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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 기독교의 역사인식과 죄책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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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한국 기독교의 역사인식과 죄책고백

김경재(한신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1945년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 한국 기독교의 역사인식을 자기 죄책고백적 시각에서 성찰함으로서, 과거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고, 닥아오는 21세기를  바르게 전망하려는 한 신학도의 엣세이다. 모든 글과 사관이 글쓰는 사람의 '사유의 존재 제약성'을 받는다는 지식사회학의 지적을 집필자는 겸손하게 받아드린다. 인간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므로 필자의 견해가 보편타당성을 지닌 역사해석이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 진보적 신학도의 입장에서, 그리고 필자가 이해한 신구약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예언자적 역
사해석의 입장에서 가급적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   
  필자가 해방후 53년간의 한국 기독교를 통시적으로  성찰하는데 '예언자적 역사 해석'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한다는 말은, 한국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맘을 가지고 얼마나  정의,자유,평화,가난한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에 투철 하였는가를 역사적 판단의 시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교세가 얼마나 증가하였는가, 교회숫자와 교회당의 건축이 얼마나 증가하였는가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글의 역사적 판단척도는 아니다. 다시한번  더욱 분명하게 말하면, 이 글은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정신'에서 한국 기독교의 지난 53년을 성찰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정신'이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게 하라, 모든 우상을 타파하라, 그리하여 성령 안에서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서라"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말한다.
  '프로테스탄드 원리'의 시각에서 필자는 한국의 해방정국 이후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역사적 시기구분을 좀더 미시적으로 세분하여 고찰하려 한다.물론 이러한 통시적 시기구분은 역사학적 시대구분이라기 보다는 한국 기독교가 매번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카이로스에 기초한 통시적 시기구분이다. 그 것들은 다섯 단계인데   (1) 해방직후부터 한국동란 까지, (2) 한국동란이후 4.19 혁명 발발까지, (3) 학생의거와 군사혁명기의 1960대의 역사공간, (4) 1970-80년대 공업화및 군사정부기간의 천민자본주의 정착과정과 교회성장론의 빛과 그림자,(5) 1990년대 자기성찰의 조짐 기간으로 나누어 고찰 할 것이다.

2. 해방정국과 한국 기독교의 첫번째 카이로스(1945-50):정치이념을 극복 못한 한국기독교

  한국 기독교가 맞이한 첫번째 카이로스는 해방직후부터 시작하여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주로 해방공간과 건국 과정에서 맞이한 역사적 카이로스 시기를 말한다(1945-1950). 헬라어 '카이로스'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내포한 긴장된 시간의 질을 말한다. 해방정국과 건국기간은 진정 한민족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첫번째 카이로스 였으나 한민족과 한국 기독교는 그 역사적 카이로스를 창조적으로 응답하는데 실패함으로써 20세기 후반 50년간을 질고,전쟁,독재,빈곤, 혼란등으로 점철된  역사적 고난으로 인해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식민통치로부터 한민족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 민족에게 돌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기치 않은 선물로 받아드려 졌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2차세계 대전의 종말과 때의 괘를 같이하는 한민족의 해방의 의미는 독일 나치당의 제3제국의  국가주의,   이딸리아 파시즘 및 일본 군국주의의 광란으로부터 세계인민의 해방이며, 특히 제3세계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자주독립한 주권국가로서의  새 출발을 의미했다. 한민족의 지도자들, 독립운동의 투사들, 상해임정의 요원들, 유학중인 지식인들은 일본의패망이 멀지않은 줄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1945년 8월15일  한민족에게 해방은 함석헌의 표현대로 "도둑같이 임한 해방" 이었다. "해방이 도둑같이 임했다"는 감정적 표현은 두가지 인데, 그 한가지는 준비되지 않은체 갑자기 임해서 당황한 우리민족 감정이요, 또다른 의미는 은혜로 임한 감격적 선물로서 해방이 인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의 감격도 잠간일 뿐,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하여 남북분활로서 각각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남한은 1945년 9월 2일, 미국 극동사령관이 조선분활점령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동년 9월11일 미점령군 하지중장이 군정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미군정 실시를 선포하였다. 북조선에는 물론 소련점령군이  진주하였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9월가지 3년간, 한반도는 해방은 되었으나 자주독립을 하지못하고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할통치가 이뤄져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대로 '신탁통치'가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소의 계도적 지도를 받는 3년간의 신탁통치를 치룬 셈이다.
  소위말하는 해방정국은 한국민에게 임한 하늘의 테스트 기간이었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스스로를 절제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관리 조직할 능력이 있나 없나를 테스트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남과 북에는 벌써 정치적 야심을 지닌 권력추구자들이 민족의 통일염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각종 명분과 이념으로 분장한체 하늘이 준 역사적 카이로스를 자기 권력추구의 기회로 도둑질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암투, 태러, 살육, 마타도어, 파업선동, 내란적 준동을 서슴치 않았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중심의 건국준비위원회,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들의 천대받는 입국, 미군정 지지를 받는 이승만, 김규식등이 남한에서 권력의 배분과 정치경제 형태를 놓고서 암투를 벌리고 있었다. 북한 에서는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의 점령군이 남한 보다 일사분란한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체계로 북한 사회전체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미국은 1947년 10월18일, 조선문제를 정식으로 국제연합에 제소했다. 극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에 의한 통일한국 정부수립안이 국제연합 총회에서 통과되었으나, 이북에서 국제연합 선거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했다. 1948년 3월 미군정 하지 중장은 남조선  단독선거안을 발표했고,   국내의 국론은 분렬되었다. 민족분단의 영구화를 초래할 단독정부 선거를 반대해야 된다는 입장과 현실적 차선책으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48년 4월19일, 평양에서 남북정당및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남한으로부터는  민족의 광복과 통일조국의 탄생을위해 애국충정 일심으로 평생을 헌신해온 김구선생 일행이 어떻게 하든지 남북분단을 막아보려고 평양회의에 참석했으나, 이미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북한 노동당의 치밀한 계획적 의사진행과  결론을 미리 결정해놓고 형식적 회의 절차를 밟는듯한 일방통행적 의사진행에 실망하고 돌아왔다. 한민족은 하늘이 준 첫번째 카이로스를 책임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는 최악의 과정을 밟고 말았다. 1948년 8월15일, 남한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수립을 세계에 선언했고, 북한에서는 같은해 9월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함으로서 해방후 한민족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개의 분단국가로 각각 갈라서고 말았다.
 해방정국에서 남북한의 분단비극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물론 국제 정치역학 관계에서, 이차대전후 이미 미소를 양극으로하는 동서냉전체제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 외부적 근본원인이다. 한반도의 분활은 이차대전후 독일의 분활과도 다르고, 월남의 남북 분활과도 다르다. 남북한 정권은 사실 미국과 소련의 세계제폐의 야욕에 의한 전초기지 설정이라는 국제전략적 계획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분활되었다. 남북한 땅에 점령군으로서 주둔한 미국과 소련의 지지를 받은 정치세력을 내세워 대한민국이라는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을 내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아세아의 지정학적 구도에서 한반도의 이념적 지배는 냉전시대 아시아 전체와 세계전체의 정치이념적 투쟁에 있어서 결정적  지렛대 역활 또는 돌쩌귀 역활을 할 수 있는 군사전략적 요충지 선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방정국의 기간동안 남북한 사회 안에서 벌어진 인간성 말살의 비극적 사건은 아직도 충분히 역사적으로 그 진상이 밝혀지거나 그 비극적 사건의 의미가 한민족에게 스스로 자각되지 않은체 방치되어 있다 할 것이다.  북한 땅에 진주한 소련점령군은 고상한 인간 해방군만은  아니었다.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사건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은 그러한 사건을 직접목도하고 남하를 결단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사실로서 판명이 된다. 1948년 11월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초토화작전을 벌려, 제주 양민 15,000-30,000명을 집단 살해한 '제주 4.3 민간 살해사건', 동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여수 반란 사건'과 '대구 반란사건'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한 사건 속에는 이념적 냉전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계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일부 무장 게릴라 투쟁이 원인제공자로 지적되어야 하지만, 희생당하는 자들은 항상 무차별 학살로 응징하는 우익 군사작전에 희생양이 되어 이유도 모르고 좌우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수많은 민중들의 억울한 죽음과 양민 학살사건이 되었다. 한민족은 이러한 이해도 되지않는 이념투쟁 속에서, 죽이고 죽임당한 반인간적 행동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거나 참회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남북한의 분단비극을 미소 양대 국가의 힘의 대결이나, 국제 정치역학적 희생이라고 분단 책임을 외부에로만 돌릴 수 있는가?  미소양대 세력이 한반도를 분활 점령하고 , 각각 그들의 이념을 대행노릇하는 정부기관을 세우기 전,  이미 해방정국에서 한 민족은 구심력을 잃고 분열되어 있었고, 그 이념적 분열조짐은 1920년로에까지 거슬러 올가가야만 한다. 특히 정치세력자들의 정권야심은 민족, 국가,자주독립,자유,평등,인민해방등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대부분의 민중들은 전문정치꾼들의 조직적 정치선동만 없었다면, 어차피 새로 시작하는 새나라 국가 건설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장점과 사회민주주의 기획경제의 장점을 혼합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사회 건설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비젼도 없었고, 열정도 없었고, 마음을 비운 정치인도 없었다. 그것이 해방정국 한민족의 비극이었다.  
 이 글의 목적이 해방정국을 둘러싼 남북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동향이나 원인분석에 있지 않고, 그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했고, 어떤 반응을 했었는가를 성찰하는데 있으므로 당시 정치상황을 이런정도 언급하고 한국 기독교의 응답이라는 본래 주제에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한국 기독교 교회사가들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는 이 격동하는 민족진로의 방향모색을 해야하는 카이로스 기간에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남북이념갈등의 분쟁을 화해 조정시키고, 새로운 신생 근대국가형성의 이념을 제시할 지성적 역량도 도덕적 순결성도, 영적 직관력도 가지지 못한 집단이었다. 무엇보다도 36년동안 일제 식민통치기간 와해되고 위축되고 황폐화된 교회를 '재건'하고 교단적 조직을 재정비하며, 일제시대에 특히 신사참배를 용납하여 현실에 적응한 대다수 교회지도자들과 소위 말하는 '출옥성도'간의  양심논쟁으로 중요한 해방정국의 기간을 탕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너무나 작은 기독교라는 종파의 내부문제에 집착한 남어지, '날씨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때를 읽지 못하는' 눈먼 지도자 집단이 되어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을 앞에 내세운 볼세비키 혁명적 공산주의 정권이 한단계 한단계 사회전체를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로 재구성해가면서 북한의 기독교회도 당의 통제와 지배하에 두거나, 점진적 말살을 획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북한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의 2,000교회와 30만 신도의 이름으로 신앙과 집회자유, 주일성수 권리, 정교분리등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한경직, 조만식씨를 중심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의 결성과 북한사회의 해방정국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정치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려는 일련의 노력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치밀한 정치공작과 전략전술에 비하면 순진하기 이를데 없는 셈이었다. 마침네 북한 기독교는 1946년 '기독교도 연맹'이라는 반강제조직체 안으로 통폐합 당하게 되고, 교역자 양성의 신학교 교육이 제한과 제지를 받게 되었다. 수많은 기독교 교역자들과 조만식 장로등 지도자들이 투옥, 고문, 순교,재산 몰수등을 당하였기에, 종교말살의 가혹한 정책을 편 초기 북한 공산당의 종교정책 로선에 의해 초토화되고 좌초된 북한 기독교의 지도세력들과 신도들은 마침네 대거 '남하'를 결단하게 되었다.
 한편 남한의 기독교는, 남한에 군정을 펼친 미국의 종교정책을 힘입어 신앙과 결사 집회의 자유를 맘껒 누렸다. 그러나, 남한 교회는 민족의 카이로스에 책임적으로 응답하기엔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도 약했고, 도덕적 영적 능력도 부족하였다. 우선 무엇보다도 일제시대 신사참배에 저항한  '출옥성도' 지도세력과 기존 지도세력과의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진정한 의미에서 맘으로부터 스스로 울어나오는 참회, 그리고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연민의 용서와 화해정신이 지배하지 않았고 바리세적 단죄와 반발이 주조를 이루었다. 거기에 교권에 대한 영적 탐욕이 가세하여 '출옥성도' 지도세력측이나, 기존교권세력측이나 교회분열을 게의치않는 분쟁만이 지속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요체라 할 수있는 은총의 신앙, 죄의 용서, 사랑, 화해등의 분위기는 찾아 볼수 없고, 바리세적 도덕주의와 신앙적 율법주의가  남한의 기독교 교계를 지배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현실적으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등 개신교 각 교단들은  교단정비와 교단총회의 행정적 체계를 확립하고 집안단속을 하느라 민족의 운명이나, 사회윤리적 선도책임등에는 전혀 맘쓸 겨를이 없었다. 해방정국에서 남북한 기독교의 숫자는, 기독교 선교역사 70년이 지난 1945년 현재로서, 신도 70만명에 불과 하였으니, 당시 한국민 총숫자에 비하면 인구비례 기독교 신자의 백분률이 2.5% 밖에 아니되는 종교집단이었던 것이다.
  비록 전체 국민 숫자중 2.5% 미만의 교세를 가진 기독교 였지만, 혼돈의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집단을 제외하고 한국사회를 선도해갈 다른 종교집단이나, 사회정치 집단이 있었는가하면 그렇지도 못하였던 상황이었다. 오로지 비밀훈련과 학습을 받아 조직된 좌익계 혁명이론가 학생운동가 정치운동체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해방정국에서 좌익계운동에 맞설 이념적 지도능력은 아무리 약해도 기독교계에서 나오거나 기대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예들면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를 중심으로한 젊은 청년들을 사상이념적으로 방향제시를 한 지도세력들은 당시 진보적 기독교 사상가를 대변하는 김재준, 함석헌, 한경직,장준하,강원용씨등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민족의 나갈길과 세계사조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좋은 예로서 당시 조선신학교 학장이요 교수였던 김재준 목사는  1945년 8월 어느날 '선린형제단'이라는 기독교 청년집회에서 "국가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이라는 부제가 붙은 역사적 강연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강연을 한바 있었다. 이 강연을 하는 때는, 남북한에 각각 어느 정권도 정식으로 성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아무런 사상적 제약을 받음없이 당시 한 기독교의 지성인이, 해방정국에서 어떤 국가 건설의 비젼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볼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된다. 대체로 건국 이념의 기조는 기독교적 신앙에 기초를 두고서,  자유민주주의이념과 사회주의 이념을 절충한 절충적 제3의 로선 곧 민주사회주의적 로선을 피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공 김재준과 같은 초기 입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 였고, 북조선 사회주의국가 성립당시 교회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받은 한국 기독교의 박해받은 생생한 기억은 그 뒤 한국 기독교로 하여급 반공투쟁의 선두에 서도록 만드는 실질적 계기가 되었고, 그 박해경험은 한국 기독교의 이념적 초월능력을 마비시켜버렸다. 교회는 좌우익 이념을 넘어서서 화해와 진리의 증언을 해야 하지만, 역사적 현실교회는 기독교적 가치관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일치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방정국이 지난 뒤에도 거의 40여년간 한국 기독교는 남북화해의 역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남북간의 이념분쟁을 초월하여 새로운 물꼬를 트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반통일적 세력집단으로서 냉전체제를 고착시키는 집단세력으로서 일정기간 역사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좋게 해석하면 한국 기독교는 1945-1985년까지 40년간 남한 사회에서, 강력한 반공세력의 최후 보루로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내는 순기능을 감당했지만, 바로 그 순기능을 뒤집어 해석하면, 남북분단의 고착과 냉전체제의 장기화, 상호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더 높게 쌓아가는 비극을  가중시키는 역기능으로서  작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한 정부의 초기 단계에, 국정을 수행 할만한 훈련받은 지식인과 민주주의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이승만정권 안에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많이 입각하였고, 사회 각계각층 곧 교육계, 문화계, 사회사업계, 자연과학계등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않게 많이 있어서 초기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건국과정에 일정한  공헌을  한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만사엔 빛과 그림자가 있음일가? 바로 기독교 장로로서 이승만 씨가 대통령직에 있음으로 인하여, 당시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한국이 이제 거의 기독교 국가나 된양 착각하게 되었고, 이승만 정부의 부정과 비리를 볼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눈먼장님들이 되었다. 심지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적 정권유지를 떠받혀주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국민의 심판과 하늘의 심판이 1960년 4,19 민주학생
의거로서 나타났고, 5,16 군사혁명으로 나타났지만, 그보다 앞선 더 큰 민족적 시련이자, 기독교의 시련이 동족상잔이라는 1950년 한국동란의 사건이었다.       

3. 한국전쟁과 한국 기독교의 반응(1950-60):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위배

  한국전쟁의 기원과 그 근본원인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연구서적이 한국에도 적지않게 많이 소개되어 있다. 흔히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할 때, 전통주의설, 수정주의설, 그리고 제3의 시각이랄 수 있는 종합주의 시각이 있다는 것은 이제 어느정도 상식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정통주의 설은 공산주의자들이 냉전체제 상황에서 세계공산화 계획의일환으로서 스탈린이 명령하고, 모택동이 지원하여, 김일성이 집행한 전쟁으로서 전쟁의 발발 책임을 소련, 중공, 북한 공산주의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설이다.  수정주의 설이란, 대체로 극단의 진보적 학자임을 자처하는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는 설로서, 냉전상황에서 팽창주의 정책을폈던 것은 소련이 아니라, 국제 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면 미국 이었으므로,  미국이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함정을 팠다는 견해이다. 1년이상 남북한 간의 산발적 충돌을 방치하고, 남한 군대에게 아무런 중무장을  시키지 않고, 1950년 맥아더는 충분히 한국전재의 발발 위험이 있음을 군사정보를 통해 감지하면서도, 미 국무성 국무장관 에치슨이 "한국은 미국의 방위권 밖에 있다"고 1950년 1월에 선언함으로서 남침을 유발시켰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건전한 학자들은 제3의입장 곧 종합주의 설을 지지한다. 종합주의 시각이란 한국전쟁의 근본원인은  세계냉전구조의 축소판으로서 '세계냉전의 한국적 국내폭발'이라는시각과, 동시에 한반도 내에 축적된 모순의 충돌 곧 국내정치적 계급투쟁과 민족모순이 폭발한 '한민족 국내 모순이 국제화 된 전쟁'이라는 두가지 요인이 종합적으로 상승작용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세번째 입장 곧 종합적 시각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북한이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할 때,  준비된 탱크, 대포, 비행기등 중무장을 가지고 공격해 왔다는 사실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김일성 북한 정권은 한국전쟁을 '반제민족독립운동'으로서, 그리고  '남조선 인민 해방운동'으로서 규정하고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으로 동족상쟁의 민족학살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떤 이념적 명분을 내걸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는 집단적 살인행위를 통하여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쟁자체를 야만행위로 규정하며, '살인하지말라'는 신의 절대게명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나 그 전개 과정을 다시 언급하는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전문적인 학문 분야에서 다룰만큼 다뤄지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전쟁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드릴 것이냐 이다. 3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쟁의 이 전쟁을 치루고 한민족은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했던가, 그 전쟁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고 있는 것인가, 한국 기독교는 엄청난 세계적인 전쟁 한국전쟁을 치루고 그 전쟁의의미에 대한 충분한 반추를 했던가 등등 진지한 자기성찰 하려는데 있다. 한국전쟁이 지닌 신앙적,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기 전에 한국전재의 참상에 대한 통계적 자료에 관하여 잠간만 언급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어린아이들의 전쟁도 아니고 옛날 부족간의 전쟁도 아니고,남북한 한민족 형제간의 총력전은 물론이요, 온세계 국가가 달려들어,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여 약3년간 치룬 전대미문의 가장 처참하고 이상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1950년 6월25일 남북한 사이에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국 ,소련, 중국등이 개입하게 되고, 유엔군 16개국이 남한을 지원하려 참전하였으며, 비공식적이나마 사회주의공산국가들은 군기술고문으로 또는 공군병력으로 북한을 지원하였다.  이 엄청난 전쟁은 만 3년간 진퇴를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서 포성이 멈춘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과는 전쟁발발 당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형국이다. 어느 편도 승리하지 못하였으며, 북위 38도선으로 직선분활되었던 국경선이 휴전당시의 전선상태로 고정되어 155마일 휴전선이 동부에서는 38선 이북으로 올라가고 서쪽에서는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는 차이 뿐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인간이 모여살기 시작한 이래 가장 참혹하고 격렬한 전쟁이었다.
  남한의 전쟁피해는 1950년 6월과 9월말사이에 남한의 90%가 북한군에 점령되었으며,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이후 서울은 다시한번 공산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51년 유엔은 발표하기를 한국전쟁 발발 첫해엔 남한의 전쟁피해액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해 남한의 GNP 총액보다 많은 20억 달라에 이른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공공시설, 운송설비의 80%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관공서의4분의3과 주택의 50% 이상이 파괴 되었다.농토의 황폐화와 관개시설의 피해도 커서 농업생산량의 27%가 감소되었다. 무엇보다도 인명피해는 남한에서만 100-150만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 중에서 절반이상이 민간인 이었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는 그의 책 "한국 기독교사"속에서 한국전쟁중 파괴된 남한 교회당숫자는 267개소이상이며, 납치 순교당한 목사와 장로급 지도자숫자는 232명이며, 학살당한 교인숫자는 이루 말 할수 없다고 했는데, 차라리 기독교회의 피해는 민족사회전체가 당한 피해에 비하면 비교가 않된다.
  북한의 전쟁 피해는 남한보다 더 심했다. 전쟁이 후반기로 돌입할 수록 공군력을 상실한 북한은 미군과 유엔군의 공중폭격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더 컸다. 유엔의 연합군파견 결의에 의해서 미군을 주력부대로 하여 구성된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북한은 1950년 반격을 당하여 1950년 12월, 중공의 한군전 개입직전엔 북한 영토 90%가 점령되었다. 북한은 전쟁발발이후, 처음 2년동안 당시 인구 40만명이었던 평양은 완전히 폭격으로 말미암아 초토화되었다. 1953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평양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의 히로시마와 비슷하게 보인다. 북한의 중요 산업기반 80%가 파괴 되었다. 북한인구의 전쟁 사망자숫자는 남한의 숫자와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다. 공식적으로는 120만명에 육박했는데, 남북한 합하여 300만명에 가까운 인명의 사망및 부상자 숫치는 제2차세계대전의 참상보다도 더 큰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생긴  상이군인, 전쟁고아, 미망인, 정신질환자, 불구자들을 생각하면 그 참화를 필설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한 한국전쟁 이었던가, 누구를 위한 전쟁 이었던가? 세계2차대전 이후 세게에 편성된 냉전의 긴장이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군사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곳에서 불거져 터져나온 것이라면, 천하보다 중요한 생명 300만명의 사상자를 값으로 지불하여 치룬 동서 세력권이 지지했던 '이념'이란 것이   오늘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인간들에게 평가되고 있는가? 죽은자들은 말이 없지만, 한국전쟁을 치룬면서 한민족의 심성 속에 쌓인 원한, 살의, 복수심, 증오심, 파괴적 마성, 인간성 경시등 말로다 할 수 없는 부정적 업보들은 살아지지 않고 한민족의 오늘의 생명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들은 해원되고, 복수심은 화해와 용서되고, 찢기고  상처난 영혼들이 치유되지 않는한, 한반도엔 인간다운 사회적 공동체가 꽃피어 날수 없는 것이다.
  전쟁기간과 전쟁후 한국 기독교는 물론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거두어 돌보는 인간에 실천의 사회 복지사업, 전쟁기간동안과 그 후에 밀어닥치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기독교 의료기관들의 헌신적 봉사, 기독교적 비젼을 교육을 통해 실현해 보려는 기독교 사학들의 교육사업, 열악한 산업기반을 기초로하여 산업을 일으켜보려고 노력한 기독교 기업가들, 각계각층에서 최선을 다한 기독교 신앙인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않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작은 물줄기보다는 한국 민족사 전체라는 큰 물줄기에서 볼 때, 한국 기독교가 한민족 공동체 속에서 치유와 화해와 정의와  평화의 멧시지를 바르게 선포하고 복음의 본질을 실천으로 준행했는가를 준엄하게 되 돌아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부터 4.19 학생의거가 터진 1960년 까지 한국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깊이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점을 들어 1950-60까지 한국 기독교는 실패의 역사요 무익한 종이라는 주님의 꾸중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첫째, 한국 전쟁기간중 인간의 극한 상황속에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신도가 보인  몰염치한 비도덕적 행태는 비신자와 다름이 없는 평균이하의 수준이었고, 도리혀 기독교가 공산주의 정권으로 부터 받은 피해와 박해가 증오심으로 변하여, 철저한 반공주의 집단이 됨으로서, 한국 기독교는 민족 화해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기독교 신앙이 반공주의적 정치이념에 종속되었고, 미국이라는 세속적 국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기독교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라는 이분법적 사유체계가 교인들의 맘에 단순사고, 평면적 사고, 조건반사적 사고를 하도록 주입되었다.
  둘째, 한국동란 직후, 한국 전체사회가 극심한 경제적 빈곤과 사회의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한국교회는 민족을 위로하고 치유하기는 커녕, 교파적 분파주의 운동에 휩쓸려 자해상태나 다름없는 교회분렬과 교권투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특히 장로교회 교단은 진정한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근본주의적 교리주의 기독교에 의해 굳어진 교권주의자들의 바리세적 교권횡포가 극심하여 형제의 신앙양심을 이단이라고 정죄 후 교회에서 축출하고,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 선교교단의 한국 지부인양 주체성없는 신학적 사대주의와 종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셋째, 한국동란 기간에 상처받고 영혼이 메말라버린 대중신도들은, 돌덩어리처럼 굳어진 교리주의적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성적이고 즉물적이고 무교적인 사이비 신앙에 휩쓸리고, 비복음적 부흥운동에 휩쓸리게 된다. 역사적 시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그 근본원인을 파해처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진정한 신앙운동을 일으키지 못하고, 박태선장로의 신앙촌 운동, 문선명의 기독교통일신령협회 운동같은 사이비 종말론적 신앙운동에 양떼들을 방치하거나 그리로 네몰고만 셈이 되었다.
  넷째, 전쟁기간과 휴전 이후, 한국사회는 이승만정권의 자유당  세계였는데, 이승만정권은 그 출발당시부터, 일제시대의 부유한 지주들과 일본경찰 출신세력들, 즉 반민족주의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도리혀 그들을 남한 정부의 초기에 이승만의 정적들과 좌익세력들을 견제하고 억압하는 경찰력으로서 활용했기 때문에 부패, 불의, 합법성의 결여를 이승만 정권은  태생적으로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부패와 불의에 대하여 예언자적 비판을 전혀 가하지 못하고, 동조, 은폐, 지지하는 죄업을 범했다. 이승만 정권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 '대통령 만수무강'을 노래하는 어용적 기독교로 전락해 버렸다. 민족주의적 국가의식도 없었고, 근대 시민사회적 비판의식도 없었다. 선거가 부정투표를 공개적으로 강행하고, 경찰력이 국회의원을 강제연행 테러하고, 정부관료들의 부패가 수뢰를 밥먹듯이 하는데도 교회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수수방관 하였다.
  다섯째, 이 시기 한국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복음의 본질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목적과 그 신학적 변증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 있었다. 다시말해서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 성속의 관계를 분리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성육신적 영성을 전혀 결여하고 있었다. 교회가 세상에 존제하는 근본적 존재 의의가 세상 속에서 인간영혼을 빼내어 노아방주와 같은 교회당 안으로 데려와서 다시 세상에 물들지 못하게 한다는 죤번연의 '천로역정'식의 타계주의적 영성, 몰역사적 영성, 세상도피주의적 영성, 관념주의적 구령주의적 기독교가 한국 기독교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복음이해로부터 세상을 변혁시킬 창조적 힘과 운동이 나올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너진 상수리 나무에서 싺트는 작은 창조적 소수자들의 예외적인 몸부림을 굳이 찾는다면, 고난사관에 의해 한국현실을 진단하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와 리챠드 니버의 <문화와 그리스도>를 번역하고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를 '문화변혁설'로 초지일관 파악하면서  그렇게 몸으로 증언하고 산 김재준의  역사참여신학이 있을 뿐이다.
   이상의 다섯가지 이유 때문에, 1950-60년 기간 한국전쟁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의 헌신적 봉사활동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볼 때, 한국 기독교는 실패의 역사였다. 역사는 동시에 심판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국 기독교의 실패와 이승만 정권의 실패는 두가지 전혀 상반되는 성격의 혁명으로 인해 심판받고 붕괴되고, 더 무거운 역사적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4. 두 차례의 혁명과 기독교의 대응(1960-70): 등잔에 기름이 떨어진 처녀의 눈뜸

 1960-1969년 까지 10년간의 한국역사는 혁명의 흙바람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혁명에 의해 문을 열고 1969년 박정희 집권당의 불법적 3선개헌 파동으로 막을 내려 얼룩진 '어둠의 자식들'의 광란의 밤의 역사였다. 굴욕적이고 불법적인  '한일협정'이 군사혁명정부에 의해 체결강행되고, 미국의 사주를 받아 월남전에 '용병'시비가 붙는 '월남파병'을 강행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탈법적인 '4대의혹사건'이 세상사람들의  도덕적 가치관을 혼란에 빠뜨려 무법천지로 만들고, 마침네 군사혁명아들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삼선개헌'을 강행하여 역사의 전진을 정지시킨 시기가 1960년대 한국사였다. 이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반응하며 증언하고 투쟁하며 죄책고백을 했던가를 돌이켜 보기로 하자.
 4.19 학생의거는 기성세대와 기독교 교회들이 세상에 만연하는 불의와 범죄적 악을 보고서도 비겁과 야합으로 인해 아무런 저항이나  말도 못할 때, 순수한 젊은 학생들의 양심의 입을 통해 하늘이 죄많은 한민족을 향해 '정의 의 공법'을 유린하는 한민족을 고발하고 응징한 놀라운 사건이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씨의 종신 집권을 위한 무차별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유린하고 부정하는, 선거행위를 형식적 치장으로 국내외에 전시하는 요식행위였다. 보다못한 민심은 자유당 정권을 떠난지 오래지만, 경찰국가와 반공법으로 위협공갈하는 타락한 정권에 대해 목숨 내놓고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다. 있었다면 장준하의 <사상계>지를 통한 외로운 고투가 있었을 뿐이다.
 1960년 3월15일, 마산에서는 고등학생, 청소년,   행상인, 하급점원들, 자동차운전조수, 식당심부름꾼, 구두딲이등 소위말하는 '민초'들이 주류를 이루는 거센 의분의  데모가 일어났다. 당황한 경찰은 발포로 임하여 데모데중 26명이 죽고 86명이 부사당하고 체포구금된자가 220명이었다. 한번 불씨를 얻은 의분의 불길은 부산,대구,광주, 청주,전주, 수원, 이리, 진주, 창녕, 하동등지로 번져가더니, 4월11일, 마산데모 때 최루탄이 눈에 박혀 무참히 죽임당한체 바다에 던져졌던  김주열 소년의 시체가 바다수면 위로 떠올랐다. 4월18일 고려대학생 3,000여명이 부정선거 무효를 선언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뒤 서울의 모든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데모에 가담했다. 불의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경찰서들이 부셔지고 불에 탔다.  광화문에서 발포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수많은 학생이 피를흘리면서 쓸어졌다. 당황한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비상계엄령을 무시하고 4월25일 대학교수단 258명이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랭카트를 들고, 경찰의 중립화, 학원의자유보장, 지식인의 정치도구화 배격등을 주장하였다. 마침네 이승만은 민의의 봉기와 순수한 학생들의 의분을 중심으로한 국민들의 저항권에 무릅을 꿇고 하야성명을 냈다.
  4.19의 혁명기간동안 한국 기독교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한국 교회는 이승만정권에 대하여 건국당시부터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가 감리교 교인이고, 투철한 반공주의자라는 점이 맘에 들어 무조건 이승만을 감싸고 도는 행태를 보였다. 그리하여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지극히 미온적이거나 정권지지세력으로 '콘스탄틴적 기독교' 냄세를 분에 넘치게 풍겼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심팜이자,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간접적 심판이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4.19 학생혁명에 대하여 1960년당시 분명한 지지성명하나 낸적이 없었다. 이승만정권에 대한 비판은 곧 용공으로 치부되는 냉전시대  안보상황에서, 자유당정권의 몰락은 곧 용공세력의 득세라고 생각하는 두려움과 잘못된 '레드컴프렉스'를 한국 기독교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달리 말해서, 구약과 신약의 예언서와 사도서신과 복음서를 그렇게 열심히 예배 때 마다 읽으면서도, 성서적 신앙의 중심축을 이루는 '하나님의 공의' 사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념적 기독교, 초세간적 기독교, 영지주의적 기독교로 변질해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씨의 대통령직 하야로인해, 남한의 정국은 민주당 집권시대로 넘어갔고, 윤보선씨가 대통령으로 장면씨가 국무총리로 짜여진 '내각책임제'가 출범했다. 그러나 민주당정권의 출범은 비능률적이고, 정파간의 파쟁, 민생고의 가중, 사회기강의 문란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다. 이런 혁명전후의 혼란기를 틈타 19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 를 중심으로한 5.16 군사반란 구테타가 일어났다.군사혁명군은 '혁명공약 5개조'라는것을 발표했는데,  그 중요요지는 반공국시, 부패구악일소, 민생고 해결, 승공힘의 배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상에 열거한 과업이 완수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인사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군인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정권을 잡고 권자에 오른 박정희 씨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만주군관학교를 1942년에 졸업한후, 일생을 군에 몸담은 인물이다. 그의 맘 안 에는 한민족의 수백년에 걸친  '가난'에 대한 한이 있을 것이다. 절대빈곤을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시 정보장교출신으로서 철저히 권력집중력과 용인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독재형의 인물이며, 민주주의적 생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자기에게 반대하는자나 정적에겐 가차없는 보복과 제거를 서슴치않는 인물이요, 정치에 있어서 도덕주의나 덕치주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박정희의 군사정권의 치명적 병균은 힘의 숭배철학, 마키아벨리즘, 도덕냉소주의, 결과지상주의,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절차의 합법성 무시등이었다. 그래서 그 정권 안에서는 줄곧 정경유착,언론말살,  매수와 수뢰, 고문과 린치, 금권지상주의, 한탕주의, 형식적 과시주의가 판을친다. 소위 박정권 초창기 4대의혹사건이 그것을 보여주며, 국민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한 36년간의 일제식민통치를 얼마않되는 보상금을 지급받고   황급히 체결한 '한일협정서', 월남파병,그리고  비밀리에 중앙정보부를 조직하고 공화당을 창당하는 행태에서 드러난다. '혁명공약'은 휴지가 되고. 정권에 맛을 보고 중독된 일부 정치군인들은 내친김에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만용과 만행을 거듭하였다. 군정을 연장하고, 대통령직 후보에 나서 합법을 가장한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60년대 역사적으로 어둔밤, 흙바람 일어나는 혁명의 시기에, 한국 교회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등잔에 기름떨어진 처녀들'과 같이 당황하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형국이다. 오랫동안 잊버렸던 민족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참여의식에 눈을 뜨게 된것이다. 그리고 예언자적 종교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선포해야 할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점차 각성과 분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한국 기독교의 각성과 자기정체성 회복에 대한 때늦은 눈뜸은, 1965년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을 위하여 영락교회에서 회집한 한국 기독교회의 신앙집회에서 부터 시작되어, 신학적 논쟁으로서는 기독교사상지를 중심한 1965년부터의 '토착화 논쟁', 그리고 1969년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결성에 참여하는 진보적 기독교 세력의 활동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군사정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미국의 동아시아 정치적 외교전략에 따라, 미국은 박정희정권을 부추겨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체결하도록 회유와 압력을 가해왔다. 그렇잖아도 혁명정부를 이끌어가는데 돈이 궁색한 집권당으로서는 마다할 리가 없었다. 김종필씨와 오오히라(太平)간의 양국 국교정상화 한일협정 비밀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때에도 그렇지 않았던 한일관계가, 박정권 때에 이르러 말 할수 없는 굴욕외교 자태를 보이며, 민족의 자존심과 국제정치법상의 도의와  적법절차를 무시한 행태가 한일간에 이뤄지고 있었다. 국민은 분노하고 학원과 민간에서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36년 일본식민통치하에 희생된 애국선렬들과 조상들을 욕보이는 태도였다. 일본과 철천지 원수나라로 지내자는 것은 국민의 진정한 뜻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이 식민통치기간 누를끼친 표시로서 '보상금' 몇푼을 받고 과거문제가 다 해결된듯이 넘어가려는 굴욕외교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일본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통치기간에 저질은 모든 죄과에 대한 공식적 사과와 한민족의 납득할만한 태도가 있어야 양국의 관계가 정상화된다고 본것이다. 양국관계는 '보상금'이라는 돈으로 해결될 그런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인륜과 공법과 도덕률에 기초한 진정한 '역사정리'에 있었던 것이다.
  1965년 7월초, 한경직, 김재준,그리고 이태준씨등 뜻있는 교계지도자 10여명은 '한일굴욕외교'문제에 교회가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생각에 동감하고 거교회적 신앙적 결의를 표하기로 합의하였다. 집회는 영락교회 공식예배시간을 연장하여, 대강연회를 가지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로서 교회 기도회나 예배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어떤 집회허가도 당국은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회는 대성공이었다. 한경직목사와 김재준목사가 강사로서 책임을 다했다. 이 영락교회에서의 '한일굴욕외교 반대 신앙집회'의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이 때를 기점으로하여, 한국의 기독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적어도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는 '민족'과 '현실역사'문제의 한복판에 복음의 빛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 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로서 한국 기독교의 본래전통 곧 3.1운동이나 조선조 말 개화기에 보여주었던 민족의 운명과 고난에 깊이 신앙적 입장을 가지고 참여하는 한국 민족교회로서의 전통에로 다시 돌아올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공화당 정권은 1965년 6월22일, 국민의 열화같은 반대를 아랑곳 하지않고 한일협정 조인을 마쳤고, 8월14일에 야당 국회의원들이 퇴장한 상태에서 국회통과 비준을 강행했다. 더우기 그날이 8.15해방 전일이어서, 국민감정은 마치 '한일합방' 때 당한 비통한 감정과 같은울분을 누를 길 없었다.
  사회정치적 현실마당에서 격렬한 근대화구호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한일굴욕외교반대운동, 월남파병 찬반운동등이 일어나는 동안, 교회 신학자 써클에서는 세계적 교회의 흐름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로마 카토릭교회가 1962-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가히 놀랄만한 자세로 교회를 쇄신하고 선교지 문화공동체의 문화종교적 유산을 존중하는 멧시지를 내고, 평신도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모든 전레(典禮)행위를 해당교회 모국어로 토착문화적 요소를 복음의 빛에 비추어 용납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세계교회 협의회(W.C.C)도 뉴델리 대회를 계기로 '복음의 토착화'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1965년 <기독교사상> 誌는 토착화논제를 제기하고 수십명이 몇년간 참여하는 지상 대토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선교80주년을 넘기면서 그동안 서구신학을 수입하여 복송하던 시대를 마치고, 좀더 주체적인 한국인으로서 책임적 신앙응답과 신학적 증언을 하려는 자각의 나타남이었다. 비록 토착화논의는 한국보수적 교회들의 부정적 참여로 인해 진보적 기독교교계에서만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 교회사적 문화사적 의미는 자못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박정희 공화당 정권은 집권10년을 지내고 난후, 헌법이 대통령직을 2선이상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것을 고치기 위해 박정희씨의 대통령직 3선을 가능케하기 위해, 다시말해서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헌법개정을 음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야세력과 기독교 진보세력 간에는 연대전선이 형성되고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그 위원장에는 전혀 비정치적 인물이면서도 민주주의 신념에 투철하고 도덕적 고결함으로 존경받는 진보적 기독교계 지도적 인물 김재준목사를 추대하게 되었다. 함석헌,이병린,장준하, 김상돈, 유진산, 김대중, 박형규 씨등 재야세력권 전체와 야당정치인들이 총단결하여 삼선개헌시도를 저지하려 했다. 효창공원에서 60,000여명이 모인 군중집회를 개최하여 민의를 만천하에 천명했다. 그러나 공화당정권은 국회 '제3별관'이라는 어두컴컴한 뒷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밤을 틈타 날치기 불법통과를 시켜버렸다.
  1960년대를 총체적으로 뒤돌아 볼 때, 혁명의 시기요 혼돈의 시대였다. 오랜동안 빈곤과 전근대적 농촌사회 속에서 살던 한민족이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전통문화, 가치, 가족관계, 사회규범이 해체되거나 혼돈상태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불행하게도 한국정치의 후진성으로 말미암아 두번의 혁명이 일어났고, 검을 손에 쥔 군인들의 정치개입과 군부집권이라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크게 보수적 정통교회와 진보적 사회참여 교회로 양분되고, 전자는 정교분리 원칙하에 현실정치에 관련된 일체의 행동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몰역사적 이었다.그러나, 보수적 기독교계는 침묵을 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불의한 현실을 인정하는 과오를 범했다. 진보적 교계는 비록 숫자적으로는 많지 못하였지만, 적극적인 역사현실참여를 통하여 시대의 양심세력으로서,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의 파수꾼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도시빈민층이 형성되고, 초기자본주의적 폐해가 사회도처에서 나타나는 시점에서 복음과 세계현실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신학적 문제가 중요한 촛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민족, 역사현실, 민중현실을 서서히 재발견하는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5. 광야의 세가지 시험에서 모두 실패한 1970-80년대 한국 사회와 기독교

 1970-80년대의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군부독재가 박정희 정권을 이어받아 내리 30년간을 지배하는 군부독재시기로 규정된다. 그 기간 동안 형식적인  적법절차를 밟는 시늉을 했을지라도역사적 양심과 역사이성은 그것을 민주적 절차에 의한 합법적 정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노동자 농민의 저임금 노동력에 기초하고, 재벌기업이 외국 차관을 들여와 단시일안에 경공업부분에서 북한을 능가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능률성을 극대화한 시기로서 황금만능주의와 저임금  도시빈민의 인권문제가 위험수위를 넘었던 시기였다. 문화적으로는  일본 미국등 자본주의 문화의 예속이 가속화되고, 종교 특히 기독교는 미국 자본주의적 무한경쟁및 무한 성장론철학을 교회선교신학으로 채택하여 '교회성장론'과 '삼박자 축복신앙론'으로서 교세의 체중이 불과 20년만에 4배를 증가하여 교세 1,000만을 헤아리는 비대증세에 걸리게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커다란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971년 3선개헌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결성(1971),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1971), '남북  7.4 공동성명'의 발표(1972), 유신헌법 불법통과(1972),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1973), 1974년 1.8 긴급조치령 발동(1974), 장준하 피살(1975), 3.1 민주구국선언문 발표(1976),한국민중신학의 태동(1975), 한국 카토릭과 개신교의 공동성서번역본 출간(1977), 여의도 광장 77 민족복음화 성회(1977), 박정희 피살(1979), 광주민주시민 대학살과 민주항쟁(1980), 김대중 납치수감과 사형언도(1980), 전두환 정권 출범(1980), 노태우 정권출범(1887), 세게 올림픽 서울대회(1988),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988), 문익환목사 통일염원 평양방문(1889) 등으로 나열된다.
 이상 일련의 중요한 년표를 보더라도, 1970-80년대는  예수님의 광야시험처럼 3가지 시험이 한민족에게 주어졌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징하는 진실,  정의로움, 생명가치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맘몬을 숭배하는 배금주의가 한국민족의 심성을 완전히 지배한 시기라는 말이다. 사탄 앞에 절하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약속은 군부독재정치의 연장선상에세 권력숭배, 힘의숭배앞에 아부하고 침묵하는 한민족의 자화상이다. 기적을 구하는 종교적 유혹은 과시주의를 통해 들어난다.  살아있는 교회는  강가에 심은 나무처럼 건강하게 자라야 하지만, 문제는 사회전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고 불의와 배금주의가 활개치는데 교회성장론을 최고 목표로 삼는 선교신학은 비복음적 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역사는 콘스탄틴대제 시기의 교회확장론이 결코 참된 복음의 전진이라고 보지 않는다. 필자는 여기에서 1970-80년대 한국의 정치경제사적 사건을 다시 약술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시기에 한국교회가 보인 총체적 응답과 증언을 '예언자적 사관'에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원리'라는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한다.
  첫째, 한국정치 상황은 박정희 씨의 시해를 뒤이어 등장한 전두환, 노태우씨로 이어지는 군부정권아래서,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참다운 실현, 시민민주국가의 실현, 민주주의의 참가치라 할수 있는 삼권의 독립보장,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자유,법앞에서 인간의 평등과 인권보장등이 크게 위협을 받는 시기였다. 권력의 창출과정 자체부터 태생적으로 국민합의에 기초한 민주적 정당성과 합법성을 결여하고 있던 군부정권은  한국사회 전반을 진정한 민의에 의한 '국민주의적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가 아닌 19세기 서구 전제군주시대에서나 볼수 있는 '국가주의적 내셔날리즘'단계를 고수하려 했다. 정치, 경제, 문화 세가지 기본 영역의 자율성이나 자율성에 기초한 상호견제협력 관계는 없어지고, 정치권력이 사회의 모든 분야를 통제하고 전횡하는 사회가 된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는 건전한 발전을 이뤄가지 못하고, 관치금융, 사법권통제, 신문 방송 텔레비등 언론기관의 지배와 통제, 문화및 교육의 파행이 발생하게 된것이다. 한마디로 1970-8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는 민주주의가 정지된체, 민주주의를 가장한, 군부독재정치형태를 은폐하려는 온갖 정치적 권모술수가 사회를 지배한 것이다. 정치적 양심세력을 감옥에 가두거나 주택연금시키고, 정적이나 위험인물은 반공법에 걸어서 감옥에 감금하거나 사형언도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한 극단의 실례가 김대중씨의 구속 사형언도사건이요, 수많은 학생 교수 문인 양심세력을 감옥에 가두는 인권말살정책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정치권력의 마성화, 권력의 우상화가 진행되어  갔다.
  이러한 정치적 암흑기 민주주의가 위협받게 된 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크게 두진영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보수적 기독교 진영이요 다른 하나는 진보적 기독교 진영이다. 다시 보수적 기독교진영은 두가지 범주로 구별되는데, 그 하나는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을 토대로 삼는 정통보수신학 계열이요, 또다른 하나는 성령운동과 영혼구원을 표방하고 오순절 성령운동의 계승을 표방하는 부흥회적 성령파교회 운동이다. 한국 기독교의 보수적 진영 안에 흐르는 이러한 두가지 흐름은 신학적으로 보면 사실 매우 이질적이지만 현실 정치에 대하여 보수적 입장을 취하거나 정교분리를 내세워 교회의 정치현실참여를 비판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그러므로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정치적 위기시대에 한국 보수적 기독교 진영은, 군부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끝까지 지켜줄 정권이라고 믿고 실질적으로 군부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결과를 시종나타냈다.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기쁘게 주관한다든지, 빈민선교나 도시선교나 노동자 농민선교를 좌익세력과 연계된 위험한 선교단체라고  쉽게 매도하고 문익환목사의 방북사건이나 교회청년단체의 통일운동을 공산주의 동조세력이라고 매도하는 보수적 기독교의 태도가 그것을 잘 나타낸다. 이점에 있어서, 정치신학적으로 보면 1970-80년대 한국보수적 기독교 진영은 정치권력에 아부한 어용종교로서 역사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복음' 또는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현실세계 한복판에 준동하는 각종 우상들에 대하여 침묵했으며, 사회정의를 구현해야하는 성서적 신앙전통을 배신했거나 그 직무에 태만했다.
 다른 한편,  1970-80년대 한국정치상황 속에서, 한국기독교의 진보적 진영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참으로 예언자적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여 수많은 고난을 받게되고 한국사회 속에 '사회정의', '인권의 존엄성', '정치권력의 비신격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몸으로 증언했다.  1970년대는 민주주의적 가치,사회정의,인권보호,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보존을 위해 강조점이 놓여진 투쟁을 벌렸고, 1980년대는 민족통일, 분배정의, 군축평화운동, 자연생태계보존 운동에 보다 역점이 놓여지게 된다. 1970-80년대 불의한 정치권력에 맞서 저항하고 비판세력으로 예언자적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고, 직장에서 해직되고, 고문 살해당한 수많은 기독자 교수협의회 소속인사들, 기독 학생들, 재야 기독교 신앙인들, 목회자들,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는데, 1970-80년대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 진영의 '예언자적 증언'과 '프로테스탄트정신'에 입각한 '정치권력의 비신성화' 운동은 한국 교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정치운동사에서 깊이 연구할 만한 일이다. 사회구성원의 다른계층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물론 1970-80년대 민주주의 파수 운동에 많이 참여했지만, 그 숫자나 영향력에 있어서 기독교 인사들의 용기있는 증언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해보아야 한다. 필자는 성서적 신앙의 '예언자 전통'과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발로라고 본다.
  1970-80년대 한국정치상황에서 인권운동, 민주운동, 노동자 권익운동, 통일운동의 선두에 서서 고난을 무릅쓰고 투쟁한 인물들중 극히 제한된 일부 명단을 기억해 보면 김재준, 함석헌, 장준하,문익환, 안병무, 서남동,문동환, 은명기, 박형규, 박순경,현영학,강희남,김관석,강문규, 이문영, 이우정,노명식, 박대선,조요한,지명관,김용준, 서광선, 한승헌, 홍근수,조화순, 이해학,전태일, 한완상, 이해동, 오충일, 조용술, 강신석, 김상근 제씨등이다. 물론 여기 언급한 인사들 이외에 훨씬 더많은 해직당하고 옥에 갇힌  교수들,목회자 및 평신도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지도자들, 여성들이 있으며 카토릭 교회형제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름을 다 열거하자면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히12:1)  위에서 언명한 이름들은  그 수많은 구름같은 증인들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지만,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 진보적 교단교회들의 신앙적 증언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고, 한국에 개신교 전래 100년동안 뿌리가 내리고 싹이 자란 예언자적 성서신앙의 사회윤리적 응답이며, '사회정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성서적 신앙의 발로라는 것을 필자는 강조하고자 한다.
  둘째, 1970-80년대 경제사회 분야에서 한국의 상황은 본격적인 수출주도형의 경제도약을 강행하던 시기요, 초기엔 노동집약적 경공업으로부터 시작해서 석유화학 제철 조선등 중화학 공업단계를 거쳐 고부가가치의 전자산업으로 이행하는 길목까지 접어든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시기이다. 흔히 세계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단기간안의 경제발전은 한국민의 교육열, 잠재능력, 노동자 농민들이 헌신적인 희생위에서 이뤄졌다. 물론 창의적 기업정신을 가지고 한국전쟁의 폐허위에서 세계적 기업을 일구어낸 존경할만한 수많은 기업인들과 기술자들 과학자들의 노고가 기억되어야 한다.
  문제는 소위 근대적 합리주의정신에 기초를 둔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 곧 사물의 '합리성'에 대한 충분한 내면화가 동시에 한민족 가운데서 이뤄졌느냐 하는것이 문제이다. 물론 이 '합리성'이란, 물리화학적 자연계안에 자연법칙으로서 파악되는 '합리성'에 대한 존중은 물론이요, 기업의 경영과 관리, 금융자산의 조달과 증식, 생산과정과 분배과정에서의 '합리성', 노동운동의 조직과 운영면에서의 '합리성'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잘살아보자'는 슬로건을 추진하되 '바르게 잘 살아보자'는 도덕적 정당성도 충족시켜야 되는 '합리성'을 말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근대사회를 가능하게 했던 계몽주의시대의 '합리성'이란 만물의 이법으로서 '이성과 이법'에 조화하고 순응하는 합리주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70-80년대 한국사회는 급속한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과정을 밟으면서도 여러가지 차원에서 근대화의 기본원리인 '합리성' 훈련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 불실시공, 과잉투자와 문어발식 기업확장, 정경유착과 뇌물수수, 세금포탈과 비합리적 경영기법이 마치 정상적 기업방식이나 되는 것처럼 관례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과 참사는 그 상징적 사건이었고, 결국오늘날 한민족이 당하는 I.M.F국난도 다름아닌 '합리성'에 대한 충분한 내면화 과정의 훈련이 되어있지않는 합리적 정신의 결여에서 부터 발생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문명은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폐해를 보완하고 극복하자는 포스트모던니즘에로 나아가고 있지만, 우리 한국사회는 아직 근대정신의 핵심인 '합리주의정신'의 기초훈련없이 곧바로 포스트모던사회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다.  관료주의의 횡포, 정치권력이 국민위에 군림하려는 전근대적 정치의식, 정경유착식의 기업경영, 부패구조의 먹이사슬등이 모두 '합리성'의 결여에서 나오며, 점집이 호황을 누리고 교육제도가 자주 바뀌는 것도 합리정신의 결여인 것이다. 종교와 미신이 혼동되며, 신앙과 광신이 혼재하고, 과학과 종교가 불필요한 충돌을 고집하는것도 합리정신의 훈련부족에서 기인한다.
  한국 기독교는 이 점, 곧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민의 정신을 '합리적 정신'으로 훈련시키고 합리성을 내면화하는 일에  별로 크게 공헌한 점이 없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자체의 지도적 계층 곧 교회를 이끌어가는 성직자 계층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의 이중구조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앙이란  초자연 영역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서 진정한 근대정신의 함양에 스스로 실패하고 있다. 다른한편, 일반 대중적 신앙인 계층에서는 감성주의적, 감정주의적 신앙행태가 발전하여 쉽사리 무교적 기복신앙형태와 기독교 신앙을 혼합시켜  부정적 '종교습화 현상'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자녀들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금방 건강을 회복하여 정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기도원에서 안수기도로서 고친다고  치사행위를 일으킨다든지, 자녀의 상급학교 입학이나 가장의 직장진급을 '합리적 과정'을 통해 이루려하지 않고 초자연적 힘을빌려 성취 획득하려는 신앙행태등이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상당히 고급지식을 가진 보수적 신앙인들 중에서도 성서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입각하여 '창조론'과 '진화론'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는 경직화된 신앙행태들도 그러한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조짐들이다.
   1970-80년대 한국의 경제사회적 상황속에서 그래도 한국 기독교의 창조적 활동이 있었다면 한국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서 일어난 '민중신학'운동이었을 것이다. '민중신학'운동은 매우 아이러니칼 하게도 한국 기독교 전체에게 실질적 영향을 주지못했으나, 세계신학계와 기독교계에 매우 깊은 인상과 충격을 던진 신학운동이었으며, 한국기독교의 보수진영에게도 자신을 돌아보는 간접적 충격을 주었던 운동이다. 1970년대 중반에 일어난 '민중신학'운동은 신학자들의 서재에서 조립된 신학운동이 아니다. 신학적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운동을 하다가 고난을 받거나 옥중체험을 하면서 '민중현실'을 발견하고 '민중체험'을 함으로써 예수의 복음운동을 원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데서 발생하게 된것이다. 전통 서구신학이 복음을 탈정치화하고 기독교신앙을 관념체계로 변화시키거나 제도, 교리, 종교예배의식, 성직질서 속에서 복음을 변질시킨것을 발견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들의 삶과 고난과 민중사건 속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19세기말에 발생했던 동학의 '시천주'체험과 몹시 통하는 공통점이 있으며, 불교의 '선종'의 구도정신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민중신학은 1970-80년대 한국 진보적 기독교 진영이 고난속에서 조성한 진주조개의 '흑진주'라 할 것이다.
  셋째,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가치규범과 삶의 목적 지향성에 관한 사회학적 현상과 한국 기독교의 '교회 성장론' 선교신학과의 함수관계를 깊이 성찰해야 할 차례이다. 1970-80년대가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 유교적 가치범주가 붕괴되고 자본주의적 경쟁원리, 핵가족 형성, 농촌마을문화의 해체, 익명성과 소외를 경험하는 문화사회의 격변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전쟁의 엄청난 '존재충격'을 충분히 해석하고 소화해내기 전에 한민족은 또 한번의 자기존재의 뿌리가 흔들리는 대 격변을 경험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남북분단체제 상황아래에서, 힘없는 대중은  끊임없는 전쟁위협과 사회불안, 외부적 군부독재 정권의 철권 정치분위기, 공업화 산업화 과정에서  뿌리뽑힌 소외감과 소속감 결여, 무한경쟁속에 내 팽개쳐졌던 것이다. 개개인의 잠재적 불안의식과 개인의 무력감, 소외감에 시달리는 일반 대중들은  보다 따뜻한 감성적 보호, 내면적 확신, 축복에 대한 갈증충족, 정서적 안정과 유대감 등을 강력히 요청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대중들의  심리적 불안의식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한국 보수적 기독교 진영의 방응이 '축복신앙', '교회성장론', '복음화운동', '좋으신 하나님 신앙'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 보수적 기독교진영이 보여준 1970-80년대의 교회성장론의 빛과 그림자, 공헌과 폐해,성공과실패 그 양면성을 가급적 공평하게 평가해 보려 한다.
  1970-80년대 한국사회가 정치사회적으로  군부독재에 시딜리고, 인권, 노동자 권익, 언론자유, 사회적 부정의가 극심한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진영에서는 외부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직접 반응하지 않고, 전혀다른 사회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인양, 거대한 대중 신앙집회를 연이어 개최하였다. 물론 이러한 대형 맘모스 집회기간동안 정부당국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1972년 4월에 3,500명의 군인들에게 합동세례를 준 '전군 신자화 운동' 을 비롯하여 '빌리그래함 대회', '엑스플로 74 대회', '77복음화 성회'등 서울 여의도 광정에서는 대형신앙집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그 중에서도 '77복음화 성회'는 한국 기독교가 초교파적으로 32개교단이 참여하여 3년간 준비끝에 1977년 8월15-18일 까지 모인 대회로서 신앙집회 표어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였다. 집회에 참여한 총인원 숫자는 공식적으로 130만명에 이르렀다.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 보수진영을 중심으로한 대형집회, 복음화운동, 교회성장론 강조는 이제 보수적 기독교 진영만이 아니라 거의 한국 개신교 기독교계의 약 70% 가까운 신앙적 생리가 되어있다. 이 선교신학운동의 신학적 기초는 미국의 선교신학자 매가브란(Donald McGavran)의 '선교신학'과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적극적 사고'에 기초한다. 교회는 성령의 이끄시는 영적 공동체로서 은사와 능력이 함께하는 공동체이어야 하며 양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 사회적 집합적 인격체보다는 인간을 개인 영혼단위의 실체적 존재로서 파악한다는 점, 선교운동은 구체적으로 교인의 증가로서 나타나며, 선교운동은 집단적 대중운동형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개개인의 인간이 잠재능력으로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어 활성화시키고 자아를 긍정하게 하며 자아를 실현시키도록 해야 한다는것, 복음화를 복음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힘의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등이다. 사회학자 한완상의 적절한 분석대로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교회성장론에 기초한 대형집회 운동은 동시대를 지배한 한국적 상황 곧 '사회구조적 불균형과 불안', '가치관의 혼란과 자기정체성 및 공동체의 상실'감 속에 있는 대중들에게  분명 치유의 멧시지로 닥아왔던 것이다.
  1970-80년대 한국교회 복음화운동, 부흥운동, 교회성장 지향적인 성령강조운동, 은사운동을 무어라고 부르던지 간에 1960년대 말 교인수 300만정도에 머물던 기독교인 숫자를 불과 20년만에 1,000만신도의 숫자단위로 확장시킨 과정에서 이룬 노고와 업적을 부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해방후 50년의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식과 죄책고백이라는 시각에서 다음 몇가지점에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도록 비판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 1970-80년대 한국 교회의 성장 선교신학은 당시 한국 사회전체를 덮고 있는 근원적인  어둠세력의  근본문제를 덮어두고 개인의 심리적 치유에만 전념함으로서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예언자신앙 전통에서 이탈하거나 외면했다. 군사독재자들의 권력횡포에 준엄한 예언자적 비판 멧시지를 가하지도 않했으며, 노동자농민의 사회구조적 불의에 희생당하는 근본원인 치유에 소홀함으로서 '사회윤리 의식'의 부재를 노정하였다.
 (2) 1970-80년대 기독교 대형집회는 사실상 반공대회를 겸한 셈이어서, 이념적으로 남북의 화해를 모색하는 화해자로서 노력하였다기보다, 남북대결을 강화 고착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통일을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했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통일은  흡수통일론 아니면, 정복통일론이었다. 그리하여 본의아니게 군사정권의  안보논리에 근거한 보수정치권력의 지지 집단으로 기능하여 한국 민주화의 발전을 더디게 하였다.
 (3) 맥가브란의 선교신학과 로버트 술러의 적극적 사고론 안에 일정부분 경청해야 하는 가치가 있지만, 그들의 신학적 사고와 인간이해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인 미국사회의 '삶의 자리'와 심리학적 인간관에 기초한 인간낙관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 교리적으로는    '십자가 대속신앙과 그에 대한 심리적 감격응답'을 강조하지만, 실질적 '십자가 사건'을 회피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고난,예수의 상흔, 십자가의 부끄러움,십자가의 스칸달론을  무시하거나 피해가는 값싼 축복신앙으로 기독교신앙을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
 (4) 1970-80년대 교회성장론은 당시 한국 사회의 급격한 자본주의화 해가는 사회현상학과 괘도를 같이 하면서, 무한성장과 무한경쟁을 삶의 원리로서 받아드리면서 개교회주의,교파주의, 개인주의적 신앙심을 강조하였다. 그결과 우주적 보편교회로서 공동체적 교회성격을 약화시켰으며, 결과주의에 탐익하여 '바르게 살자'를 강조하지 않고 성령축복 받아 남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인생관 가치관을 주입시켰다. 한민족 전체의 고난을 통애하며, 민족 구성원 전체가 구언받아 행복해지기 전에는 나 개인의  구원행복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대승적 신앙심은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집단적 이기주의 신앙'을 조장시켰고, 그 비도덕성을 선민의식과 예정신앙론으로 미화 은폐하였다.
 (5) 맥가브란의 선교전략이 대중집회를 통한 집단적 선교전략을 강조하기 때문에, 회심이라는종교적 진지성이 없어지고 '집단주의적 대량신자 양산'이라는 현상을 나타낸다. 가장 심원해야하고 진지해야 할 신앙고백과 세례행위가 집단군인 세례의식에서 보는 것처럼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3,000명 세레준 베드로의 선례를 가지고 정당화하려고 하겠지만, 그렇게 양산된 통계숫자적 기독신자 1,000만명이 오늘 한국 사회에 미치는 도덕적 무력감과 영적 지도력 상실은 도리혀 세상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값어치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평가절하하게 한다.독일 나치당의 출현은 독일국민의 90% 이상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 이라는 통계적 상황에서 출현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 기독교사에 끼친 큰 공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한국 기독교의 치명적 약점과 죄는 '역사의식, 시대의식'의 부재인 것이며 몸으로 따르는 진정한 '십지가의 도'의 외면이며, 하나님의 '공의'요청에 진지하지 못하여 사회윤리의식이 부재하다는 사실에 있다 할 것이다.

6. 1990년대 한국 기독교 : 새로운 영적 쇄신과 화해된 민족 평화공동체 형성을 지향하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사회와 교계의 분위기는 전혀 다른 단계로 전환되었다. 김영삼정권 시대에 민의에 의해 밀린 역사적 심판은 준엄하여, 명색이 대통령직에 있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수감하여 뒤틀리고 곡해되었던 지난 30년간의 군부통치시대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를 단행하고 거짓으로 씌여진 역사서술을 바르게 잡아 고쳐썼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집정기간 90년대 전반기 내내, 안으로 깊이 곪아 들어간 한국적 병은 치유되지 않고 자라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말자 '경제환란' 이라는 국가적 위기사태로 들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발전,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합리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민의식이나  사회정의가 결여된  문화종교의 성장론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죄악적인 것인가 단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추세는 보수 진보 양진영을 막론하고 급속히 둔화되거나 감소되고, 한국교회의 진보적 진영이 보여주었던 1970년대 사회양심 세력으로서의 구심력과 국민신뢰도 역시 급격히 살아지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층들의 도덕적 비리가 대중 메스컴에 오르고, 광신주의적 극단보수파들이 벌리는 시한부 종말론이나, 타종교에 대한 상식이하의 배타적 정복주의 신앙태도가 한국사회로부터 비방과 조소, 멸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철저한 자기 개혁과 영적 갱신으로 다시 거듭나지 않으면 21세기를 바르게 맞이할 수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안에서 창조적 집단으로서 공헌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특히 아래에 적시하는몇가지 측면에서 한국 기독교는 진지한 참회와 개혁이 요구된다.
  (1) 우선 한국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과분한 생각을 가지기 전에, 자기를 정비하고 정화하여 환골탈퇴하는 영적쇄신을 감행해야 한다. 양적으로 급증했던 지난 1970-80년대의 1,000만 신도 숫자를 정예화하고, 내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켜 진정한 알곡 신앙인으로, 참된 복음을 받아드려 회심하고 변화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들'로 거듭나게 하는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진정한 영성수련을 지속적으로 행하여 정직, 절제, 경건, 희생봉사, 사랑, 화해의 사람들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 진영이 지녔던 '부성적 영성' 곧 사회정의 지향적 해방신학적 신앙동기는 보수적 진영이 지녔던 '모성적 영성' 곧 내면적 회심경험과 내면적 해방신앙동기와 서로 보완하여 보다 건전하고 온전한 선교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 교단의
KNCC가입은 좋은 조짐이라고 보여진다. 합동하여 선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3) 한국 기독교는 민족 평화통일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위하여 진심으로 사고의 패러다임전환을 기하여, 공헌해야 한다. 해방이후 한민족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 시민사회적 국가 건설도 이룩해보지 못했고, 근대 민족주의적 국가 건설도 완성하지 못했다. 분단상황은극복되어야 하고 통일은 이뤄져야 한다. 그 이유는 지리적 국토 통일이나, 정치적 정체통일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한민족 마음 속에 분열된 자기분열증이 치유되어야 하고, 그동안 해방 50년간 쌓여온 비인간적 증오, 살의, 적개심, 상호비방의 원죄적 죄악이 치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 199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선교신학은 달라진 새로운 지평에 눈떠야 한다. 첫째는 자연 생태계회복과 환경친화적인 생태학적 윤리와 생태학적 구원론을 발전시켜야한다. 또한 새로운 역사지평은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면서 한국이라는 종교다원사회 속에서 바른 선교신학정립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문명에 갇힌 종교, 전통에 메인종교, 성전과 경전에 갇힌 종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멀티미디어 시대 정보화시대에 기독교선교는 마틴루터와 칼빈시대에 시작되었던 문자적 '구텐베르크 선교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전자정보 메스미디어 선교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문명사 전환의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한국 종교문화사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지극히 짧고, 아직 그 무한한 잠재적 능력은 미래를 기다린다. 한국 기독교가 해방 후 50년동안, 한국 사회사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우면서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모습 두 모습을 보여 왔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현대사는 한국 기독교 없이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책임적 신앙집단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바른 역사의식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회개하고 한국 사회 속에서 창조적 힘으로 공헌할 때, 한국 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가 지금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公義를 행하며,  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行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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