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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다석의 씨알사상 차연(『씨알의 소리』통권 199호.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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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다석과 차연(差延)이 발생하는 이유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차이’라고 말하지 않고 ‘차연’이라고 하는 의미

함석헌 기념사업회 산하 연구기관인 씨알사상연구소에서 회원들이 돌려가면서 하는 월례 연구발표회 순서로서 발제자에게 기회와 숙제를 주었다. 그러나, 맘 속에  오늘의 주제에 관하여 알고픈 과제를 늘 품고 있으면서도,  준비되지 못한 부족한 생각을 말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일 큰 이유는, 논제를 제대로 논구하려면 다석 선생과  신천 선생의 영혼의 깊이는 그만두고서라도, 남겨놓으신 문집을 모두 읽어 본 후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평생연구 해야할 과제임을 절감할 뿐이다. 그러나, 만용을 부리는 변은 소고기 맛을 말하기 위하여 소의 각 부위를 고루고루 모두  맛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바닷물 맛을 알기 위하여 오대양 물을 고루 맛보아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위한다.
 최근 (재)씨알이 창립된 것을 우리는 축하한다. (재)씨알은 그 재단법인 설립의 취지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재단 법인 씨알은 유영모․함석헌 선생님의 씨알사상을 연구하여 널리 알리고 깊은 영성과 생명평화의 시대를 부르는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재단법인 씨알발행, ‘씨알소식’제1호(2007.11), 설립취지문 중에서 인용.
법인체로서 다석기념사업회와 함석헌 기념사업회가 독립적으로 발전해가는 중에,‘(재)씨알’이 창립된 것은 ‘씨알사상’이라는 공통요소를 근거로, 두 인물의 사상을 연계하여 한국 사상계에 주체적인 한국사상의 진면목을 밝혀보려는 적극적 의도가 있음을 짐작케한다. ‘씨알사상’이라는 주제어가 두 인물의 사상을 함께 아우르는 공통분모인 것을 확실하지만, 깊이 드려다보면 두 사상가의 ‘씨알사상’에는 연속성과 차이가 있음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석과 신천의 관계가 자타가 공인하는 ‘사제삼세’(師弟三世)관계 임을 인정하더라도,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상가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이라 할만큼 차이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이 아니고 마땅이 그러해야 한다. 신천선생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스스로함’은 생명의  근본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씨알사상‘은 고정된 죽은 물건이거나 완결된 사상체계가  아니고 살아 쉼쉬고 자라가는 하나님의 암호와 존재의 현성체(現成體)가 될 수 있다.
 씨알이라는 근원어(根源語)를 공통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양자사이에 있는 동질성과 차이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차이(差異, différence)’라는 어휘대신 프랑스 철학자 쟈크데리다가 제시한 ‘차연(差延, différance)’을 사용하려고 한다. 차연은 1960년대 이후 서구사상사에서  후기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던니즘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사람인 쟈크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비평학의 핵심적 어휘다. 프랑스어 ‘차이’(différence)와 동일한 ‘디페랑스’ 발음을 지니면서도 ‘차연’(différance)이라는 새로만든 어휘는 ‘다르다, 상이하다’(différer)라는 의미와 ‘연기하다, 지연시키다’(différer)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지닌 신조어 이다.
데리다의 견해에 의하면 “차연이란 언어, 부호 또는 일반적인 지시체계를 차이의 체계들로 ‘구성’해내는 작용이다.” 김귀룡, “데리다 해체전략의 특징․구조․한계”, 『해석학의 역사와 전망』, 354쪽,(철학과 현실사, 1999)
도대체 ‘차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까지 데리다가 수행하려는 그의 해체주의적 철학의 근본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구철학과 사상의 본질주의, 주체성의 철학, 자아, 로고스, 현전등등 모든 사고중심엔 관계성이나 얽힘없이도 스스로 자기 고유한 특성과 남과 구별되는  차이성을 전유(專有, appropriation)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기완결적, 자폐증적, 독선적, 독단적 실재관을 비판적으로 해체하여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소 난해하기까지 한 데리다의 사상이 말하려는 핵심을 데리다 전공 철학자 김귀룡의 해설을 도움받아 이해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서구의 형이상학, 철학에서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immediate) 것으로 간주되는 현전 (現前), 현전작용도 궁극적으로는 “절대적으로 그것이 아닌 것”과의  얽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복합적이고 매개된(mediate) 것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의 작업은 주어지 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아닌 것을 통해서 구성하는 부정적 구성이기 때문에 그 주어진 것을 주어진 꼴로 있지 못하게 하는 구성(構成)이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적 구성(de-construction, dis-construction)이다. 김귀룡, 위와 같은 논문, 위와 같은 책, 357면.


위 인용문에서 “주어진 것”은, 오늘 우리들의 논제에서 말한다면  신천이 다석으로 배우고 받은 ‘씨알’이라는 화두이다. 그런데, 그 ‘씨알’이  고정된 자기완결적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신천에게 받아지고 이해되고 새롭게 표현될 땐 “절대적으로 그것이 아닌 것과의 얽힘”을 통하여 복합적이고 매개된 것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절대적으로 그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석이 『대학』첫문장  명덕(明德)을 ‘속알’로 풀이하고, 친민(親民)을 ‘씨알어뵘’으로 풀이 했을 때, 아직 인지되지 않았거나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차원은 모든 새로움과 창조성의 원천이자 현존(Dasein) 속에 현전 하면서도 은폐하는 절대자 하나님이다. 또다른 차원은 신천이 부딪히고 배운 새로운 삶의 사건과 지식의 인식지평이다. 그래서 신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다석 유영모의 씨알사상과 ‘차연’(差延)을 지니게 된다.
 해아래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있는 모든 것은 과거와 어제에도 있었고, 미래와 내일도 있을 것이지만,  같은 동일한 것이 아니요 새로운 것이다. 동양고전 진리의 말씀과 성경말씀을 다석이 자신의 얼의 용광로에 녹여 새롭게 표현해 냄으로서 독특한 다석사상이  출현한 것처럼,  신천사상도 그러하다. ‘새롭게’라는 표현은 가치론적으로 우열을 함의하는 말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의 씨알사상과  신천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같은 사상의 연속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같음’도 아니고, 이질적이고 고유하다는 의미에서의 ‘차이’도 아니다. 두 사상가의 ‘씨알사상’엔 차이가 아닌 차연이 있다.  차연이 발생하는 이유, 혹은 차연을 구성하는 요소를 아주 거칠게나마 스케취해보려는  무모한 시도가 이 글이 뜻하는 바다.

2. 다석의 씨알사상과 신천의 그것 사이에 차연이 발생하는 이유들

2.1.  씨알사상의 기본바탈: ‘없이 계신 하느님’과 ‘뜻으로서 하나님’

‘씨알사상’이라는  아직 온전히 정리되지 않은 포괄적 어휘로서 두 사상가를 ‘사제’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두 사상가의 차연을 살펴보기 위하여 두 사상가의 씨알사상의 바탈특징을 드러내는 언어로서 각각 ‘없이 계신 하느님’과 ‘뜻으로서의 하느님’을 제시해 본다. 하느님이해는 모든 사상가 특히 종교사상가의 특징을 드러내는 핵심요소이다. 다석은 어느날 일기(1955.7.11. 月 . 23861)에서 이렇게 썼다:

 (전략)  없이계신 임이 시키신 대로만 사는 나애요.
         없이계신 임만이 우리 아바지시오.
         아바지  있이 살라시니, 이에 있고요.
         아바지 없이 살라시니, 없에 산다오.
         언니는 ‘있다 없을 것’을 나라고 살고 있다시니.
         그럼 ‘없이 계신 임’은 알랑곳이 없으시단 말씀이지요?
         그럼 아이구 - 그럴 수가 있을가?  김흥호, 유영모 명상록 풀이 , 『다석일지』, 제1권, 105쪽(솔출판, 2001). 이하 『다석일지』로 표기함.


신천은 『뜻으로본 한국역사』라고 책 제목을 변경한 연유를 설명하는 넷째파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략) 유신론자․무신론자가 다같이 믿으며 살고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 이다. 하나님은 못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있다. 저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며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해도 좋고 역사라해도 좋고 그져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함석헌, 함석헌 전집 제1권,  『뜻으로 본 한국역사』19쪽 (한길사, 1992). 이하 『함석헌 전집』으로 표기함.


  앞으로 설명을 더 해가겠지만, ‘없이계신 하느님’ 과 ‘뜻으로서 하나님’ 은 다석 유영모와 신천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유형적 특징을 각각 드러내는 암호같은 기표(記標)가 된다고 생각한다. 널리 일반에게도 알려저 있고 다석의 종교사상을 신선하게 표연하는 어휘 ‘없이계신 하느님’은 신선한 사상의 표현이면서도 심오한 생각의 드러냄이기 때문에 일상성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게 이해되는 어휘는 아니다. 적어도 ‘없이계신 하느님’이라는 기표(記標, signifier)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기의(記意, signified) 또는 기표의 의미화작용(sinification)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하느님은 존재자들의 범주에 예속되지 않기 때문에 유한존재자들의  범주들(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 질량, 인격성등)로서 표현할 수 없다.
 둘째, 하느님은 진리의 존재론적 근거이지만 동시에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근거이기 때문에, 사람의 참 지성(얼)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연합적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모든 것을 다 이해 할 수는 없다.  
 셋째, 하느님은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있음(有)과 없음(無)을 넘어서며 양자를 낳은 근원이니, 유무가 함께 거기로부터 유래하고(同出而異名) 돌아가는 진리(道)의 다른 이름이다.   
  넷째, ‘없이계신 하느님’은 유신론과 무신론을 당혹(aporia)으로 몰고가는 ‘부정의길’(via negativa)로서 묘유(妙有)와 충만공(充滿空)을 포용하는 동아시아적 신관이다.
  다섯째, ‘없이계신 하느님’은 ‘존재중심의 사유’, ‘이성중심의 독단론’, ‘유물론적 환원주이’ , 그리고 ‘소유집착적 전유(專有, appropriation) 실존태’를 비판하여 삶 한 복판에서의 초월경험을 하도록 현대인들에게 비움의 영성수행을 촉구한다.

위에서 살핀대로 ‘없이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안에 담긴 다석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그 것자체로서 말로 다하기 어려운  진리를 우리들에게 선물하지만, 우리는 다석의 씨알사상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숨기고 싶지 않다.

  (i) 다석의 씨알사상은  물질성, 육체성, 세계현실성을 근본적으로 악이나 타락의 결과로 보는  피타고라스학파적  오르페우스종교나 영지주의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이 세상은 인간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보면서 플라톤-네오플라톤전통의  신적 일자(하느님)에로 환원(還元, reditus)을 강조하는 탈세계적, 몰역사적 종교철학은 아닌가?
  (ii) 다석의 씨알사상의 존재론은 ‘없이계신 하느님’이라는 신선한 표현으로서 ‘없이’(無)와 ‘계신’(있음,有)을  동시에 포괄하고 초월하는 진리자체이신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무와 유가 진리자체의 동질적인(혹은 등가치적인) 존재방식임을 부정하고 ‘있음’(有)에 대한 ‘없음’(無)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수없이 암시함으로써,  현세를 보다 긍적적으로 이해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철학으로서 성공하고 있는가?  
 (iii)  다석의 씨알사상은 하나(unum), 존재(esse), 지성(intellectum)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존재론과 인간론을 펼침으로서  감성적 존재로서 인간, 의지적 존재로서의 인간,  희망적 존제로서의 인간을 너무 소홀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다석의 스토아적 초연(超然)함과 수도승적 초탈(超脫)의  구원종교는 보통사람들에게 윤리적 영웅주의로 혹은 지적 엘리트주의로 받아드려질 위험은 없는가?
 (iv) 다석의 씨알사상은 어거스틴의 시간론과 같이 ‘지금․여기’의 시간성, 찰나성만을 강조하게되고 ‘지속’으로서의 생명의 얽힘과 유기체성을 약화시킴으로서 ‘역사의식’ 이 거세되고  실존론적 ‘역사성’만 조명됨으로써,  현실역사에 대한 창조적 변혁의지를 이차적 관심거리로 치부하게하는 참여윤리측면에서의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는가?
(v) 신천의 씨알사상은 다석의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으면서도, 존재(being)보다 생성(becoming)을 강조하고,  엑하르트적 지성보다 프란시스적 의지를 강조하고, 플라톤적 영혼상기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의 현실화를 강조하고,  실존론적 역사성보다 민족공동체의 역사지평을 내어다 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가?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 다석 선생과의 차연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2.2. 씨알사상의 생각바탕의 두가지 메트릭스: 천체물리학과 진화생물학

다석의 씨알사상과 신천의 그 것 사이에 대비되는 차연은 양자의 생각이 이뤄지는 생각바탕이 서로 다른데서  연유하지 않을가? 전자는 천체물리학적 관점이요, 후자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이다. 관점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관심의 시작점은 관심의 지향성을 규정한다.  
두 사상가가 모두 젊은 시절,  동경의  고등교유기관에서  현대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다석은 22세 때(1912)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비록 4년간 대학과정을 밟지않고 뜻한바 있어 물리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귀국하지만, 평생 물리학 특히 천체물리학에 관심이 깊었다. 그는 종교적 질문과  진리탐구에서 그 시발점을 우주적 사실에서 시작한 분이었다. 다석은 그의 일기장에 아래처럼 썼고(1955.5.4 水 23793), 김흥호는  다석강의 말씀의 일단을 아래같이 전한다.

        180Km(428.5里) 속의 Micron 數 ! ,  太陽星團 半徑 一萬光年 1cm ,
        銀河界星霧 半徑 十萬光年 1cm ,     一天兆 星霧로 된 宇宙,
        直徑 1800億光年 180km,             一光年은 約 2兆 2千億里

         宇內千兆霧(우내천조무)   ,    霧中一萬團(무중일만단)
         每團百萬星(매단백만성)   ,    百億千兆霧晏(백억천조무안)

     (전략) 나는 이 마지막 겨울망울(冬蕾)에서 귀가지곤 못듣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서  말하는 것이다. 천체(天體)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이는 없다. 천체야 말로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 름지기 우주를 묻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우주적 사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자.
          김흥호, 『다석일지』, 제1권, 39쪽.


다석이 그의 씨알사상 형성과정에서 우주천문학적 사고지평을 가지고 늘 생각에 골몰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첫째, 무엇보다도  다석의 종교사상의 핵심사상인 ‘無․空의 존재론’은 허허광막한 대우주의 우주현상에서 도출한 존재유비(analogia entis)다. 우주공간의 대부분은 텅빈 암흑의 공간이요, 우주내 크고 작은 성단(星團)들 일지라도 캄캄한 우주공간 사이를 떠돌고 있는  미미한 존재들이다. 그처럼, 물질적 현상을 지니고 나타난 ‘존재자’ 들은  텅빈 우주시공계처럼 텅빈 ‘존재 그 자체’에 비하면  없는 무(無)와 다름없다. 다석의 우주천문학적 생각의 매트릭스(matrix)는 우리의 생각을 한없이 크고 넓고 깊게 하도록 촉구하며, 상대적 유(有)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도록 ‘유(有)의 존재론’의 한계를 깨닫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긍정적 기능을 한다. 물론 다석에게서 ‘빈탕한데’(虛空)는 자연신학적 은유이다. 다석표현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한데가 하느님의 겉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속생명은 얼(성령)이시다”. 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어록』, 54쪽,(두레, 2002)

 그러나, 다석의 우주천문학적 사고지평은 동시에 부정적 영향을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대우주의 허허막막한 시공의 어두운 텅빔에 비할 때, 존재하는 성단을 다 한데모은다 한들 한줌 흙돌덩어리나 먼지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재자들의 현실성의 의미가 핍가(乏價)된다. 존재하는 생멸계(生滅界)를 보이지 않는 無․虛․空으로 상징적 표현을 하는  진여계(眞如界)와 해파관계(海波關係) 혹은 체용관계(體用關係)로 파악하지 않고 “공(空)에 혹이 난 것” 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다석은 이렇게 자전적 고백을  한다:

       나는 스무살 전후에 불경과 『노자』를 읽었다.
       그러나, 무(無)와 공(空)을 즐길 줄은 몰랐다.  
       요새와서 비로소 공(空)에 친해졌다......... 맨 처음에 무가
       있었다는 것은 옳은 것 같다. 무는 엄숙하다.
       무(無)는 나도 안다며 지내 갈 수 없다.
       이 우주 천체(天體)는 공(空)에 혹이 난 것이다.
       혹이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것은 끝내 빔(空)에 돌아간다.
       혹에 난 물 것이 생물이다. 나는 빔(空)에 가야 해방된다고
       생각한다.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321쪽(문화일보,1996), 이기상의 논문 「“태양을 꺼라!”
       존재 중심의 사유로부터 해방」, 김흥호 해설, 『다석일지』,
       제1권, 674쪽에서 중인용.


 순수 우리말 명사 ‘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긍정적 의미가 아니다. 혹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i) 살 가죽에 내민 기형의 군더기 살덩어리 (ii) 타박상 따위로 근육이 부어오른 것 (iii) 식물의 조직에 비정상적으로 생기는 덩어리 (iv) 물건의 거죽에 볼록하게 도드라진 부분 (v) 방해물이나 짐스러운 사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우주천체 그 자체와 그중에 작은 혹인 지구라는 행성위에 발생한 생물은 ‘혹에 난 물 것’ 정도로  은유하는 다석의 발상법은 그의 존재론이 얼마나 진여계(眞如界)에 경도되어 있고 생멸계(生滅界)를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다시 불교사상사를 조명등 삼아, 다석의 씨알사상  생각패러다임을 말해본다면 나가르쥬나(龍壽)의 중론송(中論頌) 팔불게송(八不揭頌)에서 표출되는 정신 곧 파사현정하려는 ‘부정정신’(否定精神)이 주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슈바고샤(馬鳴)가 그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주장하려는 핵심진리 곧 일심(一心)의 두 존재양식(存在樣式)인 진여계와 생멸계는 역설적 일치라고 강조하는  패러다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다석도 체용(體用) 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며, 떠날 수도 없고, 붙을 수도 없다”는 것 을 잘 알고 있다.  ‘유즉무무즉유’(有卽無無卽有)를 말하는 것이 노자요, ‘기즉도도즉기’(器卽道道卽器)를 가르치자는 것이 유교의 역(易)이요, 색즉공공즉색‘(色卽空空卽色)을 말하자는 것이 대승불교의 요체이다라고 다석은 본다. 그러나, 그 해설면에서 김흥호는 다석풀이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유(有)는 무(無) 속에 있고, 무는 유 밖에 있는 것이 노자다. 기(器)는 도(道)안에 있고 도는 기(器)밖에 있는 것이 공자다. 색(色)은 공(空) 안에 있고 공은 색 밖에 있다. 이것이 석가다.  유무(有無)가 같이 있고, 기도(器道)가 같이 있고, 색공(色空)이 같이 있다. 무와 도와 공은 체(體)고, 유와 기와 색은 용(用)이다. 무도공(無道空)은 ‘하나’(一)고, 유기색(有器色)은 ‘둘’(二)이다.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떠날수도 없고  붙을 수도 없다. 불즉불리(不卽不離)가 중도(中道)다. 김흥호, 『다석일지』공부, 제1권, 563쪽.


위의 다석풀이는 ‘즉’(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문제에서 독자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즉’을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은유로 풀어서 해석함으로서 문제의 오해를 일으킨다.  ‘안과 밖’이 아니고 ‘즉’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근거가 되고, 가치론적 우열이나 시간론적으로  선후를 말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근본의도가 아닐가? 전통적 불교사상가들은 ‘즉’(卽)은 불상잡불상리(不相雜不相離) 관계표현 이라고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이해에서, 다석의 견해를 해석하는 또다른 다석의 애제자 박영호도 김흥호와 큰 차이없이 해석하는데 필자로서는 동의하기가 쉽지않다. 박영호는 이렇게 해설한다: “ ‘색(色)은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에서 공색일여(空色一如)인 것이다. 공(空)과 색(色)이 대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이렇게 알아야 한다.” 박영호 옮기고 풀이, 『다석 유영모 명상록』, 20-21쪽(두레, 2000)
우리는 대승기신론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 연구자들의 다음같은 소리를 접 할 때, 김흥호선생이나 박영호선생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해석방법이 한문자 해석상의 오류가 아니라, ‘유의 존재론’을 극복하고 더 근원인 ‘무의 존재론’을 터놓으려는  사유의 지향성 때문에, 無가 有보다 앞서고, 진실하며, 무만이 참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또다른 일방성에로 독자를 이끌어갈  위험을 느낀다. 그러나, 이홍우교수는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마음’(一心)이 ‘實在’(眞如)와 ‘現象’(生滅)이라는 두 개의 측면에서  파악 될
    수 있다는 것은 起信論의 기본가정인 것과 동시에 起信論의 모든 설명 -- 그리고 나아가서는 불교의 모든 修行 -- 이 심어주는 궁극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뜻에서 이것은 起信論의 알파요 오메가에 해당한다.  馬鳴저, 李烘雨 번역주해, 『大乘起信論』, 18쪽 ( 경서원, 1991)

 
 거듭 강조하거니와  다석의 ‘無․空의 존재론’이 허무주의나 현실도피주의나, 서양정신사에서 발생했던 오르페우스교나 영지주의적 반물질주의 계보와 비교할 수 있는 사상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플라톤적 사유체계와 몹시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가? 조금전 위에서 인용한 다석의 고백중에서 마지막 말 “나는 빔(空)에 가야  해방된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처럼, 플라톤에게서도 완전한 행복이란 감각적 세계가 주물(鑄物) 될 수 있었던 ‘지고의 원형’ 곧 지고선으로서 원형인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현대 철학자 알렌(Diogenes Allen)은 다음같이 말한다.

    영혼의 선재성, 육체적 죽음을 통과하는 불멸성, 그리고 지상에서의 선한 삶을 통해
    다시금 육체적 고통의 굴레에 속박되는  윤회로부터의 해방과 비감각적 ․ 초월적 세계에로의 희구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들은 때로 오르페우스교적이고 피타고라스적인 개념들을  사용할 만큼 다분히 신화적인 형식으로 씌여졌다. 그러나, 그가 이 영혼을 불멸한 것으로, 그리고 원형적 형상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야 말로 인간에게 내려준 축복으로 간주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디오게네스 알렌지음, 전재현 옮김,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76쪽( 대한 기독교서회, 1996)


혹자는 플라톤과 다석을 같은 계열로 놓고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서양사상사에서 ‘존재중심의 철학’을 터놓은 대표자요, 다석은 ‘없음(비존재) 중심의 철학’을 터놓은 동아시아의 사상가라고 대조시킬 경우 그러하다. 그러나, 좀더 깊이 연구한 사람들의 연구결과를 들어보면, 플라톤이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중심으로써 ‘실재의 궁극적 면모’를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경박한 사상가가 아니다. 예들면,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우주의 아버지이며 창조자이신 분은 파악 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한다”  위와 같은 책, 118쪽.
고 말함으로서 다석 못지않게 사람의 지성을 강조하였지만 지성이 진리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한다고 보는 이성지상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다석과 신천은 같은 씨알사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매트릭스는 다르다고 보는 우리의 논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차연은 함석헌의 역사라는 사유지평에서 온다. 신천은 변화하는 실재인 역사를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전공으로하여 공부한 역사학도 이다. 우주사를 역사이해의 먼 배경으로 깔지만 구체적인 지구사를 주목하며, 지구위에 출현한 생명의 진화사를 주목하는 진화생물학적 사유바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존재자들의 세계, 지구생명계, 인류문명사는  ‘무와 공에 나타난 혹’이 아니라, ‘무와 공의 뜻의 나타남이요 그 전개과정’이라고 본다.  덧없고 불필요한 ‘혹’이 아니라 잠세테의 실현이요 현실화과정이며, 열매맺음이다.  신천의 발상법은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사실(事實)은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식물생활의 근본이 되는 땅이 흙과 물의 합한 것이듯이, 인간생활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인생적인 면과 역사적인 면의 둘로 되어 있다. 역사 없는 인생도 없고, 인생을 내논 역사도 없다..... 이리하여 여기에서 우리 살림의  두 원칙인 개인적 생활체험과 세계적 역사이해가 나온다. 생활체험이란 것은  개인이 자기의 존재를 한 개 저만으로, 값을 가지는 인격적인 것으로 알고 파 들어가고, 붙잡고, 나타내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역사이해라는 것은 자기를 뜻있는 발전으로 보는  세계의 체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보고 들여다보고, 내려다보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숲이다. 씨를 매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함석헌, 『뜻으로본 한국역사』, 27-28쪽.


 함석헌은 사람이 자기를 안으로만 파고드는 유아론적 사유방법을 비판한다. 인간의 개체아는 그것이 아무리 초월적 정신이요 얼로서의 영명성(靈明性)을 지닐지라도, “전체속에서 발견을 하고야 안심입명을 한다”.  위와 같은책. 29쪽.
이 때 신천이 말하는 ‘전체 속에서’라는 말 뜻은, 우주론적 의미에서 시공우주와 존재론적 의미에서 자기초월의 근거인  하느님과의 수직관계를  포함하지만,  해석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역사이해를 더 강조하는 것이다. 단순한 ‘우주’ 이해가 아니라 ‘우주사’ 이해가 중요하다. 단순한 개체인 나와  하나로서의 전체인 한얼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기존재의 배경이 되고, 생활의 근원이 되고, 활동의 터전이 되고, 정신의 교섭자가 되는”  위와같은 책. 28쪽.
생명의 행렬, 곧 역사현실재를 말한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으로서 실존인간의 특징을 ‘世界-內-存在’라고 규정 할 때, ‘世界’는 단순한 시공우주이거나 자연환경이 아니라 언어적․문화적․역사적으로 매개되고 얽혀살아가는 ‘生活世界’인 것이다.
 다석과 신천이 모두 씨알사상을 공유하지만, 다석의 천체물리학적 발상법과 그러한 사유의 메트릭스는  ‘역사적 시간길이’로서 지속의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시간단위를 ‘광년’(光年)단위로써 생각하는데 익숙한 다석에게 있어서 고작해서 3만년  전부터 시작한 인간사회사의 ‘역사기간’이나,  ‘5,000년 문명사’라는 것은 그 시간길이로서 볼 때 지속적 길이로서 시간이 아니고 찰나일 뿐이다. 영원 억겁시간 길이에 비교할 때, 양적 시간길이가 짧아서 ‘찰나’ 일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시간이해 처럼 ‘현존재’ 인간에게 시간의식이란  ‘기억’의 추상개념산물인 과거와 ‘기대’의 추상개념으로서 미래가 만나고 갈리는 ‘순간’으로서의 찰나시간이 있을 뿐이다. 다석의 유명한 ‘하루살이‘는 ‘지금․여기’가 곧 영원이요, 영원이 현존하는 유일한 우주점이요, 가온찍기의 현존자리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석에게는 ‘역사성’(historicality, historicity)은 있지만 ‘역사’(history)는 없다. 철학적 시간론에서 엄정하게 말하면,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것은 아니다. 과거나 미래나 모두 인간의  현재의식을 통해서 기억이라는 의식작용 때문에 과거라는 시간이 탄생하고, 기대라는 인간의 희망과 상상력 때문에 미래라는 시간의 질이 탄생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역사가로서 신천은 ‘영원한 현재’로서의 그 질적시간이 중요한지만 동시에 ‘역사’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적어도 역사는 매우 의미있게 취급되야 한다. 왜냐하면 진화생물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발생하는 생명의 ‘누적적(累積的)이고 점진적(漸進的)인 변화’를 절대로 소홀하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2.3.  존재인가 생성인가의 문제

 철학사에서 일(一)과 다(多), 통일성과 다양성, 영원과 시간, 존재와 생성의 문제는 서로대비되는  중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인류정신사에서 그 문제에 가장 오래된 대비적 입장을 보인 사상가로서 주전 5세기에 희랍나라에서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와 헬라클레토스(Herakleitos)를 상징적으로 들곤 한다. 이 두 사람은 실재가 ‘존재’냐 ‘생성’이냐로 대립되는 두 상이한 실재관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우리는 실재의 참 모습이 ‘존재’라고 보는 입장을,  우주나 존재세계를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는 ‘정태적 실재관’으로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존재’를 선호하는 실재관은 변화하는 모든 현상을 넘어서, 변화를 가능케하며, 존재자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통일된 원리나 궁극적 일자(一者)를 강조하며, 그에 의해서 우주와 역사에 질서와 통일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플로티누스, 어거스틴, 그리고 현대 양자물리학자  아인슈탄도 그 계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실재는 ‘생성’ 이라고 보는 입장은 “똑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명제로서 상징되는 생성론적 실재관이다. 실재는 끊임없는 변화, 과정, 겨룸, 그리고 창조적 전진을 말하며, 궁극적인 것도 구체적인 현실적 과정을 떠나는 순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 존재로 되기 때문에, 역사적현실이나 창조의 현세계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헬라클레토스, 아리스토텔레스, 외팅거,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현대사상가로서는 A.N.화이트헤드가 그 대변자들이다. 진리의 참 실재는 ‘존재냐 생성이냐?“라고 대립적 양자 택일을 할 것은 아니지만,  다석과 신천의 씨알사상의 스팩트럼 속에서 전자는 존재우위적 사고를, 후자는 생성우위적 사고를 한다고 대비시키는 것은 지나친 억지소리일가?  다음과 같은 신천의 말을 들어보자.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 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올라가는
   층계라 하고 구르는  바퀴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다시
   돌아온다.  되풀이 한다 하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면서
   또 아니다. 역사는 결코 꼭 같은 것을  영원히 되풀이 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그저 되풀이 끝없이
   하는 운동이 아니요,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57쪽.


신천은 성격상 대단히 수줍은 면, 내성적면이 있었다고 여러사람이 말하지만, 그의 사상과 삶 속에 지치지 않는 역동성과 불꽃같은 정열이 있는 이유는 ‘실재’를 영원히 미완성적인 생성의 과정, 창조적 전진의 과정으로 보는 세계관 때문에 그렇다. 신천은 그의 종교시 「미완성」속에서, 영원의 미완성품을, 영원히 높아가고 확대해가는 정신을, 영원히 영광을 더해가며 벌어져 나가는 생명의 불바다를 찬양한다. 이러한 ‘과정적 실재관’은 화이트헤드가 그의  새로운 형이상학 철학 속에서 신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 할 때, 함석헌의 입장은 좀더 뚜렷해진다.

     세계와 비교 할 때 신이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과 비
     교 할 때 세계가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
     다. (중략)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
     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A.N. 화이트헤드,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598쪽( 민음사, 1991)


화이트의 과정철학, 유기체철학, 새로운 실재론에 의하면 신은 모든 정신성의 근거이며,  물리적 세계로 하여금 다양성과 창조성을 맛보게하는 비젼의 통일이다. 신도 세계도 결코 정태적인 완결이나 완성에 이르지는 못한다. 신과 세계는 창조적 전진을 이뤄가는 실재의 두 수레바퀴다. 앞서 인용한 신천의 역사철학적 비젼을 음미하면  A.N. 화이트헤드보다는 좀더 초월적 인격신을 신앙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기독교적이지만,  실재를 생성, 창조적 과정, 고난을 통한 승화와 전진으로 보는 견해는 대동소이하다.  다석의 실재관에서도 변화, 전진, 새로움, 올라감을 강조하면서 동양의 실재관이 그렇듯이 매우 살아있는 역동적 실재관을 말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어디까지나 물질을 바탈 정신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요, 몸나와 제나가 얼나로 변화하는 과정이요,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과정이다. 김흥호, 『다석일지』풀이, 제1권, 222쪽.
다석에게는 나무가 태양을 향해 솟구져 자라듯이 사람과 역사적 존재도 하느님을 향한 수직상승을 강조하는 것이지, 나선형의 운동을 통하면서 대각선적 방향으로 승화해 간다는 개념은 약하다.

3. 나가는 말

 다석에게는 “오늘이 영원의 끝이요, 하루가 하느님 앞이다.”  위와같은 책, 448쪽.
다석은 훨씬 개인구원론적 종교성이 강하다. “죽음은 깨어 솟아 날아가는 것이다. 껍질만 남겨두고, 속알 명덕(明德)   영혼이 깨어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 이 종교적 삶의 구경목적이다.  위와 같은책, 479쪽.
신천은 개인의 구원과 전체구원이 맞물려있다고 보는 편이 강하다. 그런의미에서 개인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공동체의 구원에 관심이 더 크다. 우리의 오늘 대화를 한줄의 명제로 요약하여 다석 유영모와 신천 함석헌의 씨알사상의 차연을 표현한다면 이렇다:  

 신천 함석헌의 기본자세는 ‘역사(세계)로부터 구원’이 아니라 ‘역사(세계)의 구원’이며, 이 세상은  플라톤적 사유처럼 수직방향으로 탈출해야 할 곳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미래에로  탈향(脫鄕)해야 한다. 다석은 개인의 얼나가 얼 자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하려고 ‘하늘’에 오르기를 열망하지만, 신천은 하늘의 뜻이 땅 위에 이뤄지기를  열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한다.

속알 명덕을 밝히고 얼나로 전환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점에서 다석과 신천은 동일하다. 그렇지만 다석은 중세 기독교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엑하르트를  더 많이 닮았다. 마이스터 엑하르트는 하나님의 제1차적 본성도 ‘사랑’ 이라기 보다는 순수 ‘지성’이라고 보았다.  다석의 씨알사상의 맛은 지성(intellectus)을 강조하는 도미니코회의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그에 비하여, 신천의 씨알사상은 인간의 ‘사랑과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 계보에 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신천은 ‘뜻’을 품고 뜻에 순명하고 뜻을 실현해가는 성 프란시스코 수도정신에 더 가깝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뜻' 없는 ‘지성’은 공허한 관념놀이에 빠질 수 있고, ‘지성’ 없는 ‘뜻’(의지)만의 강조는 광신적 열정주의나 부질없는 행동주의에 몰입 될  위험이 있다.  참 지성은  지행합일에서 그 진위가 드러나고, 의지적 실천은 깊은 사색의 열매인 깨달음 없이는 무거운 도덕적 멍애와 광기로 작동한다.  다석과 신천의 두 씨알사상가는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삶으로 보여주신 큰 스승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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