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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영성이해, 그 성찰과 해석학적 조명(호신대 해석학강좌, 201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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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영성이해, 그 성찰과 해석학적 조명
이 논문은 2010년 전남 광주 호남신학대학교 초청 특별강연으로서 “한국교회의 올바른 영성과 그 해석학적 성찰과 조명”이라는 제목으로서 행한 강연원고이다. 2010년 11월16일, 한신신대원 학술부와 우리신학회 연구자료로 소개하였다.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영성운동과 영성신학의 대두, 그리고 교회응답의 빛과 그림자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어휘가 한국신학계나 교계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부터 였다. 그 이전엔, 이 단어는 가톨릭교회와 그 신자들 사이에선 자연스런 용어였지만, 한국개신교 교회나 신학에서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낯선 어휘였다. 1980년대 이후, 이 용어가 교계나 신학계에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네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인류문명이 냉전시대 이후 급속도로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 구조로 개편해 가면서, 물질가치와 경제성장을 중심으로한 삶의 세속화(世俗化)ㆍ시장화(市場化)ㆍ계량화(計量化)에 저항하여 인간의 자기초월성(自己超越性)ㆍ내면성(內面性)ㆍ고유성(固有性)에 대한 각성을 증진시켰다. 포스트모던니즘은 모더니즘이 지녔던 지나친 ‘리성의 독단과 독선’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삶은 다양성(diversity)과 주체성(subjectivity)과 영적교섭(communion)을 지닌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게 되었다. 자연파괴와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생태학적 영성’의 정립 필요성이 절실해져 갔다.
  둘째,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생명현상’에 대한 설명ㆍ이해의 해석패러다임에서 ‘물질주의적 환원주의’ 혹은 ‘생물학주의’에 입각한 실재관과 가치관을 급속도로 보급시켰다.
인문학은 위기에 처해갔고, 종교계는 과학과의 관계에서 진보ㆍ보수의 뚜렷한 입장 차이를 나타내 보였다. 그 결과,  성숙한 사람들은 과학ㆍ종교ㆍ예술이 동시에 긍정되는 새로운 영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적 존재론이나, 자연을 경시하는 초자연주의와 초자연을 부정하는 자연주의를 모두 극복하는 ‘새로운 실재론’을 갈망하게 되었다.  
  셋째, 정통적 개신교의 신앙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서 역할을 했던 ‘경건’(piety)이라는 개념이, 본래 지녔던 복합적 개념 곧 ‘믿음ㆍ소망ㆍ사랑의 총체적 삶의 현실태’로서의 창조적 생명력을 상실하여 좁은 의미의 ‘도덕적 삶’ 혹은 ‘교리준수의 삶’으로 변질되거나 오해받게 되었다. 교회 안팎에서는 변화된 ‘삶의 상황’ 속에서 좀 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참신한 용어와 개념이 요청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 지구문명속의 다양한 종교의 실재와 가치를 경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고유성과 정체성의 귀중함이 더욱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넷째, 개신교의 영성운동의 한 흐름은 20세기 초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현대 오순절교회의 은사운동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로스안젤리스 아주사 성령운동은 (1906), 1960년대 이후부터 오순절교단이나 한국의 순복음교단을 넘어서, 교파를 초월한 세계교회적 영적갱신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중생체험, 신유와 방언, 교회의 역동적 성장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성령운동이 교회성장과  갱신에 큰 공헌을 했지만, 초대교회 ‘오순절성령사건’의 재현이나 반복으로 그 영성적 지평이 제한되는 국이었다. 다시말하면, 현대문명의 근본문제를 직시하고 치유 해결하는 보다 근원적이고도 포괄적인 영성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의 심령부흥 운동 사건’으로 국한되고 만 아쉬움이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핀대로, 현대 기독교의 ‘영성운동’의 대두는 ‘하나님의 시대경륜’과 더불어, 인류문명이 당면한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할 ‘카이로스’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의 징조’를  총체적으로 꿰뚫어보고 그것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영성운동’을 좁은 신학적 시각에서 구태의연하게 이해하거나, 심지어 교회의 양적성장의 방편적 수단으로서 오남용함으로서 ‘하나님의 시대경륜’에 순명하지 못했고, ‘때의 징조’에 적절한 응답을 하는데 실패하였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영성훈련 프로그램, 영성신학 세미나, 영성수행 훈련원이 난립하지만, 도리혀 한국교회의 영성위기가 점증한다는 우려목소리가 교회내부나 일반사회로부터 쇄도한다.
 한국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개신교의 영성운동은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있고,  ‘세상과의 소통’ 이 막혀있고, ‘교회성장론의 방편’으로 전락되어 있다고 느낀다. 겉으로 나타난 종교현상만을 보면 예언, 방언, 신유, 부흥등이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오순절 사건의 핵심본질인 ‘차이와 다양성 안에서 일치와 교제’( the unitive communion in difference & diversity)가 발생하지 않는다.
  세계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이 그들의 방언을 할 때도,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나라 말로서 알아듣는 언어소통의 기적(행2:6-11),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공생의 기적(행2:44-45), 기쁨의 친교와 하나님 찬미모습을 보고 온 백성에게서 칭송을 듣는 경외감의 기적(행2:47), 주께서 구원 얻는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전도의 기적(행2:47)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사람들은 개신교의 성령운동 안에서 격정적 인간소음, 대화의 단절, 종교적 집단 이기심, 위협적 힘의 소유집단으로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경이 증언하는 본래적이고 순수하면서도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지속할 수 있었던 총체적 영성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2] 성서가 증언하는 영성운동의 다양성과 통전성

2.1. 신학적 인간학에서 본 영성(靈性)의 양극성(兩極性, dipolarity)과 통전문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en pneuma kai aletheia / in spirit and truth /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요4:24)고 성경은 말한다.
  인간학적으로 말해서 지성, 감성, 덕성은 흔히 인간다움의 특징으로서 학문적 담론에서 이의 없이 받아드려지며 그 의미가 대체로 명료한 개념으로 파악되어 진다. 지성(知性,intelligence)은 사람이 사물과 사태를  파악하고, 생각하고, 사리분별하는 리성의 합리적 분별능력이다. 감성(感性, sensibility)은 대상과 직면하여 사람이 희비애락과 미추(美醜)를 느끼고 반응하고 표상하는 능력이다. 덕성(德性, morality)은 도덕성의 줄임말로서 옳고 그름과 선악의 가치 판단을 내리면서 윤리적 의지를 발동시키는 실천이성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인간학에서 무엇이라고 규정하는가? 지성ㆍ감성ㆍ덕성에  첨가되는 제4의 인간학적 특성인가? 한글사전엔 ‘영성’은 ‘신령한 품성’이라고만 규정되어 있다. 4가지 단어가 모두  한자어 ‘성품성’(性) 글자를 공유한다. ‘생명의 마음 바탕’이라는 뜻이다. 사람다움 혹은 사람됨의 마음바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영성’을 ‘내재적 초월의식’으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접근(ontological approach)에 상응한다.
 20세기 가톨릭계의 대표적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에 의하면 ‘영성’이란 인간본성 안에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시고 계시는 은총의 사건으로 인해 가능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범주’(das ubernaturliches Existential) 이다. ‘초자연적 실존범주’ 라는 어려운 단어를 이찬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없이 인간의 본성 안에 스스로를 내어주고 계시며, 원천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그만큼 신적으로 고양되어 있다. 하느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론적이고 내적인 구성요소가 되는 까닭에, 인간은 초자연/초본성과 상통하는 실존론적 구조를 하고 있다. 이미 세계 초월적인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에 인간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세계 내재적 존재’이면서도 세계 안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넘어선다. 이찬수, 『 인간은 신의 암호』, 61쪽 (분도출판사,1999)

   
위 인용문에서 ‘넘어선다’는 공간적 은유를 ‘초월’(transcendence)이라고 부른다. 존재론적 신학, 칼 라너의 존재신비주의 신학전통에서는 ‘초월’에 양극성이 있다. ‘초월’은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으로서 이미 이루어져 있는 , 혹은 준비되어있는, 혹은 선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가능성이며 인간품성의 핵심본질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현실태로서 실현되기 위해서  인간의 실존적 결단과 신앙적 인식과 신앙고백적 참여가 요청된다.
  다시말해서, 영성(靈性)은 바탈로서 주어져 있으나 아직 현실태로 실현된 것은 아니며, 인간품성의 선험적 구성소라는 측면에서는 인간이 지닌 본성의 핵심이지만, 창조주 ‘하느님의 자기양여’(Selbstmitteilung Gottes)   칼 라너 著 (이봉우 譯), 『그리스도교 신앙입문』, 163쪽( 분도출판사, 1994)
   칼 라너의 신학에서 ‘하느님의 자기양여’라는 신학적 개념은 매우 중요한 그의 신학의 추춧돌이다.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의 자기양여’란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인간다움의 ‘존재를 부여하는’ 의미에서 , 하나님 스스로가인간존재구성의 가장 심오한 핵심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서의 은총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영성은 인간이 전유(專有,appropriation)한 소유물이 아니다. 성리학에서 인간본성 그 자체가 ‘虛靈不昧’(퇴계)한다고 말하거나 , 불교에서 인간의 불성 그 자체가  ‘性自神解’(원효)하고 ‘空寂靈知’(지눌) 하다고 강조할 때, 칼 라너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말하는 ‘선험적 초월론’과 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본다. 칼 라너에 있어서는 ‘선험적 초월론’이  ‘하느님의 자기양여’로서 은총의 사건이지만,  동양종교와 철학 일반에서는 초월을 가능케하는 것이 인간본성 그 자체라고 본다. 한자경 지음, 『한국철학의 맥』 , 400-401쪽 (이화여대출판부, 2008)
  인간학적 품성론에서 말하는 지성ㆍ감성ㆍ덕성에 추가되는 네 번째 인간품성이 바로  ‘영성’이라고 동일평면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영성이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다. 영성은 지성ㆍ감성ㆍ덕성을 통하여 발현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성은 ‘초월적 차원’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의하면 영성은 본질적으로 그 본질이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성 그 자체 안에 있는 본구적(本具的) 속성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발현되는 ‘초월체험’이다.  칼 라너의 존재론적 신학에서 강조하는바 처럼 인간성의 존재론적 구성소(構成素)라고 말 할만큼  내재적 ‘하나님의 씨’(요1서, 3:9)로서 인간임과 인감됨의 ‘바탈,바탕’으로서 이미 인간성 안에 현존하기 때문에 ‘생령으로서 생명체’ 사람은 언제나 영성적 존재이다.
 그러나, 영성이해에서 다른 한쪽의 극성을 주목해야 한다. 영성은 초월자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하는 ‘은혜와 진리의 빛’이라고 말할 때, 피조물 에게로 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없이 영성은 공허한 메마른 땅이다. 영성이해에서 ‘구원론적 접근’(salvational approach)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은 계시론적이고, 구원사건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를 지닌다. 개신교의 신학전통에서 본다면, 영성은 ‘오시는 하나님’ 곧 성령과의 관계성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자기초월체험이자 자기초월능력이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영성’을 역동적으로 발현시키고 활성화시키는 동인은 우리에게 ‘오시는 보혜사’요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원(出源)되시고  ‘보냄받는 영’이시다(요16:7-8). 바울-어거스틴-종교개혁자-신정통주의 신학자들로 이어지는 구원론적-계시론적 성령신학은 ‘영광과 충만한 능력’으로 오시는 하나님, 임재하시고 변화시키는 능동적 영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세는 ‘인간의 내재적 본바탈’을 성찰하는 내향적(內向的) 명상이나 좌선이 아니라, 위를 앙망하는 외향적(外向的) 대화기도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21세기 영성신학은   기독교 교회사 속에서 항상 긴장관계나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하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려 한다.  내재성/초월성, 내향적/외향적, 존재론적/ 구원론적, 자연신학적/계시신학적, 생태학적/구원사적 대립항(對立項)에 스스로 사로잡히는  ‘이분법적 신학구조’를 초극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분법적 신학구조’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발생하는 대립구조인 것이지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성령의 임재방식에서는 아무 문제가 않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이며, 가장 깊은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시며, 비우시고 낮아지심이 역설적이게도 충만이고 고양(高揚)이기 때문이다.  

2.2. 건강한 영성적 신앙의 3가지 왜곡(歪曲,distortion) 형태들

 지금까지 고찰한 잠정적 결론은 영성이란 다름아니라 건강한 신앙인의 ‘신령한 품성’ 이라고 간략하게 말 할 수 있겠다. 건강한 신앙인에게서 누구나 감지 할 수 있는 ‘우아하고 숭고한 인간품성’이다. 흔히, 좁은 의미로 이해되어온 것처럼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지닌자, 곧 방언ㆍ예언ㆍ신유ㆍ영통ㆍ영분별의 능력을 지닌자만 영성적 인간이 아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귀중한 것이고 그 체험자들을 깊은 신앙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들을 직접 지니거나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영성적 신앙인이 덜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전통에서 말하면, 신앙인은 곧 영성적 사람이며, 경건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항상 그의 존재함 자체가 은총의 선물이라는 감사, 하나님은 멀리계시지 않으며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17:27)는 존재론적 체인(體認), 유한성의 구조안에 제약받고 살면서도  거기에 갇히지 않고 해방된 기쁨ㆍ자유ㆍ황홀한 감정을 체험한다.  그 자유와 기쁨을 혼자 즐기지 않고 ‘사랑하는 자유’와 이웃사랑 계명을 자발성과 기쁨으로 준행하려는 용기를  갖는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은 궁극적 관심으로서 신앙은 통체적 인격행동이기 때문에, 지성적ㆍ감성적ㆍ도덕적 삶의 역동성에 깊이 관계되고, 그러한 다양한 인간적 삶을 기초 놓으며 초월하게 한다고 강조하였다.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 Part 1. 'What  Faith Is", pp.1-8.(Harper & Row, 1957)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정신적ㆍ영적 삶의 모든 깊이의 차원이지만, 정신적 ㆍ영적 삶의 어떤 특수기능이 아니다. 그와 같은 논리로서 인간의 영성은 성숙한 인간성의 통전성ㆍ전인성에 관련된 것이지 특수한 은사기능을 영성과 동일시 할 수 없다. 틸리히는 현대 계몽된 사회  속에서 ‘신앙’(faith)이란 어휘는 그 본래적 실재성과 현실성을  지탱하기 참 어려운 상황이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왜곡(歪曲, distortion)을 일으키곤 한다고 경고하였다. 위와 같은 책, part 2. 'What Faith Is Not", pp.30-40.

 본래적 의미에서의 신앙(the authentic faith)의 3가지 왜곡형태는 ‘知性的 歪曲’(the intellectualistic distortion), ‘意志的 歪曲’(the voluntaristic distortion), 그리고 ‘感性的 歪曲’(the emotional distort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신앙의 지성적 왜곡’이란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역동적이고 생명적이고 전인적 신앙관계가 살아지고, 그 대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신앙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신앙의 변질형태를 말한다. 건강하고 본래적인 신앙인의 표준이 정통교리와 신조 및 정통신학의 수용여부로써 판가름 난다고 착각하게 된다. 성경무오설ㆍ삼위일체론ㆍ 예수의 양성론ㆍ그리고  사도신경의 신조고백 항목을 철저하게 믿는 것이 곧 ‘신앙’을 담보한다고 착각한다. 흔히 ‘근본주의신학’에서는 ‘5가지 근본신조’를 참 신앙인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거기엔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판을 치게 된다.  
  ‘신앙의 의지적 왜곡’이란 인간이 초월적 계시에 접할 때 신앙인이 체험한  ‘神的 자유와 해방의 선물’에 자발적 응답으로서의   ‘계명준행의 자발성과 사랑하는 자유’가 도덕적 의무감이나 공로신앙형태로 변질되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 준수ㆍ성수주일ㆍ십일조생활ㆍ전도선교활동ㆍ성전건축ㆍ 목적 성취의 삶 등등이 모두 귀중한 것이지만, 참 신앙을 대신하거나 변질시키는 ‘경건한 공로주의’가 신앙을 대신하는 타락을 유도한다. 바리세적 경건주의를 예수께서 ‘外飾하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경계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앙의 감성적 왜곡’이란 인간이 거룩한 실재와 접할 때 체험하게 되는 원초적 감정으로서의 ‘황홀감과 경외감’이 살아져버리거나 변질되고, 그 대신 심리적  과잉흥분상태나 잠재의식적ㆍ 무의식적 심리에너지의 폭발과 카타르시스를 성령체험이라고  오인하는 경우를 말한다. 열광주의적 신앙집단과  광신적 사교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신앙체험을 통해서 인간 그 자신의 중심이 변화받아 ‘重生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이 발생하여 봉사하고 사랑하는 주체적 인격으로 결실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감성적 왜곡’이 일어난 표징이다.  
 우리가 여기서 폴 틸리히의 통찰에 경청하여  본래적인 참다운 의미에서 ‘신앙’이 3가지 왜곡형태로 변질되는 위험을 다시 성찰하는 이유는 올바른 ‘영성신학의 정립’이라는 과제를추구하는 경우에도 깊은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참 신앙인ㆍ참 경건한 사람ㆍ 참 영성적인 사람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 참 신앙이 3가지로 왜곡되는 위험에 직면하듯이, 통전적이고 성경적 의미에서의 바른영성이 오늘 한국교계에서 병든 모습으로 왜곡돼어있는 것이다. 구체적 진단을 다음장(제3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성경이 증언하는 통전적 바른영성은 어떤 모습인가 잠시 살펴보아야 하겠다.

2.3. 성경이 증언하는 통전적 영성의 7가지 스팩트럼

 영성은 사람의 혼백(魂魄)이 영(靈)이신 하나님의 접촉과 임재를 받아 영혼(靈魂)이 되는 창발적 사건의 연속에 대한 명칭이다. 인간은 본래 ‘흙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다. 흙 그 자체는 영성을 직접 창조해내거나 창발적(創發的) 사건으로 고양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쇠조각이나 쇠가루 자체는 자기(磁氣)의 성질이 없는 광물질이지만, 큰 말굽자석에 문지르거나, 남북극 전자기장에(電磁氣場)에 가까이 접근하면 자성(磁性)을 띄게되는 현상과 같다. 주 하나님께서 생명있는 자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고, 주 하나님이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시고 지면(地面)을 새롭게 하신다(시104:29-30)
 영성은 영혼이 발하는 무지개의 일곱가지 색깔처럼 다양성 안에서 통일성을 이룬다. 성경은 성령으로  인하여 창발하는 놀라운 사건들이 많고, 하나님의 영에 촉발받은 ‘영성적     사람들’이 하는 놀랍고 기이한 일들로 가득차지만 총괄적으로 압축하여 무지개의 일곱색상처럼  일곱가지 특징을 열거할 수 있다. 성령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요,  성령에 충만한 참된 영성적 지도자들이 지니는 공통적 특성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 성령의 사역(使役)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창발성’(創發性, emergence)의 특징을 지닌다.
  ‘창발성’ 이라는 단어는 문자적 의미그대로 ‘창조적 발생’이라는 중층적 복합단어의 성격을 지면서, 어떠한 사건이나 생명현상의 예측불능성, 자유로움, 창조성, 통제불능성,  유연성, 신묘성을 지니고 일어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성경말씀은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말씀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영성적 인간은 매우 역동적 창조성을 지니되 동시에 수용적 순명성(順命性)을 지닌다. 참된 영성적 사람은 영의 소리와 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을 그릇으로서 자각 할지언정, 그 영을  소유ㆍ조종ㆍ조작ㆍ강요ㆍ타협하는 대상으로서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해방’(解放, emancipation)과 ‘치유’(治癒, healing)사건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방은 물론 정치적  억압이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됨만이 아니라, 육체적ㆍ심리적ㆍ정신적ㆍ영적 일체의 눌림과 사로잡힘에서 자유롭게되는 사건을 말한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든다면, “주 야훼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61:1) 이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운동 초기에,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사역의 본질과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을 천명하시는 자리에서 택하여 읽은 성경구절이 바로 위에서 인용한 이사야서 61장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중요하다(눅4:16-20). 만약에 어느 영성가임을 자처하는  교회지도자가 인간 내면성의 ‘해방과 치유’에만 관심갖고 외면적인  그것을 소홀히 생각한다든지, 반대로 외면적 정치사회적 해방에만 관심을 갖고 내면적 ‘해방 과 치유’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통전적 영성이 아니다.
   셋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다양성 안에서 일치’(多樣性中一致, unity in diversity)를 촉매한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는 사람을 자유하게하고(요8:32), 주의 영이 계신 곳엔 자유함이 있음을 경험한다(고후3:17). 성령과 영성은 획일성이나 통제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방임이나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대표적 성구사례는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체험에서 나타난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은 말했지만, 여러지방에서 온 각종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언어로 듣게되어 ‘언어소통’이 일어났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행2:4-11).
 성령의 은사를 논하는 편지에서 사도바울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고전12:4-6)고 말하면서 성령의 사역과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으로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밝혔다.
   포스트모던 사회가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며, 문명ㆍ인종ㆍ언어ㆍ종교의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뜰 것을  강조했다. 정통적 기독교는 다양성 가운데서의 ‘통일성’과 ‘일치성’을 강조하려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획일주의와 전체주의에로 쉽게 전락하여 영성의 풍요로움이나 성령활동의 다채로움을 훼손 시켜왔다. 단적인 예를 들면,  교회공동체에서 성령의 임재체험을 ‘불체험’의 이미지로서만 강조한 나머지 ‘이슬비처럼’, ‘미세한 음성으로’, ‘미풍처럼’ 오시는 성령임재에 둔감한 교인들로 단조로워져 갔다. 성령의 활동공간을 기독교ㆍ기도원 ㆍ교회당ㆍ 부흥회에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해왔다.
넷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유기체적 몸의 형성, 새로운 공동체 조성, 즉 ‘연대성’(連帶性, solidarity) 강화라는 특징으로서 나타난다.
 영성은 서로를  통하게 한다. 서로 통하게 할뿐만 아니라 서로 새로운 관계로 연결시키며, 개체를 구성하는 삼투막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존재를 내어주고 받는다. 생명은 ‘개체이면서도 전체로서 하나’라는 높은 자각에 이른다. 초대교회 성령강림 체험후에 ‘원시공산사회’가 잠시동안 이지만  자발적으로 실현되었다(행2:44-470.
 영성적 공동체가 자폐증 집단처럼 폐쇄적이 될 수 없다. 모든 수도회공동체는, 그 수도회가 건강하게 살아있을 땐, 언제나 필요한 물질적 재화를 공동으로 생산하고, 탁발하고, 분배하는 생활공동체 였다. 영성적 사람은 개인의 내면적 지복직관(至福直觀)에만 관심을 가질수 없고, 지역사회공동체나 넓게는 전체 생명세계의 공동체 문제를 항상 동시에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공동체구원(사회구원) 없이는 개인구원이 최고단계에 실현되었을지라도 그의 개인구원이 부분적이고 잠정적 임을 영성적 인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생명세계에 엄존하는 고난(苦難,suffering)에 민감하며,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생명승화 내지 생명속량의 창조적 계기로서 삼는다.  
 종교란 현실 속에 엄존하는 고난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한다. 참 종교는 인생여정 속에서 누구나 부딪히는 고난의 문제를   면제시켜 준다고 , 당하지 않게 보장해준다고 사람들을 속이지 않는다. 그런 약속을 하는 종교는 사이비 종교의 특징이다.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간디/함석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있는 곳에 고난이 있게 마련이다.    고난은 여러형태로 체험된다. 예들면 질병의 고통,  사별의 슬픔, 빈곤의 곤궁, 악한자의 협박, 정의 때문에 받는 핍박 등등 그 사례를 모두 열거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성적 인간은 현실과 삶 속에 엄존하는 고난을 정면돌파하는 거룩한 싸움속에서 생명은 정화(淨化)되고 죄가 속량되고 선이 승리함을 경험하게 된다.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까지를 예민하게 느낀다(롬8:22). 영성적 사람은 고난없음을 탐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딤후 1:8). 육체의 고난을 받은자는 이미 죄를 그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때를 살게 된다(벧전 4:1-2). 영성적 인간임을  자처하면서, 이웃의 고통과 피조물의 고난에 둔감한 자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고통이나 고난을 겪고 앓는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온다. 하나님의 속성중 신비인 ‘긍휼의 속성’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을 동반한다(호11:8,사49:15).
여섯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서 이해하는 통찰적 지혜(洞察的 知慧, noetic wisdom)을 지니게 된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고전적인 저서 『종교체험의 다양성』의 ‘신비주의’ 연구 부문에서 신비적 마음상태의 4가지 특징으로서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ㆍ이해가능성(noetic quality)ㆍ일시성(transiency)ㆍ수동성(passivity)를 열거하였다. 윌리엄 제임스(김성민,정지련 공역),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 제16-17강, 신비주의. 412-413쪽(대한기독교서회, 1997)
그 4가지 특성중, 특히 ‘이해가능성’(noetic quality)이란 고등종교의 영성체험 혹은 신비체험에서 음미해야할 중요한 특징이다. 번역하기가 어려운 ‘notic quality'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영성가들의 신비체험 상태는 일상적인 인식론적 지식구조 곧 ‘주객구조’(主客構造,subject-object structure)가 초극된다. 그 때 인간의 이성은 황홀상태를 경험하고, 심하면 탈아적 상태에 몰입되거나 이성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흔히 무속종교나 신령성을 강조하는 저급종교에서 ‘신들린 상태’ 가 그런상태 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참다운 영성은 황홀상태에서도 이성은 고양되고 주객구조는 지양(止揚)되지만 무질서, 혼돈, 무인격 상태에로 전락되지 않는다.  말로서나 글로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깨달음으로 이해되는 영성’인 것이다.
 성경의 영성적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고전2:10) 성령에 그의 심령이 조명 받아서 사물의 깊이를  알게되고, 영적 통찰력으로서 깊은 지혜를 갖게된다(욥32:8). 바울은 그래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전14;19)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에서 참다운 영성은 반드시 ‘이해가능성질’(noetic quality)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요소가 없으면 한국교회의 성령운동, 영성운동은 감상적 열광주의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곧 신앙을 보장하지 않지만,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가 신령성의 표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도된 풍토가 바로 잡아져야 한다. 계시는 이성을 억압하지 않고 더욱 온전하게 하며, 초자연적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갱신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일곱째, 성령의 사역과 성령에 충만한 영성적 사람들의 특징은 만물을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ally)이며 공시적(共時的,synchronically)으로 동시에 보면서 우주만물의 유기적관계성(有機的 相互關係性, organic interrelationship)을 깊이 깨닫고 느끼며 만물을 사랑한다.
 기독교의 실재관은 공간개념보다 시간개념이 압도적이어서 사물을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시간적 과정으로 파악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래서 구원사신학이  발달하였다. 그 결과 사물의 시공간적(時空間的)ㆍ상호인과적(相互因果的)ㆍ상호순환적(相互循環的) 그물망조직(network)에 대한 통찰력이 불교보다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서양신학의 시간중심적 신학적 사유가 성경이 증언하는 창조계의 신비함과 경외감을 다 표현했다고 보아서는 않된다. 성경적 신자연신학(新自然神學)의 복권이 요청되는 시대에 돌입해 있다. 21세기 영성적 사람은  자연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성구들(시104),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는(호2:21-22) 상호 네트웍킹적 관계성에 주목하게 된다. 참다운 영성적 인간은 만물의 상호괸계성을 지성과 몸으로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3] 한국교회의 건강한 영성운동 회복을 위한 방향전환의 과제

 위에서(2.3)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다양한 영성적인 사람들의 참 모습들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특징 7가지를 ‘무지개 일곱색상의 은유’로서 고찰하였다.  성경이 증언하는바 대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명한 영성적 사람들이 ‘옛 사람ㆍ 혈육적 인간’에서  ‘새 사람ㆍ영성적 인간’에로 변화됨을 보았다.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유기적 집합체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에 합당한 열매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개신교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  신령한 영적공동체로서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고 ‘기독교 종교단체’로서 보여지고 있으며, 존경과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비판과 냉소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에서 시급하게 방향전환 해야 할 4가지 과제만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서 오늘 우리 강연의 결론을  대신하려고 한다.

3.1. 한국교회 영성은 ‘십자군의 영성’(spirituality of crusade)에서 돌이켜 ‘십자가의 영성’(spirituality of crucifixion)으로 복귀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한국사회의 급진적 경제성장과 도시화 및 산업화에 응답하면서, 함께 ‘교회성장과 축복신앙’을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생명공동체라고한다면 정상적 성장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며, 영육간에  참다운 성경적 축복을 누림도 또한 마땅한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복음전래 초기의 ‘아가페적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십자군적 영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십자군의 영성’(spirituality of crusade)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은유적 상징어 이다. 교회사에서 십자군전쟁이란 성도(聖都) 예루살렘및 예수의 묘소가 이슬람교 세력권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것을 용납못한 로마교황 우르바노 2세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중심이되어  시작하게되어 8차의 파병을 거듭한  장기군사원정 (1095-1270)이었다. ‘성지탈환’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지만,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는 셀쥬크 투르크 이슬람국가의 군사적 위협을 박멸하고, 상업적 무역업과 정치적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세속적 전쟁이었다. 8차례 걸친 처참한 전쟁은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인간집단 의 명예욕ㆍ권력욕ㆍ인간살육ㆍ마을파괴ㆍ타종교인 증오ㆍ황금욕망등이 지배한 더러운 교회사의 비극이었다.
 서방 로마교회의 교황권이 극치에 다다른 시기였기에, 신성로마제국 안의 여러 왕들은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하여 교황권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표시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며, 신도들에게 ‘성도 예루살렘에로의 순례길’을  복원해 준다는 경건한 종교심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행동은 낭만적 장난이 아니다. 군사전략은 강해야 하고, 공격적이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승리주의가 궁극목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 ‘이교도들의 박멸을 위하여’, ‘거룩한 교회의 안전보호를 위하여’등등 온갖 거룩한 명분을 동원하여  전쟁을 통한 인간살상을 합리화한 것이다.
 인간문명사에서 저지르게 될 ‘종교전쟁’을 예견하셨음일가?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 할 지니라.”(요4:21-24)고 말씀하셨다. ‘십자군의 영성’이란 그러한 교회사적 성찰을 바탕에 깔고서 사용하는 은유적 상징어이다. 곧 ‘십자군의 영성’이란 강함. 승리, 정복, 공격, 미움을 마음바탕에 깐 일체의 경건을 가장한  종교적 위선행태(僞善行態)를 의미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성’(spirituality of Cross) 이란 좀더 정확하게 그  의미를  표현하면  ‘십자가에 못박힘의 영성’(spirituality of crucifixion) 이다. 그것은 자기 비움과 낮춤 ㆍ자기희생ㆍ용서ㆍ대신죽음ㆍ고난받음ㆍ속량ㆍ속죄의 총괄적 상징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강한 인상은 ‘십자가의 영성’이 아니라 ‘십자군의 영성’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물량적 대형화 덫에 걸렸다. 종교집회는 거대한 실내 체육관이나  옥외 운동장이나 시민광장에서 열려야 직성이 풀린다.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낯선 것처럼 되어 버렸다. 교회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강한 집단, 힘있는 집단’이 되었다. 한국교회지도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결과’ 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아가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예수’를 발견하지 못한다. 상한마음 병든 몸을 껴안고 함께 울어주었던 한국교회 초기 성자들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 힘가진  한국 교회를 무시하진 못하지만, 존경하지도 않고 한국의 미래를 위한 창조적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경쟁하는 여러 종파들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마하트마 간디는 일찍이 갈파하기를 “자기희생이 없는 종교는 사회악이 될 뿐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십자군의 영성’에서 돌이켜 ‘십자가의 영성’을 다시 회복하느냐 못하느냐는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과제가 된다.

3.2. 한국교회의 영성은 감정적ㆍ지식적 영성(sentimental-intellectual spirituality)에서 감성적ㆍ지혜적 영성(emotional-sagacious spirituality) 에로  전환해 가야 한다.

 우리는  건강한 영성적 신앙이 왜곡되면 3가지 병든 영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2.2). 3가지 왜곡형태 중에서 한국교회가 특히 깊이 자기성찰을 해야할 왜곡형태는 ‘감정적 왜곡’과 ‘지식적 왜곡’이다. 한민족은 민족 심성이 격정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민족이다. 동시에 어떤 경우는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성을 드러낸다. 북방계열 수렵문화의 오랜 생활이 한민족에게 용맹과 날쌤과 격정성을 민족성으로서 형성시켰다. 동네골목마다 ‘노래방’이요, 응원열기는 ‘붉은 악마’의 열광적 일체감으로 나타나고, 감정의 풍부함은 ‘촛불집회’와 뛰어난  
천재적 예술인을 배출한다. 지난 40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서구사회가 400년에 걸쳐 진행해온 근대화ㆍ 산업화ㆍ민주화를 어느정도 성취해낼 수 있는 민족집단적 힘도 바로 한민족이 지닌 민족심성의 날쌤ㆍ풍부한 감정ㆍ격정적이라 할만큼의 열성적 성품품에서만 가능했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전해준 개신교의 유형적 성격이 ‘부흥회적 경건주의’ 신앙 형태와 ‘철저한 성서주의’였음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개신교 유형이 한민족의 감성적ㆍ열정적 기질과 창조적으로 융합하지 못할 때, 종교형태는 감성이 아닌 감정적  지배를 받고, 깊은 영혼의 지혜를 함양하지 않고  단순한 교리적 지식주입의 표층적 영성형태로 퇴행되고 만다. 오늘날 한국사회인들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특징은 지나친 감정주의 예배형식, 열광적 전도열, 반지성적 독단주의 교리신앙 등등을 특징으로 한다고 평가한다.
  종교집회가 어려운 학술용어나 심원한 지식을 요청하는 지식인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눈높이 설교’라는 목적아래 ‘쉽고, 평이하고, 재미있게’ 말씀전하는 것은 탓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씀전달이 코미디 쇼처럼 재미있어야 하고, 경건성이 지속되어야 할 예배가 예술공연장처럼 되어가는 일부 행태는 ‘예배의 위기’ 상태 , 기독교영성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의 갈릴리 ‘평지설교’가  누구나  알아듣게 쉽지만, 천박하게 들리거나 만담처럼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한국 T.V 종교방송 매체들(평화방송, 불교방송, 원음방송, 기독교방송)을 시민들은 종종 채널을 돌려가면서 비교한다. 시민들의 평가는 한국 개신교 영성수준은 너무나 감정적이고, 교리적이고,  반지성적이고, 비지혜적이라고 평가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3.3. 한국교회의 영성은 이원론적ㆍ배타적 영성(dualistic-exclusive spirituality)에서 전일론적ㆍ포괄적 영성(wholistic-inclusive spirituality)에로 성숙해가야 한다.

한국개신교가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기독교 2,000년의 신학적 전통 안에 내포된 복음적 진리를 지켜 보존하려는 동기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특정시대 특정 문화 -사회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신학적 패러다임을 ‘복음 그 자체의진리’와 동일시 하려는 무리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 세속주의 시대사조나  세계관의 변화속에서 자기를 방어하려는 ‘방어기제’는  쉽사리 독단적ㆍ독선적ㆍ공격적 자세로서 나타난다.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는 한국기독교가 오랜전통의 ‘이원론적 실재관’을 고수하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선도하지 못한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적 경험과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현실성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차이와 다름’을 ‘위협과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원론적 실재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고전적 이원론은 ‘자연과 초자연의 이원론’ 이다. 하나님의 ‘통일적인 피조세계’를 ‘자연과 초자연’으로 이분화 하고, 하나님ㆍ하늘나라ㆍ계시ㆍ영혼구원ㆍ영성등은 ‘초자연’ 세계와 관련된 것으로 강조한다. 이에 대조되는 피조물ㆍ땅의 나라ㆍ리성ㆍ몸의 구원ㆍ물성등은 ‘자연’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가치론적으로 항상 이차적이고, 방편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덧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현실적으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과반수 이상은 계몽주의시대 이후, 보편적 세계관으로 정립된 자연과학적 진화론과 역사과학적 경전비평연구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신구약 안에 전개되는 하나님체험과 구원론을 ‘성경의 통일성’ 이라는 교리적 전제아래에서 구약족장시대와 예언자 시대를 동일 평면상에 놓아버린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유일신 신앙’(motheistic faith)이 모세종교시대의 배타적 ‘일신론  신앙’(henotheistic faith)과 혼잡하게 얽혀버린다. 가나안 입주시대에 투쟁했던 바알신앙과 야훼신앙과의 상호배타적 대결구조를 비그스도교적 세계종교들(불교,유교, 이슬람교, 힌두교)과 기독교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시켜서 ‘종교적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한 분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도다”(엡4:6) 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특정문화의 신도 아니고 특정종교의 신도 아니고, 특정 경전의 신도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해석학적 맹인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배타적 광신주의 신앙’을 ‘독실한 정통신앙’처럼 혼동시켜 버린다.
  이원론의 폐기가 곧바로 창조세계의 시공간적으로 동질ㆍ 균질 ㆍ 평준화로 퇴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는 존재질서의 차원(次元)이 다른 다양한 피조물적 질서와 현실이 복합적(複合的)이고 중층적(重層的)으로 존재하면서, 그것들은 깊이서로 연관되어 있고 통일되어 있다. 땅의 구원없이 하늘만의 구원은 없다. ‘하늘’은 구원사역의 시작점 이지만 땅은 그것의 결승점이다.

3.4. 한국 교회의 영성은 ‘인간중심적 영성’(humancentric spirituality)에서 ‘생태중심적 영성’(ecocentric spirituality)에로 전환시켜 가야 한다.

지구환경오염과  지구생태계의 파괴로 인하여 ‘지구생명체계’와 ‘지구기후 정상상태’가 심각한 위기에 도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시대 종교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역할은 다름아닌 생태학적 윤리와 생태학적 영성을 전인류에게 함양시키는 과제이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창조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 받았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피조물중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 ‘특별한 대우나 특권’을 허락받았다는 의미로서 오해되어 왔다.  ‘생태학적 영성’이란 다음 네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인간이  땅의 짐승들과 함께 동일한 여섯째날에 창조 되었다고 말하는  창세기의   ‘신학적 인간학’의 근본명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생태학적 영성은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다는 철저한 자각에서 부터 시작 한다. 지구의 생물을  구성하는 모든 유기체 구성원소와 인간 몸을 구성하는 구성소 사이엔 친화성(親和性)과 치환성(置換性)이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아 ‘만물동체’(萬物同體)임을 자각하는 영성이다.  
 둘째, 인간의 생존자체는 전체 지구의 환경조건과 생태학적 그물망에 온전히 의존되어 있는 생태계의 한 매듭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영성이다. 이점에서 21세기 ‘생태학적 윤리의식’의 은유적 패러다임은 ‘정지기 모델’을 넘어서서 ‘중추신경모델’(장회익)에로 반드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적 신앙은 생태학적 실재관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을 자연 그 자체에로 환원시켜버리는 낭만적 자연주의를 또한 경계한다.
  셋째,  생태학적 영성은 대자연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회복하여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에  응답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생태학적 영성은 필연적으로 ‘과학자ㆍ예언자ㆍ예술인’의 마인드를 함께 아우르는 영성을 향해 성숙해가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태학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새로운 인류의 몸’의 심장이고 두뇌이며 중심으로서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영광의 비밀’(골1:27)이라는 것을 감지하는 영성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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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테드 피터스 엮음, 김흡영 배국원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옮김,
『과학과 종교』(동연,2002)
17. 이정배 지음, 『켄 윌버의 신학』,(시와 진실, 2008)
18.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 2,000)
19. Karl Barth, Church Dogmatics.III/2, The Doctrine of Creation,(T.&T. Clark,         1960)
20.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Harper & Row, 1957)
21. Pierre Teilhard de Chardin, Christianity and Evolution,(A Harvest Book, 1971)
22. Richard Niebuhr,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Harper & Row, 1960)
23. Matthew Fox, Passion for Creation: The Earth-Honoring Spirituality of Meister Eckhart,(Inner Traditions,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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