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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모험을 노래한 이단자의 장시 :'대선언'(씨알의 소리, 통권217호,'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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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모험을 노래한 이단자의 장편시: ‘대 선언’

                                                    김경재

[1] 들어가는 말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의 시작활동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흰손’과 ‘대선언’ 이었다. 6.25전쟁은 한민족의 동족상잔 전쟁이면서 동시에 세계냉전시대의 모순이 한반도에서 폭발한 세계적 전쟁이었다. 산업시설 파괴나 주택파괴등 손실은 그만두고서라도 인명피해로 남북합하여 사상자 450만명을 낸  이 처참한 전쟁을 겪으면서, 함석헌은 그 누구보다도 깊게 인생과 종교와 국가와 문명을 새롭게 성찰했고, 그의 사유체계에서 결정적 전회를 이루게 되었다.  ‘대선언’은 6.25를 겪으면서 함석헌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허물을 벗는 결과로서 나타난 작품이었다. 이 시를 마지막으로 함석헌은 더 이상 시작품을 내놓지 않는다.
  특히 장편시 ‘대선언’은 3년1개월 지속되던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결(1953.7월27일)을 앞두고 소련·중국·북한이 한편된 북측과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 16개국이 한 편이 된 남측의 줄다리기 속에서 전선의 포성이 한반도를 할퀴고 있을 때 세상에 태어났다. 함석헌은 부산항구에서 전쟁을 비판하는 문명 비판시와는  무관한 한 편의 종교시를 예언 처럼 쏟아냈다.     ‘대선언’의 시 첫구절에 이 시의 탄생일자를 말하고 있다. 그 날은 우연하게도 미국 독립기념일 이었으니 1953년 7월4일 이었다. 겉으로 보면 ‘종교시’이지만 그 가장 깊은 본질은 전쟁을 포함한 옛시대 문명의 종말을 알리고 새문명의 탄생을 고지하는 생명의 본질과 참을 추구하는 철학적 시라고 말 할 수 있다.
  ‘대선언’이라는 작품은 시라면 시요 종교개혁적 신학선언 이라면 선언이다. 시의 제목으로서 볼지라도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항상 진리 앞에 겸허하기를  남보다 뒤지지 않은 함석헌의 성품을 아는 사람은 ‘대선언’이라는 제목자체가 함석헌 답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왜 시의 제목을 그렇게 내걸었을가? 작품의 내용은 생명철학적이고 진리론의 핵심을 다루지만, 구체적으론 그가 몸담고 지냈던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종교형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무서운 이단아의 고백적 선언이다.
  함석헌의 ‘대선언’을 읽노라면 13세기 교회개혁의 수도승 요아킴을 떠오르게 한다. 요아킴 수도승은 교황권이 절정에 도달했던 그 시기에, 하나님의 시대경륜은 일체권위가 부정되고 자율과 기쁨으로 특징되는 ‘성령의 제3시대’가 시작된다고 선언했다. 요아킴 수도자는 이단파문을 받았다. 중세기였다면 함석헌도 이단자로서 당연히 ‘화형처형’죄목에 해당한 내용을 선언하고 있다.
   본론에서 해설을 가하면 더 밝혀지겠지만,  고도의 은유적 표현을 구사하면서 중세기에 절정에 이르렀고 오늘도 계속되는 로마가톨릭 신앙체계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신앙체계와, 종교개혁정신을 더 철저하게 관철시키려고 나온 일본 우치무라 간죠의 ‘무교회 신앙’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씨사상’의 진수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의 진리이해를 이해해야 하고, 그의 진리이해는 그의 종교이해를 이해해야한다.  그의 종교이해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가 구체적으로 몸담았던 그리스도교라는 역사적 종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그 역사적 한계를 끝없이 초극하려고 했던 가를 이해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장편시 ‘대선언’은 독자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종교유무를 넘어서 반드시 한번 깊게 음미 해보아야 할 중요한 시작품이 되는 것이다.
  ‘대선언’은 장편시이다. 문단으로서만도 22문단이요 시행으로서는 무려127행이 되는 장편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시를 가급적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편의상 다섯마당으로 구분하여 차근 차근 음미하려고 한다.

[2] 첫째마당 : 문명의 지반이 흔들리는 소용돌이 틈바구니에 서서

   (텍스트)
    일천 구백 오십 삼년 칠월 사일
       그 옛날 구대륙의 낡은 집 뛰쳐난 젊은 역사의 혼
       대서양 날뛰는 물결타고 건너 새 대륙에 올라
       뉴잉글랜드 언덕 높이 자유 종 울려
       새 시대의 아침을 외쳤던  이 날

    여기 아시아의 큰 길목
      세기의 새 아들 낳으려 아픔에 떠는 고난의 여왕의 꽃동산의 동남쪽 끝에 서서   
      뒤로 세계 갈라 쥐는 두 무리 싸움에 타 녹는 땅을 돌아보며
      앞으로 더 큰 싸움 나타내는 물과 바위 어우러져 우는 바다를 내다보며
      밀려드는 평화의 물결 삼켜버리자 이빨 옥무는
      노한 용의 내젓는 대가리를 발 밑에 밟고 서서

   나는 큰 말을 내붙이노라
      버마재비 큰길 위 수리 막으려 도끼를 들듯이
      계자 씨 얼어붙은 땅의 가슴을 박차려 발꿈치를 들듯이
      어안이 벙벙한 소리
      어림없이 내 하노라

  들으라 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그 사이에 소용돌이쳐 오르는 인간의 회리바람이여

이상의 제1마당을 구성하는 4문단은 장편시 ‘대선언’의 서막에 해당한다. ‘대선언’ 곧 ‘큰 말’을  내붙이는 세계사적 시대 상황, 그리고 감히 큰 말을 내붙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작가의 심정을 말한다. 버마재비가  큰 길위에서 자기를 덮치려 달려드는 맹금류 수리의 발톱에 맞서, 가당치도 않게 작은 버마재비의 톱날 앞발을 치켜들고 덮쳐오는 맹금류 수리에 대항하는 장면과 대조시킨다. 버마재비란 사마귀과의 곤충이다. 몸은 가늘고 삼각형 모양의 머리를 가지고, 앞다리가 길고 그 끝이 낫처럼 생긴 돌기가 있어 벌래잡기에 알맞게 진화한 곤충이다. 버마재비의 낫처럼 생긴 긴 앞발이 아무리 무섭기로서니 맹금류 수리발톱을 당해낼 수 있을가? 저자 함석한은 자기 입장이란 것이, 먹이를 낙아채려고 공중을 선회하는 날카로운 맹금류 수리의 발톱같은  현실세력에 비할 때, 버마재비의 앞발처럼 동키호테의 만용처럼  약한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고 계자씨가 솟구치듯이 약하지만 막을 수 없는 생명의 엄숙한 명령의 힘으로 이 큰 말을 외친다고 고백한다. 구약성경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말씀’이 그들의 입에 위탁될 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음과 동일한 심정을 피력한다. 시대가 역사의 카이로스, 곧 문명의 전환기 이라는 것을 시인은 절감한다. 세계현실은  용들의 싸움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미소양대국을 중심으로한 험악한 냉전의 시작의 때 이다. 어제까지 일본을 항복시키려고 연합했던 연합군이 적대적 용과 범으로 변모한다.
 무엇보다도, 이 장편시 ‘대선언’을 쓰는 작가의 시대의식은 6.25동란을  겪은  한민족 한반도의 생명현실을 ‘세기의 새 아들 낳으려 아픔에 떠는 고난의 여왕’으로서 이해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민족의 고난과 한반도의 전쟁의 비극은 새로운 문명의 새 시대를 낳으려는 산고의 진통으로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대선언’은 바로 이 새문명, 새 아기의 탄생이 실패로 끝나서 산모와 태아가 동시에 죽고 산파들이 낭패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거쳐야하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 무엇인가를 종교적 은유와 종파적 상징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제1마당은 그래서 이 장편시 ‘대선언’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임을 알리는 중요한 마당이다.

[3] 둘째마당: 이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텍스트)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오 나로 늘 새 끝을 들게 합소서

 앞으로밖에 모르는 몰아치는 영이 이를 명한다
    내 감히 자신 있어 지어먹는 맘에서랴
    내 속에 분명 딴 뜻을 나는 듣노라
    나의 나직 하잠에는 거슬리는 뜻을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자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미움은 무서움 설으고 무서움은 허깨비를 낳느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담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둘째마당은 본격적으로 시인의 각오하는 바를 선언한다.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이단’소리 들을가봐  보신에 신경쓰는 지도자들과 달리, 이단이라고 비방하는 소릴 들을 가봐 자신도 긴가민가하는 정통교리에 목줄꿰어 끌려다니는 지도자들과는 달리, 시인은 정말 이단소리 듣지못해 도리혀 걱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들어간 사람, 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이단도 없고 정통도 없다. 다만 자기의 조그만한 머리통으로 진리를 구획하고 재단하고 통치하려는 교회주의자들의 눈에 비치는 헛깨비요 밥통그릇일 뿐이다.
 시인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울타리에서 자랐고, 구미교육을 통하여 기독교가 역사속에서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지도 잘 알고 인정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진리자체 곧 참은 기독교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이고 참과 하나된 경험을 말하는 증언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참과 역사적 종교인 기독교가 일치한다면 좋으련만 양자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경쟁이 생기고, 우열다툼이 발생한다면 기꺼이 참을 선택하고 교회에 대하여 반대자가 되어 죽으려 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인류종교사가 큰 깨달음에 이른 시대이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역사적 문명을 이끌어온 위대한 세계적 종교들로서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그리스도교등이 다 위대한 전통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자기전통이 참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진리자체를 독점한다고 우쭐댈 수 없음을 깨들은 시기였다. 앞에 열거한 세계 6대종교 중에서 특정종교보다 참이 더 위대하며, 역사적 특정 종교는 참 그 자체를 가리키는 손가락들임을 인정하는 점에서 가장 인색한 종교가 그리스도교 종교임을 시인은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이단자 소릴 들으면서도 증언해야 한다는 자기 속의 영적 속삭임을 듣기 때문에, 나직한 자세로 살려는 자기 성품에 맞지 않는 대선언을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특히 한국 개신교 교회의 보수적 독단주의와 독선주의는 심각한 종교적 질병을 앓고 있다. 함석헌은 그 점을 고발하고 교회주의와 교권에 갇힐 수 없는 영의 자유를 엄숙히 선언한다.

[4] 셋째마당: 생명은 가장 여린 끝에, 어렴풋하고 미세한 파동처럼 움직임

(텍스트)
   생명은 난 끝에 있나니
      레바논 백향목의 자람 그 순 끝에
      역사의 나감 시대의 뾰죽한 끝에
      거룩한 영의 피어남 맘의 풋 끝에
      묵은 가지의 짙은 그늘을 수북이 두고
      생명의 원줄기는  사정없이 올라만 가나니

   부사산 만고 눈물 흘러넘쳐 윗뎀베르히 높은 숲에 대들었듯이
   태평양은 또 그 무한의 구름을 일으켜 그 봉우리를 덮고야 말리라
      굳어진 가톨릭 성다락 북유럽 광산군의 망치에 부셔졌고
      얼크러진 프로테스탄트 그물 동아시아 무사의 칼에 찍혔고
      그리고 역사는 또 나갔더라
      무섭게 날개치는 그 바퀴가 오늘 너와 나를 끌지 안나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치 말고 내 외치자
      물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영의 안테나에 간신히 느껴진 파동을 너는 가장 큰 마이크로 부르짖으라
      길은 뵐듯 말 듯
      참은 들릴 듯 말 듯
      삶은 잡힐 듯 안 잡힐 듯
      말하는 네 입이 아니
      행하는 네 몸이 아니
      아는 내 맘이 아니

   시대 떨어진 삭은 못으로
     흐르는 역사를 못박아는 못 놓는다
     식물에 양치류 지금도 있더라만
     동물에 파충류 오히려 살더라만
     그들은 이미 이 날 이 지구의 주인은 아니더라.
      
넷째마당은 ‘대선언’의 시내용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시인이 체험하고 깨달은 진리가 드러나는 미묘하고도 신비한 역설적 참 모습을 노래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시인다운 예민한 맘의 안테나를 가지고서 표현에 있어서 가장 절묘한 시적 형상화로서 진리를 드러낸다.
 우선 생명이란 항상 겉으로보면 가장 여리고 보잘것 없게 보이는 생명원줄기의 끝에 있으며, 끝에서 새것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거목의 나뭇가지 맨끝 새순에서, 날아가는 역사의  화살에서는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맨끝 화살촉에서, 영음을 듣는 맘은 그 풋풋한 순수맘 끝자락에서, 생명은 새로움과 창조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완성된 것, 원숙한 것, 점잖고 질서에 어울린 것, 형태지어진 것, 몸통과 가지둥치와 이미 무성한 잎이 달린 가지에서는 정말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리스도 교회사에서 그 사례를 들어 예증한다. 중세 가톨릭의 단단한 성체가 북유럽 독일 아이스레벤 광부의 아들 마틴 루터에 의해 개혁되었듯이, 부사산 봉우리 정기타고 자란 무사의 후예  우치무라 간죠가 북부독일 윗덴베르그 도시의 아들 루터의 종교개혁 성루에 새로운 도전장을 냈듯이, 역사는 새로운 태평양의 개혁구름을 일으켜 우치무라 간죠의 무교회신앙을 넘어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저자 시인은 자기의 정신적 스승이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운집해있는 무교회신앙의 울타리도 넘어서야하는 진리의 명령을 듣고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시작을 감지하는 영의 안테나와 그 절박한 심정을, 물냄세맡고 달리는 사막의 낙타에 비유했다. 진리의 빛을 잡으려고 빛을 그리워하여 벋어나가려는 영의 존재론적 향일성을  움 속의 허우적 거리는 새싹의 몸짓으로 비유하였다. 진리는 항상 그렇게 현시되고 포촉된다는 것이다.  뵐듯 말듯, 들릴 듯 안들릴 듯, 잡힐 듯 안잡힐 듯, 진리는 언제나 모호성을 동반하는 확실성을 가지고 생명을 부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예언자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영의 안테나에 감지되는 진리의 파동을 크게 외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지구 생태계 안에는 지난 생명의 진화사 가운데서 한 때 지구를 덮고 지배했던 양치류나 파충류가 아직도 존재하지만, 그들은 이미 지구생태계에서 주인노릇하는 생명이 아니듯이, 정신적 영적 운동사에서도 과거의 주류가 오늘도 여전히 주류일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본시 끊임없는 창조적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위와 전통에 안주하는 무리들은 골동품을 관리하며 먹고사는 무리들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5] 넷째마당: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 살아가는 진리 모험가의 용기와 희망

(텍스트)
 
  자라는 생명은 또 한 매디를 맺었노라
  역사는 자랑하듯 새로 페이지를 뒤집는다
     중세의 맘 착한 일의 무거운 짐 들치고 났듯이
     오늘의 정신은 복음주의의 굳은 덮개를 터치려 않나
     아직도 도마뱀 같이 갑옷 입는 교파 교파의
     제각기 닦아 들고 나서는 가지가지의 무기는 문제도 않된다

  ‘나’의 걸음은 쾌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육신
     져서 날리는 연꽃인 듯 아름답지 않으냐
     의롭담 받고 나서는 양심의 얼굴
     신부 방에서 나오는 신랑인듯 빛나지 않느냐

  그러나 시대의 까꿉서는 재를 넘는 역사의 바퀴소리
  그것은 무엇에나 비 할 수 있게 감격스런 것인가
     보이는 세계의 지평선이 깨지고
     보다 무한한 것 너머에 나타나며
     이제껏 안 역사 스스로 쫄아들어
     없을 수는 없으나 까만 한 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그래 예언의 이루어짐을 몸으로 보는 자리
     아니다 절대의 음악에 이 내가 녹아버리는 시간

 나는 옛날의 모험가와 한가지로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리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흐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넷째마당은 셋째마당의 톤을 이어가면서도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교파주의 시대가 이미 지났음을 엄숙히 선포한다. 개신교 교파주의는, 특히 한국에서, 스스로 ‘복음주의’라는 호칭으로 영원한 구원진리를 보존하고 파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좌충우돌 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문제의 종교집단이 되어가고 있는지 오래다. 함석헌은 복음주의라고 자처하는  개신교의 교파주의를  도마뱀같이 갑옷을 입고 보호색으로 위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몸짓으로 본다. 교파마다 이단 감시및 검증재판부가 있어서 정통교리 잣대로서 이단정죄를 일삼지만 그런 무기는 이미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넷째마당의 둘째연 첫행에 나오는 따옴표를 친 ‘나’는 누구를 말함인가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이면서 그와 하나된 체험을 한 함석헌 시인 자신을 말하기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육신”이란 상징적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심을  상징하기도 하고, 정통교리적 십자가 대속교리를 벗어나는 시인자신을 말하기도 한다. 어느경우나 그 걸음은 경쾌하고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정통교리적 속죄교리를 통하지 않고서도 시인의 양심은 ‘의롭다고 인정받고’ 나서는 걸음인지라 양심은 두렵지도 않고 도리혀 신부 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밝게 빛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시인은 역사가 재를 넘어가듯이 전환기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역사의 근본적 전환기는 위험하고 두렵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것의 도래를 기다림으로  감격스런 일이라고 강조한다.
 시인은 사도 바울을 옛날의 모험가라고 비유하면서 앞으로 달려나가는 역사의 ‘수리채’를 메고 달려보련다고 노래한다. ‘수리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글 사전에도 없는 단어이다. 어느 물건이나 기구가 고장 날 때 수리하는 기구를 담은 짐가방 을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도바울이 천막깁는 기능공 전문직 업을 하면서 전도여행을 했듯이, 시인 함석헌은 자기의 사명을 찢어진 낡은 역사를 수리하는 자로서 자기사명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수리공의 역사 시대의식이다.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고 손에 잡히지 않았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분명하진 않지만, 지난 뒤에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앞에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희망의 의식이다.

[6] 다섯째마당: 변모산의 신비체험 같은 신비가의 영성시대 열린다

(텍스트)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자의 원수가 되면서 슬퍼하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리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그 향 냄세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내 다시 내려오는 때면
     시내 산  올랐던 모세 돌아오듯
     헤르몬 꼭대기 섰던 사람 아닌 사람  내려오듯이
     구름 위 끌려 올라갔다 내 다시 내려오는 때면

 내 다시 살아있지 못하리라
 거룩한 불꽃에 내 연한 얼굴 끄슬리고
 독한 생명의 향기에 내 약한 가슴 녹아
     풀무에서 튀어나는 쇠찌기처럼
     내 몸 쫄아들어 시체 되어 골 바닥에 굴러 떨어지리라

여섯째마당은 시인의 신비체험의 여운을 남기는 마당이다. 왜 시인은 평소 자신의 나직하게 살자는 겸손의 성격과도 전혀다르게 어울리지 않는 시제목으로 ‘대선언’이라고 내걸면서 스스로 이단자가 되려는 것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낡은 종교에 대하여 이단자가 되려는 것이다. 낡은 종교에 이단자가 되려는 이유는 새로운 종교의 믿는이가 되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낡은 종교는 무엇을 의미했고, 새종교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시인이 초극하려는 낡은 종교는 앞에서 누차 언급했듯이 전통종교들이요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서구문명을 키워온 그리스도교 종교이다. 그 첫째 형태로는 로마가톨릭 종교와 희랍정교회를 말하고 둘째 형태로는 모든 교파적인 개신교 종교요 셋째 형태로는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깊이 몸을 담고 영향받았던 우치무라 간죠선생이 조사로 되어있는 무교회 종교이다. 특히 무교회 신앙동지들과는 <성서조선> 잡지를 함께 했고, 독립운동을 함께 했고, 함께 모여 여름겨울이면 신앙수련회를 함께하던 신앙 동지들이 몸을 담고 있는 종교집단이었다.  무교회 신앙집단에서 탈출은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림과 같고,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요, 가장 사랑하는 자들로 부터 원수같은 놈이라고 비방받는 슬픈 일이다.
 왜 무교회 신앙집단을 떠나야하는 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섯째마당의 시구들을 깊이 음미해보면 그 근본적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무교회주의 신앙집단이 이단적 교리를 가르쳐서도 아니요, 성서연구에 깊이 파고들어가 말씀의 생수를 마시지 않음도 아니요,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자세가 진실하고 고상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다만 한가지 이유를 말하라 한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종교’가 새 시대의 참종교 자격인데, 진리를 추구하는 진지성을 갖추었어도 영에 이끌리는 신비적 차원을 결여함에 있지 않을가? 다시말해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하고도 윤리적인 고상함을 갖추었어도 ‘영적 종교’가 줄 수 있는 경전문자에 메이지 않는 자유, 특정한 역사적 종교에 메이지 않는 열린신앙, 속죄론 같은 특정교리의 정통해석에 메이지 않는 영적자유인 됨 등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가?
 20세기 가톨릭의 대표적 교수인 칼 라너는 “미래의 기독교는 신비적인 것이 아니면 않된다”고 말했다. 이때 신비적인(mystic) 것의 본질은 무슨 독특한 신비체험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종교, 교리적인 종교, 제도적이고 종교의례적인 종교, 교단의 권위체계와 전통의 거룩한 힘에 의존하는 종교를 넘어서서, 믿는이들의 맘에 진리의 영이 직접 속삭이고 자유하게하며 기쁨과 ‘세속 한 복판에서의 초월경험’을 가능케하는 진리체험을 말한다. 도덕성을 넘어선 영성이며, 합리성을 넘어선 초합리성이며, 성속이분법과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을 넘어선 성속일여의 영성종교를 말한다.
 다섯째 마당에서 시인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는 거룩체험을 한 사례(출애굽기 24:12-18)와 예수가 공생에 말년에 베드로,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변모산에 올라 산정상에서 체험한 ‘변모산상의 신비체험 이야기’(루가복음 9:28-36)를  은유적 사례로 들고 있다. 줄여말하면, 시인이 내어다보는 미래문명은 소위 모더니즘(Modernism)의 신념인 합리성, 과학성, 중산계층의 도덕성, 역사상대주의, 가치판단 획일주의, 특정문명 우월주의등을 초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7] 여섯째 마당 : 에필로그

(텍스트)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내 부탁한다
  그 때도 나를 쓸어안기를 부디 잊지 말라
     내 그대를 저버렸음
     미움에서도 교만에서도 다 아니요
     코카서스 높은 봉 만년 흰 눈 위에
     즐겨 저주받은 자의 이름 들으며
     영원한 고통의 불 술잔 기쁨으로 마시던
     저 이방의 영웅같이
     나도 모르는 막아낼 수 없는 영에 끌려
     하늘에 올라가
     영원의 빛 따 내려다 그대들 눈동자에 쏟아넣고
     사라지지 않는 향기 받아다 그대들 코에 불어넣어
     그대들로 이 역사의 법궤를 메고 요단을 건너는
     거룩한 제사가 되게하기 위해서임을
     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그것을 빌며 그 빛을
     그 빛을 먹고 죽었음을
     그 말없는 시체를 안는 찰나
     그대들은 맡아 얻으리라

 장편시 ‘대선언’의 여섯째마당의 분위기는 마지막 유언을 듣는 기분이며 장엄하고 비장하다. 그러나, 단지 슬픈 이별노래가 아니라 왜 ‘대선언’의 시를 쓰고, 즐겨 이단자가 되었으며, 홀로 고독하고  버림받은자 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했는가 그 근본 목적을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비극적 운명을 노래한  희랍신화적 희곡을 은유로 들어 마지막으로 밝히고 있다. 시인의 관심은  좁은 종교교리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역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는 찰나 이스라엘 민족을 가로막는 요단강물처럼 거너야 할 ‘역사의 강’이 있다는 것이다. 그 강을 건널 때, 모세의 지휘를 받은 제사장들은 법궤를 둘러메고 물살 센 요단강 강물 속에 발을 딛고 있을 때, 험한 강물은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이 강을 무사히 건냈다는 고대 이스라엘백성의 가나안 입주에 관계된 고사(여호수아 3:7-17)에 기초하여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 여섯째마당에서 중요한 키워드(key words)는 ‘영원한 빛’, ‘역사의 법궤’, 그리고 ‘법궤를 메고 요단을 건너는 제사장 무리’ 세마디 은유적 표현이다. 영원한 빛, 하늘의 그 빛을 여러차례 강조하는 것은, 그가 말년에 귀의한 퀘이커 신앙공동체가 중요하게 말하는 ‘내면의 빛’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새시대 종교의 핵심은 사람들 맘 속에 초월적인 ‘내면의 빛’이 문제인 것이지 종교단체의 크기나 외모나 정치사회적 힘 행사가  본질이 아니란 강조이다.
  ‘역사의 법궤’란  함석헌으로 말하면 ‘역사의 의미’이다. 인류문명 역사의 의미가 살아남느냐 죽고 마느냐의 갈림길에 인류역사가 직면하고 있다는 카이로스 의식을 나타낸다.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는 제사장들’이라는 은유는 한민족이 그 책임을 자각하여 감당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방후 분단의 비극과 450만명의 인명희생자를 낸 동족상잔의 6.25가 생각없는 백성들의 허수아비 놀음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반도가 제국주의자들의 군사기지로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강대국간 이해갈등이 계속되고, 남북한 에서는 시대착오적 정치꾼들의 냉전시대 좌우파 극렬주의가 조국과 민족을 팔아가면서 씨들을 우롱하며, 계시종교라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독선주의적 종교잡상배들의 만용과 성직매매가 계속되며,  이단과 정통 논쟁으로 밥그릇 싸움하는 한국현실에서, 시인의 ‘대선언’은 독자들의 바른 음미를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시’라고 말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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