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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의 학위논문에 나타난 바울신학의 중심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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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의 학위논문에 나타난 바울신학의 중심주제
          - 만우의 경건신학에서 영의 현존과 새 생명의 실재론-  

                                                    김경재(한신대, 조직신학)

[1] 한국 신학사에서 만우의 경건신학이 지닌 중요성

  만우 송창근목사의 탄신 100주년을 한해 앞둔 해였던 1997년에 뜻있는 분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된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조용하면서도 참으로 뜻깊은 활동을 펼쳐 하마트면 과거역사의 시간속에 묻혀져 한국교회사 교과서의 한 페이지만을 장식할뻔 했던  한국의 위대한 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기독교 경세가인 만우의 생애와 사상을 오늘의 역사 안으로 다시 부활시켜내는 큰 공헌을 했다. 그 일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지만, 그간 기념사업회를 중심해서 수고하신 모든 선배어른들과 관계기관의 책임자들, 그리고 만우선생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자신들을 위해서 마땅이 만우선생의  '정당한 한국 기독교사에서의 자리메김의 작업'은 기장교단을 넘어서 한국 개신교전체와 한국 근현대 종교사에서 연구되어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흔히 그동안 만우선생에 대한 연구가 늦어진 이유로서, 그분이 활동했던 격동기 한국 현대사와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인한  돌연한 납북사건으로 인하여(52세) 그분이  충분하게 당신의 사상을 단행본 저술서나 논문으로 남겨놓지 못한 '연구자료의 빈곤'을 한 이유로 말하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기회 짧은 기간의 연구결과, 만우의 생애와 신학사상을 밝히고 오늘에 재생시키기엔 충분할 만큼 1차자료와 2차적 증언자료가 있어서 '연구자료의 빈곤' 염려는 이제 아니해도 좋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요 철학자였던 콜링우드(R.G. Collingwood, 1889-1943)는 말하기를 "역사는 과거를 의식 속에 되살리는 학문"이라고 했으며, 역사가는 모름지기 "사건들의 뒤에 숨어있는 정신작용에 몰입하여, 과거를 역사가 자신의 경험영역 안에서 다시 해석함으로써 문화와 문명의 중요한 유형과 그 운동을 발견 할 수 있게 된다"고 갈파했다. 콜링우드의 역사철학자로서의 탁견은 우리가 만우선생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한 인간의 역사연구를 통하여, 그 분 개인사를 통해 드러난 놀라울만큼 특유하고 창조적 영향을 미친 목회자와 신학교육자로서의 가르침, 활동, 행동유형  뒤에 숨어있는 '정신작용의 근본 에너지 원천'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오늘강연의 목적이며, 만우 기념사업회의 근본 지향점이라고 확신한다.
  다시말해서, 강연자와 같은 젊은 세대 곧 직접 몸으로 만우선생을 대하지 못한 후대사람들도, 만우선생의  동역자들과 제자들과 교인들의 생생한 산증언을 통해 만우선생의 숨결과 체온을 가깝게 느낄수 있다: '유머에 능했고, 인정다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고,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김재준), '총명한 위에 다독하고, 다정한 위에 결벽한 사람'(김인서), '경건, 학문, 선교의 신학교육 이념을 정립하신 이'(김정준), '교계인사중 가장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하는 분'(강원룡), '불이면서 물이신 분'(박한진), '신학이론이 아니라 신학의 실상, 삶의 실상, 한국교회의 실상을 가르쳐 주신이'(김영수), '복음주의적 경건주의자'(민경배), ' 성빈과 화해사상의 민족목회자요 신학자'(주재용)등등 그밖에도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만우선생의  독특한 인격과 사상에서 울어나오는 그분의 향기와 잊혀지지 않는 언행을 전해주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러한 다양한 증언들이 말하는 바의 그 근저에서 만우라는 한 인간을 그렇게 추동했던  영적 에너지 원천이 무엇이었던가를 그의 학위논문 속에서  찾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만우의 언행과 그의 탁월한 영적 지도력은 그가 가지고 태어난 개인 심리적 유형과 능력, 그리고 그가 후천적으로 연구하고 노력하여 습득한 자질에 힘입은바가 적지않을 것이다. 그의 다정다감한 미학적 감성능력, 그의 인간을 사랑하는 휴메니즘적 기질, 그의 인간관계에서 갖는 포용력과 판단력,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특히 교육과정에서 엄격한 부성적 측면과 인애하는 모성적 측면의 절묘한 조화, 인간집단체의 조직력과 그 운용능력등등 실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능력을 스스로 함양하고 발휘하여 한국 개신교사에서 드물게 보는 큰 인물로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만우의 인격과 사상의 특징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여러 사람들의 표현들과 그가 지닌 천부적 재능들을 그 밑바탕에서 지배하고 영향을 주는 만우의 신학과 삶의 '근저'가 무엇이냐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우를   위대한 목회자로서, 경건신학자로서, 탁월한 신학교육자로서, 그리고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에큐메니칼 교계지도자로서 교파를 초월하여 오늘도 흠모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부재하거나  결여되어 있지만, 그 분 안에는 분명하게 작동했던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되찾아 한국 기독교가 쇄신되어야 한다는
시급한 시대적 요청때문인 것이다. 그에 대한 연구는 과거지향적 추모행위가 아니라, 오늘을 살려내는 활인신학, 생명신학, 영성신학을 그 안에서 되찾기 위해서 인 것이다.

[2] 만우의 학위논문의 구조와 그 논문의 성격   

 목회자나 신학자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박사학위논문'은 자신이 평생 씨름하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연구테마로 삼는다. 만우 송창근 목사도 그러했다. 1931년 봄, 미국 콜로라도 덴버시에 위치한 아일리프신학교에 신약학분야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학위논문 "유대적 개념 상에서 바울의 믿음에 의한 구원사상"속에 만우의 신학, 특히 그의 경건신학의 본질적 내용이 총괄적으로 나타나 났다.
  만우의 유고집(전집 제1권) 안에는 14편의 신학논문, 7편의 설교문, 9편의 신학적 엣세이, 그리고 성프란시스와 칼빈에 관한 글이 실려있지만, 그 모든 논문과 설교와 신학적 수필들의 밑바탕을 이루는 신앙적, 신학적 주춧돌은 그가 학위논문에서 주제로삼은 바울의 구원론 이다. 학위논문에서 밝힌 매우 독특하고도  핵심을 갈파한 개혁파신학전통을 이어오는 복음주의적 신학의 체험신앙적 근본고백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임재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혁신학이었다. 만우는 그의 학위논문을 이렇게 결론맺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기계적으로 혹은 외적인 것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     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 가운데 활동하     는 힘이다. 새로운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인과 부활하신 예수님간의 연합 안에서 찾아져     야  한다. 바울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이 근거하고 있는 핵심적 진리는 바로 성령의 임재     로 인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위 결론을 얼른 들으면, 늘 듣는 기독교의 강단에서의 설교 한구절이라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그렇다. 기독교의 영원한 복음진리는 언제나 '오래된 새길'이지 경천동지할 새로운 학설이거나 특수한 신학자가 주장하는 인기있는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위에서 인용한 복음진리의 근본명제가 신학운동에서, 강단설교에서, 기독교 선교사업에서,  목회현장에서 관철되지 않고 교묘하게 왜곡되거나 변질되어 있다는 엄정한 사실에서부터 모든 한국 기독교의 비극과 신앙의 변질과 쇠락의 뿌리가 있다.
  만우의 학위논문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총괄적 복음주의 신학정신에 비춰보면, 왜 만우의 기독교이해는 그렇게 생동적이고 영적 정열이 동반되는가, 왜 그의 신앙과 신학은 윤리적 삶과 실천으로 육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가, 왜 기독교신앙은 본질적으로 은총의 신앙이고 기도의 영성이어야 하는가, 왜 그의 신학은  사회구원을 지향하면서도 인간 영혼의 지성소를 통과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왜 복음은 새로운 구원에 관한 이론이 아니고 현실이요 실재인가, 왜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이면서 인간의 책임성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역설이 가능한가, 왜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조직단체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한 '새크라멘트' 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가 등등이  비로소 이해 될 수 있다.
  만우의 학위논문은 단순한 전문 학술적 이론을 논구하는 지적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1930년대 초기, 해외로 유학한 제3세계 교회지도자들이 제출한 학위논문으로서는 질적으로 매우 수준높은 우수한 논문이며, 학위논문인 이상 당당한 이론과 학술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만우는 자기의 학위논문이 차거운 머리의 작품이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전존재의 신앙과 지성이 혼연일체가 된 '신앙고백적 학위논문'임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위논문 서문을 닫는 말미부분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 논의의 목적은 교회, 기독교, 세상은 계속 변화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개념과 부     합하는 바울의 구원론에 대해 해석하려는 것이다. 나는 소위 정통 혹은 진보와 같은 어     떤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논문은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나의 내     적 신앙과 확신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동료들, 친구들, 부모님이 이런 관점       에서 본 논문을 고찰해주기를 바란다.

  만우는 위에서 말하기를 "이 논문은 학술적인 논문이 아니라 나의 내적 신앙과 확신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데, 사실은 학술적인  논문이면서도 논문집필자의 내적 신앙과 확신을 고백하는 논문, 곧 학문과 경건, 신앙과 지성, 아는일과 믿는일, 로고스와 파토스, 신학자와 목회자, 교의학과 윤리학, 존재와 행위가  함께 통전되어 숨쉬는 '진정한 신학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다.
  만우의 학위논문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에서 3장 까지는 바울의 용어해설, 사회·종교적 배경, 그리고 바울입장에 대한 기초적 연구를 다루었다. 제4장부터 6장까지는 본 논문의 성서신학적 교의학적 근거제시로서 '믿음' 내지 '믿음으로 인한'이란 말 뜻에 대한 철저한 논구가 이뤄진다. 마지막   제3부를 구성하고 만우논문의 독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론부분인 제7장과 제8장에서, '새로운 존재'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신학의 핵심본질이자, 기독교 복음신앙의 비의(秘義)를 다루고 있다.

[3] 바울신학의 핵심주제로서 그리스도·성령의  현존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탄생

 우선 만우의 학위논문의 중심주제를 따라가면서 그가 천명하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문제의 핵심을 간명하게 표현하자면, 정통적 기독교신앙 특히 종교개혁의 신앙전통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이란게 무슨 뜻이냐를 묻는 것이며,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바울신학의 핵심주제는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어 구원에 이른다"  (salvation with the Justification by faith)는 것인데,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칭함'(Justification by faith)이란 말 뜻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이신칭의'(以信稱義)로 인해 화해와 구원을 얻었을 때, 구체적인 신자의 생명 안에는  어떤 영적 혁명사건이 일어나길래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했다고 감히 선포하는가를 되묻는 것이다.    만우는  '이신칭의'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이신칭의란 범죄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총을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롬4:25, 갈 2:20). 이신칭의는 (i) '죄의 용서'와 (ii)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     아드려짐'으로 인해 실현되는데, 여기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는 하나님 아들의 영이 곧     증거이며 보증이다(롬8:15, 고후 1:22, 갈 4:6, 엡1: 13).

 위의 인용문에서도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 강단의 '설교내용'을 듣는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드려다 보면  강조점은 후반부에 놓여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은총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구원의 객관적 실재'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것이 관념이거나 원리이거나  단순한 신앙교리적 승인이 아니라  '현실적, 사실적, 역사적 실재성'으로서 인증되고  담보되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영의 내주,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철저한 '거듭나는 영적 중생사건' 이 현실적이고도 실존적으로 발생하여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임을 드러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우는 힘주어 말하기를, 바울의 구원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를 고백함과 더불어 기독자의 몸안에 영으로 임재하시어, 육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실질적으로 '영의 사람', '새로운 피조물'로서 변화되어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우는 말하기를 "바울에게 하나님의 영, 살아있는 그리스도는  실재(reality)이며 모든 실재중 실재이다"라고 말하면서, 영(pneuma)을  하나님의 현존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본다. 만우의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아무튼 바울은 칭의행위를 죄의 권세를 없애는 것으로, 또한 율법서가 아니라 성령 안에     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는 능력을 신앙인에게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 바울은 분명 율법의 행위 없는 칭의를  가르쳤지만, 결코 선행없는 칭의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만우는 바울의 구원론에서,  '칭의신앙' 이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사실'을 받아드리고 인정하는 심리적·지적 동의 이상의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칭의신앙' 곧 믿음이란 옛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실질적 능력이자  사건이며, 그 존재가 새롭게 영의 사람으로 변질되는 인간혁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열정적인 헌신의 사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 및 교제, 그리고 이웃에 대한 적극성으로 전인격의 변화, 도덕적 갱신으로 나타나지 않은 '칭의신앙'이나 '믿음'이란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과는 아무 관련없는  잡설에 불과한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그의 뜻에 대한 순종이며,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이자 고백이다. 만우는 논문 제6장 "믿음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장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은 믿음에 관한 바울의 사상이었고, 그의 종교였으며, 또한 그의     전(全)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에 있어 그리스도는 그의 사고를 형성하고 결정하는 자     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 바울에 따르면, 믿음에 의한 구원은 믿음을 지적 동의로 간주     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성령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훈     육된 순종이다(갈5:16).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전5:7).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그     것은 하나님의 관심에 자기의 뜻을 다시 바치는 것이다. 바울에게 기독교는 플라톤의       이상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이다.

 거듭거듭 강조하여 만우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이상주의자와 신비가들의  '관조'이거나, 형이상학자들의  '이데아적 관념' 이거나, 칸트적 도덕론자들의 '윤리적 당위론'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는 실재적 현실이며, 그러한 삶을 가능케하는 창조적 능력이며,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변혁하고 재창조하는 실천적 역동성이자 '실현된 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 만우의 경건신학은 주재용이  바르게 그의 신학적 계보를 지적한 대로  '개혁파신학전통'(The Reformed theological tradition)에 서있다. 개혁파신학의 특징은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강조, 하나님의 말씀의 강조, 성령안에서 성화신학,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교회의 회중공동체성강조, 그리고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윤리 강조등을 들수 있겠다.
  만우의 신앙론은 개혁파교회의 전통에 굳게서면서도 17-18세기 경건주의운동의 창조적 요소를 주체적 신앙 안에서 수용하였다. 아니 수용하였다기보다는 만우자신의 생동하는 신앙행태가 경건주의 신앙유산과 자연히 통하는 면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머리만의 신학이 아니니 가슴과 심장의 신학,  성령의 내적 체험과 삶의 변화, 교회의 경건성 회복과 복음전도의 열정, 생활신앙의 강조들이 그렇다.
  그리하여, 만우의 신앙론과 신학세계는 장로교 신학이 빠져들기 쉬운 교리중심적 신학, 외식적 형식신앙, 바리세적 도덕주의 신앙, 19세기 인본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경향성 등이 철저하게 경계되고 있다. 만우의 말을 한번 더 들어보자.

  비록 바울은 이상(理想)과 그것의 실현간에는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지만, 그들이     서로 대립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바울의 주장은 기독교인의 이상이 단지 꿈이나 바램     만은  아니라 곧 이루어질, 이루어 질수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 졌     다. 복음은 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선을 가능케하는 힘도 밝혀준다고 바울은 주장한      다. ...그가 '믿음의 삶', '영의 삶', 그리고  '새로운 삶'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모두 바     울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는 삶의 여러모습 들이다.... 바울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이      근거하고 있는 핵심적 진리는 바로 성령의 임재로 인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다는 것이다.

  만우의 경건신앙을 비복음적 경건주의자들과  구별하는 척도는 만우자신이 1934년 신학지남에 기고한 "조선인의 신앙을 논함으로서 성서적 신앙에 이르고자 함"이라는 논문 끝부분에서 피력하고 있다.  만우는 1930년대 당신 조선교계의  잘못된 신앙의 흐름으로서 보수적 정통파 신앙, 신비파 신앙, 자유파 신앙을 비판하고 나서 교계 일부에서 풍미하던 오도된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는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뜨거운신앙, 진지한 생활, 개인과 단체윤리의 책임성 자각,  순수를 추구하는 영적태도등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신앙운동을 일단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결정적 위험은 성화(sanctification)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의인(justification)을 잊거나 소홀히 생각함으로서 신앙이 주관주의나 감정주의에 흐를 위험이 있어서, 역사적 예수 안에 나타난 대속적 구원진리를 간과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만우의 일생을 뒤돌아 볼 때,  일제식민통치와 해방정국에서의 민족 분단과  동족상쟁, 교권투쟁 속에서 고난, 박해, 투옥, 감시, 가난의 질고, 건강의 투병,  유학시절의 노동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살고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와 신학교육 속에서 그가 보인 불퇴전의 용기와, 절망을 모르는 전진, 그칠줄 모르는 유머와 자유로운 신앙인의 품격, 신도와 제자훈련에서 엄격한 경건훈련과 탈속적이고 파격적인 자애로움등등 상호양립 할 수 없는 갈등대립적 요소들이 만우의 인격과 신앙과 신학 안에서는 그렇게 역설적으로 통전되는 비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순히 그의 갈고 딱은 인격도야와 도덕적 품격에서 오는 것일까?  
  만우의 자연인으로서의 인격의 힘 그 이상의 비밀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다름아닌 바울의 체험적 복음진리의 증언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와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이다. 만우의 언행과 사상에서 그 역설적 통전능력은 바로 그러한  '복음적 실재주의'(Evagelical Realism)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우의 멋과 자유와 용기와 지혜와 정열과 자애심이 거기에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갈2:20)는 것이 신앙적 단순명제가 아니라, 만우에게는 실재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4] 만우의 바울의 복음적 신앙론에서 본 오늘의 한국 교회  

 만우의 학위논문에 나탄난 바울의 구원론에서 강조하는 복음적 진리신앙은 그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1934년 『신학지남』에 기고한 앞서 언급한 매우 중요한 논문 "조선인의 신앙을 논함으로 성서적 신앙에 이르고자 함"이라는 빼어난 글 속에서, 목회신학적 맥락 안에서 다시한번 분명하게 나타난다. 필자는 감히 위에 언급한 논문을 1930년대 나타난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논문중 최고수준의 질높은 논문이라고 평가하고자 한다.
 논제가 말하듯이 1930년대 조선교회의 신앙형태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참된 복음적 신앙, 진정한 신앙의 표준을 제시하고 당시의 혼탁한 교계의  오도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그 만우의 비판은 2003년 오늘의 한국 교계에서도 똑같이 유효한 것은 어인 일일까?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세계적 신학자 폴 틸리히가 『신앙의 역동성』에서 말하고 있는  논지가 놀랍게도 만우가 앞에서 언급한 1934년 『신학지남』에 발표한 논문의 논지와 너무나 닮은 것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만우 선생의 글은  틸리히의 책보다 23년전에 쓴 신학적 통찰이요, 틸리히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교수로 옮겨간 것이 1933년 이었다는 것을 생각 할 때,  만우선생이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던 해는 1931년인지라, 폴 틸리히의 강연이나 글을 읽은 일이 없던 때이다.
  최고의 신학적 통찰과 영적 분별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은 시공을 넘어서 이렇게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음을 발견하고 한국이 낳은 자랑스런 신학자 만우선생에 대한 존경과 자긍심이 후학들에게 너무나 큰 것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만우의 격조높은 논문내용을 소개하기 위하여,  폴 틸리히의 위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곁드려서  말하고자 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진정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전인간의 전적인 헌신과 궁극적 관심을 동반하는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의미'에 붙잡히고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격성은 흔히 지·정·의(知· 情·意)로 삼분되어 기능적으로 나뉘어지는데, 신앙이 위의 세가지 인격의 일부기능과 동일시되는 때, 참 신앙은 왜곡되고 만다. 그리하여 틸리히는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이  변질되어 '지적왜곡'(intellectual distortion), '자유의지적 왜곡'(voluntaristic distortion),  그리고 '정서적 왜곡'(emotional distortion)을 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왜곡'이라는 말은 거짓이거나 이단이라는 말과는 다른데 '뒤틀린 것', '일그러진 것', '곡해된 것'을 의미한다.
 제일먼저 참된 신앙의미가 '지적 왜곡' 형태로 나타나면 어떤 신앙형태가 되는가? 대체로 기독교의 구원체험과 영적 신앙진리는  일정한 교의들, 교리체계, 신학체계, 및 신학적 명제들로 언표되는데, 그러한 신학명제적 진술들을 지식적으로 동의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마치 바른 신앙의 표징인양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들면 삼위일체교리를 받아드린다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을 인정한다든지, 예수의 인성·신성 양성론을 수용한다든지, 근본주의신학자들이 주장하는 5가지 근본주의교리를 받아드리면, 가장 올바른 신앙이 자동적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만우는 1930년대에 조선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 중에서 정통파임을 자처하는 수구보수적 기독교 집단을 매우 염려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지적 왜곡' 형태는 "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운동을 생명으로하는 은총의 신앙을 불완전한 인간의 지력에 의해 산출된 신학의 이론적 체계와 맞바꾸려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만우의 신랄한 비판은 수구적 보수정통파임을 자처하는 집단을 죽은 정통파, 껍데기 정통파, 신앙의 형식주의자, 신앙의 바리세주의자라고 혹평하였다. 그들은 경건을 삶으로 살지않고 신학이론과 정통교리로 대치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근위대라고 자처한다. 심지어 '밥벌어 먹는 직업적 정통파'들이 난무하여 형제를 이단이라고 피난하고 주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상습적 신학지식 외판원으로 전락한다. 오늘 한국 교계파가 난무하고, 이름도 모를 신학교 간판이 우후죽순처럼 범람하는 것은 신앙의 의미가 '지적왜곡'하여 일으키는 병증상이다.
  폴 틸리히는 신앙의 둘째번 왜곡형태로서 '자유의지적 왜곡'(voluntaristic distortion)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이 왜곡은 인간의 영적 신앙을 도덕적 행동, 사회복지활동, 인도주의적 행동, 십계명의 계율적 실천, 산상수훈의 율법적 실천, 경건주의 집단의  금욕주의 생활, 민족운동, 인권민주운동이라고 동일시하는 왜곡이다. 윤리적 실천을 외면하는 종교나 도덕적 책임성을 간과하는 기독교신앙은 종교나 신앙이라고 칭함받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도덕운동, 윤리행동은 종교와 신앙생활의 자연스런 열매로서 결과물 이어야하는 것이지, 그런 도덕 윤리운동 자체가 신앙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의 참 의미가  '자유의지적 왜곡' 형태로 변질이 되면, 인간 개인과 집단은 도덕적 바리세주의자가 되던지, 도덕적 명법을 준행하지 못하는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기학대증 환자 또는 자아를 긍정하지 못하는 병든 인격이 되고 만다.
  만우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논문에서    1930년대 조선교회의 둘째번 병폐집단으로서 '자유주의파 또는 신진주의파"임을 자처하는 지식인 엘리트그룹이 빠지기 쉬운 병폐를 지적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강한 인간 의식을 내용으로 하고 근대의 발달된 과학적 방법에 의해 움직이는 합리적이요, 자연주의적이요, 실증적이요, 공리적인 기독교신앙 입니다"라고 그 실체를 분석 폭로한다.
  1930년대는 조선 기독교가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론 새롭게 대두된 공산주의 운동에 의해 도전받으면서 농촌운동, 사회개량운동, 민족운동, 문화산업운동으로  많은  뜻있는 기독청년들이 노력하던 때이다. 만우자신이 생활개량과 민족애국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러나, 만우는 근본뿌리와 나무의 가지잎들이 뒤바뀌거나 혼동되면 않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요,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영혼의 만남의 사건이요, 인간 구원은 성령 안에서 육의 몸이 죽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사는 일이지, 외형적, 집단적, 사회제도적, 변혁의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틸리히는 참신앙 의미가 왜곡되는 형태의 세번째 사례로서 신앙의 '정서적 왜곡'(emotional distortion)을 들었다. 계몽사조를 지낸 서구사회에서 종교란 형이상학적 지식문제이거나 도덕문제라기 보다는 체험, 느낌, 감성, 정서와 더 깊이 관계된 문제라는 자각이 팽대해갔다.  19-20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오순절 신앙계열의 부흥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기에 심리적 감동, 열정, 심리적 고양체험을 동반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심리적 과잉흥분상태로 일시적인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심리나 개인심리의 '심리상담'이 곧바로 신앙문제의 본질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도들은 자신도 콘트롤하지 못하는 강력한 정동적(情動的) 체험에 휩쓸려, 자아의 책임적 판단이나 윤리적 책임성을 망실하고 열광주의운동단체나 광신주의 신앙운동에 휩쓸리는 신앙의 '정서적 왜곡'에 빠지는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만우는 위에서 말한 논문 속에서 1930년대 조선교회가 빠진 세번째 신앙위기로서 탈선된 '신비주의 운동'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부랑아'라고 까지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만우는 당시 탈선된 사이비 신비주의자들과 그 일파의 반복음적 신앙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탈선된 신비주의 파들은 종교적 주관주의에 빠지거나, 천박한  신인합일 경험 속에서 몰역사적이 되고,  사회적 역사적 책임윤리를 망각하며, 사조직 종교집회처소를 마련하여 재물을 탐하며,  한국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성숙을 저해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폴 틸리히의 명저 『신앙의 역동성』(1957)과 만우의 「조선교인의 신앙을 논함으로 성서적 신앙에 이르고자 함」(1934) 이라는 논문에  나타난 논지가 "참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갈파하는 신학적 논문으로서 얼마나 동일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그러한 만우의 신학적 통찰력은 바로 그가 그의 학위논문에서 갈파한 사도 바울의 '복음적 신앙론'에서부터 도출된 신학적 분별력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틸리히가 1950년대 후반기에 제시하고, 만우선생이 1930년대에 제시했던 참신앙의 지침이 오늘에도 여전히 더욱더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은 한국 기독교계의 현재모습이 외양적으로는 1,000만명이상의 교세성장을 이룩하고, 수많은 신학교와 신학자와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날로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으며  더욱더 한국기독교의 개혁을 우리사회와 역사현실이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맺는말

 만우의 복음주의적 생명신앙, 신앙의 실재론, 그리스도 안의 신비적 연합, 옛사람이  예수 십자가 안에서 죽고 다시 살림받는 신앙론은 20세기 전반기를 혜성처럼 살고간 한 선각자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오늘의 한국 기독교 교계와 신학계, 신학자와 목회자, 평신도들과 신학생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인 것이다. 만우의 신앙론, 특히 그의 학위논문에 나타난 바울신학의 중심주제에서 오늘을 성찰 할 때, 몇가지 과제앞에 우리는 서게 된다.
 첫째, 한국 기독교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만우가 강조하는 처방은 교회의 예배가 다시 예배답게 제자리로 돌아와서 예배자체가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우의 진단과 처방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길은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지는  길에서 찾아질 터인데 왜냐하면 "예배는 믿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교회의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드림이 참 예배인가? "근본적인 예배는 지극한 동경과 경건과 신비와 열정과 엄숙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고 역설한다.
 개신교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의 중심이  목사의 설교에 놓아져서는 아니되며, 예배에서 성도의 교제가 중요하지만, 예배시간이 교인들의 친교클럽 시간처럼 되어서는 아니되며, 예배에서 교회의 사회적 문제 증언이 중요하지만 정치비판이나 경세론을 펴는 시간이 되어서는 아니되며, 예배에서 신자의 윤리적 책임각성이 중요하지만 기독교 윤리강론시간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요, 생활신앙자요, 기독자다운 윤리적 삶을 강조했던 만우선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다시 순수한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점에 오늘 한국 교회지도자들은 주목해야 한다. 교회는 땅위에 서있는 하늘기관이기 때문에, 초자연적 실재이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과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영적기관이지 사람들의 냄세가 진동하는 '종교단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와 예배현실을 보라. 너무나 속화되고, 인간화되고, 사회화되고, 제도화되고, 교권화되고, 신학화되고, 그리하여 마침네 유명목회자의 사유화된 종교사업체가 되고 말았지 않는가? 그래서 만우는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기독교를 생명력 넘치는 복음적 구원종교로 복권시키기 위해서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자"고 역설하는 것이다.
 둘째, 만우의 복음적 생명신앙론은 모든 신도들에게 해당되지만, 한국 기독교가 다시 소생하려면 특히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순결과 순명의 신앙에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강조한다.
 만우는 귀국후(1933)에 쓴 글에서 말하였다. "의지의 순결은 오로지 자기 의지를 포기 할 때에만 획득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획득은 철저한 회개와 신앙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 마음의 옥좌에서 나의 의지를 쫒아내고 순결을 유지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즉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타락과 혼잡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종들의 열심히 지나치게 강해서 자기자신의 '영적 탐욕'과 '권력지향적 명예욕'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과 뒤섞어놓음으로서 자기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는 영적 기만행위를 비일비재로 하거나 아예 능사로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만우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성 프란시스가 청년시기에 주님의 소명을 받을 때 들은 하늘로부터의  영음 곧 "프란시스야, 내집이 허물어져가고 있다. 내 집을 수리해 다오"라는 주님의 부탁은 결코 화강암 대리석으로 짓는 교회당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란시스도 첨엔 그러한  의미로 알았으나 곧바로 영적교회로서의 '주님의 거룩한 몸' 교회가 속화되어가는 것이 교회의 무너져감 임을 자각하게 되어, 청빈·순결·노동·섬김이라는 제자직의 수도회를 결성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란시스를 사모하던 만우는 도미하기전(1926)에 『청년』지에 기고한 글 "침묵의 말씀" 속에서 "빛이여 내게로 오소서"라고 영혼의 절규를 한다.

   빛이여, 너무도 오랫동안 나는 그대를 기다렸나이다. 세상이 저마다 지껄이는 신조, 자      기가 말하면서도 알지못하는 교양,  듣기만해도 마음이 답답하기만 한 특수 종교의 신      학이 얼마나 나를 괴롭게하고 시달리게 했던가를 지금에 와서 나는 거짓없이 말 합니       다....빛이여 내게로 오소서. 지금 내게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나니, 이제는 빛이여 그      대만이 내게로 올 때가 되었나이다.

  만우의 경건신학, 혹은 신비신학은 프란시스와 어거스틴의 그것처럼 '빛의 신비주의'라고 말 할수 있겠는데, 다만 만우에게 있어서 그 '빛'은 단순히 신비가의 내면을 조명해주어 어둠을 내쫒고 환희와 자유를 선사하는 '내면의 빛'일 뿐만 아니라, 그 빛은 곧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하나님의 현존이기 때문에 창조능력을 동반하는 실재이며 초월적 인격이라는 점이다.  
  만우는 신학자였지만, 추상적 개념과 공허한 이론과 '식어진 잿더미'에 불과한 외국신학자들의 신학논문과 외국어를 인용하면서 그럴싸하게 꾸며놓는 신학지식인들의 '신학장사놀음'에 역겨움을 느꼈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자기도 믿지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책임못질 말들을 '말씀의 강단'에서 청산유수처럼 늘어놓고 거룩을 외식하는 직업종교인으로서의 목사직을 경멸하였다.
  오늘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들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혹자는 말썽부리는 교회내에서의  '정치장로'와 교회외에서의 '정치혼탁'에서부터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 만우더러 진단하라면, 오늘의 한국 교회의 혼탁과 속화는 전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일차적으로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영적 타락과 직무태만에서부터 온다고 지적 할 것이다. 순수를 잃어버린 것이다.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삶의 전부인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탕자들이 된 것이다.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심령이 어두어질 때 교회가 어둠에 휩싸이고, 그들의 심령에 세상적인 명예욕과 영적 탐심이 꽈리를 틀 때, 교회와 신학교는 하늘의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고 경건을 가장한 종교사업체로 전락하고 만다.
  셋째, 만우의 생명론적 구원신학이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 던지는 멧시지는 복음진리의 역설적 논리를 명심하여 서구학문세계의 '논리정합성'에 얽메이지 말고 역설적 진리체험의 특징이랄 수 있는 '반대의 일치'(coincidence of the opposites)에 투철하여 아세아적 신학, 한국적 신학의 성육화에 좀더 용감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의 생명적 진리를 말과 글로서 표현할 때, 우리는 언어의 제한성과 걸림을 느낀다. 그럼으로 많은 선각자들이 말하기를 기독교진리의 논리는 동일율(同一律)과 배중율(排中律)에 기초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도 아니고,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도 아니고, 차라리 쿠자누스의 '반대일치논리'라고 말해왔다. 반대일치 논리란 한마디로 말해서 역설적 진리체험을 표현하는 역설의 논리이다.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은 모두 역설적이다. "죄인이면서 의인이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다", "내가 나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다", "영광의 하늘보좌에 계신이가 말구유 안에 성육하신다", "순간이 곧 영원이다", "내가 약할 때가 곧 강한 때이다" 등등 심원한 기독교 신앙고백 체험은 모두 역설적인 것이다.
  만우의 경건신앙이 딱딱하게 경직된 엄숙주의, 금욕주의, 도덕주의로 전락하지 않고, 동시에 자의적인 자유분방한 인본주의에로 떨어지지도 않고  자유와 멋과 유머를 담지할 수 있는 비밀은 그가 기독교신앙의 논리를 '반대일치의 역설의 논리'로서 파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만우는 앞서 인용한 1926년의 글 "침묵의 말씀" 속에서 '일즉다'(一卽多)의 역설적 논리를 펴되, 긴긴 동아시아적 범신론과 동일철학(同一哲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서적 유일신 신앙 관점에서 과감하게 차용한다.

  모든 것에 내재하고 모든것에 편재해서 모든 것을 가치잇게 하는 종교생활이란 것은 하     나  (一)의 경지를 밟는 생활을 가리킴니다.....상대가 있음으로 인해 취급받는 하나가 아     니요, 홀로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존재와 권위를 자증(自證)하는 하나입니다. 피와     눈물이 있는 하나요 생명이 약동하는 하나입니다.....절대의 하나는 결코 고립하는 하나가     아닙니다. 일체를 포용하고 일체의 굳은 터가 되는 하나입니다. 수학상의 하나가 아니요     절대의 하나는 일즉다(一卽多)의 하나입니다. 절대의 하나가운데 만유가 살아있고 그 속     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귀하게 여김을 받고 그 품 안에서 길러집니다. ...이리하여 일체     의 다(多)는 일(一)로 말미암아 살고 일(一)은 또다시 다(多)로 말미암아 삽니다. 일(一)     은 다(多)를 살게하고 다(多)는 일(一)을 살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一)과 다(多)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맺어져 있습니다. 일(一)을 떠난 다(多)는 생명이 없고, 다(多)를      떠난 일(一)도 생명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하나님은 사람으로 말     미암아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우리의 생활은 죽은 생활이요, 사람이 없는     하나님의 생활 또한 뜻없는 생활입니다.

 좀 길게 인용했지만, 위 인용문은  만우의 진정한 신학의 역동성과 생명력, 그의 경건신학이  왜 서구 근대경건신학과 다른 색깔을 나타내는가의  비밀, 철저한 하나님중심· 성령중심·예수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분이 그렇게도 기독자의 윤리적 삶과 책임적 참여를 강조했는가, 왜 그의 인품 안에는 '불이면서도 물'인 양극성이 내재하는가의 신비를 푸는 열쇄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만우가 아닌 다른 신학자가 위와 같은 말을 함부로 발설 했다면 그는 당장, 기독교신앙을 동양사상 속에 섞어놓고 훼손시킨 '종교혼합주의자",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同役)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적 아르미니안 신학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한 신학자,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차이'를 부정하는 반개혁신학 주창자등등 온갖 비방이 그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우는 종교혼합주의자도 아니요, 범신론적 신학자도 아니요, 아르미니안 주의자도 아니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모르거나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차이를 부정하는 그런 가벼운 신학자가 아니다. 그를 비방하는 그 어떤 신학자보다 그는 더 정통적 신앙의 소유자이다.  만우가 말하려는 신앙의 논리는 오직 '역설적으로서만' 기독교신앙은 생동하는 산 신학적 표현을 얻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고백하는 자만이, 만우처럼 '반대일치의 역설의 논리' 위에서   '번역신학'이 아닌 주체적 한국신학을 수행하는 용기를 지닐 것이다.
  신학만이  아니라 신앙도 마찬 가지이다. 혹시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영광이 손상되거나 가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인간의 자유·인격적 책임성·해석학적 참여의 분깃을 부정하고 묵살하여 인간학대증을 보이는 사이비 신본주의자들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초월적 독대군주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요, 말구유에 성육하신 복음의 신비를 영원히 이해 못하는 '초자연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다.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분"이다(엡4:6) 20세기 전반기의 격동하던 민족수난기를 살고가셨던 만우의 신학이 오늘 21세기의 한국 신학자들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성서적이고, 더 복음적이고, 더 역동적이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확신하면서 '주체적이고도 복음주의적 한국신학형성'을 꿈꾸던 선각자들이 남긴 사명을 감당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신학자들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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