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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단순성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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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단순성의 신비

김 경 재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 한신대 교수)
  http://soombat.org

[1] 영성수련과 단순성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현대문명과 사회는 단순성보다는 풍요로움과 더많은 소유를 미덕으로 삼는 가치관이 지배한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성공했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축복을 그 만큼 많이 받았다는 증거로 삼기까지 한다. 그 무엇을 소유한 만큼 자기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자기의 존재가 스스로 존재성을 확보한다고 맹신한다. 소유의 대상은 물질만이 아니라, 지식, 경험, 정보, 확고한 신념, 등 보이지 않는 귀중한 값어치 있는 것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적당한 일을 한다는 것은 삶의 보람이요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일에 쫒기고 시간에 쫒기어 삶의 본말을 잃어버리고 혼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분초를 다투면서 각종 회의나 협의회에 참석하는 지도자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필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영성의 위기를 초래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성이야 말로 가장 귀한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과 진정한 생명 곧 영생을 얻게되는 첩경이자 조건이라고 까지 말한다. 단순성은 영성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요, 성숙한 영성의 징표가 된다. 단순성은 기독교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척도라고까지 말 할 수 있다.
  단순성이란 유치함이나 세련되지 아니한 거치른 덕목과는 다르며 게으른 나태함과는 더욱더 거리가 멀다. 단순성이란   그 무엇이 부족해서 미쳐 다 체우지못한 아쉬운 맘과 관련된 어떤 심리상태도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의 예술작품에서 보듯이 단순성은 고도의 훈련과  연단 뒤에 오는 맑고 순수한 영혼의 모습이요 몸짓이다.  기독교의 영성수련은 단순성의 수련을 요청한다. 이제 아래에서 그 성서적 근거와 단순성의 본래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성서가 부르는 단순성에로의 초대

   첫 째,  다른  말씀보다도 단순성을 가르치는 말씀은 예수님의 팔복선언 중에서 그 으뜸을 차지하는 말씀 곧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마5:3)라는 말씀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나한 자란 그 마음이 단순성을 잃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 만을, 진리만을, 하나님 나라만을 원하는 순수한 맘 상태를 가르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은 뒤에 들어갈 미래의 하늘나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모든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과 이 땅 위에서 맛보는 가장 숭고한 기쁨과 충만한 생명의 현실성 바로 그것이 천국이다.  
  둘째, 단순성을 영성의 아름다운 덕목으로 지니는 자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마13:44)  단순성이란 "이것도 구하고 저것도 구하는" 두 가지를 모두 얻으려는 탐심을 부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기쁘게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다. 단순성의 영성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자기의 욕망을 성취시키는 후원자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복음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지 다른 목적 달성을 하려는 수단으로서 복음을 활용하지 않는다.  단순성의 영성을 지닌자의 마음은 사도 바울과 같아서 자기의 기존에 이룬 모든 자랑거리 업적과 사회적 신분과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리는 맘"(빌3:7-8)을 지닌다.
  셋째, 단순성의 영성은 한마디로 말해서 광야 수도자들의 본질이며, 사막 신비가들 영성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거치른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호2:14) 고 말씀하신다. 풍족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에굽 땅에서 나올 때의 그 순수한 단순성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바알신앙에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단순성의 영성은 성 안토니 수도자로 하여금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마19:21) 거치른 사막 광야로 나아가서 도리혀 하나님과 하나됨과 영생을  체험한 그 영성을 말한다.
 넷째, 단순성의 영성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맘을 지닌체 험한 이 세상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어린아이같이 되는 것"(마18:3)과 "순전함과 진실함"(고전5:8)을 잃지않는 삶을 말한다. 세상을 궤변과 복잡다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명명백맥한 하나님의 생명의 법도가 햇빛처럼 항상 이 세상을 비추이고 있다고 믿는다. 어린애답게 된다는 것은 철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철이 들었어도 어린애같은 순수함을 지니라는 말이다. 복잡한 이 세상의 이론과 철학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 공부했을지라도 그 맘이 항상 순전하고 진실하여 학문을 깊이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섯째, 단순성에로 부르시는 성서의 말씀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막8:34) 이며,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막10:42-45)가 지니는 영성을 말한다. 단순성의 영성은 자기를 비움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남이며, 자기를 부정하고 낯춤으로 도리혀 자기를 높이시고 긍정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성이다. 단순성이 지니는 놀라운 영성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단순한  순종의 맘으로" 예"하고 따라 나서는 신앙인의 삶을 말한다.
 여섯째, 성서가 가르치는 단순성의 축복 사례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흔히 오해하듯이  마르다와 마리아 두자매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육신의 몸을 위한 음식을 장만하는 마르다의   일보다 영의 양식인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교훈의 초점은 단순성을 지녀야 할  신앙인 태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교회일과 선교일이라도 단순성의 상실은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순성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영성수련에 있어서 단순성 회복은 가장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서 매우 귀중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현대 삶의 구조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경쟁적이며 우리의 관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욕망을 확대재생산해내는 광고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단순성을 견지하는 신앙인의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단순성을 회복하기 위한 삶의 성찰을 위해 몇가지 관점을 생까해보아야 하겠다.

[3] 단순성 회복을 위한 삶의 성찰 그 몇가지 관점들

첫째관점: 무한 시공간 좌표 속에서 찰나의 인생을 생각함.

 단순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일상성에 묻혀 무엇을 입을가  먹을가하고 염려속에 살아가는 삶의 타성에서 일단 한번 벗어나서 무한시공간 좌표에서 나의 삶의 자리를 한번 볼 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자연과학자들의  연구덕분에 우주의 시공간이 얼마나 넓고 무한한가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 밤하늘의 은하계를 다시한번 올려다보지 않는다해도, 이 무한 광막한 우주 속에서 순간처럼 짧은 시간을 살아가도록 선물로 허락받은 우리들의 생명은 신비하고 귀중한 것이다.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단 한번의 일생을 선물로서 부여받았다.
 내 생명이 이러한 무한 시공간 속에서 "지금 여기" 이렇게 현존한다는 사실은 기적중에서도 기적이다. 적어도 지구진화 생명과정45억년의 생명물줄기를 용케도 단절당하지 않고 생명줄기를 이어 이어 여기에 도달한 것이다. 아침에 거울을 쳐다보면서 종종 그 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서 하늘에서 큰 도시를 내려다볼 때, 커다란 아파트단지가 바닷가 게들의 집처럼 작게보인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무한 시공간 좌표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보면 바닷가의 작은 조개껍질같은 것들을 붙들고 귀중한 일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의 조건은 귀중하다. 그러나 필수불가결한  의식주의 마련을 넘어서 더 큰집,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그것들을 자랑하는 데다가 단한번 밖에 없는 일생의 시간을 낭비하고 쏟아붓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어느부자의 재물자랑이 극에 달했을 때, 그 영혼을 오늘저녁 불러간다면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 같이 사람의 영혼의  부요함 곧 영성의 영글음의 정도가 그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성의 영성이란 무한한 우주적 시공의식 속에서 삶아가는 유한한 인생이 우선 무엇을 구하고 이뤄가야 할것인가를 분별하면서 성찰하는 일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단순화시킬 것은 시켜가면서  깨어 살아가는 삶에서만 가능하다.

둘째관점: 더많이 비울수록 더 큰 충만임을 깨닫게 됨,

  단순성의 영성을 되찾기 위하야 모든 종교들은 자기를 부정하거나 버리거나 비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한마당 과정을  출가정신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바울이 말한바처럼 우리는 목표에 아직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지금도 달려가는 순례자들인 것이다.
  신앙인의 생황에 있어서 "비움과 충만의 역설적 일치"를 깨닫는 일처럼 중요한 것도 흔치 않다.  개신교 신앙인은 누구나 다 성령충만, 은혜충만, 말씀충만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교회당 정면에 표어로 붙여놓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충만하고자하는 그 욕망도 하나의 욕망임을 깨닫지못한다. 진정한 충만은 비움에서만 가능하다. 참으로 자기의 심령은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들어오셔서 신자의 심령 지성소 안에 임재하시고 성령님이 일하시는  광장으로 비워드리고 순종하는 일은 드물다.
  산이 높은 것은 산정이 그 스스로 잘나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계곡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눈에 잘 띄는 산정이 되기를 바라고 산정에 오른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계곡의 조용한 위대함, 모든 생명을 기르고 품어주는 어머니 같은 계곡의 위대함을 보지 못한다. 계곡은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품고 기를 수 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깊은데도 계신다. 하나님은 충만이실뿐만 아니라 가장 심원한 비움이시다. 하나님에게서는 비움이 충만이시다, 하나님은 날마다 순간마다 자기를 비우심으로 그 신적 생명을 피조물에게 선물로 주심으로서 피조세계는 신적 생명의 충만으로 피조물들이 삶을 누린다. 단순성이라는 영성의 덕을 지닌자는 항상 비움이 곧 충만임을 깨닫는자이다. 계곡처럼 자기를낮추고 비우는 사람의 인품 속에서는 단순성의 덕성이 풍긴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가진자 같이 세상을 산다.

셋째관점: 삶을 유기체적인 그물망구조와 역사적 흐름 과정속에서 파악함.

 자기의 귀중한 생명을 욕망과 이기심이라는 조개껍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한 구원의 생명에로 돌아서서 단순성을 회복하려면 자기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두가지 점에서 이루어야 가능하다. 그 첫째는 삶이란 현재적으로 서로 얽히고 설킨 그물망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갖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지금 현재적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내려오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고귀한 희생의 덕분임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신문 방송을 통하여 일생동안 고생하면서 벌어모은 귀중한 재산 전체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장학사업에 흔쾌하게 내어놓는 할머니나 독지가 소식을 접하고 감동한다. 대체로 그런 선한 일을한 사람은 고생을 많이하면서 일생을 살았고, 지금도 근검절약하면서 생활하시는 분들이다.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자기가 장학사업이나 구제금으로 내놓는 그 돈이 자기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마땅이 돌아갈 본래자리 본래주인 자리에로 돌아가는 일일이라고 담담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그런 위대한 훌륭한 생강이 가능할가?
 그분들의 그 선한 생각의 밑바닥을 자세히 드려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삶이란 물론 구체적으로 어느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힘써 노력하고 사는 것이지만, 동시에 삶이란 지극히 사회적이고 유기체적인 몸과 같아서 그물망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사회 속에 어느 인간 집단이 가난과 못배운 설움과 무지와 죄 속에 살아가는 한 그것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함께 책임지고 그 무거운 인생짐을 나눠 짊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성 안토니 수도자와 앗시시의 프란시스 성자가 자기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단순성을 회복한 수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을 그물망구조로서 파악하고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소유한 재물과 지식과 사회신분은 내것이면서도 내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생명체들의 희생과 노력의 집성물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임시로 관리하고 보관하고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단순한 삶의 행장으로 바꾸어 살아갈 수 있다.

넷째관점: 삶을 그리스도 십자가 빛 아래에 놓고 생각함,

 그리스도인에게서 단순성의 삶의 자세를 거듭 회복하는 능력은 신도가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절대사랑과 절대희생의 빛 아래에서 자기를  성찰 할 때만 가능하다. 찬송가(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는 결코 교회력상 고난주간에만 부르는 찬송가가 아니다.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십자가를 생각하기만 하면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헛된줄 알고 버리게 되고, 세상의모든 자랑과 교만한 맘을 버리게 된다.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는 명상수련은 단순성 회복의 명약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성령사역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영광을 위하고 자기교회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경우가 많다. 탐심은 우상숭배인데, 그 탐심중에는 거룩한 일 많이하겠다는 탐심도 탐심으로서 섞여있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오늘의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많이소유하고,, 너무 많이 대접받고, 너무 자주 자기영광을 구하고, 너무 많이 핑계와 복잡한 이론을 내세우면서 단순한 사랑의 순종을 유보한다. 야고보선생이 충고를 기억하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 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다"(약1:27) 그러한 경건의 참 모습은 단순성의 회복에서만 가능하고, 그러한 단순성 회복은  십자가의 빛 아래 자기를 놓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빛 아래 놓는다는 말은 동시에 자기 생명을 "탄생과죽음" 이라는 두 괄호 속에 놓고 본다는 말과도 통한다. 오늘의 자기 생명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물처럼 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던 벌거숭이 로서의  탄생 모습과 수의를 입고 차거운 관 속에 누어있을 자기의 모습을 항상 잊지않고 오늘의 자기 삶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사람은 단순성의 자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단순성을 회복하기 위한 영성신학적 고찰을 네가지 점에서 수행하였다, 이제 다음단계로 우리는 좀더 구체적인 명상과 실천단계로 들어가 단순성 수련의 방법을 실천해가는 영성생활을 해가야 하겠다, 영성과 단순성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물질적 단순성 의 삶, 정신적 단순성의 삶, 그리고 질병과 죽음에대한 영성수련으로 대별할 수 있다.











       2000년 4월27일, 총회영성교제웍샾 / 영성과단순성의 신비, 교제자료 안(1)

                   영성수련과  단순한 물질적 삶  

성경본문 : 마태복음 19:16-26
          빌립보서  3:7-9
수련의 초점: 1. 현대인의 삶이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중독되어 도리혀 영혼의 밝고 맑                 음을 방해받고있음을 깨닫고 상업주의의 소비문화 속에서 자아를 찾는일.
           2.  현대사회의 구조를 생각할 때, 중세수도자나 성자들이 추구하던 청빈한 삶                  을 신앙생활의 본을 삼지 못할 지라도, 절제와 단순한 삶의 자유를 회복함                  으로서 신앙을 보다 강건하게 하고자 함.     
수련대상과 방법: 소그룹수련: 10-30명정도의 그룹모임이면 가장 이상적임
                대그룹수련: 50명이상 회중신도전체를 상대로하는 수련도 가능함
전체소용시간   : 60분

[1]  도입

 
 최근 98세로 소천하신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목회자 한경직목사는 영락교회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과 사회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분이 존경받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복음주의적 설교, 성실한 목회자세, 원만한 인격과 기도생활, 성서에 대한 열애같은 사랑, 교육사업과 구제사업에 대한 헌신등이 그 이유중에 거론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가깝게 모시며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한 교인들의 심정엔 한경직목사 허름한 오바코트가 일생 강한 인상으로 마음에서 지어지지 않는다. 대교회목사이므로 이런 저런 경우에 교인들이 마련해준 새옷과 새오바코트가 준비되기 일수이련만 그분은 그 모든 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몰래 주어버리고, 당신은 항상 다헤어진 낡은 겨울 오바코트를 낡아서 더 이상 입지못할 때까지 입고서 영락교회를  목회하셨다.
 현대그리스도인들의 영성생활에서 치명적 약점은 너무나 많이 소유하고, 더많이 소유하려는 물질적 욕망과 관심이 우리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나약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적 은혜의 현존과 갖는 섬세한 접촉감수성을 무디게하며,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도관을 차단하고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대사회자체가 '소유지향적 문명사회'이며 물질적 부를 형성하고, 소유하고, 풍족하게 누리는 일이 곧 인생의 성공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거대한 세속주의 물질문명 사회구조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생활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먼저 정직하게 인식하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2] 성경본문 묵상

 마태복음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이야기는 위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부자청년은 단순한 물질주의자도 아니요, 영적으로 교만하거나 도덕적 선행을 실천하는데 인색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서 압축된바처럼 지극히 윤리적 이고 종교적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계명들도 충실하게 지켜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부자청년은 영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모든 제도적 종교규율을 다지키고 선행에도 힘썼으나, 그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영원한 생명의 충만과 확신'을 느낄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 그 청년이 소유하고 있는 그 많은 물질적 부가 그의 영혼을 부자유하게 하고, 병들게하며, 하나님의 가까운 임재를 느끼지못하게 차단하고 있음을 보셨다. 그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네소유를 다팔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걱정하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하셨다.
 보통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성경에 나오는 그 부자청년 만큼 부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므로 오늘 본문의 성경말씀과 나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곧 그 부자청년과 같은 삶을 살고있다고 선언하고, 진실로 '영생'을 원한다면 단순성과 절제의 삶을 회복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이 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수준이냐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하기에 나름이다. 부자재벌들이나 큰 그룹 회장 사장님들의 물질생활의 풍요로움에 비하면 보통 한국사람들은 '나는 가난하고 기껏해야 중산층 정도다"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구위에 생활하고있는 지구인구 2/3 이상 40억명이상의 사람들은 평균한국사람들의 경제수준보다 훨씬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신앙은 물질을 죄악시하거나 물질적 부를 얻는 경제활동 그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물질에 대한 관심과 물질소유로 인해 얻는 포만감과 안정감이 마치 우리생명을 보전해주고 그것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강변하면서, 진정으로 순수한 맘으로 하나님을 겸손하게 모시고 동행하는 삶을 방해한다는데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물질에 비하여 약간의 구제와 헌금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혀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할만한 책임은 다하고 있다는 자기교만에 빠지게도 한다.  
  물질적 경제생활을 하되 물질에 메이지않고, 부를 증식시키는 경제생산활동을 하되 그 중심에 영적 하나님신앙을 견지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들의  삶은 필요이상 너무많이 소유하고있으며, 필요이상 물질적 걱정으로 우리맘이 온통 점령되어 있어서 정작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실만한 맘의 지성소에 빈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늘에서 오는 참된 평안도 없고, 맘 속에 영생의 희영감도 없는'  틀에박힌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물질적 삶의 단순성과 절제생할을 위한 영성수련

 (가) 내가 지금 받아가지고 있는 삶의 여러 가지 자산가운데(건강,가족,지식,경험,사회적 일, 교회관련, 사업과 경재상황, 인간관계등) 가장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다섯가지만 선택하라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맘으로 생각하고 가능하면 서로 이야기해보자.

 (나) 하루 하루의 삶의 시간중 나의 관심과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렬한 동기들은 다음중 무엇인지 솔직하게 우선순위를 번호로 표기해보자.
     * 신앙의 성숙 * 자녀들의 교육과 안정 * 가족건강 * 교회봉사 * 물질(돈)의 증식
     * 예술이나 문학적 소양 * 미모가꾸기와  옷에 대한 관심 * 사회봉사활동

 (다) 우리집 장농안에 사용하지 않는 옷가지나, 집안 물건중 절대필요하지 않으면서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하고, 그것들의 생산을 위해서 지구환경오염과 파괴가 얼마나 가중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라) 1950-60년대 한국사회가 물질저긍로 절대빈곤상태 속에서 살아갔을 때, 사람들의 인심과 공동체샐활을 생각하고, 1990-2000년대 오늘 우리사회모습과 인간성의 황폐모습을 대비하면서 그 근본원인이 어디에있는지 이야기 해보자.

[4] 마감하는 순서

 (1) 다시한번 마태복음 성경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서 묵상하는 시간       을 갖는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지로는 거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물        질과 부의 증식에만 관심을 집중했으며, 내 맘을 지배하는 실질적 일차관심은 돈(맘        몬신)임을 고백하고 참회 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성령의 위로와 도우심을 기도하자
 (2) 가급적 단순한 물질적 삶을 습성화하고, 절제의 덕이 물질생활에있어서도 가장 절실하        게 필요한 시대임을 다시하번 확신하면서 살기를 다짐하자.
 (3) 찬송가 147(주달려 죽은 십자가)장을 부르고 '주가르치신 기도'를 함께드림으로 모임을        마친다

.2000년 4월27일 총회영성교제웍샾 / 영성수련과 단순성의신비, 교제자료 안 (2)

               마음의 단순성은 순수성과 통일성의 길

성경본문 : 마태 5:3, 마태13:44
          누가 10: 41-42  
수련의 초점: 1. 복잡해진 현대생활 속에서 신앙인들의 심령은 극도로 피곤하고 환경에 적응                 해가노라고 심령자체가 산만성에 휩싸여있다.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리고 일                 과 성취욕과 과시욕에 희생이 되어있다.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하면 잠된자                 기를 되찾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둔다.
            2. 마음의 단순성 회복은 영적 순수성의 회복이며, 그 자리에 들어감으로서 하                 나님과 하나되며 성령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삶이                    은혜의 삶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수련대상과 방법: 인원은 20-30단위의 소그룹, 장소는 조용한 장소 또는 넓은 방
전체소용시간 : 약 60분

[1] 도입
  유명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70세가 훨씬 넘은 말년에,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교훈의 말씀이 바로 진리임을 깨닫고, 그의 전체 재산과 세계적 대문호로서의 부귀와 명예를 모두 놓아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는 단순성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현대종교, 특히 개신교는 그 왕성한 선교열정과 활동성이 지니는 잠점에도 불구하고, 잘못하면 '마르다와 마라아'의 비유에서 주님이 경고하시는 말씀 '꼭 필요한 것은 하나이다"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고 심지어 봉사활동을 하노라고 분주히 돌아다니지만, 정작 자기자신의 참 영혼을 잊어버리고  사회적 신분과 가정과 교회가 자기에게 부여한 '그 모습' 이 참 자기인줄 알고 헤메이기가 쉽다. 참된 자기를 성경에서는 속 사람,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녀, 영의 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참자기가 아닌 자기인줄알고 끌려니는 자기를 겉사람,  혈육의 사람, 육의 사람 이라고 한다.
  신앙생활과 종교란 무릇 바로 다름아니라 겉사람을 날마다 벗어버리고 속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겉사람의 특징은 겉치례를 좋아하기 때문에 겉에 붙은 인격적 장식물에 일차적 관심을 갖는다. 가문, 학력, 사회직장에서의 신분, 재산, 교회의 직분, 교회봉사와 성교업적도 모두 겉치레에 항목에 들어가는 것이다. 겉사람의 특징은 그 심령에 여러 가지일로 '근심하고 관심하여 그 심령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점에 있다.
  사람의 심령이 복잡하면 순수성은 감소되고 투명성은 상실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적 통일성이 방해받게된다. 그것은 마치 래디오 주파수가 여러 가지로 동시에 안테나에 잡히게되는 때면 잡음이 나고, 맑은 뉴스앵커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들려지지 않는 상태와 같다.

[2] 성경본문 묵상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유말씀'은  초대교회이후로 그 해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입장이 있었다. 중세기 수도원운동이 횔발할 때는 마리아는 수도사처럼 모든 가사일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와 주님의 일 곧 복음과 주님섬기는 영적일에만 종사하는 것을 더 좋은 일이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가사일 도맡아 하는 가정주부의 어머니로서의 일이나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며 세상일에 충실하는 것은 영적으로 그 수준이 낮은 세속적일이라고 폄하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유말슴이 정신적 영적일은 선하고 고상하며,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일은 덜중요하거나 영적으로 하등적인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말씀이 아니라는점은분명하다.
 비유말씀의 초점은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가지일로 분주하며 들떠있고 그럼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일로 염려하는 일이 영혼에 치명적 독이 됨을 경고하고, 심령의 단순성과 고요함과 집중함과 투명함을 권면하시는 비유로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가스렌지에 불을 붙여보더라도 빛의 색깔이 여러단계가 있음을 알게된다. 가장 초기 산소공급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불꽃은 붉은 빛을 뜬다. 좀더 진행하면 푸른빛을 띄게되고. 마지막은 고온 속에서 백광을 발한다. 햇빛은 그 다양한 일곱가지 무지개 색깔이 통일되면 하나의 '흰빛'으로 나타나는데 흰빛은 성경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빛이다. 흰빛은 모든 일고가지 색을 통일시킨 가장 단순한 빛이며 가장 심원한 빛이다. 이 흰빛이 스팩트럼 분광기를 통과하면 일곱가지빛갈로 나타나면서 우리눈을 즐겁게한다.
 정신적 영적 생활의 단순성 회복은 참된 자기를 찾는 일이며 ,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빈 마음으로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의 조건이 된다.
  [3] 영적 삶의 단순성을 위한 영성수련

 우리들의  정신적 삶과 영적 삶에서 단순성의 회복은 물질적 단순성 회복보다 더 어려운 영성수련단계 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왜냐하면 교회사적으로보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집과 전토와 가족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하여 독신주의를 택한 수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인간 마음 속에 스며드는 공명심, 지배욕, 성취용망, 영적 탐심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20세기 람바네의 성자로 존경받는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리키오지로 떠나기로 결정할 무렵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문명사회의 편리함이나 존경의 대상으로서 그가 지녀오던 교수직을 버리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바하음악 연주가로서, 의사로서, 학자로서, 목사로서 유럽도시안에서 더많은 의미있는 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를 설득하는 순수한 동역자들 교인들의 만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알버트 슈바이쳐는 '단순성의 영성이 지닌 귀중함'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모든 '복잡하고 들떠있는 도시문명인들의 마음의 영성'을 떠나 '원시림의 단순성, 아프리카오지 사람들의 단순성' 속에서 복음을 보았다.
 현대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치명적 약점은 단순성의 상실에 있다. 신도들의 맘은 복음이 밝혀주는 단순하고도 투명한 저 산상수훈의 정신에서 멀어져가고, 교리와 신학이론과  선교사명감에 의하여 그의 심령이 분주하고 들떠있거나 너무많은 염려와 사명의식의 근심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신교회의 특징은 활성적인 단계를 넘어서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성취동기로 시달리는 영적개미군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성취, 영혼의 절대평강, 문명비판의 눈을 지닌 성숙한  정신의 자립심,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인한 천진난만한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은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이것이 우리시대 영성의 위기이다.
  (1) 진정한 자기찾아가기 묵상 : 참된 나는 누구이며 어디있는가 조용히 묵상해보자.

     *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과 사회에서 나에게 붙여준 기능적 이름들이 진정한 나인          가?  아빠, 엄마, 스승, 학생, 목사,장로 권사,집사,사장,과장, 부장, 의사,변호사,간호          사등등 그것들이 진정한 참 나인가? 그러한 직분과 기능들이 모두 내게서 살아지면          나는 무엇인가?
     * 내가 소유하고있는 것들이 나인가? 내가 가진 지식, 내가 체험했던 귀중한 경험들,
       귀중한 우정관계, 내가 소유한 재산들, 그것들이 나인가?
     * 내가 무의식중에, 또는 잠재의식중에 지니고있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얼마나 많았          던가? 그런것들이 나의 한번 밖에 없는 나의 인생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던 것을 방          치하고  맹종했던 것은 아닌가?   
     * 진정한 내 속사람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2) 한국 개신교 신앙행태안에 들어와 있는 정화되지않는 세속적 모습들을 점검하고 반         성해보자.
     
     * 교회안에 친교를 위한 성도들의 소식, 순수한 축하할 일, 교회봉사를 한 공로들들이          지나치게 사회적 관례를 따라 논공행사식으로 흐를 위험들은 없는가?
     * 한국 교회가 지닌 외형적 공적주의, 과시주의, 업적주의, 경쟁을 유도하는 교회교          육방법, 등  수많은 사례들은 그 교욱적 동기부여가 지닌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도          들의 맘을 들뜨게하고 분주하게하고 경쟁적으로 만들기 때문네 심령의 단순성과 순         수성을 해친다. 그런 사례들은 무엇들이 있는가 이야기 해보자..  

[4] 마감하는일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찬송 349장(나 주의도움받고자..)과 424장(나의         생명 되신주)을 부르고 주님기도드린후 폐회한다.

2000년 4월27일, 총회영성교제억샾, 단순성과 영성수련,  죽음을 넘어서는 기독자의영성(3)

                   죽음을 넘어서는 기독자의 영성

성경본문 : 누가복음 20:34-40
          고린도전서 15:35-58
수련의 초점: 1. 교회에서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하여 많은 교육과 설교를 하되, 정작 죽음 그                  자체와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한 신앙교육은 많이 이루어져오지 않았다.  이                  런 현상은 죽음문제 자체를 거론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현대문명의 경향성                  과 무관하지 않다.죽음문제를 직시하고 바른죽음에 대한 이해와 준비를 갖                  추는 것을 수련목적으로 한다.
            2.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준비는 매우 역설같지만 삶의 문제를 그마큼 더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도록 하는 결과를 이룬다. 기독자의 바른 죽음이해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함으로서 현실문제에 대한 바른 대응                  을 하도록 한다.
수련대상과 방법: 교회청장년 그룹별 수련회모임
                영상매체준비물로서 장례식모습, 묘소 이장과정, 매장이나 화장의 모습,                    입관식 모습등을 가능하면 준비한다.
전체소요시간: 약 60분 전후

                 
[1] 도입

 종교의 구경의 목적중 하나는 죽음문제의 해결 곧 죽음의 극복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니다. 사람은 누구나 탄생과 죽음이라는 시작과 종국으로서 이생에서 한번 태어나고 한번은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로서 절실하게 이해될 때, 사라은 인간의 본질문제에 대면하게 된다. 죽음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거나, 회피하는 것, 사는 것도 바쁜데 죽음문제를 왜 미리 앞당겨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솔한 듯하지만 진실을 왜면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멀리있는, 미래에 있는 어떤 낯선 일이 아니다.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종 그 일이 구체적으로 나의가족이나 진실한 친구에게 일어날 때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일이 나 자신의 문제로 들이닥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평소에 그 일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 일보다 더 절실하고 심각한 문제가 다시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영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며 극복하는 일은 영성수련의 핵심적 본질이라 할 것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가장 단순한 태도를 갖도록 하는 귀중한 생명의 신비한 계기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진솔하게 대면하고 대화할수록, 단순성의 영성을 지니게 된다. 인간의 부질없는 껍데기 삶의 행태,  쭉정이같은 일들을 털어버리고 본질적  삶을 살게하도록 추동하는 힘이 있다.  

[2] 성경본문명상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두가지를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첫째,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모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으면 그만, 죽여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시는 말씀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오, 생명의 처음과 마지막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둘째, 죽음 이후의 삶이 분명히 있는데, 죽음이후의 삶은 이세상에서 살던 방식의 연장이 아니고 질적으로 다른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시집가고 장가가거나 이세상의 부귀영화가 계속되는 그런 시간의 연장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 천사같은 영적 생명체로 변화한다는 말이다.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생명을 덧입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편지 속에서 부활의 생명, 죽음이후의 영적 생명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부활장'이라고 부른는 고린도전서 바우르이 증언의 핵심을 세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활생명, 죽음 이후 영생의 생명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으로서 그 첫 증거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부활생명의 첫열매로 일으켰다. 이제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잠자는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둘째, 부활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지녔던 혈육적 생물학적 생명의 소생이거나 재생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영적 변화를 덧입은 제2의 창조생명이다.  죽음 이후, 우리가 덧입을 영적 생명은 흙으로된, 약하고 부셔지는 생명이 아니다. 영적 생명체이다 영적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덧입혀주시는 선물이며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몸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지니셨던 그 몸이 직접변화 되심으로 인하여 썩어짐을 당하심 없이 영적몸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되심으로 부활하셨다. 그 몸에 죄가 없으시며, 그 부느이 땅 위의 몸 그자체도 너무나 거룩하고 의로우신 생명으로서의 몸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땅에서 지니던 육신의 몸은 직접 에수님의 몸처럼 영화롭게 그 몸 자체가 변화되지 못한다. 죄로 물든 몸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난 것은 자연의 흙으로 다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 장막집이 부셔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변화됨을 입을 때까지, 우리는 잠정적 부활체로서 영적몸을 지니게 된다. 그런 상태를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의 생명이라고, 그리스도안에 감추인 생명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부활은 이 땅의 신체가 그대로 소생하는일이 아니기 때문에, 장례법에서 매장, 화장,풍장 수장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3] 단순성의 극점으로서 죽음에대한 영적 성찰

 첫단계:. 우리는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과   우리 몸이 썩어짐의 대상이 된다는사실은 직시            한다.

  생각하기도 싫고 두렵기도 한 일이지만, 성숙한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미리 앞질러 반성적으로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질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하거나,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거나, 자연스럽게 천수를 다 누리고 죽는다거나 할지라도 죽음 그 자체는 우리에게 슬픈 일이요 견디기 어려운 일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옳다.
  죽음이 슬프고 두려운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이별을 해야한다는 것. 내가 하던 모든 이 세상 일들이 허무하게 중단되고 해체된다는 사실. 나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한다는 고독감. 내 몸이 수의가 입혀지고 관 속에 누이게 되고, 땅 속에 묻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내 몸은 부패되고 해체되어 자연의 흙과 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크게  마음의 눈을 뜨고 보아야한다.

 둘째단계: 우리에게 죽음이 두렵고 무서운 것은 '자연스런 생물학적 생명체로서의 이 생의              마감'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죄가 지니는 가시독성' 곧 죽음이 지니는 주              정적인 힘 때문임을 직시해야한다.

  죽음에 대한 감적정단계의 두려움을 일단 극복하고 나면 죽음의 문제가 다 해결되거나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후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서는  전혀 알수 없으며, 더욱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한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지 못했던  데서 오는 회한과 두려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겸손해야하며, 정직해야 하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게하셨던 신비로운 생명의 주인에게 감사해야하고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는 맘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남보다 억울하게 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거나 재난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와 그 유족들은, 처음엔 대부분 누구나 다  죽음앞에서 저항하고 원망하고  항의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흘러 죽음을 받아드릴 자세가 되면 도리혀 지난 이 생의 삶을 감사하고, 용서하며, 화해하고, 죽음 이후를 바라보는 소망과 영안이 열리게 된다.

 셋째단계: 이제 신앙인에게 죽음은 무서운 사탄의 망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자로서, 생명의 더 높은 질서 안에서의 창조적 계기로 변한다.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은 가장 단순하게 되며, 빈손들고 십자가에 나아가 십자가만을 붙든다. 그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안에 맡기게 된다는 말이다.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맘이나, 스스로 영생을 쟁취하려는 생각을 그만둔다. 나의 생명을 어머니의 모태 안에서 조성하셨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 생명세계에서 살도록 육신의 몸을 입혀주셨듯이, 내가 지금 알지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생명질서이지만 더 높은 차원의 영적 몸으로 덧입혀주실 것을 믿게된다. 이 세상에 남게되는 가족이나 유업들에 대하여도 더 이상 염려 걱정을 아니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가장 깊고 신비로운 섭리 속에서 다 인도하실 것을 믿고 맡기게 된다. 맘은 평온해지며 죽음을 누이처럼 맞이하게 된다.

[4] 마감하는 말

  * 찬송 424장(나의 생명되신주), 342장(어려운일 당할 때)를 부른다.
  *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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