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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점(Zero Dot) 의식의 축복(<성서와  문화>, 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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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점(Zero Dot) 의식의 축복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신학)

  서울 사는 덕으로 여러 가지 편리한 이익이 있음을 알면서도  큰 손실중 하나가 밤하늘 별들을 보수 없게된지 오래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맑은 초가을 초저녁에, 희미하게 깜박거리는 금성을 비롯한 몇개의 별들을  헤아려 보다가도, 그것들 마져 금방 보이지 않게 된다. 대도시 상공을 덮고있는 두꺼운 미세 먼지층과 공기 오염물질 때문이다. 중동 아라비아 사막에서 밤하늘이나, 지리산 노고단에서 보는 여름밤의 총총한 별들이 그립다.
  아폴로계획의 일환으로 1969년에  성취한 지구인의 달 착륙기념 대형사진을 구해서 거실에 걸어놓고 아쉬움을 달랜다. 달표면이 넓게 펼쳐저 있고, 지구라고 부르는 녹색행성은 저 멀리서 캄캄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엷은 청록색 축구공처럼 좀 외롭게 떠있는 모습을 달 표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좋아한다.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두가지 부정하지 못하는 엄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곤 한다. 허허막막한 대우주 시공간 속에 떠있는 녹색별 지구는 우주속에서 한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생각하는 나의 생명자체도 최장 20년 안에 지구 흙속에 묻힐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제로점 의식(Zero-Dot Consciousness)이 나를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킨다.
  기하학에서 점이란 위치만 있고 크기나 질량이 없는 기호적 표식이라고 중학교 때 배웠다. 지구표면에 사는 우리들은 지구가 큰 별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우주 속에서 보면 지구는 글자그대로 한개 점이다. 태양계 마져도 한 점과 같다. 하물며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연약한 생물체로서 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지구의 황도 운행이, 동일한 자리에서 진동하고 있는 점운동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제로점의식이 나로하여금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현기증만 느끼게 하지 않고, 존재의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도록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이 제로점 의식이 내게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무엇보다도 나를 ‘공작인’(호모파베르)으로서의 엄숙한 의무감에서 해방시켜 ‘놀이하는 인간’(호모루덴스)에로 자유감정을 선물로 준다. 그리하여 루터가 경고했던 공로의식과 성취욕망과 그 강박관념에서 나를 해방시켜준다.노동의 신성성과 의무감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물질재화의 생산분배를 목적으로하는 경제활동으로서의 노동일반은 현대인 모두를 ‘경제동물’로 전락시켰다. 그렇지만,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보노라면, 한국에서 가장 비싸다는 서울강남구에 있는 20억이상 값나간다는 30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나의 청춘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던 지난세월의 나의 선택에 대하여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단독주택 전세방을 살고있는 동포들에게도 기죽고 살아갈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알고보면 모두 한 개의 점안에서 진동하는 원자들이니까 말이다.
  철학자 막스 쉘러가 쓴 『우주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최재희선생이 우리말로 번역한 문고판 명저를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에 예수회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의  『인간현상』과 함석헌 옹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서론부분을 읽으면서 천체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물진화론적 관점으로 나의 의식의 지향점을 돌리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세분의 공통점은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허허막막한 대우주속에서, 한 개의 점과 다를바 없는 지구 행성 안에서,  춤추는 소립자같은 인간생명일지라도, 그 나이가 45억년 내지 35억년 먹은 놈이니까 경이로운 눈으로 봐야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제로점 의식’을 또렷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앙리 베르그송이 그의 명저 『창조적 진화』에서 거듭강조하는 ‘생명적인 것의 특징’에 주목하게 된다. 아직도 한국 보수적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세기 제1장 그대로 창조론을 믿는 모양이지만, 진화론적 창조신앙이야말로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능력을 더욱더 절감하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창조과학회’까지 조직하여 35억년 달려온 생명의 대파노라마를 보지못하게 하는 그들의 독단은 어디에서 오는가?  생명의 진화가 몇천년 몇만년만에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단위가 적어도 몇천만년 몇억년을 거쳐오면서 자연선택이라고 과학자가 말하는 그 변화가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이루어져 왔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생각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에서 유래한다. 그것도 그럴것이 하루살이 모기가 코끼리 일생을 이해못하듯이, 인간의 시간의식은 고작해야 몇천년 단위나 백만년 단위 이하인 것이지, 그 이상은 실감이 나지않는 추상적 숫자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주는  둘째 축복은 단연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사랑이다. 지금 65억 지구촌 동료인간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조립식 공산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조상대대로 35억년 길고 험난한 생명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온 연어떼들처럼 놀랍게 살아남은  결실물이라는 사실이다. 함석헌의 시구절을 인용하여 노래한다면  사람의마음은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도 모든 형상의 어미니”이다. 인간 생명만이 아니라, 인간종과 더불어 지구촌을 공유하는 다른 생명의 종(種)들이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계획이 경제동물들의 독단과 독선이라는 것이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종교신념이 다르다고,  피부색갈이 다르다고, 생명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계원로중 한분이셨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85세경에 여신도들에게 내려준 휘호의 세글자가 < 生命․平和 ․正義 > 였다는 사실은 깊이 음미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제로점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세 번째 큰 축복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충돌해왔고 나를 괴롭혔던 서로 다른 두가지 견해 곧 인간정신의 초월능력 기원에 관한 실재관의충돌을 화해시켜주는 축복이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일관념론을 거쳐 현대 헤겔과 훗서얼에 이르는 ‘선험적 주체의 초월론’은 인간정신능력이 지닌 시공초월능력과 자기반성적 사유능력이 인간 본성에 갖춰져있는 선험적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이나 유학의 심학(心學)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입장이다.   다른한편, 인간정신의 역사성과 시간성에 주목하거나 발달심리학에 정직하려는 사상계열은 고대 헤라클레토스로부터 현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은  삶의 경험적 과정과 세계구조 속에서 후험적으로 형성되고 구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제로점의식에서 생각해보면, 두가지 견해는 모두 상대방 견해가 말하려는 근본취지의 어느요소를 받아드릴 때, 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사람은 ‘세계-내-존재’이다. 세계없이, 삶의 경험없이 유아독존적인 주체적 자기초월능력이란 공허하다. 그러나,  아무리 자연의 자기조직원리와 기능을 현상학적으로 강조하더라도, 35억년동안 ‘점진적으로 누적적으로 생명진화’를  달려온 결과물로서 인간정신의 자기초월능력과 영혼의 영험성이 ‘우연과 필연’의 두 가지 주사위 법칙만으로 가능했다고 믿는 것은 자연과학의 한계초월행위로서 과학적 독단이라고 느껴진다. 35억년 진화기간은 그만두고서라도, 내 엄마의 자궁에서 세포분열을 시작한 그 작은 운동이, 20-30년이라는 찰나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자기를 낳아준 온 우주를 한개 점으로 파악하는 그 정신능력으로 인하여 우주를 도리혀 품고도 남는 현상이 신묘하다.  구상선생님의 <풀꽃과 더불어> 마지막 시구가 생각난다 :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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