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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성서실재론에서 부활체와 사후생이해(장공기념사업회,광주,201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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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기념사업회광주강연20110417]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에서 부활체와 사후생 이해

                                                                                    김경재(한신대명예교수)
1. 논제의 연구목적

 장공 김재준목사(1901-1987)가 소천하신지 내년이면 벌써 25주년이 된다. 그는 생존시부터 현재까지 보수계 한국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 ‘신신학자’, ‘인본주의 신학자’, ‘자유주의 신학자’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그런 무책임한 사상규정의 어휘들은  결국 장공의 신앙과 신학은 비복음주의적이요 반복음주의적 위험한 내용을 갖고 있다는 고의적 악선전을 하려함이다. 도대체 ‘복음적’(evangelical)이라는 어휘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자기입장을 정당시하는 ‘신성표식’으로 오용하는데 문제가 있다. 보수적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들자신의 신앙고백형태와 내용을 절대신성시하는 대심문관의 ‘진리보증 옥쇄’인양 생각하는 독단적 오만을 전제로하고 있음이 문제이다.
 다른한편, 장공의 신앙과 신학에 대하여 호의적인 진보계 기독교인사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서문자주의 족쇄, 바리새적 교권주의, 타계주의 신앙, 정교분리주의등의 해악으로부터 자유케하여, 역사변혁적이고  성육신적 영성을 가져다준 진보신학의 대부로서 장공을 높게 평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계 기독교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내용중 하나인 ‘부활과 죽음 이후 영원한 삶’에 대하여 장공이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하여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장공의 신학은 죽음 이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신앙’엔 큰 공헌을 하였지만, 누구나 부딪히는 죽음과 죽음 이후의 일에 관한 ‘신앙생활’엔 도움을 별로주지 못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이 논문은 장공의 신학사상 연구테마들 중에서 흔히 다루지 않았던 주제 곧 ‘죽음과 죽음 이후의 생명존재양태’에 관계된 장공의 신앙을 그가 남긴 글들을 참조하여 밝혀보려는 것이다. 이것을 밝힘은 그의 지론인 ‘생활신앙’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생활’과 관계가 손등과 손바닥관계라는 것, 역사변혁적 성육신영성은 역사초월적 사후생(死後生)신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 현세일에 충실하는 십자가 신앙은 부활신앙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결실을 얻을 것이다.
 우리의 논제는 구체적으로 세가지 핵심주제어(核心主題語)로서 구성되어 있는데, ‘성서적실재론’(聖書的實在論), ‘부활체’(復活體), 그리고 ‘사후생’(死後生)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 세가지 주제를 순서대로 살피고, 종합정리하면서 우리의 논제가 오늘의 한국 개신교의 개혁과제와 새문명 도래의 비젼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를 성찰 할 것이다.    

2.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

 장공은 20대초반 성령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맘에 주님으로서 영접한 후,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았고, 그의 평생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동행하셨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장공의 일생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삶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사건에 대한  성서적 증언에 대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말하자면, 그는 ‘성서적 실재론자’이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가 왜 ‘부활의 몸’을 강조하고 ‘사후생’을 신앙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성서적 실재론’(Biblical Realism)이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는 입장을 말하는가 일반에게 충분히 알려있지 않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성서적 실재론’(Biblical Realism)을 보다 보편적 개념인 ‘성서주의’(Biblicism)와 동일시하거나,  보다 구체적 신학개념인 ‘성서영감설’(Biblical Inspirationalism) 및 ‘성서문자무오설’(Literally Biblical Infallibilism)과 같은 개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네덜란드의 조직신학자요  선교신학자인 쟌 용어네일(Jan A.B Jongneel)에 의하면, ‘성서적 실재론’은 성서가 증언하는 구원체험 증언의 주제사실(主題事實,Die Sache)이  계몽주의자들의 ‘리성적 판단기준과 사상’에 의해 변형되고 훼손되고 무시되는 것을 저항해온 독일 경건주의 신앙운동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계몽주의의 비판정신은 기존의  권위적이고 신성화된 일체의 신념들과 제도들에 대하여 이성적 검증을 요구하였기에, 성서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촉발시키는 긍정적 공헌도 하였던 것이다. 성서연구에 있어서 ‘역사적-비평적 연구방법’(die historisch-kritische Methode)의 발달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서를 ‘계시적 영감의 경전’으로 확신하고 일체의 학문적 비평연구를 이단시하였던 정통보수주의자들은 성서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연구’를  매우 위험하고 비신앙적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러한 자기방어적이며 경직된 태도는, 한국 교회사의 비극이랄 수 있는 예장총회(1953)에서 김재준의 조선신학교교수직 파문과 이단정죄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  역사비평적 방법을 철저하게 밀고나간 극단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그룹에게 있어서는 성서가 증언하는 근본적 ‘주제사실’의 본질자체를 위협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들에게는 신적 구원행위를 증언하는 성서의 초월적 사건들이, 극단적으로는 20세기 불트만신학에서 처럼 ‘비신화화’(非神話化) 대상이거나 부정될 것으로 치부되어갔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증언이 ‘실존론적으로 십자가 사건의 의미의 부활’로서 이해하고, 극단적으로는 ‘케류그마의 비신화화’에로 까지 치닫게 되었다.
  20-21세기 신학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지성과 신앙이 함께 숨쉬는’ 신학적 담론공간으로서 ‘성서적 실재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인가?  다음같은 5가지 특징을 열거함으로서 ‘성서적 실재주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입장에 선 장공의 신앙을 오해없이 바르게 파악 할 수 있다.
  첫째, ‘성서적 실재론’이란 성서가 증언하는 중심주제들을 관념적으로나 신화적으로 보지않고 현실적인 실재로서 고백한다.  
 예들면, 하나님의 현실적 실재성과 자기계시, 말씀의 그리스도 안에서 화육, 성령의 능력안서 치유와 중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 영화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체부활, 성령의 강림과 하나님나라의 진행중인 현실성등을 ‘실재적인 진실’로서 믿는다.
 둘째, ‘성서적 실재론’ 이란 성서가 증언하는 구원사건들이 역사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역사개념’에 갇혀있지 않지만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관통하여 발생하며, 인간학적 ‘인격개념’에 유폐되지 않지만 철저하게 인격적 응답성과 자유를 중요시한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격적 책임성을 강조한다.
 셋째, ‘성서적 실재론’이란 성서관에 있어서 성서가 신적 영감에 의해 기록되고 주어진 오류가 없는 경전이라고 믿는 ‘성서문자영감론’을 거부하며, 동시에 성서는 ‘역사적-문헌비평적 연구방법’에 의해 밝혀지는 단순한 인류의 정신문화적 책이라고 균질화 시키는 ‘성서계시부정론’을 거부한다.
크게보아 말하면,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 강해>제2판 서문에서 취하는 입장 곧 성서연구에 있어서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은 정당성을 가지지만, 그 방법은 성서가 증언하려는 원주제(die Sache)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이해를 위한 준비’단계로서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역사비평연구방법’은 성서케류그마가 증언하는 ‘계시적 구원진리의 사실’이 말하려고 하는 그 실재성을 드러내고 조명하며 봉사하는 기능이 있을 뿐이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넷째, ‘성서적 실재론’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의 역사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창조세계 전체를 완전하게 인간 지성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 곧 인간의 인식론적 피조성과 한계성,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초월성을 겸허하게 받아드린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거칠게 말한바 ‘시간과 영원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영원, 땅과 하늘, 사람과 하나님의 ‘무한한 질적 차이’는 플라톤 철학적인 양자사이의 분리를 상정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무한한 질적차이’는 ‘시공간적 분리’나 ‘실체론적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지만(행17:28),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사람은 하나의 피조물로서 사람일 뿐이다.  ‘성서적 실재론’은 이 ‘질적차이’의 교차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다섯째, ‘성서적 실재론’은 관념성이 아닌  실재성을, 보편성이 아닌 구체성을,  이론이 아닌 실천을, 가능태가 아닌 현실태를 강조하기 때문에, 신앙의 진실성 판단기준을 이론으로서가 아닌 “나무의 열매”로서 판단한다.
  성령의 실재성을 삼위일체론으로 말하기보다는 ‘성령의 열매’(갈5:22-23)로서 말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고 본다.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성과 그 실재성은, 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공동체와 개인 생활신앙에서의 역동적 생명력과 죽임의 권세를 이미 이긴 승리적 삶의 현실성으로서 증언한다.  성서실재론은 종말적 삶을 “이미...그러나 아직”(Already...Not Yet)이라는 긴장과 과도기적 중간시대 의식으로 산다. 어둠은 지났고  이미 동은 텄으나 새벽의 아침 해는 아직 환하게 밝지는 않았다.  

  이상에서 나는 ‘성서적 실재론’의 특징을 5가지로 요약해서 살펴보았다. 오늘날 고도로 전문화되고 다양화된 성서연구방법론 입장에서 보면, ‘성서적 실재론’은  보수신앙의 성경관 처럼 보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해를 신학적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궁극적 결단과 가치관의 바탕으로 삼는 신앙인에게는 이상에서 말한 5가지 특징을 지닌 ‘성서적 실재론’을  지나간 시대의 소박한 성서적 실재관이라고 보지 않는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20세기 사람이요 21세기 최근의 성서연구동향에는 학문적으로 접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의 성서관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 생애 말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앞서 언급한 ‘성서적 실재론’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장공의 입장이 ‘성서적 실재론’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몇군데 글을 인용하여 보겠다.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최첨단의 자유주의 신학과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을  고루 경험하고 귀국한 장공은 1930년대에 3가지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논문 안에서 장공은 튜빙겐대학교의 키텔교수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종교로서 특수한 인격과 장소와 시간에 관계된 구체적 사건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우선 역사적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사실의 진실성’은 철학적 해석이나 과학적 설명에 의해 판단되는 것 아니라고 주장한다. 장공은 복음서의 ‘빈무덤설화’와 ‘부활현현기사의 다양성’을 근거로 하여 그동안 제기된 예수의 잠정적 ‘가사설’(假死說), 심리적 ‘환상설’, 희망적 부활 기대심리의 ‘와전설’등을 하나 하나 논박하고서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주장한다.

  물론 자연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때 부활은 불가해한 것이며 경험을 초월한 것이니 자연법칙을 중시하는 철학자 과학자로서는 이에 용훼(容喙, 말 참견)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하  신 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보아 움직일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일진대, 이 사실에      대한 철학적 과학적 해석이 이 사실자체의 진정성을 좌우 할수 없는 이상 우리는 다만 겸손한 마     음으로 신의 위대하신 기적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서적 실재론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재를 믿는 믿음에 기초한다고 말했다. 장공은 「욥기에 나타난 영혼 불멸관」이라는 30대 중반시기 논문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그것은 욥기의 중요한 고백구절인 욥기 19장 25-26절의 성서주석입장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을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장공의 성서실재론은 그 부분을 이렇게 이해한다.

  욥은 (i)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결백한 것을 변호해 주시리라. (ii) 그가(욥)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것이라는  두가지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때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여기서 그가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  은, 그야 살던지 죽던지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의”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있어    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성서적 실재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성서를 ‘역사적-문헌비평적 방법’으로 연구하려는 ‘신앙적 지성’과 성서가 증언하는 ‘계시적 말씀의 권위’를 동시에 살려내는 문제였다. 그 것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성서관이 ‘성서적 실재론자’의 성서관이다. 그 점에 대하여 장공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1950.3월) 라는  논문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내가 성서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까닭이다. 성서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 이다.......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자. 성경에  원본은 없으니 더 말 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사본이 원본과 꼭 같다보면 사실 성경에는 문자적 오    류와 과학적 역사적 부문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성경의 목적이 무엇인가?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    게 영생을 얻게하려는 것이요 영생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이렇게 성경을 설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 면에서 성서무오설을 수립 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나 대담하게 전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서적 실재론’의 특징으로서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성과 존재양식의 한정성에 대한 장공의 입장을 살펴보자.  ‘사후생’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은 성서적 사유세계에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본래 흙으로 지음받아 철저히 시공한계 안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서 인간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고백하는 성서의 기본적 관점은 ‘죽음’을 창조질서로서 이해하고, 타락이라는 원죄댓가로서의 징벌과는 관계없는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자연스런 제약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눅23:46).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 등  예로 열거한 여러성구가 말하는 사후생을 장공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현세와 래세의 불가분리성과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안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신비의 세계를 믿었다.

  우리가 래세의 자세한 그림은 그릴 수 없어도, 아버지의 세계는 우리의 상상에 넘치는 크기와
  넓이를 갖고 있으며, 영의 세계는 우리가 아직 유치원생 정도로도 탐색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
  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죽어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 계신 곳에 있으리라는 것쯤은 믿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공의 신앙은 ‘성서적 실재론’을 지닌 진보적 역사참여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많은 다른 인용문장을 더 이상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론에서 자연스럽게  관련한 언급이 많게 될 것이다. 이제 장공의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인간생명의 본래성, 죄성, 그리고 영화될 몸의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3.  부활사건의 가능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

(1) 인간의 죽음은 본래적 창조태(創造態)에서 볼 때 타락태(墮落態)의 비정상적인 현실


  장공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가 ‘인간의 죽음’이라는 자연질서의 현상마져도 원창조질서에서 변형된 비정상적 현상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장공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놀라운 점은, 우리가 본 논문 제2장에서 살펴본 ‘성서적 실재론’을 받아드림에 있어서 장공은 진보적 신학자답지 않을 만큼,  ‘철저한’(radical) 성서적 실재론자로서  성서주석을 견지한다는 점이다.
 장공은  창세기 제1장에 서술된 창조기사를 물론 문자주의자들처럼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해에 있어서 장공은 창세기 제1장 안에 나타난 창조설화에서 두가지 질서가 구분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두가지 질서란 ‘자연질서’와 ‘영의 질서’이다.
 자연질서에 속한 피조세계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공중에서 삶을 누리도록 축복받되 생물학적 번식과 신진대사를 반복하면서 생존하고 사멸하는 생명질서이다. 여기에서 죽음이란  생명체들이 지속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삶의 리듬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자연질서에 속한다.
 영의 질서는 피조물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창1:26)을 닮도록 지음받은 생명체 곧 인간생명의 질서이다.  장공은 구약신학 전공학자 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해왔던 조직신학적인 관념적 이해를 넘어서서, 장공은 인간생명체 그 자체가 ‘하나님을 닮은 영적 존재’임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성 안에 간직한 특수한 기능(언어기능, 지성기능, 양심기능, 진선미 분별기능등)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마치 조개속에 진주가 박혀있듯이 인간성의 어느부분을 의미하거나, 인간의 어느 부위에 박힌 특수자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 창조설화가 기록되던 고대사회에서 고대제국을 통치하는 제왕들이 자기의 ‘얼굴형상’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품으로 만들어, 지방제후들의 통치영역에 안치하면 ‘제왕의 얼굴형상’ 그 자체가 제왕의 권위와 임재를 의미하는 상징기능을 갖듯이, 피조물로서 ‘인간생명체’ 그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생물학적인 외모를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시고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창조하고 다스리고 영적으로 통교하는 모든 능력을 갖춘 피조물로서 닮았음을 의미한다. 장공은 진화론을 받아드린다. 그러나 인간존재가 진화과정의 정상을 차지하는 고등동물로서 온갖  리성적 지능을 구비하고 만물을 지배하는 자리에 오를지라도, 그 능력과 자질은 본질적으로 ‘자연질서’에 속한 것이어서 자연질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존엄성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에서 인간존엄성의 근거는 인간이 ‘영의 질서에 속한 피조물이라는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데서 찾는다.  장공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하나님의 창조설화에는 자연질서와 영의질서라는 두 질서가 구분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형상을 따라, 자기를 닮은 피조물로 손수 지으신 특별창조에 속한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같이 인  간도 영적 존재며, 영은 불멸한다는 견지에서 영적존재에는 본성적으로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이 영   적 존재인 인간이 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의 몸이어서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    는, 그리고 물질적 보급을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는 몸일 것이다. 이 영의 몸은 ‘영의 언어’를   갖고있다. 영의 언어란 것은 인간들의 ‘말’이라는 표현기구를 통하지 않고 혼과 혼이 직접통하는 ‘말   없는 말’을 의미한다.........이 영의 몸이 지상에서의 생성단계에서 육의 몸을 갖고 번식의 축복을 받   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지면에 두루 퍼져 산다 하더라도, 어떤 기간후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영의   세계에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에녹, 엘리야 승천기사)...... 타락 이전의 인간상은 예수의 부활체와    흡사하다. 예수의 부활한 몸도 예수의 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한 몸이어서 시공에 제약되    지않는 현현, 지상과 천상에 구애됨 없이 자유로운 몸이었다.     

다소 길게 인용했지만, 장공의 성경독해(聖書讀解) 에서의 해석학적 입장이 얼마나 ‘성서적 실재론’의 기본입장에 철저한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장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더우기 위 인용논문 내용은 장공의 나이 80세때(1980) 쓴 글이어서 더욱 소홀히 다룰 수 없다. 장공은 엘리야나 에녹의 승천기사를 허황한 신화나, 사막회리바람에 말려 올라간 자연현상의 후대 과장된 설화라는 식의 합리적 해석을 경계한다.  장공은 거듭 말하기를 영의 세계에 있어서는 현대 과학적 인간의 지식이 너무 유치한 단계라고 말한다. 장공은 1985년 한국퀘이커 여름수련회에서 행한 “역사의 원점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며 생명자체기 때문에 그에게는 ‘죽음’이 없다. 영원한 삶이 있을 뿐이다.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본레적으로는 죽을자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생명이 정상태(正常態)요 죽음은 변태(變態)라 하겠다......우리가 소위 ‘하관식’을 할 때 “육신은 흙에로, 영혼은 하늘에  로”라는 선언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분리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 일 수가 없다. ‘산 몸’이 아     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으로서의 인간, 영체로서의 ‘몸’,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 날개 안에 품긴     인간의 작은 생명인 경우에는 인간생명의 영성(靈性)과 영생(永生), 그 몸의 영화등을 기대 할 수     있다.

 위에서 인용한 두곳의  장공증언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장공의 신학적 인간학의 특징은 인간의 본래적 창조태(創造態)로서 몸은 일정기간 신진대사를 지속하다가 세포기능과 유기체로서 생리기능이 쇠약해저서 자연구성물로 되돌아가는 ‘자연사로서 죽음’이 당연하거나 본래모습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죽음이 인간의 운명이 된 것은 인간이 “본래적인 영의 질서에서 자연질서에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타락의 본질은 창조주로부터 자기의 분리, 곧 생명동산의 질서에서 일으킨 영적쿠테타의 결과라는 것이다. 타락의 결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2:19)는 창조주의 명령은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로서 보는 것을 마치  당연지사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비정상태로 되어버린 인간생명을 정상태로 바로잡는 제2창조적 사건으로서 장공은 이해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부활체(復活體)는  형체변화된(transformed, transfigurated) 몸, 영적으로 승화된 몸

 장공은 대체로 그의 생애에서 보면 이른시기(1935년), 『낙수(落穗)』에 실린 논문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연구”에서 예수의 부활체에 관한 상세한 지론을 펼쳤다. 그리고, 그 이후 50년의 세월이 지난 85세 무렵에도 예수의 부활체에 관한 그의 이해엔 변함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부활의 몸은 대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가 라는 만인의 궁금증과 질문에 대하여 장공은 사도 바울의 영체에 관련된 설명(고전15:42-44)을 근거로 삼으면서 응답하였다. (i)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이전의 몸과 그 동일성을 가지면서도 그와 동시에 마치 산상변화에서의 변화된 때와 같이 영광 영화된 몸이었다. (ii) 영체라는 것도 몸인 이상 필연적으로 형체를 갖추었을 것이지만 ‘살과 피’의 생리적 존재는 아니다. (iii)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가 몸으로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응답이요 최종확증 이다. (iv)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반신자의 부활에 대한 전제임과 동시에 그 원동력이다.

 그러면 생리적 존재이었던 혈육을 가진 몸이 어떻게 그 동일성을 잃지 않고 영체(靈體)로 화(化)하는가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생명의 움직임과 창조가 신비임과 동양(同樣)으로 신비불가해(神秘不  可解)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속한 행사요 인간의 알바가 아니요 알 수 있는 것도 아    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그러면 그의 육체적 존재를 하나도 잃지 않는 동시에, 그의 영적생   명을 표현함에 가장 적응된 표현기관(表現機關)인 몸 즉 영화 영원화(靈化 永遠化)한 몸 이었던 것    이다. 철(鐵)이 그 동일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내외(內外)가 아울러 변하여 영광과 열을 발함에도   비할 것인가?

위에 인용한 글 내용은 장공의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 그의 부활체 이해의 근본신념이 되었다. 장공의 년령이 오십대 중반이 되었을 때(1954년), 장공은 예수의 산상변모설화(눅9:18-36)를 텍스트로 한 설교형 신학논문에서 변모설화의 의미를 다음같이 요약하고 있다.
 (i) 예수의 산상변화는, 이 것이 그리스도의 원래의 모습이란 것을 생각 할 때, 신비라기보다는 현실이요, 변화라기보다는 원형(原形)의 드러남이다. (ii) 그리스도는 인간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신 것이고, 부활하신 몸으로 그 처음익은 열매를 보여주신 것이다. (iii) 시공을 초월한 원형(proto type)안에서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의 만남을 가질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만난것 같이, 산자와 죽은자가 만난다. 유대교 관계의 인물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있다. (iv)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 제사전통과 예언자전통이 만나 통전 완성되고,  십자가와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로 된다. (v)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모든 만민은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하늘의 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영과 몸이라는 두 개념은 상호 상충되는 대립개념이거나 모순개념으로서 모든 인간학은 생각해왔다. 그런데, 인간존재는 몸이라는 육체적 요소를 지닌 존재이면서 자기초월적이며 영적존재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래서 인류사에 나타난 두 개념의 갈등해결방법에 3가지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첫째는 헬라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전통에 기초하고 근대 데까르트의 인간학에 이르기까지 관철되는 가장 오래된 견해로서 ‘영육이원론’이다. 그러나, 영육이원론은 영과 육, 물질적 실체와 정신적실체의 상호관계성을 해명하지 못한다. 둘째해결방법으로서 나타난 것은 물질주의적 환원론이다. 모든 정신현상, 영적 현상은 결국 물질의 변화형태이며, 물질법칙으로 설명되고 물질에로 환원된다고 보는 유물론적 입장이다. 셋째 해결방법은 관념론적 철학이다. 궁극적인 실재는 정신적인 것, 관념적인 것으로서  순수의식이며 물질은 그것의 외화이거나 굳어진 응결물이다.
  장공은 구약을 전공한 구약학자로서 히브리적 사유체계 안에서 이상의 3가지 입장을 모두 부정하고  영과 육의 모순충돌을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을 믿는 신앙 안에서 해결한다. 히브리적 사유 안에서는, 바르트의 설명대로,  인간은 ‘육체화된 영혼’(leibhafte selle, embodied soul) 이면서 동시에 ‘영혼화된 육체’(beseelter Leib, besouled body)이다. 20세기 대표적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도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실존 할 수 없으며, 죽음 속에서도 세계와 관련된 형태를 지닌 새로운 육신성이 영혼에게 부여된다고 보았다”.

‘영혼불멸’ 사상은 그리스의 이원론적 철학에서 나온 것이어서 히브리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바울도 다소 이원론에 감염된 데가 있으나, 그가 ‘몸’, ‘부활의 몸’을 유난히 강조한 것으로 해서 가리어  지고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히브리 사상에서는 ‘몸’ 없는 영혼만의 삶이라는 데 대하여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몸’이 곧 삶의 거점(strategic point)이요, 삶의 표현기관 이요,  따라서 삶의 ‘실체’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것은 ‘몸’으로서의 부활이다. 그러나, 그 몸이 반드시 우리가 지   금 갖고있는 생리적 실체와 꼭 같은 몸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몸’은 승화(sublimate)된 몸이      다. 부활한 예수의 몸과 같이 자유로운 몸이다. 그 유지를 위해서 물질적 영양소를 보급할 필요도     없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표현으로 사람들과 소통(communicate)     할 수가 있다. 바울이 말한 ‘영의 몸’(spiritual body)이다. ‘영’이란 것과 ‘몸’이란 것과는 서로 반대   되는 개념이라지만 그 연합이 가능한데에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난다. 이것은 영광의 몸이다. 인간은   본래 ‘몸’으로 창조되어, 몸으로 살다가, 이런 더 높은 차원의 몸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살핀것 처럼 장공의 ‘부활체’ 이해는 히브리적 사유체계를 따라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되, ‘혈육적 몸, 생리적 몸’의 소생으로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되고 승화된 ‘영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변화와 승화는 철저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총의 선물이요, 창조적 권능에 기인하여 영과 몸의 갈등이 종합지양된 영체,  리성으로서 해명불가능한 신비한 사건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론적 신학이 강조하는바 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내면에서 볼 때, 그  십자가 사건 자체가 죽음의 권세및 죽임의 세력들을 영원히 정복한 생명승리의 사건, 진리와 진실이 승리한 사건이다. 진리와 생명의 힘의 승리가  십자가 사건에서 ‘거리낌과 어리석음과 수치’의 형태로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땐 십자가 사건자체가 승리한 영광이라는 것을 장공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가 죽음의 권세에 의해 죽임당할 수 없는 생명승리의 사건임을 하나님이 입증해주신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예수의 십자가 생명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11:25)는 증언이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현실적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4. 죽음 이후생에 대한 장공의 이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새로운 영체로서의 첫열매요, 영화된 몸이라고 바울은 보았고 장공도 동의 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체는 예수의 땅 위 육체생명이 질적 변화를 받아 영화된 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진지한 물음이 발생한다. 현실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일반인의 죽음체험은 설혹 장차 ‘부활체’로서 덧입는다 하더라도 예수의 ‘영화된 몸’과 차이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세적 ‘몸’은 ‘혈과 육’의 몸이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부패하고 자연의 소재에로 환원된다. 사람의 몸을 구성했던 유기물적 무기물적 원소들은 자연에로 되돌아가서, 자연소재로서 남겨있던지 다른 유기체 생명의 구성자료로서 흡수되어 자연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된다. 종말의 날의 ‘마지막 변화와 승화’가 이뤄지기 전에 사람들의 죽음후 생명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속하는가? 소위 ‘중간시간’의 생명의 존재양태 문제요, 일반적으로 ‘사후생’(死後生)에 관한 신학적 질문이 일어난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 믿고 천당가시요!”라는 모토로서 압축된다고 강조하는 한국교계의 타계주의에 대하여 남다른 비판과 경종을 울렸던 장공은 사후생을 온통 부정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장공은 현세와 래세, 역사에 충실하는 믿음과 래세 영생신앙과의 관계를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대승적 안목에서 이해한다. 타계를 위한 현세도 아니고 현세를 위한 타계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무한한 질서속에 있는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의 존재양태라고 이해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중심적 사후세계가 확신되고 있듯이, 장공에게서도 그렇다.
 장공은 저 유명한 해방직후 선린형제단  집회에서 행한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제목의 기념비적 강연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의 최고사상은 하나님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如實)히 건설되는 그것이다.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래세적인 소위 천당(天堂)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  한 것인줄 알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생활(全生活)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    의 전부문을 지배하는 그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사회에 삼투(滲透)    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세계에까지 생생발전(生生發展)하여 우주적 대극(大極)의 대낙원의 날    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 안에서 진보적 한국기독교 신학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당시 타계주의적이고, 개인영혼구원에 몰입해있는 교계를 보면서 장공은 참다운 복음적 의미에서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신학적으로 갈파했다. 위 문장을 깊이 보면, ‘천당’강조의 타계주의 신앙을 경고하지만 동시에, 하나님나라를 현세 역사내의 생명현실로서만 생각하는 현세주의적 기독교, 세속화된 기독교에도 경고를 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현세 삶의 각부문에 삼투하여 성육화한 결실물이면서도, “사선을 넘어서 미래세계까지” 관계되는 범우주적 생명실재이기 때문이다.
  장공은 기독교 복음메시지의 본질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덧없음을 인식시키어 사후 천당에서 영혼구원 받도록 하는 ‘타계중심신앙’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다. 예수님은 저세상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을 위해 그리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 창조세계가 온전히 ‘신천신지’로 변화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중간시대의식을 갖고 산다.  바울도 예수도 사후세계를 믿었다고 장공은 확신한다.  그러나, 장공은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타계가 인정되기는 하나 그것은 현세를 위한, 또는 현세의 연장으로서의 ‘타계’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현세의 연장으로서의 타계”란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데, 그 말의 참뜻은 래세와 현세는 오직 하나뿐인 신비한 창조세계 안에서 차원이 다른 삶의 질서라는 것이요, 오늘의 삶의 결실이 래세의 존재양태를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장공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맏딸의 제4주기(1982)를 맞이하여 맏딸 정자를 그리워 하면서  산사람에게 편지하듯이 애절한 편지체로 일기에 사후생의 신앙을 남긴다.

 간사람, 있는 사람, 보이는 사람, 안보이는 사람, 남과 나, 선배와 후배, 모두 모두 ‘전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과 자연과 모두 얽혀 한 몸 되는 그날이 오면, 이 늙은 부모도 다시 너를 몸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잘 있어라. 정자야 잘 있어라. 그 날이 올 때 까지! 네 아빠와 엄마.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적 확신은 분명하지만, 그 사후생을 포함한 ‘하나님나라’의 현실적 실재가 지닌  높이와 넓이와 크기가 글자그대로 ‘범우주적인 것’이어서 단순한 심리적인 소망을 말하는 차원이 아니다. 장공의 말년작품 “새벽 날개타고”라는 일종의 죽음을 앞에 내다보면서 읊은 종교시(1983년작) 속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이 우주는 하느님 집 / 하늘 위, 하늘 아래, / 땅 위, / 땅 아래,/ 모두 모두 아버지 집.
  새벽날개 햇빛타고 / 하늘 저편 가더라도 / 천부님 거기 계셔 / 내 고향 마련하네.
  이 눈이 하늘보아 / 푸름이 몸에 배고 / 이 눈이 밝고 맑아 / 주님 영광 비취이네.
  새벽 햇빛 날개 타고 / 하늘저편 가더라도 / 천부님 거기계셔 / 내 고향 마련하네.
  땅에서 소임받아 / 주님나라 섬기다가 / 주님 오라 하실 때에 / 주님 품에 안기나니.
  새벽 날개 햇빛타고 / 하늘 저편 가더라도 / 천부님 거기 계셔 / 내 고향 마련하네.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적 신념은 불변하다. 그러나, 그의 사랑하는 맏 딸 정자와 그의 애제자 서남동이 죽음을 맞아, 그들의 육신을 땅에 묻고 돌아설 때, 장공은 그들의 생명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천국에서 지금 안식한다고 믿었지만, 그들이 예수의 ‘몸의 부활체’같은 ‘영화된 몸, 승화된 몸’을 이미 덧입힘 상태로인지 아니면, 궁극적 그날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다.
 바울의 부활한 영체에 관한 편지를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살며, 약한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고전 15:42-44)을 믿었지만, 임박한 종말신앙을 가졌던 당시 바울은  ‘영적 몸으로 덧입는 존재변화 사건’은 임박한 그리스도 재림이 일어나는 종말의 날에 발생할 것이라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오늘날 대표적 현대신학자들은 이 신령한 ‘몸의 변화로서 영체에로의 변화입음’의 사건이 죽음직후에 일어난다고 본다. 소위 ‘중간시간’이란 시간 개념은 이미 상대적 시공제약을 초월한 영적 차원의 생명에게서는 의미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균진은 현대신학에서 죽음, 부활, 죽음이후  영원한 생명에 관련한 다양한 견해들을 철저히 검토하고 다음같이 말했다.

  그것은(영원한 생명)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표상과 인식의 한계 바깥에
  있다. 그것은 인식조건에 따라 인식 될 수 있는 사물들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우리의 세계의 물질적 시간과 공간의 도식을 연장시키는 것’ 은 옳지 않다.


김균진의 신학적 견해는 옳다. 성경에서 죽은자들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잠들었다’는 표현은 은유적 표현이지 객관적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가 아니다. 또한 구약학자였던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믿음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스올사상’에 갇혀있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죽은자의 사후생은 초기 임박한 종말론에 지배되었던 사도들이 생각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고전 15:18, 살전 4:14)이라는 표현처럼 피동적, 정태적, 단순한 기다림의 존재양태라고 보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의 충만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빛과 능력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그것에 대하여 합리적 설명을 하거나 심리적 상상묘사를 금기한다.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지금 살고있는 자나 이미 죽은자가 함께 관계되어 있다. 율겐 몰트만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하나님이 충만함)은 신적인 삶의 한 없는 충만함이다. 그것은 끝없이 창조적으로 자기를 전달하는 삶이요, 죽은 것과 사멸한 것을 살리는 넘치는 삶이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삶의 힘과 삶의 즐거움을 그것으로 부터 얻는 삶이요, 생동하게 된 모든 것이 깊은 기쁨과 큰 환호와 함께 답변  하는 삶의 원천이다.   

장공이 믿는 사후생은 몰트만이 미학적 신학의 필치로 설명한 ‘하나님의 충만함’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과 은혜로 살아있는 생명존재 양태이다. 죽음도 다른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롬8:38-39).

5. 나가는 말: 쟁점과 의미

  (1)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 부활체, 그리고 사후생 이해에서 남은 쟁점


  장공은 그의 성서관 곧 ‘성서적 실재론’(Biblical Realism)의 입장에 철저했기 때문에, 우리가 본 논문 제2장에서 살핀대로,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몸 그자체가 반드시 죽어야하는 ‘사멸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신학적 입장을 줄곧 주장했다.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진 것은 ‘정상태’ 곧 창조질서로서가 아니라  ‘변태’ 곧 죄로 말미암은  ‘원창조질서’에서의 일탈과 변질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의 근거로서 창세기 창조설화에 나타난 창조주의 창조행위를 두가지 질적으로 다른 행위로 구별하였는데, 자연질서에 속한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창조하는 방식과, 영적 질서에 속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직접 창조하시어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우리가 장공의 타락 이전의 본래적 인간은 그 몸 자체가 불사적인 영적 존재였고, 여타의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여 직접 창조주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견해에 접 할 때, 장공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새삼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앞에서 정리한 장공의 타락이전의 영적 몸으로서 본래적 인간창조 이해를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그의 입장이 마치 오늘날 소위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입장 곧 ‘젊은 지구창조론’의 입장 처럼 받아드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창조과학회’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젊은 지구창조론’의 특징을 신재식교수는 다음같이 요약한다. (i) 성서문자주의와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성서비평학을 거부한다. (ii) ‘창조진화’논쟁에서 우주창조를 6천년-1만년 전이라고 보며, 노아홍수를 역사적 사실로 보며 지구전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iii) 창세기 1-2장 말씀대로, 창조주는 생명의 종(種)마다 별도로 지금의 모습대로 창조했으며, 따라서 ‘종의 진화’는 부정된다. (iv) 죽음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저주선언(창3:14-19)에 따라 자연계에 들어왔고 인간은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였다.
 장공의 지론중에서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한 배려와 의중을 가지고 직접 창조하셨다는 견해, 그리고 죽음이 ‘정상태’가 아닌 ‘변태’로서 타락의 결과로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견해는 ‘젊은 지구창조론’의 견해 곧 ‘창조과학회’의 견해와 통하는 점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장공의 ‘창조-진화’ 관계론에 대한 견해는 ‘창조과학회’가 말하는 ‘젊은 지구창조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은 성서문자주의와 성서무오설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장공은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알수 있다.

  다윈은 생물진화의 요인을 외적 환경 즉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그 더 강한 힘으로 환경을 지배하는 놈이 좋은 씨를 남겨 ‘진화’된다고 했다. 그러나, 샤르뎅은 생물 자체안에 있는 스스로의 능동성이 새로운 창조에로 그를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심리적 계(Biosphere)에서,    약 100만년 전에 우리 유성(지구)에 가장 운명적인 순간이 오게 됐다. ‘인간의 출현’이다. 인간은      전 우주의 범위와 모든 과거의 계(지질界,생명, sphere)를 그 존재 안에 간직하면서, 그중 어느 하    나에도 해당시킬 수 없는 다른 계(sphere) 즉 그가 말하는 정신계(Noosphere), 능동적으로 창조하    는 지성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주, 자립, 독립된 창조하는 개체로서의 응결된 덩어리       다...... 백만년 걸린 하나님의 성업(聖業)을 똥 묻은 군화로 짓밟는 것이 ‘죄’가 아니겠는가?

위 인용문장을 신중히 살펴보면, 장공은 다윈의 ‘생명체는 진화한다’는 진화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이론설명중 소위 말하는 ‘자연선택론’이나 ‘적자생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에 비판적이다. 장공은 떼이야르 샤르뎅의 고생물학적 ‘창조적 진화론’ 요즘 학계용어로서 ‘진화론적 유신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볼수 있다. 신재식은 ‘진화론적 유신론’의 특징을 다음4가지로 압축한다. (i) 진화는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실이며, 진화의 전과정은 하나님이 이끈다. (ii) 신앙과 과학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보적이다. (iii) 생명의 다차원적 다양성과 계층구조를 긍정한다. (iv) 생명은 물리적 환원 곧 물질주의적 환원주의 관점을 가지고서는 제대로 설명 할수 없는 창발적 현상이라고 본다.
 장공의 ‘성서적 실재론’의 철저한 적용은 창세기 타락이전의 인간존재의 본래성을 죽는 운명에 필연적으로 휩싸인 ‘혈육적 죽을 몸’으로 보지 않고 ‘영적 몸’으로 보게 했다. 그러나, 장공의 입장이 ‘창조과학회’의 주장처럼 성경문자주의에 매이거나 ‘젊은 지구창조론’ 입장에 일치하지도 않는다. 도리혀 떼이야르 샤르뎅의 ‘창조적 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여기에 긴장 갈등이 있다.   

(2) 사후생에서 신자들이 덧입은 ‘영적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동일한 것인가의 문제.

  신자들의  사후생과 그리스도의 부활체에 관한  장공의 신학적 담론중에서 몇가지 좀더 분명하게 규명해야 할 과제가 발생한다. 그 과제들중 명료성을 요하는  세가지 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i) 구약성서학자였던 장공의 사후생 이해는 구약성서세계에서 말하는 소위 ‘스올사상’과 다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죽은자들의 세계랄 수 있는 ‘스올’은 생기가 없는곳, 살아있다고 말 할수 없는 그림자 같은 죽은자들의 집합소,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하고 죽은자들과의 교통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장공은 ‘사후생’을 역동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생명력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충만한 생명상태로 보았다. 그 상이성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ii)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죽음은 총체적 유한한 생명의 끝이며, 부활의 생명과 죽은자의  생명과는 아무런 연속성도 없다. 장공의 ‘사후생’은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죽음이해와 병립 할 수 있는가? (iii) 장공의 ‘사후생’에 대한 신앙담론에서 이미 온전하게 영화된 몸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체와 종말의 영적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영체 사이엔 차이가 있는가?  
 장공의 사후생 이해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스올사상’과 다르다. 장공은 구약성서학자였으나, 유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자의 부활이나, 보편적 만인부활 이전의 낙원에서 ‘영원한 삶’의 이해도, 장공의 경우는 헬라철학적 ‘영혼불멸론’과 다르다. 변증법적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죽음과 함께 유한존재로서 인간의 완전한 죽음’은  피조물인 인간편에서 볼 때  옳은 말이다. 인간편에서 보면, 죽음은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생명의 완전한 끝이다. 그러나, 장공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살아있다”는 신앙입장을 취한다. 죽은자들은 새로운 생명과 형체를 덧입는 것이고, 선물로서 받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와 다름없다.
 남는 문제는, 땅위에서 지녔던 몸이 영화되고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땅의 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간 신자들의 낙원에서의 ‘영체’가 본질상 같은 성질의 것인가 다른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다소 현학적 문제같지만  소홀히 여길 문제는 아니다. 장공은 양자사이의 뚜렷한 질적 차이를 언급하진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말한바, ‘영적 몸’을 덧입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의 몸이 ‘영화’된 것이다. 바울은 죽음에 직면 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벗은자들’로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혀주심’에 대하여 강조하였고, 그것을 이루게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후5:2-5). 장공은 바울의 견해에 동의한다.  

(3)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비젼이 지닌 현세적 삶의 중요성과 의미연관성 문제.

 마지막으로 살펴 볼 문제는 장공신학에서 ‘사후생’ 신앙은 ‘현세적 삶’의 중요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문제이다. 전통적 보수신앙이 말하는 입장은, 현세적 삶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인것, 불완전 한것, 언젠가는 폐기되어 없어질것, 사후생을 위한 준비단계의 것이라고 보았다. 과연 그런가?
 장공의 신학적 입장은 ‘현세’와 ‘래세’라고 규정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서, 인간의 합리적 두뇌기능이 이해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무궁성과 신비성 앞에 겸허 할 것을 요청한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러나 하나로 통전된 세계’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 세계를 장공의 독특한 신학적 어휘로서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주적’ 혹은 ‘범우주적’이라는 말은 시공연속체로서의 물리학적 대자연의 광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의 존재양식이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다차원적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다른 세계들은 그 고유한 질서속에서도 서로 분립되어있는 것 아니고, 통일성과 관계성과 의미연관성을 지닌 것이다. 비유하건대, 사람의 몸은 물리화학적 법칙 지배를 받는 생물적 차원, 심리정신적 차원, 영적 차원이 구별되면서도 통전된 ‘하나의 산 몸’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고 명명한 장공의 신학적 총괄언어는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에너지가 약동하면서 다양한 존재질서 차원이 어우러지고 서로 순환교통하는(perichoresis) 신묘한 ‘대생명 세계’로서 본 것이다. 지구의 삶은 단순히 그 준비단계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는 핵심적 삶의 단계이다. 장공의 사후생 신앙은 현세적 삶을 ‘잠시동안 머무는 임시정차 간이역’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결정되고 터놓이는 기초이자 최종목적(텔로스)으로서의 현세적 세계의 중요성과 현세적 삶의 의미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성경의 증언은 ‘새하늘과 새땅’이 하늘로서 이리로 내려온다는 비젼을 가지며(계21:1-7), 세상의 종말은 현세계의 ‘폐기와 멸절’이 아니라 ‘질적변화와 성취로서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구생태계의 위기와 자연파괴및 기후붕괴현상에 접하면서, 과학자들은 언젠가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에로 인류의 집단이주를 꿈꾸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녹색별인 지구행성은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천문학적 관점에서 작은 녹색행성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45억년간의 생명농사의 밭이며 독생자 예수의 보혈이 스며든 생명체이다. 코페루니쿠스 이전의 ‘지구중심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생명현실은 우주창조의 의미가 살아나느냐 죽는냐의 운명이 결정되는 ‘온생명체’(장회익)이며 ‘영적 정신계’(떼이야르 샤르뎅)이다. 장공의 사후생론은 죽음이후에 ‘유한한 생명이 영원화 되는 영적 사건’을 믿으면서도, 현세적 지구역사와 지구생명 현실의 중요성및 현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 한다는데 그 특징이 드러난다.

[참고자료]
1. 한신대학교 신학부교수단 편집, 『김재준 전집』, 총18권(한신대출판부, 1992)
2. 김균진, 『죽음의 신학』,(대한 기독교서회, 2002)
3. 율겐 몰트만(김균진역), 『오시는 하나님: 기독교 종말론』,(대한 기독교서회, 1997)
4. H. 포그리믈러(심상태역), 『죽음: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이해』,(바오로딸, 1998)
5. 김이곤, 『삶, 죽음, 그리고 죽음이후』, (프리칭아카데미, 2007)
6. 한국종교학회 편, 『죽음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창, 2001)
7. 삐에르 떼이야르 샤르댕(이문희역), 『신의 영역』,(분도출판사, 2010)
8. K. Barth, Church Dogmatics,III/2,The Doctrine of Creation,(T. & T Clark, 1960)
9. E. Brunner, Dogmatics,vol.III, Part.4, The Consummation in Eternity of the Dvine Self-Communication,(The Westminster Press, 1962)
10. Ted Peters & M.Hewlett,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Conflict, Conversation, and Convergence,(Abingdon Press,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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