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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우상과의 싸움(씨알의 소리, 2013년 3,4월호, 2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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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저항, 우상과의 싸움
                                              김경재

[1] 주제의 목적과 범위 설정

 함석헌 선생(1901-1989) 탄신 112주년 기념강연회 주제는 ‘한국종교, 함석헌의 종교’라고 강연자에게 통보되었다.   본래 주어진 큰 주제의 정신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구체적으로 ‘함석헌의 저항, 우상과의 싸움’으로 제한하였다.  내건 주제는 3가지 의도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사상가로서 함석헌의 특징을 ‘저항정신’으로 보았고 종교와의 관련에서는 결국 그의 생존당시 시대를 풍미하는 ‘종교적 우상에 대한 비판적 저항’으로 읽었다.
 둘째, 한국의 제도적 기독교계는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를 ‘정통에서의 이탈’로 규정하고 그를 기독교 울타리 밖의 광야로 내쳤지만, 함석헌은 초지일관 ‘그리스도인’으로 본다는 확신을 강연자는 갖는다.  그는 정통 교권주의자들로부터 ‘이단자’소릴 듣는 것등엔 게의치 아니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인 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몸을 담았던 신앙공동체 ‘퀘이커, 종교친우회’는 그것이 아무리 ‘탈기독교적’ 래디칼한 신앙신념과 종교 행태를 보일지라도,  세계 그리스도교 물줄기 중의 ‘한 지류’임을 그 누구도 부정못한다.  
 셋째, ‘함석헌의 저항정신, 우상과의 싸움’은 한국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 특히 한국 개신교의 신앙행태에 대한 비판에 집중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한국개신교가 앓고있는  질병 진단이 이웃종교에도 일부 타당한다면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무방하지만, 이 강연에서는 한국 개신교에 집중한다. 한국 개신교는 함석헌의 종교생활의 모태이었고, 그의 신앙구도자로서 여정은 개신교도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적 인격체로서 영글어가는 ‘종교껍질 벗기’ 과정이요, 참을 찾아 치열한 구도자의 영혼을 옥죄이고 가로막는 ‘종교우상’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 강연문 초고를  써가는 도중에, 바로 며칠전 출판된 김삼웅 선생님의 역저 「저항인 함석헌」(2013년,3월15일 초판 1쇄 발행, 현암사)을 접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제목에 ‘저항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그의 생애가 온통 저항인 이었는데, 마치 종교인, 재야사학자, 문필가, 시인등로 ‘왜소화’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옳은 지적이라고 동의한다.
  저항아 함석헌의 야인정신은 결국 우상을 우상이라고 폭로하면서, 씨이 우상의 노예가 되지않고 자유인이 되고 참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위하여, 우상과의 싸움을 살았다. 그는 본래 심성이 평화주의자였는데 때론 지독한 독설가요 싸움꾼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오직 ‘참(진리)를 그리워함’ 때문이고 ‘씨이 자유인 되게함’ 때문이었다. 이 글은 우상중에도 특히 가장 자기정체를 절묘하게 위장하고 은폐하는 ‘종교우상’과의 싸움을 함석헌은  왜  했던가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우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상숭배가 종교계에서 빈발하는가?   

 우리의 주제 ‘함석헌의 저항정신, 우상과의 싸움’을 이야기하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그그리고 우상숭배 현상은 왜 발생하는가를 먼저 이야기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상의 정체’와 ‘우상의 현상적 매력과 그 능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종교에 대한 정의와 ‘종교와 문화간 상호관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두가지  명제를 말한바 있는데  ‘우상’과 ‘우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1명제 :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신앙인이란 자신이 관여하는 궁극적 관심이 내포한 그 힘과 의미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제2명제 : “종교는 문화의 실체(얼,substance)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몸, form) 이다”.

위의 제1명제에서 중요한 단어는 ‘궁극적’(ultimate)이라는 형용사 단어이다. 틸리히는 그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를 구약성경 신명기서의 본질 핵이라고 구약성서학자들이 말하는 구절(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오직 유일한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계명이 말하는 심정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궁극적’이라는 형용사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는 전인적 관여(commitment)” 상태를 일컫는다. 그래서 모든 진지한 종교인에게는 자기 종교에 대한 진지성, 성실성, 전적 헌신성, 무조건성을 발견한다.
  둘째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는 아무리 초감각적 실재계 혹은 진여계(眞如界))와 관계되는 인간경험의 사건일지라도, 인간이 시공적 존재요 몸을 가지고 땅위에서 살아가는 한 문화와 관련을 갖는다는 점이다. 사람의 의미와 가치창조 행위과정과 그 결과가 문화인데,  ‘문화’는 형태, 형체, 제도, 조직, 이론, 상징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문화라고 총칭하는 ‘살과 피로 된 몸’ 을 입지 않는 종교는 공허한 관념이요 죽은 종교이며 추상이고 허공일 뿐이다.

  위에서 말한 ‘종교의 본질적 특성’과 ‘종교와 문화’관계성 때문에 ‘우상’이 생기고 ‘우상숭배’현상이 종교계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하면, 종교란 본질적으로 우상과의 싸움이면서, 역설적으로 종교는 바로 우상발생의 텃밭이 된다. 참 종교가 조금만 본래자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우상숭배가 된다. 그러므로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한 잠정적 정의를 다음같이 명제화 할 수 있다.

  ‘우상’이란 ‘궁극적 관심’의 자격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인간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관심갖도록 유혹하는 그 것’이 우상이다.   그리고 ‘그 것’에 충성과 마음과 뜻을 다  바치는 행위와 마음의 태도가 곧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이란 고대 원시시대의 종교의례에서 신상(神像)으로서 만든 목제물, 석조물, 철조물등 가시적 대상물만이 아니다. ‘우상’은 철저한 비판적 성찰력을 결여한 보통 인간들에게 잠정적으로는 자기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매혹과 힘’이 있다.  그런 ‘매혹과 힘’이 결여된 것은 ‘우상’이 될 자격도 없다. 문명사 속에서 ‘우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 해가며 인간개인과 집단을 사로잡았다. 절대적 신관념, 제국의 힘, 황금의 위력, 지성적 학문체계, 위대한 예술작품, 과학문명, 에로스적 사랑의 열정, 무소불위적 절대 정치권력, 정치경제적 이념, 거룩한 종교제의, 보물함 같은 종교경전 등등이 모두 ‘우상’의 반열에 서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농락했다.
  ‘우상’이 인간성을 파괴하고 문명을 병들게 하는 이유는, 우상은 사실인즉 ‘궁극적 관심이 될 자격없는 것’인데, 잠정적인 그 매혹적 힘과 능률성과 욕구를 체워주는 만족감 때문에,  결국 인간을 사로잡아 ‘자유인’이 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상이 약속하는 그럴듯한 유토피아는 결국 환상으로서 막내리면서 인간을 허무감에 몰아넣는다.  ‘우상’이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요청하는 맹목적 충성과 열정의 열기로 인해  뭇생명을  상해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사이비종교 신흥종교집단 교주와 그 신도들의 집단자살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동아전쟁의 일본군국주의와 독일 힛틀러 제3제국의 희생이 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간 사실을 생각하면 우상숭배 폐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수 있다. 한마디로 우상은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며, 문명사회에서 창조적 힘과 숭고한 삶체험을 말살시키면서, 인간 생명의 자기실현을 저해하는  파괴적 힘으로 은밀하게 작동한다.
  ‘우상’이란게 알고보면 진짜인척 하는 가짜요, 진리인척하는 비진리요, 생명을 풍요롭게하는척 하면서 반생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데, 왜 사람은 개인이나 집단이 ‘우상숭배’ 행태(行態)에 쉽게 떨어지고 마는가? 그 원인을 고전적 사례로서 설명하는 비유가 하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이며, 또다른 하나는 사도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눈멀어진 후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진후 시력을 회복했다는 (행9:18) 상징이 말하는 해석학적 진리에 눈뜸문제가  그것이다.  전자 ‘동굴의 비유’는 주로 왜 인간은 문화적-사회적 집단으로서 ‘집단적 우상숭배’에 희생이 되는가를 잘 말해준다. 후자 ‘눈에 덮힌 비늘’은 개인의 열정적 신념과 닫혀진 지성이 왜 도리혀 진실의 실재에 대하여 맹인이 되고  귀먹어리가 되는가를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맹목성의 비극’을 일깨워준다.

 2-1.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대화록중 「국가」(政體, Politeia) 라는 명저 제7권의 주제는 아테네청년들을 ‘올바름(정의론)에 관하여 바른 교육(paideia)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한가, 그리고 교육부족과 잘못된 폐쇠된 교육이 얼마나 진리실재 파악과 접촉을 저해하고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가 해명하는 비유이다. ‘동굴의 비유’의 중요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① 어릴 때부터 깊은 동굴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일단의  사람들은, 동굴의 희미한 빛의 조명도에 시력은 알맞게 적응되어  조절되어 있고, 동굴 밖의 세계(실재계)를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동굴안에 유폐된 생활세계를 자신들의 유일한 생활세계로 알고 자족하며 산다.
 ② 노예들중, 어느 한사람 혹은 일부가 동굴밖 빛의 세계를 보거나 경험했을 땐, 밝은 빛에 눈의 감각작용이 익숙해지기 전엔 시각신경은 고통을 경험할 것이며, 동료들은 그의 ‘동굴밖 세계 정보제공’을 감사하기는 커녕 안정된 질서를 교란하는 반동자로 몰고 죽이려고 까지 할 것이다.  
 ③ 그러나, 참된 삶을 살려는 자유인은 지성의 힘을 의지하여 빛의 세계를 향해 등정해야하며, 태양으로 빛나는 진리의 세계(이데아계)를 보아야(idein) 한다. 참 교육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동굴밖에 참된 빛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그리고 오르도록 돕는 것이 참교육이다.

  플라톤의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 내용을 위와 같이 그 일부만 소개하는 것은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소개하지 않은 잘못을 범하지만,  왜 인간집단이 쉽게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가 이유를 해명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오늘날 지식사회학이나 ‘인문학의 꽃’이라고 말하는 ‘해석학’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역사적-문화적-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 문화, 사회는 단순이 삶의 조건이거나 여건만이 아니라, 물고기가 동해바다 물속에 녹아있는 공기를 흡수하고, 플랑크톤을 먹고 자라며, 물에 의한 부력에 의해 헤엄치고  다니듯이 사람은 ‘세계-내-존재’(하이데거)라는 말이다.  
  닫힌 사회, 사상통제사회, 김일성 유일주체사상만 허락되는 사회, 하나의 종교와 하나의 교리체계만 진리라고 강요받고 제공받는 종교집단 사회,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만 읽는 종교인은  한마디로 플라톤이 비유하는 ‘거대한 정신적 동굴사회’에 갇히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 동굴사회의 빛의 조명도가 낮은 동굴 분위기가 편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동료 노예들과  기존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동굴밖 다른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자는 불순분자요, 동굴의 안정과 질서를 헤치는 자이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해야하고  ‘왕따’시키거나 심할 땐 죽여버려야 한다.  
  인류의 지성사, 특히 종교사는 그래서 이단파문, 마녀사냥, 화형에 처하는  극형, 동족간의 종교전쟁도 불사한다. 우상숭배는 인간집단을 특정한 정신적 ‘동굴’에 갇우어 놀 때, 동굴에 갇힌 정신적 노예들의 자발적인 충성심과 결속력으로 ‘우상종교’는 호황을 누린다. 그러한 댓가는 영원한 노예상태요, 빛과 자유세계를 모르는  비인간화가 가속화 된다.    

2-2. 바울로 전환하기전 유대 젊은 지성청년 사울의 ‘눈에 덮힌 비늘’의 상징성   

  초대 그리스도교 발생당시 문화적-사회적 여건을 감안할 때, 유대청년 사울은 흔하지 않는 지성인이요 유대교의 진수에 통달한 율법학자였다. 그는 당대 최고 지혜자라 일컫는 가마리엘문하의 제자요, 바리새파 출신의 앨리트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하에서 ‘로마시민권’을 획득한 특별히 선택받은 유대인 엘리트 청년이었다.
 그의 ‘예수도당’을 타도하려는 열정은 흔히 기성세대가 갖는 출세욕망이나 권력지향성 때문도 아니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보상을 받거나 유대교권 당국으로 부터 표창을 받고자하는 치기어린 충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 자신은 당시, 오로지 일념 그가 진리라고 믿는 유대교의 율법종교, 그가 신성하다고 확신하는 산해드린의 권위와 성전체계, 거룩한 전통, 야훼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절대성을 전념을 다해 지키자는 것이었다.     로마제국 식민통치아래서 선민 이스라엘이  수모를 당하는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그 이름 들어보지도 못한 시골출신 예수와 그 도당들이  혹세무민하는 ‘십자가과 부활의 도’를 전하면서  유대교 사회집단의 기저를 위태롭게 하는 ‘새 종교’를 전파하고 다닌다하니, 젊은 청년엘리트 사울은 분노가 충천했다. 예루살렘 저자거리에서, 스데반이라는 청년을 돌더져 즉살시키는 인민재판에도 참여해지만 분이 안풀려, 대제사장으로부터 죄인압송 영장집행권을 받아가지고,  다마스커스로 향해가던 중  사건이 터진 것이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에 둘러싸임 받고, 말안장에서 굴러떨어져 시력을 잃게되고,  며칠간 은거하다가   ‘눈에서 비늘같은 것’ 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력을 회복하고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을 갖게된다.  그가 박멸하려는 예수를 전하는 ‘사도’에로 극적 전환이 그것이다.  우리의 오늘의 관심은 사울청년의 신비체험의 실상이 무엇인지, 그가 회심하고 전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밝히자는데 있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가 ‘바울의 눈에 덮혔던 비늘같은 것’의 상징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세가지 점이다.
 ①  최고 수준의 지성과 학벌과 사회적 신분을 갖는자도 ‘유대교’라는 종교를 절대화하는 것처럼, 인간 개인은 비판적 자기성찰능력에도 부룩하고  ‘특정신념의 절대화, 우상화’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② 더욱이 그의 전향전 가졌던 ‘예수당’에 대한 ‘광기’와 ‘광신적 열정’이  자기자신의 출세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대가성 행동이 아니고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상숭배’의 열정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지키려는 ‘궁극적 관심과 열정’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③ 사울로부터 바울에로의 전회(轉廻)는 교육, 설득, 자기수양, 독서등의 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고, ‘진리로부터의 조명’을 받을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 ‘빛의 조명’이 밖으로부터 오는가, 인간의 본래성 안에 선험적으로 있는 ‘진리의 빛, 말씀의 빛’에서 오는가에 관한 학자들의 의견 차이는 둘째문제다. 사실은 ‘밖으로 부터이냐, 안으로 부터이냐’의 논쟁자체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어서 다툼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2-3. 그러나, 인간의 우상만들기의 현실적 충동은 인간의 탐욕 때문.

 인간의 우상만들기와 우상숭배의 원인이 인간집단이 처하는 사회문화적 경험의 제약성으로서의 ‘동굴상황’과 개인의 왜곡된 ‘사이비 궁극적 신념의 열정’에서만 온다면 너무 원론적 원인 분석에 그칠 위험이 있다.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와서 그 속을 파헤치고 보면 결국은 인간의 ‘무제약적 탐욕’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계고등 종교들은 탐욕이 인간성의 근본적 질병원인이자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탐욕은 단순히 소유욕망보다 더 깊은 인간성의 불안의식과 자기초월의식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역설한다. 가령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간성의 세가지 치명적 삼독(三毒)을 ‘탐 진 치’(貪瞋痴)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교에서 3가지 대죄를 ‘교만(pride), 불신앙(unbelief), 탐욕(concupiscence)’으로 보는 것이 그 예이다.
 신약성경 목회서신 속에서도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고 잘라 말한다. 탐심은 탐욕이요, 탐욕의 대상은  물론  금권욕, 권력욕, 명예욕등 다양한 종류로서 뒤엉키고 혼합되기도 한다.  

[3] 함석헌이 지적한 한국 기독교의 5가지 우상숭배

 함석헌의 사상 특징을 참과 올바름과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에서 울어나오는 ‘거룩한 분노’의 표출로서 거짓과 불의와 추함에 대한 ‘저항’으로 규정할 때, 특히 종교영역에서는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는  ‘ 예언자적  질타와 고발과 심판선포’로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기없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축복선언보다도 하나님의 심판과 위기경고를 전달해야 할 임무를 운명적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미워서가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망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혹시나 개혁하여 살아남기를 바라서, 예언자들은 냉엄한 우상파괴적 언어를 쏟아낸 것이다.
   해방이후 함석헌의 타계까지 40년동안 그는 한국교회의 다음과 같은 우상숭배적인 대죄  5가지를 지적하면서 고발, 비판, 저항, 파멸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류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몰리고, 아예 기독교 울타리 밖으로 쫒겨났다. 그는 기독교계 정통신학자들과 목회자들로부터  잊혀졌거나 아예 언급을 회피하려는 기피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선포는 역사속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이미 예언대로 이루어저 가고 있는 것이다.

(1) 특정한 정치  〮경제 이념에 예속된 이데올로기 우상화

함석헌이 한국 개신교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첫째 논쟁점은 한국기독교는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가 말하는바처럼 “날씨는 분별하면서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현대용어로 말하여 깨어있는 역사의식과 시대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때를 분별하는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에, 당대를 풍미하는 특정시대의 정치이데올로가와 경제사회 이데오로기에 자신의 혼을 팔고 충성하고 그 이념에 예속될 뿐아니라,   마친네 그것을 신성시하고 우상화 한다.  
해방후 남북 분단이 진행되면서, 남북은 구약성경 창세기 족장설화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 쌍둥이의 장자권 다툼처럼, 북한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 이념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대결국면으로 나뉘이게 되었다. 그래서 1950년에서 발발한 동족상잔의 한국 동란에서 400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래도 끝장이 아니나서 지금도 대결중이다.  해방정국의 북한 땅에서 ‘체험적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하고 남하한 대다수 한국 개신교 주류들은 남한의 반공주의 전열의 최강 최후 보류가 되었다.
  그러한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 이념가치’를  지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비리에도 눈감고, 군사정권의 월남파병도 적극 지지하였고, 역대 한국정치계의 보수적 수구정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함석헌은 묻는다. 그의 물음은 저항이고 한국기독의 그동안 행태는 복음의 본질인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계명’을 배반한 특정이념의 우상화 라는 것이다. 저항아 함석헌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논설문에서 그의 독설아닌 진실의 소리를 들어보자.

  새로 나라를 세우는데 높은 이념을 보여준 것이 없고, 공산주의와 만나서 기독교의 믿음     과 사랑을 발휘할 때인데 겁내고 미워만 했지 이긴 것이 없다.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도 민족적 회개운동도, 깊은 역사적 의미파악의 노력도 보여준 것이 없었으며 전쟁이 지     나간 후도 새 건설의 설계도를 내는 것이 없다. 지유당 10년에 반항 하나 한 것 없기       때문에 4.19라는 역사적 운동에 아무 참여를 못했고, 5.16에 대해서도 정당한 책망하나
  못했다. 한일회담 때는 첨에는 상당히 강한 투쟁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명분없는      월남전쟁에 대해서는 사실상 찬성을 한 셈이니 이제와서 무슨 소감이 있는가, 없는가?      이때껒 남의 나라의 침략속에 사는데 평화운동 하나 일으킨 것이 없지, 젊은이들이 그렇     게 고민하는데 강제징병에 대한 양심적 거부 하나 지도해준 것이 없지, 그리고 오직하나     생긴 것이 있다면 교회재벌이다.

 함석헌은 20세기 애굽의 파라호 우상숭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할 것 없이 ‘국가주의’라고 본다. 그 국가주의가  전제민중을 몰아가고 온우주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값어치를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이란 현대판  파라호의 신격화된 정치권력과 이데올로기 절대화라는 우상숭배에서 인간을 건지는 것인데, 그 직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충견처럼 그 일에 복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 경전과 교리를 절대화하는 한국개신교의 『성경』우상화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 힘과 표준이 성경이라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민족이 사실  서양종교라고 일컫는 그리스도교가 한민족에게 전래된지 230년만에(가톨릭1784, 개신교1884) 그리스도교인 숫자가  한국종교인의 절반에 이르고, 개화기 이후 사회와 문화변동에 큰 힘이된 것은 그 일차적 동력이 성경의 한글번역과 보급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개신교 경우는 더욱더 그랬다.  그런데,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라고 부르짖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중심의 원리가,  성경속에서 들리는 살아움직이는 생명의 말씀과 영적 역동성을 성실하고 교조화되고 문자적으로 절대화될 때, 한국 기독교에 치명적 족쇄로 작용하는 역기능을 초래했다.
 사실 개화기에 당시 한민족의 일반적 교양수준보다 앞서는 먼저깬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 점차로 시대에 뒤떨어지고, 문명진보의 대열에서 지진아가 되고, 진화론을 무조건 이단이라 단죄하고,  지성인 사회에서 대화소통의 단절을 일으키고, 타종교나 전통문화와 끊임없는   충돌을 야기하는 근본원인이 근본주의신학으로 훈련받는 선교사들의 성경관을 금과옥조 처럼 삼는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의 경전문자주의, 정통보수신학교리와 신학체계의 절대화에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종교는 어디까지나 체험의 자리입니다”고 주장한다. 말로서 글로서 표현될 땐,  화산의 마그마가 식어져 하루방 돌이 되듯이, 말이나 문자는 원체험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보통경험에서도 그러할진데 하물며 높고 숭고한 종교체험과 진리체험은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함석헌은 종교가 교리적으로 체계화되고, 『성경』을 구원에 관한 길만을 알려줄 뿐 아니라 세상만사 모든 비밀을 풀어주는  백과사전처럼 생각하는 ‘책 종교’로 변질되는 것을 누누이 경고했다.
  신앙이 독실한 정통신앙인들은 『성경』이 표준이라고 곧잘 주장하지만, ‘해석’되지 않는 ‘성경 그 자체’란 없는 법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경문자 자체가 글자 그대로 진리라고 주장하는 성경관을 전제한 소리이거나, 자기류의 해석이 ‘표준해석’ 이라고 주장하는 해석학적 독단일 뿐이다.  그러한 ‘성경’의 절대화는 놀랍게도 하나님이나 진리를 성경안에 제한하는 만용을 부리게 된다. 『성경』이 기록되고 편집되어 경전으로서 확정되기 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온 우주속에서 살아있었고, 인류는 하나님을 신앙하고 진선미 거룩을 체험하고 노래하고 있었다.  함석헌의 자신이 쓴 시집 『수평선 너머』발문((跋文)에서 다음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가 영원히 사시기 위하여 자기 깊은 속을 영원히 감추시는 이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의 시(詩)를 밤알 까듯이 완전히 깨쳐버린다면 그 하나님은 벌써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비유 속에 숨으신다. ....... 시가 끊어진 곳에서 시가 살아있다.
   산 시가 있다. 가람(伽藍)의 종교를 버리고 인격의 신앙으로 들어가자.

『성경』만이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종교경전들은  가장 위대한 최고의 시집이다. 하나님이 성인들과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읊게한 하나님의 시들이다. 해인사는 목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세계에서 자랑하는 법보가람(法寶伽藍) 이다.  “가람의 종교를 버리고 인격의 신앙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경전의 책종교를 극복하여 인격적 신앙, 영과 진리로서 환하게 꿰뚫린 신앙, 지성과 감성이 함께 동반하는 신앙, 이성적 과학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종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가고 더 온전케 하는 ‘이성을 넘어선 이성종교’에로 나아가자는 말이다.
 한국기독교가 영적으로 살아나려면, 개혁되려면, 21세기에도 의미있는 영적종교로서 한민족에게 영향을 주려면 『성경』책과 정통교리를 절대시하는 우상숭배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그자체가 아니며, 진리와 참생명을 증언하는 증언자의 소리이지 ‘진리 그 자체’ 는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우상화하는 대죄에 빠지게 된다.  

(3) 땅을 경시하고 하늘만 중시하는 천국직행 우상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제대로 성서신학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발생의 원점이요 원동력인 역사적 예수의 절대적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가 가르친 ‘주기도문’의 핵심도 “(하나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20세기 대표적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도 위대한 세계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상징할 유형적 특징을 지적하는데, 불교는 ‘니르바나’(涅槃)이고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나라’(神國)라는 총괄적 상징어로 표현된다고 말했다. 불교는 니르바나 안에서 만유와 만인이 그 본래성을 성취하는 것을 궁극목적으로  염원하는 종교이고,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만인과 만유가 하나에로 연합되기를 염원하는 종교라고 그 특징을 비교한바 있다.
  다시말해서, 모든 종교들은 표현을 달리하지만 결국 본질계와 현상계, 정신계와  물질계, 영원과 시간,  진여계와 생멸계, 공계와 색계를 어떻게 구별하면서도 분리하지 않는 관계라고 설명하며 그 양자의  통전을 이루는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 양자의 두범주, 혹은 두차원의 실재를 성경은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그런데 그 통전문제의 해법에 있어서 인류의 대표적 3종교는 각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헬라철학 종교는 ‘땅에서 하늘에로의 상승’을 가르쳤다.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가 그 대표였다. 물질계를 초월하여 순수 정신계에로 올라가 ‘일자’(一者)에로 귀환할 것을 가르쳤다.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지혜종교는 그 양자를 분리시켜 이해하거나 분별하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참지혜를 통하여, 진여계와 생멸계가 ‘해파관계’(海波關係) 임을 깨달으라고 가르쳤다. 이른바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다.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두가지 혈통을 초대기독교 시대때 물려받았기 때문에, 두 혈통간 에는 항상 긴장갈등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본래 원주류는 “하늘이 땅에 임하여, 땅을 변화시켜 땅에 임한 하늘세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고백해 왔다. 이것이 이른바 ‘성육신적 영성’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임했는데,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 1:14)는 증언이던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는 성경구절이 진실로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증언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과 땅을 소홀히하거나, 기피하거나, 잠시 지나갈 ‘간이역’ 정도로 생각해서는 않되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종교사 2000년은 예수의 간절한 염원을 배신한 역사였다. 왜냐하면 땅을 버리고 하늘에로 직행하려는 천국직행 신앙을 정통복음 이라고 주장해왔고, 신도들을 그렇게 세뇌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더 중요한 문제는 상징으로서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제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목적은 하늘에 있으나 일은 땅에 있다.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하나도 없다.
  이 의미에서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셨지, 땅을 버리고 곧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십사 하시지     않은 것은 깊이 새겨 알아야 할 말씀이다. 현실을 피하고 구원은 없다. 현재의 고통은      문제 아니된다는 소리는 민중을 속여 영워한 압박에 비겁하게 굴복케하면서 그들의 피땀     으로 수고한 결과를 짜먹자는 지배자의 앞잡이 종교가만이 하는 소리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     에 있다.

  그 놈의 천당이 나라를 망쳤다. 절대로 하늘나라가 없다는 말 아니요, 하늘나라 찾는 것     이 잘못이란 말 아니다. 그렇게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나라 바라는 일 아니라는 말이다...
  하늘이 허공에, 죽은 후에, 있는 줄 아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다......허공에 있는 것이 햇     빛이 아니요 땅에 내려와야 빛이요 열이듯이, 하늘은 무한 막막한 허공에 있지 않고 땅     에 와 있다. 땅 중의 땅, 흙중의 흙이 어디냐? 네 가슴이요 내 가슴 아닌가? “하늘나라     너희 안에, 혹은 너희 사이에 있다”는 말은 왜 그렇게 쑥 빼놓는가?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가 역사의 고난현장, 민중의 아픔과 신음, 현실 정치 사회 문화계의 문제를 외면하고, “예수 믿고 천당가시요!”라고 선전하는 것이 정복음(正福音)이라고 오늘도 우겨대는 개신교는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본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핵으로 전하는 예수 뜻을 배반하고, 모두 사이비 플라톤제자가 되었거나 이단적 영지주의자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오늘도 명동거리에 나가면 “예수 천국, 불신지옥” 팻말을 들고 복음전도랍시고 행인들 길을 가로막는 열심교인들이 있다. 한국 개신교의 점잖으신 주류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명동거리의 전도자들과 다르다고 발뺌하겠지만, 세계에서 단일교회로서 제일크다고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설교 멧시지 핵심내용이 사실 그것아닌가? 다만 한술 더떠서, 기독교의 본질은 천당가는 것이지만, ‘간이역’같은 이 세상에서 잠간 기차가 머무는 동안에도 쇼핑도 즐기고 ‘삼박자 축복’을 누리는 것이 ‘순복음’ 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기독교를 가지고 새시대, 새문명을 이끌어 갈수 있을가? 천국직행 복음주의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기복적 우상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

(4) 무한성장 축복론과 거인숭배에 빠진 개신교안의 우상화 열풍

 한국 개신교의 급성장은 한국사회와 국가의 경제산업의 급성장 무드를 타고 특히 1970-80년에 열기를 더해갔다. 개화기 물결을 타고 들어온 초기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복음주의자들과 초기 예수믿는자들은, 비록 당시 신학교육은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 신학을 받았지만,   경건과 절제와 근검청빈의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썩어 문드러져가 고루한 동시대의 사회기풍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런 초창기의 한국개신교의 경건성과 근검소박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인물들로서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김약연, 김교신, 이용도, 김용기, 최흥종, 이현필 등이 있었고, 신학사상적으로 본다면 보수라 하는 김익두, 길선주,주기철, 손양원, 박형룡, 장기려, 그리고 수많은 이름없는 진솔한 여신도들의 삶도 모두 근검소박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기독교가, 1970-80년대 미국 자본주의적 성장위주 기업경영철학을 교회론과 목회신학에 야합시킨 ‘교회부흥 성장론’을 수입하면서, 교회당은 점점 대형화 되어갔고 신앙집회도 대형화 되어갔다. 소위 ‘성장이 곧 축복의 증거’라는 묻지마식 ‘교회성장론’이 기독교를 잠식해갔다. 그결과 세계 50대 대형교회당 가운데 27개가 한국에 있으며, 규모로말하면 상위랭킨 세계15위 안의 교회들이 모두 한국 개신교들이다. 이런 대형교회당  급증과 교인수 대형교회의 현상을 일컬러, 한국 경제성장에 대하여 ‘한강의 기적’이라고 말들 하듯이, 세계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복음선교확장의 기적’이라고 자부하지만, ‘거인숭배 신앙’처럼 크고 힘있는 무조건 좋다는 우상숭배 경지에로 전락하였다. 그 현상에 대하여 함석헌은 날카로운 경고를 퍼붓는다.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애고추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     요를 느끼지 않는다. .....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하고 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고추 속에 있     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찬공기와 일광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 같이, 내리     누르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예언적 경고는 불과 20년이 못되어, 1990년부터 한국 개신교에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줄어들고, 일부대형교회의 교인수 지속이란 기존교인들의 수평이동 이동일 뿐 새로운 교인의 입교(入敎)는 정지상태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받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목회자는 교회제직회(敎會諸職會)에서나 개인 신도들에게 무리한 자금대출을 독려해서라도 몇백억, 몇천억비용드는 석조건물을 짓느라고 큰 교회들이 대부분 은행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함석헌이 경고한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시는 일”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교회당과 기존교인수의 현장관리에 심혈을 쏟는다. 해독과 피해는 그뿐만 아니다.  한국 경제계와 산업계에서 재벌기업이 중소기업이나 시장상권을 무자비한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앞세워 무너뜨린다고 비판 받듯이,  ‘작지만 내실있는 작은교회들’을 그 근져에서 무너뜨리고 신도들을 흡입해가는 반신앙적 행태가 자의반 타의반 자행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거인숭배 우상신앙’에 빠졌다.

(5) 실질적 맘몬숭배로 빠져든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의 ‘탐욕’의 우상화

함석헌과 출생년도가 같고 19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재야지도자로서 함선생과 함께 일하셨던 장공 김재준목사(1901-1987)는, 그가 양성한 기독교장로교 교단 제자목사들에게 늘상 경고하기를, ‘영적 야심’도 더욱 교묘한 ‘탐심’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란 명분을 내걸고서 실지로는 목사 자신의 ‘영적 탐욕’을 충족시키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늘상 충고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고 말하는 성경의 단도직입적 선언처럼, 마지막 한국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우상은 지도자들의 탐심에 우상숭배 근원이 자리잡고 있다. 성직자들의탐심은 자신도 속아넘어갈 뿐 아니라, ‘거룩’으로 포장하고 변호하면서 타락과 나락이 끝모르게 진행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돈’의 위력 앞에  대부분 굴복한다.
 예수가 광야에서 겪었다는 3가지 치명적 ‘광야시험’의 본질은 황금위력, 권력위력,초능력의 종교기적능력의 유혹이 뜻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항상부딪혀오는 치명적 유혹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기독교가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저지르고있는 맘몬숭배의 속내를 듣기 거부할 정도로 함석헌은 직설적으로 파헤친다.

 사실 언제나 타락은 황금에서 온다. 광야의 교회는 금송아지 숭배로 타락이 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믿고 택해 세운 아론, 미리암이 앞장을 서서 그렇게 했다는 데 더 슬픔이 있    다..... 황금이 무엇인가? 이미 있는 질서, 제도,권력의 심볼이다.

  현대교회 중에 자본주의적인 생활속에 있지 않는 교회는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하     에 살면서 덮어놓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으로 믿으므로, 자기네 손에 들어오     는 수입이 과연 사회정의에 합한 과정을 밟아오는 것인가 아닌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     저 은혜(恩惠)라고만 한다. 그러나 성단(聖壇) 위에 놓이는 돈은 피가묻은 돈들이다.굉장     한 교회당는 사실 엄정하게 몰 때 맘몬이 세운 것이요, 맘몬의 힘으로 유지되어 가는 것     이지 결코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은 막스베버가 지적한 대로 근대자본주의 초창기 발생기에 프로테스탄트정신 특히 청교도정신의 특징들로서 근검절약정신, 합리적 시간사용과 경영정신, 이익으로 창출된 자산을 자기소유라고 생각하지 않는 청지기 정신, 자본의 창의적 재투자 기업가 정신 등등에서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사회제도의 출현에 공헌한바 있다는 지론을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는 초창기 건전한 청교도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돈귀신’에 사로잡힌 병든 자본주의 이다.
 함석헌은 현대교회가 변질된 현대자본주의 문화와 정신적으로 야합하는 자세를,  가까운 친척 남녀사이의 성적관계를 일컫는 토속적 말 “상피(相避)를 붙는 일이다”라고 까지 비유적으로 말하면서  실랄하게 비판한다.
 역사적 거리를 두고보면 중세 기독교가 복음의 본래모습을 잃어버리고  귀족과 영주를 중심으로하는 중세봉건주의에 사로잡힌 시대라고 보이듯이, 역사가 흐른뒤 후손들은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한국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만몬숭배신앙에 완전히 포로되었던 시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평가 할 것이다. 기독교는 지금 입바른 형식적 고백은 ‘하나님 중심신앙, 오직 십자가 신앙’ 운운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탐욕에 젖어 맘몬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셈이라는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신랄한 비판은 ‘불편한 진실’인가  사실무근의 ‘기독교 비방’인가?

[4] 함석헌이 꿈꾸는 미래의 종교

  함석헌의 엄정한 현대종교비판 특히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가 망해버리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문둥이의 피부에 새살이 돋듯이, 고목가지 끝에도 봄엔 새순이 돋듯이 새로운 영적 생명으로 소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함석헌은 현대 한국 기독교가 ‘낡아가는 종교’로 보인다고  진단한다. 그 노쇠증상으로서 5가지 증상을 열거했다. ①  교리를 강조하는 경향성 ② 역동적 생명공동체가 제도화되고 교권강화 경향성 ③ 새로운 시대사조에 대항하는 방어적이고 수세적 성향 ④ 현실문제를 도피하여 피안적 신앙을 강조 ⑤ 세력싸움과 재산싸움으로 내분이 격화되는 경향 등이 그것이다. 듣고보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 그대로이다.
  전래된지 130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기독교가, 초창기의 젊고 싱싱한 기백과 근검절약하고 경건하던 신심을 잃어버리고 노화현상과 망발현상까지는 보이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단체만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변혁되어야 하고 개혁되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함석헌이 예견하며 동시에 바라는 미래의 종교모습은 다음같이 정리된다.
  ① 인간이 인간인한 영육의 갈등을 항상 겪는 것이지만, “뚫려비취는 체험단계”에서 ‘정신과 육체’, ‘초월과 내재’의 이분법을 극복한 통전적 인격종교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통을 말하고 신비체험을 말하지만 철저한 깨어있는 이성과 인격의 토대위에 자리잡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을 존중하고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성을 넘어서는 종교라야 한다. “이성이 갈 곳까지 간 후에 신앙의 세계가 열린다”고 강조한다.  
  ② 미래의 종교는 점점 더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승화되면서, 생명이란 ‘하나’이라는 동체대비심으로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속의 죄와 선이 개인적인 책임면이 있으면서도 종교적 입장에서보면 사회전체의 책임이요 공동선이라는 자각에 이를 것이다. 종교가 개인주의와 교파주의와 국가주의에 갇혀있는 유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③ 제도와 조직과 규모는 가급적 단순하고 작은 규모의 종교공동체라야 한다. 앎과 믿음과 실천이 하나되는 자리에로 나갈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 대형교회당의 미래는 1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빈좌석 공간채우기가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일간신문 사설에서 끼지 공개적으로 질타하는 여의도 모교회나 강남 대형신축 교회 담임목사와 연루된 부정비리가 결국은 종교의 제도와 조직과 규모가 큰데서 발생한 것이다.
 ④ 새시대의 종교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하는 종교라야 한다. “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 썩어서 새싹으로 나와 자라서 열매를 맺어 퍼져나가야 한다”. 굳어진 나무둥지와 가지를 붙들고 자기종교는 완전무결하며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희망이 없다.
 ⑤ 미래종교는 ‘하나’를 지향해갈 것이다 섣부른 종교혼합이나 인위적 세계종교통합은 어리석은 일이고 불가능하고 시도해도 않될 일이다.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대하는 우월주의 종교 또한 시대착오적이다.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하는 “이 산에서도 밀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하는 신앙이라야 할 것이다(요4:21-24). 간디가 말한바 처럼 진리가 곧 하나님이고, 사랑이 곧 하나님의 현존임을 생활 속에서 느끼고 살아가는 종교라야 할 것이다.

   우상숭배 상태에로 전락해 있다는 경종을 받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치유와 거듭나는 방향도 위에서 언급한 미래종교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철저한 개혁’(the radical reformation)을 단행 할 때,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013.3.20)

[참고도서]

1. 『함석헌 전집』, 제1권,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1983)
2.  위 같은 전집, 제3권,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한길사,1983)
3.  위 같은 전집, 제4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한길사,1983)
4.  위 같은 전집, 제6권, <시집, 수평선 너머> (한길사,1983)
5.  위 같은 전집, 제14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한길사,1983)
6.  김삼웅, 『저항인 함석헌 평전』, (현암사, 2013)
7.  김경재, 『함석헌의 종교시탐구』,<내게오는자 참으로 오라> (책보세,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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