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1/05 (10:27) from 129.206.82.100' of 129.206.82.100' Article Number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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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종교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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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종교적 영향
           The Religious Effects through the Process of Donghak-Peasants' Revolution

김경재(한신대, 신학)
Prof. Kyoung-Jae Kim(Hanshin Univ.)
http://soombat.org




편집자료1: 한글논문개요
  이 논문은 동학농민혁명기간동안 동학의 종교성이 형명의 전과정에 미친 종교적 영향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다. 논지는 동학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원인 제공만이 아니라, 동학의 종교적 이념과 조직체계가 혁명기간 전과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러므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서 정치경제 사회사적 연구방법과 접근만이 아니라, 시종여일 종교적 관점과 종교적 요소를 감안하면서 연구해야, 유기적 사건의 총체적 모습이 파악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동학혁명을 독일 농민전쟁과 비교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편집자료2: 논문의 주제어
  동학농민혁명 이념, 동학군의 군사조직과 훈련방법,  남북접 갈등의 원인결과, 동학혁명     과 독일농민전쟁

 편집자료 3: 영문개요
This essay is a study on the religious effects through the process of Donhak-Peasants'  
Revolution during 1892-1894. The main theme of this article is that Donhak as a Religious system as well as spritual movement had influences on the whole process of  Donhak-Peasants' Revolution; namely  exercised effects not only on the motive of the Revolution but also upon the military affairs like as military command system, military training, army headquater, and army strengthen. Finally, this study suggests a comparative study between the Donhak-Peasants' revolution with the German Peasants' Rebellion against Feudalistic conflicts regarding with the left wing of Reformation in 16th century.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동학농민혁명‘ 이라는 호칭에서 동학도와 농민군의 관계성
3. 혁명군의 명분, 이념,  행동지침의 제공자로서 동학의 기능
4. 혁명군의 군사조직, 지도체계, 정훈교육, 통신체계의 공여자로서 동학조직
5. 남북접 갈등과 전투력의 손상: 해월-전봉준 관계와 루터-뮌처 관계의 비교
6. 맺는말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종교로서의 동학이 혁명과정 전반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를 집중적으로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 동안 봉건적 사회체제및 사회신분제도를 핵으로하는 가치관의 붕괴를 촉진시킨 한국 근대화의 지각변동 진원점으로서, 반외세 반제국주의 운동과 함께 대두된 민족주의 의식의 발생 원점으로서, 주권재민의 원론적 정치사상을 민회(民會)와 농민자치를 통해 실험한 근대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효시로서, 그리고 주체적 역사변혁의 담지자로서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최초 혁명사건으로서 갑오농민운동에 대해  학계에서 꾸준히 연구되고 논의 되었왔다. 신용하, “동학혁명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 <동학혁명100년사, 상>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1994), 765쪽-793쪽. 신용하는 이 논문의 결론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로서 반봉건 반 제국주의 애국운동, 양반신분제도와 사회신분제도 철폐, 구체제 (앙시앙레짐) 붕괴, 농민민주의 실현,  개화파 갑오경장의 추동, 국민정치사회의식의 제고, 반일운동 의병운동의 반일역량의 강화등 일곱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특히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하여 집대성된 <동학혁명 100년사, 상 하>와 동학연구단체의 논문집들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가 일단 정리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동학농민혁명 과정의 연구분석은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역사사회사적 관점에서, 순수 종교사나 군사적 전투사의 관점에서 치밀하게 연구되었으나, 막상 동학농민혁명 기간중 동학이라는 종교성이 혁명과정에 직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서는 크게  주목되지 못한 감이 있다.  다시말하면, 동학농민혁명 자체가 정치,경제, 군사, 외교, 민속,철학, 종교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지만, 혁명사건 와중에서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경제 군사등 외면적 현상연구가 강조되고, 불가시적인  종교적 차원은 혁명의 와중에서는 해저의 심처같이 배면으로 물러가게 된다.  
  비유하건데, 동학농민혁명은 일종의 사회적 ‘태풍’과 같은 사건인데, 태풍이 태풍이 되는데는 ‘태풍의 눈’ 처럼 텅비어있는 공간 같지만 그것이 없으면 태풍은 태풍으로서의 위력을 상실하고 거대한 열대성 저기압 기단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에서 ‘종교성’의 망각은 동학농민혁명전과정에서 ‘태풍의 눈’을 제거해 버리는 일과 같다. 동학의 종교성은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준비과정에서만 작동하는 사상무장도 아니고, 동학농민혁명 전체를 포장하는 수사적 포장지도 아니다. 기상학자들에 의하면 태풍의 실재바람은 중심을 향하는 나선형 순환과 태풍이 진행하는 지향류(指向流)의 합인데, 태풍의 벽 내부는 도리혀 산들바람 또는 무풍같은  특이한 기상현상을 현성시킨다. 이것이 이른바 ‘태풍의 눈’이다.
 ‘태풍’이라는 거대한 자연재난의   위력적 물리현상이 발생하는 동안에 무풍지대처럼 고용한 태풍의 눈이  중심에 있듯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회적 태풍이 격렬하게 발생하는 전기간 동안에도 ‘태풍의 눈’과 같은 동학의 종교성이 그 중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태풍의 눈과 같은 동학의 종교성은 조용하게 혁명의 전과정에 ‘에메르겐츠’(Emergentz) 현상처럼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점을 집중적으로 이야기 해보려는 것이다.

2.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호칭에서 동학도와 농민군의 관계

 이 논문은 동학혁명기간을 신복룡이 ‘동학기간’(1860-1905)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광폭으로 잡지 않고, 삼례역 聚會事件(1892.11월 1일)부터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등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서울감옥에서 교수형을 받는 사건(1895년 3월29일) 까지 약 3년간의 짧은 기간(1892-1895)을 연구범위로 한정한다. 신복룡, “동학혁명의 전개과정”, 동학당 연구, 31-44쪽.(탐구당, 1973). 김창수, “독학혁명의 전개”, 동학혁명 100년사, 상, 590쪽.
그동안  학계 전문가들에 의해 충분하리만큼 논의된  갑오농민운동의 사건적 성격에 관한 논의 곧 그것의 혁명적 성격부여 여부, ‘동학란’이라는 폄하시키는 부끄러운  칭호부터 농민반란, 농민전쟁, 농민혁명, 동학혁명, 갑오동학농민운동, 갑오동학농민혁명등등 다양한 표현자체의 변화과정이 함의하는 내용을 다시 재론하지 않겠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을 ‘혁명’으로 보지않고 ‘농민전쟁’이라고 성격내용을 규정하는 견해에  대한 신용하의 반론을 필자는 전적으로 지지하고 수용한다. 신용하의 위의 논문, 785-787쪽.참조.
결론적으로 필자는 ‘갑오동학농민혁명’ 이라고 생각하며 여기에서는 줄여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약칭하고 이 칭호가 함의하는 의미를 음미하려고 한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에서 ‘갑오’는 혁명이 발생한 역사적 시점(1894)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아무런 혼동이나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타나는 ‘동학 농민혁명’ 이라는 어휘에서 ‘동학농민’이라는 두 단어의 상호관계성은 자명하지 않고, 해석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번 해석 가능성은 앞의 단어 ‘동학’이 포괄적 상징어로서 갑오년에 일어난 농민혁명의 배경이나 환경을 두루뭉실하게 조명한다고 생각하는 ‘포괄적 상징어’로서 파악할 수 있다. 이 경우, 농민군과 동학도와의 직접관계성은 매우 약하게 파악되거나 부정될 수도 있다. 첫 번째 견해는 갑오혁명의 주체나 실체는 동학도가 아니고 농민군이며, 사건의 핵심은 종교문제가 아니고 경제정치문제라고 본다.  기껒해야 동학은 갑오농민혁명을 발생시킨 도화선으로서 기능한 것이고, 이론적 원인규명을 명분론에서 찾고자하는 학자들이 붙인 포괄적 시대상황을 파악하는 어휘일 뿐이라고 보는 경우이다. 줄여말하면 최수운의 득도(1860)로부터 시작해서 갑오경장(1894-1896)에 이르는 한세대 30여년간의 근대한국사의 격동기에  가장 큰 원인 제공의 단체가 동학이므로 ‘동학농민 혁명’이라고 ‘포괄적 상징어’로서 이해하는 경우이다.
 둘째번 해석 가능성은 앞의 단어 ‘동학’이 뒤의 단어 ‘농민’을 직접규정하는 지시적 형용사로서 농민군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능하다. 다시말하면, 농민군의 구성  성분이 단순한 농민학정에 저항하여 일어난 농민소요사태의 주체로서  농민일반이 아니고,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 주체집단은 농민들 중에서 동학에 귀의하여, 세상이치에 눈이 뜨인  ‘의식화 된’ 농민 곧   ‘동학도 농민’의 혁명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물론 이 둘째번 입장 경우 일지라도 갑오농민혁명에 참여한 모든 전투군사들이 순수한 동학교도들로서 구성된 것이라는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혁명적 전투의 발생과 종결에 이르는 기간의 중심 주력부대, 핵심실체, 전투명령하달과 작전지휘 통제등이 일사분란하게 동학의 지휘부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성격규명은 19세기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사적 연구’로서 밝혀지는 것 못지않게 차라리 동학의 정치신학이 보다 심도깊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세 번째 해석 가능성은 첫째와 둘째 해석시각을 종합지양한 탄력적 해석이다. 서론에서 ‘동학농민혁명’을 태풍에 비유하여 말했지만, 은유적으로 말해서 동학및 동학도농민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회적 혁명에서  ‘태풍의 눈’에 해당하고 나선형의 회리바람을 일으키면서 폭풍과 폭우를 동반하는 풍속이 맹렬한 열대저기압 기단을 구성하는 막대한 양의 수증기와 기압은 동학도만이 아닌 수탈당하는 다수 ‘농민계층’이라는 견해다. 이 경우 동학과 농민의 관계가 ‘태풍사태’라는 단일 사태를 형성하는 불가분리적인 상관관계성(corelationship)을 갖는다.  태풍의 중심부 눈 ‘동학’과 태풍기단의 소용돌이치는 나선형 외곽 폭풍세력 ‘농민’의 관계가 상관관계성이라고 말하는 요지는 관계항의 어느 한쪽 없이는 다른 한쪽의 존립이나 그 의미가 성립될 수 없는 상호관계성을 말한다.
 ‘동학’ 이 없다면 갑오농민혁명은 19세기에 도처에서 발생한  축적된 사회적 모순에 저항한 농민소요사태중 규모가 큰 사건에 불과하게 되어 그 혁명의 성공실패여부와 관계없이, 한국 근현대사에 창조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반대로 동학에 입도하지 않은 일반  ‘농민’과 사회하층계급의 전폭적 지지와 참여없는 갑오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회구조와 가치관을 일대 혁신한  태풍과 같은 세력을 담보하지 못한 교조신원운동의 연장, 포교자유, 동학교세확장, 동학도 농민의 권익운동 차원에 그친 종파운동에 한정되고 말았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호칭에서 애매모호하게 파악되는 두 단어의 관계를 ‘상관관계성’으로 파악하는 탄력적 이해관점에서 혁명전과정에 영향을 미친 종교로서의 동학의 의미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3. 혁명군의 봉기명분, 이념, 행동지침의 제공자로서 동학의 기능

  동학이 갑오동학농민혁명에 미친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일차적 기능은 자신의 생명과 가족 일가친지의 생명까지를 담보하고 봉기한 혁명전투군 구성원들에게 확고한 혁명의 명분, 이념, 행동지침을 제시하는 일이다. 동학은 이 과제를 수행한 점에 있어서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가장 신속하고도 분명하게 모든 민중들의 맘에 충분히 납득되고 공감하는 ‘전체동원령’을 발 할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탐관오리들의 토색질에 견디다 못해 호구지책으로 일어난 ‘비도’(匪徒)들의 거사가 아닐진데, 관군이나 외국 청일용병들의 신념보다 훨씬 능가하는 높은 혁명의 당위성과 그 혁명거사에 참여하는 자긍심과 역사적 사명의식 고취에 동학은 크게 공헌했던 것이다. 당시 정부당국은 군국기무처의 의안으로 동학혁명문제가 조정에서 논의 될 때든지, 청병파병청원을 적극 주장한 민영준이 원세개에게 보낸 파병청원서에서 보는바 처럼  ‘동학교비’(東學敎匪),  또는 ‘비도’(匪徒)라고 호칭함으로서 줄곧  동학혁명의 거사에 참여하는 집단을 ‘비도들의 불법적 봉기’로서 매도했다. 김창수, “동학혁명의 전개”, 동학혁명100년사(상), 525쪽, 541쪽,

  그러나, 군대의 정신무장, 정훈교육,  명분싸움에 있어서 동학농민군은 관군이나 외국용병들에 비하여 비교되지 않을 만큼 훨씬 능가하였다. 청국에 대한 공식 파병요청 이전, 그리고 특히 전주화약 이후 일본군 철병을 요청하는 조선 정부의 의사를 무시하고 주권을 무시한 조선 병탐이라는 장기외교정책 일환으로 강행된 일본군 파병 이전,  동학농민혁명군의 초기단계 전투승리는 동학농민군의 정신적 전투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비록 일병의 최신 무기의 화력에 압도당해 물리적으로는 참패한 동학농민혁명군이었으나, 정신적으로 동학농민군이 승리하여 역사속에서 계속 그 혁명전투의 의미가 부활 재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은 1894년 1월10일 전라도 고부군에서 당시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축적되어 지방관리의 가렴주구가 하늘을 찌를듯하므로,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고 고부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발생하였다. 비폭력적인 평화적 방법에 의한   민소(民訴)가 부당하게 거절당 할 뿐만아니라 도리혀 가중된 폭력으로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므로, 고부기병(古阜起兵)과 함께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여 봉기의 뜻을 천하에 밝혔으니, ‘백산격문’은 짧고 간단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크다 할 것이다. 백산격문은 동학혁명군의 ‘창의문’, 그리고 4대 행동강령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군의  혁명이념이요, 그 정당한 명분의 선언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봉기 명분을 알리는 대외 선언문으로서의 목적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   생명을 내걸고 혁명전투에 참여하는 동학농민군 전투병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적 힘으로 작용하였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의하면 갑오년(1894) 정월 초사흘, 전라도 동학거두 세사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이름으로  창의문(倡義文)을 세상에 선포한후 고부관청을 함락하고, 이틀 후 고부읍에서 고부백산으로 진을 옮기고 대장기폭에 ‘보국안민’ 4자를 크게 특필하고 재차 격문을 지어 세상에 팔표하니 이것이 백산의 격문(檄文)이다.  ‘창의문’이란  글자그대로 ‘의(義)에로 인도하는 글’ 이라는 뜻인데, 동학농민봉기의 핵심이 ‘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데는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종교의 궁극적 종지가 사랑, 자비, 어짐등으로 알려져있지만,  20세기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지론대로 ‘사랑, 자비, 어짐’등 종교의 최고 이념이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구현되는 통로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방편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한역: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0)
‘정의’의 실현을 외면하거나 무시한 자비, 사랑, 어짐의 강조는 감상적 종교, 개인 주관주의적 종교, 심지어 사이비 종교에  그치고 만다.
  창의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부분은 인륜의 중요성과 군신부자관계의 바른 질서가 안정된 사회의 요체임을 설파한다. 둘째 부분은 타락한 봉건적 관료사회의 부정부패를 질타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의 고통을 울분으로 토로한다. 세 번째 부분은 창의문의 이념적 결론부로서 주권재민사상과 보국안민의 이념을 뚜렷이 제창한다. 吳知泳 著, 李圭泰 校註, 東學史 (文宣閣,1973), 198-199쪽.
다소 길다면 긴 창의문의 핵심정신이 간결한 형태로 재천명된 것이 백산의 ‘격문’이다.  
                                 격문(檄文)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단연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는데 있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       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들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갑오 정월  * 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 -   위와 같은 책,  203쪽.


 동학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에게 끼친  최대의 영향은 동서양 역사에서 종교가 혁명전투의 중심에 서서 개입한 어느 역사적 사건보다도 위대한 높은 혁명이념과 명분과 행동강령을 제시했다는데 있다. ‘성지탈환’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십자군 전쟁’, 독일 토마스 뮌처의 농민전쟁, 중국 홍수전의 태평천국 혁명 이념보다도 훨씬 높고 숭고한 것이다. 인간존엄성의 가치를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여 단시일안에, 전체 민중에게 사회적 의식화교육을 단행한 셈이며,  수천년동안 민중을 얽어맨 사회신분제도나 민중지배 인간수탈의 정치가 허구이며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확고하게  동학농민군들에게 심어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억압수탈 당하는 농민이나 동학도들 자체 이익만이 아니라, 민족 국가의 안위와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통한 대동세계의 구현이라는  높은 이상을 제시하였다.    
   인간은 영물인지라, 평소엔 소리에 탐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하다가도, 어떤 절대적 가치와 명령에  그의 마음이 접촉하게 되면 평소의 소아는 죽고 대의를 위해 살려는 범상하지 않는 용기와 자발적인 헌신의 담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그 동기부여가 종교적인 숭고한 이념에 의해 촉발될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용맹이 발현된다.  광제창생, 주권재민, 보국안민, 사인여천등 동학이 가르치는 핵심적 진리설파는 수천년간 구차한 인종과 굴욕의 삶을 살던  민중들로 하여금 홀연히 떨쳐 일어나 대의에 순명하는 거대 군단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리고  마침네 전쟁으로서는 참패한 동학농민혁명의 말기 현상을 전쟁현장 가까이에서  직접 참여하고 목도한 오지영은 이렇게 증언한다:
     갑오 12월 부터는 조선  남방은 관병과 일병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동리마다 살기        가 충천하고 유혈이 흥건하였다. 이 때에 있어서 조선 사람의 사상은 또다시 둘로 갈        라져 있음을 나타내었다. 한편으로는 관리, 양반, 부자, 유림, 소리(小吏), 사졸(使卒)과        서학군(西學軍)은 모두 정당(政黨)이 되어, 관병이나 일본과 한테 섞여 혹은 수성군         (守城軍)  혹은 민포군 같은 것을 조직하여 동학군 잡이에 날뛰었고, 다른 백성들은         동학군 편에 동정하였다. 관리나 양반이나 소리나 사졸배로서 동학당에 참여했던 자        들은 일조에 표변하여, 다시 동학당의 원수가 되었었다.  ...동학군으로서 관병, 일병,        수성군, 민포군에게 당한 참살 광경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전후 피해자를 계산하        면 무릇 三四十萬의 다수에 달하였었고,동학군의 재산이라고는 모두 관리의 것이 되        고, 가옥등은 죄다 불 속에 들어갔으며, 기타 부녀강탈과 능욕등은 차마 다 말 할 수        가 없는 정도이다.  오지영, 동학사, 262-263쪽.


  비록  100여년 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목격자의 보도요 직접 참여한 체험자의 보도이지만 옷깃을 여미지 않고서는 읽어 갈 수 없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흔히 통계숫치상 쉽게 말하는 30-40만명의 희생자라고 쉽게 말들 하지만, 그 당시 동학농민군 30-40만의 죽음은 당시 나라 기강을 지켜가려던  이 한민족의 ‘의로운 씨종자들’의 집단적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단지 보국안민, 광제창생, 사인여천의 이념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지난 1970-80년대 군부독재시기에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을 촉구하는 대학 지성인들의 이름석자 서명을 받으려고 동분서주했을 때, 30만-40만명은 커녕 30-40명의 지성인들의 참여를 얻기가 힘들었던 때를 회상 할 때,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죽음이 ‘한국의 얼’을 지켜가는 기맥이며, 그러한 놀라운 저항적 혁명을 가능케한 정신적 힘은 단순한 사회경제사적 원인분석만으로서는 도저히  해명되지 않는 동학의 종교적 정신력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에  줄곧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4. 혁명군의 군사조직, 지도체계, 정훈교육, 통신체계의 공여자로서 동학조직

 혁명적 전투는 생사와 승패를 가름하는 총체적 싸움이다. 전투력은 무기, 군사, 조직, 통신, 수송, 선전, 선무등 다양한 요소들의 총합으로서 결판 나는 입체적 투쟁이다. 그러므로, 방대한 군사력을 조직하고, 통솔하며, 군령이 서고, 작전명령이 하달되며, 끊임없이 물자와 인적 전투병의 지원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전쟁을 수행 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일사분란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지속적이면서도 단계적인 전략전술을 구사 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종교단체로서의 동학의 기존 교단조직체계와 지도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동학혁명전투사를 소상하게 연구한 김창수도 그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고부의 동학농민군은 다른 민란에서의 농민군과는 달랐다. 그들은 동학의 교단조직을 통     해   전봉준등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항쟁 할 수 있었     던 것이다.  감청수, “동학혁명의 전개”, 동학혁명 100년사(상), 480쪽.


단순히 동학의 교단조직이 동학농민혁명의 전투를 지속적으로 버티게 하는 기반역활을 한 것만이 아니다. 창의문이 포고된지 불과 10 여일만에 그에 호응하여 수만명이 집결되었는데, 동학도들과 일반농민이 함께 결합하기 시작한 이 무렵, 봉기에 참여하는 농민군을 조직하고 훈련하고 의식주를 제공하는 일체의 일이 상당한 조직과 훈련된 통제기관이  없었다면 오합지졸의 집합체가 되어 투쟁은 커녕 일대혼란으로 인해 스스로 괴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동학의 접제도(接制度)는  수운 최수운 선생의 생존시부터 동학교단의 기본 조직단위체로서 형성되었다. “신유년 이후, 선생(수운선생)은 포덕에 종사하여 사방에 사람이 많아졌으므로, 그 다수를 접제(接制)코자 접(接)을 설치하고 접주(接主)와 접사(接司)를 두게하였다” 오지영, 동학사, 76쪽.

동학의 종교단체로서의 기본조직 단위 명칭을 접(接)이라 하고, 접의 책임자를 접주라 하는데, ‘접’이라는 명칭자체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1878년 해월은 접소(接所)를 유시헌의 집에 설치하고 개접하는 말을 하는데, 핵심가르침이 요지는 동학에서 개접(開接)이란 유가에서 처럼 시부등 문자와 힉문토론과 형식적 의식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고, 시천주의 마음, 순수한 하나의 맘으로 성경신(誠敬信)을 준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위와 같은 책, 119-120쪽.

 ‘접’은 접물, 접인, 접령등 바른 ‘만남’의 장소이자 그 결과로서 발생한 집단적 공동체이다. ‘접’은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기초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기본단위에 해당한다. ‘접’이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연합체를 이룰 때 ‘포’(包)라고 부르는데,  ‘포’와 ‘포’사이의 협조 갈등조정등 행정조정실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직무가 도찰(都察)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학교단의 기본단위는 ‘접’이며 그 ‘접’의 관할 구역과 도인수가 특별하게 클 때, 각포(包)에는 두령급의 대접주가 도인의 행정관활과 군사통솔권을 갖게된다.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된 후 폐정개혁안 12개조가 실천되면서 동시에 많은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입도하게 되는데,  “큰 읍에는 수십개의 접이 있었고, 작은 곳에는 3-4개의 접이 있었는데, 각 접에는 대접주, 수접주, 접주의 순위로 두령이 있었다.  이현의, “동학혁명의 의의”, 동학혁명 100년사(상), 663-664쪽에서 중용.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물려받은 해월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동학교의 제도정비에 소홀하지 않았다. 1884년 경부터 증가된 동학도를 효율적으로 지도하고 교육하기 위하여 육임제(六任制)를 정하였으니, 아는바처럼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이 그것이다. 정재호, “동학혁명의 배경”, 동학혁명100년사(상), 397쪽.
백산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할 때, 동학 혁명군의 군대조직은 동학교단의 조직체계를 최대활용하여 군사지도체계로 전환 한 것이다.  동학혁명군 총대장으로는 전봉준, 대장소장령급(大將所將領級) 두령으로서는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등 18명, 출신 지방병 군장급 소두령들은 162명에 달한다. 김창수, “동학혁명의 전개”, 동학혁명100년사(상), 490-491쪽.
이러한 동학종교조직체계를 군사조직체계로 전환시킨 동학농민군은 명령하달, 군사모집과 훈련, 협동작전, 통신연락을 수행하였다.
  특기할만한 일은 동학군과 농민군이 이제 대의명분아래 하나로 단결하여 동학농민혁명군으로서 조직편제를 이룰 때, 그 군대의 연대감과 동체감 결속력을 강화하고 두려움 없는 필승신념을 고취하는 정신적 전투력을 얻기위해 동학주문을 소리높혀 함께 ‘주송’(呪誦) 했다는 사실이다. 보은회집 때에도 동학도는 질서정연하게 각포와 각접마다 기를 세워 표지를 삼고 때를 따라 큰 소리로 동학주문을 한 목소리로 하늘에 크게 아뢰곤 했다.  오지영, 동학사, 162쪽.
천도교간부였던 김재계가 일곱 살때 본 기억을 증언한바에 따르면, 동학농민군의 출정식이 동학의 종교의식처럼 행해졌다는 것이다. “대장기 아래 청수를 모시고 주문을 세번 고성대독(高聲大讀)하니, 그 웅장한 소리는 저절로 강산초목이 동하는 것 같았다” 동학혁명 100년사(상), 598에서 중인용. 원인용문의 출처는 천도교월회보 제271호, 27쪽. 성암 김재계의 교사이문:갑오년 동학이야기.
군대의 행진이나 전투력 증강에 있어서 병사들이 함께 한 목소리로 군가를 부르거나, 군승이나 군목의 기도문을 올리는 일은 병사들에게 큰 격려와 용기를 준다. 동학농민혁명군은 단순히 농민반란군이 아니었으며, 동학의 단순명료한 주문을 암송하게 함으로서 단결력과 필승신념을 다짐케하는데 막강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고부를 점령한 직후, 고부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7,000여명은 최초로 승리한 동학농민군이므로 그 군률이나 백성들로부터 받는 지지가 대단했다. 그런 중에도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동학농민혁명군의 행동강령에 해당하는 ‘사대명의’(四大名義)를 공포했는데, 이 또한 동학농민군에게 미친 동학의 종교적 영향을 반증한다. 첫째는 살인이나 물건파괴를 하지 않는다 . 둘째는 충효를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하고 민을 편하게 한다. 셋째는 일본오랑케를 쫒아내 멸하고 왕정을 깨끗이 한다. 넷째는 군병을 몰아 입경하여 권세가 귀족들을 진멸한다.  이상의 네가지 동학농민군의 행동강령중에서 특히 첫째 강령은 얼듯생각할 때 혁명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명령처럼 들린다. 모름지기 혁명 그것도 전투적 혁명은 인명살상과 재물파손을 각오하고서만 가능한 것인데, 형식적 윤리강령이거나 도리혀 동학농민군의 혁명적 전투행동을 제지시키는 역효과를 낼 수 있는 제약조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사대명의’ 제일조야 말로, 동학농민군들로 하여금 그들의  봉기가 결코 살육 약탈 방화를 일삼는 폭도들의 난동이 아니고, 민중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살리려는 ‘정의로운 전쟁, 성스러운 혁명’을 수행하려 일어선 군대들이라는 자긍심과 사명감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도리혀 동학농민군의 전투력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신라화랑오계에 나타나는 ‘살생유택’의 숭고한 정신이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동학이라는 종교적 요소가 혁명군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것인가를 반증하는 또다른 사례인 것이다.

5. 남북접 갈등과 전투력 손상: 해월-전봉준 관계와 루터-뮌쳐관계의 비교

  필자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전투과정에서 남북접갈등의 본질을 집어보고, 동학농민혁명의 경우와 독일 농민전쟁의 경우를 비교해봄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의 특징을 다시한 번 확인해
보려고 한다. 이현희교수의 논문 “동학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양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인식함으로서 “동학혁명이 가지는 근대적 시민사상의 의의와 가치”를 보다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이현희, “동학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비교”, 동학혁명 100년사(상), 665-689쪽.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16세기 종교개혁당시 발생한  독일 농민전쟁과 비교하여 연구해 볼 때, 동학농민혁명의 위대성과 한계를 또한 알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양자는 종교적 신념과 농민들의 정치경제적 불만이 결합되어 발생한 사건으로서의 유사성, 그리고 종교지도층 핵심부의 신중론과 농민 현장의 상황성을 더 중시하여 화급한 혁명투쟁을  주장한 민중적 시각의 유사성등이 두사건의 비교연구를 기다린다.
  갑오동학농민혁명 과정 초창기에 발생한 남북접간의 갈등에 관한 그 동안 학계의 연구는 많이 연구되었으나 충분하리만큼 그 의미와 혁명실패의 결과론적 원인 중 한가지로서 연구되지 않았다. 무릇 혁명적 전투의 승패는 전략전술에 따른 신속한 속전속결이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시간에 결연한 결단을 내리고 지휘부의 신속한 명령하달은 수십만명의 군사생명을 살려내고, 혁명적 전투의 단기간내 목적 달성을 성취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 하루 이틀 또는 며칠의 시간낭비는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이 중세적 봉건사회를 민의로서 청산하고 새로운 근대사회에로의 전환을 가져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사실 그래야만 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미 정부로서의 권위나 능력을 상실한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후기 왕권, 척신세력, 보수적 정치정상배들은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는 ‘민의 혁명군’을 제압할 능력도 전술도 없었다. 고부 백산 봉기 직후, 동학농민군의 행동강령 ‘사대명의’(四大名義) 제3항과 제4항대로 만천하에 공개적인 전략전술로서  신속하게 서울로 진입하여 썩어문드러진 권세가 귀족들을 진멸시키고, 일본첨병과 그 세를 초기에 축출하고 왕권을 쇄신했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승패는 뒤바꾸어지수도 있었고, 한국의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자체도 바꾸어졌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전술전략측면에서 볼 때, 동학농민혁명군의 패배는  정부군 곧 관병 경병 수성군 민포군등에 의한 제압평정 결과가 아니라, 온전히  최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훈련된 일본군대의 특수부대파병에 의한 제압이었다. 일본정치 지도자들의 조선식민정책과 동아시아 침탈이라는장기적 정치계획의 포석아래서, 반일사상의 핵심세력인  동학의 진멸이 가장 중요하고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파병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창수, “동학혁명의 전개”, 동학혁명100년사(상), 554-557쪽 참조.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병은 조선왕조 척신들의 청나라 병사 파병요청과는 달리 이뤄진 것을 기억함이 중요하다. 전주화약(1894.6월14일) 이후, 조선정부는 청군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주둔과 추가 군사 정예부대 파병은 양국간 외교통로를 경유하여 충분히 논의된 일이거나,  조선왕권의 보호책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온전히 일본국 그들의 국익을 위해 남의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여, ‘주권재민의 현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민중들의 의지를 잘라버린 무뢰배 같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일본인 보호명분으로 경성에  주둔시켜온 일본군 경성후비보병 제18대만이 아니라, 이노우에(井上馨)공사와 병참감 이토오(伊藤裕義) 요청으로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은 야마구치현 히코시마 정예 수비대제19대대를 동학농민군 살육목적이라는 특수임무를 부여하여 조선에 급파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책, 555쪽.
  
  이미 정부로서의 존립 의미와 능력을 상실한  정부군이 동학농민혁명군의 서울집입 군사행동에 대처하기전, 그리고 청국와 특히 일본군의 동학군진압 목적의 군대파병이 이뤄지기전, 동학농민혁명군이 속전속결로서 군사행동을 결행했더라면 혁명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라도 53군현의 동학농민군의 재기(1894년 9월)와 관병 및  일본군병의 대대적 반격(10월) 사이에는 전투상황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30일간의 시간낭비가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의 서울진격의 발목을  잡았던 결정적 변수가 남북접 지도부간의 갈등내지 상황판단 시각차이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비록 남북접 지도부의 각각의 견해차이가 모두 양측에 일리가 있었고, 또 결과적으로 남북지도부의 화해와 대승적 단결로 남북접이 통일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지휘부가 구성됐지만, 혁명적 전투상황에서 1개월간의 시간낭비는 관병과 일본군에게 전세를 역전시킬수 있는 충분한 병력동원배치, 신무기조달, 동학농민군의 전술과 전세파악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신복룡교수도  남북접 “지도층의 분열은 동학혁명을 실패로 이끈 커다란 원인중의 하나라고 볼 수가 있다”  申福龍, 東學黨硏究, 92쪽.
고 지적하고 있다.
  동학교단발전사에서 남북접 별칭의 유래, 그 갈등과 화해과정에 대한 자세한 서술을 여기서 다시 반복 할 생각은 없다. 이미 사계전문가들에 의해 상세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오지영, 앞의 책, 238-246쪽. 신복룡, 앞의 책, 91-96쪽. 김창수, 앞의 논문, 동학혁명100년사(상), 540-553쪽.
본의 아니게 결과적으로 보면 신복룡교수가 지적한 것 처럼  동학농민혁명을 실패로 이끈 큰 이유중 하나가  되고만 남북접 갈등의 근본 핵심원인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동학교단 전체의 오늘과 내일을 이끌고 가야할 책임을 진 해월의 동학도통 자체정비강화를 중시하는 종교적 이상주의와  더 이상  동학도와 농민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일어난 무력적 행동 정치적 현실주의 사이에 견해차가 발생한 것이다. 해월은 동학도들이 폭력적 방법에 의지하여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것 자체가 동학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고본 것이다.
   오지영이 북접의 해월을 만나보고 북접대도소장(北接大都所長) 김인국과 손병희,손천민등을 대면했을 때, 북접지도부가 내민 ‘통문’(通文)의 내용은 그당시 북접 지도부가 남접 무력항쟁파들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道로서 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湖南의 전봉준과 湖西의 徐璋玉은 국가의 역적이요 師門의 난적이라, 우리는 빨리모여 그곳을 공격하자” 오지영, 동학사, 241쪽.
라는 내용이었다.
  남접의 봉기 이후, 집단적으로 동학농민군에 입대한 군사들 중에는 동학군으로서의 명예와 군기를 먹칠하는 여러 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북접지도부는 듣고 있었던 것이고, 동학의 장기적 앞날을 생각 할 때, 해월이 ‘통유문’(通諭文) 속에서 보인 분노, 염려, 경고, 경책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일어나서 전개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군’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군기율에 관련된 탈선을 빙자하여, “道로서 亂을 지음은 불가하다”고 본 입장은, 그 핵심이 농민군의 탈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수도에 힘씀으로서 세상을 새롭게 해야할 종교인으로서 무력봉기에 호소하는 전쟁자체는 용납 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이상주의’와 ‘종교적 현실주의’와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충돌은 다음에 살피겠지만, 종교개혁당시 독일농민전쟁이 발발 했을 때 마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의 견해 충돌이기도 한 것이다.
  둘째, 남북접 지도부의 갈등과 충돌의 이유 중에는 교단지도세력간의 교권적 권위주의 가 발생하면서  지도력의 미숙과 종교의 제도화 과정에 따르는 불미스런 교권쟁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점을 부정 할 수 없다.
  북접지도부의 입장에서 보면 수운대선사의 순도이후, 도통을 지켜오며 갖은 핍박속에서도 포교와 교도훈련을 진행시켜온 해월을 중심으로한 지도부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남접의 전봉준 이하 지도부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동학농민군의 혁명기치를 들고 일어나니, 서운도 하고 분노도 일어났을 것이다. 호남 호서 지역이 서로 겹치거나 경계선상의 지역에서는 서로 동학농민군의 두령급 지휘자들 사이에 더 많은 동학농민군을 자기 지휘하에 입대하게 함으로서 군대의 지휘서열에 등급을 높이려고 동학농민군 쟁탈전까지 발생하는 형국이 되었다. 전투현장에서만이 아니다. 분명히 남북접 지도부간의 갈등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대승적 관점에서 아름답게 극복되긴 했지만, 그 교단지도력을 둘러싼 교권주의적 발상이 전무했다고 볼수 없는 것이다.
  셋째, 남북접 대립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회집된 삼례회의(1894.9.12-13일)에서 나타난 대로, 남북접 갈등은 광제창생 보국안민을 실현시켜가는 방법중 남접의 주전론과 북접의 화평론간의 견해 대립이었던 것이다.  동학혁명100년사(상), 545쪽.
 이 셋째 원인은 첫째 원인과는 그 본질에서 성격이 다르다.  이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투의 전략전술면에서 남접 지휘부의 주전론자들은 그 상황을 훨씬 더 혁명적 상황으로 파악하고 적대자들과의 화평이나 타협이나 휴전협정같은 것은 결국 동학농민혁명을 실패로 이끈다고 본 것이다.
  다른 한편 평화론자들은 이미 9월에 반격을 가해온 관병과 일병 청병의 파병소식도 현실적으로 고려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제1차 동학봉기이후 경험 한 바처럼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안 제시등 관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민생의 현실을 개혁해 갈수도 있다는 점진적 개혁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북접지도부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성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례회의는 엄정하게 본다면 남북접 지도부의 의견통일로서 성공적 이었다기보다는 협상 실패였고, 다만 이미 행동으로 옮겨져 시시각각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내걸고 죽기로서 참여한 12 만명에 가까운 혁명군의 대세를 정지시키거나 막을 길이 없어서 대세에 따른 합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제2차봉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된 동학남북접 갈등을 16세기 독일 농민전쟁기(1524-25)에 발생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와 토마스 뮌쳐(Thoams Muntzer,1490-1525)를 대표로하는 두 종교지도자 사이의 충돌과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있는 일이다. 중세봉건체제는  카톨릭 종교체계와 함수관계를 이루며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동은 동학의 발생 경우 처럼, 단순한 종교적 원인만이 아니라 정치경제등 사회사적 제반요소가 맛물려 있는 일이어서, 종교개혁은 근대서구 시민사회의 출현의 진원운동이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과정속에서 미시적으로 보면, 해월과 전봉준의 시국판단이나 종교적 행동방식에서 무력사용의 견해차이처럼  루터와  뮌쳐사이에 갈등 및 충돌이 있었다. 전봉준이 동학도이며  해월을 존경했지만 해월과의 견해차이를 보였듯이, 토마스 뮈쳐도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받고 루터를 존경한 개혁 성직자였지만, 농민혁명에서 무력봉기를 지지하고 앞장섬으로서 루터와 첨예한 대립을 겪었다.
   토마스 뮌쳐를 비롯한  보다 급진적 개혁종교가들을 ‘종교개혁을 개혁하는 개혁자들’ 또는 ‘종교개혁좌파’(the left wing of the Reformation)라고 부른다. 종교개혁운동을 통해 근세 주체적 개인의 신앙자유, 양심의자유, 봉건영주나 교황권의 횡포에 대하여 저항하는 용기가 동시대 사람에게 전파되었지만, 현실적으로 농민계층 삶은 여전히 절대빈곤, 과중한 세금, 무지, 신분적 억압체계속에서 귀족들과 사회상부계층 들의  ‘밥’ 이었다. 마침네, 농민들은 종교개혁정신에 고무되고, 농민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무장봉기를 하고 일어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마치 동학농민군이 ‘강령주문’을 주송하고 종교적 열정과 민중봉기의 영정을 융합시킨것처럼, 독일 농민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앙적 경향성은 종교개혁 신앙 유형중에서도 ‘성령의 직접 임재 체험’을 강조하는 ‘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 영향아래 있었다.
  1524-25년 독일농민들은 슈바르츠발트, 알슈테트, 슈바벤, 튀링겐 등지에서 봉기하였으며, 짧은기간동안 이나마  마치 동학의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안의 실천등과 같이  정부 의회를 전복시키고 1523년 ‘영원한 의회’곧 농민자치 민회를 설치하기도 했고, 동학의 폐정개혁안처럼 ‘12개조 요구’를 주장했다. 뮌쳐는 사회적 개혁없이는, 그리고 사회개혁을 달성하기 위한 무력사용을 동반한 혁명적 방법없이 종교개혁의 신앙원리만을 가지고서는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검을 들어 하나님나라를 앞당기려는 거사는 신의 뜻이요 정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농민혁명기간동안 토마스 뮌쳐는 주도적 인물이 되었으나, 1525년 5월 독일 프랑켄 하우센 전투에서 제후귀족들 군대의 막강한  반격을 받아 동학농민혁명군처럼 패배하고 전봉준처럼 뮐하우센 병영에서 필립 영주(Philip of Hesse) 권력아래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 윌리엄 스코트(김쾌상역), 개신교신학사상사(대한 기독교서회, 1988),82-99쪽.
   브리테니카 엔사이크로페디아(한글판), 마틴루터항목 및 토마스 뮌쳐 항목 참조.

         
   
  루터가 독일농민군에 대한 강렬한 비난을 가했을 때, 그의 동기는 동학 북접 지도층이 혁명초기에 가졌던 명분과 대동소이하였다. 루터 또한 농민혁명 초기엔 농민들의 정당한 불만에 동정을 했지만,  해월이 동학도가 폭력에 휩쓸리는 것을 반대했듯이, 마틴 루터도  1525년  “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무리에 대항하여”라는 제목의 거칠고 독설적인 비판의 글을 썼다. “그리스도교도는 폭도로 무리를 지을만큼 그 수가 많지 않다”고 말했으며, 근본적으로 마틴 루터의 종교사상은 세상의 정치경제문제를 다스리라고 신이 세운 제후들의 정치왕국와 영혼의 구제와 훈련을 감당하라고 신이 위임한 영적 종교적 왕국과의 혼동을 반대하는 ‘두왕국설’ 정치신학이론을 가진 개혁자였다. 따라서 그 자신이 웜스제국회의에서 인간의 영혼과 신앙양심에 대하여 그렇게도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폭력적 혁명수단에 의해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혁하는 일에는 반대한 종교개혁가였다.
  지금까지 위에서 루터와 뮌쳐의 갈등을 북접지도부와 남접지도부의 갈등원인과 비교해보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비교연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접지도부의 입장은 개인 해월이나 두령들의 견해라기보다는 종교가 인간 사회적 삶의 모순상황 속에서 반응하는 변혁이나 개혁의 방법중에서, 어느만큼 폭력적 방법, 무력항쟁적 방법, 혁명적 수단을 용납할 것인가의 영구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남북접 지도부의 갈등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전쟁상황 속에서 결정적 호기를 실기하여, 패배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만약 남북접 삼례회의가 갑오년 9월 중순에 열릴 것이 아니라 갑오년  3-4월에 동학의 남북접 지도부의 앞을 내다보는 상황전개 예측능력으로 앞당겨 열려서, 동학농민군의 총체적 봉기에 일심합의하여 관병이나 외국군대의 개입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동학농민혁명의 결과나 한국사는 전혀 새로운 전개를 겪었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6. 맺는말

   이 글에서 필자는  동학농민혁명기간동안 동학이라는 종교성이 농민혁명전투과정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고찰해 봄으로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 흔히 소홀하기 쉬운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갑오혁명사건의 총체적 해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경제사적 연구를 비롯한 사회과학적 연구가 필수적이지만, 이 운동이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지되는 것은 그 운동 전과정 속에 동학이라는 종교성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동학은 갑오농민혁명의 촉매자이거나,  혁명발단 초기에만 영향을 주고 그 후로는 군사적, 경제 정치적 요인들로서만 진행된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시종일관 동학의 종교성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신복룡교수는 “동학사상에 나타난 민족주의와 그 특질” 이라는 탁월한 논문의 결론에서 “동학혁명에 포함된 종교적 색체, 즉 그들이 지녔던 지나친 이상주의는 동학발생의 원인인 동시에 실패의 원인이기도 한것이다”  신복룡,  앞의 책, 96쪽.
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보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에  스며있는 종교적 요소는 동학농민혁명운동 발생의 원인만이 아니라, 혁명 추동과정의 수레바퀴 역활을 수행한  군사조직체계 지탱의 힘이었으며, 전쟁사로서는 패배했지만 문명사적 의미로서는 승리한 혁명이 되게하는 초월적 힘의 원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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