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30 (19:03) from 211.33.75.85' of 211.33.75.85' Article Number :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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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혁명이 꿈꾸는 새포도주와 새가죽부대(<씨알의 소리> 209호, 2010.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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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소리 창간 40주년 기념강연(1)]
         씨알혁명이 꿈꾸는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혁명의 참뜻과 씨알혁명의 이중성
                    씨알생명을 억누르고 죽이는 세력들
                    꿈꾸는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의 밑그림

[1] 혁명의 참 뜻과 씨알혁명의 이중성

    먼저 전체주제 곧 <씨알은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긴급한 맘으로 총론적 대답을 하고 강연을 시작하려 합니다. “혁명을, 그것도 철저한 본래적 혁명을 하지 않으면 씨알들은 모두 죽게되어 있어서 살려고 혁명을 해야한다”고 응답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강연내용은 씨알혁명이란 무엇인가? 씨알생명을 현실에서 억누르고 죽이는 세력들이 어디에다 그 아지트를 두고 있는가?  씨알혁명의 목표로서 꿈꾸는 사람다움 회복과 그 사람다운 삶을 담아낼 혁명된 사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세가지 점을 밝히는데 초점을 둘것입니다.    
  우리가 감동깊게 읽었던 함석헌님의 명저 『인간혁명』속에 <혁명과 종교>라는 항목에서 함선생은 참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파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먼저 인용하여 음미하면서 우리 이야기를 시작하려 함니다.

  혁명이라면 사람 죽이고 불놓고 정권을 빼앗아 쥐는 것으로 알지만, 그것은 아주 껍데기 끄트머리만 보는 소리고, 그 참 뜻을 말하면 혁명이란 숨을 새로 쉬는 일, 즉 종교적 체험을 다시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하늘의 명(命)한 것은   성(性) 곧 바탈이다. 바탈은 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러므로 혁명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잊어지고, 잃어지고, 가리워진 것을 도로 찾는 일이다. 함석헌, 『인간혁명』,295쪽(제일출판사,1975)


혁(革)은 익힌 가죽이라는 글자인데, 짐승의 날가죽 곧 피(皮)를 익혀서 털을 뽑으면 모양이 전연 달    라져서 새 것이 됩니다. 그래서 ‘혁’에는 ‘달라진다. 새로워 진다’는 뜻이 붙게 됐습니다. 함석헌, 『思想界』1968년 4월호, 『함석헌 전집』,제2권, 『人間革命의 哲學 』, 25쪽. (한길사, 1983)


인용한  말씀을 하실 때는,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군사정부가  혁명공약을 지키지 않고 장기군사정권을 도모하려고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정권의 맛을 알고, ‘혁명’ 한답시고  온통 법석난리를 칠 때, 정말 혁명이 무엇인가를 갈파한 역사적 명문입니다. 현대한국사 30년의 군사정부시대가 지나갔다고들 착각하지만, 오늘 한국사회의 모든 혼란은 알고보면, ‘혁명’의 참뜻은 무엇인가라고 말씀하신 ‘들사람 함석헌’의 충고를 듣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교육 종교마져도 “껍대기 끄트머리” 혁명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벌어지는 일이요, 거두어진 열매일 뿐입니다.
 ‘혁명’(革命)이라는 한자어가 왜 ‘가죽혁, 목숨명’ 두 글자를 쓸가 그 언어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철저하게 깨달을 때, 인간혁명이 가능해지고 사회혁명이 가능해진다는 요지입니다.  가죽공장을 피혁공장이라고 한자어로 부름니다. 오랜 옛날 인류의 수렵시대이후 짐승의 가죽을 이용한 피혁공예의 역사는 오래다고 할 것입니다. 가죽재료로는 담비, 양과 염소, 사슴, 호랑이, 곰, 말, 소, 악어등이 많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짐승을 잡으면 원가죽 피(皮)는 살점, 기름, 오물, 털등이 붙어있고 또 나무껍질 처럼 단단해서 그대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붙어있는 것들을 모두 깍아내고 뜯어내고 부드럽게 만드는 모든 과정과 결과물을 혁(革)이라 부름니다.  원가죽에 붙어있는 살점, 기름, 털, 오물등을 제거하고, 가죽의 단백질 섬유사이에 있는 수분을 제거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특히 가죽의 섬유와 섬유의 결합을 가속화시키는 타닌산을 이용하는 ‘테닝’(tanning)이라 부르는 처리과정이 중요 합니다. 모든 피혁공정이 끝나면 가죽본래의 특성이 드러나는데 3가지 특성 곧 가죽의 유연성, 내구성, 통풍성 만이 살아남니다.
 가죽만드는 공정과정을 은유로하여 ‘혁명’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때, 생명이 지닌 본래적 바탈에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피묻은 살점, 두꺼운 동물성 지방층, 보기흉한 털과 오물이 더덕더덕 붙어서 생명이 뻣뻣허게 굳어져 감니다. 그것들을 걷어내 없애고 생명 본래바탈이 지닌 생명의 유연성, 내구성, 통풍성을 되찾는 일이라고  혁명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죽음의 문화로서 숨이막혀 죽을 지경인 이유는 생명 본래바탈인 부드러운 유연성이 없어지고 경직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가치지속성과 영원성은 없어지고 일회용 소비재처럼 ‘하찮은 존재’로 느껴지게 되어 슬픈 것입니다. 생명본래바탈인 통풍성이란 대화와 소통인데 독단독선만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씨알혁명의 이중적 성격입니다. ‘씨알혁명’이라고 쓴 것은 혁명의 대상이 씨알의 안과 밖 두가지 면이라는 말입니다. ‘씨알혁명’에서 씨알자기는 그대로 놔두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조직구조를 바꾸는 ‘사회구조의 외면적 혁명’만으로 참  혁명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수양과 자기성찰을 한다면서 공동체와 사회의 구조적 메카니즘을 가볍게 생각하고 자기 안으로만 파고드는 ‘개인정신의 내면적 혁명’ 만을 가지고서도 아니됨니다.  
  함석헌님이 누누이 강조한바 처럼,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바처럼, 생명은 개체이면서도 전체요, 여럿이면서도 하나요, 정신이면서 물질이요, 입자이면서 파동이기 때문입니다. 씨알혁명이 이중적 과정으로 동시에 진행되어야하는 이유는 사람생명의 존재론적 구조가 쌍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강연자는 함석헌님의 ‘씨알혁명’을 새롭게 이해해보기 위하여 동시대에 살았던 개신교의 저명한 신학자 폴틸리히가 말하는 각각 쌍(雙)을 이루는 ‘생명의 존재론적 구조’의 틀에 대입하여 설명해보려 함니다.  

[2] 씨알생명을 억누르고 죽이는 세력들

   씨알생명의 온전한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죽이는 세력들은 우리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밖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과 밖이란 시공간적으로 뚜렷하게 분리되는 독립영역이 아니라 상호침투, 상호생성, 상호지속하는 속성을 지님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이해하고 파지하는 것은 반성적 사유능력을 지닌 인격적 정신생명체 뿐이니까, 혁명의 시작과 과정과 끝맺음은 우선은 우리 안에서 부터입니다.
  씨알생명을 억누르고 죽이는 세력들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으로 부터 옴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론적 원리를 위배하여 뒤틀리게하고 무시하고 파괴시키는데서  발생하는 생명의 독소인 것입니다. 폴 틸리히(1886-1965)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양극구조의 상호동시적 관계성을 지닌다고 설명했습니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1. pp.174-185.(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첫째, 구체적 존재자들은 ‘개체실현-참여연대’( 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라는 양극적 존재구성요소간의 상호관계 원리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구체적 존재자들은 원자로부터 인격적 존재인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성의 차이는 다양하지만,  그 존재자의 있음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다시말해서, 개별자로 있으려면 동시에 전체에 참여하는 사회적 연대성을 필요로 합니다. 역으로 말해서  한그루의 나무가 존재하려면 무수한 세포단위체의 참여없이 불가능하고, 인간사회가 사람다운 얼굴을 지니려면 인격적 존재로서 개인의 또렷한 자의식과 자발적 참여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서구문명속에서 발생한 극단적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그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출현한 집단적  전체주의(totalitarianism)는  존재론적 양극구조를 부정하는 병든 모습입니다. 인격적 개인들이 존재하고 나서 ‘사회적 계약관계’를 통해서 사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인격적 자아로서 성숙하고 영글어가는 모든 과정이 사회문화적 공동체에로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함석헌은 그의 ‘맘’이라는 종교시 첫구절에서 이 생명의 원리를 절묘하게 시적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맘은 꽃 / 골자기에 피는 난(蘭) / 썩어진 흙을 먹고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위 시구에서 ‘맘’은 자아의식을 가지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윤리적 결단을 하고 자기초월경험을 하는  개인으로서의 인격적 생명체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개체가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발하며 거기에 피어 있으려면, 그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꽃은 골자기에 낙엽으로 떨어져  퇴비가 된 무수한 생명체의 유기물질을 먹고서라야만 자라고 꽃피는 것입니다. 골자기의 ‘썩어진 흙’이란 역사과정에서의 무수한 생명체들의 얼이요 혼이요 예술이요 기술이요 자기희생인 것입니다. 인문학적 해석학에서는 그 모든 것의 총체를 ‘역사문화적 전통’이라 부릅니다.  개체생명은 알든지 모르든지 거기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문명사회가 병들어 죽게되었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엄연한 생명의 원리를 부정하는 개체 존재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면서, 자페증 환자나 중세기 성주처럼 “내 인생 내가 사는데 아무 간섭말라1”고 소리치는 무리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내 재산 내가 무슨일로 쓰던지 간섭말라!”는 주장도 그런 것이지요. 이러한 극단적 개인주의는 존재의 근본원리인 다른 한쪽의 축 곧 ‘참여, 사회화, 생명의 연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생명의 진실이 아닙니다.
  남한 사회에서 극단적 개인주의가 삶을 병들게 한다면, 북한 사회는 그 반대로 참여와 전체성과 사회적 연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개인의 자유와 인격성을 몰수하는 전체주의적 집단주의가  발호하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와 인민을 위하여!”라는 구호만 있을 뿐이고  집단주의적 사회체제 유지를 위하여, 강병주의와 주체사상으로써 인간의 삶을 군사병영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억누르고 죽이는 세력의 본질은 ‘자기중심적 이기심’에 뿌리를 둔 나만이 잘살면 그만이라는 동물적 이기주의와, 다른한편으로는  ‘전체’의 이름을 빙자하여  우주의 무개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개체의 자유와 인격성을 쉽게 말살하는 전체주의  가치관으로 부터 발생합니다. 현재 2010년 우리사회의 더 큰 문제는, 병든 두가지 모습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탈을 쓰고 우리사회를 무자비하게 독점지배하려는 이기주의와 전체주의 신봉자들이 판을 치도록 방치한데서 있습니다. 자기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미 냉전시대종언과 함께 살아진 좌파세력 운운하는 색깔론으로부터 공영신문방송계의 독과점, 학교교육의 무한경쟁도입, 4대강 토건사업강행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씨알혁명은 혁명의 대상이 개인이면저 전체라는 깊은 통찰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 성범죄자나 수많은 아녀자를 살해한 흉악범의 죄값은 그 당사자에게 엄중히 물어야 하지만, 함석헌의 관점에서보면 “죄는 단일범(單一犯)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죄는 다 공범(共犯)이다” 『인간혁명』, 324쪽.
고 듣기 거북한 진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존재론적 원리가 ‘개체화와 참여’라는 대원리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 씨알생명을 짓누르고 죽이는 세력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론적 양극성 둘째원리 곧 존재하는 것들은 ‘형상형태-질료기운’( form and dynamics)의 상호 불가분리적 관계속에 있음을 이해해야 함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유령이 아닌 참 생명체로 존재하려면 나는 신체라는 구체적 조직형태를 갖어야 하는데, 내가 죽은 시체가 아니려면 동시에 내 생명체는 끊임없는 역동적 생명력으로서 파동처럼 그 무엇과 관계속에 있어야  됨니다.  원자에서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하는 현실재는 형상형태(form)와 질료기운(dynamics)의 상보적 길항관계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호관계는 상보성을 지면서도  서로 길항작용(拮抗作用)을 하게된다는데 생명의 묘미가 있습니다.  
  길항작용이란 상반되는 두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여 그 효과를 서로 상쇄시키는 역설적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개인단계에서 점차 고등단계로 발전해가며 보다 유기체적인  조직형태를 생성시키게 되는데 그 대표적 표현이 국가요 종교입니다. 국가라는 조직형태와 종교라는 조직형태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는 생명체가 보다 충실한 생명기운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하자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실존적 삶의 비극은  “최선이 타락하면 최악이 된다”는 이반 일리히의 경고처럼 국가와 종교의 타락은 씨알생명을 옥죄이는 최악의 쇠사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독단적 종교는 반드시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18쪽 , (한길사,1992)

  현실 속에서 국가는 본래 목적대로  씨알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울타리 역활을 하는 정도를 넘어 구체적 생명체인 씨알생명을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병역법으로  전쟁터에 내보내며, 언론법으로 언론자유를 제한하며, 사회안전질서를 명분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시키고 유보될 수 있다는  괴변을 펼칩니다. 자발적인 민주시민의 ‘촛불집회’를 사회난동죄로 억압합니다. 국가권력을 손에 쥔 정권은 언론통신을 길들이며  재벌과 야합 합니다. 공룡과 같은 국가권력 앞에서 국가의 실질적 주인인 국민의 한사람 한사람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에로 전락된 현실세상입니다.  국가권력으로써 인간의 양심세계 까지 명령하고 감시하여 성직자의 발언과 활동을 정권자 입맞에 합당하게 갈아 치우고 조정하려듬니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초월 운동이 도달하여 형성시키는 최고단계의 조직형태인데, 이 종교제도와 조직이 인간의 영성을 보다 역동적 ․ 창조적으로 발현되도록 돕는 기구조직이 아니라 생명을 억압하고 옥죄이는 ‘교권체계’가 될 때, 총독 빌라도와 야합하여 메시야를 죽이는 악역을 담당합니다. 오늘의 메시야는 개인으로서 출현하지 않고 ‘집합적 인격체’로서 ‘새로운 인류의 종(種) 출현’으로서 오는데, 교권적 ․ 율법적 종교가 이것을 방해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맘속에 자리잡고 있는 절대 권력의지,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새디즘적 인간성, 국민과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실질적으로는 자기 이익을 탐하는 정치권력자들과  종교교권주의자들의 맘 속을 씨알혁명가는 꿰뚫어보고 깨버리려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관계되는 존재론적 제3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발자유- 제약숙명’(freedom and destiny)이라는 상호공속적 관계원리 입니다.
 일반상식적으로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위같은 물질덩어리 부터 고도로 진화발전한 인격적 인간생명체에 이르기 까지, 존재하는 것들은 그 나름대로 자발적 자유운동과 어쩔수 없는 제한적 한계성을 갖습니다. 인간적 인격생명 이하수준 단계에서는  그것을 ‘자발성 혹은 자유’라고 부르지 않고  ‘경향성’ 혹은 ‘자기조직적 성향’이라고 합니다. 물질계에서는 ‘제약숙명’이라고 부르지 않고 물리화학적 법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생명단계에 이르러, 생명체는 자기를 전체구조관계에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 자기한계를 자각하면서, 그것을 초월해보려는 수직상승운동을 하게됩니다. 이것이 인격의 특징이요 종교와 철학과 예술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 인격생명의 자유란  ‘절대자유’가 아닙니다. 어떤 한계성과 유한성을 자각하면서 자유의식이 발생하고 또 가능한 ‘유한한 자유자’ 인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령 예들면, 장회익교수의 『삶과 온 생명』에서 갈파한데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낱생명’체로서 자기를 둘러싼 무수한 다른 생명체들과 생태자연조건들 즉 ‘보생명’(補生命) 없이는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회익, 『삶과 온 생명: 새 과학 문화의 모색』,(도서출판 솔, 1998)
인간은 죽음을 앞당겨 생각하는 유한자의식으로 말미암아 도리혀 영원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사용할 물질재화의 제한성과 부족을 느낄 때, 인간은 물질재화에 대한 감사와 선용하려는 자유의지가 생기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서 씨알생명을 옥죄이고 죽이는 세력은 다름아니라 존재자들의 제3원리 곧 생명은 자발적 자유와 제약적 숙명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이 엄중한 법칙을 위배하고 무시하는 방자한 자유남용과 무제약적 탐욕과 자연생태환경의 파괴행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죄의 한국적 표현형태가 ‘4대강 사업’의 강행이라고 볼 때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정부의 정책강행의 변은 홍수예방, 물부족해결, 녹색환경조성, 강변문화환경조성, 경제활성화 및 일자리창출등 국민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명분들로써 치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4대강사업’의 근본문제는 토목공학적 기술상 문제이거나 그 효용성 찬반이론을 넘어 존재자들의 기본원리를 무시한다는데 있습니다. 4대강과 그 강의 근본존재질서 침해는 인간의 모든 자유행위와 쌍을 이루는 ‘제약적 숙명’(destiny)을 완전무시한 처사입니다. 생물의 사멸성은 생명의 탄생과 지속성을 가능케하는  ‘제약적 숙명’이듯이, 오늘의 강이 그렇게 굽이쳐 흐르고 넘치게 흐르도록 되어있는 것은  인간을 비롯하여 강과 관련된 모든 생태계 그물망 존재자들의 ‘제약적 운명’인 것입니다.
  현정부의 ‘4대강 사업’강행은 어쩌면 대한민국 하천의 효율적 관리이용에 관한 정책적 견해차이가 아니라, 대통령직책의 무한권력을 자유라고 착각하여 남용하는 절대권력자의 ‘휴브리스’(hubris)가 ‘제약적 숙명’(destiny)을 부정하고 프로메데우스적인 거인주의(taitanism) 세계관에 사로잡혀 정신적 만용을 부리는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씨알들은 생명을 옥죄임 당하고 생태계는 죽임의 위협아래 노출됨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씨알의 생명과 우리사회 보통사람들의 사람다운 삶을 옥죄이고 죽임문화에 예속하도록 강요하는 마성적 세력들의 정체를 분석하였습니다. 그 파괴적 세력들은 우리 각각 모든 인간들의 내면 속에도 있고, 집단적 형태로 조직화되어 사회구조적 악의 힘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씨알혁명은 언제나 이중적 과제를 갖게됨니다. 자신 안으로부터의 내면적 혁명을 통한 해방과 자기 밖 세계의 외면적 혁명을 통한 해방이  그것입니다.  전자가 새포도주를 숙성시키는 작업이라면, 후자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가죽부대를 준비하며 형성하는 과제입니다. 새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5가지 필수적 과정과 새 가죽부대를 만드는 5가지 필수과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3] 꿈꾸는 새 포도주와 새 가죽부대의 밑그림

첫째, 생명의 전일성과 연대성 자각
 새 포도주 다시말해서 씨알의 주체적 내면적 혁명은 개체생명의 전체성 자각 또는 사회적 연대성 자각에서부터 시작해야 함니다.
오늘 나의 개체생명은 내 개인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것이라는 ‘생명의 하나의식’입니다. 오늘의 내 개체인격과 생명실재는 좁게는 나의 조상가문 긴생명 릴레이 끝에 맺힌 열매요, 넓게는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총결승점이자, 미래 무한히 지속해가야할  종자씨앗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니다.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함부로 자살 할 수 없습니다. 함석헌의 아름다운시 한구절로써 다시 형상화한다면 아래문장으로 압축됨니다.

 맘은 씨알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아무리 하찮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45억년 지구진화의 결승점이요 꽃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담겨진 생물학적이거나 정신적 생명바통을 다음세대에 전달 주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 영혼의 정화와 비진리에 대한 저항정신의 회복
내면적 주체적 행위로서 씨알혁명은 순수한 씨알생명 겉에 붙은 온갖 오물과 문명의 기름덩이를 걷어내고 정화시켜  순수한 본래생명모습을 되찾고, 씨알생명을 옥죄이고 죽이는 세력들에 저항하는 용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함석헌선생께서 잡지 『씨알의소리』를 발간하면서 잡지의 정신이자 강령이라고 할 <우리가 내세우는 것> 8가지를 내세웠는데 그 6번째 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씨알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알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사명으로 압니다. 『씨알의소리』, 잡지 뒷표지 <우리가 내 세우는 것>  참조.


씨알사상은 평화주의요 비폭력주의 이지만, 그 말은 불의와 비진리에 대한 비겁한 굴종이나 타협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의 신념처럼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비겁함’을 가장 경계하며, 역사도피주의나, 비진리와 불의에 대항하여  ‘대듦’을 모르는 씨알을 죽은 씨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우상의 동굴에서의 탈출과 자유인되기
씨알혁명은 스스로를 ‘우상의 동굴’에서 끊임없이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이념적 독단주의를 거절하고, 거기에 얽매인 자신과 동포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이념, 종교 종파적 독단주의, 경제제일 물신숭배, 과학영역을 벗어난 물질환원주의적 과학종교를 거절합니다.

넷째, 자기중심적 이기심 극복과 사회적 문화기능의 회복
내면적 씨알혁명은 자신안에 있는 폭력성과 자기중심적 이기심의 독아를 빼내고,  우리사회의 죄악상에 대한  공동책임의식을 가지고, 특히 언론, 교육, 종교의 3대분야에 대하여 엄중한 책임을 묻고 비판적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질적 현실사회를 구성하는 세가지 힘은 정치의 힘, 경제의 힘, 문화의 힘인데, 문화의 힘을 창조적으로 살려내느냐 죽이느냐의 관건이   언론․ 교육․ 종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생각하는 백성 되기
씨알은 자기자신을 내면적으로 혁명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깊이 생각하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님의 명제는 영구불변의 진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모든 사회적 질병과 고통,  비인간적 모습은 돈과 물질과 권력에 영혼을 팔아넘긴체 생각하기를 중단한  이 나라 백성  곧 씨알들에게 있음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여섯째, 국가권력의 폭력중지와 민주주의 가치의 실현
씨알혁명의 외면적 해방은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착오적인 국가폭력으로부터 해방이 시급합니다. 국가 권력은 사회질서유지, 군사적 안보상황지속, 폭력테러집단의 방지, 지속적 경제성장  여건조성등 명분을 내걸고 무차별적 국가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실질적으로 1980년 이전시대에로 한국 민주주의는 후퇴하였습니다.
씨알혁명이 꿈꾸는 새가죽부대는 국가주의와 국가폭력이 살아진 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혹자가 오해하듯이, 함석헌의 정치사상과 씨알사상은  무정부주의(anarchism)를 신봉하거나 지지하는 것이 절대 아님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17-19세기 역사시대에 존재했던 그런 국가기능의 수행자로서 국가주의시대는 끝났다는 문명사적 시대의식을 갖습니다. 최소한도의 간섭과 최소한도의 제약을 법으로 규제하는 최소의 정부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로서만 국민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을 하면서, 실제에서는 국가의 실질적 주인인 국민위에 군림하는 현재상태의 권력국가를 씨알혁명은 단호히 거절하고 바꾸려는 것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어떤 명분으로든지 제약하는 국가정부를 씨알혁명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 시민의 자유로운 ‘촛불집회’를  제약하고 검거조사 합니까?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는 ‘국민의 정부’로서의 명실공히  민주주의 정치를 꿈꾸는 것입니다.

일곱째, 약육강식의 동물왕국과 물신숭배를 강요하는 사회채제로 부터 해방
  외면적 해방을 위하여 씨알혁명이  꿈꾸는 ‘새 가죽부대’는 더 이상 씨알들로 하여금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을 강요하는  ‘삶의 전쟁터’를 종식시키려는 것입니다.  귀중한 생명과 삶의 기회는 ‘삶을 전쟁터’로서가 아니라 ‘두래 공동체 마을’ 같이 변화되기를 꿈꿈니다. 이땅의 씨알들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급학교 입시준비와 과외 학원공부에 시달리는 학생들과 학부모들, 살인적 등록금 인상과 졸업후 취직전쟁에 내몰리는 젊은이들, 조기명퇴를 항상 염려하는 직장인들은  ‘전투적 삶의 방식’에 모두 지쳤습니다. 이런 사회의 삶은 정상적이 아니며 모두 바보같은  짓거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씨알혁명은  인간사회란 인간이 새롭게 꿈꾸는데로 새로운 사회건설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씨알혁명에 동참자들은 물신숭배종교를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경제가치 중심의 정책과 사회일반의 가치관이  ‘생명가치’ 존중사회로 변화된 사회가 탄생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개인과 사회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하여 물질재화의 필요성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구촌 전체 인류의 평균적 삶의 질을 생각할 때, 한국사회는 지나친 물신숭배사회에로 전락되어서 도리혀 생명이 죽어가는 아이러니가 연출됨니다. 남은 음식 버려지는 총량, 재활용가능한 가구제품의 폐기, 차고 넘치는 의류제품의 유통, 사치품의 범람등을 감안 할때, 보다 근검절약한 소비생활 삶의 질서가 형성되고, 빈익빈 부익부의 영극화가 극복되고, 삶이 내면적으로 더 자유롭고 문화적 예술적 삶으로 승화되는 사회창조를 꿈꾸어야 합니다.

여덟째, 보편적 복지정책이 실현되어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복지사회실현의 꿈
 씨알혁명의 외면적 방향에서의 꿈은 “같이살기 운동”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 학문용어로  옮기면 보편적 복지사회의 실현입니다.  보편적 복지사회는 선별적 복지사회와 구별되는  개념인데, 선별적 복지사회이념 안에는 가진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온정’과 ‘빈곤층 구호’개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사회개념은 빈곤층에 대한 부자들과 여유있는 사회계층의 온정행위 혹은 국가가 빈곤층에게 베푸는 호의적 구호정책이 아니라, 마땅이 되돌려주어야 할  인간도리요 의무요 책임이라는 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씨알혁명이 꿈꾸는 미래적 사회변혁은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이땅 위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도 존엄성을 스스로 느끼도록 하는 교육, 보육, 의료, 장애인,노인층 복지정책이 실현된 사회라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엄청난 재정예산이 들고, 조세담당자자들의 불평불만 때문에 현정부는 보편적 복지정책 실현은 불가능한 유토피아 발상이라고 말하고 합니다.그러나 정말 그럴가요?
  호사스런 구청건립에 세금을 낭비하고, 멀쩡한  보도블록을 몇 개월마다 뜯어 교체하고, 보이지 않는 지하철 안전운행에 관심쏟기 보다는 지하철역 외벽치장에 세금을 낭비하고, 국민세금 23조원 이상을  퍼붓는 4대강 개발사업 예산낭비를 중단하여 국민의 세금을 진정한 복지사업에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가난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선별적 급식’제도를 실행하는데 따른 ‘어린 영혼의 상처’를 정부와 집권당 간부들이 예민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부자집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가 점심시간에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하며 밥먹는 일은, 영양섭취시간을 넘어 말로다 할 수 없는 귀중한 사회교육적 시간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홉째, 씨알혁명의 평화협정채결, 무기경쟁 철폐, 남북자유왕래, 평화통일의 꿈
  밖을 향한 씨알혁명의 꿈은 더 이상 한반도가 세계열강들의 군사적 긴장완충지대로서 희생당하는 것을 끝장내는 꿈을 꿈니다.   더 이상, 동족끼리 총을 겨누며,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며 창조적 민족에너지를 파괴적 군사에너지로 소진시키는 어리석음이 끝나는 시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곧바로 평화협정을 채결하고, 모든 핵무기를 철폐함은 물론이며,   전통적 중화학무기 및 천문학적인 군사장비구입 예산을 삭감하고, 병역복무시간 단축및 및 예비군 복무년한의 폐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남북은 이러나 저러나 성경 창세기 이야기에서처럼, 동일한 아버지 어머니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처럼 쌍둥이 형제입니다. 야곱과 에서 두 형제가 장자권을 가운데 놓고 서로 겨루며, 분노와 적개심으로 불타던 시절이 있었지만 피차 형제애로서 화해하듯이, 한민족도 이제 그만  동족에 대한 어리석은 불타는 적개심을 고쳐 화해하고 서로 함께 잘 살아가야 합니다. 남북이 경험하고 실험했던 정치-경제-문화적 삶의 방식중 좋은 점을 서로 배우고 삭여서, 보다 인간적 얼굴을 한 7,500만 민주적 나라건설의 새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회는 근본적인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이 보장되고, 동시에 평등과 정의가 실현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생명․평화․정의가 입맞추는 사회를 씨알들은 꿈꾸어야하고, 그런 사회실현이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니고 실현가능한 사회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열째, 씨알혁명은  자연생태환경의 위기극복을 위한 생태학적 윤리의식과 영성을 추구함
  마지막 우리시대 씨알혁명의 꿈은, 인간과 자연의 화해, 생태적 윤리의식의 제고, 더 나아가 생태학적 영성이 한껒 성숙된 문명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가장 급한 문제는 자연생태계의 붕괴요, 지구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의 위협입니다. 자연생태환경위기의 극복문제는 어떤 다른 정책적 사업보다 우선적이고 정언명령적인 것입니다.
무엇이 선한 인간행위이며 무엇이 보다 심원한 종교적 영성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과 자리매김이 생태학적 균형, 조화, 증진으로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와 정책선택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정부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기업에게는 생산설비투자를 권고하고 국민에게는 소비를 권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정책은   짧고 좁게보면 특정 공동체의 물질적 생활향상을 잠깐 동안 가져다 줄런지 모르나, 크게보고 길게보면 지구촌구성들로 하여금  집단자살을 권고하고 강요하는 반생명적 비윤리적 행동이 되고 맙니다.
   씨알은 왜 혁명을 해야하는가?  죽지 않고 살기위하여 , 지속가능한 사회실현을 위하여 우리는 근본적(radical) 혁명을 해야합니다. 씨알혁명은 나부터, 내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삶의 전체영역으로 눈을 부릅뜨고 혁명군을 진입시키는 총소리 없는 생활혁명, 선거혁명, 국회혁명, 교육혁명, 신문전파방송혁명, 종교혁명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씨알혁명은 반드시성공해야 하고 성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혁명은 보다 잘먹고 잘살자는 동물적 욕망충족 목적의 혁명이 아니라,  이 세기말적인 죽임문명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것이냐 전멸 할 것이냐의 생존 그 자체에 관한,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는 ‘근본적 혁명’(Radical Revolution)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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