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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학이 본 현실 기독교 진단과 그 개혁의 길(제1회 생명과 평화마당, 기사연,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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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학이 본 현실 기독교 진단과 그 개혁의 길(제1회 '생명과 평화마당', 기사연, 2011.2.8)



[생명과 평화 한마당, 2011년 2월8일, 기사연 이제홀]
   
지구촌과 한국사회 병든 현실을 치유하기 위한 ‘생명과 평화’ 담론
    - 진보적 기독교 신학에서 본  사회와 교회의 근본적 혁신과제-


                                                               김경재 (한신대명예교수,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1. 왜 ‘생명과 평화’라는 주제가 진보적 한국 기독교신학및 교회운동의 중심화두가 되어야   하는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고전적 기초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두가지 과제가 언급되곤 했다. 첫째, 신학은 기독교 교회공동체가 신앙하고 증언하는 진리내용을 성경과 교회 신앙전통의 빛에 인도받아 체계적으로 복음내용을 진술하는 과제를 지닌다. 둘째, 그렇게 이해되고 진술된 기독교의 복음적 진리내용이 오늘의 삶 속에서 의미를 갖고 역동적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하여,  현재적 삶의 상황관계 속에서 ‘복음적 진리 내용’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적 해석학의 과제를 지닌다.
  위와 같은 보편적 신학의 과제에 대한 규정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한국교회, 한국사회, 동아시아 문명, 그리고 넓게는 지구촌 사회를 직시할 때, 다음같은 심상치 않는 괴리감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i) 신학운동이란 신학자들의 개인활동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자신의 선교내용을 주체적으로 검증하여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교회주체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자 써클’과 ‘목회자 써클’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지 오래다. 상호불신관계를 넘어서, 심각한 상호갈등 관계 속에 빠져있어서 한국 기독교의 위기의 발생원인중 하나가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의 종교지식 홍수 속에서 지식인 평신도들은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계몽시대 이후의 신학계 지식창고’를 검증없이 오남용하여  주관적 ‘개인 기독교 신앙’을 만들어가고 있다. 다른한편,  대중적 신도들은 ‘의심의 해석학’ 자체를  불신앙이나 배교(背敎)로 간주하도록 교육받아왔기에, 시대에 동떨어져 있는 전통적 ‘교리신앙’에 안주하면서 ‘불편한 진실’을 애써 무시하는 신앙을 견지하고 방어벽을 강화하고 있다.
 (ii)  주류 문명사회에서 ‘근현대 이후시대’ (post-modern era)에로 역사가 전환함에 따라, 거의 2천년동안 불변적인 복음진리 체계와 진술내용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현대인의 삶속에 ‘의미연관적 정합성’을 갖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다. 정통적 신론,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등의 새로운 재해석이 요청되고 있다. 유일무이하다고 특권을 누려왔던 ‘기독교’(Christianity)라는 역사적 계시종교도 지구촌 종교문명의 다양성 속에서 ‘종교의 시장 상황’에 노출 당하게 되었다. 이웃종교의 진리체험과 인간해방의 기능에 대하여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이 약화되거나 흐려지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화 성숙되어가는 역동적 자기정체성 확립을  요청받게 되었다.
 (iii) 정보화 시대와 정치경제적 네트워킹 구조 속에서 지구촌 시대가 이미 개막된지 오랜데도 불구하고,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들의 망상이 시민사회의 성숙을 저해하고,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면서 ‘국가안위’와 ‘이념수호’라는 명분아래 반생명ㆍ반평화적 행동을 강행ㆍ강요하고 있다. 인간다운 인류사회와 시민사회의 구현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패배주의적 비관주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iv)  현대 지구촌사회의 우상은 대기업의 자본주의 생산소비체계, 정치권력과 무기산업의 결합체계, 지식층과 언론의 권력추종적 종속체계라는 삼정(三鼎)으로 세워져 지탱되고 있다. 경제권력, 정치권력, 문화권력이 시민사회의 생명분출을 옥죄이고, 종교를 어용사제집단으로 길들이고, 기독교는 앞에서 말한 현대판 우상들을 지탱하는 댓가로서 종교왕국의 ‘거짓평화’를 누리거나 ‘반생명집단’의 나팔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서는 형국이다.
(v)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로서 대두된 사안은, 지구행성이 이상기온과 생태계ㆍ자연질서파괴라는 대재앙 앞에서 ‘생명종(生命種)의 종언’이라는 묵시론적 경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심있는 학자들의 집단지성과 권위있는 세계통계자료청의 보고서가 생태학적 위기와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누차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인의 대처는 느리고 인류의 집단이기심은 기독교가 강조해왔던 ‘원죄적 이기심과 탐심’을 극복하지 못하여 낭떨어지 기차괘도를 달리고 있다.

  우리가 이미 간파하고 있는 위의 다섯가지 어두운 현실들은, 깨어있으려는 이 시대의 기독자들로 하여금 ‘생명과 평화’라는 화두를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사즉생(死卽生)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대면해야 할 것임을 자각하고 선포한다. ‘생명과 평화’는 교회의 성장과제보다도 우선적 이고 기독교선교 과제보다도 시급하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생명과 평화’ 없이는 그 모든 선교노력이 헛되게 되고 도리혀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앞선 5가지 상황이 심각하고 극복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복음전파를 통해서 개인을 ‘회개’시키고 ‘중생’한 사람들을 ‘사회’에 많이 내 보내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론에서 밝혀지겠지만 현대학문은 ‘개인윤리와 집단윤리’, ‘개인변화와 사회구조변화’, ‘ 심령도덕적 회개와 정치경제적 회개’, ‘인류종(種)의 생존과 생태계의 생존’등 상관관계 속의 어느것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선적 이라는 발상과  그런 사고구조가 심히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모든 불의와 반생명적 현실의 근본원인 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서 다음같은 주님의 말씀과 사도의 권면을 귀를 크게 열고서 특별히 경청한다.

  - 도둑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

  _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_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

2. ‘생명과 평화 마당’이 말하는 통전적 생명이해, 신학 근본주제의 혁명, 그리고 정의문제


 20세기 2차대전의 종전 직전의 해 (1944), 지금부터 66년전 세계 학계는 ‘생명담론’에서 이정표가 될 책 한권이 세계적 물리학자에 의해 충격적 도전으로 나타났는데 슈레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책이다. E. Schroedinger, What is Life? (Cambridge: Cambridge Uiversity, 1944)
이 한권의 책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학문적 담론을 종교ㆍ철학ㆍ심리학을 중심한 인문학이나 생물학ㆍ유전학ㆍ의학을 중심한 생명과학계의 울타리를 넘어 물리화학계를 중심한 기초자연 과학계가 참여하는 학제간 연구주제의  중심 화두로 전환시켰다. 슈레딩거의 문제작 이후, 생명담론의 다양한 전개에 대하여 다음책을 참조. 마이클 머피ㆍ루크 오닐 지음(이상헌ㆍ이한음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후 50년」,(지호,2003)
18세기 계몽시대정신의 완성자이자 비판자였던 칸트가 모든 철학적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착된다고 말한 것이 20세에 들어와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로 달라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순간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도되고, 그 질문은 전통적으로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연구로서만 해명되지 않고 자연과학 전체가 함께 달려들어서 연구해야 그 정체와 구조적 관계의 복잡성과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는  모든 학문의 총괄주제임이 확인된 셈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정신성과 영성과 윤리적 책임성과 정의론을 묻고 논하려면 은 곧바로 생물과 인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그리고 물질과 생명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연구해야만 풀린다. 신학, 철학, 정치사회학, 심리학, 생물학, 물리화학, 지구생태학은 이제 각자 따로 떨어져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자연과학자의 관점을 바탕에 깔고, 인문학과 사회학의 간학문적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에 몰두하여온 장회익교수는 최근의 그의 저서 「물질ㆍ생명ㆍ인간」에서 다음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온생명’ 안에서 출현한 것이 분명하며, 인간의 문명 또한 ‘온생명’ 안에 나타난  ‘온생명’의 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점에서 ‘온생명’을 굳이 사람의 몸에 비유해 본다면, 인간의 문명 이라는 것은  사람의 두뇌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이 지닌 지적 기능은 불가피하게 개별인간들의 지적 활동에 기반을 두지만,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초개인적구조를 통해 정보와 지적자산을 축적, 전수해 가고 있다.... 우리 ‘온생명’은 바야흐로 ‘온생명’자체로서의 자의식을 지닌 진정한  주체로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실로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지 40억년 만에 처음으로 전체 ‘온생명’으로의 통합적 의식을 지닌 존재로 깨어나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이 ‘온생명’이 무의식적 생존이라고 하는 긴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의 책임과 판단 아래, 의식의 차원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해 나갈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다.  장회익, 「물질, 생명, 인간」, 173-174쪽 (돌베개, 2009)

   
다소 긴문장을 인용했지만, 위 장회익의 통찰은 슈레딩거의 문제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후, 70여년동안 세계 학계가 생명현상을 연구해온 여러 학문분야의 업적들, 예들면 분자자생물학의 유전메카니즘 연구, 뇌신경학의 연구, 인공지성연구,  생태학의 연구, 지질기상학 연구, 정치사회학의 거시경제연구, 철학과 종교학의 성스러운 지혜통찰을 모두 아우른 집단지성 결과물로서의 결론적 요약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복잡다양하고 심오한 현대 학계의 생명담론의 구체적 동향이나 그 내용을 소개할 능력도 지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오늘 지구촌과 한국사회에서 생명이 위기에 거듭 봉착하며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못하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하여 ‘현대 집단지성’이 밝혀내 생명담론의 핵심적 통찰을 요약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근본이 바로서면 길이 생긴다”(本立而道生) 는 성현의 지혜를 들어야 한다. 당장 현장에서는 지엽적-국지적 해결방안도 필요하고 대증요법적 대응도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나 신학은 근본 원인진단과 바른 살길을 위해 실재관및 생명관의 일대 혁신과 ‘사회집단적 회개운동’을 선도하는 대중교화적 , 교육적 사명을 담당해야하는 독특한 위치와 임무를 지닌다. 현대 생명담론의 핵심적 통찰의 빛에 인도받아 오늘 우리들의 주제 ‘생명평화마당’의 대화 내용을 세가지 테제로 집약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태제 1.  생명은 유기체적 관계 속에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생명’이다.

  떼이야를 샤르뎅은 지구의 진화적 발전단계를 3단계로 크게 대별하여 지질권(geosphere), 생명권(biosphere), 정신권(noosphere)이라고 말했다. 이 때 말하는 ‘생명권’란 지구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생명화된 물질의 실재층위’를 말한다. 바다속의 플랑크톤으로부터 지표위의 동식물, 그리고 공중을 날고 있는 조류를 모두 포함하는 생명세계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출현함으로서 ‘정신권’(noosphere)이 형성되고 있다. 인간문화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 의미세계도 거기에 포함한다.
 장회익교수는 떼이야르  샤르뎅이 세단계 차원으로 대별한 지질권, 생명권, 정신권을 하나로 통전시키고, 그것을 자유에너지의 원천인 태양과의 관계성을 포함하여 ‘온생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온생명’은  ‘생명권’과 ‘정신권’보다 더 포괄적인 ‘전체로서 자생적 생명단위’이다. ‘온생명’은 그 안에 수많은 ‘개체생명’을 포괄하고 있으며, ‘개체생명’은 ‘온생명’에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생명그물망의 총체인 ‘보생명’(補生命)과의 관계속에서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장회익, 「삶과 온생명」, 274-275쪽 (솔, 1998)
지구상에서 현실적 생명현상은 서로 뗄수 없는 긴밀한 상자(相資)ㆍ상의(相依 )ㆍ상생(相生)의 ‘시공연계적 정합체계’ 안에서 존재한다 장회익, 「물질 생명 인간」, 114-118쪽.
.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하나이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31쪽.(한길사, 1983)
라는 함석헌의 종교적 직관은 과학적 근거로서 더욱 정당화된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실재에 대한,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현대 진화론적이고도 생태학적 견해에 따르면, 생명은 상호관계성과 의존성만이 아니라, 상호 내주적이며 되먹임 사슬구조 안에서 ‘생태학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샐리 맥페이그(김준우역), 「기후변화와 신학의 재구성」, 111-122쪽,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생명은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인 것이란 점이다. 개별적인 것은 전체적인 구조적 관계 안에서만 존재 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그렇다. 특히 ‘온생명’ 으로서 ‘전일적 생명’이 이제 막 깨어나서 자기를 의식해가는 진화문명사적 첫단계 이지만, 그 ‘온생명의 집합적 자기의식’도 개인의 주체적 자기의식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함석헌의 은유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개체적 생명)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온생명으로서 하나)는 숲이다. 씨를 매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함석헌, 위와 같은 책, 27-28쪽.
개체와 전체를 동시에 살리는 생명철학만이 진실한 것이다. 한민족 한반도 남쪽의 시장경제중심의 정치사회구조의 생명론은 무한경쟁을 전제로한 개체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북쪽의 북한식 사회주의 집단체제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과 권리가 억압되고 전체인민의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킨다. 이 두 모습은 건강한 생명질서에 어긋나는 잘못된 질서요 삶의 방식이다.
  위의 온생명론적 관점에서 생태학적 통일성과 상호관계성을 깊이 음미할 때,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모든형태의 정치철학에서 자유권ㆍ 선택권ㆍ 자기생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온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시장정치경제 철학’이 잘못이라는 것이 명백해 진다. 동시에 실재와 생명이 지닌 상호관계성만을 강조하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모토로하는 공리주의적 정치철학을  밑바탕에 깔고 사회의 양극화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타당한 생명현상으로 보는 보수적 기득권자들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인간적 삶의 연대성과 공동체적 생명의 상호공속성에 어긋나는 동물적 사유형태임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09)는 바로 이문제를 다루는 가운데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구한다. 서구학자들의 한계는 근대이후 서구사상사를 지배해온 개인적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과 독립성에 대한  깊고도 광범위한 관념 때문에, ‘생태학적 통일성’에 입각한 ‘전일적 생명론’ 적 사유전환에 어려움을 겪는다.  
   

테제2. 전통적 신관과 인간관의 혁명적 변화없이 세계관의 변화는 불가능하며, 세계관의 변화없이 새로운 문명의 탄생과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전환은 불가능하다. 전통적 ‘청직이 모델’은  ‘중추신경계 모델’(장회익)에로 바꿔져야하고,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하나의 그러나 다차원적 창조세계관’에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명과 평화 마당’에서 둘째로 생각해야 할 주제는 전통적 하나님이해와 인간이해를  새롭게 하는 과제이다.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서만 생각하는 ‘초월적 하나님이해’를 버리고 시편과 사도행전과 에베소서가 전하는 복음적-히브리적 사유체계에로 되돌아가야 한다(행17:22-27, 엡4:4-6, 시104: 24-34). 인간창조설화에서 ‘하나님의 형상론’에 기초한 인간의 특별한 지위부여는 성서가 말하려는 전체맥락에서 바르게 재해석되고 재정위 되어야 한다.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증언은 오늘 한국 주류 기독교의 ‘타계지향적, 신앙공로 지향적, 교회당 건물지향적 선교신학’과는 전혀다른 것임을 새삼스럽게 인지해야 한다.  바울이 증언하는 하나님론은 3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 이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의 주제시자 충만자이시니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려는 분이 아니시다. 셋째,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요,  멀리 계시지 아니하신 이요, 우리는 그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행17:24-28).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후기 목회서신으로 분류되는  에베소서에서도 지금 한국 주류기독교가 강조하는 반진화론적(反進化論的, anti-evolutionary), 반범재신론적(反凡在神論的, anti-panentheistic), 반내재적(反內在的, anti-immanent) 하나님 이해를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도다”(엡4:6).  ‘만물 위에, 만을 통하여, 만물 안에’( ho epi panton kai dia panton kai en pasin/ who is above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라고 표현된 공식구(公式句)에 대한 주석학적 해설은 사실 서구문명의 기독교 신학사에서 제대로 이뤄진적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경전의 해석학적 이해담론은  이해자(해석자)의 세계 삶 경험의 전이해(前理解)와 해석학적 순환구조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전해석에서 문자주의적 무오류론을 고수한다거나, 세상 학계에서 이미 상식으로 되어있는 생물과 만물의 진화론적 생성과정을 애써 부정하려는 보수적 ‘창조과학회’ 신념을 고수 하는 한 위의 세마디 공식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은 문이 닫혀지게 된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대의 ‘생명과 평화마당’을 열어가려는 진보적 한국신학 젊은 주류세력들은 궁색하기  이를데없는 지난날의 전통기독교의  문자경전주의와 교리주의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서  성경이 증언하는  놀랍고도 위대한  하나님 신앙을 새롭게 재정립시켜야 한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은  공간적 초월세계에 좌정하신 제우스‘와 같은 분을 말하지 않는다. 우주 대자연과 지구의 온생명체 안에 창조주의 영광이 임재하고 드러나고 있다. 전통신학의 계약전승에서는 “역사적 사건은  신의 현존방식”이었다. 이제 ‘창조신학’이 관점에서 눈을 뜨고 새롭게 보면 “만물은 신의 현존방식이다” 이다. 토마스 베리 & 토마스 클락대화(김준우 역),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에로」, 43쪽(에코조익, 2006)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 이란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신령스런 존재자들을 모두 넘어서계시는 ‘규정불가능한 신비이신 주 하나님의 신성’을 공간적 은유로서 표현한 것이다.
‘만유를 통하여 계신 하나님’ 은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한글성경에 번역되었다. 접촉사 ‘통하여’(dia(헬), through)는 여러 가지 뉴앙스를 지닌 전치사이다. <...을 관통하여, 꿰뚫어, 통과하여, ..에서 끝까지, ...을 거쳐서 , ...때문에>등 다양항  의미를   매개하는 접촉사이다.  우리시대는  창조주 하나님이 시공간을 통하여, 진화과정을 통하여, 임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 은 전통기독교가 신관의 범신론화(汎神論化)를 두려워하여 신경과민적으로 기피하고 경계하던 표현이다. 그러나, 성경은 ‘만유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매우 역설적이게도 ‘만유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이라고 체험해왔으며 고백해 왔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하여 그 체험적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서는  칼 라너가 말한바대로 “미래에서 기독교인은 신비가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In the future Christian will be  mystics, or they will not be  anything)" Paul Knitter, 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 p. 15( Oxford: Oneworld Publication,2009)
.  칼 라너가 말하는  ‘신비가’란 주로 하나님이 인간 마음안에 내재적 임재를 경험는 것,  만물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영성적 인간들을 말한다.
 만물과 생명가운데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인간이 누구인가를   표현한 구약 시편기자의 노래(시편 104편)는  생태학적 신관과 인간학의 성서적 전거로서 흔히 인용된다. “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29-30).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가 그대로 반영되는 대자연의 생태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동안,  서구신학전통의 신학담론이 지나치게  구원사중심의 ‘역사범주’에 매몰되어어 왔음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반성한다.
  지난 시대까지 기독교 신학담론의 맥락는 우주존재론적(cosmo-ontological)맥락, 사회정치적(socio-political) 맥락, 정신심령적(psychic-spiritual) 맥락으로 대별되는 세가지 범주에서 이뤄져왔다. 그중에서도 개신교 신학써클의  진보계열은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해방신학적 동기에 경도되었고, 그에 대조하여 보수적 계열은 ‘정신 심령적 맥락’에서 개인영혼구원과 치유에 경도되어 왔다.
  이제 새시대의 ‘생명과 평화 마당’의 신학적 담론은  세가지 맥락이 통전되는 신학을 수행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일차적으로 시급한 것은  ‘우주존재론적 신학 담론’의 복권이다.  다름 말로하면, 성서안에 흐르는 두 전승 곧 건강한 생명충만을 모티브로 강조하는 ‘창조전승’과 해방과 정의실현을 모티브로 강조하는 ‘계약전승’ 중에서, 상대적으로 경시되거나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던 ‘창조전승’의 신학적 담론의 활성화가 시급히 요청된다는 말이다.
   만약 신학담론의 맥락구조가 전통적인 구원사 일변도나 해방신학동기 일변도에서 벗어나서 좀더 통전적 신학담론이 필요로하는 맥락을 생각할 때, 현대 기독교 교회안에서 ‘생태학적 위기’극복을 위한 신학적 인간학의 패러다임 특히 ‘창조세계 안에서  청지기 직분론’의 은유적 모델은 극복되고 새로운 모델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의 세가지 이다.  
  첫째, ‘청직이모델’은 고대및 봉건적 신분사회라는 사회적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민주적이고 참여적이며 디지털화한 현대문명사회에 설득력이 없다. 과수원 땅주인과 관리인(청지기)과 그 외 땅과 동식물과 임금노동자들, 그러한  3분적 신분차별이  오늘날 밝혀진 생명의 ‘생태학적 통일성’에 배치된다. 요셉이야기에서 보면 애굽땅 주인 파라호와 관리총리 요셉과 나머지 백성과 짐승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공동운명체가 아니다.
  둘째, ‘청직이모델’은 주인과 관리인(청직이)과 관리대상물, 그들 3자간의 관계개념이 ‘소유와 지배’의 관계이지 ‘소통과 동고동락’하는 유기체적 관계가 아니다.  생태자연으로서 대지와 동식물은 수익을 극대화하는 ‘계량적 대상으로서의 물품’으로 간주될뿐이지 , 그들의 고통과 신음은 고사하고 ‘존재적 가치’는 애초부터 무시된다. 토양, 강과 바다, 농축산물 생산과정등이 모두 경제적 이익관계로서 계량화 되고 만다. 호세아가 말하는 야훼와 하늘과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이스르엘이 상호 응답하는 구조는 사라지고만다.(호2:21-22)
 셋째, ‘청지기 모델’은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그리고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유기체적 생태통일성 안에서 가능한 통전적 사유지평이 설저리가 없게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이던지 공리주의적 정의론이 득세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이 받아야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그리스 폴리스 도시국가를 삶의 맥락으로 한 이 철학자의 정의론의 문제점은 한 사회구조 안에서 사람들의 신분과 지위를 누가 규정하는가? 기득권이,  전통이, 관습이, 경쟁관계 결과로서, 능력에 따라서 등등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청지기모델의 생태학적 윤리관점에서보면, 불의한 강한자들의 독식체계를 피할수 없게되어, 강한자나 약한자가 모두 비인간화 된다. 공리주의적 정의론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는 주변부로 내몰린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희생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장회익이 제시한 ‘중추신경모델’은 그런 점에서 ‘청직이 모델’의 단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은유적 모델이 된다. 중추신경계는 몸의 일부 기관이면서, 몸의 모든 다른 기관들의 도움과 영양 산소공급 없이는 한시도 존재 할 수 없다. 신체기관중 담낭이나 비록 똥을 담고있는 큰창자일지라도 그것들의 고장이나 죽음은 동시에 중추신경계의 죽음을 초래한다. 인간 몸에서 중추신경계는  말초신경기관이 보내오는 감각정보를 종합판단하고, 몸의 메카니즘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운동과 감정을 조정 명령하면서 반성적 자기성찰능력을 갖춘 유일한  생리적 기관이다. 그렇지만, 중추신경계는 기타 다른 어느 신체기관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일 순 없다. 기능적으론 특수하고 우월하지만, 중추신경계는 음식물을 씹어삼키는 식도에 고장이 나서 영양 흡수가  불가능 할 때, 함께 죽는다. 인류종(人類種)이 온생명 혹은 생태계 안에서 갖는 위치와 기능이, 인간 몸을 은유로 해서 볼 때, 중추신경계의 위상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류종의 지나친 탐욕과 무한성장의 경제정치 철학은 결국 생태계 안에서 암세포덩어리로서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인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한 소비쾌락에 병든 물질적 탐욕, 그것을 추동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계의 경쟁구조와 자연파괴와 수탈, 그리고 그러한 기득권자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보호하는 군산(軍産)산업체계와 신무기  개발판매 체제의 3대 표징으로 나타난다.
 현대국가는 ‘기업국가’로 변신되었으며, 끊임없는 국지전쟁과 군사도발은 냉전시대처럼 정치적 이념대결 이거나 중세기의 종교분쟁이 원인이 아니라,  자연자원확보와 그 독점지배및 생산된 상품의 소비시장 확장을 위한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가원수의 임무가 통치영역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인간다운 삶과 자유ㆍ정의ㆍ평등과 같은 덕을 고양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역활’이 아니라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새일스맨’으로서 경제적 교역증진과 생산자원및 시장확장같은 역할을 한다.
 현대국가는 ‘국민국가’도 아니요 ‘인류공동체실현의 단위국가’도 아닌 오로지  ‘기업국가’로 전락되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개인주의적 인간들의 소비지향적 탐욕, 시장경제체계의 무한성장 경쟁, 기존세계질서를 지키고 강화하는 군사주의 강화는, 개인과 인류공동체가 갈망하는 ‘평화’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평화없는 세계를 지속시키고 도리혀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고 있다.

테제3. 성경이 증언하는 평화는 ‘샬롬’이다. 샬롬은 평강이다. 평강은 평화와 건강의 통전적 개념이다. 생명이 원하는 것은 평강으로서 평화인데, 인간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조물 자연과의 관계에서, 동료인간과의 관계에서 평화롭고 건강한 관계를 누리기 원한다. ‘로마의 평화’와 본질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는 자유ㆍ정의ㆍ평등을 삼각축으로 하는 통전적 평화이다. ‘생명과 평화 담론’에서 정의 문제는 비켜갈 수 없는 핵심문제이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함”(요10:10)이라고 선포하셨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생명’을 영적생명, 정신심리적 생명, 신체적 생명등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다. 생명은 통전적 현상이다. 인류철학사와 종교사에서는 항상 이원론적 도식이 우리들의 진실파악을 혼란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신/신체, 의식/물질, 본질/현상, 실체/양태, 관념/경험 등등의 이분법적 도식이 그것이다.
  기독교 신학도 실재의 참 모습 파악에 실패한 역사였다. 신학사는 언제나 정신, 영혼, 본질, 실체, 관념에 우선권을 주어왔다. 그결과, 본래 갈릴리복음은 점차로 변질되어 갔다. 구원개념자체가 영혼구원, 본질(천상)세계로의 귀환, 창조세계 대지와 분리된 신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다.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신학도 구원개념 자체가 정반대의 다른 한축 곧 신체, 물질, 정치현실, 경험에 자폐증 환자처럼 국한되어 ‘초월의 차원’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부터 세계의 석학들과 지혜있는 자들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실재관을  취해야한다고 강조해왔다. 스피노자, 화잇트헤드, 떼이야르 샤르뎅, 폴 틸리히, 쟌 콥, 샐리 맥페이그, 함석헌, 장회익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들의 존재론 혹은 실재관을 데카르트의 물질/정신의 이원론에 대비하여 ‘일원양면론’(一元兩面論)이라고 부른다. 장회익, 최종덕 공저,「이분법을 넘어서」, 313-317쪽. (한길사,2008)
즉 ‘우주를 구성하는 궁극적 기본재료’(universal stuff)는 구체적인 물질적 존재로서나 정신적 존재로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안에 ‘물질성’과 ‘정신성’을 내포하여 있고, 그 근본질료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구성되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존재의 양태’(modes of being)가 다양하고 다차원적이라는 신념이다.  
  그리하여 우리 눈에는 별도의 세계적 실재로 여겨지는  물질계, 감각계, 심리계, 정신계, 이념계, 신령계등 다양한 현상이 스펙트럼을 통한 빛의 분광색상처럼 실재의 다차원적 다양한 존재질서로서 나타난다. 적외선이나 자외선 처럼 특수장비를 갖추지 않으면 그 실재성이 안보이는 파장의 빛도 있듯이, 현대 경험과학의 방법론적 도구나 이론으로서는 포촉되지도 않고 설명되지도 않는 ‘신비경험세계’도 실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법칙과 원리가 아직 완전하지 않더라도, 아인슈타인이 말처럼, 신비하고 경외로운 사실은, 우주자연현상이 수학적 합리성에 의해 파악되고 이해된다는 점이다. 성경종교의 강렬한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평강’으로 지속되기 위하여는, 대자연 안에 수학적 공리처럼,  두가지 근본적 삶의 원리가 역동적으로 작동해야하는데, 하나는 ‘사랑의 원리’요 다른 하나는 ‘정의의 원리’이다.  이 두 가지원리는 심장의 두 심방ㆍ심실 처럼, 하나님의 심장박동의 나타남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맘’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하신 이의 선하심’에서 우러나온다.
 인간공동체를 포함하여, 뭇 생명공동체가 ‘평화, 평강, 샬롬’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살려고한다면 반드시 ‘사랑과 정의’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류역사 과정 속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곧 “무엇이 선한 일인가?의 질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맹자, 밴담과 죤 록, 칸트와 죤 롤스, 그리고 최근 하바드대학 강좌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견해가 역사를 이끌어 왔다. 마이클 샌델(이창신 역),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마이클 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하버드대학교 연속강좌에서, 서구정치사회사에서 논의 되어왔던 세가지 방식의 대표적 입장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입장: “정의란 공리(公利)나 행복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벤담, 프리드만). 둘째입장: “정의란  이익이나 불이익에 관계없이 개인 인격체의 존엄성과 선택결단의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이다”(칸트, 죤 롤스). 셋째입장: “정의란 시민의 미덕을 키우고 공동체의 공동선을 성취시키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샌델). 위와 같은 책, 360쪽 참조.

 서구사회에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판단의 준거는 소득과 분배,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들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문제라고 이해한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회자되는 말로서 ‘공정성’이 핵심이다. 하버드대학 연속강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정독해 가노라면, 서구인들의 단자론적인, 개인주의적 인간이해가 얼마나 뿌리깊게 새로운 문명패러다임의 출현의 발목을 잡고있는지,  ‘정의로운 인간공동체’ 이념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지  금방 간파할 수 있다.
 서구적 사유체계와 다르게,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연기론적 실재관’(불교), ‘천지인 합일의 실재관’(유교), ‘후천개벽의 이천식천 세계관’(동학)을 바탕에 깔고서 이해하면, 개체와 전체생명은 상호 공속적이고, 연대적이며, 공동책임과 운명의 공동체라는 것이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성경은 본래 어떻게 보는가? 성경의 줄기찬 증언에서 보면 ‘무엇이 선인가?’라는 질문에 주저함 없이 또렷하게 답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이스라엘 공동체적 삶 속에 ‘선한 삶’의 필수요건이 3가지로 제시되었다. 정의로운 삶의 추구, 인자(仁慈) 곧 사랑의 실천,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이다. 겸허한 맘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경건’이라고 부르는데, 경건의 본질은 정태적(靜態的) 맘의 종교적 상태가 아니라 동태적(動態的) 실천의 삶이다. 구체적으로 야고보서는 이렇게 제시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고보서 1:27)

 인간생명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연속성, 연대성, 책임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과, 인간생명은 개체이면서 전체라는 생각을 함석헌은 다음같이 시적 은유로서 말한다.

   “ 맘은 꽃 / 골짜기에 피는 란(蘭) /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
      ................   맘은 씨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   함석헌 전집 제6권, 15쪽(한길사, 1983)



    “하나를 나무의 씨라면 하나는 숲이다.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숲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자아에 철저하지 못한 믿음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요, 역사의 이해없는 믿음은 가시덤불에 난  곡식이다.”  함석헌 전집 제1권, 27-28쪽.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서 보면, 서구 근대문명의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변종(變種)이자  
본래적 인간상 곧 ‘하나님 형상’의 타락형태이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나서 상호계약을 통해 공동체생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골짜기에 떨어진 난초의 씨앗이 골자기의 퇴비흙을 먹고 자라듯이, 문화역사의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 사람으로서 형성되어간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의 개인소유물이 아니다. 그 개인생명의 출현이전의 수백만년의 통시적 생명흐름과정에서 희생자들의 덕택으로 살아남은 마지막 결승점이자, 동시에 무수히 펼쳐나갈 미래생명의 시작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있고, 시공간적으로 우주생명과 함께 있고, 공시적으로는 오늘날 지구촌의 모든 인간활동에 연계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보편적 복지론’에 관한 논쟁은 단순한 사회경제적 수익자부담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온생명론이나 생태적 통일성 그리고 역사-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론에서 보면 ‘보편적 복지론’은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우연하게 주어진 사회적 환경(국적획득, 사회신분계층, 인종, 언어등)이나 선천적 유전자의 형질획득(재능, 지능, 성격등)이나 심지어 노력을 통한 승리와 그 포상으로서의 사회적 특혜가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아기적 생각은 점차로 반성되어야 한다. 인간존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전체적 존재요, 역사문화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작은 녹색행성 지구촌에서, 하루 1달러 미만의 열악한 최저생활자가 10억이상인데, 제1세계 선진국이나 한국사회에서 10억명이 넘는 부자들의 낭비와 호사는 그것자체가  죄악인 것이다.
  남북관계의 악화로 인해서,  한때 전쟁불사론까지 함부로 입에 올리는 무책임한 정치지도자들이나 반공주의 극우파집단들의 발언은 생각 할수록 모골이 송연한 일이다. 군사전문가들의 예측에 의하면 , 남북한의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개전초기 사망자 숫자만도 220만명-230만명이나 되고 주한 미군의 사망자만도 5만2천명이 되리라고 계산된다. 전쟁비용은 3조달러, 복구및 재건에도  천문학적 숫자인  3조7천억 달러가 소요되리라고 본다. 북한은 거의 완전 초토화될 것이며, 한반도는 폐허지역으로 변할 것이다.  한겨례신문, 2011년 1월1일. 사설 참조.
  2010년 한국 국가정부예산 292조 8천억원중 국방비 예산은 29조 5,627억원으로 편성 집행되었다. 국가 예산대비 약 10%가 국방비에 쓰인 셈이며, 세계전체국가들 중에서 국방비 지출예산 규모로서 10위권에 해당한다. 2011년 국방비 예산은 첨으로 30조원을 넘어서 31조 2,795억으로 편성되어있다. 국가 예산편성으로만 보아도, 한국사회가 생명ㆍ평화ㆍ복지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말 할 수 없다.
  지난 2년동안(2009-2010) 한국에서처럼 정부의 4대강 개발사업에 대한 반대여론으로서 학계와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줄기차게 반대해온 사례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지난 2년간 MB 정부만큼  국민과의 소통에 귀를 꼭 막은 정부가 없을 것이다.
  MB 정부만이  아니다. 현대의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 못지않게 기계식 대형 가축사육방식에 따른  부작용이 해마다 가중되고 있다.  땅 위에 생명과 평화가 깨지고  심각한 위기 앞에 서 있다. ‘식량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식량위기는 기후위기와 함께 인류의 생존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집약적 단작재배, 공장식 대형가축사육시설, 제초제와 살균살충제로 남용으로 토양과 물의 오염, 표토유실, 지하수 감소, 사막화, 조류독감유행, 마침네 절대식량부족으로 대기근을 불러올 조짐마져 보인다.
  근본원인이 어디있는가? 가치관의 뒤집힘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무한 탐욕과 소비지향적 성향, 성장을 멈출줄 모르는 시장경제체계, 인간의 오만과 위선,  형제살인과 근친상해의 원죄적 죄성, 문화의 견인차라고 할 수 있는  언론ㆍ 대학ㆍ종교의 타락과 물신숭배적 풍조에서 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분별’ 정도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동’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교회의 당면과제와 변혁되어야 할 필수적 사항3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서 발제를 마치려고 한다.   

II. 한국 기독교와 교회, 변화되지 않으면 죽는다.

변혁1. 성공적 목회중인 개별교회라 해서 책임면제가 될수 없고, 역사는 기독교 전체의 회개와 갱신을, 한국사회는 개신교 교회전체의 철저한 혁신과 공동책임을 묻는다. 개별교회중심주의가 변혁되어야 산다.


 한국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모두가 감지하고 염려하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어디있는가? 개신교 교회중 성공적 목회를 한다고 평가받는 출석교인수 평균 1,000명 이상회중을 가진 개별교회들이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배신하거니 외면하고 개교회중심적 교회로 변질되어 있기에  문제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근대 서구문명의 병든 모습인 개인주의를  닮았고, 자본주의의 경쟁원리를 수용했으며, 무한성장 팽창주의 선교신학을 목회신조로 삼아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명령과 부탁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교인수 평균 1,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를 이루고, 지속적으로 지탱하고, 더 성장시켜가기 위해서는 해당교회 목회자들은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않된다. 다른 교회들을 염려할 여유가 없다. 내가 목회하는 목양지만 잘 관리하고 지키고 육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웃종교에 대한 비상식적인 개신교인들의 폄하행태, 전철이나 역광장에서 공공적 사회윤리성을 무시하는 정도행각 행위, 일부 문란한 성직자들의 탈선과 수준이하의 공중파 설교, 집단이기주의 행태마져 보이는 개신교 평신도들의 기복신앙등등은 “내가 목회하는 교회와 관계없으니 난 책임없다.”는 식이다. 목회자들도 그렇고 신학자들도 그렇다. 그러나, 사회와 역사는 기독교  전체위상과 한국개신교의 공동책임을 묻는다.  
 한국교회는 특히, 회중 숫자 5,000명 이상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오늘의 한국개신교 위상 타락에 대한 무한 공동책임의식을 가지고 대안모색에 함께 나서야 한다. 특히 목회신학에서 개교회중심적 성장선교신학은 비복음적임을 알고 하루속히 청산해야 한다. 미국 ‘수정교회’의 몰락의 원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한다. 개인주의적 인간관이 잘못이라면, 개별교회중심의 교회관도 잘못이다. 개인의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예획득이 개인의 공로로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듯이 개별 교회의 성장도 그렇다. 그리스도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이다 . 수치와 조롱도 함께 받고 칭찬과 영광도 함께 받는다. 대형교회나 소형교회나 매월 헌금총액의 10%를  따로 구별하여 전국적으로 모아서, 생명을 살리는 일과 평화운동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변혁2. 한국교회는, 특히 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와 자기성찰을 요구하며, 보수계 교회지도자들과 진보계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대화, 소통, 상호배움, 변화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권력욕과 명예욕과 더불어 재산욕까지 첨가한 치명적 삼독(三毒)이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양심에 화인맞은 자 곧 파렴치한, 안하무인, 자존망대, 적그리스도인으로서 만든다.

 불교계 쪽에서나 밖에서 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뼈아픈 충고는 사회안에서의 국민소통, 종교간의 대화협력, 정치경제적 남북대화 협력을 말하기 전에 “당신종교 기독교 안에서 보수계와 진보계 간의 대화 협력부터 복원해 주세요”였다. 듣고보니 할 말이 없고 심히 부끄러웠다. 교리적 말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말하고 ‘이웃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보수교단과 진보교단끼리는 상호 대화포기, 상호경청과 배움의 무용론, 협력과 상생커녕 상호적대 비방 폄하를 체질화 해왔다.  이 현실을 그대로 둔채 세상 한 복판에서 ‘생명과 평화 마당’ 이루기는 명분적 신학담론과 아무 열매없는 헛수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보수계와 진보계의 대화소통이며 차이를 인정하면서 존중하고 협력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확립이다.    
  그런 당연한 일들이 왜 어려운 일이 되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자기교만’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요, 신성한 복음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요, 거룩한 진리 신학을 전공한자요, 날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직통하는 제1급 하나님 참모들이니, 그 자부심과 자존망대병은 치명적인 영적 맹인지도자 그룹이  된다. 그들은 형제의 말을 경청하려들지 않고, 더 이상 새로운 진리에 대하여 배우려는 자세를 갖지않고, 이미 모든 진리를 완전 소유한자라고 자처한다. 독선독단적 신앙태도와 교단내 정치싸움 추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복음이 모독을 받게되어도 자기들 책임 때문이 아니고,  도리혀 참 복음을 파수하려는 순교자적 십자군병의 ‘상흔’(스티그마)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합리화 한다.
 진정한 진보성이란 무엇인가? 신학계열에 있어서 진보적 신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진보성이 담보되는 것 아니다. 일반 사회적 통념에서조자 ‘진보적 지식인’이란 사회약자와의 사회적 연대를 중시하고, 전쟁이나 빈부격차를 쉽게 용인하는 기득권 계층의 내부심리를 분석해부하여 생명평화공동체 실현에 그들의 전문지식을 힘껒 발휘하면서 변화를 추동하는 참여적 지식인을 말한다. 한국 기독교의 진보계 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진보적 신신학이나 KNCC 가입교단의 배경을 가진자냐 아니냐의 형식조건과는 무관 한 일이다. 지구촌의 춥고배고픈 자들의 고난과 슬픔을 몸으로써 함께 느끼고, 자기책임의 일부라고 통감하면서, 교회공동체가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일에 뜻과 힘을 쏟도록 견인하는 신앙지성인 집단을 말한다.
 진정한 보수성이란 무엇인가?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교리 문답과 정통 칼빈신학및 웨슬리신학에 충성한다고 해서 보수성의 진정성이 담보되는 것 아니다. WCC운동이나 종교간의대화나 교회의 정치참여에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 보수신앙의 본질을 담보하는 것 아니다. 진정한 보수성(保守性)이란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마음이다. 복음의 본질은 신학체계나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 말씀과 행위’ 안에 계시된 진리이다. 그 또한 다름아니라 빈자와의 연대, 평화의 왕국 하나님 나라 실현, 죄의 용서와 화해, 공로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서의 구원신앙이다.
변혁3. 우리시대에 교회가 힘을 모아 진력해야할 일차적 선교사명은 ‘기독교 교세확장’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공동체 실현’이며, ‘십자군적 영성’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성’이다. 구체적으로 자연생태계의 보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구현, 그리고 지구촌의 빈곤극복을 위한 청빈과 ‘예수살기’ 운동의 전개이다.

  한국교회는 제2차대전 강대국의 국제정치군사적 정책에 의해 분단과 민족 상잔의 전쟁의 비극을 경험했고, 좌우 이념의 갈등과 상호증오의 덫에 걸려 60년 이상을 ‘20세기 바벨론 포로기간’을 감내하였다. 이제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는 이사야의 사명을 받아야 할 때이다. “나 야훼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하리라”(사42:6)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시 받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때이다. 그러한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한국 기독교가 분단이후 북한당국으로부터 받았던 박해받은 상흔과 앙심을 청산하고, 남한당국으로 받았던 ‘반공주의 첨병임무’를 청산하고,  맘을 열어 7,000만 동족을 맘 속에 ‘에서와 야곱을 품은 리브가’처럼 품어야 한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사명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구체적 행동언어도 병행해야 한다. 주변 강대국가들과  국내 군사주의자들은 ‘천암함과 연평도 사건’이후 ‘한ㆍ미ㆍ일 군사 동맹론’을 입에 올리며, ‘북ㆍ중ㆍ러시아의 군사협력’체제와 대치하는 신냉전대립구조를 강화하려는 조짐을 보인다. 개화기 이후,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대문에, 함석헌의 말 대로 ‘수난의 여왕’이 되었고 ‘세계사의 쓰레기통’이 되어왔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가 ‘날씨분별의  눈만 아니라 때분별의 눈’을 가지고 ‘남북한ㆍ일본ㆍ중국ㆍ대만ㆍ베트남’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생명평화공동체’ 실현에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유럽공동체 실현에 비하여 50년 이상 뒤진 역사의 보폭을 줄여서, 21세기 중반기 경엔 그 비젼이 역사적 현실로 실현되도록 해야한다. 유불선 동아시아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과, 근현대화의 경험과, 전쟁의 쓰라린 체험과,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우주적 세계관을 지닌 한민족과 한국기독교가  이 촉매역활을 해야 한다. 그 일을 지향하면서 일차적으로 남북 평화정착, 평화협정의 채결, 군비무력감소협정, 민간인 자유왕래와 정부간 경제협력,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도록 ‘민중의 목소리’를 결집하여 정정당당하게 ‘국가’의 실질적 주인인 ‘민’(씨)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켜야 한다. 역사의 진로를 바로보는 정권,  ‘생명평화민족 공동체’ 형성에 봉사할 정권을 지역과 좌우이념을 넘어서서 선택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과 평화마당’을 꿈꾸는 진보신학연대 젊은 일꾼들의 화급한 일은 무너져 내리고 파괴 되어가는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하는 일이다.  기후변화, 구제역 발생, 조루독감, 가뭄과 한파폭설등 이상기온, 지진 해일등의 ‘자연의 반란’ 조짐이 예사스럽지 않다. 인류와 한국민과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우리시대 하나님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새로운 인류문명과 동아시아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느냐 못들어 가느냐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명기 30: 19-2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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