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1/19 (20:34) from 210.207.24.203' of 210.207.24.203' Article Number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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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은 아레오바고 영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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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은 아레오바고 영성시대

김경재 목사(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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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바고의 상징성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스 아테네를 관광차 방문할 것이다. 일찌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 인류의 철인들을 배출한 그리스 국민은, 그 찬란했던 조상들의 후예답지 않게 오늘날은 가난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시달리며, 수도 아테네는 관광사업으로 재정수익을 올리면서 도시전체가 자동차 매연으로 시달리고 있다. 무엇을 보려고 매연의 도시 아테네로 사람들은 몰려가는가?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에 서있는 파르테논신전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가)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의 중심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의 파르테논 신전이다. 본래 '아크로폴리스'(acropolis)란 아테네에만 있는 특정 언덕이름 고유지명이 아니고, 고대 그리스 도시마다 도시중심부 가장높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던 종교의식의 중심지를 일컬으는 보통명사이다. 종교적 제의가 집례되는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관계되어있던 고대사회에서 국가의 중요핵심부와 군사적 방어본부가 신전을 둘러싸면서 자리잡은 곳을 통칭하는 말이 아크로폴리스이다. 말하자면 아크로폴리스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시대에서 각 도시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아테네시의 아크로폴리스가 매우 유명해져서 지금은 파르테논신전이 그 위에 서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거의 고유명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의 파르테논신전, 그 조형건축물을 보려고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를 방문할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은 찬란한 고대 그리스 건축예술물의 백미라 아니할 수 없다. 3단의 기단위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늘어서있는 동서 8개 기둥 남북 17개 기둥으로 건축물을 떠받히고 있는 직사각형 클로네이드 열주(列柱)들은 지금도 매우 인상적이다. 19세기 서구제국주의 외세에 꿇려 그 건축물 몸체 일부가 해체당하여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코펜하겐 박물관에 팔려나가 만신창이된 파르테논 신전 이지만, 오늘도 딸러화, 유러화, 엔화로는 살수 없는 그 무엇이 잔영으로나마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으로 살수 없는 그 무엇이 그리워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 파르테논 신전을 찾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위 파르테논 신전은 BC 438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신전 안에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아테나 여신상이 안치되었다. 신상뿐만 아니라, 파르테논신전 자체가 고도의 건축학적 조형미, 조각기법, 대칭미등이 어우러져 그 종교적 엄위와 예술적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들의 심혼을 완전히 사로잡고도 남을 만하였다.


 파르테논 신전이 만들어질 무렵,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그 무렵 곧 주전 450년 전후시대는 바벨론 포로기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족속이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지도아래 허물어진 성전을 수축하고, 율법을 재정비 강조하면서  배타적 유대주의 형성을 조성해가던  시기였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 뒤 역사의 부침에 따라 그 영광이 또한 엎치락 뒷치락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주후 5세기경에는 아테네 신상은 파르테논신전에서 철거되었다. 15세기에 그리스가 이슬람 국가 터어키의 점령지가 되었을 때, 파르테논 신전 남서쪽 귀퉁이에는 이슬람 모스크를 상징하는 첨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17세기말 터어키군과 베네치아군의 포격전으로 인해, 파르테논 신전 중심부 비밀화약고가 폭발하여, 오늘날 보는바처럼 그 건물이 결정적으로 훼손되었고, 앞서말한대로, 19세기엔 열강들의 문화적 예술품 찬탈로 인하여 열강들의 박물관 소장품들로 조각품들이 해외로 반송되었다.

  (나) 아레오바고스 언덕과 시민법정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본문 사도행전 17장, 사도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하던 때, 제1세기 파르테논신전은 아직도 건재했으며, 종교의식과 예술성을 갖춘 휘황찬란한 의식이 정기적으로 집례되고 있던 때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하던 때는 바로 새로운 천년기가 시작되는 시운이 바뀌던 시기였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생명으로 인하여, 전세계, 전 인류, 전 우주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이 사도의 맘을 사로잡고 있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와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워가던 바울사도로서는 새로운 우주시대의 개벽이 시작되었다고하는 우주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있었다.
  일반사람들의 눈을 휘황찬란하게 매혹시킨 건축미와 파르테논 신전을 감싸고 도는 황금빛과 향냄세속에 진행되는 종교적 경건성이 결코 사도 바울의 마음의 눈을 흐리게 하지 못햇다. 그는 철학과 지성의 도시, 예술과 종교성의 도시 한 복판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했다. 그 결과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고발당하여, 아레오바고 언덕위에 세워져있는 시민법정에 공개적으로 서서 그가 전하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변증하게 되었다.그 과정의 자초지종이 사도행전 17장 내용을 이루고 있다.
  사도행전 17장 아레오바고란 정확히 발음하면 아레오파고스인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부터 북서쪽 방향으로 약 1,000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낮은 언덕이름이다. 그런데 이 아레오파고스 언덕에는 지금 영국의 상원과 흡사한 아테네 귀족회의가 열렸었기 때문에 아레오파고스라는 명칭이 귀족회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을 검토하여 비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탄핵법에 따라 헌법위반행위를 심리했으며, 도시질서를 파괴하는 죄인들을 심리하는 시민법정기능도 담당했다. 말하자면 법률의 수호기능을 했던 것이다.
  아레오파고스 권위와 법적 위상은 시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지만,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보는데로, 1세기 당시 아레오바고는 시민법정기능과 공개토론 기능이 뒤섞여있는 복합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도와 몸의 부활의 도를 전함으로 인해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소당한 신분으로 붙잡혀 거기에 서게 되었다. 다른한편 새로운것을 말하고 듣는 일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는 탐구심 많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십자가도와 부활의 도를 전하고 변증하는 기회를 얻게되어 아래오바고 가운데 서서 오늘의 본문멧시지를 설파했던 것이다.
  바울이 설파한 아레오바고의 멧시지가 오늘 우리가 다시한번 새로운 눈과 귀를 열어 들어야 할 새 천년시대의 영성의 핵심본질이다. 그 멧시지를 심도깊게 우리가 성찰하기전에, 파르테논신전이 거기에 서있는 아클로폴리스 언덕과 바울이 서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설파한 아레오바고언덕, 그 두 언덕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고 넘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다) 아크로폴리스와 아레오바고스의 대조

  아크로폴리스는 감각적 눈으로 보고 즐기는 '눈의 종교'의 상징이고, 아레오바고는 바울의 멧시지를 듣고 결단하고 순종해야하는 '귀의 종교'의 상징이다. '눈의 종교'인 헬라종교는 본질직관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과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는 이데아를 추구한다. '귀의 종교'인 이스라엘의 바울종교는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약속에 의지하면서 새롭게 모든것이 변하고야 말 새로움의 도래를 앙망하는 희망의 종교가 된다.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은 아크로폴리스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파르테논신전의 기하학적 균형과 조형미가 상징하듯이 이미 결정되어있는 질서에 순종하고 따라야하는 지배적, 권위주의적 보수정치신학이 깃들인다.
  보다 낮은 언덕에 위치하고 항상 오클로스 또는 라오스가 광장을 가득체우는 아레오바고의 바울종교는 귀족적이 아니고 민중적이다. 기존질서에 순응하기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비토하고 거부하는 법을 가르치는 진보적 혁명적 정치신학이 깃든다.
  무엇보다도 아크로폴리스의 종교는 웅장하고 휘황찬란하고 제법감동적이고 경건의 모습까지 갖추었지만 그 안에는 근본적으로 새로움이 없고 영적 능력이 없다. 그 곳 안에는 말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우상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레오바고 바울의 종교안에는 세상의 철학적 지성과 도덕적 실천이성으로서는 쉽게 이해되지않고 요리할수 없는 새로움과 낯설음이 있으며, 생명의 영의 박동이 있다.

[2] 아레오바고의 영성신학

  흔히 그동안 말해오기를 바울사도의 아테네 선교는 실패한 경우라고 말해왔다. 선교의 결실로 얻는 결과가 겨우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이름의 여인과 성명미상의 몇사람만을 믿음의 결실신자로 거두었기 때문이다(행17:32). 그리고, 아덴에서 바울설교의 실패원인으로 들기를 철학과 이성으로 무장된 아덴사람들의 지식이 복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게 했으며, 바울의 선교접근방법도 성령의 능력표징인 방언 치유 예언 기사이적으로 이교문화를 '정복'하려고 하지않고 그들의 지성과 종교성을 감안하면서 '변증'하려는 소극적 접근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들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부정적 평가, 평면적 평가에 계속 사로잡혀서는 아니된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가장 위대한 바울신학의 진수가 응축되어 있으며,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 할수 밖에 없는 복음의 본질이 증언되고 있으며, 매시대마다 새로운 밀레니움이 시작될 때마다 다시 읽고 새롭게 재해석해야할 '복음적 영성'의 알짬이 거기에 다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택한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자리가 더 높은 언덕 웅장한 파르테논신전을 배경으로 하고 듣는것인가, 아니면, 보다 낮은 언덕 아레오바고로 내려와서 신전이 없는 대신 라오스 백성들 속에서 그 멧시지를 든는 것인가가 문제의 관건이 된다.
  과학사가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그의 베스트셀러 책 <과학혁명의 구조> 속에서 말하기를 "자연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틀 곧 패러다임이 바꾸어지면, 자연 그자체야 본래 그대로 자연이지만, 과학자의 눈에 자연은 새로운 자연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밀레니움전환기에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보면 바울사도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전혀 새로운 육성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새천년은 아레오바고 영성시대가 될 것이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그 본래적 의미로 인류에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지기 위해 세계 기독교 교회사는 2,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아레오바로 영성신학 특징을 본문에 근거하여 몇가지로 압축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가) 비움이 곧 충만임을 깨닫는 영성 :
      종교성이 깊을 수록 '신비자'(The Mystery) 앞에 겸허 해야 한다.(행17:122-23)

  바울이 아덴 사람에게 던진 첫마디는 그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들이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이 있음을 보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알지못하고 위하는 그 것'의 실재를 복음의 빛으로 알게하려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하는 두가지 단어는 '종교성'과 '알지못하는 신'이라는 두가지 의미심장한 주제이며, 그 양자간의 매우 역설적인 상관관계성이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실재의 전부인양 지극히 현실적이고 너무나 속물적이 되어버리는 인생살이 속에서, 헬라인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았다. 우주의 원리와 만물의 이치를 찾아 탐구하고, 운명과 자유의 역설적 관계를 해명하려하며, 인간성속에 있는 로고스와 파토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갈등을 해결할수 없어 고뇌하면서 정직하게 '알지못하는 신'이라는 제단을 세운 헬라인들의 진지성과 지적 정직성에 대하여 우리는 멸시와 조롱을 하는태도를 회개하고 일단 존경해야 할 일이다.
  20세기 신학자 중에서 인간의 종교성, 종교 그자체의 허구성 자기기만성 교만성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고발한 사람은 놀랍게도 20세기 최대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였다. 인간에게 종교성이 많다는 것은 축하하고 칭찬받아야할 만한 일이 아니라, 비판받아야하고 경고받아야 할 일이다고 경고한 것이다.왜냐하면 바르트가 당시에 본 '종교'란 하나님의 은총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쟁취하고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불신앙'이며 가장 숭고한 형태를 옷입은 인간의 교만의 표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 바르트가 비판하고 말하는 '종교'의 범주 안에는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종교도 포함된다.
  본래 '종교'(Religio) 단어의 뿌리는 '주의한다, 조심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 'relegere'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루돌프 오토의 저 고전적 명저 <거룩:聖스러움의 의미>에서 분명하게 밣힌데로 성스러움이란 전적으로 다른 것 앞에서 인간의 경외감의 체험이자 동시에 매혹과 황홀함 속의 경배이며 떨리는 사랑이다. 이른바 거룩한 실재에 대면하는 진솔한 감정은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이자 동시에 매혹케하는 신비(myterium fascinosum)이다. 본래 '종교'라는 말 뜻은 신비하고 거룩하신 이 앞에서 주의하고, 조심하고, 삼가하고, 겸허하는 마음에 동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에서 '종교심'이란 곧 '경건심이요 영성'이다.요한 칼빈선생의 명저 <기독교綱要: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책 표제가 말하려는 의미도 요즘 통속적으로 말하는 "축적된 전통과 상징체계로서의 종교"(C. Smith)가 아니라 신자의 맘 속에 살아 생동하는 '경건한 영성' 이라는 의미였다.
  종교는 교리의 집합체계나 제의적 상징체계이거나 종단기구조직체계나 더욱이 건물이거나 책으로서의 경전 그 자체도 아니다. 종교는 다 알지못하는 신 앞에서의 경건한 조심이요, 신벗음의 자세이며, 항상 낯설음을 대하는 자가 지녀야하는 겸손이다. 당시 헬라인 중에는 적어도 그들의  지혜와 철학적  사색으로나 도덕적 진지성으로서도 다 파악하기 어려운 '알지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자각을 하였고, 마침네 '알지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20세기 후반 개신교의 위기는 어데서부터 오는가? 오늘 한국 교회의 영적 위기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종교인들이 특히 종교지도자들, 성직자 ,전문 신학자,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하나님이 더이상 신비하지도 않고 알지못하는 점이 있는것도 아닌 이로 전락되어 버렸다는데 있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경륜과 신비와, 그 안과 밖을 다 안다고 자신한다. 말로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신비로우심을 말하지만 실지로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일반신도들과 대중들은 종교인들 안에서 '경건의 모양'은 발견하되 진정한 '경건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것을 우리는 종교의 俗化, 종교의 物化라고 부른다.
  종교성이 많았기에 도리혀 '알지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세웠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21세기에 종교가 살아질 염려나 약화될 염려는 조금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21세기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물이기 때문에, 기존 종교의례, 예배, 증언, 찬양,봉사등등 다양한 모습 속에서 더 이상 낯설음, 범상치않은 것, 합리적이면서도 합리성을 초월한 것, 지성적이면서도 지식을 초월한것, 감성적인 것 이면서도 감정을 초월한 것, 윤리적이면서도 도덕주의를 초월한것을 찾지못하면 그 종교단체를 미련없이 떠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영적 갈증을 목축여줄 다른 대안공동체를 찾아 갈 것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다시한번 더 원용하면 이렇다. 뉴톤물리학에 정통한 일류 과학자집단에게는 뉴톤물리학이라는 표준과학 패러다임이 그들에게 자연을 '어떻게'(how) 보고 설명할 것인가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무엇을'(what) 볼 것인가를 규정해버린다. 그리하여 뉴톤물리학적 표준과학이 인정하지 않는 자연현상이란 일어날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않된다는 교조주의적인 비과학인이 되고 만다.
  새로운 천년의 문턱에서 기독교, 특히 한국 개신교는 지나친 자신감과 성취감에 도취하지 말고 겸허하게 진리앞에 낯설은 자처럼 서야한다. 하나님의 신비와 무궁하심에 대하여, 역사의 모호성과 역설적 신비에 대하여, 인간성과 문화의 깊이와 다종다양함에 대하여 한국 개신교 교회와 지도자들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다 알고 있다는 교만을 회개하고 욥처럼 당분간 입술을 가리고 침묵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침묵이 더 큰 말이다. 비움이 곧 충만이다. 높이계신 하나님이 곧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다. 21세기 영성은 산정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계곡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다.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찾지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것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 콩깍지와 콩알의 유비 :  건물성전에 계시지 않고 몸의 성전에 계신다 (행17:24)

  아레오바고 영성신학의 둘째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 지성소가 어디인가의 문제이다. 사람이 손으로 지은 '殿'이냐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신령한 '몸'이냐의 문제이다.
  아레오바고 언덕 위에 올라가서서 2,000년 그날 의 모습을 눈을 감고 상상해볼 때, 사도바울의 복음신앙이 얼마나 혁명적이고 생명적이고 참신한 새시대의 영성이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몸둥이를 가진 물리화학적 구조물을 지닌 존재이므로, 시골에서 살던 청년이 서울역에 이른새벽 도착한 후, 플랫폼을 빠져나와 서울역 광장으로 나오면,눈 앞에 버티고 서있는 수십층 거대 건물들의 휘황찬란한 전등불과 건물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괜히 자신이 초라해지고 무력감을 느끼고 겁도 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바로 1,000미터도 채 안되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에 웅장하고도 신성한 모습으로 세워져있는 파르테논신전의 위용에 조금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아테네 여신이 바로 그 거룩한 신전안에서 신적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던 동시대 사람들에게, 감히 천지의 주제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殿에 계시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바울의 믿음은 예사스러운 것이 아니다.
  종교는 神聖空間을 성별하고, 그 장소에 건축물을 축조하고 성별한후 거기에서 거룩을 접촉한다. 그것이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거룩한 시공간의 예사스럽지 않은 '거룩한 힘의 충전된 場' 에 대한 사람의 영적 감수성은 뉴톤물리학이 지난 300여년동안 가르쳐왔던 균질적인 시공간 개념에 의해 많이 손상되었지만, 세속화의 거센물결일지라도 인간의 근원적 체험 곧 거룩한 신성공간에 대한 원초적 경험의 흔적을 그 영혼의 밑바닥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20세기에도 사람들은 성지를 순례하며, 종교적으로 중요한 공간이나 건물을 사수하려한다. 신전, 성소,교회, 사찰등은 우주의 법칙과 일치해야하고, 우주 질서를 드러내는 상징이어야했다. 그러한 신성공간은 신성한 힘을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곳, 거룩한 힘이 밀도높게 집중되어 있다고 믿는 거룩공간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신전 그 자체는 우주구조의 축소판인 것이다. 땅위의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모방한 것이며, 이중표 목사가 목회하는 분당 민족성전 건축물은 계시록의 가시적 상징물이다. 분명 유대인들의 회당이나 개신교의 '집회장소'로서의 공간건물은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례되는 '장소'기능은 유지되지만, 거룩한 힘이 충전된 신성공간으로서의 고대종교시대의 '성전'개념은 살아졌다. 교인들은, 목회자들은 계속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예배당, 교회당'이 되었다.
  '성전'과 '예배당'은 단순한 표현의 차이만인가?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성전'이라는 말을 겸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사적으로 보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거나, 파르테논의 신전이 되거나, 그 중심엔 거룩공간의 중심 곧 지성소에 신이 임재하고 거주한다고 하는 개념이 있는 것이다. '성전'이나 '신전'은 글자그대로 신들이 거주 하는 집이다. 사람들이 신들을 만나려면, 신들의 거룩한 힘에 의해 치유받고 생명력을 재충전 받으려면 이 거룩한 공간, 성전에로 나아가야한다.
  그러나, '예배당'과 '교회당'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집'일 뿐이다. '교회, 에크레시아, 부름받아 소집된 무리'들이 모인 공간이요 집일 뿐이다. 거기에서는 집 그 자체나 그 공간 자체가 특별나게 성별되는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동휘 목사가 목회하시는 안디옥교회는 '성전'건물없이도 훌륭하게 에크레시아로서의 교회일수 있으며, 초대 로마 카타콤베교회는 건물아닌 공동무덤 안의 좁은 공간면적을 예배처소로 사용 할 수 있었다.
  아레오바고의 설교 속에서 바울사도가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주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다고 선언했을 때, 사도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 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요4:21-23)하신 예수의 복음신앙을 재천명한 것이다. 그러면, 새천년시대 인류들은 하나님의 임재장소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자시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시공간의 주이시기에 어느 특정 장소나 건물에 한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가장 원하시는 곳은 45억년 건축기간이 소요된 인간생명이라는 몸을 성전으로 삼아 임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사람의 생명체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며, 심령에 하나님을 모신자들이 모인 회중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고후6:16). 이말은 새로운 말이 아니요, 교인들도 성경에서 수십번 읽고 듣던 말씀이지만, 진정으로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신앙의 새시대로 이제 인류는 들어가려한다. 새천년의 영성시대는 별다른 우주 기술공학발달과 정보화 통신기술로 시작되는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사람의 몸 그 자체가 가장 거룩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임재소로서 '성전'이라는 자각을 인류구성원들이, 특히 성직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갖느냐의 여부로 판가름난다. 그 진실이 바르게 인지되고 각성될 때,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 억압 착취 멸시하는 온갖 비인간화 행태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창조적 변화를 지향하는 변혁의 열정이 솟구친다. 마치 19세기말, 동학 최수운에 의하여 '시천주신앙' 곧 사람의 몸에 하나님을 바로모심의 종교가 농민들을 일시에 각성시켜 당시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변혁시키려는 혁신운동이 가능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말하면, 강연자는 교역자와 교인들이 지극정성 모아 교회당을 건축하여 주께 봉헌하는 그 일을 부정하거나 그러한 노력의 의미를 과소평가 하는 것 아니냐라는 오해를 가질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가시적 교회당 건물이 좀더 아름답고 거룩한 상징물로 건축되기를 힘써야 한다. 예배는 신앙공동체의 심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예배처소가 가장 아름답고 거룩하게 성별되고 축조봉헌되어야 한다. 신도들이 사는 주택들은 수십억되는 좋은 건물인데, 신도가 모여 예배드리는 예배당이 자기 집 차고 만도 못한체로 방치하는 그 교회에 진정한 은혜체험이 있을런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진리가 있다. 건축물로서 예배당 건물과 하나님의 임재가 실지로 일어나는 성전물인 인간의 심령체의 관계는 비유컨테 콩깍지와 콩알의 상호관계와 동일하다. 콩밭에 나가보지 않더라도 콩깍지와 콩알은 함께 자라는 것이다. 농사의 궁극 목적은 영근 콩알을 가을에 수확하고자 함이지만, 튼튼한 콩깍지가 없이 콩알이 형성되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외모가 그럴싸한 콩깍지가 생겼더라해도 그 안에 콩알이 영글지 않으면, 가을추수 때 콩깍지는 소죽 쑤어주는데 사료나 아궁이 뗄감으로 밖에 달리 쓰여질 수 없다. 500억원을 들여서 건축했을 지라도 건축물 교회당은 콩깍지 이상 일수 없으며,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도들이 콩알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콩알이 바르게 영그는가의 여부에 있지 콩깍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새천년의 아레오바고 영성신학은 '사람의 몸'이 단순한 생물학적 진화결과로서 육체덩어리가 아니며, 경제적 동물만도 아니며, 뇌신경체계와 호르몬으로 유지되는 고급컴퓨터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새천년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교인에게 알리고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일과 연결된다. '사람의 몸' 그 전체로서의 통일적 존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극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몸' 그 자체는 통시적으로 45억년의 지구진화및 우주생성의 역사를 그 안에 진화암호체계로서 간직하고 있는 영물이며, 공시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의 촉발적 임재와 새롭게하시는 능력에 감응하면서 동역하는 '우주신인론적 영성'(cosmotheandric spituality:R.Pannikkar)을 지닌자이다. 동시에 시공간적으로는 전체자연, 전체 우주생명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존재다. 장회익 교수에 의하면 지구생명을 유기체단위로 삼을 때, 인간의 위치는 지구몸의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
  사람의 몸안에서 '중추신경계'의 위상과 기능은 몸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자료를 분석종합판단하고 몸전체의 균형과 조화와 건강을 위해서 조정기능을 하는 것이다. 지구생태계 위기를 맞아 기독교의 신학적 인간학은 '청지기모델이나 '상속자 자녀'모델을 넘어서서 '중추신경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중추신경계의 형성과 그 기능은 몸의 다른 제반기관으로부터 공급받고 유지된다. 그러나 동시에 중추신경계는 그가 지닌 '초월적 정신능력, 반성적 사유능력'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 봉사한다. 유기체적 지구생명과 인간과의 관계가 몸안에서 중추신경계의 역활과 같다는 말이다. 중추신경계는 신체 각기능의 절제 , 균형조화, 창조적 성장을 위해 봉사한다.
  새천년의 교회갱신을 앞에두고 서있는 기장은, 다른 교파에 비하여 교세의 열세를 만회하려는 교인수 열세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려는데 일차적 신경을 쓰기보다는 근본적 발상법전환을 해야한다. 목양지의 각 교회 신도들 심령안에 진정한 교회, 영적 교회가 세워지도록 우리는 복무하고 있는가? 가시적 교회당을 새롭게 신축하려는 열망만큼 불가시적 교회 그 자체를 각각의 신자들 심령 속에 건축하려는 목회적 노력을 하고 있는가?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처소의 제일차적 지성소가 교회당의 제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의 지성소임을 볼수 있도록 신도들의 영적 시선을 바꾸어주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우리들의 목회가 파르테논신전에 복무하는 현대판 사제기능인가 아니면 사도바울의 복음사역의 후계자로서 기능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다) 내재적 초월경험과 미학적 감성이 숨쉬는 아레오바고 영성(행17:25,28a)

  새천년의 영성이 지향하는 바를 그 지향성에서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지난친 도덕적 엄숙주의나 역사주의에 경도된 영성을 한번 더 초월하여 내재적 초월경험과 미학적 감성이 되살아나는 영성시대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한다면, 주지주의적 교조신앙이나 퓨리탄적인 도덕적 엄숙주의를 넘어서서 몸으로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내주와 성령의 역사를 날마다의 일상성 안에서 체험되는 기독교 신앙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신론을 예들어 조직신학적 표현으로 같은 지향성을 달리말해본다면, 새천년의 아레오바고 영성은 초월적 유신론, 내재적 범신론, 미래주의적 종말신앙을 모두 극복한 하나님관을 받아드린다. 만유를 초월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바로 그러하시기에 만유가운데 내재하시며 한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내재하실 뿐만아니라 창조적 과정 속에서 인류를 설득하고 격려하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아레오바고 영성시대에로 돌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증언하기를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행17:25)라고 했다. 갈릴리의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군림하는 군주적 이미지도 아니고, 엄숙한 율법을 산정에서 내려주시는 무서운 율법수여자도 아니시며, 재물과 복채를 바치는만큼 선심과 축복을 내려주는 무교의 몸주신 같은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민에게 생명, 호흡,마물을 친히 주시는 이요, 우리가 그 분 안에서  그 분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오늘날 신학계의 기상도를 가만히 돌아보노라면 1960년대를 전후하여 20세기 전반부와 후반부가 확실하게 다르며, 20세기 후반부도 다시한번 세분하면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전후반의 기류가 확실하게 다르다. 역사에 몰두하여 지금 바르게 향유하라고 주시는 생명을 소홀히 생각하는것을 싫어한다.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지니되 경직되지 않고 더불어 축제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희망 속에서 선취하되 항상 오늘 지금 여기의 삶을 바르게 대하려한다. 천박하거나 경박한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기쁨과 찬양과 경배의 신학' 을 요청한다. 사물을 '명석판명하게' 파악하는 합리적 이성이나, 정의로움과 평등을 추구하는 실천적 이성만으로는 그들의 영적 갈증을 다 체워줄수 없다. 성숙한  인간들은 종교란 본질적으로 '능동적 수동성', '놀라움과 기쁨', '신명성과 감정의 고양', '진통이 동반되는 기쁨과 자유', '값싼화해나 천박한 열광주의가 극복된 감사와 찬양'과 긴밀하게 연관된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점점 확신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영성은 상징을 잃어가면서 교회는 점점 정통교리와 성경내용을 바르게 알게하려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 갔다. 예배에서 성만찬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설교가 개신교 예배를 지배하는 경향성을 띄게 되었다. 설교의 임무가 바르게 수행되고, 말씀증언과 함께 하나님의 영의 감동감화가 함께 일어날 때 예배는 은혜롭게 되지만, 대체로 설교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강론하거나, 도덕적 계율을 바르게 지키도록 신도를 각성시키는 도덕적 권면의 시간이 되기가 일수였다. 그런 모습들은 진정한 아레오바고의 복음적 영성이 주지주의적으로 왜곡되거나 도덕주의적으로 왜곡된 현상이다. 다른한편 그러한 교회예배의 주지주의화와 도덕주의화를 반발하고 나온 오순절교회를 필두로하는 성령파교회들 안에서 교회예배는 자칫하면 인간감정의 심리적 과잉흥분과 감동이 마치 사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거듭나게하는 일과 동일하것 처럼 혼동하여 열광주의 형태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런 현상은 진정한 아레오바고 영성의 심리학적 왜곡형태가 된다.
  새천년의 아레오바고 영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엡2:16) 실질적 경험과 그들이 사랑하는 주 그리스도가 목사님의 설교말씀 속이나, 성경이라는 경전 속이나, 천국의 영광보좌에서나, 돌보아야 하는 가난자들 속에서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마음에 직접 임재하시는 체험"(엡2:17)을 하기를 원한다.
  기장은 지난 40년간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예언자적 섭리교단으로서, 역사참여적 진보교단으로서, 민중지향적 하나님 선교신학 교단으로서 그 어느 교단과도 비교 할 수 없는 큰 일을 해왔다.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리한 것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함께 동행하신 격려의 능력으로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제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새천년의 여명을 맞이하면서 우리 기장교단은 진지하게 자신의 걸어온 길을 성찰해야 한다.
  예언자적 섭리교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우상타파에 힘쓰다보니, 제사장으로서의 교회기능  곧 치유하고 양육하고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죄를 대속하는 기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역사참여적 진보교단 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다보니 지나치게 역사에만 몰두하는 경직성을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민중속에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설교는 했지만 우리 자신의 맘에 그리스도를 계시게 하는 실질적 체험을 소홀히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정직해야하겠다. 기장교회가 부흥되지 않은 것은 기장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적 지향성에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 지향성을 능히 감당할만한 우리들의 아레오바고 영성이 부재했던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새천년 그리스도교회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예배의 갱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신앙을 이어가는 장로교 교단으로서, 귀중한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역동적이며 창조적 변화가 일어나도록 깊은 예배신학적 통찰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설교강론중심의 예배분위기를 지양하여 전교인이 참여하는 참회, 말씀,감사, 찬양경배가 바르게 자리잡는 역동적 예배로 변화되어야 한다. 설교는 중요한 위치를 계속 지켜가야하되, 설교시간이 교리강론이거나, 도덕훈화이거나, 성경주석시간처럼 되어서는 아니된다. 방금 화덕에서 막 구어낸 부드럽고 따뜻한 빵처럼 생명의 떡 잔치에 참여하는 말씀중심의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찬양과 경배가 훨씬 강화되어야 하지만 천박한 감정주의에로 교인을 몰아가거나 소음과 별다름없는 확성기와 타악기의 범람은 절제되어야 한다.
  장로교전통의 중요한 예배정신 곧 하나님의 주권앞에서 인간의 겸허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즐거워하는 예배로서 진정한 거룩체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들의 참여가 동시에 이뤄져서 예배자체가 한편의 '거룩한 드라마'의 전개처럼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부성적 성령 이미지만이 아니라 모성적 성령 이미지가 체험되도록 해야 한다. 교인들을 능동적이고 적극적 신앙인으로  육성하는것 못지않게 진정으로 성숙한 영성인은 '능동적 수동성'이 보다 한단계 높은 영적 삶이라는 역설적 체험단계로 교인을 성숙시켜가야 한다.

  (라) 문화종교신학의 개안을 통하여 주체적 한국신학형성 과업과 아시아 선교과업을 이뤄내야 한다(행 17:26-29)

  새천년시대 아레오바고 영성은 지난 2,000년동안 지중해문화 중심의 기독교, 서양문화 중심의 기독교를 넘어서서 전지구적 차원의 삶의 빛에서 복음을 재해석하는 과제가 요망된다.21세기에는  헬라-라틴적 기독교 틀에서 복음을 해방시켜 진정한 동아시아적 기독교신학, 복음적 한국신학, 아시아 신학 형성에 진력하여 25억 인구 아시아의 복음화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오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거주의 경계와 년대를 정하시어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하시었으며, 그 창조주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은 모든 각각의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선언한다.(행17:27)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준 19세기말 선교사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들어와서, 하나님없이 살던 한민족에게 하나님을 전달해준것처럼 말했지만, 오늘 사도바울은 다르다.
  모든민족과 년대와 경계 속에서 사는 찬하만민 각각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멀리떠나계시지 않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께서 너희 하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신비자 하나님, 모세와 이사야와 베드로와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조상들과 한반도에서 선교사 도착이전부터 한민족을 위로 격려하시며 징계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해오신 임마누엘이 하나님이신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이 어두워지고 영성이 쇄약해져서 밝히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 '알지못하는신'처럼 되어버린 그 분을 복음은 좀더 분명하게 한민족에게 복음의 빛에서 증언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세계 카토릭교회는 라틴적 기독교세계 패러다임에 의해 이해되고 설명된 복음의 멧시지를 전세계 지평으로 확대시키고, 非라틴신학적 문화전통 특히 아시아적 문화, 종교, 영성과 깊은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아시아 복음의 토착화와 제3천년기의 선교신학을 구축하려는 노력들을 매우 진지하고 활발하게 진행해시켜 가고 있다. 1987년 아시아 주교회의는 앞으로 아시아의 신학형성과 복음화는 삼중적 대화를 반드시 거치면서 이뤄져야하는데 아시아의 문화, 아시아의 종교, 그리고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것이라고 갈파했다.  알로시우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가 갈파한대로 아시아의 종교문화전통을 무시하거나 비켜가는 정치신학과 교회선교는 공허하거나 정복론적 열광주의 신학이 되며, 아시아 민중의 가난과 정치적 소외를 외면하는 신학과 선교는 맹목적이 되거나 사치스러운 신학이 되고 만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1세기 한국 개신교의 선교신학은, 특히 한국과 아시아에서의 선교는 그동안 19-20세기 서구 신학자들이 취했던 이교문화와 종교에 대한 정복론적, 배타주의적 선교신학을 가지고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도 않을 뿐아니라, 선교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기독교자체의 성장과 성숙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선교신학은 기독교가 지닌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자기 전통과 정체성 고백에 더욱 순수한 헌신을 하면서 동시에 타종교와 전통문화에 대한 열린 맘 개방성을 지니는 태도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불교와의 선의의 경쟁과 상호포용적인 관용과 협동은 시급한 일이 되어 있다.
  흔히 항간의 오해는 종교다원주의란 기독교 신앙을 상대화시키거나 종교혼합주의로 만들고,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성서적 증언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진리의 궁극성(finality), 능가불가성(unsurpassability), 결정적 성격(decisiveness), 유일성(uniqueness)등을 모두 포기하거나 폐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오해들이 있다. 종교다원주의 안에는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들이 있지만, 위와 같은 입장 곧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는 신학적 입장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도 않된다. 왜냐하면, 폴 틸리히가 바르게 지적한바 처럼 살아있는 신앙이란 '무제약적 궁극실재'에 대한 인간실존의 '무제약적 응답이며 전인적 반응'이기 때문에 '궁극적 관심'이 아닌 것, 곧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관심하지 않은 것은 '궁극적 관심'이 아니며 신앙이 아니다.
  기장의 선교신학 입장은 '하나님의 선교'를 받아드리며 타종교의 실재에 대하여 포용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경륜과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시아의 고등종교 안에서도 현재하였음을 믿으며, 그러나 기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궁극적 진리의 완성형태와 온전하고도 투명한 생명적 진리가 계시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1965년 장공 김재준 목사의 논문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보다 앞서고 세계교회협의회의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보다 앞서서 일찍부터 피력되었다.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인은 원시종교인 巫敎는 논외로하고 유교 불교등 그리스도교 아닌 타종교를 받아드린 이후만 하더라도 약 1500년의 긴 역사를 이룩해 온 것이다. 좋든궂든 이것이 한국인의 體質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생활의 典型을 조성하고 았는 것만은 사실이다.....우리나라에 온 그들 (초대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하나의 空白과 같이 다루고 있었다. (한국문화 속에) 무엇이 있었다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악의 소산이라하며 일망타진을 기도했던것이다. 불당의 불상이나 유가의 제사를 단순한 우상숭배로 치부하여 그 박멸을 기도했다....
  우리는 타종교가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유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단편적인말씀이라고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받는 인간이 情況이 어스름 달빛처럼 희미한데 서 그 나타남이 흐리고 또 단편적인 것으로 된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함을 이루었다.   [김재준전집, 제7권, 336쪽]

  위에 인용한 장공의 문화신학 또는 종교신학의 견해가 발표된지 어언 35년이 지나가건만 한국 기독교계가 타종교및 한국 문화에 대해 갖는 선교신학적 입장은 구태의연하며, 진보적 기독교를 자처하는 기장마져도 보수교단의 태도와 대동소이하다. 일반적인 기장의 문화신학및 타종교에 대한 입장은 장공의 견해에 비교할 때 훨씬 못미쳐 거의 보수주의적 태도를 답습하고있다. 또한 1970-80년대 기장의 신학적 증언은 민중신학에서 보는것처럼 정치신학적 차원에서 복음의 정치사회적 증언에 힘쓰다보니, 자연히 문화및 종교신학의 발전은 소홀하게 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이나 카토릭 바티칸의 입장에 대하여도 그동안 변화의 실상에 대해 정보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나간 20세기에는 그렇다하더라도, 21세기와 새 천년에도 이 문제를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 없다.
  20세기가 저물면서 신문 언론매체들은 20세기에 일어난 20대사건 나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최고 석학중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는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은 기독교와 불교가 심층적으로 만난 사건이라고 피력한바 있다. 그는 역사가이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긴 안목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1000년후 어느 역사가가 20세기에 대하여 쓰는 경우,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갈등 이상으로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비로소 일어난 상호변혁에 대하여 보다 깊은 흥미를 나타낼 것이다".
  아레오바고의 영성신학은 지구촌안에서 발생한 역사적 종교들과 다양한 문화들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지배 안에서, 하나님의 눈 앞에서, 하나님의 장중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견해를 가능하게 한다. 아레오바고 영성신학은 성서의 하나님을 지중해 셈종족 문명권의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온 인류의 하나님, 만민의 주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수한 선택적 사명과 교회의 사명이 부정되지 않고 도리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딤전2:4)임을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한다.  
  새 천년의 아레오바고 영성은 더 이상 기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교신학'과 '배타적 보수선교신학' 사이에서 주저하고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지속하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기장교단은 사회정치신학에서 만이 아니라, 문화종교신학에 있어서도 다른 교단이 열고나갈 수 없는 역사의 '화살촉'이 되어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열어가야할 사명을 21세기에 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장의 21세기 선교지평은 한국사회를 넘어서 아시아의 25억 인구가 왜 서구신학이 지난 300년간 막대한 자금과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인구 25억중 불과 1% - 3% 이내의 지극히 미미한 선교결실을 맺혔는가를 거시적 안목에서, 해석학적 안목에서 파악해야 한다. 특히 중국 13억의 선교과제는 한국 기독교에 사명으로 맡겨져 있다. 중국동북 3성에 흩어져 사는 중국 교포들 200만명은 중국대륙을 복음화할 21세기의 디아스포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천년시대 아레오바고 영성신학은 첫째, 인간의 모든 종교적 神名과 신학이론과 교리적 패러다임 속에 다 해명되지 않으시는 진리자체이신 하나님, 신비자 하나님, 이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궁성 앞에 겸비하게 자신을 비우는 영성이어야 한다. 둘째, 새 시대의 참 성전은 사람의 몸 그 자체임을 깨달아 각자 마음의 지성소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영성' 시대이어야 한다.그리하여 지구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중추신경계' 역활을 하도록 창조주로부터 사명이 주어졌음에 대하여 새롭게 각성하여 생태학적 성령론의 신학, 생태학적 윤리신학, 몸의 훈련이 동반된 영성수련을 지향해야 한다. 셋째, 새 천년시대 아레오바고 영성은 하나님의 내재적 초월경험과 미학적 감성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영성이어야 한다. 예배가 진정한 예배답게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가 지상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일들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하고 자유롭고 새로움을 체험하는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넷째, 새 천년시대 영성은 기독교가 지구촌 안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고등종교들과 진지한 대화를 통해, 특히 한국상황에서는 불교와의 심층적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더욱 뚜렷하게 밣혀내고 알렉산드리아적 기독교, 바티칸적 기독교, 제네바적 기독교의 색갈과 다른 동아시아의 위대한 영성과 창조적 지평융합을 이룬 복음의 재해석을 이뤄내야 한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복음화'라고 하는 새로운 밀레니움의 선교과제를 달성해 내야 한다. 새 천년의 영성은 사도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은 생명의 영, 부활의 영, 진리의 영으로 충만한 아레오바고의 영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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