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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상황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기장교역자대회, '0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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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교역자대회20090608]

                    세계상황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신학적 관점에서 본 시대적 상황의 본질 4가지와 그 응답의 과제

 지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기독교 신학의 흐름은 시대적 변화가 제시한 삶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창조적 반응결과로서 점철 되어있다. 복음진리는 영원할 지라도, 복음과  시대적 상황이 만나 빚어내는 교회의 신학적 반응은 언제나 상황적이고, 상대적이고, 유한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18세기 인간의 이성주의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교회의 신학적 반응은 반계몽주의적인 보수정통주의와 적극적 반응으로서 친계몽정신적 성향의 진보적 신학으로 양분되어 나타났다. 전자의 신학적 흐름을 속칭 신본주의 신학이라는 보수주의 신학흐름이라 부른다. 후자의 형태는 칸트철학에 영향받은 윤리적 기독교와 개신교의 문화적 기독교(Kultur Protestantismus)로 나타났는데 자유주의신학 혹은 인본주의신학이라는 표지가 붙었다.
 개신교 보수정통주의는  계몽주의 정신의 여파로 발생한 성경비판학, 다윈의 생물진화론, 발전론적 역사주의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방어할려는 순수한 열정은 근본주의신학이라는 성벽을 교회둘레에 쌓고 자폐증적 방패를 들고 서든지,  아니면 인간 심령의 내면세계로 도피하는 청년왕국론적인 심령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하늘을 사랑하여 땅을 버렸고, 영혼 구원을 위해 ‘몸의 속량’(롬8:23)을 간과 했으며,  천국을 사모한 남어지 역사 현실 세계는 세속인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개신교 자유주의적 진보신학 캠프는  칸트철학에 영향받아, 기독교의 본질을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집약표현된 윤리적 가치로 한정시킨 개인윤리적 기독교로 만들어갔다. 종말론은 탈신화화 되어 중립적 역사과정에로 편입되고, 마침네 실존적 종말론에서 종착역을 발견했다. 또다른 진보계열은 계몽주의적 역사낙관주의에 편승하여, 서구 중산계층의 욕망과 정열과 야합하면서  19세기 서구 식민주의 함선에 편승하였다.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기독교 종교문화권의 확장’과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하면서도, 19세기를 ‘기독교 선교의 세기’로 삼는다는 명분을 면피용으로 지녔다. 땅을 정복하느라고 하늘을 잊었고, 역사에 책임적 이려고  초월을 상실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보수정통주의와 진보적 인본주의 기독교는 20세기 초,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양편 모두 그 근저에서 고강도의 지진 진동을 겪었다. 그리하여, 국제연합(UN)이 형성되듯이, 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나 복음주의협의회( NAE)로 개신교의 교회운동이 2분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세기 교회의 신학운동은 이러한 역사변동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어느 신학운동도 영원한 신학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20세기 들어와서 어떠한 주류적 신학운동도 30-40년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인간의 시대적 상황의 중심문제가 대체로 1세대 시간길이 곧 30년-40년을 단위로하여 변화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정통주의 신학, 폴 틸리히의 철학적 변증신학,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칼 라너의 초월론적 신학,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 윤리신학,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희망의 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교회성장 축복신학, 생태학적 신학 등등도 시대적 책임을 다하면 약화되거나 새로운 신학으로 대체될 것이다.
 우리는 시공제약적 유한성 안에 살기에, 늘 마음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학체계를 원하는 심정이 있다.  30-40년만에 그 실용성이 변화하는 신학은 할 필요가 없거나 그 가치를 평가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신학무용론에 빠지기 쉽다. 신학무용론자나  신학 경시론자는, 사실은 자기가 만든 자기류의 검증되지 않는 신학체계를 가지고, 신학을 잘모르는 평신도들 앞에서 ‘영원한 신학’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신학이란게 별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원한 진리복음’을 매 시대마다 인간이 직면한 실존적, 시대적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복음의 진리로 그 문제를 해결 돌파하려는 교회의 창조적 지성활동이요 교회의 응답인 것이다. 시대적이고 실존적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은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무책임한 것이 되고, 영원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망각한 상황신학은 공허하고 한갖 제3류의 종교철학담론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밑바탕에 깔고서, 우리는 앞으로 30-40년 동안 세계상황과 한국사회가 맞부딪혀 씨름해야 할 상황중에서 가장 본질적 문제를 다음 4가지로 총괄하고,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의 방향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우리세대가 직면한 4가지 위기를 돌파할 뿐 만 아니라, 문명위기를 창조적 도약의 기회로 삼고 문명을 한단계 승화시키기 위해서, 교회(교역자)는 정의, 생명, 평화, 성화의 4가지 영성주제에 투철하되 말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현재화 시키는 길뿐임을 명심하고자 한다.

(i) 빈부 양극화로 인한 계층간 국가간 갈등과 분쟁에 직면하여
                - 계약전통 예언자정신의 회복(正義)과 섬김의 영성회복 -
(ii) 자연생태환경 붕괴로 인한 질병과 생존위협에 직면하여
                - 창조전통 성육신 신앙의 회복(生命)과 청빈의 영성회복 -
(iii) 다문화 종교사회 도래로 인한 가치신념 체계 충돌위험에 직면하여
              - 지혜전통과 화해신앙의 회복(平和)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영성회복 -
(iv) 유물론적 환원주의 실재관과  물신숭배적 바알문화의 도전에 직면하여
          - 초월적 인간품성의 정체성회복(聖化)과 예수생명의 체현(體現)의 영성회복 -

[2] 빈부 양극화로 인한 계층간 국가간  갈등과 분쟁에 직면하여 正義를 세워야
            - 계약전통 예언자 정신의 회복과  섬김의 영성회복-


 경제전문가들과 사려깊은 정치가들의 통찰과 분석처럼, 21세기 초엽에 지구촌에 닥친 경제적 금융위기와 시장경제 체재의 불황은, 일차적으로는 경제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도덕적 해이와 무책임, 불성실, 이기적 무한 욕망이 초래한  결과라는 진단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책임론은 한계가 있다. 문제는 20세기 말,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후, 인류는 전 지구촌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한 ‘세계화’가 자명한 인류의 올바른 진로라고 경솔하게 속단한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세계시장경제 현장은 초기 자본주의 경제를 출현시킨, 이른바 막스 웨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한 노동윤리나 직업윤리, 그리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그런 사회가 아닌지 이미 오래다.  도리혀, 시장경제는 인간의 소비욕망을 무한히 계속 자극 확장시키면서 신상품의 공급, 기업간의 무한 경쟁, 얼굴없는 다국적 기업, 이마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백만 달러 수익을 챙기는 이동성 금융자산등이 날뛰는 현장이었다.
  그결과, 소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과 후진국간의 경제차이는 극대화되어가고, 그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박탈감과 비인간화는 폭력적 증오감으로 변화해 갔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살상행위와 공격적 폭력이 점증해 갈 조짐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사회의 최근 사회통계조사 보고를 보면(한겨레.2009.6.1일), 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이 지난 1년동안 8.41배에서 8.68배로 크게 높아졌다. 가장 최근에 조사된 2009년 1분기 하위 20% 계층의 가계소득은 월평균 85만5900원이다. 4인가족 기준 최저생계비가 132만원이다. 한국사회 구성원의 하위 20%가 문화,교육,여가, 자기개발 투자는 아예 고만두고 생물적 생존위협에 까지 몰리고 있음이 현실이다.  
 빈부의 양극화는 국가사이만이 아니라, 동일 사회안에서 계층간의 위화감을 증대시켜 사회의 연대성은 붕괴되고 있다. 사회공동체는 법에 의한 지배와 합리성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공동체라고 자위하는 가면을 쓴체, 사회구성원 사이는 무한 경쟁과 살벌한 인간성 붕괴가 노정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기업체의 회생을 위한 불가피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에서 쫒겨난 가장과 그 가족들과 어린자녀들의 말못할 고통은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의 저 깊은 분노와 좌절감 속에는 한가지 물음을 묻는다: 인간의 삶이 과연 정의로운가?  정의 라는 것이 살아있는가? 아니, 정의란게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데, 과연 하나님은 지금 억울하게 희생당하여 생존위기를 겪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인가?  교회가 서있는 삶의 현실적 상황은 바로 거기이다.
 이러한 우리시대의 심각한 부의 양극화로 초래된 비인간화 상황을 교회가 외면해서는 아니된다. 그런일은, 이 세상적인 일이요, 정치경제전문가들의 일이요, 교회와 교역자는 낙담한 자를 위로하고 영혼의 안정과 평강을 지키도록 하는 일이다고 핑개할 수 없다. 그러한 ‘영혼의 돌봄’이 필요치 않다는 말도 아니고,  교역자의 1차적 임무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에서 들려오는 중심 메시지는 가난한자, 억눌린자, 억울한자들의 한을 대변하여, 인간공동체 안에 정의(正義)를 바로세우는 예언자적 열정을 놓아버리면 , 그것은 성서적 신앙과는 아무관계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는 경고이다. 기장교단이 이 예언자의 열정을 굳게 붙잡은 것은, 비록 그것 때문에 교회의 양적 성장이 다소 늦을 지라도, 귀중한 우리들의 축복받은 사명이었다.
 성경안에 줄기차게 흐르는 ‘계약전통’의 핵심정신 속에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와 인간다움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계명이 있다. 레위기를 포함한 성경의 법정신은  ‘약자보호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학교 때 배웠다.  설교강단이 가진자와 못가진자를 대결시켜 무시와 증오를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않된다. 그러나, 기장의 목회지향성은 ‘민중의 한(恨)의사제’(서남동)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거나, 아모스 예언자 소리를 잠간이라도 잊어버리면 참된 교회의 자리를 일탈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聖會)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1,24).
 구체적으로 부의 양극화로 인한 인간사회의 소외를 극복하고, 새로운 치유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새로운 경제-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정의가 보다 실현된 사회,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공동체 건설이 가능하다는 비젼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며 격려하는 일이다.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최대 적은, 꿈을 잃어버리고 비젼을 상실한 자포자기의 절망심리이다. 세상은 어차피 그렇고 그런 동물들의 왕국일 뿐이라고 자조하며,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 당연한 사회윤리 원리라고 강변하는 ‘사회진화론자’들의 신념체계가 문제이다. 실용주의라는 고상한 미국의 삶의 철학도 ‘사회진화론’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엔 무한경쟁, 승자독식, 약자패배, 위계질서, 기득권의 보호법, 경제적 동물왕국이  판을 친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길위에 세워놓고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예수의 목자심정은 무책임하고, 비능률적이며, 비판받아야 할 정신으로 매도된다.
 둘째는, 양극화로 인한  인간심성의 황폐와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찬 사회적 박탈감을 치유하고 정화시키면서, 상생하는 사회로 전환시키려면, 특히 목회자들의 존재방식이 ‘바보들의 바보’ 이미지를 갖출때까지, 성직자로서의 모든 기득권과 특권의식을 버리고 낮아지며, 소탈해지며, 민초들의 삶 속에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금년들어 두차례 겪은 국민적 심성의 커다란 출렁임, 곧 고 김수환추기경의 소천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즈음한 국민들의 애도물결은, 고인들의 성직자로서의 인격과 정치가로서 치적에 대한 추모만으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 분들이 갖춘 ‘바보 상(像)’이, 약삭바르지도 못하고, 영악하지도 못하고, 모질게 독하지도 못해서 늘 바보처럼 뒤쳐진  삶을 살던 민중들의 맘과 동일시가 이뤄진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당하는 모멸과 비난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나름대로  목회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착한 교인들이 그 나름대로 사회봉사와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의 혹독한 기독교비난이 터무니 없고 반기독교세력의 악의찬 공격이라고 이해하려한다. 그러나, 냉엄하게 돌아본다면,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가고 있는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도세력들 안에서, 한국 일반 사회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갖추신 ‘바보 상(像)’을 느끼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사야서 53장 ‘고난의 종의 노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체현된 삶을 살아가는 개신교 성직자들을 찾아 볼수 없다는 것이 근본 이유이다.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분쟁 상황을 치유하는 길은, 항상 약자들의 형편을 자기자리로 삼고 동병상린하면서,  ‘정의’를 바르게 세우는  계약전통 예언자정신의 회복과 ‘바보像’을 육화(肉化)한 교역자들의 섬김의 영성회복이 관건이다.

[3] 자연생태환경 붕괴로 인한 질병과 생존위협에 직면하여 교회의 대응
      - 창조전통 성육신 신앙(生命)과 생태학적 청빈의 영성회복 -


  자연생태환경 파괴 및 붕괴로 인한 지구 행성의  재난과 생존위험은 사실 우리시대 최대 최상급의 위기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문제상황이다. 그 문제는 환경론자들의 과장이거나 수다스런 일거리 만들기 이거나, 진보성향을 과시하려는 지식과시가 아니다. 실제 사실(factum)이요 현실문제이다. 좁게 국지적으로 보면, 아직도 자연생태위기 문제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지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 행성 전체로 볼 때, 대륙 지질권에서 가뭄과 홍수 ․ 지구의 허파인 적도 원시림 파괴․남북극 빙하 해빙과 해수면 상승 속도 ․ 지구온난화 급진전으로 곡물 및 물 부족현상 ․해저 생태계의 생물 멸종사태,  신종바이러스 창궐로 인한 질병재난등은  인류가 이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해결할 충분한 시간을 이미 잃었다는 비관론이  일어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다.
  자연생태환경이 현재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현실적 보고나 통계수치를 여기서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문제는 이러한 자연생태환경의 붕괴로 인한  지구행성의 위기를 극복하여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를 어떻게 회복 할 것인가의 대안이다.
 교회는 4가지 목회적 과제를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한다. 첫째는 생태학적 영성의 각성을 위해 우주의식의 눈뜸을 위한 교회교육을 힘써야한다. 둘째, 피조세계와 창조주와의 관계정립, 다시말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재해석하여 현실적인 포스트모던시대의 신관을 재정립해야 한다. 셋째, 자연생태적 유기적 그물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의 위치설정, 다시말해서 호모사피엔스는 누구인가 새로운 신학적 인간학 정립이 요청된다. 그리고, 넷째는 구체적인 생태학적 윤리의 실천행동 지침마련과 실천을 독려해야 한다.
  첫째, 우주의식에 눈을 뜨고 생태학적 영성을 고취시키는 일은 오늘날 교회와 같은 영적 공동체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귀중한 사역이다. 구체적인 쓰레기 분리수거나 재활용  운동펼침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시편 90편의 시인이 이미 고백하고 눈뜬 우주 속에서 인간의 자기 위치에 대한 각성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난간 어제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 우리에게 우리말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하소서”(시90:1-4, 12).
  자연생태계 위기극복은 인간이 우주속에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그 위에서 살고있는   녹색지구행성이 광막한 대우주 시공속에서 얼마나 가냘프고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작은 행성인가를 크게 눈뜨고 바라보도록 해주는 우주의식 계몽에 교회는 힘써야 한다.  그 교육적 프로그램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각종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영상물, 대형사진등을 교회공간에 항상 비치하여 각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한다. 예들면 달표면에서 캄캄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찍은 지구행성사진을 교회 교육관에 걸어놓는 일은, 중세기 종교화를 걸어놓는 것 보다 훨씬 큰 종교교육 기능을 한다. 서울을 둘러싼 북한산 ․ 관악산 바위의 생성연대가 1억7천만년전이라고 최근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아침저녁마다 그 산들과 바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지질학적 연대기 사실을 거듭 인지해야 하며, 인간의 출현시기나 인간개인의 생존길이가 그야말로 ‘밤의 한 경점’ 임을 끈임없이 각성토록 도와줘야 한다. 청빈의 영성을 중세기적인 금욕적 노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자신의 존재사실을 확철케 함으로서 어리석은 소유집착 욕망에서 자유롭도록 도와야 한다.
 21세기 제1급의 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igue)는, 생태학적 신학시대에서 교회가 수행해야할 가장 본질적인 사명으로서 두가지를 언급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연세계 속에서 재발견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피조물 속에 부어지고 육화되는 성육신적 영성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즉 창조주하나님과 지구생명체 피조세계와의 뗄수 없는 유기적 관계성을 느끼고, 깨닫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영성을 눈뜨게 하는 일이다. 또다른 하나는, 바로 인간이라는 호모사피엔스가 하나님의 집(oikos)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유기적인 관계그물망 속에서 경제적 살림살이(economics)를 바르게 잘하고, 그 일을 위하여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에큐메니칼 연대성(ecumenical solidarity)을 강화하는 일이다. 새로운 시대의 영성수행은 ‘생태학적 영성’을 각성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비움 ․ 절제 ․ 모심 ․ 배려 ․ 경청 ․ 고요 ․찬미의 영성수련은 자연히 뒤따라 오는 것들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청실과 홍실로 짷여가는 동아줄 처럼 두가지 영성전통이 맥맥히 흘러가고 있다.  하나는 계약전통으로서 예언자정신에서 최고로 승화표현된  역사구원을 통한 정의와 긍휼의 하나님 신앙이다. 다른 하나는, 창조전통으로서 교회사에서는 성례전적이고, 성육신적 신학을 강조하는 영성흐름이다. 이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시는 찬미와 아름다움의 영성,  만물이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려는 열망의 흐름이 있다(롬 8:21). 칼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피조 현실세계총체)와 계약(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약속)이라는 두가지 실재는 서로 각각에 대하여 존재근거 된다.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가 되고,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가 된다. 창조없는 계약은 공허한 것이 되고, 계약없는 창조는 맹목적인 것이 된다.   
 개신교와 기장교단은 전자 곧 계약전통의 영성신학에 치우쳐 왔고,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적 신비주의 경건신학은 후자 곧 창조전통의 성례전적 영성에 공헌해왔다. 새로운 21세기 그리스도교 영성은 두가지의 상호보완을 요청한다. 고대교부 이레네우스의 표현처럼 “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이 완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시대 영성은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심을 느끼고 각성하는 것이다.(엡4:6) 성육신 신앙은 2,000년전 필레스타인 예수의 몸을 입고 단 한번 성육하신 은총을 찬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피조세계에 순간순간 끊임없이 그의 장엄함과 영광으로 성육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 27-28).

[4] 다문화종교사회 도래로 인한 가치신념체계의 충돌위험에 직면하여
    - 지혜전통과 화해신앙의 회복(平和)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영성회복-


  현재사회가 직면한 또다른 큰 문제는 20세기 후반에 들어, 교통 통신 정보의 동시적 유비쿼터스 시대로 인하여 지구촌이 다양한 문화체계와 가치체계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문화․다종교․다인종․다언어 현실은 포스트모던시대의 특징이 되었고 현실이 되었다. 다양성과 차이와 개성과 고유성이 존중되어야하고, 그 차이 때문에 차별을 받거나, 억압을 받아서는 않된다는 신념이 21세기의  계몽된 사회와 성숙한 사회의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다문화․다종교 사회현실은,  종교사회학자들이 종교를 기능주의적 시각에서만 모면서  ‘종교의 시장화’라는 어휘로  단순하게 처리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종교의 시장화’란 종교의 다양성이 시장에서의 물품질의 경쟁을 통해 고객에게 선택 구매되는 것 처럼,  종교 또한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각 종교가 지닌 가치와 특성에 따라 선택사항이 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는 판단이다. 그러한 ‘종교의 시장화’란 단일 종교의 독점지배에서 오는 허위의식, 권위주의, 배타적 정체성등을 예방하는 장점도 있다는 것을 종교사회학자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나 신앙이란 그 종교(신앙)에 귀의하는 사람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폴 틸리히) 이기 때문에, 시장바닥의 상품경쟁과 다른 면이 있다.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문화)는 세상을 보는 사람의 ‘해석학적 눈’을 구성하며, 가치판단의 척도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서,  종교문화는 세상 속에서 삶을 헤쳐나가는 돗배를 띄워주는 바닷물 같아서,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다종교․다문화 상황을 맘 편하게 축복으로서만 여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00년동안 오직 하나의 진리종교, 오직 하나의 참된 계시경전, 오직 하나의 구원의 길이 있을 뿐이라고 믿고 가르쳐온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포스트모던사회의 다문화․다종교 현상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그리스도교가 이웃종교와 비그리스도교문화에 대하여 가져야하는 지금까지의 태도변화에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신학적 통찰에서 패러다임전환은, 지구촌 실현의 현실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웃종교․비그리스도교문화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타협이나 신앙의 변질이 아니다.  지난 과거에 지녀왔던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념체계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너무나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독선적이 었음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웃종교나 비그리스도교 문화와의 만남과  협력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성과 개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른바 종교혼합주의가 아니다. 자기 종교에 실존적 진지성과 궁극적  관심으로서  철저하게 충실하는 신앙적 헌신(commitment)과 이웃종교에 대한 관대한 개방성(openness)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같지만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실사회가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변화해가면 갈수록, 지구촌 어느사회에서나 위에서 말한 진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하나의 종교 밖에 모르는 사람은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다”(막스 뮐러)는 명제는 좀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종교평화없이는 세계평화 없다”(한스 큉)는 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리고, 살아숨쉬는 “종교란 진주보화를 간직한 궁궐같은 건축물이 아니라, 자라나는 생명나무와 같은 것이다”(함석헌)라는 은유가 설득력을 갖는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국 개신교는 다문화 ․다종교 사회가 실현될수록, 신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기 어려운 근본주의적 신학멘탈리리티를 복음주의라고 착각하는 비신학적 미성숙 때문에, 이웃종교 문화와의 갈등과 충돌  위험이 아직도 상존한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인 불교와의 관계가 아직도 성숙한 상호존중과 상호협동의 관계에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점차로 지구촌의 노동시장이동과 무역교류증진 및  기업합작 관계로 중동의 이슬람교 신자들의 입국과 그들의 종교집회 건축물 모스크의 건립이 많아져 갈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계신문의 일반적 경향성은 이슬람문화나 종교의 한국사회 진출을 몹시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분위기 논조를 읽을 수 있다.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의 비그리스도교 동포들에게 한국 개신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인상보다는 ‘갈등을 일으키는 독선적 종교’ 라는 인상을 주고있다.. 전문적 사회여론조사 기관들이 객관적으로 조사한 통계결과를 보면, 한국 개신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원인 두가지가 다름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도덕적․영적 신뢰도 상실’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독선적 태도’로 나타나 있다.  이문제의 해결없이는 한국 개신교의 양적 질적 성장이 더 이상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신자들간의 수평이동은 진행되겠지만, 새로운 신자들의 교회등록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진보적 교단임을 자처하는 기독교장로교 교회들의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 발상법의 전환이 요망된다. 특히, 이웃종교와의 대화 협동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의 정신으로서, 복음의 정체성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한 특성을 더욱 또렷이 잃지않고 발휘하면서 이뤄지는 성숙한 영성이 요청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선교는 더 이상 전투적이고 정복적인  ‘십자군적 영성’(crusade spirituality)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가르치신 섬김과 자기희생적 사랑을 통해 성취되는 ‘십자가의 영성’(cruxified spirituality)이라야 함을 분명하게  다짐해야  한다.

[5] 유물론적 환원주의 실재관과 물신숭배적 바알문화의 도전에 직면하여
     - 초월적 인간품성의 정체성회복(聖化)과 예수 생명의 체현(體現)의 영성회복-


 앞에서 우리가 고찰한 우리시대에 교회가 당면한 세가지 응답해야할 시대상황은 외부적 요인들이 더 많이 원인이 된 문제들이다. 부의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분쟁, 자연생태계붕괴로 인한 생명계의 지속가능성의 위기, 다문화와 다종교 사회실현으로 인한 신념체계의 갈등문제는 경제적 문제, 생태오염문제, 종교독단성문제등을 극복해가면 조금씩 효과가 드러날 문제들이다. 다시말하자면  대응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 뚜렷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교회가 우리시대에 대응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정말 위험한 문제는 보이지 않게 현대인들과 특히 젊은이들의 맘을 파고들어가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물신숭배적 바알문화의 범람이다. 유물론적 환원주의는 지난세기의 단순한 철학적 무신론이나 반종교적 처세관이 아니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이나  자연과학의 기술공학의 발달, 의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삶의 철학이요 실재관이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의 기본적 신념은, 인간의 모든 가치문제란 결국 물질현상의  복잡한 관계성의 산물이므로, 종교․휴메니즘․진선미 가치등 모든 형이상학적 실재들도 결국 물질현상으로 환원시켜 설명된다는 실재관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환원주의자들이 모두 비윤리적 이거나 도덕적 가치에서 무규범주의자 이거나 자유방임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그들도 사랑․진리․아름다움․선한것․문화가치등을 옹호하고 그것들의 발전에 진력한다. 다만, 그러한 모든 것들은 물질의 부수적 현상이거나, 물질의 복잡한 구조역학관계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신념을 갖는다. 단적으로, 하나님 신앙에 기반을 둔 종교란 아직은 덜 성숙한 인류문명의 환상이며, 인간이란 생화학적 물리적 ‘복잡계의 기계’ 라고 보는 것이다.  프로이드, 럿셀, 에드워드 윌손, 도킨스등이 대표적 사상가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의 많은 수가 이러한 ‘유물론적  환원주의’  실재관으로서 자기생의 철학을 삼고 무장해가고 있다.
 다른 한편, 좀더 감상적이고 모방문화에 쉽게 순치되는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결국 돈의 위력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다는 물신숭배, 그리고  문화창조적 활동보다는 감각적쾌락문화를 모방하면서 현대판 바알숭배신앙에 젖어들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목도한다. 물론, 이러한 현대문명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판이, 다른 새로운 제3,4물결 곧 젊은 새로운 문화감각과 창조적 지성과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인류가  가보지 못한새 시대를 열어가며  시대정신을 추구해가는 수많은 건강한 젊은이들의 청년문화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  
  위에서 언급한  우리시대의 ‘인간정체성 위기’에 직면하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그들과 유물론․ 유신론 논쟁을 벌린다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교리적 ‘하나님 형상론’을 교의학적으로 변증하는 것도 별 매력이나 설득력이 없다. 유물론적 환원주의가 세를 얻어가는 21세기 시대적 무신론의 풍조속에서, 이론투쟁은 별 효과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오직 한가지 있다면, 인간이란 생화학적-물리적 복잡계로서의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온전히 영글어 익어가야 할 ‘하나님의 씨’(요한1서 3:9)를  그 생명 안에 품고있는 존재, 곧 성화(聖化)되어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서 삶을 통하여 증명해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특히 성직자의 삶이 예수의  교훈과 행동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케류그마 전달자로서가 아니라, 예수생명을 그 자신의 몸에 체현(體現) 해서 보이는 ‘예수 몸 세크라멘트 성체’가 되어야 할 것을 요청받고 있다.
                                                       (2009.6월1일 탈고)
[참고서적]

1.  카알 바르트, 『교회교의학』, III/1, chap.41. Creation and Covenant.(T.& T. Clark,         1958)
2.   율겐 몰트만, 김균진 옮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7)
3.   율겐 몰트만, 곽미숙 옮김, 『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 동연, 2009)
4.   샐리 맥페이그, 김준우 옮김,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5.  샐리 맥페이그, 장윤재와 장향미 옮김, 『풍성한 생명』,(이화여대출판부, 2009)
6   장회익, 『삶과 온생명: 새과학문화의 모색』,(도서출판 솔, 1998)
7.  이정배, 『켄 윌버와 신학』,(시와 진실, 2008)
8. 에드워드 윌슨,  이한음 옮김,『인간본성에 관하여』,(사이언스북, 2000)
9.  에드워드 윌슨, 권기호 옮김, 『생명의 편지』,(사이언스 북, 2006)  
10.  박재순, 『다석 유영모』,(현암사, 2008)
11.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분도출판, 2003)
12. 매튜폭스, 김순현 옮김, 『영성: 자비의 힘』, (다산출판, 1999)
13. 김은규, 『하느님 새로보기』,(동연,2009)
14. 이언바버, 이철우 옮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김영사, 2002)
15.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한국신학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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