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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대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개신교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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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대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개신교의 입장에서-


김경재 목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 한신대 교수)
http://soombat.org

[1] 개신교의 여러갈래와 종교갈등은 개신교의  공동책임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전래 된지는 불과  120년 정도밖에 않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개신교는 짧은  역사를 지닌 종파이다.  해방직후 총 개신교 숫자는 60만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1960년대 초에 겨우 100만명 정도의 신도숫자를 가졌다.  1960-80년대 한국사회의 급격한 사회변동 기간 곧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교세가 1,00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통계숫자의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가 통계적 숫자로서 폭발적 증가를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그 중 얼마가 부끄럽지않는 진정한 알곡 신도이고, 얼마가  형식적인 쭉정이  신도인지를 분별해내기는 난해하지만, 필자의 주관적 판단으로서는 알곡신도는 50%를 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신교의 급성장은 내실의 부실성을 초래하게 되었고, 우후죽순처럼 외형적으로만 확장해가는 개신교의 선교 전도집단들과  별의별 교파중심 및 개교회 지도인물 중심의  갈래들이 '개신교 간판'아래 종교사회학적으로 분류된다는데 있다. 그러나 사실 개신교를 통합하는 기구적 통합조직도 없고, 개신교라고 스스로 자칭하는 신도들을 신앙적으로 교도하고, 견제하고, 통제할 실질적 교회조직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1970년대 이후 급증한  개신교 극단적 보수신도들의 타종교와의 갈등, 특히 불교훼불사건을 비롯한 불교와의 갈등을 개신교측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있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파와 갈래들만이 아니라, 아무런 통제를 받지아니하고 '종교자유'라는 명분아래 횡횡하는 사이비 종교행태와  무자격 성직자들의 난무에도 큰 원인이 있다.
  필자는 한국 개신교가  한국 전통종교들과 갈등을 초래하는 문제 종파 집단으로서 일반인에게 비춰지게 된데 대하여, 자괴감과 송구한 맘을 금할 수 없으며 책임의 일단을 아니가질 수 없다.  왜 한국 개신교는 종교간의  대화협력에 가장 소극적이고 종교갈등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종파가 되어있는가 그 핵심 원인을 분석하고,  그 극복대안을 제시해보려 한다.

[2] 개신교의 종교갈등 유발 원인과 그 치유대책  

 질병의 원인을 알면 질병을 치료할 길이 열릴 것이다. 비록 그 치유기간이 길고 환자, 환자가족, 그리고  의사가 모두 함께 인내를 가지고 노력해야하지만, 치유의 길은 병 원인을 찾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 길이 비록 멀어도 그 길을 가야한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갈등 발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다른 왕도는 없다. 개신교의 종교갈등 고질병의 원인을 아래에서 네가지로 진단하고 그에 따른 치유방도를 제시하겠다.
 첫째, 개신교를 탄생시킨 근본 원동력인 '성경주의'가 변질하여,  문자적으로 절대진리를 수록하고 있는 계시책으로서 성경을 절대화되어, '성경무오설'을 신봉하는 개신교도가 많기 때문이다.
  성경은 불교팔만대장경 처럼 참으로 위대한 책인 것이다. 그 안에 우주가 다 들어있고 삼라만법의 이치와 구원의 길이 다 들어 있다. 성경은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과 같이 높은 진리체험, 구원체험을 다 기록해 놓은 위대한 책이다. 수천년동안 한국역사 속에 불교,유교,도교등 세계적 종교가 종교문화사를 이룩해왔지만, 경전을 평범한 민중들이 다 읽고 그 안에 내포된 영적 진리에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에야  처음 있었던  일이다.
  본래 중동지방 셈종족을 그 뿌리로해서 발생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그러하지만 특히 기독교는 그 경전이 내포한 진리의 힘이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민초들이 첨으로  성경이라는 '진리의 창고, 진리의 바다'에 직접 접하고서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그 성경을 사랑하고 그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려고 맘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도들의 신앙체질을 이해하려면 한국 개신교도들이 엄청나게 성경을 사랑하고 많이 읽고 모든 종교적 진리판단을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을 규범으로하여 판단을 내리려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그 궁금증이 풀릴 수 있다.
  그 치유방법은 개신교도들이 성경을 사랑하는 일과 성경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하여 우상화 하는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뜨도록 해 주는 일에서 찾아야 한다.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종교구원문제에 있어서 "종교의례와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갈파했는데, 문자의 한계와 독소를 잘 지적한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높고 깊은 진리와 구원체험을 경험한 신앙인들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언어와 문화적 사회적 상황에 담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성경은 만백성을 구원하기에 족한 진리를 담고있는 인류의 위대한 경전이지만,  '진리자체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성경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다. 개신교도들은 그 점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성경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성경문자주의에 빠져서, 자기와 남을 괴롭게하는 종교중독증에 희생이 되지않을 것이다.
  둘째, 한국 개신교의 종교갈등 원인은 초기선교사들과 그들에게서 전수받은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에 집착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기독교해석의 편협성에 있다.
  19세기 말 한국의 개화기에 복음을 들고 온 초기 선교사들은 위대한 공헌을 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서   무지와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민초들을 인간화 시키는데 큰 공헌했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인 선교사들을 제외하고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신학으로 훈련받고 무장된 전도자 들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위대한 종교를 깊이 알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극복되고 정복되어야할 종교전통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이 초기 한국 개신교 종교지도자들 양육교육을 전담했다.
  제2차바티칸 공의회(1962-65)와 뉴델리에서 회집한 제3차 세계교회협의회(1961)이전까지, 거의 지난 2,000간 기독교 신학자들과 교회성직자들은,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계시종교이며, 다른 종교들은 우상종교이던지 기껏해야 자연종교로서 도덕적 종교 수준을 넘지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선 보수적 기독교 집단은 타종교에 대하여 공격적태도를 취하거나 정복주의를 무의식중에 갖게된다.
  이 치명적 질병의 치유를 위하여 서구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심한 열병을 지금도 않고 있는 형국이지만, 한국 개신교는 세계 기독교계의 창조적 변화를 향한 진통과 치유노력을 오불관언 하는 셈이다.  아니, 도리혀 그러한 서구 진보적 기독교의 자기성찰의 바람이 한국 개신교에도 불어닥칠가 봐서 더욱 집안 단속을 견고이 하고 보수정통신학의 성체를 단단히 강화한다. 그런 보수적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신앙지도를 받는 한국 개신교도들은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공격적이고 종교갈등을 일으키는 2차적 원인이 된다.
  치유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문과 세계기독교협의회(WCC)의 선언문들이 선언한대로, 하나님의 구원경륜및 역사섭리가  서양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전통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세계보편종교들을 통해서도 일해 오셨음을 받아드리는 포용적 열린자세가 요청된다. 다원주의 입장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지만, 지난 2000년동안 서구 기독교가 지닌 배타적, 독선적, 정복적 태도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구체적 치유의 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카톨릭과 세계교회협의회 진보적 기독교 공동체가 비기독교 종교전통에 대하여 어떻게 열린태도, 상호 존중과 상호배움의 태도, 상호협동과 상호성장을 지향하는 태도를 견지하는가를 귀를 열고 배워야한다. 한국 개신교만이 세계기독교계의 변화소리에 문을 닫고 우문정책을 지속 할 수 없다. 그래야 개신교 역시 더욱 역동적 종교로서 역사 속에서 공헌 할 수 있게된다.
셋째, 개신교가  불교와의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불교진리에 대한 무지에 기인한다.
 위에서 언급한 첫째와 둘째 원인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한국 개신교도로 하여금 불교에대하여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관심과 애정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불교에 대하여 불자들과 불교학자들은 전혀다른 선입관이 있을 것이다. 불교는 1,500년 이상 한민족을 교화하고 양육해왔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불교에 대하여 어느정도 알고있을 것이고, 태양처럼 자명한 보편적인 불교진리를 도대체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불교를 어느정도 알아야하는 것은 한국인의 마땅한 의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불자들의 선입관이다.
 일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인상은 매우 천박하며 편파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가정이 불교에 귀의하거나 부모님 손을 잡고 성장하면서 자주 절을 찾아가지 않는 한국인 수는 국민중 약 70% 이상이다.  불자들이 아닌 보통사람 한국민들의  불교에 대한 인상은 초중고등 학생시절 소풍 때, 문화재 사찰을 방문하여  받은 인상이 전부일 수 있다.  불교사찰 법당의  단청이 주는 원색적 색감, 굳게닫힌 대웅전 안에 존치된 불상들,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 만난 무서운 사천왕의 형상들, 풍경소리, 그리고 삭발한 스님들의 무색에 가까운 회색법복이 주는 초세간적 인상들 ...그런 감정들이 전부인 것이다.  대부분 불교에 관한 글들이 한자로 되어있던지, 번역서일지라도 그저 한자를 음역한 것이라서 몸에 와 닿지를 않으며, 과거 특정시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종교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더욱이 불교는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종교라고 개신교도들은 접촉자체를 터부시하기  때문에, 어지간히 용기있는 목회자들 서재에서 조차도 불교에 관한 책들을 발견하기 가 어려운 것이다.
  "종은 종치는 자의 힘만큼 울린다"는 말이 있다. 불교라는 진리가 아무리 위대할 지라도, 그 진리의 종을 치는 힘이 전혀 없을 땐 아무런 진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만큼 들리고, 아는만큼 이해되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무지의 소치를 한국 개신교도들의 무식의 소치로서만 돌려서는 않된다. 나는 이점에 있어서 한국 불교지도층의 맹성을 감히 촉구하고 싶은 것이다. 훼불사건을 일으키는 무지몽매한 광신도 같은 일부 개신교신자일지라도, 그 사람은 한국사람이고 한국에서 자라났다. 한국 땅에서 삶을 유지한다고해서 자명하게 불교진리를 다 이해하고 접촉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불교 지도자들이 적지않게 많이 있다. 한국불교가 '호국불교'의 전통임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1,500년동안 왕족과 귀족들의 불사만을 위해 공을 들이는 동안 수많은 이 땅의  민중 들은, 그림 속에서 보는 쌀법처럼 도대체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지못하고 진리에 배고픈체로 버려져왔던 것이다. 알고보면 한국 개신교도들, 훼불사건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은  한국 기독교계와 불교계 지도자들이 가장 그 책임을 공동으로 통감해야하는 희생자들인지 모른다.
 불상들이 종교적 상징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구약시대 우상물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상징신학을 무시해온 400년 개신교의 업보이다.   같은 불교진리를 공유하면서도 불상을 법당에 존치하지 않는 원불교에 대한 한국 개신교도들의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가 원불교의 근본교리나 진리체게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않는 것만 보아도, 훼불사건의 직접동기는 불교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불상이 지니는 종교상징성에 대한 이해의 결핍에서 부터 온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와 한국불교의 진정한 화해와 대화 협력은 서로를 깊이 알고 이해하는 상호배움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 역사의 미래만이 아니라 인류미래 종교문화의 큰 성숙의 계기는 위대한 세계보편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배움을 통한 상호변화와 사호성숙과 협력에 달려있다. 대중강연, 홍보책자발간, 예술문학 작품등을 통한 상호배움, 상호방문과 초청강연, 생태환경운동과 통일운동, 빈민구제운동, 인터넷을 이용한 종교간의 대화협력 마당등  서로를 배우고 협력하는 길은 얼마든지 개발하면 가능하다. 성직자 양성의 교과과정 속에 타종교에 대한 이해과정을 필수과목으로 넣는 것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넷째,경쟁적 포교정책, 선교정책이 경쟁심을 유발하고 종교간의 갈등의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
 살아있는 종교는 살아있는 나무와 같아서 성장하고 번식하게 마련이다. 자기가 귀의하는종교를 통해 체험한 귀중한 진리를 타인에게 알려서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 종교인들의 선교정신, 포교정신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의 구경목적을 "생명을 치유하여 살려내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하며, 소외된자를 자비와 사랑으로 돕는일"을 뒷일로 돌려놓고 종교교세 확장 자체를 일차목적으로 삼을 때, 종교도 망하고 사회도 어지럽게 된다. 서두에서 말한바 처럼, 한국 개신교는 전래역사 120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선교열정'이 타종단에 비하여 특히 강하다. 선교를 일종의 진리싸움이라고 보는 선교신학에서는 '아군-적군' 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 대중을 몰아넣어야 결속력과 연대성이 강화된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필요한 불교와 기독교의 긴장대립의식, 경쟁의식, 상호피해 의식, 주도권 의식이 작동하여 상호갈등을 증폭시킨다.
 이 문제의 극복은 종교지도자들이 진실로 종교인다운 성숙한 지도력과 세계관의 확립및 인격형성을 요청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통찰하고 인간을 살려내는 활인운동을 감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고도의 식견과 인격, 역사의 변화에 대한 통찰, 타종교에 대한 기본적 이해등이 요청된다.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성실하게 헌신하고 충성하면서도, 타종교의 존재의미와 가치에 열린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지도자를 요청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개신교라는 종파는 서두에서 말한대로  획일적 통제가 불가능한 교파집단의 집합체이지만, 위에서 말한 네가지 갈등원인 진단과 처방방법을 깊이 인식하고 꾸준히 노력해가면, 점차로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지닌 위대한 우주적 보편종교로서의 강점을 보완하여 한민족과 아시아를 '생명이 꽃피는 문명사회'로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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