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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적 복음에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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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소리 통권164호, 2002년 1-2월호



                                  생명적 복음에 목마르다



                                           김경재
                                    http://soombat.org






 1. 오늘의 복음이 생명적인가?  

  ‘생명’이라는 주제는 오늘 날 인문학계만이 아니라, 무릇 학문계의 중심화두가 되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지구 지표위에서 진행되고 있어서 생명위기, 생명실종, 생명멸종의 적신호가 계속 울려퍼지고 있다는 위기 위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장회익 교수같은 물리학자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당신이 전공하는 물리학 연구에 전념하지 못하시고, <삶과 온 생명>(도서출판 솔, 1998)이라는 저서를 통해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의 위기를 호소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주제는 “복음, 생명, 교회”인데, 한마디로 주제가 추구하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생명’(딤후1:1) 그 자체이며, 교회는 바로 그 생명의 능력 안에 있고, 그 현실을 증언하는 생명적 공동체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생명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며, 교회는 그 복음과 함께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딤후1:8)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1:13) 로서 자신을 이 세상 속에서 ‘생명의 빛’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교회는 정통교리를 가르치는 단순한 ‘교리학교’에 머물러서는 아니되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회상하기만하는 전통을 보수하는 종교집단에 머물러서도 아니되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임당한자의 부활을 망각하는 무한 성장신화와 성공신화에 사로잡힌 바알신앙적 기독교 교회가 되어서도 아니된다.
  1970-80년대에 세계선교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고도성장을 기록했던 한국 개신교는  분명히 1990년대를 정점으로 하여 위기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인수의 증가는 둔화 또는 감소되고, 개신교의 대 사회적 공신력과 도덕적 영적 신뢰감은 국민 일반으로부터 현저하게 상실되어가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정의 평화 통일 지향적  희망의 공동체로의 역할이 약화되고있다. 문화적 차원에서 보면  개신교는 한국 전통문화및 타종교와 끊임없는 긴장 갈등을 일으키는 종파로 국민 눈에 비치게 되고 한국 개신교는 카토릭교회와 다르게 배타적이고도 독선적인 종교집단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국민들은 도처에서 십자가 표식을 건물 꼭대기에 세운 무수히 많은 교회당건물과 기독교라는 종교집단의 여러 가지 행사소식은 접하지만, 그 안에서 ‘사망권세를 폐하는 생명’과 ‘세상을 비취는 빛‘을 점점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통계청이 조사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2000) 통계자료에 의하면 1994년도 전체국민중 종교인구 비율은 49.9%였으며, 그 종교인구중 불교 기독교 천주교가 각각 48.9%, 36.5%, 11.7% 였다. 그런데 1999년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체 인구대비 종교인구 비율은 53.6%로 상승했는데,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3대종단의 종교인구 점유율을 보면 불교와 천주교는 상승했는데 기독교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 통계는 남한의 종교인구중 불교가  49.0%, 기독교 34.7%, 천주교 13.0%로 나타났다. 통계청,  한국의 사회지표(통계청, 2000), 514쪽.

  종교인 통계숫자의 문제보다도 더욱 심각한 위기는 한국 국민이 개신교의 양적 성장위주 의 각종 열광적 전도행사와 공격적 선교정책에 대하여 감화감동의 커녕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개신교 성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덕적 영적 신뢰감에 대하여 일반 국민은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며, 개신교 집단을 사회정화와 개혁의 주체라기보다는 개혁과 정화의 대상으로서 보고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각종 고급공무원의 부정과 비리보도에 기독교인들의 관련성, 기독교 연합기관들의 몰염치한 교권다툼과 밥그릇 싸움행태, 타종교에 대한 비관용적 배타주의 태도, 종교의 힘을 입어 세속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획득하려는 바알종교적 교회의 세속화등에 대하여 깨어있는 세상사람들은 차거운 비판적 안목으로 개신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형국이다.
  교회가 위기인 것이다. 생명의 복음이 실종된 것이다. 절기마다 성례전은 집례되고, 신학교와 신학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각종 은사집회는 성황을 이루는데,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은 찾아보기 힘들고, ‘청결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딤후1:3,5)의 자녀들이 드물게 되었다.  예수믿어 복을 받고 잘살게 되기를 바랄 뿐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좆아 복음과 함께 고난’(딤후1:8)을 받으려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진단되는 한국 개신교의 영적 위기의 증후군과  복음적 생명력의 침체원인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2.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씀은 뭇종교의 제1계명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한국 천주교와 크게 다른 점은 선교초기부터 ‘성서번역과 보급’을 통하여 복음을 증언하고 한민족에게 생명의 떡과 생수를 접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한글성경의 보급은 기독교의 복음 전파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문맹률 급격한 저하, 개화정신의 보급, 민족주의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세력의 토양육성, 교육입국의 정신과 각종 기독교사립학교의 설립과 인재 양성, 근대서구문명과의 접촉등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향을 한국 사회에 끼쳤다.
 한마디로 성경의 한글 번역과 그 보급은 기독교 선교역사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한국문화사와 사회사 변천에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된 것이다. 이 점을 생각 할 때, 성경의 한글번역과 보급에 개척자의 노고를 감내한 수많은 선교사들, 런던성서공회등 해외 문서선교단체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그 일에 참여한 선구자들의 노력을 항상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성경 위에 선 종교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은혜와 영감을 받고 삶의 지표를 삼으면서 한국 교회는 자라왔다.  종교개혁의 근본 원리중 하나가 ‘오직 성서만’의 원리 이기도 하지만,  오랜 동안 문화민족으로서 동양고전의 경전을 통해 인성도야와 치국 평천하의 원리를 삼아온 문화적 에토스는 ‘문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신뢰심이 다른 민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불교, 유교, 노장사상등 훌륭한 동양의 고전과 경전들이 있었으나, 모두가 한자로 쓰여져 있고 제한된 문자매체의 보급율 때문에, 그러한 동양고전들은 선비들과 식자들의 독점물이 되어왔다. 그동안 동양 고전과 경전들은  사회 상승계급의 독과점 품목이었으며 그들의 신분증 역할을 해왔을 뿐, 대다수 민중들은 영적으로 배고팠고 생수에 목이 갈한지 오래였다.
  그렇게 하기를  4,000년이 흘러 드디어 ‘생명의 떡과 생수’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한민족 민중들의 손에 들려지니, 마을마다 골자기마다  섬마다 한글성경 읽는 소리 진동하고 한국은 복음선교 100년만에 국민 1,000만명이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는 기적을 이루게 되었다. 이 놀라운 한글 성경번역과 그 보급사건은,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을 통해 독일문학과 문화 사회 정치에 미친 영향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를 있게 한 한국교회의 ‘성경지상주의 신앙’이 위대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영감과 영적 저력의 원천이 될 것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정체(停滯), 분열, 미성숙, 문화사회 발전과정에서의 지진아(遲進兒)가 되어가고 있는 원인제공이 되고 있음을 성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 근본 원인은 성경을 읽는 법, 성경을 대하고 이해하는 해석학적 눈에 있어서  ‘성경축자무오영감설’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 복음과 더불어 성경을 전해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성경관, 특히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으로 무장한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기독교의 다섯가지 근본 교리중 하나가 ‘성경축자무오설’ 이었던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운동은 19세기에 풍미했던 유럽 자유주의적 신학풍토 특히 성서연구에 있어서 비판적 연구방법, 종교사 및 진화론의 긍정적 수용, 인관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등에 반발하면서 기독교의 근본교리적 신앙을 보수하고 방어하려는 일련의 신학운동이었다 근본주이적 보수정통신학은 다섯가지 근본교리를 주장했는데 (i) 성경의 무오성 (ii) 예수 그리스도의동정녀 탄생 (iii)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iv) 육체부활 (v)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이다.
  박아론, 보수신학 어디로 가고 있는가? (총신대출판사, 1992), 16쪽 이하 참조.
다섯가지 근본교리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리가 ‘성경축자무오설’이다.
  하나님의 인류구원 경륜가운데서  성경이 성령의 감동감화와 영감에 의해 씌여지고 편집되고 전승된 경전임을 부인하는 건전한 기독교 신학자, 목회자, 평신도는 한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영감설’이 ‘문자적 무오설’로 변질되고, 창세기1장1절부터 요한 계시록 22장 21절까지, 곧 성경의 내용전체가 영감으로 씌여진 것인 만큼 그 영적 진리와 내용만이 아니라, 글자 한자한자 문장 하나하나가 조금도 틀림없는 ‘진리의 백과전서’요 ‘문자 실증적인 확증서’라고 독단하는 순간, 복음의 ‘영적 종교’는 ‘문자종교’로 전락하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신자들의 심령에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영감과 구원진리의 희열은 살아지고 문자주의적 율법주의가 횡횡하게 된다.
   ‘진리와 은혜의 영’은 66권 성경 책 안에 갇혀지게 되고, 만민에게 주어진 생명의 떡이되고 생수이신 그리스도는 정통적 성경 해석권한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의 ‘독점물’로 변질해 버리고 만다. 이 문제를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한국 기독교계에 제기한 사람이 장공김재준(1901-1987) 목사요 그는 당시 예수교 장로교 교권주의자에 의해 이단자라고 제명 처분되어(1953) 장로교의 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성경연구방법론이 문제가 되어 김재준을 파문한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문자무오설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자유로운 영의 활동을 경전 책 갈피 안에 갇우어 유폐시키고 제약시키고 있다.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죄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쇠창살 안에 갇힌 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경고한바 있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고후3:6)는 말씀의 진의를 한국 보수적 기독교는 아직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몰이해성 때문에, 한국 기독교 신자는 오늘날  21세기에 걸맞는 보다 성숙한 영적 신앙인으로서 성숙해가지 못하고,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진리들과 불필요한 문제까지 사사건건 충돌하며, 열린 신앙이 아니라 문자에 메인  배타주의적 신앙인으로 육성되어,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제의 신앙을 이단시비로서 정죄하는 교회분열사가 지속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언필칭 입을 열기만 하면 ‘성경주의적, 복음주의적“임을 진리증명서나 된 듯 주문처럼  남발하지만, 그들의 ’성경적 복음적‘ 이라는 말의 실체는 보수정통신학의 ’문자주의적 성경무오설‘ 이외 다른 의미가 아니다.  그 결과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영과 진리와 사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옛 혈육적 인간, 자기중심적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 영적인 사람, 새로운 존재에로 거듭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다”라고 믿는 책종교 신자, 경전을 우상처럼 섬기는 ‘경건한 우상숭배자들’만 양산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성경은 위대하며 기독교 영감의 원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이 위대한 것은 그 경전의 문자를 통해서 증언되고 드러나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와 은혜의 능력이 위대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성경이 위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적 복음을 증언하는 책인고로 성경이 위대한  책이 된 것이다.  
  오늘 한국 기독교의 질병의 근본 원인 중하나가, 성경문자주의 성경절대지상주의에 있다는 이 아이러니를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의 치유나 성숙이 불가능하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2)라는 구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 말에 거한다”는 말씀은 예수의 말씀과 인격과 영이 하나가 된 예수의 영적 생명 그 자체 안에 머문다는 말이지, 한국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66권 성경 문자로 씌여진 그런 ‘경전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성경 말씀들은 위대하지만, 진리는 더 크고 위대하며, 그 진리가 육화되고 영화된 구체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는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것이다.   
    
3. 성육신적 영성, 시천주신앙, 양천주 영성

  한국 기독교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교회에 ‘영성’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게 되었다. ‘영성신학’, ‘영성수련, ’영성 세미나‘, ’영성 클리닉‘등등 표현도 다양하다. 그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의 영적 갈증과 영적 위기를 나타내면서도 아직 건전한 영성신학과 영성수련 방법이 정립되지 못하고, 심지어 교회 양적 성장의 수단방법쯤으로 곡해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기독교인숫자가  남한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창조적 변화를 시키지 못하는 것은 올바른 영성 함양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육신 신앙’을 중요시하는데, 그 참 의미를 알고 믿는자들은 드물다. “말씀의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다”는  요한복음의 위대한 선언은 진리가 단지 가르침의 교훈으로서나 당위적 이념으로서 설파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명 그 전체 안에서 통체로 투명하게 드러난 체험을 하고서 하는 말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과 교훈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 생명이 하나가 된 것을 느끼고 보았다.
  성육신 신앙을 믿는다는 말 뜻은 지금부터 2000년전, 유대 팔레스타인 땅 위에서 33년간 삶을 살고 간 예수라는 한 인간 몸을 빌려  땅 위에 현신(現身)하신 하느님이 계셔서 33년간 땅 위를 사람 몸을 입고  거닐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대사회에 흔해빠진 구원신화 종교교리를 기독교식으로 다시한번 반복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반대로 예수라는 한 인간, 참 사람이 지극 정성 오직 일념 하나님만 꼭 의지하고 신뢰하는 참사람,  하나님 뜻에만 절대순명 절대 순종하는 외골인생 길 걸었던 사람, 죽는 자리 한 가운데도 하나님의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들면서 하나님을 놓아주지 않은 사람, 세상 돌아가는 뽄세를 보면 도저히 하나님이 사랑이거나 빛이시라고 말하기 어려운데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분만이 빛이시고 사람이시고 생명이시라고 말하는 그 청년 예수에게  하나님이 “맞씨름‘에서 지신 사건을 ’성육신‘이라 말한다.
  20세기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능력과 의미’에 옛 인간존재가 부딪혀 옛존재가 깨어지고, 새 생명능력에  붙잡힘 받아 그 인간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역동적이고 생명적인 신앙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적 승인 또는 수용과 다른 것이다. 동시에 참 신앙은 기독교 계명으로 표현되어 있는 도덕규범 준수 곧 율법주의적  도덕생활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참 생명적 신앙은 인간의 종교감정이나 종교적 과잉흥분상태에서 맛보는 엑스타시나 일종의 종교적 특수심리상태에 잠기는 심리학적 체험현상과도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Paul Tillich, Dynamics of Faith(New York: Harper & Row, 1957), <신앙의역동성> 참조.
신앙의 왜곡은 곧 바르고 건강한 복음적 영성의 왜곡을 의미한다. 그 왜곡은 세가지 형태로 나탈 수 잇다.
  첫째, 건강한 역동적 복음적 신앙,  창조적인 복음적 영성이 왜곡되는 첫 번째 형태는 기독교 교리체계나 교의를 받아드리고 지적으로 수용하는 지적 동의가  마치 신앙 그 자체라고 동일시 하는 잘못에서 나타난다. 정통주의 신학을 소유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착각하는 ‘신앙의 지적 왜곡’( intellectual distortion of faith)  형태이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믿고, 예수의 대속적 속죄교리와 부할 승천 교리를 믿고,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내가 지적으로 수용하면 좋은 신앙, 바른 영성이 저절로 보장된다고 착각하는 잘못을 말한다.  
  둘째, 역동적 신앙의 왜곡 형태는 도덕적으로 성경이 명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잘 지켜내면 좋은 신앙인, 역동적 영성을 지니게 된다고 착각하는 ‘신앙의 도덕적 왜곡’(moral distortion of faith) 형태가 있다. 십계명을 잘 지키고, 성수주일하며, 십일조생활을 잘하며, 술담배를 안하고, 구제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면 저절로 영성이 좋아지거나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 3)고 말함으로서  외형적인 도덕적 진지한 생활이 꼭 신앙인의 영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셋째, 역동적 신앙, 바른 복음적 영성이 왜곡된 형태는  ‘신앙의 감성적 왜곡’(emotional distortion of faith)이다. 신앙체험은 초감각적인 경험을 할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초심리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불체험,  방언, 예언, 신유체험,  축귀체험 등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그러한 생생한 체험들은 귀중한 은사들일 수 있고, 개인적으로나 신앙집단의 신앙에 열정을 가져다 주는 귀중한 체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러한 종교적 신비체험이 반드시 건강한 바른 신앙이거나, 올바른 영성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하실 것이라 하였다.  참으로 두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용도목사(1901-1933)는 1930년대에  살면서 조선교회의 영성회복을 위해 몸부림 친 감리교회의 부흥사였는데, 그가 말한바 날카로운 지적의 말 “교회는 있는데 예수는 없다. 설교는 있는데 복음은 없다. 찬양대는 있는데 하나님은 없다” 이용도의 생애, 신학, 영성: 이용도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논문집(2001.한들출판사),6쪽.
라는 신랄한 비판은 오늘의 한국 교회 현실에서도 올바른 영성과 복음적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  깊이 음미해야 할 경고로서 맘 속에 아로새겨 놓아야 할 조선의 예언자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3. 한국 교회여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교회협의회 선교정책은 그 이전 시대와 비교 할 때 커다란 선교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 안에서 복음을 증언해야 할 세계적 현실 상황이 19세기나 20세기 초와 비교 할 적엔 엄청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몇가지 가장 중요한 상황변화의 변수들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지구촌이 실현되면서 지구촌의 다양한 문화적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화의 다양성, 가치관의 다양성, 실재관의 다양성등 전통적인 기독교 문명의 획일적 사고방식으로서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지구촌에는 기독교 신앙이외에도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등 세계적 보편종교문화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 문화를 우상숭배 종교들이라고 매도 할 수 없으며, 전통적인 배타적 정복주의 선교신학이 먹혀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류 구원경륜과정에서 타종교들 특히 세계문명을 이끌어온 세계적 종교들(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도교)등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기독교 복음선교와 그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선교신학적 과제가 생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직면한 긴급한 문제들을  기독교 교회나 기독교문명 독자적으로 해결 할 수 없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연대와 협력이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대두됨에 따라서, 그러한 선교신학의 과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종교간의 대화 및 협동을 추구하는 종교신학 및 토착화신학 과제가 대두되게 된 것이다.
 둘째, 생태환경의 위기는 전지구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고, 지구 온난화 현상, 물 토양 공기의 오염, 생물종의 멸종문제는 선교신학의 차원에서 ‘생태신학 및 생태윤리’문제를 각성시켰다. 생태윤리와 생태신학의 문제는  성경이 자연과 피조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가의 근본적 실재관에 있어서 패러다임 전환을 요청하게 되었다. 자연은 인간에게 맞선 ‘기계물리적 물질의 총합’ 세계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유기체적 생명체’임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창조신학’과 ‘자연신학’의 새로운 발상법의 전환을 촉구하게 되었다.
 셋째, 인류의 역사시대문명사 5000년동안 지구문명을 이끌어온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재성찰을 요구하게 되었고,  보다 모성적 원리와 여성의 눈으로 세계현실을 해석하고 문제 해결의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여성신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단순한 여성권익 보호문제임을 넘어서서,  실재관의 문제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가 되었다. 실재의 세계는 무한 경쟁, 무한 성장, 무한 소비, 약육강식의 원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 나가게 되었다. 상보상생, 순환조화, 혼돈속의 질서, 미학적 감성, 비움의 충만성등이 새롭게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넷째,  정보화 사회의 실현으로 인하여 전지구촌의 실현과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사회 계층간, 국가간, 문명사회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중되면서, 정의 평등 평화문제가 긴급사항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절대빈곤 현실과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들 사이의 위화감은 극단적인 폭력, 테러, 혁명, 전쟁등의 파괴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기독교 교회로 하여금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선교신학의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다섯째,  생명공학과 분자생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유전자 암호해독을 하게 되었고, 생물체의 줄기세포 배아를 활용함으로서 신약 개발, 질병치료, 건강증진등 순기능과 더불어 생명가치와 생명윤리의 근본적 위협이라는  두려운 과제 앞에 직면하게 하였다.
    이상의 5가지 근본적 세계상황변화가 전 지구촌과 한국사회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신학과 선교정책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변화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한국 기독교 교회의 선교정책은 지난 40년간을 뒤돌아 볼 때, 문화의 다양성에 다하여 배타적 정복주의 선교정책이 주조를 이루었고, 뉴톤 데깔트적 세계관에 머물면서 양자역학 이후 형성된  유기체적 전일적 실재관에로 창조적 전환에 미흡했다.
   개교회나 교단선교 정책방향에 있어서 가부장적 가치관이 아직도 지배적이며, 선교정책은 무한경쟁-무한성장-약육강식이라는 세속적 가치관에 편승하거나 소외된자들의 고난과 아픔을 외면 하였다.  놀라운 급성장을 이록한 한국 개신교의 노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한국 사회가 싸늘한 비판적 시각을 보내는 근본적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가, 우리시대의 올바른 선교과제를 바르고 빠르게 응답하지 못하고 교세확장이라는 종파적 이기주의에 집착하고, 인류 구원방도를 독점하고 있다는 독선적 배타주의에 메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인류문명이 새롭게 털갈이 하듯이, 20세기부터 시작된 문명의 세계관적 변화가 완전이 이뤄어질 중대한 전환기이다. 이러한 문명 전환시대에, 남북한의 통일 지향하면서, 동북아시아 문명을 토양으로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선교신학 패러다임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영성신학의 방향을 기본테제로서 말 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한국기독교 교회의 영성은 ‘성육신적 영성’을 지향해야 한다. 성육신 신앙의 본질은 “말씀이 육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가인의 역사를 아벨의 역사로 바꾸어 가는 창조적 변혁의 영성”을 말한다.
 성육신적 영성에서 보면, 이 세상을 사탄과 어둠의 권세들에게 맡겨버리고 기독교인들은 천국만을 바라보는 세상도피적 신앙, 몰역사적 신앙, 탈역사적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상 속에 두심은, 교회 그 자체를 위함도 아니요, 죄의 홍수물결 속에 허덕이는 세상사람들을 하나 둘 건져내어서 안전한 ‘구원의 방주인 교회’ 에로 불러 들이려는 목적이 아니시다.
  ‘역사로 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신다.  우주자연은 기계구조물과 같은 결정된 물질덩어리가 아니다. 순간 순간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발생할 형성적, 과정적인 소용돌이 같은 세계다. 허무한데 굴복해온 모든 피조물들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신음하고 있는 세상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 교회의 영성은 대지,역사,현실 속에 뿌리박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려는 공동체적 영성이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추구하셨던 궁극적 영성의 방향은 주기도문 안에 잘 나타나 있다. 주기도문 중에서도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실천하는 영성은 자유 정의 평화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공동체의 영성이다. 땅에 임한 하늘과 하늘의 빛에 의해 영화된 땅‘을 지향하는 영성이라야 한다.
  함석헌의  증언대로 땅 중의 땅은 광화문 정치 네거리이거나 강남 환락가 상업중심지가 아니라, ‘민중의 마음이 땅중의 땅’이다.  본시 사람의 맘 그 자체가 ‘하늘과 땅’ 이라고 볼 수 있는 콩깍지로 덮여있는 생명 영그는 자궁터 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들이 이뤄나가는 이상적 복지국가는 결코 아니지만, 정의 자유 평화 사랑같은 열매로 가득한  지구위 인류공동체 실현을 회피한체  하늘에서 떨어지는 타계적 나라는 결코 아니다.  
 셋째,  한국 기독교의 교회의 영성은 문자주의적 성경관에 메이지도 않고, 정통 교리주의 신경에 얽메이지도 않고, 교회의 제도나 조직체계에 의해 경직되지도 않은 유연성과 탄력성과 역동성을 지닌 ‘모성적 영성’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를 벗어버리고, ‘예수의 심장박동’  소리에 항상 귀 기울이는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에만 닿는 영성이라야 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기능의 네가지 기본범주는 말씀선포(케류그마), 성도들과의  깊은 친교(코이노니아), 서로나눔과 사회봉사(디아코니아),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훈련(디다케) 이였다.
   건전한 교회공동체는 이 네가지 기본 사역중 한가지라도 소홀하지 않고 균형 조화 속에서 발전 성숙해가야 한다. 교회의 예산 편성도 원칙적으로 이 네가지 사역에 걸맞도록 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통계적 으로 한국 개신교 교회 전체 예산중 ‘디아코니아’(서로 나눔과 사회봉사)를 위한 예산 지출이 평균 5% 미만인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이라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증언하는데 그쳐서는 아니되고, 세상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 그 분의 몸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21세기 한국 기독교 교회의 영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적 정신으로 투명한  우주적 그리스도를 향한 열린 영성이라야 한다.
   글자 그대로 우주시대에 인류는 돌입하였다. 과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활동들은 지구적 차원과 전 지구적 시각에서 날마다 달마다 역동적 창발성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직도 근대적이거나, 16세기 종교 개혁시대이거나 , 심지어 중세기 기독교 시대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국지주의에 메여있고 교파주의적 신학에 갇혀있다. 그러므로 우성 일차적으로는 우선 개신교 타 교파신학의 장점을 살려내고 배우며, 로마 카톨릭 신학과 동방정교회 및 성공회의 영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 지구와 인류전체를 섭리 경륜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 창조주 하나님의 맘에 걸맞도록 타종교에 대하여 관용의 정신, 대화적 정신, 배움과 협력의 정신으로 대하는 적극적 선교시대가 열려야 한국 기독교는 산다.  종교혼합주의는 종교독단주의 만큼이나 위험하고  옳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한 깊은 영성과 진리에로 뿌리를 내릴수록, 타종교의 진리소리와 타종교의 영성에 두려움 없이 맘을 열 수 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영성은 첨부터 끝까지 기도의 영성이요, 자기 비움을 통한 충만경험의 영성이며, 절제능력을 통해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랑의 영성이다.
  교회의 예배는 보다 성령이 역사 하시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기도와 비움과 기다림과 절제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울부짖는 통성기도가 있다면 절대침묵의 기도도 있어야 한다. 산봉우리를 앙망하는 영성훈련이 있다면, 계곡의 비움과 포용성을 터득하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교리교육이 필요하다면 신비가의 영적 눈뜨임이 요청된다.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신앙이 (영적 눈이 띄여져서)  눈으로 뵙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욥42:5-6)
   예배는 보다 역동적 이어야하고, 보다 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살아있는 예배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삶을 기획하는 교육못지 않게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교회의 존재자체가 ’거룩을 드러내고 매개하는 세크라멘트‘ 이라야 한다. 하늘로부터 구름타고 천군천사 거느리고 나팔불며 강림하는 예수를 바라보려하지 말고, 지금여기 생명있는 것들의 신음과 눈물과 고난 한 복판에 임재하시는 영원의 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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