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16 (09:36) from 80.139.175.11' of 80.139.175.11' Article Number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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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의 정치신학: 신학적 원리와 사회 정치변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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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준의 정치신학: 신학적 원리와 사회․정치변혁론1)
               -1970‘-80’년대 인권․민주화․평화통일운동을 중심으로-

                                                               김경재(한신대, 신학)


[Abstract]

       Theology of Politics in Kim Chae Choon: It's theological principle and socio-political vision for Korean transformation

This article is a study on Rev. Changgong Chae Choon Kim's theology of politics in terms of his Human Right movement & Democracy of Korea during 1970'-80' abroad in which he had worked as a representative of 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and reunification of Korea in North America.
His basic theological foundation for his engaging in the practical politics during 1970'-80' is rooted on his Christian conviction that the prophetic spirit and the Gospel have to be reponsible for this worldly social life because of the incarnational spirituality, the discipleship of Jesus Christ, and the committment on God's Lordship on creation. For Chae Choon Kim, the substantial messages  of the Gospel are the supreme human freedom based on Imago Dei, the social justice among human relationship, and the socio-cosmic peace in Biblical terms of Shalom.
The Rev. Kim has been assured that any power group which is against the democratic participation of people in the decision-making processes in any country will force that country into an inevitable state of terror, distrust, and dictatorship. For him, so called on the perspective of the ideological critics,  fighting for democracy, human right, and reunification of Korea against military powers of both North-South Korea must overcome both the present political systems of capitalism and communism. Although Christianity should not be identify the Kingdom of God with any political ideology on earth, the responsible Church must grope for 'the Third Way' something like 'Democratic Socialism' in which the individual human freedom, the social justice, and international-ecological peace are realized  in  ‘an approximate solution'(R.Niebuhr) of the unified Korea as a permanent neutral nation.

[1] 들어가는 말

이 연구는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 사상가들 및 목회자들의 지도자로서 만이 아니라, 기독교계를 넘어서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대표적인 재야 원로의 한분으로 큰 활동을 한 장공 김재준(1901-1987)의 정치사상의 신학적 원리와 참여적 실천정신을 추적하고, 그의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활동과정 속에 초지일관하는 그의 정치신학사상의 핵심을 밝혀보려는 것이다.2)
논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는 이미 발간된 기초연구자료들 이외에도, 최근 연구자의 연구출장을 통해 카나다 토론토에 거주하시는 장공의 자녀들 가정에 보관중인 ‘미간행자료들’3)을 많이 참조하였다.
   장공의 정치신학의 이론과 실천적 행동에 관한 연구는 자연히 그의 삶의 괘적에 따라 다음 몇단계로 구별해서 살펴불 수 있을 것이다. (i) 해방정국부터 4.19혁명까지(1945-1960) (ii) 5.16군사혁명부터 유신헌법 선포에 맞선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까지(1961-1973) (iii)
북미주에서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기(1974-1983) (iv) 귀국후 타계시 까지(1983-1987)이다. 이상의 4단계중에서 이 논문은 특히 제3단계 곧 장공의 해외활동기간에 초점을 맞출것이지만, 그의 활동의 앞 뒤 연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i)과 (ii)단계도 간략하게 언급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그 기간동안 세가지 사항에 관하여 연구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첫째, 북미주 체류 10년동안 장공이 ‘북미주 기독자교수협의’(The Association of Korean Scholars in North America),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Unification) 북미주 본부, 그리고 ’민주주의 국민연합‘(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 북미주 본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
 둘째,  위 기관단체에 지도자로서 참여하면서, 부딪혔던 문제들 중 특히 북한당국과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민주인사들의 좌파 우파 중도파 입장들을 어떻게 조율해 갔으며, 장공의 북한관과  앞으로 남북평화통일의 일정에서 그가 이념비판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점이 무엇이었는가?
 셋째,  북미주 체류 10년간 그가 참여한 정치행동 중에서 일관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정치신학적 기본원리는  무엇이었는가?
 
[2] 해방정국 시기부터 한일굴욕외교 반대운동까지(1945-1965)

 2.1. 1945년 8월 현재 해방정국에서 새나라 건설에 대한 김재준의 정치적 비젼
 
 장공은 1945년 8월, 해방정국의 역사적 카이로스에서, 당시 남북한에 아직 아무런 국가형태의 정치조직이나 이념이 정립되기 전에, 아주 백지상태에서 한 기독자 지성인으로서의 「기독교의 건국이념」이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맨 머리 첫 문단은 바로 장공의 역사참여적인 정치신학의 기조, 그의 성육신적 영성신학에 기초한 현실변혁적 복음의 지향성, 그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대승적 기독교이해, 그리고 그의 생에 말년에 나타난 정치신학적 화두인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사상의 배아가 이미 그 논문 첫 문단 속에 다 나타나 있는 것이다. 위 논문의 첫 문단을 아래에 인용해 본다.

   기독교인의 최고사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사회에 여실(如實)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래세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      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생활에 군림하      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부문(全部門)을 지배하였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사회(全社會)에 침투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세계에 까지        생생발전(生生發展)하여, 우주적 대극(大極)의  대 낙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      님의 나라의 전모(全貌)인 것이다.4)
   
「기독교의 건국이념」논문속에 나타난 장공의 정치신학 사상의 기본내용을 일곱가지 테제형식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테제1. 기독교의 최고이념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전인류는 하나의 유기체적 일체이다. 하나   님의 나라란 통시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하고, 현실세계와 영적 초자연계를 다   포함하고 통전하는 대우주적 생명유기체로서 생명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햇빛   처럼 지배하는 현실생명계를  말한다.(전집,1권, 159-160쪽)
 테제2. 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정의․평화․진리가 충만한 생명의 나라인데, 개    인적․집단적 인간죄악의 결과로 인하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명공동체가 파괴되었고 위    협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 원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인간공동체 속에 합법적     정치조직과 정치적 권위의 필요성은 일반은총의 질서 안에서 긍정되어야 한다.(161쪽)
 테제3. 모든 권위의 근원과 최종적 소재는 하나님이다.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땐, 관료주    의 정당, 민주주의 국가전체로서의 인민, 전국민의 총의의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무제약적    권위를 주장함은 잘못인데, 그것들도 인간의 유한성과 집단적 죄악성에 물들어져 있음      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동등시 될 수 없다.(161쪽)
 테제4. 새롭게 형성될 근대국가 정부로서 최소한도의 필요충분조건은 신앙과 예배의 자유,    사상․ 언론․집회․출판의 자유, 개인양심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부이어야 한다.(163쪽)
 테제5.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정치경제적 사회모순을 밝히고 개선    하려는 노력인한 기독교는 그들의 노력을 수락해야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    이념이나 체계가 개인의 신앙․정신적 가치세계․사상의 자유까지를 간섭통제하려 할 때    는 용납할 수 없다. (163-164쪽)
  테제6. 국제정책면에서 우리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영세중립국이어야 한다. 어느라라도     침략하지 않음과 동시에 어느 나라에도 모멸을 당치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되     기 위해 국민전체 문화정도를 세계수준으로 높이고, 의무징병과 의무교육을 시행해야 한     다.(169쪽)
  테제7. 새 조선의 건설에 있어서 지녀야 할 가장 주요한 맘의 자세로서 두가지를 명심      할 것인데, 그 한가지는 우리는 모두 조선사람이라는 일치점을 중시해야하고, 모든 일을     도모하고 사상운동을 하더라도 조선국을 위해서 한다는 민족의식을 견지해야한다. 그리     고 정체(政體)의 결정, 헌법의 제정, 정부수반자의 선정, 입법등이 모두 철저한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인민총의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176-177쪽)

이상의 일곱가지 테제를 통해서 필자는 남북한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 어떤 국가형태와 정체(政體)와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 당시 한국 그리스도인 중에서 최고지성의 한 사람인 장공의 맘 속에서 그려보는 새나라 건설 비젼의 골격을 대충 간추려 보았다.

2.2. 해방에서 제1공화국 붕괴에 이르는 김재준 정치신학의 한계
 
  김재준의 개혁교회전통에 뿌리를 둔 칼빈신학적 정치신학로선과 그의 성육신적 영성신학은 본래부터 이론상으로는 역사현실참여라는 진보적 신학로선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의 역사현실참여라는 신학은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실질적인 정치권력의 역학관계와 그 힘의 왜곡된 사용에 대하여 적극적 발언과 저항운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해방정국 이후부터 4.19학생민주혁명이 일어날 때까지(1945-1960) 그의 역사의식은 현실참여를 배제한채, 서재의 학문으로서, 기독교 지성인의 이론으로서 결국 기독교계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서, 그가 현실적으로 부딪힌 장로교 교단내의 신학로선 논쟁과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이나 교역자를 장로교 ‘보수정통신학’의 이름으로 축출하는 비신앙적, 반지성적  교권의 횡포에 맞서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 기독교를 바로세우는 기초사업이라고 확신하였다.5)  바른 신학정립과 열린 복음의 자유정신의 확립을 통하여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바로 세워지고,  교회와 기독교가 바로섬을 통하여 신생 독립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김재준 역시 시대의 아들인지라,  정치현실로 드러난 남북한 분열상황 속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그로하여금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권력현실 속에 내포된 정치적․도덕적 죄악과 그 결과로서의 대파멸의 재앙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간접적 원인도 있었다.  가깝게 모시던 한국신학대학의 학장과 이사장을 지낸 함태영씨가 비록 실권없는 이름뿐이었지만 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점도 장공의 비판적 이성을 무디게 만들었다.  초기 남한의 군정시기에 군정당국의 협조를 얻어 일제종교의 몰수재산인 천리교 건물을 인수받아 동자동 신학교실로 사용하였다는 마음의 빚진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25 전쟁을 통해서 그가 체험한 무력적 공산주의 혁명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강화되었다.  장공은  세속적 국가의 하나에 불과한 미국의 오만, 그 제국주의적 흉계, 그리고 자국의 국익을 위해 제3세계를 지배통제하는 미국의 야누스적 두 얼굴의 실상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3. 신학적 참회와 현실역사 의식에로 전환의 계기: 두 혁명과 한일굴욕외교

   역사현실의 모순에 대한 김재준의  깨어있지 못한 비판적 역사이성과 정치적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기능 침묵 속에서 15년간 정체되어있을 때, 그를 역사현실 현장에로 불러내며,  현실역사에로 그의 신학적 지성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계기는 바로 다름아닌 4.19학생의거와 5.16군사혁명 이었다.
   김재준은 박정희를 정점으로하는 군사구테타 군사정권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지 3개월이지난 1961년 9월, 대학총학장 년령제한을 60세로 한다는 군사혁명정권의 일방적 ‘지시하달’로 인하여, 졸지에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나게되고, 수유리 새로운 켐퍼스 신학교육의 도장에서 펼치려하던 꿈을 접고 그의 활동무대가 “신학교 켐퍼스에서 한국 역사 한복판으로” 옮겨지게 된다.
  구테타로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로서는 정치자금문제가 현실적으로 시급했다. 민주적 절차를 정당하게 밟아 정권을 획득하지 않았다는 박정권의 태생적 약점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나, 경제문제란 그 것 자체로서 경제논리란게 있어서 독재자 맘대로 움직여주지도 않고, 은폐할 수 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급한 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한 정권적 차원의 비리가 ‘사대의혹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네 박정권은 4년 군정연장을 선언하고(1963.3.16),  불법적으로 조직된 민주공화당이름으로 박정희씨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게 하고(1963.5.27), 관제로 동원된 민주주권의 탈취를 통하여 윤보선씨를 제치고 15만표차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5년의 ‘한일굴욕외교수립’이란  ‘한일국교정상화’의 명분을 내걸고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간의 비밀회담과 ‘김-오히라메모’에 기초한 것이었다. ‘김-오히라 메모’의 비밀회담의 핵심내용은 그 동안 1951년이래 양국간의 국교정상화 핵심 쟁점이었던 대일청구권문제, 평화선문제, 재일동포지위문제등에서 한국이 굴욕적 양보를 한 비밀회담 메모인 것이다. 기본조약체결 가조인(1965.2.20), 한일협정 제조인의 본조인 체결(동년6월22일), 그리고 계엄령아래서 한일협정안 국회통과라는 요식행위는 1910년 ‘한일합방’의 굴욕감을 민족에게 가져다 주었다. 36년 한민족의 독립투쟁을 위해 싸운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을, 은돈 삽십량에 예수를 쉽게 팔아넘긴 가롯유다의 야밤 범죄처럼, 경제적 기본재원에 쫒기는 군사정권의 자금필요성과 한일관계를 빨리 정상화시켜 동아시 정치질서를 미국의 계획대로 이끌어가려는 미국의 막후 거간꾼 노릇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굴욕적 한일국교정상화를 강행한 것이다.
  1965년 7월 1일, 김재준, 한경직, 이태준목사등 뜻있는 6-7명으로 작게 모인 교역자모임은 ‘굴욕적 한일국교정상화반대’ 시위에 뜻을 규합하고, 영락교회 안에서 여러차례 준비모임을 가졌는데 차츰 교역자, 평신도, 문인, 재향군인등 사회각계각층의 국민여론이 모아져 ‘한일굴욕외교 반대 성명서’를 내고 영락교회에서 종교집회형식을 빌어 한일굴욕외교를 비판하고 정릐롭지 못한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국민집회가 열렸다. 강사는 김재준과 한경직이었고 채택한 성명서 초안을 김재준이 맡았다. 대통령, 일본정부 및 국회, 미대통령과 국제연합본부등에 보낼 공개서한 작성위원이 김재준 책임하에 구성되어 문서가 작성되고 채택되었다. 그리고 대회는 삼엄한 군사정권의 감시아래서도 성공리에 개최되었다.6)
  1965년 7월 영락교회당에서   모인 ‘한일굴욕외교반대 대회’가 군사정권아래서 개최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첫째, 1919년 3.1독립운동 거사에 거교회적으로 민족문제에 참여했던 한국 기독교가 민족을 잊고 교파교세확장, 신학교리논쟁에 그 에너지를 소모한지 45년만에, 다시 민족문제에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역사적 시점이 된다. 둘째, 한경직, 김재준 등 기독교지도자들이 비록 교파가 다를지라도, 언제든지 민족문제에 있어서 맘을 허심탄회하게 열고, 한 마음으로 대동단결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셋째, 김재준은 본격적으로 역사현실 속으로 깊이 신앙적 고백행위로서 참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3] 삼선개헌 투쟁위원회와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중심한 참여적 정치신학활동             (1966-1973)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굴욕외교반대투쟁은 민족운동임에 틀림없지만, 김재준이 관여한 것은 교회당 안에서, 주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행한 제한적 참여정치신학 제1보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김재준의 이름이 한민족 대중과 언론인들, 그리고 정치인들과 군사독재자들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민주주의운동과 인권운동에 깊이 참여한 때부터이다.
  대한일보 사장이며 한양대학의 총장과 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연준은 평생동안 장공의 인격과 지조와 문필능력을 존경하고 어려운  난세에 김재준이라는 선비를 보호하고 돕는데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장공을 대한 일보 논설위원으로 모시었기에, 장공은 ‘신문의 날’에 고재욱, 홍종인 ,이관구, 김연준, 천관우등 원로언론인들과 한국 신문의 역할과 ‘한국신문윤리실천’문제들을 화두로 의기상통했다. 그러나 김재준을 본격적으로 ‘삼선개헌반대투쟁’ 대열로 끌어드린  사람은 장공의 오랜친구였고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과 장공의 제자요 사상계의 주필인 장준하였다.7)
  문제의 발단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박정희 씨가 국민과의 약속을 또 헌신짝처럼 버리고, 헌법에 금지되어있는 대통령3선 연임금지조항을 헌법개정을 통해서라도 바꾸고, 3차례 대통령 연임을 꿈꾸는 정치적 야망에 있었다. 그것은 영구집권 야욕을 드러낸 것이며, 민주주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헌법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태도였던 것이다. 함석헌, 장준하, 유진산, 이철승, 윤길중, 송원영등 주로 재야민주인사들과 야당정치인들이 주축이 되어,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기하고, 규약을 만들고, 대회를 소집하고, 각부서와 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사업프로그램을 작성하는등 구체적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인도 아니요 정치적 야심이라곤 전혀없는 순수 목사요 신학자인 김재준이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 옹립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원인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 민주주의 신념에 투철하고, 때묻지 않는 사회적 명망가로서 인격을 갖추어있고, 다양한 정치적 참여단체들의 구심점 역활을 하면서도 본인 자신은 정치적 야망이 없이 맘이 맑고 정치조직체를 갖고있지 않는 순수한 지도자을 찾고있었는데, 장공이 그 적임자로서 옹립된 것이다.  1969년 서울대성빌딩에서 ‘3선개헌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윤보선,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장준하, 김상돈, 유진산,유진오, 김대중,김영삼, 박순천등 재야인사와 야당정치인들, 그리고 김지하등 젊은 문인들이 군사정권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효창공원에서 범국민대회에는 자발적으로 6만명 이상의 국민대중이 모였고, 김대중의 정치강연등 사자후하는 정치인들의 연설에 민주주의 파수열기가 하늘을 덮었다.8)
   장공의 이러한 현실정치에로 참여는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계의 차거운 반응에 부딪혔다. 장준하, 박형규씨를 통하여 직간접으로 한국 기독교계가 민주주의 구국대열에 참여해주기를 호소했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소리’에 그치고 말았고, 최소한의 응답은 김관석 목사가 총무로 일했던 KNCC에서 보인 짧은 반응뿐이었다. 왜 한국 기독교계의 반응은 그렇게 속극적이거나  비판적이었는가?  그때 한국 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부분 동일한 변은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는가? 목사가 왜 정치집단에 참여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잘못이해한 ‘정교분리론’과 ‘성속이원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보수적 교회지도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수구보수정치 집단’과 ‘군부신흥정치집단’을 지지하거나, 침묵을 통해 간접적으로 불의한 정치행동을 묵인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야합하여, ‘정교분리원칙’이라는 형식론리 뒤에 숨어서 정치권력의 비호와 행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교파나 개교회 세력의 강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은 포기한지 오래고, ‘예와 아니오’를 말 할줄 모르는 종교집단이 되고 있었다.
  3선개헌이 불법적으로 통과되자, 민주세력은 거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1971년 4월19일 종로 YMCA건물 꼭대기 층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민주주의 수호대열은 점점 더 큰 강을 형성하면서 흐르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기에 김재준, 함석헌, 지학순, 이병린, 천관우씨가 공동대표위원으로 추대되었다.9)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수호하고 회복하기 위한 대정부 성명서,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투쟁하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역사는 진행되면서 대통령 3선연임을 허락하도록 개악된 헌법에 의거하여, 박정희씨와 김대중씨가 대결하였다. 선거결과는 박정희씨와 윤보선씨와 대결과정에서 드러났던 모든 선거부정들이 동원되었고, 결과적으로 박정희씨는   94만 6천표의 표차로서 가장 두려운  정적 김대중씨를 누르고 다시 제7대 대통령직을 거머쥐었으며, 김대중씨는 생명위협의 절박한 정치적 상황에로 내몰리게 된다.
  3선개헌도 모자라 박정희 군사집단은 아예 영구종신집권책을 강구하게 된다. 1972년 7월4일 돌연한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도리혀 국내정치적 상황은 “7.4 남북공동성명”이 천명한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나아가지않고 “국제정세의 변화와 남북대화에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1972년 10월17일 전국에 긴급조치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국회해산․정치정당활동금지․옥내외집회금지․언론출판 보도의 사전검열․대학의 휴교․군법회의를 연이어 공표한다. 마침네 1972년 10월27일 박정희 대통령 주제하의 비상국무회의 에서 ‘유신헌법안’을 의결하고, 계엄령아래서 동년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 국민을 동원 회유 협박하여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는 형식적 요식행위를 마무리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1970년초 20세기 후반 세계사 한 복판에서 독일 힛틀러 정권 때보다도 더 심한 무법적․탈법적 반민주적 정치행위가 이 땅위에서 자행되었던가 믿어지지 않을만큼 모골이 송연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국민협박 철권이 휘둘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열과 인권존중의 신념은 굽힐줄 몰랐다. 특히 한국정치사에서 한민족의 위대한 정치적 역량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목숨보다도 더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해가 1973년 이였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급조된 사이비 국민대의원회의에서 박정희씨가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이 땅의 민주세력은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움츠려들지도 않았다. 도리혀 적극적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도 젊은 대학생들과 문인들, 진보적 성직자들이 일어서서 항거하기 시작했다. 1973년 ‘남산부활절 연합예배’가 발생했던 해 여름 김대중씨는 한국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태평양 해상에서 수장될번 했다.
  나라의 어른들도 물러서지 않고  1973년 11월5일 서울 YMCA에서  ‘민주시국선언’을 했다. 천관우, 장준하, 함석헌, 김재준은 수시로 만나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 결과 긴급조치상황에서 불법집회와 불법선언문 발표죄로 김재준 함석헌등  나라 어른들이  종로경찰서와 남산 중앙정보부 연행되어 문초를 받았다.10) 동년 12월13일엔  YWCA 알로하홀에서, ’미주원로회의‘가  모였다. 앞에서 언급한 인물들만이 아니라 백낙준, 김수환, 한경직,이인, 유진오도 나오셨다. 청와대에 보내질 나라원로들로서의 건의서가 채택되었다. ’민주원로회‘ 사무국장으로 선임된 장준하는 ‘민주개헌100만인서명운동’에 들어갔다.11) 그 결과 그는 백기완과 함께 구속되었고, 그 뒤 끝네 의문사 당하게 된다. 1970년이후, 김재준은 거의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였다. 그는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활성화 시킬 계획을 가지고 1974년 카나다로 출국하게 됨으로서 국내에서의 활동은 10년간 중단되게 된다.

[4] 북미체류 10년간 장공의 역사참여 신학운동(1974-1983)

 장공은 네 번째로 가택연금상태의 신분제약을 받게되자,  국내에서보다는 해외로 나아가 세계기독교 교회의 네트웍을 통하여, 한국의 인권․민주․평화통일 운동을 펼치려고 결단하게 된다. 단순히 해외 기독교 교회세력의 덕을 보자는 생각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하고, 한국 크리스챤으로하여금 크리스챤되게 하려는 ‘전령자 역할’을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12) 그의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의식의 핵심을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다.13)
  첫째, 남한과 북한의 공통분모는 민중(people)이며, 민중은 남북한 정권보다 크고, 특정 집권자 개인을 우상화하며 그를  추종하는 정치집단보다 근원적이고 나라와 역사의 정치적 주권자이다.   둘째, 남북한 민중이 원하는 것은 세가지이다: 각개인의 자유, 정의로운 사회, 나라간의 평화이다. 자유, 정의, 평화가 기본적이며, 성서가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최소구성요소라고 보았다.  셋째,  현실적으로 남북한 현실집권자들은, 인민해방, 민주주의 신장, 사회질서 유지, 민족통일 달성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내심은 독재자와 그를 추종하는 정치집단의 권력유지와 권력강화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있으며, 그들의 통일론은 남과북을 자기빛갈 단색으로 색칠하려는 일방적 통일론이다.   
  넷째, 인간의 삶 자체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것인데, 사회가 근본적으로 ‘불의’ 와 ‘반인간’으로 치달을 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과 행동으로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고백행위가 된다. ‘아니오’를 말해야 할 때 거꾸로 ‘예’라고 아첨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비굴한 행동이며 윤리적 ‘외식행위’(外飾行爲)가 된다. 다섯째, 통일문제나 세계평화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의 존엄성’ 이 그 일차적 목적이고 최우선의 관심이어야 한다. 정치적 이념, 경제발전논리, 부국강병등 국가이익등을 앞세우게 되면 그것들이  인간자체를  비인간화하는 ‘우상’이 되므로, 인간존엄성이 제1차적으로 모든 민주화운동의 초점이 되도록 하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있는 것이오 인간이 안식일위해 있는 것이 아님과 같이 정치,경제, 문화, 사회정책, 언론등등이 모두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고 인간이 그런 것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장공이 북미주에 체류한 10년동안, 그가 더불어 관계하면서 활동을 폈던 조직기구는 크게 대별하면 4가지 기구조직이었다. 첫째는 토론토 한인 연합교회를 공간상징적 중심으로하는 ‘토론토 민주사회 건설협의회’와 『제3일』등 언론활동, 둘째는 ‘북미주 기독학자 협의회’(The Association of Korean Christian Scholars in North America), 셋째는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약칭, 민통, 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Reunification) 미주본부, 넷째는 ‘한국 민주화 연합운동’(약칭, 민주연합:UM, 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북미본부가, 그리고 다섯째는 ‘한국에서 인권을 위한 북미주 연합(약칭. 인권연합,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이 그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각 기구조직관계에서 장공의 활동과 책임 그리고 시시때때로 발표한 그의 논문 및 성명서에 나타난 그의  정치신학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4.1. 토론토 민주사회 건설협의회, 『제3일』과 『민주동지』 및 목요기도회

  장공이 북미주에 체류하되 카나다 토론토에 자리를 잡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당장 해외에 나가면 거주할 주거지가 있어야 하는데, 1969년 카나다로 이민간 두 아들내외와  먼져 카나다에 정착한 두 딸 내외와 손자들이 있어서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의식주 생활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14) 둘째, 토론토에는  사회참여의식이 뚜렷한 토론토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이며 뒷날 카나다 연합교회총회장과 토론토대학교 내 빅토리아대학교 찬슬러를 지내는 사위 이상철박사와  신앙동지들이 많았다. 특히 윌리엄스캇박사와 문재린목사등 오랜 신앙동지들이 큰 힘이 되었다. 셋째, 장공이 1950년대 전후 기독교장로회출범과 한국신학대학 건설과정에서 카나다 연합교회와 쌓은 인간적 신앙적 신뢰와 카나다 정부의 호의, 그리고 토론토에서 속간된 『제3일』과 『민주동지』의 발행을 돕는 전충림,전학필, 최성일, 그리고 민혜기를 비롯한 수많은 한신동문제자들이 많았다.  
  한국에 민주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북미주, 유럽, 일본등 세계 각지역에 ‘민주사회건설협의회’가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는데, 토론토지역에도 1974년에 “조국의 민주사회 건설을 촉진하고, 그의 완성을  효과적이며, 계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총칙 제2조) 카나다 토론토시에 본부를 두었다.15)문재린, 김재준, 이상철, 전충림, 전학필등 제씨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1974년 인혁당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 목요기도회가 시련을 당하자, 뉴욕,보스턴, 토론토, 와싱톤등지에서   한국인권와 민주화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여 구속자 가족들을 돕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였다.      
  재북미 한국인권위원회 간사로서 봉사했던 구춘회의 회고와 증언에 의하면,  1975년 세계교회협의회에 해외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한국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지지하고 돕기위해 조직을 구성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한국민주화 인권을 위한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 뒤에 International Christian Network로 개칭)이다. 처음모인 세계각지역  대표인사들의 면모는 김재준,이상철(카나다), 이승만(미국), 박상증(제네바), 오재식(일본), 장성환(서독)등이었는데, 이 조직은 각나라 그리스도인들의 국제적 연계망을 구축하여 조국의 인권과 민주화 및 평화통일 운동을 이념과 운동방향제시, 연락망과 정보교환, 운동전략수립, 국내 고난받는 민주인사가족 지원 및 인적자원의 조달등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16)
   장공은 카나나 체류 첫해가 지나가기 전, 1974년 10월 제1차적으로 심열을 기울여 한 일이 『제3일』해외 속간호 제1호를 낸 일이었다. 속간호 제1호를 간행한 부수는 800부였는데, 4년뒤엔 2,000부가 넘었고, 속간 60호를 마감으로 재정난등 원인으로 자진 정간되었다. 이 잡지는 단순한 종교적 개인월간지가 아니라, 실로 해외전지역에 1970-80년대 조국의 인권․민주화․평화운동을 이끌어가는 이념적 방향제시와 높은 도덕적․종교적 정열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발전소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종교적 영감과 문학적․ 미학적 단편을 제공하여 민주화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심신이 지치거나 메마르지 않게하는 오아시스역활을 했다. 이 잡지 『제3일』 안에, 특히 1970-80년대 속간호 60권 안에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이 녹아들어 표현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2. 북미주 기독학자 협의회

 장공이 카나다에 도착하자마자, 74세 노령의 피로를 풀기도 전에, 최초로 접촉하게 된 북미주 운동조직체는 ‘재북미주 기독학자 협의회’(The Association of Korean Christian scholars in North America) 제8연차 대회였다.  대부분이 박사학위를 가진 크리스챤들로서, 인문학,사회학, 자연과학, 신학등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대학, 연구소,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전문 지식집단이며, 연차대회때는 100여명이 모여 각각 전문분야에서 논문발표와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17)
  '북미주 기독학자협의회'의 조직체 성격이 조직될 첨부터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으로 동질인 단체는 아니었다.  1974년 4월 뉴욕에서 회집된 동협의회 제8 연차 대회에 장공 김재준 목사가 참석하여 이틀에 걸친 경건회 인도를 맡게되었는데, 첫째날과 둘째날 각각 ‘우상’과 ‘양두구육’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의 본문을 인용하고, 한국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의 무자비한 반인권, 반민주 행태와 독재정책을 구체적 사례를 들고 비판하면서 기독자 지성인들로서 시대적 증언의 사명을 고취하였다. 제8차연차대회는 ‘한국의 반독재 민주화를 요청하는 성명서’가 대회폐막시에 채택되고  동협의회는 북미주 크리스챤 학자들의 역사의식과 기독자 지성인으로서의 비판정신을 일깨우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 북미주 기독학자협의회에서 행한  군사독재에 대한 장공의 비판은 그대로 정보부를 통하여 박정희 최고당국자에게 까지 보고되어 중앙정보부를 통한 귀국조처지시가 내려졌으며, 장공은  쉽사리 한국에 다시 귀국하지 못하고 10년 북미주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치게되는 계기가 된다.  장공은 조국에 남은 자녀들과 친지 및 동지들에게 자신의 북미주에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비판적  정치적활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을 심적으로 고통하면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굽히지 않고 순회강연이나 교회강단을 통해 증언했다.  뉴욕, 와싱톤, 로스안젤리스, 샌프란시스코등지를 순회하면서 ‘증언자’로서 예어자적 사명을 다했다. 북미주 해외 교회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해외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정치의식이 반드시 진보적이거나 한국정치상황에 비판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리혀 보수적 교회들은 국내와 마찬가지로 친여적이거나, 정치무관심주의 및 부흥회적 심령주의 개인신앙이나 기복신앙에로 경도되어 있었으며, 한국 중앙정보부및 해외공관원들의 분리공작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장공의 북미주체류 초기(1974-1975),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북미주 교회와 민주동지들에게 보낸 공개편지 ‘회한(回翰)에 대신하여’(1975년 7월5일)는 그 당시 장공의  정치신학적 소신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아래에 그 편지 일부를 인용해본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당초부터의 숙원이던 일인독재 체재의 최후 완성을 위하여 국      민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고 봅니다. 국민은 이미 참정권을 박탈당했으므로 나라의      주권자에서 박정희씨 한 사람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자유한국의 최대 소망이요 영광      인 학생층은 학원의 병영화로 배속장교의 한 병졸이 되었습니다. 언론은 정보부의 한       관보같이 되었으며, ‘신문의 날’은 ‘신문 없는 날’로 몰락했습니다....그의 모든 시책은        시민자유의 말살과 국가권력의 독점에 집결된다고 하겠습니다. 학원자유와 언론자유의      봉쇄 또는 말살에 자신을 얻은 그는  이제 기독교교회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질식시      키는데로 공세를 돌렸습니다. 이것이 그이 자유민주 압살과 일인독재 완성을 위한 최후      돌격전인 것은 분명합니다.18)

장공은 공개회람편지 전반부에서 주로 박정희 군부 정치집단의 의도와 정략을 예표를 찌르면서 분석한후, 편지 후반부에서 기독자로서의 대응자세와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 장공의 정치신학 신념을 나타내는 구절을 인용해본다.

   한국민족은 자유를 갈망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챤은
   인간 자유를 위해 부름받은 자유인입니다. 역사는 인간자유를 위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역자의 주재자인 하나님은 진정한 인간해방과 자유를 위해, 그리고 정의와 진리와 사랑      으로 엉킨 인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독생자를 죽음에 내주기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      므로 개인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정병인 것입니다. 이것      은 승리를 약속받은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좌절이 용납될 시간도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승리가 지연된다고 중단이나 포기를 생각 할 수 없습니다....“We         shall overcome"은 공허한 소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신 구호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19)

위에서 인용한 화람편지 속에서 장공의 정치참여 행동이 단순한 ‘상황’에 몰린 처신행동이 거나 신앙인로서의 탈선이 아니라, 자유․정의․진리․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님나라 선취로서의 인간공동체 실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신앙적 응답행동인 것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공동체의 두 기둥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정의임을 갈파하고있는 것이다.  

4.3.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북미본부

 약칭 ‘민통’(民統)이라 불리우는 이 조직 기구단체는 장공의 북미체류 10년간 많은 심려와 에너지를 쏟아부은  기구조직이다. 본래 이 조직기구의 시원이랄가 뿌리는 김대중씨가 한국중앙정보부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전 그가 와싱톤에 체류할 때,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해외 정치운동의 거점으로 시작한 것이다. 먼져 미국 와싱톤과 일본동경에 기구조직을 만들고 김대중씨가 미국과 일본지부 모두 제1대 의장이었으나, 조직기구가 채 단단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김대중납치사건이 발생하여 ‘민통’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뜻있는 민주인사들이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북미본부’(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Reunification in North America)를 범민주국민운동 본거지로 도약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을 모으고, 헌장을 새로 만들고, 헌장통과와 새헌장에 따른 조직기구개편을 위해 1974년 11월23일 와싱톤에서 총회로 모이게 되었다. 장공은 이 민통총회에 원로로서 ‘축사’를 부탁받고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20)
 1974년 11월 23일 통과 발효된 ‘한민통’ 의 헌장은 제1장 총칙, 제2장 회원의자격, 제3장 조직, 제4장 재정 및 회계, 제5장 부칙등 총25조로 상당히 자세하게 구성되어있는데, 이는 그만큼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할 ‘민통’의 운영을 대비한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제2조 목적규정에서 “본 회의는 재미 한국인의 비영리 단체이며, 한국에 있어서의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촉진을 목적으로 한다”로 되었다. 제4조 회원의 자격규정에서 “한국국적을 가진자 및 가졌던 자와 그 배우자 및 직계가족”으로 규정하고 본회의 목적과 취지에 찬동하는자로서 타국적자는 특별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제7조 임원조직에 있어서는 의장(1인), 부의장(약간명) , 중앙상임위원(10-15명), 정책연구실장 및 위원약간명, 사무총장(1인), 사무차장(1인), 징계위원(위원장이하 약간명)으로하고, 임원의 임기는 1년으로하되 의장단은 1차에 한하여 동일 직책에 중임할 수 있도록 했다. 제21조엔 지방위원회는 중요도시 또는 지방에서 자주적으로 설치하여 본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부서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21)
  ‘한민통’ 재건총회는 이렇게하여 11월23일 오전 10시에 동원모 부의장 사회로 의사가 진행되었는데, 헌장이 통과 되고 ‘민통’의 대표적 상징인물인 의장선출에 들어갔다. 첨엔 무기명 투표로 회의를 했으나, 개표결과 다득점자들(김재준,임창영)의 사퇴고수가 이어지자 총회는 ‘장공’을 기립박수로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김대중씨와의 인연을 귀중하게 생각하여 ‘축사’ 책임을 맡기로 예정되어 참석한 장공은 참으로 난처했다. 거주지도 토론토이어서 거듭사의를 표명했으나, 북미주 ‘민통’이 해체될 기로점에 서있다는 회원들의 절박감을 감지하고, 이념적 성향에서 좌․우․중도파들의 갈등을 조화시키고 이합집산을 막기위해 장공은 의장직을 수락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민통’초대의장이었던 김대중씨는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고, 부의장엔 이용운,동원모, 그리고 고문에 김상돈, 전규홍, 안병국, 이재현, 송정율, 김성락, 최석남이 추대 되었다.22)  
  새로 구성된 ‘한민통’은 김재준 의장이하 임원진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북미주 한국인의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운동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민주세력들의 힘의 결속과 정보교류 및 성명서발표를 그때마다 적시에 발표하였다. 워싱톤과 뉴욕의 미국정치중심지에서 몸으로 행동하고 참여하는 데모를  통하여 북미주 한국인과 고국국민들의 진의가 무엇임을 천명해갔다. 장공이 ‘한민통’ 의장직 중임을 맡았던 시기(1974.11-1976. 8)에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동아일보기자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광고탄압사건’(1974,10월, 12월), ‘장준하 약사봉 의문사 사건’(1975.8.21), ‘3.1 민주구국 선언사건’(1976.3.1)등 중요한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북미주 ‘한민통’은 바쁘게 움직였다. 국내의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접하고, 전(前)대통령 윤보선을 비롯하여  함석헌, 정일형, 김관석, 윤반웅, 안병무, 서남동, 이우정, 김대중, 은명기, 백기완, 이문영, 문동환이 대표로 서명한 동 선언문은 박정희 군부독재를 격노하게 만들었고, 구금 투옥하고 재판에 넘겼다. 김재준을 중심으로한 ‘한민통’ 임원들은 (i) '3.1민주 구국선언문‘을 곧바로 영역하여   미국조야와 세계자유우방 민주주의 국가지도자들에게 알렸다. (ii) 동 ’선언문‘을 적극 지지하는 해외민주단체로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iii) 미국 국무성, 팬타곤, 상하원의 지도자들을  방문하고 한국의 인권 및 민주주의 위기를 알리고 미국의 대외정책이 독재정권을 지원하지 않고 바르게 수행되도록 촉구했다 (vi) 프레이져 상원의원을 면담하고, 미국상원 국회 의사록에 프레이져의 발제연설과 영역된 ‘3.1민주구구선언문’이 첨부되도록 했다. (v) 뉴욕타임즈와 와싱톤 포스트지등 미국 신문 방송등이 한국의 인권상황과 정치위기를 똑바르게 인식하고 바르게 보도하도록 촉구하는데 노력했다.23)
   1976년 3월17일엔 미국상원에서 ‘프레이져 청문회’가 열렸는데 ‘미국내 한국중앙정보부(KCIA) 활동실태’를 파헤치는데 집중되었다. 이 청문회에서 그레고리 핸더슨과 도날드 레이나드의 증언은 미국조야로하여금 한국 군사정부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4) ‘3.1민주구국선언’은 3.1절 57주년을 기해 서울명동성당에서, 한국의 재야지도자들과 민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일체의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봉쇄되었던 유신군부독재시대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발표되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선언문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정신은 자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강조하되, 진정한 민주주의란 ‘국민에게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참여적 민주주의라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담보하는 주권재민 국가로서의 국민 기본권으로서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확립, 의회정치의 회복,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했다.
  ‘3.1민주국선언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결속을 한층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민통’ 의장 김재준을 비롯하여 김상돈, 한승인씨등 고문단, 문재린목사를 중심한 기독교 지도자와 신도들, 북미주 재미 한인들 약 250여명이 ‘3.1민주구국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의 이름을 가슴에 붙이고 죄수복을 상징적으로 입고서, 와싱톤 D.C, 백악관, 국회의사당, 한국대사관앞에서 시위를 했다.25)

4.4 한국민주화연합운동(UM, 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 북미주 지부

  장공이 북미주에 체류하는 동안  깊이 관여하고 활동했던 또하나의 기구조직이 ‘한국민주화연합운동’ 북미주 지부였다. 1975년 7월5일, 한국 국내 민주세력은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도, 윤보선, 함석헌, 지학순, 문익환, 문동환등을 중심으로하여 ‘민주주의국민연합’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이 조직은 문익환, 문동환등 실질실무를 담당 할 인물들이 구속됨으로 말미암아 해외 각국에 성립된 지부의 활동을 통해 전개되었다.
  장공은 1978년 7월7일 뉴욕으로 날아가 그곳의 민주인사들 김정순, 임순만, 김홍준, 한승인, 김정순, 선우학원, 이승만, 손명걸제 씨와 회동하고, 한국의 윤보선씨와 직접통화하여 ‘UM'에서 ‘민주주의국민연합 북미주 지부’사업을 겸하기로 동의를 얻었다. 목적이 같은 데 다양한 기구조직을 새로 구성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민주역량의 분산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장공이 북미주에서 체류하는 10년동안 그의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은 여러 가지 사회정치조직과 기관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지만, 그대표적인 기구조직이 앞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한민통’과 ‘UM' 이었다. 그런데, 1980년 전후시기 해외 민주화 평화통일 운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한의 민주화를 먼져 생각하고 방법론적으로도 남한의 민주역량제고에 일차적 운동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선민주․후통일‘그룹의 민주인사들과, 민주화가 진척안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분단현실에 있음을 강조하고 ’통일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친이북 민주인사들과의 견해차이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늘 긴장갈등을 야기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북미주나 유럽에서 친이북 민주인사들의 정치이념이 친공산주의적 이라거나 좌파이념 추종자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민주화와 남북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 북한과의 보다 밀접한 연락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북한당국의 초청에 응하여 북한방문과 남북한 학자․민주인사․사회단체대표․정당대표자들의 범민족통일 대회에 적극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그룹이 있었던 것이다.  북미주 민주화 평화통일 운동과정에서 북한관계에서 보다 적극적이고도 개방적 입장을 취한 대표적 인사들은 선우학원, 홍동근, 강위조, 이화선등 제씨였다. 선우학원박사는 그의 팔순 기념문집 『민족통일의 비젼』(1997)에 기고한 논문 「남과 북의 통일론 및 해결책」이라는 글에서 1970년부터 1995년까지의 남북한 통일논의 과정과 북미주 민주화운동과정에서의 전략전술상 그리고 이념의 진보성에서 차이를  대체로 솔직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26)      
  선우학원박사는 위에 언급한 논문에서,북한 당국이 1960년대 부터 주장하기 시작하여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김일성주석이 발표한 ‘연방제방안’을 대체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드리면서, 남북평화 통일의 방해물로서 남한의 다국적 기업과 그와 관련된 한국의 독점기업, 군사정권의 사회경제정책, 그리고  남한의 이념충돌상황에서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 태도를 꼽았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지도자인 한경직, 김재준, 강신명등이 모두 1970년대까지 반공주의자들이었으며, 김재준이 카나다에서 민주화투쟁을 하는동안 이념적으로 유연성을 회복했으나, 보다 적극적 태도를 취하지 못한 점을 비판적으로 아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공이 북미주 체류 10년간 앞서 언급한 ‘한민통’, ‘UM'기구조직의 의장,상임위원, 고문직등 중요한 직임을 가지고 대북관계에서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은 반공로선이라는 이념적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세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평화통일의 진전이 밀접하게 관련된 것임을 장공도 깊이 숙지하고 있었지만, 1970년말과 1980년초 남북한의 현실적 정치상황은, 남북당국자들이 체결한 1972년 7.4 공동성명서에도 불구하고, 각각 첨예한 남북대립과 적대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문익환의 평양방문(1989) 10년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1960-70년대 남한의 민주화 투쟁상황을 북한 당국은 ‘베트남의 정권붕괴’처럼 기대하면서 대남적화 통일정책을 완전히 청산하기전의 상황이었음을 장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인권․민주화 운동이 이념적으로 친북한적이 아님을 분명하게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둘째,  해외에서 조국의  인권․민주화․평화통일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중  한사람으로서 장공이, 선우학원의 권면대로 보다 일찍, 보다 적극적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남북한 사회단체 정당간의 교류연대운동에 참여했다면, 박정희 군사정권은 남한의 모든 민주인사나 진보적 기독교 민주운동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고 관제언론은 그것을 부추겨 그 피해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는 점을 깊이 감안해야만 했다. 장공은 실지로, 1980년 1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부주석이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이며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세가지 직함을 겸직한 김일로부터  ‘민족의 통일문제를 상론하자’는 초청장을 받은바 있다.27) 독자들은 1979년 3월 선우학원의 안내를 받아 제네바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장공의 참회에 가까운 그의 고백형식으로 접하고 있다.28)  
  셋째, 장공이 선우학원에 비하여 1980년전후 남북한 접근문제에 있어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은,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말하기 어려운 보다 정직한 그의 기독교적 정치신학신념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말하면,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북한의 국가권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만, 민족․주체사상․인민민주주의․노동계급의 해방․이상적 사회주의 국가 실현 등등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제시와 현실정치체계를 선전하더라도, 철저하게 개인의 인간자유와 인간존엄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지도자 개인절대화를 당연시하는 북한 체제는 당시 남한군사 독재체제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정치현실이라고 평가한다는 점에 있다.29)
   이러한 현실적  북한 정치의 의미와 평가에 있어서, 장공은 남북한 정치당국자들간의 정치협상과 대화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들의 실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과 ‘인간주의적 비판’에서 좀더 솔직했다 할 것인데, 그런 장공의 입장은 간접적으로  그의 동지요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이상철목사의 대북관계론에 대한 짧은 글에서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30)
  1979년 1월 등소평의 미국방문을 계기로하여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주본부’는 김재준을 의장으로한 7인의 상임대표위원이름으로 ‘통일조국에 대한 공개서한’과 미국 카터대통령, 등소평 중국 국가주석에게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1)  그 성명서의 기본정신과 내용은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주변국 4강의 국가이익을 중심으로한 현재의 ‘불안전한 분단 체재’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 한반도 통일의 주체는 한민족 자신이라는 것, 현 남북한의 독재정치는 지양되고, 통일형태는 영세중립국을 지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생각하고 연구한다는 것 등이다.

[5] 맺는말

 이상에서 살펴본 장공의 현실참여적 역사신학은 그의 정치신학이 무엇인가를 추론해내기엔 충분할 만큼 자료가 풍부하다. 물론 그는 『정치신학』이라는 표제의 전문적 서적이나 논문을 집필하지는 않았다.32) 그의 아호처럼 맘을 비우고 깊이 멀리 내다보는 세계관과 정치적 야심이 전혀 없는  맑은 인격,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간존엄성 파수에 대한 불퇴전 의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용기, 민족애에 대한 지극한 애정, 기독교복음의 예언자정신과 자유혼등이 하나로 어울려져서, 김재준은 북미주 체류10년간 주위의 수많은 정치학자들이나 민주인사들의 좌파․우파․중도파의 다양성과 긴장갈등을 하나로 묶어내는 중심축 역할 또는 창조적 용광로 역활을 수행 할 수 있었다. 장공의 정치신학의 입장을 아래에서 요약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첫째, 장공의 정치신학은 그의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해에 뿌리박고 있는데,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실재’로 나타나서 역사적․사회적 현실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로 변혁해가는 창조적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복음이 관계하는 창조세계는 역사초월적 세계이거나 몰역사적인 정신계나 영계만이 아니라, 그 다양한 피조적 실재계는 차원에 따라구별되면서도 분리할 수 없는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신앙과 성육신 신앙과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구원신앙은  ‘현실정치적 실재’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촉구한다.
   둘째, 장공의 정치신학은 개혁파교회전통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라는 기본축을 골간으로하고, 사회적 책임윤리를 강조하면서 우상타파적인 예언자적 비판정신을 강하게 담지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을 강조하는 칼빈적 개혁파 신앙전통은 역사속에 나타난 일체의 정치이념이나 권력구조나 체재를 절대화하는 ‘정치권력의 우상화’를 예언자정신으로써 타파함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한다. 신구약성경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자유․정의․평화가 입마추는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실현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상의 신학적 기본 위에서 그의 신학적 해석학을 정치현실에로 적응시킬 때, 어떤 명분을 내걸더라도, 인간 개인의 신성한 자유․ 정의에 입각한 평등한 사회질서․폭력과 전쟁수단을 배제한 평화(샬롬)를 침해하거나 찬탈한 어떤 정치적 권력이나 체재도 반신앙적이고 반인간적이기 때문에, 그런 왜곡된 정치사회현실을 타파하여 본래적인 건강한 인간공동체의 실현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기독자의 권장사항이 아니라, 사회윤리적 책임이요 신앙적 간증행위가 된다.
  넷째, 현실적인 정치이념비판 측면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한껒 보장하는 장점이 있으나, 정의에 입각한 평등한 사회질서의 실현이나, 폭력과 전쟁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국제적 경제질서모순을 극복할 수 없기에, 황금만능주의와 비인간화를 초래한다. 거기에 대한 비판적 반동으로 출현한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정치체재는 정의의 이름으로 평등한 사회질서를 줄수 있지만, 표현의 자유․양심과 신앙의 자유․출판 언론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사회와 정치권력의 집중을 통한 우상화를 초래하여 공동체 전체를 비인간화 시킨다. 해방이후 남북한의 분단은 세계냉전의 희생물이며, 남북 두형태의 정치체재는 그 실험의 실패요, 그 실패의 모순이 ‘6.25 한국전쟁’ 과 남북한의 독재정치체제 및 비인간화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남북한 정치체재는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지닌 사회로 초극 지양(止揚)되어야 할 잠정적 정치사회체재요 삶의 구조이다.
   다섯째, 기독교는 어떤 특정 정치제도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 할수 없을 만큼, 그 지향하는 비젼은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다. 그러나 현실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최선의 정치적 결단을 통해 라인홀드 니버가 말하는 바처럼, 복음이 명하는 절대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나라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구체적 결단과 정치체재의 선택을 탄력적으로 수행해야한다. 그러한 점을 고려 할 때, 한민족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세계정치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돌쩌귀’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스위스같은 ‘영세중립국’을 지향해야하고, 정치사회형태는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에 가까운 정체를 취하여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과 인류의 복지를 추구해가야 할 것이다.33)  
    위와 같은 장공의 정치신학적 비젼은 오늘의 남북한 정치현실이 모두 받아드리기 어려운 미래 한민족의 비젼이지만, 7.4공동성명(1972)․남북기본합의서(1992). 6.15남북 공동선언(2000)정신이 남북한에서 명실공히 준수된다면, 그리고 남북한 한민족이 경험한바있는 해방후 정치실험속에서 가장 귀중하게 보존해야 할 가치들을 상호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다면, 결국은 장공이 꿈꾸는 비젼의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도서]
1. 장공김재준 기념사업회 간행, 『김재준전집』,제1권-18권(한신대출판부, 1992)
2. 김재준, 『범용기』(토론토:칠성인쇄소, 1882)
3. 미간행 자료집; 근간『북미주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 사료집(1)』(한신대출판부)
4. 손규태, 『장공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대한 기독교서회, 2002)
5. 장공김재준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간행, 『장공사상연구논문집』(한신대출판     부, 2001)
6. 이상철 목사 고희기념집 출간위원회, 『한 나그네의 삶, 그의  꿈과 비젼: 심류이상철목사     고희기념 글모음』,(대한 기독교서회, 1994)
7. 강위조,홍근수 엮음, 『민족통일의 비젼: 통일의 선구자 선우학원박사 팔순기념문집』(푸     른기획, 1997)
8. 통일부, 『통일백서』(통일부, 2003)
9. Tillich, Paul, Political Expectation. ed. James Luther Adams(Harper & Row, 1971)
10. Tillich, Paul, The Socialist Decision(Harper & Row, 1977)


후주)

1)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2003 학년도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다.
2) 장공 김재준의  장치신학에 관한 연구는 그동안 조금씩 진행되어 오고 있다.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개정판 (다산글방, 2000), 231쪽-262쪽./ 주재용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풍만출판사, 1986),제3부, 한국기독교역사와 장공사상.131쪽-265쪽./ 장공기념사업회간행, 『장공사상연구논문집』(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제4부, 401쪽-472쪽./ 손규태, 『장공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대한기독교서회, 2002)등.
3) 장공이 1974-1983년까지 카나다에 거주하면서, 북미주 민주인사들과 함께 활동한 각종 활동자료와, 1970년대 북미주, 일본 및 유럽에서 이뤄진 한국의 인권․ 민주주의․평화통일 운동에 관한 기초자료의 발간은 한국 국사학계, 정치학계, 그리고 사회학계에서 주목을 받아야하고 일부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연구지원을 받아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한국의 사회․문화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라는  주제로서 연구활동중 수집한 자료 일부는 한신대학교 출판부에서 「북미주․유럽 재외 한국인의 인권․민주화․평화통일운동 사료(1)」이라는 표제로 2004년 7월 발간될 예정이다.
4) 『전집』, 제1권, 159쪽.
5) 장로교분열과정과 그 쟁점에 관하여 다음자료 참조.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예장총회교육부, 1956)
6) 『전집』, 제14권, 59-60쪽.
7)  『전집』, 제14권, 67쪽-83쪽.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조직과 투쟁과 해체과정이 장공의 ‘범용기’ 속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8) 위와 같은 책, 78-79쪽.
9) 위와 같은 책, 106쪽-112쪽.
10) 『전집』, 제14권, 127쪽-141쪽.『범용기』,제3권, 43쪽-59쪽.
11) 위와 같은 자료, 같은면 참조.
12) 『전집』,제14권, 173쪽.
13) 『전집』, 제14권, 169-170쪽.
14) 장공의 후손들로서 삼형제중 위로 두형제 은용,경용씨가 1969년에 각각 김행강,정효순과 결혼하여 카나다로 이민가서 정착하는 노력중에 있었고, 두 딸 신자,혜원은 각각 이상철,장인철과 결혼하여 좀더 일찍이 카나다에 정착하고 있었다.
15) 자료번호,A003. “토론토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칙초안”.
16) 구춘회, “북미주 민주화 인권운동의 회고와 전망”, 『심류 이상철목사 고희기념 글모음: 한 나그네의 삶, 그의 꿈과 비젼』(대한 기독교서회, 1994), 144쪽-156쪽.
17) 『전집』,제14권, 170-172쪽.
18) 자료분류번호 I001, "회한에 대신하여“ 중에서 인용.
19) 위와 같은 편지.
20) 『전집』, 제14권, 185-187쪽.
21) 자료분류번호 H009.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헌장.
22)  ‘민통’ 재건총회나 다름없는 이 총회결과로, 1975년 8월17일 현재, 중앙상임위원들의 명단과 임원직책명단은  아래와 같다. 중안위원15인: 김응찬, 이근팔(와싱톤), 김원국,이승만(뉴욕), 송영창,고종구, 김운하(라성), 강한수,최명상(시카고), 이하전,송선근(상항), 김동건(세인트루이스), 김장호(보스톤), 전계상(씨아틀), 이상철(토론토), 정책기획연구실장(이재현), 징계위원장(안병국), 사무총장(강영채), 조직위원장(김응창), 재정위원장(이성호), 홍보위원장(정기용), 사무차장( 이근팔).*자료출처 「한민통소식, 제1권,제1호, 1975.10월」,자료분류번호H008.
23) 『범용기』,제3권, 163쪽-166쪽.
24) 위와 같은 책, 168-169쪽.
25) 구춘회, 「북미주 민주화인권운동의 회고와 전망」, 『심류 이상철 목사 고희기념글모음』, 153쪽.  
26) 선우학원, 「남과 북의 통일론 및 해결책」, 『민족통일의 비젼: 통일의 선구자 선우학원박사팔순기념문집』(서울:푸른기획, 1997), 468-496쪽.
27) 자료분류번호, E001.
28) 『전집』, 제14권, 400쪽-410쪽. 선우학원은 그의 논문 「남과 북의 통일론 및 해결책」글 중에서, 선우학원과 장공의 제네바 북한 공관방문일자를 1980년 3월이라고 적시하는데, 장공의 『범용기』,제3권에는 1979년 3월로 되어있다. 장공의 『범용기』는 장공일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1979년 3월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29) 『범용기』, 제3권, 321-322쪽., 『전집』, 제14권, 402-403쪽.
30) 자료분류번호. I009. 이상철의 기고문:남북회담재개에 대한 하나의 사견, 민중신문, 1980년2월16일 ,제1면기사참조.
31) 자료분류번호.I004[ 등소평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I006[카터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I007[조국통일에 대한 공개서한].
32) 장공의 정치신학에 대한 최근의 가장 체계적인 연구저서로서는 손규태,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대한 기독교서회, 2002)이 있다.
33) 통일정책과 통일철학에 관하여서 다음 4개의 글을 참조. 『민족통일의 비젼』, 290쪽-403쪽. 박명철, 「북한 통일론의 분석과 평가」, 김흥수, 「조선기독교연맹의 결성과정과 활동」, 강정구,「한반도 통일정세와 4자회담의 과제와 전망」, 이삼열,「정치적 통일의 원칙과 철학적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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