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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협력운동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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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협력운동의 역사와 전망

김경재(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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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 후반 종교문화사는 변화의 임계점 통과

  지난 20세기 100년간 일어났던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들을  종교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야스퍼스가 말한 인류사의 '차축시대'이후 최초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 고등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리의 대화, 평화실천의 모색을 하게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지구촌 차원에서 종교간의 대화협동 운동은,  '차축시대'이후로 인류문명 속에 서로다른 지역에서 발생해서 다양한 형태로 '확산' 해가던 인류의 종교적 영성체험들이 '수렴'을 향한  방향전환을 하는 임계점을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렴은 각 종교전통의 특성과 고유성이 약화되거나 무시되는 '종합'이 아니라, 교향악단내  다양한 악기들의  조화처럼  각 종교전통들의 음색, 멜로디, 리듬의 특성이 마음껒 발휘되면서 더 높은 차원에서의 음악적 화음을 이뤄내는 형식으로서의 '수렴'을 말한다.  1986년 세계신앙회의(WCF)의 강연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런시 박사(Dr. Robert Runci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수백년 후 역사가들은 20세기야말로 3천년대를 향하면서 위대한 세계보편종교들     의 태동을 낳았던  동양종교들과 기독교의 위대한 융합이 처음으로 실현되었던  때라       고 예찬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가는 것이며, 많은 사     람들이 당연히 앞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과가 될 것이다.

런시 박사의 위의 언급은 단순히 그 분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그 분보다 앞서서 동서 종교의 만남이 지니는 문명사적 의미를 말한 아놀드 토인비를 비롯한  우리 동시대인들의 세계적 석학들 예들면, 폴 틸리히,   칸트웰 스미스,  죤 힉, 죤 캅, 한스 큉, 레이몽 파니카, 스탠리 사마르타, 로스메리 류터, 정산 송규,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 송천성, 알로시우스 피에리스, 아베 마사오, 변선환, 폴 니터등 수많은 지성인들의 공통된 확신이기도 한다.
 인류문명사 속에서  종교간의 심층적 대화와 협동이 20세기 후반, 특히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급류를 타게 된 세기적 상황을 몇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첫째, 교통 통신 정보망의 발달로 인해 19세기까지만 해도 서로다른 자기 전통문화 안에서만  살던 인류는, 다양한 종교전통과 구원체험을 가진 이웃형제자매들이 고유한 종교문화를 이뤄가면서 살고있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종교체험의 교류와 지식의 정보교환이 급증하게 되었다.  둘째, 종교학 해석학 역사학등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종교체험과 상징체계의  단일성만이 아닌 다양성, 궁극성만이 아닌 상대성, 무제약성만이 아닌 한계성등을 깨달아가기 시작하였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문명 중심의  식민지배시대와 문화제국주의시대 종언과 더불어 배타성이 강한 셈족계 종교들, 특히 그리스도교의 자기반성과 신학적 패러다임 전환을 촉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식민지배하에서 직간접으로 억압받던 비그리스도교의 자기 목소리가 크게 울려나오기 시작한 점이다. 카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단순히 한 종단의 범위를 넘어서 가지는 의미가 큰 것은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다.
  넷째, 전쟁, 빈곤, 질병, 자연생태계 파괴등 인류가 직면한 전 지구적 재앙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양식을 가진 대다수 시민들은  종교간의 대화와 평화없이 지구의 평화 복지실현이 불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하고 그러한 운동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섯째,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운동은 역사적 상황에 몰려서 이뤄지는 피동적 동기만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 원인이 있다. 인류는 포스트모던시대, 후기 산업사회,정보화시대, 생명공학시대에 접어들면서 보다 깊고 신선한 영성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는 카이로스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인간, 우주자연, 초월적 신성과의 상호 불가분리적인 유기적관계성을 재정립하는 새로운 실재관을 요청하고 있다. 문명사의  '차축시대'이후   인류를 양육해왔던 고등종교들의 영원한 진리가 두꺼운 전통의 각질을 벗고 새롭게 창조적 형태변화를 이뤄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3000년전 베다경전의 집대성이후, 인류는 다시한 번 자기를 키워오던 알껍질을 깨고, 영적으로 거듭나려고 꿈틀거리고 있다. 두꺼운 알 껍질은 이미 깨어졌으나, 어린 독수리 새끼는 알에서 온몸으로 빼어 나오지 못하고 날개가 젖어 아직 날을 수는 없다.  그것이 오늘 인류종교문화사의 형국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몇가지 원인들은 20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오늘에도 지속되고 있는  종교대화와 협력을 가능케 하고 추동시키는 직간접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언급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창조적 용기를 가지고 책임적으로 응답한 선구자들과 창조적 소수자들은 이미 종교문화사 시각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창조적 변화과정에서  임계점을 통과했고, 되돌아갈 수 없는 루비콩 강을 건냈다. 진군하는 선두 부대가 먼저 루비콩 강을 건넜다고 해서 본진부대 전체가 강을 다 건낸  것은 아니다. 아직도 강 저편 언덕에서 머물고 있거나, 부대의 최전선이 이미 루비콩 강을 건너갔다는 정보를 듣지도 못할 수 있다. 설혹 그런 정보를 풍문에 들었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부대 지휘관이나 부대원들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오늘의 종교계상황이 그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간의 대화 및 협력운동은 단순히 종교계 안에서, 일부 관심있는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사적 관심거리가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며, 그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문명사의 임계점을 돌파한 사건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비록 종교간의 대화협력운동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보수적 종교인들의 숫자가 현재상황에서 월등하게 많을지라도 그런 통계수치는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며, 종교간 대화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 정신사적 의미를 조금도 약화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치 비유하건데, 20세기 초 양자물리학의 출현시 대부분의 대중과 과학자들은 고전물리학을 정상과학으로서 굳게 신봉하였고 극히 소수의 제한된 과학자들만이 양자물리학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그 새로운 과학패러다임을 이해했지만,  100년 지난 지금 인류는 양자물리학 이론에 기초한 기술공학의 결과물을 일상화하고 생활 속에서 대중이 체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류의 영적 성숙과정에서 한번 건너간 역사적 루비콩 강을 뒤로 되돌아갈 수 없다. 창공을 날고싶어, 때가 되자 알껍질을 깨고 나온 독수리 새끼를 다시 알 속으로 그 머리를 쳐박아 넣고 알껍질을 다시 봉인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여 창조적 소수자, 세계종교의 선구자들은 어떤 응답과 종교협력운동을 추진해왔던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아래에서 일별해 보기로 한다.

[2] 20세기후반 종교간 대화및 협력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

 20세기 중에서도 종교간의  대화 및 협력에 관계된 역사적 기구성립과 각 종단의 국제적 조직 및 의미있는 회의가 20세기 후반에 집중되어 있다는데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20세기 전반기는 1, 2차 세계대전 및 대동아 전쟁을 치루면서 인류는 식민주의, 세계패권주의, 문화제국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나치즘같은 정치이념의 절대주의에  희생이 되어 인류가 고통과 비극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 대중살상, 인종차별, 종교차별을 자행하면서 집단적 광기와 야만성을 드러내었고, 전지구적 차원의 '지구윤리의식' 또는 진정한 의미의 '인류 사해동포 의식' 이 성숙되지 못했으며, 인류를 하나로 연결하고 연대성을 강화 할만한 교통 통신 정보매체 및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이 1945년 히로시마에 핵폭탄 투하로 종식이 되자,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원자력폭탄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전쟁으로인한 인류전멸가능성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최초로 51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연합 (United Nations)이 창설되어 1945년 4월25일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회의(UNCIO)에서  국제연합헌장이 채택되었다. 실로 국제연합의 탄생은 '차축시대'이후 전인류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결성한 최초의 국제회의요 연합기구였다. 지구 평화와 안전의 유지, 국제우호관계의 증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도적 문제에 관한 국제협력을 목적으로 탄생된  국제연합의 결성은 국제적 종교협력기구의 발족과 세계종교들의 종단적 국제조직기구 형성에 큰 촉매적 영향을 끼쳤다.

 (1) 세계교회협의회(WCC,1948/ World Council of Churches)

    2차대전이 종결되자, 세계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2차대전기간 동안 특히 유대교에 대한 편견에 기초한 유대인 600만명 학살이라는 유럽 기독교문명사회 한 폭판에서 발생한  대량살육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력하게 방관 하거나 묵인한 죄책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1948년 8월 암스텔담에 모여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를 결성하였는데 개신교, 동방정교회, 성공회가 참여하였다. 7년에 한번씩 회집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1961년 뉴델리에서 모인 제3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부터 유럽 서방비독교의 목소리만 지배적이던 총회 안에서 아시아 및 제3세계교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하고 기독교이외의 세계 종교들의 존재의미를 신학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WCC 회원국들의 신학자 및 성직자들이 종교간의 대화 및 협력에 눈을 뜨고 깊은 관심을 가지게된 때는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인  WCC 제4차 총회(1968)과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모인 제 5차총회 (1975)를 지나면서 였다. WCC 총회 안에 '타종교와의 대화부서'(Dialogue with People of Other Faiths and Ideologies)가 신설되고(1968) <대화지침서/Guidlines on Dialogue,1979>를 발간하면서, 지난날 까지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Exclusivism) 정복론이 지배적이던 입장을 포용주의(Inclusivism)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포용주의 입장이란 크게말해서 하나님의 인류구원 경륜이 세계의 타종교 특히 고등종교 안에서도 역사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신의 구원경륜의 결정적 성취와 규범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중심주의 구원신학을 말한다. WCC 안에서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배타주의입장에서 포용주의입장으로, 포용주의입장에서 다원주의입장으로 패러다임 전환 시켜가려는 아시아 신학자들의 노력은 인도의 스탠리 사마르타, 스리랑카의 웨슬리 아리아라자, 대만의 송천성등에 의해 꾸준히 노력집중되었지만, 포용주의 성취설의 입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포용주의적 성취설의 입장은 불교 유교 도교등 아시아의 종교들의 영적 윤리적 예술적 가치를 존중하고, 타종교의 구원의 길에 존중과 관용의 태도를 취하여 독단적 배타주의를 극복하고는 있지만, 진정한 종교간의 대화 및 상호협력을 통한 상호창조적 변혁의 모험까지 자기를 개방하는 태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 세계불교도회(WFB,1950/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2차대전 종언이후, 세계불교도들 또한 세계적 기구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에 모여온 27개국 대표들이 모여 세계불교도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한국의 불교종단으로서는 조계종, 법화종, 원불교 세단체가 한국지역센터(three regional centers)라는 공식명칭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원불교의 활동은 눈부신바 있다. 원불교는 1958년(원기 43년) 제5차 태국에서 회집된 세계불교도회에 옵서버로 참석하였고, 1980년 제13차 세계불교도회 정기총회에서 정식회원단체로 등록되었으며, 1990년 제17차 세계불교도회를 한국에 유치하여 세계불교인들과  한국의 종교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켜 약동하는 원불교의 활동상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세계불교도회에 참여하는 불자들이 타종교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지닌 포용주의적 태도보다는 기본적으로 종교다원주의적 이다.  물론 불교도인들은 타종교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타종교들이 결국은 모두 불교안에 모두 포용되고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성취될 것이라는 포용주의적 성취설 입장은 아니지만, 진리체험과 구원도리의 한 패러다임으로서 불교가 제시한 '구원의 길'이 지닌 탁월한 심원성과 우주적 보편성 주장을  은폐하거나 철회하는 것은 아니다.
  소태산의 '일원사상'과 정산의  '동원도리'가 말하려는 기본정신대로 "종교의 근본은 그 형식과 이름은 달리 표현 되어도 하나로 통하고 있으며,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한 집안과 같이 회통하고 있다"는 정신 속에서 타종교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소태산과 정산의 정신은 원효가 화쟁론에서 말하려는 근본정신과 같은 것이다.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성립시키려는 원효의 화쟁의 논리" 는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노력 속에서 개별종교들의 통일성 논리와 개별종교들의 다양성 및 고유성 논리를 동시에 살려낼 수 있는 시사점을 제시한다.
(3) 제2차바티칸 공의회( The Second Vatican Council))
  20세기 후반 인류의 종교문화사 속에서 일어난 특기할만한 사건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들 수 있다. 이 회의는 단순히 로마카토릭교회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공의회가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종교간의 열려진 대화의 분위기를 가로막았던 담장이 철거되고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한 회의였다. 1963년엔 정식으로 교황청 안에 '비기독교인들과의 관계 사무국'이 설립되고, "비기독교 제종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1965)과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 Dignitatis Humanae,1965)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문으로 채택 선포되었다. 위의 두 선언문의 분량은  한글 국판인쇄책으로 20페이지에 불과하지만, 그 선언문이 카토릭교회 자신과 개신교와 희랍정교회에 준 영향은 매우 컸다.
 세계 타종교인 들에게는, 솔직히 말해서 놀라운 새로운 내용이 담긴 선언문이 아니라, 인류의 고등종교들과 성인들이 수천년전부터 말씀해온  진리를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역사동안 그리스도교계 특히 카토릭교회가 타종교에 대하여 보여온 "그리스도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해온 배타주의적 태도가 최소한 포용주의적으로 전환한 점이 종교간의  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고 보고 크게 환영하였다.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카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힌두교,불교,기타종교)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     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     다. 그것이 비록 카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해도, 모든 사람     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     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     시키기를 모든 자녀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타종교를 대하는 카톨릭교회의 태도는 천년이상 견지해온 타종교들에 대한 몰이해, 편견, 독선적 정죄에 다름없던  배타주의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포용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감행했다. 그러나, 칼 라너(Karl Rahner)의 '익명적 그리스도론' 까지를 포함해서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포용주의적 패러다임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우월론을 은폐한 성취설이 아니냐는 신학계 및 종교학계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고, 카토릭교회 자체 안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문에 표현된 정신을 초극하려는 노력들이 한스 큉, 라이몽 파니카, 폴 니터등 진보적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더욱 활성화 시키는 선도적 노력을 하고 있다.
(4)세계종교인 평화회의(WCRP/ 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와 아시아 종교인     평화회의(ACRP)
  '세계종교인 평화회의'는 1968년 인도 뉴델리에서 모였다. 평화를 주제로한 국제종교협의회가 끝날 즈음 그 회의에 참석한 종교인들이 뜻을 모아 종교간의 국제적 유대강화, 상호협력,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국제적  연대를 목표로하여 발족되었다. 1970년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1차 KCRP 대회가 열린이후, 지난 1999년 요르단 암만에서 제7차 대회를 열었다. 인류의 평화와 구원, 자비와 사랑을 목표로하여 위대한 세계종교가 발생했던 중동지역이 아이로니칼하게도 종교문제가 분쟁의 도화선이 되거나 빌미가 되어 전쟁과 갈등을  증폭시키는대 대하여 인류의 양심과 영성의 회복을 촉구하고 평화를 호소하였다.    '아시아종교인편화회의'(ACRP)는  1976에 조직되었고, 그 3차 총회를 한국 서울에 유치하였다. 아시아 종교회의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중에는 김수환추기경, 강원룡목사들이 큰 공헌을 하였으나, 한국 원불교 교도들의 적극적 참여와 역동적 공헌은 괄목할만하다. 한국 원불교는  제3차 아시아 종교인 평화회를 한국 서울에 유치하여 대회와 ACRP 평화교육센터를 운영하는 일에  인적, 재정적 공헌을 하였으며  원불교 전팔근 교무를 비롯한 원불교 지도자들과 교도들의 헌신적 봉사와 종교협력정신은 참여한 아시아인들과 한국사회에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5) 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와 국제자유종교연맹(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Religious Freedom/ IARF)
 19세가가 저물어가던 1893년 9월 미국 시카코에서는  세계박람회와 때를 같이하여 인류종교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카코 세계종교대회(1893.911-28)였던 것이다. 이 대회는 종교학자 막스 뮐러의 표현대로  "세계사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사건의 하나"(막스 뮐러) 였는데, 서로다른 민족과 타종교 안에 내재하는 신의 보편적 임재를 믿었던 보편주의적 종교관용주의자들이 한 목소리로 새로운 멧시지를 인류에게 던졌다. 이 대회에 참가앴던 인도의 스와비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는 다음같이 말했다.
  기독교인이 힌두교도나 불교도가 될 필요는없다. 힌두교인이나 불교인도 역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다. 힌두교인이나 불교인도 역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 사람은 다른 종교인의 정     신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법에 따라서 성장하여 ..... 신성과 순     결과  자비는 어느 특정 종교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종교대회는 증명했다.
시카코 종교대회를 조직했던 이 대회 총무, 예일대학교출신 장로교 목사  배로우스(Rev. John Henry Barrows)는 폐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진리가 크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 어두움에서 부터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의 빛 속으로     벗어나오도록 하게하는 신의 섭리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아니라 더 많은 길이 있다. 인도의 옛 '베     다'의 지혜는 "진리는 한 분이시다. 성인들이 다른 이름으로 그 분을 불렀을 뿐이다"고 가르쳤다.
 죤 배로우 총무가 폐회사 속에 한 말은 80년이 지난후, 20세기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킨 문제의 책, '신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John Hick, God Has many Names) 속에서 좀더 심도깊게 재론되면서 부활 하였다. 세계종교대회 시카코대회 100주년이 되는 1993년 세계종교인들은 인도 뱅갈로와 미국 시카코에서 새롭게 변화된 지구환경과 인류의 위기 앞에서 백주년 기념대회로 모였다. 대회의 주제는 "참여된 지구 윤리를 향하여" (Toward A Shared World Ethic) 였으며, 대회조직과 운영에 동참한 국제적 종교기구들은 앞에서 언급한 세계종교평화회의(WCRP), 국제종교자유협회(IARP),이해의 사원(TOU), 세계신앙회의(WCF) 였으며 카톨릭 바티칸과 기독교 세계교회협의회(WCC)도 깊은 직간접 관심을 표명하였다.
 1993년에 100년만에 다시 소집된 만국종교대회 백주년기념대회 특징은, 단순히 종교간의 대화,관용, 이해정신의 고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환경위기와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들의 실천적 참여와 종교간의 협력 곧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비젼을 가지고 세계를 변화시키자는 강한 실천적 의식이었다. '종교간의 이해와 협력의 긴급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아직도 지구문명 도처에 엄존하는 인종차별, 사회계급차별, 종교 및 이념이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 성차별, 자연파괴등으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비인간화를 극복하는 실천적 종교인들의 협력이 강조되었다.  인류는 빈곤폭력, 핵폭력, 생태학적 폭력 앞에 직면해 있다. 그리하여 한스 큉이 1990년에 쓴 '지구윤리 구상"(Projeckt Weltethos,1990)에서 기초한 '지구윤리선언'(1993)을 100주년 기념대회는 채택하였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20세기에 인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협의하고 채택한 가장 의미있는 세가지 선언문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1948)과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리우선언'(1992)과 '지구윤리선언'(1993)이라고 볼 수 있다.
 뱅가로와 시카코에서 동시에 모인 세계종교대표자들이  채택한 '지구윤리 선언'(1993) 밑바닥에 흐르는 기본적인 지향가치는  다섯가지이다.   (i) 생명외경을 지향하는 비폭력의 문화 (ii) 정의와 평등이 아우르는 사회질서를 지향하는 연대성의 문화 (iii) 진리위에 서서 성실한 삶을 지향하는 관용의 문화 (iv) 성차별을 넘어 남녀  파트너쉽을 지향하는  평등의 문화 (v) 유기체적인 지구생명을 살려내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향하는 지구생태보존의 문화가 그것이다.
  일부 인도학자들과 일부 래디칼한 기독교신학자들은 한스 큉의 <지구윤리 구상,1990>에 나타난 기독교 윤리신학과 그것에  기초한 '지구윤리 선언'의 기본정신이  인간중심적 윤리이며 서구 기독교윤리의식이 너무나 깊게 베어있는 서구문화제국주의 반영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100주년 기념대회의 주제인 "참여된 지구윤리를 지향하여"라는 주제에 합당한 내용이라는 지지를 받는다. 진실로 한스 큉이 말한대로 "지구 윤리 없이는 인간의 생존이 있을 수 없다. 종교간의 평화없이는 세계평화는 있을 수 없다.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국제종교자유연맹(IARF)는 위에서 언급한 시카코에서 1893년에 열렸던 '세계종교의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1900년에 미국 기독교 유니테리언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현재 22개국 58 종교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종교자유, 사회봉사, 정의 실현, 세계평화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매3년마다 총회 및 세계대회를 개최하면서 종교간의 대화협력에 공헌하고 있다. 1996년 한국 원불교단은 '국제종교자유연맹 제 29차 세계대회'를 원광대학을 장소로하여 주최하여 에큐메니칼 정신과 종교협력의 본을 보였다.
(6) 바아르(Baar) 대화모임(1988-1990)과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1990)
 지금까지 살펴본 국제적 규모의 종교인대회 및 협의회와 비교할 때,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가 주관하여 조용한 스위스 마을 바아르에서 회집되었던 한 작은 모임은 WCC 에큐메니칼 써클 범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진일보시킬 수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모임이요 선언문 이었다.
 WCC '종교대화국'은 1988년 개신교, 카토릭, 희랍정교회 신학자들을 초청하여, WCC가 내놓은 '대화지침'(Guideline on Dialogue,1979) 이후로, 더욱더 진전되고 심화되어가는 종교간의 대화신학 및 실천지향적 경향성을 주목하면서 후속조처의 일련의 연구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러한 연구모임은 3년간 진행되었고 그 결과 발표된 선언문이 '바아르선언문'(1990)이다. 바아르 서언문의 중요성은 세계 개신교를 대표하는 WCC 종교신학 로선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원천이요 기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배타적이고 경직화된 그리스도중심주의(Christocenrism)를 넘어서서 보다 자유롭게 일하시며 비교의적 신성의 자기계시의 실재이신 '성령중심적 사고 '(Pneumacentric Thought)에로 전환하였다는 데 있다.
 다시말하면, 바아르선언문이 '성령중심적 사고'에로 신학적 발상법을 전환했다는 말은  진리자체이신  하느님의 역사적 인격적 화신체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관계가 구원의 유일절대조건이라는  전통적 구원론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서구와 미주 선교사들이 구원자(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아직 전하지 않았을 그 이전시대에도 진리자체이시며 신성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성령'의 임재 속에서 모든 민족과 역사와 전통 속에 현존하시며 구원의 사역을 지속해오셨다는 고백인 것이다.성령의 구원활동은 기독교 성립보다 , 성경의 형성보다, 선교사의 활동보다, 교회당의 건립보다 언제나 앞서고 보다 근원적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종교전통에 국한되거나 제한당하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성령의임재'라는 기독교적 표현은  보다 보편적 언어로서 '로고스의  임재',  '다르마의 임재',  또는 '신의 임재'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바아르 선언문이 말하려는 핵심은 다섯가지이다. (i) 어느 권위적 인간단체나 개인도 하나님의 구원활동 능력과 방식과 신묘한 형태를 제한할 수 없다. (ii) 종교다원현상은 극복되어야 할 장애물 이라기보다 하나님과 인간을 더 깊이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iii)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iv)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일방통행적이 아니라 쌍방적이고 대화적이다 (v) 종교간의 대화는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존이라는 실천의 장에서 추구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  
(7) 한국종교평화회의(KCRP/ 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한국종교평화회의'는 1986년 제3차 '아시아 종교평화회의'(ACRP)가 서울에서 개최되던 때를 계기로 국제종교기구와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종교인들의 합의로서 결성되었다. 직간접적으로는 1965년부터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당시원장 강원용목사)가 주관하여 진행되어오던 '한국6대종단 지도자 대화모임'이 '한국종교인 평화회의' 탄생의 준비토대가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처럼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가 심각한 종교분쟁없이  단일민족으로서의 다양한 종교전통의 위대한 유산들의 창조적 융합으로서 민족문화를 형성해온 예가 세계사 속에서도 드물다 할 것이다. 1919년 3.1만세사건 때 보여주었던 한국종교들의 대승적 협동정신과 실천운동은, 해방후 한국동란과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단절되고  가각 종단적 자기정비단계를 거치느라고 소원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한국 제종교의 공동과제-6대종단지도자 모임"이라는 대화모임을 1965년 주관하고, 그 대화협력의 정신이 발아하여 역사적 계기를 타고 '한국종교인평화회의'로 발전하게 된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역사적 발전 이었다. 1965년 6대종단모임 때는 불교,원불교,개신교,유교,천도교,천주교가 참여했으나, KCRP 조직이후엔 6대종단 이외에 민족종교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중요사업으로서는 종교간의 대화, 여성, 청년, 인권 및 환경, 남북평화교류의 특별사업, 서울평화교육센터운영, 평화를 주제로한 강연,출판,세미나,종교청년캠프,아시아 청년교화교육등을 실시해오고 있다.
 이상으로서 우리는 세계, 아시아, 한국의 종교협력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등 국제협력기구와 URI( United Religions Initiative)등 국제종교기구들이 있으며, 지역별로는 유럽종교평화회의(ECRP)를 비롯하여 지난달 제6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북미의 '불교-기독교학회'(Society for Buddhist-Christian Studies)등 수많은 종교간 대화,연구 및 협력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지면제한과 필자 능력의 제약 때문에 그 모두를 다 소개하지 못한다. 이제 이러한 세계종교간의 대화협력기구들의  활동을 근거로 하여 21세기 과제와 활동방향을 전망해 보려 한다.
[3] 종교간 대화협력의 미래비젼과 과제들
 (1) 종교간의 관계 패러다임의 전환: 배타주의에서 포용주를 거쳐 다원주의에로
 우리가 제2장에서 살펴본 대로, 1960년대 이후, 세계 종교계의 변동은 가히 전 지구적 차원에서 커다란 지각변동과 같을 만큼 커다란 진통기였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서구 기독교문명권과 학계에서 2000년동안 절대적 계시종교로서 기독교만이 '참된 유일한 계시 종교'라고 생각해왔더 전통주의  신학의 배타주의 패러다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과하면서 포용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고, 세계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성실하고도 치열한 학문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 1980년대 이후부터는 포용주의를 넘어서서  다원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소위말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에 대한 이해나 정의는 학자나 학파에 따라서 다양하고 상당한 편차가 있다. 그러나, 다양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시각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죤힉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드려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란 자아중심에서 실재중심에로의 인간존재의 변혁이 모든 위대한 종교전통 안에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견해이다...세계의 위대한 종교전통들은     인간의 구원/해방/완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안적인 구원론적 공간들 혹은 길들로서 간주되어야만 한     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종교인들만이 아니라, 진실로 진리에 순명하고 타자 생명의 고난에 귀기울이려는  겸허한 사람들은, 자신이 귀의하는 종교전통의 진리에 성실하며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헌신 하면서도, 자신의 종교가 지닌 역사성과 특수성을 인지하고, 진리체험및 구원체험의 패러다임이 다른 다른 형제자매들의 소리 곧 타종교에 개방적이어야한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투철하게 귀의하는 것(commitment)과 타종교의 진리체험과 증언에 마음문을 열고 귀를 귀울이는 개방성(Openness)은 동전의 앞뒤처럼 함께 간다.  
 인류는 더 이상 종교적 배타주의, 독선주의, 독단주의, 타종교정복주의를 받아드리지 않는다. 한 걸음 더 생각이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어느 특정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월하며, 다른 종교들은 결국 자기가 귀의하는 역사적 종교 안으로 수렴 통일되고 말 것이라는 성취론적 포용주의도 문화제국주의 잔재의 표현이라고 볼 것이다.
  심정적으로 말해서,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참된 것일수록 틸리히가 말하는 일종의 '궁극적 관심'을 그 안에 담지한 것이므로 가치중립적이거나 천박한 상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적어도 자기가 귀의하는 진리가 자기에게는  타종교에 비하여 보다 우월하고, 보편적 이며,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된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본래적 종교체험이 지닌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특성 때문인 것이지, 객관적 실증적 명제적 진리라고 혼동해서는 않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종교적 진리주장은  '명제적'( propositional) 이라기보다는 '문화-언어적'(cultural-linguistic)제약을 받고있는 '경험-표현적'(experiential- expressive) 진리주장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신약성경 사도행전 중에  나오는 베드로의 증언으로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이다. 이 증언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놀라운 체험이야기를   옥중에서 문초를 당하고 나와서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한 말이다. 이 증언은 강렬한 구원체험을 동반한 생명적 언어요, 사랑의 언어요, 증언의 언어이며, 고백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증언을 존중하고 귀기울어야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세계종교사를 다 연구하고, 세계종교체험들과 성현들의 말씀을 다 연구비교한 후 내린 객관적, 과학적, 실증적, 명제적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귀 기울어야 한다.
 (2)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목적: 상호배움 , 상호변화, 상호성숙의 과정
 1960년대 이후,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이 심화되어가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가능케하는 공통기반으로서 진리자체, 실재, 궁극자, 신비, 존재자체등 여러 가지 가 언급되었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존재론적 근거와 공통기반을 정초하려는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은 종교간의 대화협력행동이 "진리의 산을 함께 오르는 서로 다른 등산로를 택한 산악인들"로서 비유되었고, 에베레트산은 하나이지만, 그 산정에 오르는 길은 풍광과 산세가 다른 다양한 길들이 있다고 비유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협력이 깊어가면서   세계종교인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들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신앙공동체의 삶의 형태를 규정하고, 그러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형성되어가며, 그 신앙공동체 안에서만 유효한  힘을 발휘한다는 언어철학의 연구결과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이 확장됨에 따라, 종교간의 대화협력 초창기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종교들간의  '공통기반'의 확인이나 그것의 형이상학적인  선험적 전제보다는 종교간의 차이와 다름, 역사적 고유성과 진리파지방식의 다양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 종교간의 대화를 하는가? 단순히 나와 다른 타자가 지닌 관심사를  알아보자는 것이 아니다. 대화협력의  목적은 대화 당사자들간의 상호순환적 또는  쌍방적 배움과 배움을 통해서 상호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변화를 통해서 진리체험과 구원체험이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지려는데 있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목적이 '배움을 통해 창조적 과정을 거쳐 더욱 풍성해지는 진리적 삶의 실현'이라고 말하게 될 때, 보통 종교인들은 저항과 두려움과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첫째,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는 각각의 종교는 자기완결적이고 절대적인 '궁극성'을 경험하거나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배움이란 자기종교의 '불완전성' '미성숙성'을 자인하는 것 같은 오해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종교체험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요, 부분적이면서도 전체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종교적 구원체험이 아니다.  역사적 특정 종교의 '상대성, 부분성, 유한성'이란 양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체험의 관점 또는 유형적 특성이라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참된 종교적 비젼이나 구원체험의 특징은 '부분을 통하여 전체'(totum per partum)를 본다는 점이며,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구체화된 절대적인 것을 체험한다는 점에 있다.
  유명한 화가들의 인물화 작품들이 좋은 비유가 될 수 있겠다. 죠지 와싱톤의  인물화는 열명 화가들의 인물화 작품이 모두 다르다. 사진같은  사실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모든 화가가 죠지와싱턴의 내면적 생명까지를 동시에 포촉하는 화가의 관점과 화풍기질 때문이다. 10명의 화가의 작품을 보는 대중들은 그 열 작품이 모두 죠지워싱톤을 바르게 잘 나타내고 있다고 칭찬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작품도, 죠지워싱톤의 모든 전체를  남김없이 총체적으로 그려냈다고 주장 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종교의 성격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인신가 명료하게 계시되었지만( totus deus), 하나님의 무궁성과 그 신비하심이 남김없이 다 들어난 것이 아니다(totum dei). 그러므로, 세계종교들은 다른 종교들의 관점과 유형적 특성을 배울 가치와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종교간의  대화협력과정을 통해서 변화하고, 창조적 변화를 통해 성숙해진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역사적 종교의 자기정체성 상실위험에 대한 두려움이며, 보다 성숙해진다는 삶의 본질적 과정을 부정하는 경직된 실체론적 사고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종교간의 대화협력이 심화되어 갈수록, 다양한 입장을 취하는 종교다원론자들 간에 어떤 합의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그것은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궁극적 목적이 다양한 세계종교들의 특성을 희생시키고 멀지않는 미래에 지금 인류가 귀의하는 다양한 종교들보다 더 풍성하고 완전한 '하나의 우주종교'를 만들자는데 있지않다는 점에 일치하고 있다. 세계종교전통들의 수렴이나 통일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위대한 세계종교들 자체가 이미 우주적 종교들인데, 그 각각의 종교들이 갖는 다양성,고유성,독특성이 중성화 되거나 약화될 수있으며, 개별종교가 가진 창조적 역동성이 살아져 버릴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불가능한 이유는 각각의 세계종교전통들은 살아있는 나무와 같아서 각자의 문법과 상징체계와 역동적 영성을 가진 "실존의 구조들"(structures of existence: John Cobb.)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은행나무를 베어다가 하나의 살아있는 나무를 만든다는 구상이 어불성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동서종교들은 서로를 배워, 창조적으로 변화되고, 자기를 풍성하게 성숙시켜갈 필요가 있다.  불교와 기독교는 동서양의 종교발전 과정에서  그 극치를 보여준 우주적 보편종교이지만, 그 두 종교마져 지난 역사적 특정시기에 형성된 상징체계와 교의체계와 영성수련방법에 있어서 역사적, 문화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으며, 초기발생시의 그 위대한 창조적 역동성을 탕진하고 있다. 두 종교는 서로에게서  배울것이 많다. 그래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새로운 제3천년기의 우주적 기독교와 우주적 불교로서 성숙해 가느냐 못하느냐에 두 종교의 미래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종교의 미래는 어느 종교가 과연 더 온전한 진리 앞에서 겸손하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자기를 부정하는  용기를 지니느냐로서 판가름 날 것이다. 과정철학이나 유기체 철학의  통찰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삶이란 창조적 변화과정이며 보다 성숙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방향은 각기 자기의 종교전통에 대한 성실한 헌신을 잃지않으면서 진리에 대한 자기종교의 비젼과 실재의 지평을 확대심화 해가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협력이 자기 종교에 대한 헌신과 위임을 약화시키거나, 부정적인 종교혼합주의에로 흘러가서는 않될 것이다.

(3)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길들: 정교(orthodoxy),정행(orthopraxis), 정정                                                             (orthocontemplatio)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길에는 다양한 길들이 있으므로 균형과 보완 정신의 견지가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삼학으로서 혜, 계, 정을 말해왔다. 이러한 오랜 경험에서 울어나온 진리파지의 길은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길들로서도 매우 유익하다고 본다. 참지혜의 눈을 뜸이란  불교학이나 경전의 이론적 섭렵만을 의미하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경전공부가 적어도 초창기엔 기초를 이루듯이, 종교간의 대화에서  진지한 종교인들이 자기가 믿고 귀의하는 종교의  진리체계, 상징체계를 말과 글로서 대화를 통해 서로 개진하고, 생각을 넓혀가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종은 종치는 사람의 힘만큼 울린다"는 말 처럼,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 자기종교의 경전이야기나 진리체계, 상징체계를 말하는 것은 '다름'을 확대해 보임으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헤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소극적으로 생각해서는 않된다. 오늘 한국 종교상황에서 기독교 일부신도들의 훼불사건은 불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적 교리에 쉽게 쇠뇌당하는 위험도 타종교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근본주의적 광신주의에 희생이 되기 쉽다.
  깨달음의 길에는 바른 윤리적 계율들을 지성으로 준행함으로서 도달하는 법이 있다. 이른바 정행인데, 정행은 일반적으로 정혜나 정정보다 격이 떨어지는 줄로  잘못아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그러나 정행은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는 징검다리일 뿐만이 아니라, 깨달음의 목표에 이른 사람들의 나타난 삶이요, 그 자체가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다. 좌선에서 바른 몸다스림은 곧바로 깨달음의 알파요 끝이듯이, 종교의 구경은 바른 삶과 사랑 자비 어짐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삶이지 이론이 아니다. 종교는 실천적  삶 속에서 꽃피기 전에는 모든 것은 설익은 과일이요 목표점에 이르지 못한 중간성취일 뿐이다.
  종교다원주의 담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어감에 따라, 카톨릭 신학자 폴 니터(Paul Knitter)에서 그 범례적 사례를 보듯이, 정행을 종교간의 대화중심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소위 '구원중심적 다원주의'가  일어났다. 니터의 구원중심적 다원주의가 말하려는 본질적 핵심은, 종교간의 대화를 가능케하고 증진시키는 '공통기반' 이나 '공통본질'을 찾기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적어도 모든 종교들이 현상적으로 지향하는 것, 곧 인간의 고통, 억압, 소외를 극복시켜가려는 거룩한 열정을 실천적 공통기반으로 삼고, 삶의 현장에서 바른 윤리적 실천광장에서, 진선미를 힘쓰는 공동전선에서 서로 대화하고 협동하자는 주장이다.
   특히 '가난한 자와 눌린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흔히 보편적 선행주의나 사해동포주의라는 일반론 속에서 간과하기 쉬운 종교인들의  전열을 가다듬게 해 주었다. 죤힉이 말하는바 참종교의 기능적 본질이 "자기중심적 삶에서 실재중심적 삶에로의 전환"에 있다면, 그 결과는 마땅이 고해와 죄업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아픔과 연민으로 느끼고 그들을 치유하고 해방시키고 살려내는 일에 전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불교에서 참지혜(프라쥬나)와 자비행(카루나)은 불가분리적인 깨달은 자의 양면인 것 같이, 기독교에서 신의 구원은총에 감격하는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과 동전의 앞뒤와 같다.
 한발 더 나아가서, 참종교와 사이비종교, 성숙한 종교와 유치한 종교, 고등종교와 저등종교의 판단척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일은  종교학적으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종교의 객관적 평가 판단불능성, 종교의 자유권리 존중,  다양성존중, 관용정신의 권장등을 명분으로 삼고,  현실사회 속에서 백해무익한 종교들의 난립과  피해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결국은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말처럼, 진정한 종교 , 성숙한 종교의 판단규준은 현란한 가람건설이나, 종교단체의 조직기구나, 심원한 교리체계의 소유여부에  있는 것 아니고, 그 종교가 얼마나 인간 및 뭇생명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자기희생의 헌신적 봉사의 힘을 발휘하느냐로서 결정될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정행'은 종교간 대화협력의 공통기반일뿐만 아니라, 참종교와 거짓종교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셋째,    종교간의 대화협동의 길은 '정교'와 '정행'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단계로서 '정각'을 통한 종교대화 협동의 길이 있다. 이 길은 인식론적 단계나 윤리적 단계가 아니라 영성적 단계이다. 표현된 말과 글과 논리로서 비교 연구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서, 윤리적 실천행동을 통해서만이 아닌 제 3의 길이다.   말없는 말, 인격과 인격의 만남, 진리 안에서 거듭난 종교인의 숨결과 숨결을 통한 대화와 협력이다.  참으로 득도한 불자와 참으로 신행이 도타운 기독자가 서로함께 앉든지, 걷던지, 대화하던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던지, 침묵하던지 그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현존함 자체가  대화요 협력을 이루는 단계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실재, '일심' 안에서 대화요 '초월' 안에서의 사귀임이다. 거기엔 이미  평화, 이해, 선, 아름다움, 창조성, 치유능력이 있다. 국제종교협력기구의 창설보다도 종교인들의 인격적 교류와 신뢰가 실질적으로 훨씬 더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협력을 강화하는 촉매제가 된다.
(4) 종교담론을 삶의 변두리에서 삶의 중앙광장으로  
  20세기 기독교 문화신학자 폴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정의하기를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요, 문화는 종교의 드러냄(Form)이다"라고 했다. 이 명구는  중세기 신정정치의 종교지배문명시대를 재현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요, 인간이 어떤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이다.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이라는 유명한 표현구에서 '궁극적'(ultimate)이라는 형용사가 의미하는 뜻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인간의 일차적이고 근원적 관심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의 실질적 종교대상은 부처나 삼위일체 신이 아니다. 사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현대인간들의  관심을 통체로 사로잡는 관심은 황금, 권력, 명예, 성, 스포츠등이다. 그래서 일간신문의 종교란은 매주 주말 토요일이나 일요일 한 면을 차지 할 뿐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현대인들의 중요관심과 대중매체들의 지면할애나 전파매체의 시간할당은 현대인들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감각적 관심에 집중하고 종교관련 프로그램이나 기사는 지극히 부문적이다. 현실적으로 종교는 삶의 중심부에서 변두리 주변부로, 궁극적 관심에서 궁극이전의  관심거리로 전락했다.  '종교의 소외'가 이뤄지고 있다.  
  종교를 다시 삶의 중심부로, 생활 한 복판의 화두로 복귀시키고 이끌어내자는 말은 종교가 삶의 전 부분을 지배했던 기독교 중세시기나 법륜성왕 아쇼카왕 시대의 복권을 도모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와서도 아니된다. 왜냐하면 병원이 많이 있는 도시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듯이, 절이나 성당이나 교회당이  많은 문명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치유받아야 할 사람숫자가 그 만큼 더 많다는 증좌이므로 병원과 종교기관은 적으면서 건강한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신약성경 계시록의 종말론적 비젼을 보면, 새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생명의나라 에서는 "성 안에 성전이 없다. 어린양이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계21:22)
  종교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관심거리가 아니라, 모든 삶의 과정 중에서 삶의 궁극적 관심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말한 틸리히의 명구를 다시 음미함이 중요하다. 어떻게 다시 삶의 중심주제로 복권시킬수 있는가?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먹고 쓰고 입는 동물적 기본욕구충족의 삶같은 '일차원적 존재'로 전락하지 않고, 깊이와 숭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함께 숨쉬는 진정한 인간다운 삶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가? 그러하기 위해서는 종교담론을 종교학자나 성직자의 독점물로서가 아니라, 정치,경제,예술, 건축, 언어, 민속, 의상, 스포츠, 영화등 진실로 현대인들이 관심을 갖는 그 많은 주제들 속에 묻혀있고 감추어 있는 종교적 주제들로서, 종교 알짬(Substance) 또는 종교적 영성의 다양한 드러남의 형태(Form) 안에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전통의 평신도들로서 각분야 전문가들을 종교가의 대화협력 담론의 진정한 주체로 내세워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란 것이, 죽음, 질병, 죄책, 무명, 업보, 운명등 소위 인간실존의 '한계상황'에 관련된 주변일거리가 아니고, 진정한 인간다운 삶의 질의 문제요, 혼의 문제요 , 인간문화의 알짬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한다.  종교간의 대화협력문제도 종교학 전문가나 신학자 불교학자나 성직자들의 전문담론거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각분야 전문가들이  종교간 대화협력의 필요성과 그 불가피성을 더 잘 설득력잇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국 불교미술사 특강을 통해서, 어떻게 종교들이 시대를 통하여 종교간의 지평융합을 이뤄 왔는가를 예술양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들을 통해서 더 잘 말 할 수 있다.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은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종교분쟁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종교다원주의라는 새로운 학문적 시각에서 해설해 줄 수 있다. 물리학, 지구학, 분자생물학등 새로운 현대과학사상을 가지고서 세계종교들의 본질을 이해하고, 지구 생태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동서종교들이 협동해야 하는가를 보다 설득력 있게말 할 수 있다.
  요지는, 오늘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촉진하기 위해서, 평신도들을 종교담론의 중심화자들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과, 주말의 관심거리로 밀려난 종교란 기사거리가, 대중매체 중심주제로 다시복권하는 날, 한국사회는  요즘같이 소유와 지배철학이 주도하는 정신문화의 황폐화와 극도의 개인 및 집단이기주의가 회횡하는 윤리적 아노미현상을 극복한 건강사회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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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번역을 위한 강연요약문 입니다]
종교협력운동의 역사와 전망
김경재(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한신대)

[1] 20세기 후반 종교문화사는 변화의 임계점 통과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운동은 역사적 상황에 몰려서 이뤄지는 피동적 동기만이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 원인이 있다. 인류는 포스트모던시대, 후기 산업사회,정보화시대, 생명공학시대에 접어들면서 보다 깊고 신선한 영성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는 카이로스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인간, 우주자연, 초월적 신성과의 상호 불가분리적인 유기적관계성을 재정립하는 새로운 실재관을 요청하고 있다. 문명사의  '차축시대'이후   인류를 양육해왔던 고등종교들의 영원한 진리가 두꺼운 전통의 각질을 벗고 새롭게 창조적 형태변화를 이뤄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3000년전 베다경전의 집대성이후, 인류는 다시한 번 자기를 키워오던 알껍질을 깨고, 영적으로 거듭나려고 꿈틀거리고 있다. 두꺼운 알 껍질은 이미 깨어졌으나, 어린 독수리 새끼는 알에서 온몸으로 빼어 나오지 못하고 날개가 젖어 아직 날을 수는 없다.  그것이 오늘 인류종교문화사의 형국이다.
  

[2] 20세기후반 종교간 대화및 협력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

  (1) 세계교회협의회(WCC,1948/ World Council of Churches)
    
  (2) 세계불교도회(WFB,1950/The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3) 제2차바티칸 공의회( The Second Vatican Council))  
  (4)세계종교인 평화회의(WCRP/ 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와 아시아 종        교인 평화회의(ACRP)
  (5) 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와 국제자유종교연맹(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Religious Freedom/ IARF)
   (6) 바아르(Baar) 대화모임(1988-1990)과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1990)
   (7) 한국종교평화회의(KCRP/ 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3] 종교간 대화협력의 미래비젼과 과제들
 (1) 종교간의 관계 패러다임의 전환: 배타주의에서 포용주를 거쳐 다원주의에로
 우리가 제2장에서 살펴본 대로, 1960년대 이후, 세계 종교계의 변동은 가히 전 지구적 차원에서 커다란 지각변동과 같을 만큼 커다란 진통기였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서구 기독교문명권과 학계에서 2000년동안 절대적 계시종교로서 기독교만이 '참된 유일한 계시 종교'라고 생각해왔더 전통주의  신학의 배타주의 패러다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과하면서 포용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고, 세계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성실하고도 치열한 학문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 1980년대 이후부터는 포용주의를 넘어서서  다원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2)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목적: 상호배움 , 상호변화, 상호성숙의 과정
  동서종교들은 서로를 배워, 창조적으로 변화되고, 자기를 풍성하게 성숙시켜갈 필요가 있다.  불교와 기독교는 동서양의 종교발전 과정에서  그 극치를 보여준 우주적 보편종교이지만, 그 두 종교마져 지난 역사적 특정시기에 형성된 상징체계와 교의체계와 영성수련방법에 있어서 역사적, 문화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으며, 초기발생시의 그 위대한 창조적 역동성을 탕진하고 있다. 두 종교는 서로에게서  배울것이 많다. 그래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새로운 제3천년기의 우주적 기독교와 우주적 불교로서 성숙해 가느냐 못하느냐에 두 종교의 미래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종교의 미래는 어느 종교가 과연 더 온전한 진리 앞에서 겸손하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자기를 부정하는  용기를 지니느냐로서 판가름 날 것이다. 과정철학이나 유기체 철학의  통찰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삶이란 창조적 변화과정이며 보다 성숙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종교간의 대화협력의 길들: 정교(orthodoxy),정행(orthopraxis), 정정                                                             (orthocontemplatio)
  "종은 종치는 사람의 힘만큼 울린다"는 말 처럼,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된다.      '가난한 자와 눌린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흔히 보편적 선행주의나 사해동포주의라는 일반론 속에서 간과하기 쉬운 종교인들의  전열을 가다듬게 해 주었다.
   종교간의 대화협동의 길은 '정교'와 '정행'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단계로서 '정각'을 통한 종교대화 협동의 길이 있다. 이 길은 인식론적 단계나 윤리적 단계가 아니라 영성적 단계이다. 표현된 말과 글과 논리로서 비교 연구 대화하는 단계를 넘어서, 윤리적 실천행동을 통해서만이 아닌 제 3의 길이다.   말없는 말, 인격과 인격의 만남, 진리 안에서 거듭난 종교인의 숨결과 숨결을 통한 대화와 협력이다.  
  (4) 종교담론을 삶의 변두리에서 삶의 중앙광장으로  
  20세기 기독교 문화신학자 폴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정의하기를 "종교는 문화의 알짬(Substance)요, 문화는 종교의 드러냄(Form)이다"라고 했다. 이 명구는  중세기 신정정치의 종교지배문명시대를 재현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늘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간의 대화협력을 촉진하기 위해서, 평신도들을 종교담론의 중심화자들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과, 주말의 관심거리로 밀려난 종교란 기사거리가, 대중매체 중심주제로 다시복권하는 날, 한국사회는  요즘같이 소유와 지배철학이 주도하는 정신문화의 황폐화와 극도의 개인 및 집단이기주의가 회횡하는 윤리적 아노미현상을 극복한 건강사회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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