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25 (05:46) from 62.104.211.66' of 62.104.211.66' Article Number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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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갈등과 종교폭력의 해소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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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간의 갈등과 종교폭력의 해소방안

김경재(한신대,문화신학)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에 관한 세계인의 관심은 ‘문화종교적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직접 생존문제와 연관된  ‘사회정치적 관심’이 되었다. 미국 뉴욕 ‘9.11 자살비행기 폭탄공격’ 일주년이 되면서도 이 문제는 더욱 첨예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문제는 종교 그 자체 내의 종교적 신념차이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인종등 복잡한 사항들이 복합으로 얽힌 문제임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종교란 언제나 폴 틸리히가 말하는바 대로 ‘궁극적 관심’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적 종교와  서로 다른 문명집단간의 충돌은,  사실 종교적 갈등이라기 보다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갈등원인이 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해당사자들은 그들의 주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전쟁의 필수불가피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치 종교가 원인이 되어 문명충돌이 일어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대중을 그렇게 선동하는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이나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충돌을 볼 때, 양측 정치지도자들이 얼마나 그 갈등과 분쟁의  원인을 ‘종교적 문명충돌’ 분위기로  몰아가려는가 우리는 꿰뚫어 보아야 한다. ‘거룩한 전쟁’교리나 ‘지하드’ 등은 종교와 정치를 잡종시킨 정치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는 언제나 그 정신이 맑고 밝게 깨어있지 않으면, 그런 정치적 이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스스로 ‘십자군적 멘탈리티’를 강화하면서 마치 진리파수의 군단인양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다. 역사이래 교통 통신 정보교환 증대로 인하여 명실공히 최초로 지구촌 시대가 열렸다.  21세기 세계종교들은 지난 ‘지역문화’ 역사기간동안의   옛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패러다임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셈족계 종교들이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종교적 갈등과 폭력의 원인제공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셈족계 종교 안에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성찰 할 필요도 있다.
  종교학적으로 세계종교를 크게 세가지 유형적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한스 큉/쥴리아 칭 공저(이낙선 역), 중국종교와 그리스도교(분도출판사, 1994), 11쪽-13쪽.
첫째 범주는 셈족계 종교로서 일명 예언자 종교들이라고 부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 범주는 인도계 종교로서 신비가 종교들이라고 부른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를 이 범주에 넣는다. 불교를 신비가 종교라고 칭하는데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신비적 특징은 우주적 실재 진리자체와 인간의 본성사이에 궁극적 일치를 주장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셋째 범주는 중국계종교로서 일명 성인(聖人)의 종교라 칭하는데, 종교의 구경목적을 성인이 되는데 있다고 보는 특징을 공유한다. 유교나 도교가 그 대표이다.
  그렇다면, 셈족계 종교의 특징은 모두 유일신 신앙을 지니고, 인격적 신관을 공유하고,  예언자들을 믿으며, 매우 강렬한 윤리적 종교로서 특징을 강조하고, 사후 심판과 영생을 믿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중동 아랍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원인이 종교적 원인이라고 본다는 것은 억지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논문에서는 그러므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갈등, 분쟁, 폭력문제를 고찰하는데 집중하도록 하겠다. 먼저 종교간 갈등과 폭력원인을 분석하고, 둘째 그 해소방안을 제시하고, 셋째 종교간의 평화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여성들의 역할을 모색하기로 한다.

[2]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의 원인

 종교간의 관계에서 특히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지닐 수 있는 태도를 세가지 패턴으로 범주화하여 배타주의,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라고 명명한 학자는 앨런 레이스(Alan Race) 이다. Alan Race, Christians and Religious Pluralism: Patterns in the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2).
가톨릴교회는 제2차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기점으로 하여, 그 동안의 배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완전히 포괄주의적 태도에로 공식 전환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참조.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발행, 제2차바티칸 공의회 문헌1992), 605쪽-612쪽.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신교는 대체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때문인지, 일부 진보적 교단의 입장을 제외하고서는 아직도 배타주의적 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종교사회학자 이원규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귀하는 타종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설문조사에서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개신교 신도수는 전체 개신교도 중 44%, 중도적 입장은 33%, 수용적 태도는 22% 로 나타났다.  이원규, 한국교회의 현실과 전망, (성서연구사, 1994), 272쪽.
요즘은 그 극성적 성향이 많이 수그러든 감이 있지만 , 1980-90년대 20년동안 기독교와 불교간의 커다란 갈등적 폭력사건이 10여건 이상이나 발생하였다.  기독교사상, 11월호 참조. 김경재, “종교간의갈등 현황과 그 해소 방안에 관한 연구”, 신학연구 42호, 2001년 12월( 한신대학교, 2001), 219쪽-257쪽. 참조.
이 글에서는 그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지 않겠다.  문제는 외부로 드러난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사건 못지 않게, 한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들 간에 종교간의 갈등문제로 심각한 가정평화가 파괴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한국 개신교도 사이에 특별히 배타적 태도가 강세를 이루고, 그 영향력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아래 몇가지를 지적 할 수 있겠다.
 첫째, 무엇보다도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19세기 말 선교사들이, 기존의 아시아 종교들 특히 불교나 유교나 민족종교인 동학 천도교등에 관하여 깊은 이해를 갖지 못하고  아시아문화 및 종교에 대한 정복주의적 선교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그들은 아시아 종교의 영성과 종교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복음주의적 선교사들이요, 그들이 복음을 전파할 당시 한국 민중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가 미신숭배나 잡령숭배에 머무는 무교적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19세기는 교회사가 라뚜레의 말처럼 ‘위대한 세계선교 시대’ 였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열정에 기여한 당시 19세기 서구문명은 ‘역사의 진보발전 사관’에 매몰된 시기였다. 개화, 개명, 문명화, 근대화, 기독교화는 동의어로 생각되었고, 그것은 기존의 모든 선교지 토착문화와 토착종교의 정복과 멸절을 의미하고 전제하고 있었다.
  둘째, 특히 한국 개신교의 보수주의적 선교신학 정책 중에서도, 근본주의 신학으로 훈련받고 파송된 선교사들의 가르친 ‘성경축자무오설’ 이 타종교를 전혀 포용주의적 입장에서 대하는 여유를 차단하고 말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적 말씀’이며  그 말씀을 문자그대로 믿고 받아드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신도들을 교육하였다.
  일단 성경무오설을 중심교리로 받아드리고, 성경을 인용하면서 타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권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 영적 감화력과 인생및 역사를 변혁하는 창조적 변혁능력을 지닌 경전중의 경전인가는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짧은 120년만에 세계 유례가 없는 급성장을 이룬 많은 이유 중에서 ‘성경한글번역 및 보급운동’,  ‘성경 사랑 제일주의’, ‘성경 많이 읽기운동’에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문자적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이 아닌 것이다. 성경말씀 각각의 문단과 문장은 그 말씀이 증언 선포되고. 기록 편집 전승된 ‘삶의 자리’가 있다. 그 ‘삶의 자리’를 무시하고 그 문장 하나하나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절대불변적 진리’라고 주장하면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감화를 받은 예언자, 사도, 지혜자, 교사, 종교시인등의 ‘해석학적 응답의 문헌’이다. 요즘 구미의 성경학자들이 다시금 은유적, 상징적, 실존적 고백서로서 성서읽기를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성경말씀을 왜 , 어떤 경우에,  무슨 목적으로, 어떤 청중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가 생각하지 않고서, 만고불변한 ‘교리적 진리명제’ 로서 해석해버리면 종교간의 갈등과 배타적 태도가 거기에서 싹튼다.
  셋째,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은 상대 종교에 대한 편견, 무지, 오해에 기인하기 쉽다. 앞서 언급한 첫째와 둘째 원인에 사로잡힌 개신교도들은, 타종교 서적을 읽을 리가 없고, 타종교 가르침이나 문화유적지를 열린 맘으로 돌아보기 힘들게 된다. 불경의 기초 경전중에 하나인 반야심경이나 법구경이나 금강경등을 읽어본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적 태도라는 자기 방어적 심리를 갖는다.
  인간은 ‘해석학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인간의 삶이란  ‘이해’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삶의 의미지평이 그만큼 넓어져 가고 깊어져 가는 정신적 삶의 성숙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유산은 한국사회를 그동안 지배하거나 이끌어왔던 불교, 유교문화재가 대부분이다. 만약 한국 개신교들이 타종교와 한국 전통문화를 계속 배타적 태도로서 대하고 경원시 한다면, 한국 기독교는 한국문화 속에 영원히 뿌리 박지못하는 외래종교로서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되거나, 종교생활 따로 일반적 삶 따로라는  정신적 삶의 분렬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음력설이나 추석 명절에 대체로 개신교도들이 문화적 갈등을 맘 속에 느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넷째, 더욱 현실적인 종교간의 갈등 폭력의 원인은 현실적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유래한다, 다시말하면, 현대사회는 종교들의 다양한 선교가 개방적이고, 종교집단은 구체적인 마을이나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지역주민을  자기 종교에로 이끌기 위한 무한 경쟁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무의식적으로 선의의 경쟁이나 협동보다는 상대방을 험담하고 비방함으로서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의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경쟁심이 발생한다. 이것은 마치, 경쟁 관계에서 있는 회사가 자기회사 제품의 시장점유율을 올리기 위하여 타사제품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은근히 부각시키는 심리와 비슷하다. 혹자는 신성한 종교를 말하는데 장사관계로 비유를 든다고 분개 할는지 모르나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는 많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해방직후만 해도 전체신도수 100만명 정도였고,  1980년대 최고 성장결과도 국민대비수 20% 정도인 것이다. 아직도 한국 개신교는 교회사적으로 말하자면 더 많이 전도해야 할 시기요, ‘사도행전적 시기’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지도자들의 마음은 타종교에 대한 이해 및 협동보다는 우선 타종교와  경쟁감정, 타종교 견제감정, 심지어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정이 앞서서 종교간의 화해 협력의 심성 확장을 저해하고 있는것이다.

[3] 종교간의 갈등, 폭력을 해소하는 방법모색

  한스 큉의 말처럼,  “종교간의 평화없이 세계평화는 없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사회는 지금 매우 심각한 여러 가지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사회계층간의 갈등과 인간성 황폐화가 급속도로 가속화 하고 있어서 사회의 건강도가 심히 위험상태이다.  정파간의 갈등은 이미 정치의 실종을 초래했고, 시민의  귀와 눈이 되어주어야 할 신문 방송 언론매체들이 사회목탁기능을 상실하고 소승적 이익집단으로 전락하였다. 민족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사회의 갈등조정도 심각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땅의 종교들이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하게 하는 일”에 복무하지 않고, 보다 더 넓은 종교통치영역 확보에 집착 한다면, 이 땅엔 종교간의 갈등과 폭력이 더 증대해 갈 수 있는 위험요소가 언제나 내제해 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가? 해법은 본질적 접근방법과 구체적 실천가능한 접근방법을 동시에 병행해 가야 한다.
  첫째, 본질적 접근 방법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각 종교들은 지구촌 시대의 문명전환기에, ‘해석학적 눈뜸 및 회심경험’을 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석학적 눈 뜸 및 회심’이란 종교적 진리체험 및 지식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진리들은 ‘문화적, 사회정치적, 언어적, 역사 경험적’ 제약을 받고있는 상대적 진리‘임을 인정하는 용기를 말한다.  특히 종교적 진리는 비록 문화, 역사적 제약을 받지만 ’절대체험‘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자기가 하늘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붓대롱으로 본 하늘만이 진짜 하늘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해석학적 눈뜸 및 회심’을 철저히 하면, 각각의 오늘날 세계종교들은 자기가 귀의하고 있는 종교의 특수성 및 고유성의 귀중함을 더 사랑하게 됨과 동시에   타종교에 대한 열린 개방성을 지니게 된다.  종교가 추구하는 구경의 진리는 언제나 우주적이고 보편적이지만, 구체적 종교인은 구체성을 통해서 우주적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 협력을 강조하다보면,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대한 충성심이나 고유성이 약화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염려는 부질없는 염려이다. 도리혀 정 반대이다. 자기가 귀의하는 자기 종교에 충실하고 깊은 신심을 가진 자만이 두려움 없이 진리의 광장에서 타종교인을 만나고 협력할 수 있다.
  이 ‘해석학적  눈뜸과 회심경험’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축자영감설’을 주장하지 않고서도 성경을 더 많이 사랑하고, 성경이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만인에게 전해준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해석학적 눈뜸과 회심경험’은 역사적 기독교와 교회사를 사랑하되 ‘예수그리스도 복음 그 자체’ 또는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와 직접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구별하는 비판적 자기 성찰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방법론적 해결방법으로서 타종교, 이웃종교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삶이란 체험과 표현과 이해의 연속동작이라고  빌헬름 딜타이는 말한적 있다. 사람은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을 첨부터 이해하기가 어렵고 경계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해하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서로 협력 할 수 있다.
  우선 목회자 양성 과정 신학교육 커리큐럼 속에, 종교사 및 아시아 종교들에 대한 심층적 과목을 설정하여, 기독교 성직자이기 전에 종교지도자로서의 자질과 교양을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 각 교단의 지역공과  평신도 및 중고등학교 교과과정 속에 한국의 이웃종교 역사와 그 공헌 및 현황을 소개하는 교육자료를 개발하고 실시해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각종 전파방송 및 텔레비 방송망을 통하여, 타종교에 대한 교육프로그램을 삽입하고 상호 성직자 및 신학자 교환초정 기획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셋째, 더 구체적인 갈등해소방법과 평화지향적 협력방안 증진책으로서 ‘교리중심적 접근’보다는 ‘일 위주의 접근’을 하는 것이다. 생명과 삶이 있고서 종교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우선 우리 현대인들의 삶이 얼마나 유기체적으로 서로 얽혀있는 삶이며, 상호 의존적 삶임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오늘 인류사회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각종 문제들은 어느 특정종교 혼자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도시빈민돕기, 사회소외계층 돕기, 북한 동포돕기, 생태환경운동, 평화통일 운동, 사회정의 바로세우기등을 서로 종교가 다른 사람들의 한데 뭉쳐 함께 일하다보면 상대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폴 니터를 비롯하여 종교간의 대화에 관심하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점은 이제는 어느종교가 더 바른 진리를 더 많이 지닌 것이냐를 경쟁한다는 것은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오직 경쟁을 한다면, 어느 종교가 더 많은 선을 실천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냐가 중요하며, 그것만이 종교의 진정성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4] 종교간의 폭력 갈등 해소를 위한 여성의 역할

  종교간 대화와 평화증진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참으로 귀중하며 큰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세계 고등종교들의 경전이 집대성되고, 그 종교적 교리나 직제나 제도가 형성되던 시기는 인류뮨명사에서 볼 때 가부장중심적 문명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예수나 붓다와 같은 위대한 종교의 진리의  첫 울림자 들은 가부장중심의 가치관을 초탈하였지만, 그 직제자들이나 경전편집과정에 참여한 당대 사람들은 첫 스승의 높은 영적 수준을 따라 계승하지 못했다. 그래서, ‘위대한 경전’ 그 자체가 문화사적으로 보면 ‘가부장시대의 해석학적 산물’임을 우리는 깨달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란 더디고, 쉬운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4장에 나타나는 사마리아 수가마을 샘가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사마리아여인의 의식을   분석해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철저하게 가부장중심의 당시 유대교의 희생자이면서도 그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 문화 속에  예속되어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인을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말씀 걸어오심’을 사마리아 여인은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다.  크게 보면 삼중적 도피장치를 분석해 볼 수 있는데, 인종과 성차별주의, 종교차별주의, 교리주의에 예속되어 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라는 반문은 저항적 반문일수 있지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라는 이중적 구조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거기에 유폐당한 한 여인의 심리를 본다.  “우리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라는 말 속에서,  자기가 속한 종교전통에 얼마나 인간은 집착하면서 정작 진리자체를 보지 못하는가 잘 나타나 있다. 그 사마리아 여인뿐이랴.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예루살렘, 로마, 멕카, 베나레스를 유일한 구원의 장소요 성소라고 우기는 종교전통에 메인 모습이 아닌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4:25)라는 말 속에 종말론 교리에 쇠뇌된 한 여인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예배하는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 예배해야 한다.

 첫째, 여성들은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자기 몸에 잉태하고, 키우며, 양육하기 때문에 ‘생명중심적 실재관’에  민감하다. 오늘날 종교의 위험은 종교들이 물상화, 제도화, 교리화, 조직화되어서, 종교본래의 유연성과  역동적 생기를 잃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캐나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은 제도화된 ‘종교’와 살아 숨쉬는 ‘신앙’을 구별해야 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역사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바르게 받아드리는 것이 예수를 잘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줄 착각하고 있다.
 교리란 신앙의  항해중  선장 설합 속에 넣어둔 나침반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살아 있는 신앙은 “정의를 실천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이 동행하는 것이다”(미가 6:8). 여성의 힘은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몸으로 살아내는데 있다. 한국 개신교 신도들이 빠져있는 교리적 기독교의 족쇄를 풀 수 있는 힘은 생명을 사랑하는   여성들로부터 나온다.
둘째, 여성들은 매튜 폭스(Matthew Fox)가 말하는 바처럼 생래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야곱의 사닥다리’모형의 삶을 원하지 않고 하께 더불어 춤추는 ‘사라의 원무’를 선호한다. 매튜 폭스(김순현 역), 영성- 자비의 힘(다산글방,1999)93쪽-140쪽.
이 마음은 정말 인류를 구원하고 이 미쳐버린 무한경쟁이라는 문명의 광기를 치유할 하나님의 치유능력의 손길이 될 수 있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야곱의 사닥다리’ 은유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속성을 지니는데  그하나는, 대지를 떠나서 천상에 오르려는 세상부정의 타계주의 영성이요 다른 하나는, 사닥다리 단계마다 한 사람만 설 수 있는 개인주의와  계급상승 경쟁 이라는  이웃을 배려 할 수 없고 협동을 거절하는 삶의 세계관이다.  그에 반하여 ‘사라의 원무’ 모델은 우리조상의 ‘강강 수월레’처럼 함께 더불어 춤추는 역동적인 인생관의 표징이다.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은 반드시, 무슨 각 종파 수장들의  종교협의회나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세미나 및 결의문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사회 ‘삼소회’ 사례처럼,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의 수녀들, 원불교 여성교무들의 모여 함께 노래하고 친교하고 봉사하는데서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필자는 ‘삼소회’의 책임적 지도자를 만나 항의조로 말했다. 왜 개신교를 참여시켜주지 않는겁니까 라고. 그 분은 대답하기를 몇차례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에 접촉했지만 무반응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를 적지않는 진보적 기독교 여성운동체나 교단에서는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삼소회’가 아니어도 좋다, 다른 목적과 동기에 촉발되어 ‘삼소회’와 같은 자생적, 자발적 실질적 종교간의 대화, 이해, 상호 배우기, 협려이 실천되는 모임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좋은 것이다. 기독교가 앞장서서 만들어가야 한다.
 셋째, 좀더 구체적인 제안을 해 본다면, ‘한국문화유산 바로 알기’ 개신교 여성단체 운동이 일어나서 잘 계획된 교육적가치와 영성신앙 수련적 가치가 충분히 고려된 각종교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한국불교에 대하여 무조건 조건반사적 거부 반응을 일으켜 오던 한 여성신도가, 유홍준의 ‘한국문화답사기’를 읽고나서 ‘배타적 태도’가 많이 달라지고, 그 품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성도 더 풍성해진 것을 본적 있다. 사실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위대한 종교적 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타종를 알면 알수록, 내 종교의 귀중함을 더욱 절감하게 되고 내가 귀의한 그리스도교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5] 에필로그

 종교의 본질은  이론이 아니고 삶이며, 계명중 가장 귀중한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의  핵심이다. 이 때 말하는 ‘네 이웃’이란 반드시 같은 종교를 믿는 ‘기독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인으로서,  그 맘의  씀씀이 폭을 좀더 넓게 가져야 하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 종파의 하나님만이 아니고 “만유 위에 계시고, 민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엡4:6)이시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신학 2002.가을(제 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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