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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신학에서 계시,거룩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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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신학에서 계시,거룩체험, Ontology of  'ought to be'
- Paul Tillich의 dynamic typological approach를 중심으로-

김경재
(한신대 /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틸리히의 마지막 강연(19965년 10월 12일) "The significance of the History of Religions for the Systematic Theologian" 에서 그가 제시한 "역동적,유형론적 접근방법론"(dynamic typological approach)이 함의하는 바를  요약하고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학과 신학의 만남의 학문적 추구가 어떻게 이뤄져가야 할 것인가를 해석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하여 그의 "당위의 존재론" 곧 영성과 정의문제를 논해 볼 것이다.

[2] "조직신학자에 있어서 종교사의 중요성" 제목의 강연에서 틸리히가 말하려고 한 점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한 거장 폴 틸리히(1886-1965)는  1965년 10월12일 , 시카코대학 신학부의 동료들에 의해 기획된 종교사 연구협의회 마지막 순서 모듬강연에서 "조직신학자에게 있어서 종교사의 의미"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이 마지막 강연을 행한 저녁이 지나고  그 다음날 이른 새벽, 틸리히는 심장질환으로 고통받았고 열흘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마지막 공개강연이 된 셈이다. 멀치아 엘리아데는 이 마지막 강연이  의미심장한 강연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적이라고 회고했다.
엘리아데는 그 강연 속에서 그의 동료 틸리히가 특히 세계 전체종교사의 지평에 눈을 돌리고, 인류의 종교사와 대화하면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쓰고 싶다고 피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명저로서 평가가 나있던 기존의  틸리히의 주저 <조직신학>은 그것대로 고전적인 가치가 있으나, 이미 출판된 틸리히의  <조직신학>은 지중해 연안을 모태로하는 서구기독교 사상토양을 바닥에 깔고, 철저히 역사의식으로 무장되고 역사문제와 씨름하면서   세속화과정에서 소외되고 공허해진 현대서구인들의 자기 이해를 배경으로하고 씌여진 <조직신학>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구 문명의 정신적 토양과 배경만을 가지고 서구 현대인들의 실존적 위기와 서구사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멧시지로서 대답하려했던 <조직신학>을 넘어서서, 아시아의 위대한 우주적 종교들과 토착종교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구원체험의 지평 속에서 그리스도교 진리체험 이야기를 새롭게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싶다고 피력하였다. 다시말해 전지구적 종교사 지평 속에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해명한다는 희망이다.
 틸리히는 위의 강연에서  세가지의 기본적인 고찰을 행했는데, 그 첫째는 종교사의 의미를 부정하는 정통적 계시신학 입장과, 종교사의 의미를 논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 필요하다고 느끼지  아니하는 신죽음의 신학자들의 입장을 극복하는 기본적 결단을 하는 일이다. 강연속에서 심사숙고한 둘째주제는 "종교사의 신학"(a theology of the history of religions)의 가능성과, 그 연구방법론을 논하는 논제이다. 여기에서 틸리히는 그의 접근방법론으로서 "역동적, 유형론적 접근방법"을 피력하고 있다.  강연의 셋째고찰은 기독교 신학전통을 종교현상의 빛 안에서 재해석하면서 개별종교의 구체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틸리히의 강연내용을  총체적으로 아래에 요약 정리해보기로 한다.  종교사의 의미를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받아드리려면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다음과같은 내용들을 이해하고 용납하여야 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하였다.   

     1) 인간이 무엇인가 계시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종교에서나 있는 보편적 체험이다. 종교란 그러한, 인간개인과 집단에게 주어지고 발생한 어떤 계시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며, 그런 계시적 경험들은 구원하는 능력을 담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진정한  종교 안에는 각각 나름으로서의 계시적 체험과 구원체험이 있다. 그리스도교에만 계시사건과 계시체험이 있고 다른 종교는 인간이 절대자를 찾는 자연종교라는 정통주의적 신학자들의 독단적 주장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2) 모든 계시는 유한한 인간상황에 의해 받아지고 해석되면서 체험된다. 순수계시 그 자체란 없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제약되고 규정된 존제이다. 계시체험은 항상 그러한 인간의 소외된 상태에 의해 받아지는 순간 굴절되고 왜곡된 형태로 받아진다. 빛이 수면에서 꺾이듯이 계시는 항상 인간학적으로 해석되고 이해되고 응답된 계시다. 계시적 경전을 "절대자의 계시된 말씀" 그 자체와 동일시 할 때, 경전의 절대화라는 우상숭배가 발생한다. 종교적 상징, 종교적 제의, 신학교리, 신비체험의 형상적 개념을 절대화 할 수 없다.

     3)  인류의 종교사에는 다양하고 또한 특유한 계시체험들, 거룩체험들, 진리체험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항상   그 자신을 절대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신비주의 운동이나, 예언자 운동이나,  이성적 비판 운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종교의 자기 우상화 시도를 비판해야 한다. 종교사 안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비판적 능력을 통전한 어떤 중심적 계시사건이 존재 할 수 있다.

     4) 본질적 의미에서 종교사가 문화사와 별도로 분리되어, 그것과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 거룩한것은 세속적인과 분리된체  나란히 따로 따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전자는 후자의 깊이의 차원으로서 존재한다.

     5)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나타난 결정적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의 의미와 능력이 나나타기 이전의 오랜 준비적 계시의 역사를 그 배경의 빛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경의 결정적 계시증언이 하늘에서 부터 갑자기 떨어져 내려오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계시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드리게하는 성령의 조명과 깨우치심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원리는 변하지않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계시를 계시로서 이해하고 받아드려 고백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은 해석학적 존재로서 이해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다.

     6)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와의 만남에서 취해야 할 접근방법은 "역동적,유형적 접근방법"이다. 그 방법은 각각의 종교적 유형을 결정하는 유형적 특성은, 해당종교의 내적 본구적 목적으로서, 각각 종교에 귀의하는 인간실존의 내적목적(the intrinsic aim or telos of existence)으로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상대종교와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체적인 신관, 삼위일체론, 개인영혼 불멸론, 속죄론, 부활론등등 기독교 종교의 구체적 신조항목들을 상대종교에서 찾아내려는 방식을 취해서는 않된다. 그러나 불교의 니르바나와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 세계종교로서의  두 종교가 지닌 유형적 특징을 수렴하는 상징이다.  

     7) 종교는 항상 "거룩한 궁극적 실재" 곧 성스러운것에 대한 접촉과 체험을 동반하는바 그 순수한 거룩체험속에는 "황홀한 요소"(the ecstatic element), "합리적인 요소"(rational element),"당위성의 요소"(the element of ought to be)가 통전되어 있어야 하므로, 그러한 3가지 거룩체험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통전된 상태는 바울이 말한바 성령의 임재가운데서 아가페적 사랑의 능력으로 표출되는  구체적 영의 종교(Religion of Concrete Spirit)이다.

     8) 개별종교의 종교적 진술이 우주적 보편성을 지니게 되려면 구체적 종교를 종교되게하는 각종교의 고유성을 제거시키고 난후  추상화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고, 구체적인 종교의 깊이의 차원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가능하다. 개별종교가 자기의 역사적 종교로서의 근거로부터 영적으로 자유할수있는 개방성을 지닐 때, 동시에 자신의 종교적 근거를 위하여 영적자유를 견지할 때 종교적 진술의 보편성은 확보된다. 이 말은 각각의 깊은 샘에서 오염되지 않은 자기샘의 물맛을 지켜가며 자기샘에서 물을 퍼내어 마시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웃집안 마당의 샘과 생수를 인정하며, 다른샘의  물맛을 함께 볼수있는 개방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종교의 고유성과 특성을 없애버리는 종교혼합주의와 경박한 종교통일론은 있을 수 없다.    이상에서 요약해본 틸리히의 강연내용을 아시아의 신학도의 입장에서  반응할 때 다음과 같은 콤멘트가 가능하다.

[3] "역동적, 유형론적 접근방법"에 관한 해석학적 조명
  틸리히의 문화신학, "종교사의 신학"에서 말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들은 아시아의 신학도 입장에서 볼때,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도리혀, 아직도 틸리히의 종교사 신학의 구조와 중심개념과 신학적 발상법 속에 서구신학자로서의 해석학적인 태생적 한계를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신학계는 종교학과 신학과의 만남이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금기시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틸리히가 종교사의 의미를 받아드리려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한 위에서 살폈던  신학적 관점이 한국신학계의 보수성 때문에 받아드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틸리히의 관점을 용납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를 우리는 해결해야 한다.

  첫째, 그는 종교체험의 본질로서 "거룩체험"을 말한다. 그러한 거룩한 것, 성스러운것, 누미노제적인 것의 체험은 종교체험의 본질적 요소중 하나임에는 틀림없겠으나, 그가 말하는 거룩체험의 현상학이 루돌프 오토의 나 엘리아데의 <聖과 俗> 에서 말하는 누미노제적인 것의 체험이라면, 불교의 깨달음의 상태 속에서 반야지로부터 오는 절대자유, 밝음의 빛, 불생불멸한 열반적정의 悟道頌 속에 법열과 황홀의 감정(Mysterium fascinosum)은 있을지언정 과연 두렵고 떨리는 경외의 감정(Mysterium tremendum)이 존재하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다시말하면, 종교체험의 핵심이 거룩체험이며, 거룩체험의 현상은 누미노제적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패러다임도 셈족종교의 유형적 특징이지 인도종교나 중국종교의 본질적 특징인지는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셈족종교의 거룩체험에는 예언자 이사야의 체험(이사야 6:1-10)에서 그리고 모세의 거룩체험(출3:1-12)에서 예를  보듯이 거룩자에 대한 경외감, 자기부정의 감정, 거룩한 정열, 그리고 소명의식, 황홀한 이성의 떨림등이 있으나, 노장의 "玄妙之道"나, 의상의 법성게(法性偈) 속에 누미노제적 감정이 얼마만큼 감지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둘째, 틸리히는 세계종교사의 다양한 종교체험들은 거룩의 체험이요 계시의 체험이요, 그러는 한 구원능력을 그 나름대로 담지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바울이 말하는바 성령의 교리 안에서  영의 능력 안에 붙잡힌 상태를  황홀한 초월경험과 윤리적 당위성을 충족시키는 "구체적 영의 종교"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영은 "의미와 능력의 통일"이며, 주객구조의 상태를 초월하는 엑스타시요소와 이성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않고 온전하게 성취시키면서 그 양자를 통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시아적 유형의 종교체험의 극치에서 틸리히가 말하는바 "영의 현상학적 체험"이 常數的 요소로서 언제나 현존하는가 되물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틸리히가 해석한 그리스도교는 영적 종교로서  그 존재론적 특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사랑과 정의"가 통전된 영성적 삶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사라잉 없는 정의는 보복의 칼날과 심판의 정의로움만이 있고, 정의가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용서의 종교가 되어, 불의가 용납되고 은폐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릿도교의 영이 "의미와 능력(힘)"의 통전현상이라면, 그  때 의미와 힘이란 반드시 "사랑과 정의"의 용광로 불에 연단된 것이라야 한다. 제사장과 예언자의 통전의 종교만이 영적종교로서 사랑과 정의를 성취한다.









틸리히의 "역동적,유형론적 접근방법"이 신학과 종교학, 그리스도교와 타종교간 만남의 과정에서 보다 생산적 방법론이 되려면, 인간의 존재양식에 대한 현대 해석학적 조명을 보다 충분히 가하여 줘야 하겠다는 점이다. 이때 해석학은,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강조하는바처럼, 단순한 이해의 기술론이거나  방법론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존재방식 자체와 이해자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는 이해의 존재론이요,이해의 현상학이다. 우리가 신앙이라는 말하는 고백,신뢰, 인식, 체험현상도 인간의 해석학적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모든 해석과 이해의 과정은 패러다임 의존적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의 패러다임, 궁극적 진리체험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뉴톤의 자연설명의 패러다임과 아인슈타인의 그것사이엔 패러다임이 다르지만, 뉴톤의 고전물리학도 훌륭한 과학이며, 아인슈타인의 양자물리학도 훌륭한 과학이다. 그러나 순수한 과학적 패러다임으로서보면 뉴톤의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과 아인슈타인의 그것사이에는 비공약성이 엄존한다. 그처럼 불교와 기독교의 구원패러다임은 다르면서도 구원의 힘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개념이 무엇이냐하는 것인데 구원패러다임에 따라 특성이 있다.

   신학이 종교학과 대화 할 때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구원패러다임및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는 진리체험 패러다임과 다른  다양한 종교들의 다양한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구조와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틸리히가 말하는 "역동적,유형론적 접근방법"을 제대로 살려내는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신앙은 신앙을 설명하는 종교적 패러다임보다 크다. 다양한 신앙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마음은 역사적 종교보다 더 크다. 진리자체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크다. 나와 다름을 이해하는것도 고차적인 체험의 "지평융합"의 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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