 판단규범으로 내세우는 것인데,  종교가 “자기중심에서 실재중심에로 인간 경험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human experience from self-centeredness to Reality-centeredness)를 가능하게 하는가의 여부이다. John Hick, 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pp. 16-27(Mcmillan, 1985); Paul Knitter, No Other Names?, p.148. (Orbis, 1985)
 죤 힉이 여기에서 말하는 실재(Reality)는  각 종교전통에 따라서 색깔이 다양하여 인격신․다르마․대자연․하느님․우주적 생명등 여러 가지 이름들로 불리울 수 있다. 그러나, 존재변화를 겪은 종교인들의 공통특징은 자유인이 되어  자비․사랑․어짐등 자발적 봉사를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테제3은 유기체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의 과정철학적 종교론에서 배운 통찰이다.  종교는 문명의 다른 업적 성취물보다 그 효능과 진리의 가르침이 보다 탁월하고 영속적이지만, 종교도 ‘과정 속에 있는 실재’임을 강조한다. A.N.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The Macmillan Company, 1926), 정강길 옮김, 『형성과정에 있는 종교』(동과서, 2003)
종교가 과거전통 속에 안주하고 자기 완결적 교만에 빠질 때 종교위기와 몰락이 온다. 종교는 도리혀 문명사회로 하여금  자기를 절대화하거나 신격화 시키려는 우상숭배적 경향성을 깨트리고, 진리에로의 모험을 하도록 유인하고 촉매하는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 성숙한 문명의 특징은 진리모험정신의 허용, 관용성의 존중, 아름다움 추구의 예술적 삶의 고양, 그리고 합리적 사고의 발현이라야 한다.
 이상에서 간력하게 단순화시켜서 살핀 종교의 본질과 기능을 고려할 때,  지구 문명사회와 한국사회 속에서 현존하는 종교들이 종교본래의 본질과 기능에서 이탈하였으므로 종교는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가 되므로 폐기해야 한다는 적극적 종교무용론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목소리들을 다음장에서 살펴보면서, 그들 주장의 타당한 면과 부당한 면을 동시에 검토해보려고 한다.
  종교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혹은 반종교적 종교폐기론자의 다양한 목소리들 중에서, 인간학적 입장에서 프리드리히 니체(F.Nietzsche, 1844-1900), 심리학적 입장에서 지그문드 프로이드(S. Freud, 1856-1939), 사회학적 입장에서 칼 마르크스(K. Marx,1818-1883), 그리고 자연과학 입장에서  물질주의적 환원주의자 리쳐드 도킨스(R. Dokins, 1941-    )의 종교비판론을  검토하기로 한다.  네 사람이  주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염두에 두고 비판을 가하는 것이지만, 그 핵심엔 종교일반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므로 경청 할 가치가 있다.

[2] 종교 무용론 및 폐기론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1) 프리드리히 니체: 종교는 노예의지의 반영이고, 삶의 창조적 의지와 정열을 좀먹는‘모든 가치의 전도(顚倒)’현상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진정한 의미에서 20세기의 사람이며, 그의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lism)는  의지(Will)․ 힘(Power)․ 열정(passion)․생성(becoming)을 강조하는 인생관 및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20세기가 동튼 이후 지금까지  가장 강렬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반종교적 철학사상의 제창자이다.
  니체의 사상사적 계보는 19세기를 풍미하던 헤겔의 관념철학에 반기를 든 자연주의적 생명철학의  주장이며, 지식에 대항하는 의지의 강조, 존재우위 실재관에 대한 생성론적 실재관, 절제에 의한 힘의 통제보다는 ‘힘에로의 의지’( Will to Power), 겸손과 자기 낮춤을 덕목으로 수행하는 수도사적 인간형보다는 초인(Ubermenschen)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교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니체에게서 가장 인간다운 매력과 창조적 사상의 동기를 얻는 폴 틸리히는 니체를 비판하기전 다음같이  니체철학의 본래 의도를 바르게 이해 할 것을 촉구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제자였다. 그는 ‘의지’라는 말보다는 ‘삶’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삶이 란 본질적으로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의지이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전혀다른 방향을 취한다. 그 의지는 자기를 쉼에로 이끌어가기를 그만두는 의지가 아니고, 니체가 ‘힘에로 의지’라고  불렀던 의지이다.... 니체에게서 힘(power)이란 존재의 자기긍정(自己肯定)이다. ‘힘에의 의지’는 살려는 힘을 긍정하려는 의지이다. ...니체는 모든 삶의 모호성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단편은 삶의 모호성, 삶의 위대성, 삶의 파괴성을 나타내는 표현에 의해서 삶의 神的․魔性的 성격을 기술한다. 그는 이 삶을 그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긍정 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Paul Tillich, 송기득 옮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思想史』, 242-243쪽.(한국신학연구소, 1980)


 니체를 반그리스도교적 사상가로서 보면서도, 폴 틸리히가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라는 총괄적 어휘속에 함의된 바의 사상의 깊이를 바르게 성찰하도록 충고한다. 니체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역사철학, 이성적 인간론,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의 이분법에 안주하는 기존종교들 속에 은폐되어있거나 억압되어 있는 마성적인 성격, 디오니소스적인 열정,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자기모순적 생명의 분출력을 긍정하고 받아드려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하튼 니체의 ‘힘에로의 의지’(will to power)가 천박한 정치권력 지상주의를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의미는 ‘삶의 자기긍정’이라는 용기의 표현이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힘에로의 의지’는 니체사상의 본질을 총괄하는 중요한 어휘이지만 본래는 그의 마지막 단편집 책 제목이었다. The Will to Power, translated by Anthony M. Ludovic(London: T.N. Fouls, 1914)

 니체의 종교비판의 핵심은 단지 그리스도교라는 역사적 종교만이 아니라, 대체로 종교일반이 삶의 자기긍정보다는 삶의 부정 (否定)을 부추기고, 힘에로의 의지보다는 힘의 포기와 절제를 덕목으로 강조하고, 자연스런 인간 생명력의 분출을 죄의식으로 억압하며,  한계돌파 의지를 지닌 초인됨을 경고하고 겸손과 자기낮춤을 강조함으로서 인간적 삶을 왜소하게 만들고 비역동적으로 만든다고 본 것이다.
 특히 서방 그리스도교가 초자연적 초월신을 군주론적 신관으로 분장시키고, 모든 역사와 인간 운명을 섭리하며, 죄의식과 심판사상으로 인간성을 위축시켜온 것을 비판한다. 그러한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상징적 언어이다. 군주적 ・ 초월적 신관에 기초한 종교는, 계몽주의시대 이후를 살아가는 성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종교의 중요한 덕목인 위대한 ‘아가페’(agape) 마져도 동정이나 자선같은 감상적 도덕개념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에 분노하였던 것이다. 영어의 'Love', 우리말 ‘사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표기하는 다양한 구별이 없다. 그리스어에는 최소한 네가지 단어구별이 있다: 에피투미아(epithumia)는 라틴어 리비도와 같은 생명충동의 사랑이다. 필리아(philia)는 인격대 인격과 관계에서 체험하는 우정과 같은 사랑이다. 에로스(eros)는 진선미의 보다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는 창조적 문화적 사랑이다. 아가페(agape)는 정의를 내포하면서 타인을 용납하고 용서하며 받아드리는 사랑 곧 분리된 것을 다시 재결합시키는 능력으로서 사랑이다. 니체는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인데, 도덕적 감상주의로 전락하여 부즈죠아시민들의 자선과 선심을 나타내는 도덕적 위선의 개념으로 사랑을 변질시켰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서구 브루좌적 부패한 문명을 뒷받침하는 위선적이며 노예의지적 심성을 육성시키는 그리스도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점에서, 그는 예언자적 비판기능을 수행한 철학자이다. 니체는  '의심의 해석학‘ 대가 답게, 당시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문명사회의 도덕체계와 세계관을 철저한 ’가치전도(顚倒)를 통하여 바르게 조정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의 ‘생명긍정’의 철학, 생성론적 실재관, 인간을 의지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인간이해등은 도리혀 헤브라이즘의 정신적 유산을 성실하게 되살리는 공헌을 지닌다. 현대인들이 힘을 추구하고, 자신을 실현하려는 디오니소스적 인간론에  전적 지지와 동감을 표시한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비판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져 우리는 니체의 ‘초인사상’과  ‘힘에로의 의지 철학’이 태동하던 시대사적 배경이 챨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적 세계관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말하면, 적자생존․자연선택․생명력의 분출․초자연주의적 섭리신앙에 대한  비판등이 힘을 얻어가던 자연주의적 생명철학이요 의지철학이라는 것이다.  그의 초인사상 밑바탕엔 천박한 동물주의가 용납되지 않고 스토아철학적인 영웅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의 초인은 스토아 철학적인 숭고한 영웅주의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긍정의 철학’과 초인사상에는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삶을 강하게 ‘자기긍정’하도록 가르치는 장점이 돋보이지만,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무한 권력의지를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적 초인능력을 보통 대부분 인간은 갖지못하다는 현실적 인간상황을 간과하고 있다.  그 결과, 그의 초인사상과 ‘힘에로 의지’철학은 니체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나치즘과 파시즘 대두의 철학적 혹은 세계관 바탕으로서 오남용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니체의 종교비판에 대한 평가의 정당성과 부당성의 분계점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어느 종교이던지  종교가 인간의 ‘자기긍정’을 증진시키지 않거나 ‘현실적 삶’을 도피하게하거나, 초자연주의적 실재관에 입각하여 현실부정적 인생관을 고취한다면 마땅히 그런 종교는 비판받아야 하고 무용지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측면에서 타당하다.
  그의 종교비판의 한계와 문제점은 실존적 인간의 이기심과 권력욕망을 통제하고 순화하며 승화시킬 구체적 도야방도를 제시하지 않는 낭만주의 후예라는 것이다. 예들어,  불교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의 방편’, ‘이기적 존재로부터 새로운 존재 에로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나 훈련이 없다. 오직 스토아적인 영웅적 초인들의 자율적 자기통제에 맡길 뿐이다. 니체로 대표되는 인간주의적 종교비판은 ‘병든 종교’ 현상을 비판한 점에서 옳지만 ‘종교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였다기 보다는 ‘초인종교’로 대치한 셈이라고 평가 할 수 밖에 없다.

 2) 지그문드 프로이드의 종교무용론과 폐기론: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 강박신경증이며, 결국 폐기되어야 할 환상이다.

  현대 종교비판론 혹은 무용론 중에서 니체만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은 정신과 의사이며 정신분석학 이론을 터놓은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의 사상이다.그의 종교비판이론과 종교무용론은 이젠 많은 비판에 의하여 그 충격이 급속하게 감소되고 있지만, 아직도 종교가 지닌 억압적 강박감에 저항하는 주체적  사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는 이론이다.
  프로이드의 종교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는  그의 삼부작은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 1912-1913),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Illusion,1927), 그리고 『모세와 유일신론』(Moses and Monotheism, 1939)이다. 이것들 이외도 프로이드 작품속에 나타난 종교관을 압축하면, 종교란 자연의 압도적 위력과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이 뿜어내는 무차별적 폭력을 통제 억압하는 기제로서 출현한 문명의 과잉억압의 산물이자, 통제 이데올로기 이다. 다시말하면, 종교란 결국은 일종의 인류생명체의 방위기제로서 출현한 현상이며, 어린아이의 강박신경증세에 비견되는 “인류의 보편적 강박신경증”(universal obsessional neurosis of humanity) Sigmund Freud, The Future of an Illusion, p. 43 (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61)
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인류의 생명방위기제로서의 ‘환상’의 산물이며, 미성숙한 정신발달 상태에서의 ‘강박신경증세’라고 파악하는 프로이드의 종교론 속에서, 우리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정신과 19-20세기를 풍미한 유물론적 생물학, 그리고 ‘의심의 해석학’의 충실한 학도로서의 그의 열정을 읽는다. 그러나 공헌못지않게 그의 종교론 있어서는 한계와 과오를 동시에 보게되는 것이다.
  프로이드의 종교비판론을 구성하는 핵심적 키워드(key words)로서 인간심리의 무의식층이론, 심리적 투영론, 꿈의 분석론, 그리고 외디푸스 컴프렉스론등 이다.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이론의 기초이론들은 그가 보다 정교하고 실증적인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확증시킨 불휴의 공헌을 인정하지만, 무의식이론이나 투영이론이 프로이드의 독창적 산물은 아니다.
  프로이드보다 앞서서, 쉘링(F.Schelling, 1775-1854)은 자연과 인간이란 합리적 법칙이나 도덕적 정언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깊이의 차원, 마성적 요소, 자기초월적 차원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프로이드 종교비판론에서 중요한 투영론(Projection theory)도 그 보다  앞선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가 있었다. 헤겔의 관념론적 종교철학에 비판적으로 맞서고, 칼 맑스의 소외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투영론이론을  프로이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다”라는 말로서 그의 사상을 갈파한 셈이다. 유신론적 종교들의 보편적 특징인 신의 속성들 곧 무한․전지․전능․지고선과 미․거룩․불멸성등 모든 속성들은 인간성 내부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종교비판 의도는 두가지 인데, 투영의 실상은 환상이라는 것이요, 투영의 결과는 인간의 소외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종교의 근거이고 동시에 종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제2장 “일반적 종교의 본질”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神)의식은 인간의 자아의식이며, 신지식은 인간의 자아지식이다. 그대는 인간의 신으로부터 인간을 인식하며,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신을  인식한다. 인간과 인간의 신과는 동일하다. 인간에게 신인 것은 인간의 정신(Geist)이고, 인간의 영혼(Seele)이며, 인간의 정신, 인간의 마음, 인간의 심정(Herz)은 인간의 신이다. 신은 인간의 내면이 나타난 것이며 인간 자신이 언표(言表)된 것이다. 종교란 인간의 숨은 보물이 엄숙하게 개막되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사상이 고백되는 것이며, 인간의 사랑의 비밀이 공공연하게 고백되는 것이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박순경 옮김, 『기독교의 본질』, 44-45쪽( 종로서적, 1982)


 왜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의 본질규정이 문제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종교생활을 깊이 하면 할수록, ‘인간의 숨은 보물’을 밖으로 투사하여 내보내고 인간은 점점 초라해지고  빈곤해진 남어지 결국 인간소외가 초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의 투영이론은 프로이드의 종교론에서 소위 ‘오디푸스 콤플렉스’이론과 결합되어, ‘쾌감 원리’에 의해서만 욕구를 충족하려는 동물같은 인간의 행태와 마음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초자아적 신개념으로 변형되고 있을 뿐이다. 프로이드의 신개념은 유럽백인사회 중산계층의 죄의식을 방영하며,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가부장적이고 군주론적 아버지 이미지의 신개념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우리가 아는바처럼, 프로이드의 꿈해석은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관계를 해결하는 정신의 자기위장적 욕망충족의 기제이다.  프로이드는 꿈이란  의식 및 초자아와 갈등을 일으키는 본능적 욕구들의 ‘위장된 충족’이라고 확신하는데, 꿈은 수면상태에서 정교한 왜곡과정을 거쳐 압축, 전이, 상징등으로 전환하여 나타난다. 프로이드적 고전적 정신분석학 꿈해석론 에서는 의미심장한 ‘종교적 계시매체’로서의 꿈이란 용납될 수 없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인간의 심리현상분석을 넘어서서 종교에 대한 본질규정에 까지 확장 되려할 경우, 그의 이론은 단순한 전문적 심리치료론이 아니라 문명론이 된다. 프로이트 문명론의 기본명제는 “문명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영원한 억압에 기초하여 있다”는 말로 압축된다. 마르쿠제, 김인환역, 『에로스와 문명』, 21쪽 (도서출판 나남, 1989)
 문명사회의 유지와 공동사회구성원들의 공존을 위해서 인간본능은 억압될 수 밖에 없는데, 종교는 바로 본능 억압기제의 효율적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가 말하는 모든 진리내용은 ‘환상’이거나 ‘미신’이라고 본다.
  프로이드의 종교론에 대한 그 시대 이후 학계의 비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의 생물학적 인간학 자체가 근본문제이다. 그의 인간이해는 인과율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쾌감원리에 따라 본능을 충족시키려고  동분서주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프로이드의 종교론에 대한 이부영의 다음같은 비판은 정당하다고 판단된다:

    프로이드는 종교의 노이로제적 측면을 보았으나, 또한 그것의 치유기능을 보지 않았다....그는 인간이 절망에 빠졌을 때 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심층에서 신 같은 초월존재가 나타나는 것임을   간과하였다. 프로이드가 교의(dogma)의  신봉을 강요해서는 않된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었으나, 교의를 욕구충족에의 환상으로 본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것은 그의 (프로이드) 이성 ․ 합리성․ 논리성 우위의 태도․무의식을 의식에서 유도된  부수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심리학적 전제에 기인하는 귀결이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C.G Jung의 인간심성론』, 306쪽( 서울: 일조각, 1984)


 이부영의 프로이드에 대한 평가는 C.G 융이 예일대학에서 행한 ‘테리강좌’(1937)에서 강조한바와 같은 맥락이다. 융은 종교란 ‘누미노스’(Numinozum, 루돌프 오토)에 대한 주의깊고도 성실한 과조로서 그 체험적 실재가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지,  인간의식이나 문명이나 사회가 필요로 하여 만들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C.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p.4 (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1938)
무의식차원의 이해에 있어서도 프로이드는 ‘무의식’이란 오로지 의식에 의해 억압된 정신적 에너지의 현상이지만, 융에 의하면 보다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집단무의식’의 차원도 실재한다. 융의 입장을 들어본다:

    개인적 무의식은 더 깊은 층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 층은 개인적 경험에서부터 유래하지 않고 또한 개인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이다.  이 깊은 층을 나는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 부른다. 무의식의 이 부분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인류)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는 ‘집단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달리말하면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고 , 우리들 중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성의 공통적 정신기반을 이룬다. C.G.Jung, The Collected Works of C.G Jung., vol.9., part 1., pp.3-4.(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7)


 프로이드의 무의식개념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인과적 법칙에 종속되어있고,  창조적 에너지라기 보다는 억압되어 있는 저항과 요구불만에 가득찬 욕동적(慾動的)인 것이다. 거기엔 로고스의 밝은 빛, 양명학적인 스스로 밝고 맑은  ‘良知’ , 「大學之道」의  ‘속알 밝힘’(明明德), 불교적 일심(一心)의 여래장,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같은 실재개념은 거론 될 자리가 없다. 생물학적이고, 유물론적 환원주의 인간학이 프로이드의 기초철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의 종교비판이나 종교에 대한 ‘환상’이론은 계몽주의 시대정신에 의해서도 아직 잠이 덜깬 당시 서구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부장적 종교의 해독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옳다.
  그러나, 그의 종교비판은 시대에 너무나 뒤떨어진 것이다. 특히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프로이드의 종교해석 밑바탕의 전제들은  참 종교 체험에서 볼 땐 받아드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이드의 인간관은 비관주의적이며,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있다. 쾌감원칙과 현실원칙의 대립적 이분법, 자유와 억압의 갈등적 이분법이 문제이다.  참 종교체험에 의하면 인간의 몸과 정신은 단순한 대립관계가 아니며, 자유와 억압관계도 그러하다. 종교를 본능의 변이를 현실화시키는  승화, 동일시, 투사, 억압등의 방편적 임시수단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종교의 창조적이고도 신율적인 차원을 전혀 간과한 견해이다. 참 종교인의 종교성을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이에르바하나 프로이드의 종교비판이론의 핵심인 ‘투영이론’에서, 현실종교들이 경청해야 할 점이 있다.  종교적 이미지나 상들이 비록 허구적 환상(illusion)은 아닐지라도, 실재나 진리자체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경험되고 사유된 실재’( Reality as humanly experienced and thought)들의 표현물 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교의나 종교상징이나 종교의례를 절대시하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로서 들어야 하겠다. 폴틸리히의 통찰이 말하는 바처럼 모든 살아있는 종교들  깊이에는, 현실 종교들의 중요성과 특수성이 부정되고 돌파됨으로서만 드러나는 그 무엇이 있다. Paul Tillich, 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 p.97(Newyo가: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모든 참 종교들은 그 것을 지향(指向)할 때라야만, 인간실존을 ‘종교멍애’에 붙잡아 놓지 않고 사랑하며 자유하는 사람들이 되게하는  참 종교가 될 수 있다.

3) 칼 맑스의 종교비판: 종교는 억압받는 민중의 신음이며, 아편이며, 세계변화의 의지를 거세하는  인민의 적이다

 칼 맑스(1818-1883)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에 대한 철학적, 인간학적 차원에서의 ‘결정적 비판’을 받아들이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왜 인간은 인간성 자신 안에 있는 지고한 보물들을 외부로 투영하여 스스로를 소외 시키는가를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과학적으로 해명하였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보물을 밖으로 왜 투영하는지를 개인적인 인간학, 심리적 인간학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것은 오직 ‘사회적 존제로서의 인간’ 이해에서만, 특히 계급사회에 의해 어떻게 민중의 의식과 한(恨)이 규정되고, 왜곡되고, 투영되고, 대치되는지 설명하였다.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을 거꾸로 세워놓았고, 맑스는 사회학적 요소를 끌어 들였다. (종교에서) 초월적 세계의 투영은 이 세상에서 수탈 당하는 사람들의 투영이었다. 이것은 많은 인민대중을 끌여들였던 강력한 이론이었다.” Paul Tillich, 앞서 인용한 책, 174쪽.

 칼 맑스의 종교비판론은 두가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맑스의 종교비판 대상이 주로 당시 서구 브르죠아사회의 타락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지만, 단지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만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인간다운 사회의 실현과 사회적 전진 및 해방’을 저해하고 온존시키는 모든 기성종교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둘째, 맑스는 종교학적인 차원에서 종교의 본질론엔 관심이 없다. 그는  종교현상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종교의 존재이유와 타당성을 검증하자는 기능적-실천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적 ․맑스적 종교비판을 극복하는데 서구사회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오늘도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과연 필요하냐의 질문에 대한 ‘예와 아니오’는  오늘의 한국종교가 맑스의 종교비판에서 자유로울수 있을 만큼 생명력을 발휘하고 사회발전의 해방적 순기능을 담지하고 있느냐의 여부로서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맑스는 말하기를 “이날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는데서 그쳤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일조,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 세계관의 변증법』, 75쪽에서 중인용,( 홍인문화사, 1978)
맑스의 종교비판은 그렇게 신랄하였다. 이 날까지 종교인들은 세계를 해석하고, 관조하며, 고통과 모순으로 가득찬 세계현실을 개혁하기 보다는 초연(超演)․초탈(超脫)하기를 종용하였다. 한술 더 떠서 지배계급과 타협하여 지배이념으로서 충견처럼 복무함으로써 부귀와 영예를 밥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서 챙겨왔다.  마땅이 개혁되어야 하고 해방되어야 세계를 온존시키는데 크게 일조하여왔다. 그러한 종교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독이며, 세계를 인간다운 사회로 변혁하려는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적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파괴 없이 옛세계의 해체가 이뤄질 수 없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을 읽고나서(1844) “종교비판은 본질적으로 끝이 났다”라고 말한 맑스와 포이에르바하와의 차이를 장일조는 이래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다:   

    포이에르바하는 비역사적 인간에게서 출발하지만, 인간이란,  인간의  세계, 이 국가,  이 사회의 인간이며, 오직 특수하게 결정된 구체적인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종교란 불충분한  의식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불만의 정치․사회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종교적 표상을 해체시키려는 것으로서는 안되고, 오히려 종교적 표상이 인간과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정치․사회적 관계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늘의 비판은 땅의 비판으로, 종교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비판은 정치비판으로 변한다. 장일조, 『인간의 삶과 해방의 논리』, 44쪽( 한길사, 1982)


 진지한 지성적 종교인치고, 그 누구가 맑스의 종교비판의 타당한 논리를 부정하겠는가? 맑스의 종교비판론 안에 담겨져 있는 근본적 문제점은 오직 두가지 뿐이다. 첫째, 위의 인용문에서 맑스 견해대로  “하늘의 비판은 땅의 비판으로,  종교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비판은 정치비판으로” 철저하게 전환하여 총체적 이념비판과 실천적 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사회를 실현해본 결과 그가 그토록 염원해오던 인간소외가 극복되었는가 문제이다. 맑스의 종교비판에서 문제점은  그의 정치철학적 차원에서의  통찰력이나 이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바처럼 ‘이율배반적일 수 있는 자기모순덩어리 인간’을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사유재산제도와 국가의 소멸을 통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던 ‘소박한 이상주의’( Soft Utopianism)에 있었다. 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제7장. 450-593쪽 참조(대화문화아카데미, 2007)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예들면 불교나 그리스도교는  맑스보다 더 깊게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성을 통찰 하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제반관계로서 규정되고 한정되는 ‘사회적 존재’ 그 이상인데 문제가 있다.
 맑스 종교비판론의 둘째 약점은, 그가 비판대상으로 삼았던  19세기 서구 기독교의 타락된 모습을 기독교 본래의 가르침과 무차별적으로 동일시하여, 무분별한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맑스 이후 기독교 사상가들(J.B.Metz, Paul Tillich, Jurgen Moltmann)이 지적하는 바처럼,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사적 영혼구원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해방의 종교․희망의 종교․역사변혁을 추동하는 종교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맑스의 종교비판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종교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고, 타당한 면이 많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4) R.도킨스와 E. 윌슨: 종교들은 유전적 이득과 진화적 변화라는 두 측면에서 측량할 수 있는 생물학적 현상중 충분히 설명가능한 독특한 사례일 뿐이다.

  현대 종교 무용론이나 종교비판이론중 가장 강력하게  대두되는 새로운 목소리들은  자연과학분야  특히 분자생물학과 사회생물학 영역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19세기는 역사학과 사회학의 시대라고 말한다면, 20세기는 물리학과 생물학시대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현대물리학의 기초이론을 기술공학적으로 응용 발전시켜 전자정보화 기술과학 문명사회를 이루게 되었다. 분자생물학의 도움으로 신약개발, 신품종 식량생산, 동식물 복제, 유전자 게놈프로젝트, 의료기술의 발전을 초래하여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는 효과를 발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의 관게에 대한 긴 인류문명사 속에서 다양한 관계는 이안 바버( Ian Barbour) 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재치있게 정리한 바처럼 갈등이론․독립이론․대화이론․통합이론으로   대별된다. Ian Barbour, 이철우 역,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참조( 김영사, 2002). 최근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살필수 있는 논문집으로 다음책 참조. Ted Peters 편집, 김흡영등 6인 공역,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 동연, 2002)
 그러나, 종교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넘어서서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생물학 특히 사회생물학적 언어로 통섭되던가 완전 설명이 가능하며, 따라서  종교의 독자적 영역이나 기원설명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리쳐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으로부터  나온다. Richard Dawkins, 홍영남 옮김, 『이기적 유전자』, 30주년 기념판 (을유문화사, 2006); Richard Dawkins, 이용철 옮김, 『눈먼 시계공』(사이언스 북스, 2004); Edward O. Wilson,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 2001).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초판1976)의 출판 30주년기념판(개정판)에서 그의 이론에 자가당착적인 듯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측면으로 눈을 돌려 개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능력,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에는,  맹목적인 자기복제자들이 일으키는 최악의 이기적 행동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를 낳아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회시킨 이기적 밈(meme)에게도 반항 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 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meme)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 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복제들의 전제(專制)에 반항 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348-349쪽.


 위의 인용문은 도킨스의 기본주장 곧 인간의 정신능력, 이타적 행동, 자기초월능력, 성스러운 행동 그 어떤 것일지라도, 결국 과학적으로 밝혀보면 유전자의 번식과 생존전략의 고도로 승화된 표현 일뿐이라는 지론과 모순된다.  기존 철학과 종교가 말해온 인간의 존재론적 선험능력, 종교적 씨앗, 자기초월적 자아, 그리고 그런 능력을 인간과 피조세계에 가능하게 하는 초월자의 ‘초월과 내재신앙’는 모두  관습적 종교의 허구라고 주장하던 도킨스 였다. 그러나, 그는 생물학적 유전인자(DNA)와 문화적 유전인자(MEME)가 발하는  ‘이기적으로 자신을 복제하라!“는 지상명령을 반항하고 거부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종 인간이 진화상에 출현했다고 너무나 쉽게 지금까지 근본적이 자신의 입장을 뛰어넘어 버린다.
  성숙한 현대종교인은 생물학이 가르치는 생물의 진화이론을 충분하게 수용하면서도,  도킨스와 다른 실재관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우리는 현대지성인  샤르뎅( Teilhard de Chardin), 화이트헤드(A.N. Whitehead), 제임스(W.James) , 그리고 알버트 아인슈타인(A. Einstein)이 도킨스만큼 자연과학적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적적인 견해를 갖는다고 생각 할 수 없다. 위에서 인용한 도킨스의 말이 논리정합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로서 도킨스가 그가 전공한 생물학 분야의 과학적 지식에서 곧바로 철학적․종교적 진리를 추론하려는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있기 때문이다. 도리혀, 그의 ‘이기적 유전자론’은 오랜 세계적 보편종교들이 왜 인간의 근본문제가 자기집착과 자기중심점적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가의 생물학적 조명이 될 것이다.
 인간 생명현상이란 상상하기 힘들만큼의 긴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축적된 과정을 거쳐 이뤄진 진화적 산물’이라는 진실을 외면하는 종교는 종교적 독단주의자 혹은 교리주의자로서 나긴찍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을  받아드리면, 종교는 자연히 존립근거를 상실하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비과학적  논리비약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도킨스보다 종교의 속성과 기능에 대하여 보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종교철학에 가까워 보인다.  위와 같은 책. 238쪽.
그러나, E. 윌슨도 역시 현대문명에 아직도  큰 힘으로 영향끼치는 3개의 ‘거대신화’ 곧 맑스주의, 전통종교, 그리고 과학적 유물론 중에서  세 번째 물질적 환원주의 실재관이, 사회생물학의 지원을 받고 종교의 실용적 공헌에 관용적 입장을 가진다면, 가장 바람직한 인류미래 문명의 대안적 종교기능을 하리라고 예단한다. 그러나 윌슨은 결국 말하기를 “나는 종교행위들을 유전적 이득과 진화적 변화라는 두차원에서 측량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본성에 대하여』, 239쪽.
고 한다. 이 말은, “종교는 전통적인 환원 및 분석 방법들을 통해 종교를 설명 할 수 있지만, 그 실체의 중요성을 약화시킬 수 없다” 위와 같은 책. 같은 면.
고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종교는 과학적 설명을 넘어선 그 특별한 영역의 인간현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와같은 도킨스와 윌슨의 과학적 종교비판론은 유전자복제와 컴퓨터 문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대 인간들에게, 인간은 단지 복잡하게 진화한 하나의 생물학적 기계에 불과하다는  인간론을 주입시켜, 생존을 위한 무제약적 이기심의 충족과 힘지향적 처세술을 정당화하는 에토스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

[3] 에필로그 : 오늘 한국사회 현실에서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

 우리는 지금까지 제1장에서, 논제 제기의 근본동기와 그 정당성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우리 대화를 위한 잠정적 약속으로 종교에 대한 정의와 종교의 목적을 가설로서 제시한바 있다. 제2장에서   현대 종교비판론자들의 대표적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들 각각의 종교비판론의 정당한 면과 부당한 면을 동시에 점검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비판은 일정한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상황속에서 제기한 종교비판론이기 때문에, 21세기에 들어온 현대사회인과 한국사회의 종교비판론에 꼭 적합한다고 말 할 수 없는 면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회의적 생각을 품는 근본원인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영적 지도력의 상실에 대한 비판적 저항정신의 표출만이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세계관의 문제요 실재관의 문제가 무의식적으로나마 얽혀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논자는 한국적 상황에서 다음같은 다섯가지 쟁점을 제시하고 미래종교의 지향점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려고 한다.

     (i) 생명부정의 소승적 종교에서 자기긍정의 대승적 종교에로
     (ii) 탈역사적 피안종교에서 세상한복판의 초월종교에로
     (iii) 이데올로기적 가부장종교에서 치유와 돌봄의 모성적 종교에로
     (iv) 유한자 범주에 갇힌 닫힌종교에서 ‘없이계신 하나님’신앙의 열린종교에로
     (v) 독선과 전쟁의 산봉우리 종교에서 포용과 평화의 계곡의 종교에로

1) 생명부정의 소승적 종교에서 자기긍정의 대승적 종교에로

  여기에서 ‘소승적’ 혹은 ‘대승적’이라는 형용사는 불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대승불교적 입장에서의 방편적 용어이지만, 그 본래 불교적 전문용어로서가 아니라 일상화된 은유적 언어로서 사용한 것이다. ‘생명부정의 소승적 종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가 저항했던 시대적 고뇌는 당시 역사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모든 종교일반에게 경고로서 가치가 있다. 종교는 인간성의 자기 실현과 완성을 위해서, 방법론적으로 금욕적 수행과정을 갖추어야 하고,  생명세계 그 자체를 대긍정하기 위하여서는 일단 감각적 세계로부터의 방법적 출가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불교의 승단이 조성되고,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출가정신․금욕적 수행․세속세계로부터의 거리두기는 모두 참 생명세계를 살려내려는 방편적인 것임을 망각하고,  초세간적(超世間的) 은둔주의와 사이비 영지주의(Gnosticism)에 몰입하는 종교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니체의 초인사상과 ‘힘에로의 의지’는 남용되어 역사적으로  비극적 열매를 맺고 말았지만, 그의 본래의도는 종교가 인간의 ‘자기긍정’과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반생명적인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점이다. 건강한 자기긍정(自己肯定)은 자기멸시나 생명경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성이 내포하고 있거나 그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근본악’(칸트)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고, 경박한 낙관론에 빠져들어서는 아니되지만, 정통개신교의 ‘원죄설’이 말하는 인간본성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교의는 본래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지 재검토를 요한다.
  ‘자기긍정의 대승적 종교’ 태도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는 대승불교의 기본 자세처럼, 설혹 내가 아직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지 못했을 지라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자기긍정과 자기완성단계 이전일지라도, 중생들의 고해에 보살정신으로 동참하여 모두 함께 구원얻자는 큰 마음․열린마음․생명대긍정의 종교심이다.  모든 존재는 비록 실존상태가 ‘비본래적 모습’이지만, 이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근원적 은총안에 있으며, 인강성 안에는 ‘하나님의 씨’․‘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인간성 긍정의 종교에로 나아가는 종교이라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멸시․자기파괴․자기염오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의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 사이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탈역사적 피안종교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의 초월종교에로

  현대 한국사회의 깨어있는 지성인들이 종교무용론의 부정적 감정을 갖는 또다른 이유중 하나는, 많은 종교인들이 탈역사적․몰역사적 실재관에 매몰되어있다는 점 때문이다. 굳이 일부 보수적 기독교 교단들의 ‘예수 믿고 죽은후 천당가시요!’라는 전도표어가 아니더라도, 종교인들 일반은 종교의 구경목적이 극락왕생․ 천국입성․래세영혼구원등을 종교목적으로 강조하면서  역사적 현실책임을 방기한다는 것이다. 맑스의 종교비판은 현실종교들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의식 부재를 비판 한 것이다.
  종교의 본질적 사명중에, 사후생명에 대한 신앙 곧 어떤 형태와 교의를 가지더라도 죽음의 극복문제를 중요시하고, 실재계가 감각적 오관으로써 감지되는 물질적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의 차원을 갖는다는 가르침은 중요한 종교기능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후의 영생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현세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역사변혁의 창조적 의지를 비종교적․반종교적 태도라고 매도하고 세계변혁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종교를 맑스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맑스의 그 점에서 종교비판은 오늘에서도 타당하다. 20세기 독일 순교자 디트리히 본훼퍼는 ‘세상 한 복판에서의 초월’을 강조했다. 종교의 참 모습은 탈역사적 피안종교가 아니라, 역사에 책임적으로 참여하면서 역사에 매몰되지 않는 ‘역사현실 한복판에서의 초월’의 종교라야 할 것이다.

3) 이데올로기적 가부장종교에서 치유와 돌봄의 모성적 종교에로

  현대 지구촌의 지역갈등과 문화충돌은 각지역의 지배적 종교들이 정치권력과 현실지배층들의 이데올로기로서 복무하면서,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 힘을 추구하는 강자들의 종교적 하수인으로 전락되어 있다는 역사적 현실에 기인하는바 크다. 맑스의 종교비판론이 포이에르바하의 ‘투영이론’을 넘어선다는 평가는 종교가 결국 지배이데올로기 최상부에 위치하여, 변혁되어야 할 모순된 셰계를 더욱 공고히 떠받히는 반동적 역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성찰에 있다.
  중동지역전쟁,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충돌은 그 지역에 살고있는 평범한 시민들과 순수종교인들의 충돌이 아니다.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으로 무장된 극우파 정치권력자들, 아직도 신정정치를 꿈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아직도 카스트제도의 관습적 종교문화에서 부귀를 누리는 보수적 힌두교 상층부 귀족들, 이들은 모두 가부장적 종교숭배자들이요, 종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변질시켜 이득을 챙기려는 무리들이다. 이러한 종교행태를 방치하는 한,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비판적 질문은 끝이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이데올로기적 가부장 종교를 극복하고 치유와 돌봄을 강조하는 모성적 종교심성의 회복을 강조하는 각성된 소리들이 크게 일어나고 있음은 인류미래의 희망 등불이다. 특히 생태계 파괴와 지구환경의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서, 모성적종교 심성에로의 방향전화의 촉구는 귀중한 문명사의 형태변화 몸부림이다. 거기엔 기계론적이고 적자생존적 약육강식의 문화가 아니라, 상생․치유․양육․돌봄과 같은 모성적 종교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4 ) 유한자 범주에 갇힌 닫힌종교에서 ‘없이계신 하나님’ 신앙의 열린종교에로

 현대무신론적 과학철학을 주장하는 리챠드 도킨스의 종교비판은 서구철학과 그 영향아래 발전해온 서구종교들의 특징인 ‘유(有)의 존재론’과 ‘초월적 신관’에 대한 합리주의자들의 비판이다. 서구철학과종교들은 상대적 유와 무를 동시에 비판적으로 초극하면서 다시 긍정하려는 동양종교의 ‘무의존재론’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지 않다. 일부 마이스터 엑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7)와 같은 위대한 부정신학(否定神學, Theologia Negativa)이 있지만, 서양종교의 대표격인 정통 기독교는 존재자의 범주에 갇혀있기 일수이다.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분도출판사, 2003)

 존재자들의 존재범주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등이다. 종교신앙의 대상들이 비록 최고존재이지만 결국 존재자의 범주인 시공개념과 인과율법칙과 실체범주에 예속되다면,  계몽된 성숙한 현대인들은 그러한 종교가 더 이상 필요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리챠드 도킨스의 분자생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무신론적 종교비판론이 아무리 현란해도 결국 ‘유한자 범주에 갇힌 닫힌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도킨스의 종교비판에 타당성이 있지만, 그는 아시아 종교들의 통찰 예들면 ‘없이 계신 하나님 신앙’( 다석 유영모)을 끝내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 『다석강의』, 932쪽 ( 현암사, 2006)
지금은 인류의식이 우주적으로 확대심화된 문명시대이다. 인류문명의 위대한 종교를 직간접으로 발생시킨 창시자들은 상대적 세계인 유무(有無)를 초월하여  ‘실재 그 자체’를 이미 꿰뚫어 증해(證解)한 분들이지만, 역사적 종교들의 교리․이론체계들은 아직도 인식론의 한계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형국이다. 미래종교는 우주의식을 지닌 열린종교라야 할 것이다. 진화론이나 현대 우주기원론등 기본적인 과학사상을 계속외면하는 종교들은 한 때 찬란했던 인류문명의 과거 유산으로 살아지고 말 것이다.

5) 독선과 전쟁의 산정의 종교로부터 포용과 평화의 계곡의 종교에로

  “종교가 과연 필요한가?” 라는 비판적이고 다소 경멸적 질문은 아주 고답적인 사상적 이론의 기초위에서 발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아주 현실적인 종교들이 드러내는 행태들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부정적 행태들 중에서 다종교․다문화 지구촌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키는 특정종교의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독선․ 독단적 진리주장 행태를 지적 하지 않을 없다. 그러한 종교적 독단주의자들은 종교적 진리를 관철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공격적 태도를 가지며, 항상 남보다 자기종교가 우월하다는 ‘산정(山頂)의 종교’ 숭배자들이다.
  종교독선적 배타주의자들은,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진리자체를 가르키는 ‘손가락들’이거나 ‘산정에 이르는 길들’ 이라는 것, 곧 건강한 의미에서 역사적 종교들의 ’역사적 제약성‘을  모른다. 셈족계 종교들인 이슬람근본주의나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의 의식구조에서 자주 발견된다. 모든 종교들은 ’궁극적 관심‘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귀의하는 종교대상에 대한 ’전적인 헌신‘(commitment)의 자세가 동반된다. 어느정도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가 당사자 그 자신에게는 다른 종교들에 비하여 더 우월하다는 자긍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 실존의 ‘전적인 헌신’이  진리에로의 ‘개방성’이나 이웃종교들의 ‘다양성’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여, 독단적이어야 할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인류사회는 진리체험의 다양성, 구체성, 차이를 존중하고 다름에 대하여 관용해야 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기독교입장에서 기독교적 표현법으로 말한다면,  역사적 참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totus Deus)을 보았다는 고백은 항상 중요하고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을 이루지만, 그 신앙적 실존의 고백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하나님의 모든 것‘ (totum Dei)이 다 계시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은 신비로울 것도 없고 더 배우거나 밝혀질 미래도 없다는 독단론에 빠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웃종교에서 배우면서 더 풍요로워지고, 더욱이 현대지구촌이 당면한 생존의 문제 곧 전쟁․기아․질병․생태계 파괴를 극복하기 위하여 공동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각성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이상 몇가지로 압축한 현실적 문제들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종교에로 성숙해가지 않으면, 구태의연한 과거전통 고수적인 종교로 남아 있는한 “종교는 과연 필요한가?”라는  깨어있는 현대인들의 비판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본래적 종교란 필요한 것인가 필요치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내거나 창설한 제작물이 아니라, 사람이 영물적 존재로 진화하면서 직립보행하고 두뇌구조가 형성되듯이, ‘인간다움의 존재론적 구성조건’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항상 거기에 함께 있는 인간생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존종교를 부인하거나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 일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종교적 존재임’을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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