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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론 담론은 현대 역사주의와 해석학을 이해해야(휴심정, 20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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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론은 서구 지성계의 뜨거운 학문토론결과 나온 것(2011. 06. 24 10:48:52)

                                             
종교다원론 담론은 현대 역사주의와 해석학을 이해해야
- 길희성교수의 ‘초종교적 영성’의 참뜻을 찾아서-
                                                            김경재 목사


지난 2006년 삼소회 멤버들이 가톨릭과 성공회 수녀, 불교 비구니스님,원불교 여자교무들이 함께 예루살렘 겟세마네동산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

진리는 목소리 크기나 사람숫자로써 결정되지 않는다

요즘 <휴심정>이라는 열린 종교담론 광장을 통해서 ‘뜨거운 감자’인 종교다원론이 다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길희성교수의 진솔한 학문적 소신발표를 지지하는 무리와 반대하는 무리 사이에 격론을 일으키고있다. 이런 논쟁은 겉으로 보면 소모적 감정논쟁 같아도 진지하게 보면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나는 이 논쟁이 피차간 생산적이 되도록 하기위해 몇가지 점을 피력하고자 한다.

찬반 양측이 겸손하게 받아드려야 할 점은, 진리란 목소리 크기나 사람숫자로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지른 무리들의 목소리는 컷고 머리숫자도 제자들의 그것보다 훨신 많았다. 그러나, 군중무리들의 집단 목소리나 대중들의 판단이 틀렸고 잘못된 것임이 역사가 흐르면서 밝혀졌다. 독일 제3제국이나, 독재국가에서 독재자들의 여론통제와 조작은 귀신놀음보다 정교하여 대부분 국민을 동원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진리가 뒤바꿔지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교회사 속에서도 마찬 가지다. 18세기는 합리적 이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주류를 차지했고, 19세기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소리가 주류를 차지했고, 20세기 초엔 적어도 미국에서는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주류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역사란 모호성과 불확정성을 동반하면서도, 역사는 서서히 진실의 모습을 들어내면서, 진리를 독점관리한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 곧 ‘진리앞에 겸손 할 줄 모르는 대심문관 무리들’의 그 어리석음과 교만과 독단적 광기성을 생명광장에서 드러내고야 만다.

오늘 한국교계 지도자들과 신학자들과 신도들도 그 점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종교다원론 담론’을 선입견이나 독단없이 열린 맘으로,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임해야 한다. 한걸은 더 나아가서 보다 성숙한 인류의 문명털갈이나 허물벗기의 진통으로서 알고, 문명의 성숙과 치유를 위해 탄식하고 간구하시는 성령의 기도를 들으려는 맘자세로 임해야 한다.


현대 역사주의와 해석학 이론은 종교다원론 논쟁의 기본바탕


길희성의 “당신의 종교만 진리인가?”라는 질문형식의 명제는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고 확신하는 종교인들의 그 신앙의 열정과 자기 종교사랑이 독단적 독선적 주장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두가지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19세기 후반기 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러 세계 지성계가 대체로 받아드린 ‘역사주의’ 담론이요,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절정에 도달한 ‘정신과학의 꽃’이라고 일컫는 ‘해석학’ 담론이다.

먼저 역사주의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역사주의는 두가지 점을 강조하는 실재론이요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역사주의는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경험형태와 제도 조직체계는 ‘역사변화의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속에서 태어나고 꽃핀 모든 사상과 의미있는 가치들은 예외 없이 일정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통해 영향을 받아 탄생했고 뒤따르는 역사에 영향을 주면서 달려가는 ‘과정적 실재’라는 점이다.  

영원불변하다고 생각했던 철학자들의 이념체계, 정치이데올로기, 예술양식, 생활방식, 경제사회 생산분배방식등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들을 뛰어넘어 변화하지 않는 원리와 법칙을 찾는 인간성 그 자체도 길게보면 ‘과정적 실재’요 ‘역사적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역사주의란 모든 지식체계나 경험형태나 문화제도및 조직이 역사적 맥락과 상황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절대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상대성은 인간문화 속에서 도덕적이고 이념적인 가치들을 ‘회의주의’라는 망치로써 파괴하는 역기능만 갖는 것 아니다. 도리혀 역사나 문화의 개별적 특성과 고유한 구체성 속에서 도리혀 역사적 실재들과 정신문명의 참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대 20-21세기 ‘종교다원론’ 담론은 갑자기 돌출된 새로운 것이 아니고 19-20세기 서구 지성계의 뜨거운 학문적 토론결과를 기초로해서 그 결실로서 형성된 것이다. 즉 인류의 위대한 종교들도, 설혹 그 종교발생의 원동력이 초역사적 요소가 있다하더라도, 일정한 역사적 맥락과 상황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해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사건’에 의해 발생하고 지탱되는 ‘계시적 종교’이기 때문에 ‘역사주의’ 대상이 될 필요없고, 더우기 ‘역사상대주의’를 핵으로 하는 역사주의적 실재관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반신앙적이고 기독교파괴적 인본주의적 반동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종교다원론의 담론은, 기독교를 비롯한 위대한 세계적 종교들이 지닌 영원한 진리가르침의 가치는 보존하고 지키려는 열정엔 존경을 표하지만, 그 방법이나 태도가 가진 반지성적 독단적 진리주장엔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설혹 초역사적인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그리스도교 발생의 동력이고 존재원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초역사적 계시사건은 백지상태이거나 텅빈 들판에서 일어나지 않고, 일정한 역사적 삶의 맥락구조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실존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되며 드디어 ‘계시사건’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쉽게말해서 인간공동체의 역사적 맥락과 삶의 상황을 떠난 ‘순수계시’란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에집트 노예살이하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 유목생활, 역사격변에 시달리던 지중해 중동지역의 정치사회적-문화철학적 맥락속에서 발전되어간 종교라는 말이다. 그에 대조하여 볼 때, 불교나 유교는 농경문화와 봉건적 사회질서를 배경으로하여 탄생한 것이다. 기후풍토가 다르고 삶의 맥락과 상황이 달랐다.  

20 세기 정신과학분야에서 ‘해석학’이라는 학문은 19-20세기 ‘역사주의’라는 인간존재의 특성을 깊게 통찰한 지적유산을 이어받아,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의 삶이 동물일반과 다른점은, 날마다 삶의 조건에 부딪혀서 생물학적 본능에 따르는 반응을 통해 삶을 영위하지 않고, 과거 위대한 삶의 경험들을 ‘이해’라는 정신적 작용을 통해서 내것 혹은 우리들의 것으로 되살려 내는 삶을 산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개미나 벌이나 사자나 침팬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그들도 긴긴 진화과정을 겪으면서 생존과 종족번식 기술을 생물학적 유전자 암호속에 새겨넣고 발전해오지만, 5천년전 그 생물들의 삶이나 오늘의 그들의 삶은 동일하다. 오로지 사람만이, 우리 각자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앞선 사람들의 숭고한 사상, 예술, 문학, 도덕감, 종교적 영감을 ‘해석이라는 이해의 과정’을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에 인간다움이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넘어서 과거 삶의 체험과 그 표현들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것으로 되살려나가는 기술과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해석학’이라는 이해이론이다.

종교생활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각 종교들의 경전은 과거 결정적 구원체험을 문자로서 고정시켜놓은 ‘전통의 결실물’이다. 종교경전은 아무리 위대하고 신성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거나 진리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진리를 깨닫고 체험한 앞서 살고간 사람들의 증언의 결실물이다. 그 경전은 위대한 경험들을 그 시대언어와 문화로서 표현해놓은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해 바르게 ‘해석’ 되어야 한다. 바르게 창조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바른 이해의 길이고 진리가 우리들에게 알려지는 방식이다.  

그 ‘이해’의 과정에서 인간 이성적 기능을 넘어선 진리자체 혹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해서 ‘성령의 내면적 조명’이 요청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내적조명은 의사가 주사약을 피하근육에 주입하듯이 초자연적 이해능력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지성과 마음이 진리로서 밝아지고 이해되면서 사랑으로 고양되도록 돕는 방식으로 진리의 영은 일하신다. 성경을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시적 성경의 문자 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적 기독교지도자들과 그 영향아래 있는 신도들은, 현대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귀를 막고, 진리영의 자유로운 조명을 거절하고 문자에 집념함으로서 진리의 영의 활동을 실지로는 거절하는 것이다.

본훼퍼목사는 그렇게 ‘계시경전’을 절대시하는 위험을 ‘계시실증주의’라고 정곡을 찔러 비판했다. 자연과학계에서 ‘실증물’로서 과학적 가설의 정당함을 주장하려는 실증주의적 과학자들처럼, 근본주의적 신앙의 종교인들이 ‘계시책으로서 성경 혹은 꾸란’을 절대적 진리됨의 실증물로서 제시하는 독선적 독단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이미 성숙한 현대인들은 세계종교 경전들 속에 위대한 진리 가르침이 내포되어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역사적 경전을 ‘진리차체’라고 주장하고 절대시하는 것은 일종의 또다른 ‘경전 우상숭배’라고 보는 것이다.  

해석학은 한걸음 더나아가서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정신적 눈 혹은 맘은 사람마다 시력기능이 다르듯이, ‘정신적 렌즈’인 해석자의 삶의 지평과 체험을 매개로하고 그것을 통과하면서 이해된다는 점이다. 같은 신약성경 예수의 ‘산상수훈’을 읽더라도 그 말씀의 깊이, 참 뜻, 존재변화의 촉구, 새로운 존재에로의 초청등 여러면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방식이 차이가 있다. 자연인으로서 시력이 사물의 상을 뚜렷하게 망막에 만들지 못할 때, 시력을 조정하기 위하여 안경을 쓰듯이 ‘해석학’이란 인간의 이해사건 속에서 발생하는 착시, 굴절, 색맹, 근시, 원시등의 약점을 보완하여 가능한 한 경전을 쓴 원저자의 본래 의도에 접근하려는 학문적 노력이다.


‘초종교적 영성’을 맛보려면 개별종교의 깊은 중심에 돌아가야만


지금까지 나는 길희성교수가 최근 “당신의 종교만 진리인가?”라고 묻고 “내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건 우상숭배이다”라고 충고하는 종교다원론 담론의 핵심배경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역사주의와 해석학이 밣힌 20세기 학문계 지론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일부 독자들은 아직도 두가지 점을 오해하기 쉽다.  

종교학자들이 현대문명에서 종교현상을 설명 할 때, 종교들이 ‘시장적 상황’에 노출되어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경솔하고 거룩한 종교를 상품시장에 내놓는 물건으로 간주함으로서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종교의 존엄한 가치를 격하시키는 것 아닌가?라는 분노가 내포된 비판이 첫째다. 둘째는 ‘초종교적 영성’의 개념이 무성격적인 종교혼합주의 영성개념으로 전락시키거나 개별종교의 역동적 가치를 소홀하게 다루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종교들의 ‘시장적 상황’이란 말이 전하려는 참 뜻은, ‘시장’ 개념을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의 개념인식에 달렸다. 물론 ‘시장’ 개념은 경제생활 특히 근대이후 자본주의적 경제메카니즘 속에서 빌려온 은유적 표현이다. ‘시장경제’에서 ‘시장’이란 개념은 독과점 회사제품의 횡포나 일부회사들의 가격단합을 막고, 자유경쟁을 보장하여 가장 좋은 제품을 가장 합리적 가격에서 구입하도록 구매자들을 돕는 개방사회의 경제제도이다. 이것이 종교영역에서 은유적 비유로서 사용될 땐 다음같은 몇가지 전제를 깔고 있다. 첫째, 현대 지구촌에는 오직 하나만의 참 종교가 있지 않고, 다양한 특성과 고유한 가치를 지닌 여러종교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둘째, 제품을 구하는 구매자는 자기가 필요한 상품을 구입한다. 가제도구는 살림방법과 생황방식에 따라 사용가치가 다르다. 그와 강은 이유를 종교에 적용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인생 순례길에서 부딪힌 실존적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준다고 생각하는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것은 당연하다. 셋째, 시장에서 각 점포 경영주들은 자기물품의 장점과 가치를 선전하여 많이 팔리도록 하는것은 용납되지만, 다른 상점의 물건은 가짜물건 이라던지 질이 낮은 상품이라고 험담하는 것은 시장 상도덕에 용납되지 못하고, 심할 경우 그 시장에서 그 점포경영자는 축출당할 수도 있다.

폴 틸리히는 그의 말년의 책 「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들의 만남」(1962)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모든 살아있는 종교의 깊이에는 그 종교자체가 자기종교의 중요성을 잃케 만드는 한 점이 있다. 그 종교가 가리키는 그 점은 개별종교의 개별적 특수성을 돌파하여, 그 종교로 하여금 영적 자유에로 고양시키며, 그 종교와 함께 다른 종교들 안에도 인간실존의 궁극적 의미의 표현들 안에 있는 영적현존을 통찰하도록 고양시킨다.”

길희성이 말하는 ‘초종교적 영성’이란 폴 틸리히가 위의 마지막 결론글에서 말하는 ‘영적 자유’를 가지고 ‘다른 종교들 안에도 있는 영적 현존의 통찰’을 느끼고 보고 음미하고 그리하여 그 안에서 진정한 성숙된 21세기 종교인으로저 영적 자유와 책임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초종교적’이란 특수 종교에 매몰되거나 집착하여 유폐당하지 않고, 역사적 종교들보다도 더 큰 ‘진리 그 자체’에로 접근하려는 영성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종교의 고유한 가치와 독특성을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대해서는 않된다는 점이다.

‘초종교적 영성’은 위대한 세계적 개별종교를 버리고서 구체적 종교들 밖으로 탈출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혀 개별종교의 진정한 깊이의 차원에로 들어갈 때 이뤄지는 것이다. 관념적 추상개면인 ‘우주적 보편종교’를 머릿속에서 창조해냄으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이웃종교에 열린맘과 배우고 협동하려는 맘을 가지면 자기종교 전통이 지닌 예전, 신앙교의, 사랑의 실천에 깊이 들어감으로서 획득되는 것이다. 물론 이웃종교들의 중심, 곧 태풍의 눈과 같은 ‘거룩한 텅빈 공간’을 통하여 내 종교 안에서 미쳐 발견못했던 그 점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참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온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요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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