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8/31 (20:19) from 203.252.17.163' of 203.252.17.163' Article Number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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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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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삶

김경재
(한신대 교수 / 조직신학)

  인간의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

 공자는 "산다는 것도 아직 체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안단 말이냐"고 말했다. 지당한 말씀이며, 진리를 구도하는 겸양한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삶을 다 모르면서, 사람섬기는 법도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의 문제와 제사 문제를 문제삼지 않을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은 진정 인간의 한계상황으로서 위대한 신비이면서 풀고 넘어서야 할 매듭이고, 초월하여 뛰어 넘어서야 할  존재의 마지막 결승벽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하는데 주로 죽음의 현상학적인 간접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그 누구나 모든 사람이 맞아해야 하면서도 돌연이 예고없이 찾아 올 수있는 것이다.죽음이 가까워 오면 모든 과정이 의사, 장의사,성직자등 전문인들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통과제의로서의 죽음이 낯선 사람의 손에 양도되어 버린다.  둘째, 죽음은 집단학살의 경우일지라도 죽는 순간만은 홀로 맞이해야 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나 낲편이나 아내일지라도 대신죽어줄 수 없고 함께 죽어갈 수 없다. 죽음에서 인간은 홀로되는 엄숙한 시간을 맞는다. 셋째, 죽음이 주는 아픔은 죽음 그 자체라기 보다는 모든 의미있는 관계와 성취물과 삶의 의미연관구조를 일시에 잃어버리고  해체당하는  의미상실의 고통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의 아픔, 혼신의 힘을 쏟았던 일로부터 단절되고 쌓아온 모든 생의 업적으로부터 분리되는 아픔이다. 죽음의 아픔은  곧 근원적 소외가 주는 아픔이고 고통이다. 넷째, 죽음의 두려움은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녔던 구체적 몸으로서의 생명이 추하게 먼지와 물로 분해되고 해체된다는사실,  거역할 수없는 물리적 안트로피현상에 내던져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저항감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잡고 있다. 죽음은 매우 비인간적일 수있는 현상을 내보이면서,인간성을 모독하고 파괴하는 독재적인 비정함이 있다. 이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으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죽음 이후엔 당사자야 의시깅 없지만, 가족의 시신을 병동의 냉장고 속에 안치해 둬야하고, 며칠전까지 서로 몸을 비비고 만지던 친지의 몸을 차거운 땅 속에 매장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죽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죽음의 두려움은 죽음이후의 생명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무지한 상태일만큼 모른다는 사실이며, 삶의 시간을 한줌 부끄러움없이 살았다고 자신 할만한 당당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죽음이 이렇게 엄연한 현실이며, 인간의 최대의 관심거리이며, 모든 철학과 삶과 문학과 예술의 가장 깊은 신비적 대상이면서도 현대인들은 죽음에 고나해 이야기하려하지 않으며 죽음을 터부시 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터부시 된 이유

  그동안 현대 문명사회, 특히 서구 문명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하여서는 가급적 말을 않으려고 했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서구사회에서 장례식은 지극히 제한된 식구나 친지의 일부가 모여 성직자의 종교의식에 따라 진행할 뿐이다. 아시아의 문화처럼 죽음의 장례가 삶의 커다란 통과의례가 되지 못하는 감이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도 근대 이전 까지는 죽음이 삶과 긴말한 관계 속에서 운위되어 왔다. 그런대,  현세적 삶에 인간의 거의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된 근세 계몽주의 시대 이후, 죽음의 문제는  삶의 변두리문제로 몰려나게 되었다. 그러한 시대사조를 반영이나 하듯이, 기독교에서도 지난 300-400년동안 죽음에 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과, 죽음을 바르게 맞이하고 극복하는 문제에 대하여 소홀히 취급해왔다.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의 커리큐럼에도, 장례식 집전을 어떻게하고 하관식 집례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예전론적인 측면에서 전문인 양성을 하는 일에 치우쳤지, 죽음 그 자체와 죽음 이후 문제에 관하여 강의하는  교과과정 프로그램이나 세미나를 가져본적이 없다.
  그런데 기독교가 죽음에 관하여 별로 많은 말을하지 않는 이유는 매우 역설적인 양면성이 있다. 다시말해서, 얼른보면, 기독교의 죽음이해와 죽음 이후 인간의 운명에 관한 경전의 설명이, 힌두교나 불교에 비하여 매우 단순하고 단조롭기까지 한다는 면이 한편으로 있는 것이다. 죽음이후, 모든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구원 아니면  영원한 심판이라는 둘중의 어느 한 운명에 봉착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도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독교의 죽음과 죽음이후의 과정에 관한 교의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소가 중층적으로 혼재되어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죽음이해에 영향을 미친  사상적 세가지

 그리스도교의 죽음이해가 단순한듯하면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는이유는, 그리스도교의  발전과정에서 세가지 서로다른 커다란 사상적 흐름이 서로 만나서 합류되고 지평융합되면서 "그리스도교적"이라는 우주적 보편종교로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 세가지 핵심적 요소들은 첫째는 성서적 사상의  모체가 되어있는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해이다.( 주전 1800년- 주전 600년), 둘째는 히브리 민족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이나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서 살면서 그리고 그 이후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동방 여러나라의 구원종교 특히 종말사상과 우주의 종국에 있는 선악의 심판사상및 새로운 우주시대에 관한 기대의 신앙이 그것이다(주전 600년- 주후 10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요소는 기독교가 헬레니즘세게 속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자연히 그 문명사회의 문화와 철학사상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플라톤사상이나 스토아의 로고스 사상등 이다 (기원1세기 이후) .
  첫째, 기독교의 죽음과 삶에 관한 기본적 이해는 구약성경의 초기경전자료에 나타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사생관이다.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00년사이에 그들의 사상은 매우 삶을 중시하고 죽음을 바람직 스럽지않는 것으로 보는 소박한 리얼리즘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생명관은 그들의 관심이 땅위의 사는동안의 생명에 있지, 사후세계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으신 예수님도 어느곳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는 말씀 하신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씀은 죽음과 삶의 이분법을 넘어서 영존하시는 하나님 신앙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죽음무제를 생각 할 때마나다 항상 깊이 음미배보아야 할 말씀이다.
  고대 히브리 인들이 죽음이해, 곧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사후세게에 대한 이해는 우리나라의 저승처럼 땅 아래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가하는  '스올'(陰府, Seol) 사상이  있었다. '스올'은 모든 죽은자들이 가야하는 그림자같은 세계, 생명력과 생기가 없는곳,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못하고 해같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곳,  생의 환희와 기쁨도 없는곳, 그러나 아주 아무것도 없는 절대무와 같은 허무는 아닌 그런 상태의 유체게(幽體界)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국민간신앙의 저승개념과 다른점은 '스올'엔 염라대왕이 있거나 살아있을 때 행한 선악간의 행동에 적합한 상벌이 있는 그런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스올'은 이승의 연속이 아니다. 단지 그곳은 삶의 기쁨과 생기가  살아진곳, 곧 그림자들과 같은 영적 유체들만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생각 되었다.  구약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때,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한 생명의 낮시간이 다가고 그들은 생명력이 진하여 그들의 열조(列祖)에게로 돌아갔다고만 표현한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기록은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주전 1,000년경) 최초의 예언자라고 볼수있는 사무엘의 죽은 혼령이 이스라엘의 초기 왕 사울의 부탁에 의하여 여자무당 영매의 초혼행위에 따라서 다시 땅 위로 나타나 사울과 대담하는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사무엘상 28:4-19) 망자의 혼령이 땅위에 다시 출현하는것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로되 여자무당 곧 영매에 의하여 망자의 망령을 잠시동안 산자들의 시공간계에로 불러올려 내와서로 대화한다는 기사는 한국 무교의 초혼제와 비슷한 유사성이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을 지배하는 염라대왕이 따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을 동시에 주관하는 절대자 하나님 신앙 안에서 이땅 위의 생명의 시간을 매우 긍정적으로 귀중하게 향유하는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신앙사에서 둘째요소는 동방여러나라, 특히 바벨론, 앗수리아, 페르샤등의 종교사상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역사적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땅 위에서 이롭게 살련느 자들이 악하고  불의한 자들에 의해 도륙당하고 핍박받는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움, 신의 정의로움"에 대한 신앙과 결부되면서, 사람은 죽음이후 누구나 그가 행한 소행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심판사상과 역사의 종국적 완성을 대망하는 종말사상이 이스라엘 신앙사 속에 지평융합되었던 것이다. 죽은자들의 부활사상도 이러한 하난미의 정의로운 심판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한 업보대로 다시 윤회한다는 사상은 히브리 초기 이스라엘 신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행한 업보대로 윤회하는것이 아니라,행한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기독교신앙의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사상에 영향을 끼친 세번째 요소로서 주후 1세기 이후, 복음과 플라톤철학및 신플라톤사상과의 만남이 있다.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면 현상의 세계에 맞서서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이 초기 헬라 기독교 교부들의 사상을 통해 깊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교사상 특히 죽음이후 사생관이란 고대 히브리 사상, 동방신비주의사상, 헬라철학사상등의 종교혼합주의에 불과한것 아니냐고 보는 견해는 분석적 사고방식과 요소론적 사고방식이 빠지는 판단오류이다. 그 세가지 요소들은 모자이끄식으로 단순히 병합된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무가 퇴비를 흡수하듯이 사상을 흡수해서 자기의 생명체를 구성하는 살과 뼈로 만들어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흔히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를 날카롭게 구별해 놓고서 성경속에 나타나는 헬라적 요소는 비성경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이라고  설파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의 정신적 삶의 해석학적 지평융합과정을 너무 단순하게 기계론적으로 오해하고 있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나 사상이나, 종교체험은 살아있는 나무나 큰 호수와 같아서 끊임없이 자라고 새로운 물줄기가 흘러들어와 합류하면서도 그 본래적이 특성을잃지 않는다는데 묘한 생명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개인 생명도 알고 보면 날마다 변하고, 여러가지 복합적이 사상의 토양에서 자라나면서도 항상 나는 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니듯이 우주적 보편종교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선 기독교 신앙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도 단세포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해서 비빔밥같은 종교 혼합주의 결과도 아니고, 무엇인가 "궁극적 절대진리"를 체험한 이스라엘백성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예수라는 분의 죽음과 부활생명의 현실에 부딪혀서 신앙의 핵을 이루고, 그것이 끊임없이 성장발전해가는 과정속에 있는것이  기독교라는 종교현상이다. 성경엔 공관복음서도 있고,요한 복음서도 있고, 바울편지가 있는가하면, 예언자들의 글이 있고, 지혜문학과 율법서가 있는가하면, 묵시적 신비주의 경전도있는데, 각각의 경전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같아서 각각 자기 색갈으 음색을 내면서도 그 안에 앞서 말한 세가지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조금씩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핵심은 "생사의 근원자이신 하나님 신앙"이라고 정리할수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와 그 현상을 생명의 원천자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 파악하고 극복하려 한다는 점이 기독교의 종교로서의 유형적 특징이 있다.
  
  불교의 사생관과 기르스도교의 죽음이해의 차이

   원시불교이든 근본불교이든 불교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불교사상의 중심은 삼라만유를 인연생기설의 관점에서 본다는것이 사생관의 출발점이다. 만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서 바라문교도들이 말하는 브라만이나 아트만이라는 실체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공(空), 중도(中道)를 설법한다.사실 불교라는 종교는 죽음이해라는 보통사람들이 갖고 있는 죽음에 고나한 견해자체가 일종의 하난의 망집이고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구라는 사상이다. 죽음도 삶도 영원히 변화생멸하는 실재의 무한변화과정 중의 한 계기 곧 인연생기(因緣生起) 현상이라는것을 확철하게 깨닫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요체이다. 말하자면 득도한 고승에게는 죽음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 현실적 불교, 역사적 종교로서의 불교에  실질 중생들이 귀의하는 불교를 보면, 부처님의 공덕에 귀의하는 독실한 신심(信心)도 있고, 좋은 곳에 극락 왕생하려는 정토신앙도 있고, 죽은자들을 좋은 곳에 가게하려는 천도제도 있다. 그런 불교적 죽음에 고나한 종교의식절차를 보면  우주적 보편종교로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 또한  기독교만큼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체험과 사상이 흘러들어오면서 거대한 우주적 종교를 이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불교(根本佛敎)가 당시 바라문교의 경직된 사상이나 집착을 부수고 나와서, 진여자성(眞如自性)이나 법성(法性)을 깨닫도록 중생을 교화했으나, 이전 시대의 종교사상을 헌신짝 버리듯이 그렇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깨달음과 한결 깊고 높은 차원에서 지평융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윤회사상이나 업보사상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윤회사상 자체는 불교의 발생 이전부터 인도아리안 민중들의 종교적 직관과 신념속에 있어왔던 것이지만, 불교는 불교식으로 윤회 업보를 자기 사상 속에 받아드려 재해석한 것이다.

  기독교 사생관의 인식론적 원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냐라는  근본적 질문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가장중요한 인식론적 기점을  가지고서 거기에서 부터  출발 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를 발생시킨 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의 생애와 교훈과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다.  그 분의 생애와 교훈을 아는 길은 신약성경이라는 경전을 통해서이고, 그 분의 생애에서 특히  삶과 죽음과 죽음의 극복에 관한 의미를 가장 깊이있게 증언한 분으로서 사도 바울의 증언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의 기독교 이해가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본질 해석에서 중심인물로서의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예수님도 석가모니처럼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하여 자세한 논리적 설명을 남겨놓지 않으신 것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 현세의 삶이 끝난 뒤에도 영원한 생명이 삶이 실재한다고 믿으시고 또 그렇게 가르치신 교훈은 여러곳에서 나오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념을 지니신 것은 틀림없 것이다. 그 분의 관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것이였지만 그 영원한 생명이란것이 반드시 사후의 생명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한 생명, 큰 생명, 본래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한 강도의 간청에 대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23:43)라고 말씀했달지, 자신의 숨을 거둘때에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라는 표현들을 보면  예수님도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인 하나님 신앙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을 가지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주음에 대한 신념은 도리혀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해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26)라고 말했을 때, 무슨 육신의 몸둥이가 영원히 불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속 생명, 영혼, 진아(眞我)에 해당하는 참생명은 겉모습으로 사람의 육신의 생명이 유한하여 부셔지더라도 영원히 산다는 신념이다. 문제는 죽음이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도, 내 속에 참 생명, 죽음이 죽일 수 없는 참 영혼이 영글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본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약성경이나, 구약성겨잉 말하는 사생관은 삶과 죽음문제에 관한 종교철학적 사색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니고, 땅위에 엄존하는생명을 살리려는 힘과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려는 힘과의 겨룸이 문제인 것이다. 죽음이 관심이 아니고 죽임의 문제이고, 삶 일반이 관심이 아니고 살림의 문제이다. 사랑, 정의, 진실같은 근본 생명의 질을 중심으로 해서 매우 역동적인 살림과 죽임의 세력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죽이는 세력과 연관시켜서 이해한 것이고, 그러므로 죽음은 마지막엔 극복되고 정복되어야 할 세력으로서 초대 기독교들은 이해하였던 것이다.
  예수 이후 최고의 학승이라고 볼 수 있는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도, 죽음과 죽음 이후에 관한 체계적인 논문을 남겨놓은 것은 아니고, 그 때마다 상황 속에서 목회서신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죽음이후 영원한 생명에 관한 신념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신념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생관을 구성하는 세가지 근원적 정신사적 영향 세가지 흐름을 모두 그 자신 안에  가지고서 통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선 유대인이어서 고대 히브리인의 사생관 곧 원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전승을 물려받고 있다. 둘째는 그는 당시  가마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헬레니즘 교육을 받고 그 영향을 직간접으로 아니받을수 없었던 것이다. 원이스라엘 종교신앙과는 좀 다르게 유대교라는것은 이미 원이스라엘신앙과 헬라사상의 만남으로 상호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임박한 종말신앙, 곧 세상과 역사의 끝이 가까워 왔고, 모든 사람들은 그가 행한대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덧입게 될 것이라는 심판과부활과 종말신앙을 바울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세가지 요소가 각각 따로 노는게 아니라, 분리할 수 없이 한 호수에 흘러들어온 세가지 물줄기가 한 호수 속에서 구별할 수 없이  되듯이 바울이라는 인격적 믿음 안에서 '지평융합'(地坪融合) 되었던 것이다.

  죽음체험 이후의 생명의 지속 가능성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로스의 죽음 이후의 신비한 몸에 관한  이야기가  의미있게 들린다.. 그 분이 "죽음 이후의 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 이다"라고 말 할 만큼, 의사로서 또 학자로서 강조하고 있다.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종교적인 신념사항이 아니라  바른 지식을 통해 알고 있어냐 할 경험적 지식의 사항이라고 본것이다. 그 분은 자기의 그런 신념과 주장이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언급은 안했지만, 그 분이 자라고 교육받은  문화적 배경이 서구문명권이기 때문에, 그분의 그런 신념 속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삶과 죽음 이후의 신념에 관한 내용과 내적으로 많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보낸 목회서신 속에 다음과 같은 그의 신념이 피력되어 있는 점과 몹시 통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      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고린도 후서 5:1-3)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름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몸을 입은 것 같이, 또      한 하늘에 속한 그 분의 상을 입을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40,4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사후의 생명에 대한 신념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사후 생명에 대한 신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히브리적 전통에 선 바울과 헬라적 전통에 선 후자의 영생신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 본성 속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불사체로서 영혼이, 순수 정신적  실체로서 영원하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신념에서는, 인간존재를 순수히 사멸하는 흙덩이 곧 장막적 존재라고 보는 것이고, 속 사람이 영생하거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 것은 인간자기자신 속에 있는 스스로 자존하는  불사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덧입혀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순수 정신적  실체의 불멸성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몸"을 갖추는 불멸신앙이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물론 이 땅 위에서 가지고 살던 혈과 육으로 구성된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몸이 그대로 지속하는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니, 요사이 표현으로 하면 그 생명체의 존재방식과 구성원리와 구성체의 소재가 다르다는  말이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나 사도바울이나, "영혼이 불멸한다"는 명제적 신념은 동일하지만, 그 불명성의 근거와  "몸"에 대한 신념이 다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인간 영혼자체가 지닌 불멸적 속성 때문에 불사하여 영존한다는 철학적 신념이지만,  바울은 모든 생명의 근원자이시며 지탱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영적 생명체를 선물처럼 벌거벗는 무와 같은 인간영혼에 덧입혀주시기 때문에  불멸적 영생의 생명을 지속한다는 이스라엘 전통의 신앙이다.
  위에서 말한 사도 바울의 사후에 덧입혀지는 새로운 선물로서의 "영적 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은 엘리지베스 로스박사가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가 수많은 임사체험자들을 상담하고 난 후 연구결과  말한 내용과 몹시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 위에서 장님이었던 사람이나, 교통사고로 팔과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나, 어떤 형태이든지 지체불완전한 사란도, 사후 생명체 경험을 한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온전한 몸"을 구비한 자기생명체를 보았다고 했다. 순전히 기계론적이고 생물학적 인관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로스박사의 이러한 임상증언이 지체불구자들의 무의식적인 자기소망의 투영이거나 사상이라고 생각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사후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신념은  단순한 희망적인 심리의 투영이거나, 개인의 육체성에 관한 집념에서 해탈하지못한 중생들의 카르마 결과가 아니다. 기독교입장에서 보면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로스 박사는 그것은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지식의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후 생명현상과 죽음이해의 패러다임이 다른 이유

  한국인으로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적 종교의 위대성을 늘 느끼면서도,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 생명에 관한 너무나 대조적인 두가지 패러다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학문적 관심이 된다. 자연과학자들에게 있어서 "빛의 본질"을 밝혀보려는 과학적 실험방법과 실험도구에 따라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그것을 "빛의 이중성" 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처럼 "궁극적 실재", "삶과 죽음", "영혼"등을 이해 할 때도, 기독교는 입자형태의 패러다임으로서 그것을 이해하려하는 유형적 종교라면, 불교는 파동형이라고 설명해 볼 수 있는것이다.
  입자형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주체적 인격간의 관계성이 강조되고, 파동형은 빛이 온누리에 파동치는 원융회통성이 강조된다.  그것이 기독교를 지나치게 인격적종교, 영혼의 불사성에 집차하는 듯한  종교로서 오해하기도 하고, 불교는 비인격적 공(空)이나 무(無)의 종교로 일방적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빛이라는실재 안에 입자성과 파동성이 함께 존재하듯이 깊이 신앙체험의 단계로 들어가보면 기독교 안에도 파동성이 있는것이고, 불교 안에도 입자성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죽음 이후이 새롭게 덧입는 몸이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갖고 사는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의 "육체"가 아니다. 또한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의 사상은 "육체"와 "몸"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  육체개념은 글자그대로 살덩이와 뼈와 피로서 구성된 생물학적인 개념이며, 그것이 은유적으로 사용되어서서 "육적인 삶"이라고 할 때는 현세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생물학적 본능추구와 자기중심적 이기적 삶의 행태를 말한다.그러나, "몸"의 개념은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리적이 통일체로서 나타나는 생명의 총체성에 대한 이름이다. 사람은 몸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서의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몸의 개념을 중요시 한다. 몸에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 기능과 영광이 다른 다양한 몸의 존재방식이 있을수있다고 보는 것이 바울의 견해였다. 말하자면 천사들도 몸이 있는 것이고, 사후의 망자도 단순한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신비한 몸"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몸의 부활신앙과 업보윤회신앙  

  기독교는  전생에 내가 만든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다양한 인과적 영향이라고 이해하는 "업보사상"을 갖지않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총체적 책임체로서 "몸의 부활신앙"을 갖는 것이다.  복음서 속에 예수의 부활을 믿지않았던 불가지론자요 회의주의자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당신의 십자가에 못박힌 자국을 보여주면서 믿음을 강조한 이야기라든지, 요한복음서 끝부분에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호수가에서 음식을 잡수시는 보도기사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체를 세상에 살아있을 때의 육신의 소생  곧 "시체소생"으로 부활을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성경안에 예수는 시공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영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거나(누가복음 24:31,요한20:19), "내 몸을 만지지 말라"는 표현등은 부활체가 단순한 "육체의 소생"사건이 아니고 이성적으로 이해 할수 없는 새로은 "창조적 형태변화"라고  이해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선 도마의 십자가 상흔의 확인 이야기나  요한복음의 증언은 "불연속적인 연속성"이라는 생명의 신비적 증언으로 이해 해야 한다. 또한 당시 영지주의적 이단신앙에 대한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도 해석학적으로 고려해서 이해해야 할 성경구절인 것이다.
  주로 바울의 해설에 의존하지만, 사후의 신령한 "몸을 덧입는 일"에 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가지 견해가 혼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된다고 봐야하겠다.  여하튼 죽음이후에 덧입는 새로운 몸, 새로운 생명의  형태변화에 대하여 기독교는 결국 두단계의 결정적 계기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됨니다. 한번은 각자의 생을 마감 할 때, 덧입는 "영적 몸"으로서 영혼의 불사체이고, 또다른 하나는 만물의   종말적 완성의 날에 만유가 하나님의 영광안에서 변화하고 온전한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이다.
  성경 안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영생관에 있어서, 죽음 이후에 덧입는 "영적 몸"으로서의  생명의 영원화와, 묵시문학적 종말신앙과 결부된, 만인의 부활과 함께 덧입는 "부활의 몸"으로서의 생명의 영원화 사이에  쉽게 조화되지않고 화해되지않는 점이 항상 목회현장에서 있어왔다. 그것은 제가 맨 처음 기독교의 영생관을 형성한 근원적인 뿌리가 서로 기원이 다른 세가지 사상적 흐름에 기인한다. 그러나 바울자신은 아무런 모순이나 갈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형태이든지 "영적 몸"을 입고 변화되는 계기는 각자의 죽음 직후에 겪는 첫째단계와, 만인의 부활과 함께 영광으로 변화하는 둘째단계가 있다고 밖에 말 할 수없습니다. 특히 만인의 부활신앙은 단순히 유한한 생명의 영원화라는 "불사성"(IMMORTALITY)에 대한 관심만이 아님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문제, 곧 의로운 사람들의 운명과 이 땅 위에 정의로운 삶의 원리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예언자적 사상이 묵시적 종말사상과 결합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자연의 질서로 보지않고  극복되어야 할 것, 심지어 "마지막 원수"라고 까지 본것은 생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불의한 죽음의 세력이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독소와 죄의 권세" 때문인 것입니다.


티벳불교의 死者의 書와 죽음이후의빛 체험

최근에 출판되어 시중 서점에  많이 유포되는 책 <티벳 死者의 書>에 관하여 몇가지 언급할 점이 있다. 그 책의 원제목이 <바르도 퇴돌>이라고 하고, 그 말뜻은 이승과 저승사이에 있는 자 곧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들려줌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책이라고 해제에서 밝히고 있다.. 저 유명한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과 같은 학자가 이 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추천하는 글까지 덧붙였다.
 기독교에서도 보면 50이라는 숫자나 40 또는 49라는  숫자가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나타 나고 있다. 예들면 오순절(五旬節)이란 유월절 절기를 지낸후 50일째 날을  말한다거나,희년(禧年)사상이 이스라엘의 사회적 일대갱신을 이루는 해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보면 불교에서 49일을 중요시 한거나, 이스라엘사람들이 49년을 지나서 새로운 사회적 또는 개인적 갱신의 삶을 시작한다고 본 것은 서로 깊은 통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셈족 종교와 인도계 종교로서 분화되기 전부터 인류의  오랜 종교적 심성 밑 바닥에 놓여있는 원형적인 그 무엇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로스박사도 그의 책 <사후의 생>에서 그렇게 증언하고, 수많은 죽음체험을 하고서 깨어난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적 경험은 환한 빛을 경험했다는 증언이 있다. 죽음 직후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나 염라대왕 앞에 끌려나 간다는 한국 민담의 부정적 이야기 보다 우선 밝아서 좋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사후의 빛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표상화 할수 없도록 금지되어있는데, 오직 하나님의 실재를 "빛 의 근원, 또는  "존재와 생명의 빛 그 자체"로서 상징하고 또 빛체험을 하는곳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후의 영혼이 환한 빛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은 , 자기 생명의 근원자와 대면하는 경험, 다시 은총의 빛에 감싸이고 용납된다는 경험, 자신의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노출된다는 경험이나 신념을 상징하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에 죽은자가 경험하는 빛 경험자체도, 망자의 영혼의 내적 자아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정신적 환상, 곧 마음의 반영이니까, 그 빛의 경험까지도 넘어서야 한다고 보는것이다.  물론 그 책이 티벳사람들의 고유한 토속종교  특히 신비종교와 근본불교의 융합형태라고 보여지지만, 그래도 매우 불교적 해탈을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 불교에서, 특히 <티벳사자 서>에서 말하는 빛의 실재성을 단순히 정신의 환영이라고만은 볼수 없는 것이다.
   칼 융이 이책을 높이 평가한 것은 프로이드 심층신리학과 달리 인간의 개인 무의식층을 넘어서 엄존하는 인간 집단무의식 세계를 융박사는 임상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신과 환자의 임상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것이고, 그가 정신 신경의학적 방법으로 확인한 그 모든 이야기 들이 그 책 <티벳 사자의 서> 속에  거의 같은 관점으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감탄한다. 거듭말하지만,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절대자 하나님과 천상의 신령한 존재의 현현경험엔 항상 빛이 동반됨니다.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험이랄지, 바울이 다메색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경험한 것등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상징된다.(요한일서 1:5, 계시록 22:5)  로스의 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많이 나타내고 있다.
   죽음 직후에 마자를 안내하러 오는 수호령이 기독교인은 천사나 가브리엘로 나타나 보일 것이고, 불교인에게는  보살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보면 <티벳 사자의 서>의 저자가 하느 말이 해석학적으로 보면 일리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후의 세계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중간 의식상태의 경험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이미지는 그 해당 인간이 탄생하여 자라고 교육받은 문화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것은 아직 절대체험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경험마져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과 같은 종교다원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진리 한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들은 "제눈에 제 안경"이라고 하는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있는 붓대롱을 통하여 하늘을 보지만, 다른 사람이 쓴 색 안경도 있을 수있고, 다른 사람의 붓대롱도 있으니까, 내가 본 하늘이 전부라는 독단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작은 하늘도 분명히 하늘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람의 모든 인식과 관념과 사상은 그가 몸담고 자라난  문화, 역사, 전통,언어, 지질기후풍토에서 형성된 '마음의 스크린'을 통하여 경험된다는 일종의해석학적 깨달음이 중요한 인간성숙도의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귀의 하고있는 기독교나 불교에 진솔하면서도 독단과 독선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며, 자신의진리경험을증언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으 나라와 하늘나라의 뉴앙스  

 불교 속에 정토신앙이 있되, 현세 안에서 불국토를 이룩하려는 현세지향적 정토신앙이 있고, 사후 세게에 극락왕생하려는 정토신앙이 있듯이 기독교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과 '하늘나라'에 대한 신앙이 긴밀한 관련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전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 와 '하늘나라'는 똑같은 개념인데, 유대인의 전통 속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심이 지극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는 것을 삼가하여 '하늘나라'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신앙의 실재는  학문적 해석을 하는  학자들의 머리 속에 있다기보다, 신자들의 가슴 속에 숨쉬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도들은 그 양자를 구별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보다 초월적이고, 내세적이며, 사후의 세게에 들어가는 곳이며 초시간적이고 탈정치적인  천국이라고 이해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나라'는 보다 현세적이고 시공간적이며 보다 정치사회적인 색체를 지니며 하나님의 정의와 진실이 강처럼 흐르는 현실세계,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생명현실이라고 이해 하고 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의 해석에 의하면 본래 성서적 전통에서 주류는 '하나님의 나라'였는데, 기독교가 헬레니즘의 세계로 전파되면서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늘나라' 개념으로 변질되어 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이거나 '하늘나라'이거나 그 부르는 호칭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오묘한 특징이 거기에 나타나 있는데, 초자연의 차원과 자연의 차원, 영원의 차원과 시간의 차원, 거룩한 차원과 속된차원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와 같은 기능을 종교적 언어는  본질상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유하건데, 야곱이 꿈속에 사닥다리를 보았는데, 그 한 쪽은 하늘 끝에 닿았고 또다른 한 쪽은 자기가 누워있는 광야의 땅끝에 닿았더라고 했듯이, 초현실적인 면이 있으면서 다른 한쪽은 언제나 현실적인 면과 연결되어있다. 성숙한 종교인은 그 양면을 동시에 아우르는 지혜를 가지고, 두 차원을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보다 초월적인 차원,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세계, 영원한 초시간적 실재계,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실재계를 의미한다. 거기에 비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보다 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막힘없이 실현되고, 정의 사랑 자유 같은 핵심적인 가치들이 실현된 실재의 세계를 의미함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도신경을 모두 기본적인 신앙고백으로 삼고있는데, 그 첫 구절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전 피조영역의 세계를 '하늘과 땅'이라는 포괄적 상징언어로 모두 나타내고 있다. '하늘'이라는 상징어는  형이상학적 세계, 초자연의 세계, 영원하고 인간오성이 맘대로 처리 할수 없는 실재계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 '땅'은 인간의 이성이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실재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언제나, '하늘과 땅'은 함께 고백되고, 분리되어서는  아니된다. '하늘'만 관심하고 '땅'을 무관심하는 신앙은 타계주의자이거나 영지주의자가 되어버리고, 그와 반대로 '땅"에 충실한 나머지 '하늘'의 차원을 소홀히하는 신앙은 현세주의자, 휴메니스트가 되어 버린다. 물론 사후의 생명세계는 '하늘'이라는 차원과 밀접하게 관계되지만, 결코 '땅'이라는 현실과  무관계한 것이 아니라 양자는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깨달음이 신앙의 요체인 것이다. 기독교신앙에서 천국은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 살아서 들어가는 곳이며, 부활생명은 이미 현세의 삶에서 맛보며 살아가는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죽음이라는 엄숙한 현상을 사실그대로 받아드리는 자세가 우선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너무나 자명하게 인정하고 들어가는 때, 죽음의 심각성도 살아지고 삶의 진지성도 약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죽음이 모든 인생의 마지막이고 끝이라고, 그 이후엔 개인적 생명으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해도 삶의 진지성과 신비로움이 손상당 한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는 그것을 '역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는 죽음을 먼저 진지하게 받아드릴 것을  요청한다.
  다시반복하지만,  기독교적 죽음과 영생관을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중에서 히브리적인 사고,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죽음이해가 먼저 요청 된다. 그 전통에 의하면 인간의 삶이란 탄생과 죽음이라는 괄호 속에 주어진 단 한번의 기회이다. 히브리적 사유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불멸적인 신성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성경신앙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땅위, 산자의 땅 위에서 숨쉬고 동료인간과 사귀며 산다는 현실 그 자체가 기적이고 선물이라고 감격적으로 삶을 받아드려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이해를 함에 있어서  영혼이 전생에 이데아 세계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든가, 영혼의 윤회를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를 결코 미화하거나 경시하지  않는다. 죽음은 슬픈 것이고 애처로운 것이고 사실 두려운 것이다. 거듭말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죽음이  끝입니다. 그 유한한 생명체가 죽음 이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삶을 지속하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선물이고,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영생관은 헬라적인 영혼불멸사상과 융합되어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그래도 한가지 주요한 차이점은 강조되어야 한다는것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다. 헬라적인 영혼 불멸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이 본래부터 신성적인 불멸성을 그 자체로서 지닌 것이고, 기독교적 영혼 불명사상은 인간영혼의 불멸성의 가능근거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로서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자이나교의 영혼에 관한 사상이 기독교의 초대교부 오리겐(Origenus)의 영혼에 관한 사상 속에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제 생각으로는 브라만과 아트만에 관련한 우파니샤트의 사상이나 자이나교의  가르침이 고대 해상로나 육로를 통하여 지중해건너 헬라세게에 전해졌고, 그런 사상은 고대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의 사상 그리고 후엔 신플라톤사상 속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오리겐은 주후 2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큰 학자였는데, 플라톤과 신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인간 영혼의 선재설과 영혼의 불멸설을 믿었던 사람이다.
  다시한번 빛이 이중성을 비유로 말자면,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은  빛을 파동성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자연과학자들과 가깝고, 기독교 신앙은 빛을 입자성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연과학자와 가깝다. 기독교는 항상 "나는 절대자가 아니다. 내 영혼이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도 내자신의 영혼의 본구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고 초대이다"라는 의식이 강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가능한 영원한 생명도 모두 '은초의 선물'로 보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하려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게된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생명을 감싸고 있는 두 괄호는 탄생과죽음이라는두 괄호이지만, 하나님은 그 괄호를 또 감싸고 있는 더 근원적 괄호이고 존재와 생명의 품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는 것이다. 기독자는 자기 생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귀중한 생을 알차게 영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기실현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세계관적으로 말하더라도, 세계와 생명계가 자연과학적인 수학적 법칙으로 규정되 있어서 기계처럼 움직인다는 기계론적이고, 유뮬론적인 사고가 지난 300년간 풍미해왔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세계관 인생관이 이제 어느정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세계와 생명현실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해 보려는 발상법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신과 물질과 영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열린 마음, 그리고 그런 새로운 사상에 대한 철학, 물리화학, 의학, 심리학,종교학,신학등 다양한 학문간의 학제간 교류와 공동연구등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죽음이후의 생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현세적 삶을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책임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긍정적으로 보며,  생과 사를 동시에 포괄하는  더욱 넓은 의미에서의 참다운 큰 삶을 회복하려는 성숙한 현대이들의 자기성찰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죽음을  외형적인 면에서 보면 유한생명의 끝이지만, 내면적인 면에서 보면 자기 생명의 옹근 열매가 알곡으로 영글어 껍질을 깨트리고 나오는 것이고, 알로 말하면 알을깨치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과정이다. 문제는 각자 자기생명의 속알이 진실과 사랑과 자비와 어짐으로 옹근열매로 익어가는가의 여부이다. 장지(葬地)문제나 상례를 거행함에 있어서 죽음이후까지 이세상의 권세와 부를 연장해가지고 갈 수있기라도 하는양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 딱한 사람들이다. 이 땅 위에서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이웃을 외면하고 살다가, 죽음에 임하여 억울하게 그모든 소유를 두고가는 것이 아까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보다는 소박하게 살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고 위대하게 살고가는 수많은 보통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기의 죽음뒤 시신을 화장시키지 못하게하고, 평소빚지고 살았던 산속의 생물들에게 먹이가 되도록 공양하는 선승(禪僧)들의 초연한 자세, 의학발전을 위해 해부학자료로 시신을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들, 장기이식자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여 수많은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시신을 방부제로 처리하여 기념관 속에서 항구보존하려는 작태는 자연의 순리에도 어긋날 뿐아니라, 매우 역겹고 추해보인다.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어려운 종교나 철학적 논리를 운위하는 것보다 삶의 실천을 통하여,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여 두려움없이 죽음을 넘어서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 그들이 귀의하는 종교가 다를 수있고, 또는 종교를가지지 않을수도 있지만, 한가지 신념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인간의 삶과 생명은 죽음으로 다 끝나는것이 아니며,죽음을 능히 극복하고 남는  죽음보다도 더 강한 능력이  이 우주에는 존재한다는 것, 그 힘은 어쩌면 사랑,자비, 어짐, 진실, 정의, 우정등이라고 이름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것을 바울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 나는 확신함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일도, 능력도, 높        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 로마서 8:3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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