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20 (08:00) from 129.206.196.52' of 129.206.196.52' Article Number :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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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데올로기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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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와 신학


                                                   김경재(한신대, 문화신학)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한국교회의 양극화와 연세 에큐메니칼 신학의 과제’라는 전체주제 안에서 ‘한국에서의 이데올로기와 신학’이라는 소주제를 성찰하려는 것이다. 전체주제와 소주제와의 관련성에 관련된 잠정적 가정은 한국교회의 양극화 현상의 여러 가지 원인들 중에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양극화된 한국교회의 신학적 관점과 교회분열 현상에  해석학적으로,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바람직하지 않은 한국교회의 양극화 현상을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신학의 건강한 관계가 재정립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을 전제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우리의  논제를 다음의 몇가지 구체적 논제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해가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첫째, 이데올로기와 삶의 관계를 긍정적 부정적 이데올로기의 양가성에서 살펴본다.
    둘째, 한국의 근현대 사회적 삶에 영향을 주는 대표적 이데올로기들의 가치 지향성을 검토할  것이다. 특히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신자유주의를 상호 길항작용 속에서 살펴 볼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를 양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의  정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되, 한국현대 교회사의 맥락 속에서 고찰 할 것이다.
    넷째, 이데올로기를 돌파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종말론적 비젼 속에서 미래 에큐메니칼 신학형성의 과제를 논할 것이다.

II.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삶 : 이데올로기의 두 얼굴

이데올로기(Ideologie)란 이데아(Idea)라는 어휘와 이성적 담론(logie)이라는 어휘의 두가지 기본 뜻이 말하듯이 ‘이념들의 과학’(Ideo-logie)이라는 가장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한 선구적인 두 사상가로서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트라시(Desttut de Tracy, 1754-1836)와 19세기 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를 흔히 지적하곤 한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란  개인의 행동을 위한 규범들과 집단으로서 사회의 이상적 방향을 포괄하는 체계이자 세계관이며, 동시에 경직화된 규범들과  그것들이 지닌 권위적이고 폐쇠적인 사회체계 및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론을 의미한다. 이규호, 『이데올로기의 정체』,(태양문화사, 1978), 15쪽.

 위의 포괄적 정의자체가 말하듯이 이데올로기는 양날검과 같다. 잘 쓰면 유익한 도구이지만, 남용하거나 잘못쓰면 생명을 상하게 할 위험이 크다. 현대철학사조 특히 포스트모던니즘의 주류는 이데올로기 시대가 이미 인류사에서 끝났으며,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과 역동적 생명활동을 제약하는 ‘허위의식’, ‘비이성적인 선입관과 광기적 정치선전’,‘ 독단적 세계관’등등 부정적으로 파악되어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이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존재인 한, 공동체로서의  더불어서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의 최소공약적 지향성으로서, 무정부적 혼돈과 도덕적 아노미현상을 방지하는 안전망과 구조적 관계집합성과 연대의식의 공유를 위해서 이데올로기는  유용하고 필요하며  완전한 탈이데올로기는 비현실적인 망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를 통합론적․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파악하기보다는 갈등론적․ 체계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회학이나 철학 입장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기본입장을 따라 이데올로기란  관념론적 이념의 학이 아니라, 역사 발전과정의 내적 논리를 밝히고, 국가권력및 법질서와 사회계급 집단들의 의식구조를  물질적 토대론을 기초로 분석하고 소외된 인간의 해방투쟁을 위한 원리와 목표와 방법을 제시하는 과학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 개념의  사회학적 인식론에 관련된 근본적 성찰측면에서,  일정부분 마르크스의 통찰을 받아드리면서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이데올로기 사회철학으로서 만하임(KarL Mannheim)의 지식사회학과 프랑크푸르트 사회비판철학, 그리고 현대 해석학 이해 이론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지식사회학의 기본명제인 ‘사유의 존재제약성’이란 인간의 사유가 그 사유주체자의 사회적인 존재양식 즉 구체적으로  그의 사회적 권력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굴절되고 제약된다는 것이다. 칼 만하임,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지학사, 1976), 제5장 참조.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이론은 마르크스의 기본통찰을 물려받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와   프로레타리아트의 독재론등을 근저에서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맑시즘은 그 당파성 때문에 보편적 이론도 아니고, 절대적 선도 아니게 된다. 가진자도 못가진도 인간은 모두 그들나름대로 ‘사유의 존재제약성’을 벗어날 수 없을진데, 과연 현실적으로 어느 사회집단이 마음을 철저히 비우고 타자를 깊이 고려하면서 삶의 ‘전면적 통찰과 전망’을 할 수 있는 수도승적이고 관조적 맑은 지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만하임이 말하는 ‘사유존재제약성’은 단순한 ‘사회적 계급제약성’이나 봉건사회의 사회적 조건과 생산방식을 철폐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로서 자기중심적 이기성, 권력추구와 지배욕망, 끝없는 탐심과 허기진 존재갈증의 근본원인은 ‘사회경제적 제약조건’을 포함하면서도 훨씬 더 깊은 이간성의 존재론적 소외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양가성을 일별하면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철학운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론도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처럼,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론을 바닥에 깔면서도, 그것의 경직화된 반복이나 동일논리의 강화가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종합수용하여 현대문명의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과 문명비판을 감행했다. 율겐 하버마스(장일조역), 『하버마스의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종로서적, 1990). 이 역서는 프랑크푸르트비판철학의대표적 사상가 하버마스이 중요한 논문들을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역은 것이다. 특히 ‘이데올로기로서의기술과 과학’(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 Frankfurt am Mein,1968)/ ' 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 Frankfurt am Main, 1970)은 중요한 논문이다. 게명대학교 철학연구소  이진우엮음,『하버마스의 사회철학』,(문예출판사, 1996)/ 하버마스 특집호,『사회비평』,1996년 제15호,(나남출판, 1996)
특히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상품’이  인간욕망의 확대재생산 과정을 통해 어떻게 인간을 ‘1차원적 존재’로 소외 시켜나가는가  분석비판한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학파의 이념비판철학은  끝까지 인간의 이성의 빛을 신뢰하고, 의사소통적 담론과정의 활성화와 주체적 시민운동을 활성화해가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신앙이나 신학작업은 ‘새로 거듭난  피조물’로서의 맑은 마음과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려는 ‘자기비움과 나눔의 영성’으로 인하여 어느정도 인간일반이 빠지는 이데올로기적 독단성과 존재제약성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역사적 기독교의 행태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직시할 때,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신학적 통찰력에 힘입어 이데올로기의 역기능은 제거하고서  순기능으로만  활용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기독교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사유의 존재제약성’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던지, 이데올로기의 당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옳을 것이다. 지식사회학이 밝힌 ‘존재의 사유제약성’은 아무리 참신한 이데올로기일지라도 허위의식과 억압의 기제로 변질될 때, 이데올로기에 의한 이데올로기 비판형태로서 유토피아가 등장한다는 것은 신학적 종말론과 연관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요아킴 피오레, 후스파 교도들, 토마스 뮌쳐와 재세례파들을 통해 분출된 종교적 유토피아만이 아니라, 피압박계층의 ‘해방의 해석학’ 논리로서 유토피아적 의식구조가 나타나는데,   근대 프랑스혁명이후 등장한 자유주의 이념 및 사회주의 이념의 투쟁도 따지고 보면,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투쟁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회과학적 인식론의 지평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현대 ‘철학적 해석학’의 이해이론을 경청하면서 정신과학적 인식론 지평의 태생적 제약성과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의존적인 인간실존의 한계를 또한 번 더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로 대표되는 ‘철학적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의미연관구조의  총체성으로서 살아 숨쉬는 전통과 언어성과  ‘영향사적 의식’ (wirkungsgeschichtliche Bewusstsein)의 영향아래서 모든 정신활동의 이해는 이뤄지고 있다.    본래적인 경험 또는 의미의 체험이란 단순한 과거 인문학적 정보에 관한 지식의 반복적 재생작업이 아니라, 생기 ․ 사건 ․ 제2의창작 활동처럼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정한 내적 의미에서의 ‘해석학적 경험’은  고통을 통하여 인간실존의 한계성 곧 우리가 시간을 초월해서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인간에게 일깨워준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결코 인간을 폐쇄적으로나  독단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새로운 경험에 대해 개방적이게 해준다. Richard E. Palmer, 『Hermeneutics』,(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9), p.196.

   우리의 당면주제인 ‘이데올로기와 신학’의 상호관계성을 규명하려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특정이데올로기가 한국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살피기전에,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긍정적․부정적 양면성을 동시적으로 분명하게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을 개인과 집단에게 덮어씌움으로서 현실을 바로보고 대처하지 못하게 하고 광신적 정치구호와 정치선동에 놀아나도록 인간을 비인간화 시킨다. 다른한편,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하여금 제반 인식활동과 사회적 생활속에서 해방과 희망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역사이성비판적 자기 성찰의 빛이 되기도 한다.  냉전종식이후, 사회과학자들은 ‘이데올로기 종언’을 말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이데올로기 종언’이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로의 변형’이외 다름이 아니다. 문제는 개인이나 집단이, 기독교집단도 예외가 아니라는 인식이 중요한데, 자기가 지닌 역사제약적이고 상대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며 종교적 신념으로까지 신성시함으로써, 참된 하나님나라 운동을 담지하는 신앙공동체의 본래적 모습을 변질시키고 신앙공동체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예속시켜 ‘교회로하여금 현대판 바벨론 포로상태’로 만드는 과오를 범한다는 현실에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적 갈등관계로 몰아갔던 대표적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잠시 살펴보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대처해간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 ,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용기와 비겁’의 양면성을 보다 바람직한 내일을 위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볼 차례이다.  

III.   한국의 근․현대사회 속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들     

  프랑스혁명(1879)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정신의 집약적 표출사건으로서 평가된다. 구체제(Ancien Regime)를 무너뜨리고 근대시민사회가 역사에 출현했다.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세계관의 변화시기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근․현대사에 등장한 모든 중요한 이데올로기들은 사실 프랑스혁명이후 달라진 현실상황에 대한 대응방식들 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최근의 신자유주의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변화된 세계현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i) 국가와 사회 변동 및 주권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ii) 프랑스혁명의 이념으로 집약된 자유․평등․박애를 추진하는 방법과 속도 및 그 우선적 중요성을 어디다 둘 것인가?  (iii)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될 때, 우선권은 어디에 있으며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구체적 방식중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 제도가 가장 효율적이고 이성적인가? (iv) 정치적 힘, 경제적 힘, 문화적 힘이라는 세가지 사회적 힘들을 어떻게, 어느요소가 이끌어가고 주도하거나 조정하는가? (v) 인간의 ‘궁극적 관심’ 즉 ‘초월적 차원’과 접촉하는  종교의 자유 및 그 위상을 국가권력 및 다른 사회세력과의 관계에서 어디쯤에 둘 것인가? 등등이다.
   이데올로기로서 ‘보수주의’는 애매한 면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급속한 변화에 따르는 전통적 가치, 안정된 사회질서, 인간적 품위와 관습법의 존중, 적당한 사회불평등과 사회계급의 존속가치를 지키려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매뉴얼 윌러스틴(강문규역), 『자유주의 이후』,(당대, 1996), 114쪽 이하.
 보수주의는 ‘안정과 질서’의 이름으로서 ‘변화와 진보’를 대항한다.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가족, 교회, 자치단체, 전통적 도덕질서를 중요시하며, 역사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주체도 ‘개인’이라기보다는 ‘소규모의 전통적 집단’을 중요시한다. 한국의 개화기시대 사회신분제 폐지와 남녀성차별론 폐지부터 작금 한국사회의 호주제 폐지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보수주의 이념의 지지자들은  그러한 변화에 반대하고, 그러한 변화는 사회를 혼동과 무질서에 빠뜨릴 뿐 아니라, 비인간화를 초래 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미국 부쉬정권의 대중적 지지세력이 신보수층이라는 것은, 현대역사 현실에서 보수주의가 얼마든지 ‘자유주의’와 정략적 결탁을 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여 준다. 한국의 기독교는 19세기말, 개화운동의 선구자로서 한국사회의 변동을 주도함으로 인해, 한국 근대사 초기엔 ‘자유주의’ 이념의 지지자들로 보였지만, 세계질서에서 미국중심의 중심부 세력에 편승하고, 한국사회의 중산층 이상의 사회계층 이해관련에 밀착함으로써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더많이 지닌 아니러니를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보수주의는 ‘변화와 진보’를 두려워하고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보는 ‘안정과 질서’를 정의 또는 신의 뜻이라고 확신하면서 ‘사유의 존재제약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보수주의가 ‘전통과 기존질서’의 변화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의  보수적 교단들의 신앙적․신학적 경향성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소위 복음주의적 보수신앙을 지켜나간다는 자기명분을 지닌 교단들은 장로교, 감리교,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등 교파를 막론하고 기독교 정통교리 고수, 개역성경 번역본 사용고수, 여성성직자 진출 억제나 거부, 과학과 종교관계에서 갈등모델 혹은 독립모델의 지속, 친미반공주의 경향성등으로 나타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프랑스혁명과 그 이후, ‘근대성에 대한 각성’에 도달한 계몽주의 이후 시민사회가 현실세계에 대응하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확신하는 이데올로기 였다.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는 그 명칭의 중심어휘가 말하는대로 ‘자유인’으로서 일체의 전통적 권위체계들 예들면 교회, 군주, 국가등의 우상에서 해방된 자유인을 추구한다. 자유주의는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되 그것을 보수하려는 보수주의자들과 그것을 급진적 방식으로 바꾸려는 사회주의자들과 맞선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두가지 양 극단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점진적 개혁, 합리적 장치를 통한 개혁, 그리고 시민으로서 개인의 절대자유를 확보 하려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념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와 의무의 최종적 담지자를 개인이라고 이해한다. 역사의 주체 및 국가의 주권이 실질적으로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하여, 보수주의는 ‘전통적 집단’을 내세우고 사회주의는 ‘사회구성원전체로서의 인민’을 강조하지만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책, 116쪽.

   프랑스 혁명이후, 근대 서구시민사회는 국가의 권위마져도 개인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고 폭도와 무질서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미국 서부개척사에서의 ‘보완관’ 기능을 닮은 ‘야경국가론’을 주장했다. 경제활동 그 자체나 문화할동의 가치지향성과 가치판단에서 국가는 일정한 중립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배치하였다. 국가의 권위를 필요로 하면서도 국가의 절대권위를 싫어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발견한 정치적 장치가 보통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 대의정치이며, 지나친 사회불평등을 교정해가는 사회복지정책의 강화이다. 자유주의 이데올기는  서구사회에서 개인의 신앙자유와 양심의 신성불가침을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과 유대를 돈돈히 하면서 18세기 이후로 세계사의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 까지 한민족 사회에서의 ‘기독교신앙의 수용’은 ‘개화사상의 수용’과 동의어 처럼 이해되었는데, 개화의 실질적 핵심본질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신봉하는 세계관 및 가치관의 전파였다.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04), 제6장 참조.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도서출판 보성, 1986), 11쪽이하.
다만 한가지 차이는 뒤에 상론하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의 침입에 맞물린 상황속에서 민족주의와의 결합이었다. 인간 개인의 존엄성 강조, 자유와 평등의 강조, 양심의 자유, 관리들의 불법적 권력횡포에 대한 비판적 저항, 합리적 근대과학기술과 교육의 확장에 의한 생활의 합리화,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의 선양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기독교가 일본제국주의 침략기간중 민족주의운동과 결합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때, 개량주의적이고 점진주의적 방법에 동조하고 ‘혁명적 방법’보다는 ‘점진적 개혁’의 방법을 선호한 것은 가혹한 일제식민 통치하의 생존전략차원이나 기독교 복음의 평화사상도 그 원인으로서 작용하지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취하는 ‘점진적 개혁’이라는 이념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노치준, 『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참조.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의 대결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해갔지만, 그 깊은 속을 드려다보면 서로 결합하고 공유하는 이념적 공통요소가 많다.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운동은 차치하고, 마르크스에게서 기원을 두는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은 보수적 자유주의  정치경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인간소외와 부르죠아 계급의 충견으로서만 복무하는 근대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저항으로부터 발생했다. 자유주의이념과 사회주의 이념은 근대 프랑스 혁명의 깃발에 씌여진 자유와 평등 사상을 함께 지향한다. 그러나, 프랑스 이념의 제3요소인 인류의 ‘박애’란 명문화된 근대시민사회의 헌법적 조항에서 발견될 뿐, 실질적으로는 실현되는 않은 비참한 가난한자들의 현실을 경험하게된다. 시장경제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그 이념 안에 내포된 태생적 모순으로 인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인민다수의 인간소외는 가속화되고, 국제적 빈부격차와 중심부와 주변부의 갈등 및 종속관계가 가속화되어 갔다.
   사회주의 이념의 가장 먼 사상사적  뿌리는  성서의 예언자 정신에 있음을 신학자 폴 틸리히는 지적하고 둘 사이의 친화성을 일찍부터 강조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념을 구성하는 근본적  지향성 곧 과거와 질서를 강조하는 ‘뿌리신화’(myth of origin)를 극복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정의와 평등이 지배하고 인간소외가 극복된 유토피아적 사회의 실현을 대망한다.  ‘기대신화’(myth of expectation)를 가지고  미래지향적, 역사변혁적, 유토피아적 희망의 원리를 선호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데올기와 ‘종말론적 희망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샬롬이 실현된 구원받은 인류공동체를 꿈꾸는 예언자적-성서적 ‘정의에 대한 열정’ 사이엔  깊은 친화성이 있다. 알고보면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는 성서적 예언자 정신의 세속적 표현형태라고 보아도 틀린 것이 아니다. Paul Tillich, 『The Socialist Decision』, (Harper & Row, 1962), part three. pp. 97-162.
  Paul Tillich, Edited by James Luther Adams, 『Political Expectation』, (Harper & Row, 1971), pp.89-96.
다만 양자의 차이는 그러한 인간의 영원한 열정 곧 ‘인간이 자유로우면서도 현실적으로 평등한 사회의 실현, 곧 자유와 정의가 입맞추는 사회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적 접근에 있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혁명‘을 선택하고, 국가의 주권을 사회구성원 전체 특히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민의 총체‘를 내세운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갈등관계에 있는 집단들의 땜질식  타협․조정․조화같은 점진적 개혁방법을 불신하고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사회의 구조적 혁명을 강조하는 것이 사회주의다.
  1989년 소련연방공화국의 해체와 멸망은 현대사회주의 사회 실현의 인류실험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 인류사적 사건이다. 그것의 근본원인 분석은 간단하지 않지만,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원죄성에 깃든 근본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은 인간관및 역사관을 가진 때문이다. 약 100년동안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실험결과는 자신이 극복하려했던 관료주의적 국가권력의 팽창, 인간자유의 억압, 위선적인 인민민주주의 선전속에서 인민의 소외, 그리고 교만․태만․기만이라는 삼중적 근본악에 걸린 경제적 생산성의 비능률화로 나타났다.
  네 번째로 살펴볼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이다. 특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사회와 한국 기독교의 과거․현재․미래의 향방에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할  요소인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객관적으로 언어․지역․혈연․문화라는 요소를 공유하고, 주관적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정의된다. 한국산업사회학회 엮음, 『사회학』, 전면개정판, (한울아카데미, 2004), 429쪽- 441쪽.참조.
현대 급진적인 사회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며, 민족은 “특정한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에 의해 공동체로서 상상된 것이다” 위와 같은 책, 430쪽.
라고까지 보면서 포스트모던사회 속에서 민족이나 민족주의담론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급진적 사상가들도 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평가절하는 민족주의가 비합리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에 이용당하며, 지구촌시대에서 민족의 순수성이나 배타성을 강조하는  전근대적 종족주의 잔재라고 지적하면서 근현대사의 왜곡된 민족주의가 역기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다. 독일 아리안 민족주의, 일본 황국천손 민족주의, 중화중심의 민족주의, 이탈리아 뭇소리니의 파시즘운동 등이 그러한 사례들인데, 배타적이고도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국우적 국수주의가 되어 자국민이나 세계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 현실적 실재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여전히 아직도  유효하다.  한국 민족주의는 근현대사에서 대외적 충격과 제국주의국가가 가한 민족 생존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서, 외세에 대하여는 ‘민족보존’의 속성을 지니고, 억압과 수탈세력에 대하여 ‘해방적 동기’를 지니며, 정치사회사적으로는 ‘근대국가 형성’의 주체로서 ‘집합적 인격체’로서의 속성을 지닌다. 진덕규, “한국민족주의의 정치이데올로기적 인식”, 현대사회과학연구소편, 『현대 이데올로기의 제문제』,(민음사, 1978), 256쪽-275쪽. / 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길사, 1977).참조.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발전과정에서 1980-1910년대 까지의 소위 ‘자강론적 민족주의’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권강화, 부국강병, 척양척외를 주장하였으나, 진정한 민족적 국권회복 이라기 보다는 왕조체제의 복구를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초기 민족주의운동의 한계로서 지적되기도 한다. 유교의 의병활동이나 기독교의 초기 민족운동도 대체로 1905년 이전엔 왕권복고적 민족주의 였다고 보아야 한다.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민족보존, 해방적 동기, 근대국가형성등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성격을 부분적으로 지닌다고해서,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모두 바람직한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명분을 지니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지배적 권력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악용되어 권위주의적․가부장적 정권의 이데올로기로서 악용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통치수단으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세기 한국의 민족주의가 명실공히 창조적 민족주의로서 자리매김되는 조건은  자유․평등․박애로서 집약되는 근대정신을 명실공히 충족시키면서 전개되는 열린민족주의 이라야 한다. 진덕규, “제3세계의 민족주의”, 『민족주의와 기독교』,(민중사,1981), 25쪽-46쪽. 같은책 225쪽-226쪽에 실린 <함석헌․김성식․박형규의 대담: 민족주의의 재평가> 참조.
우리는 해방이후 남북 분단상황에서 ‘반제․반봉건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하는 북한의 정권과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유신정권이 얼마나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연출했던가 역사적 교훈으로 경험했다.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이데올로기와 신학’이라는 주제를 천착하려 할 때, 다섯 번째로 고찰해야할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논의가 이미 역사의 전면무대에서 지나가버린 이데올로기 담론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삶과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규정하는 세계관으로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한국적 현실 속에서 한국인의 신학과 교회의 형태를 규정하고 양극화시키거나 분열시키거나 통합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 민족주의를 언급했는데,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명료하게 이해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가장 실질적 힘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란, 인류의 ‘인식의 지도’(cognitive map)라는 차원에서 말한다면, 2차대전이 끝난후 형성된  UN을 중심으로한 국민국가들(nation-states)의 국제적 교류협력메카니즘인 ‘국제화’ (internationalization)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부르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본질을 일컫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매뉴얼 윌러스틴(강문규역), 『자유주의 이후』,(당대,1996).참조. / 이매뉴얼 윌러스턴(나종일,백영경역),『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창작과비평사, 1993).참조/ 존 톰린슨(김승현,정영희공역), 『세계화와 문화』,(나남출판,2004).참조.
신자유주의 이데올기는 갑자기 등장한 돌연변이적 관념체계는 아니지만, 1960년대 녹색문명을 절규했던 청년문화운동, 1980년대 월남전쟁종식을 부르짖던 자유시민운동,  1989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국가의 붕괴, 1990년대 지구촌 생태여성운동 대두등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인류사 전면에 부각되어 등장하는  역사적 상징사건들이 된다고 하겠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화의 본질을 지시하는 이데올로기인데, 세계화는 정치․경제적 측면에서의 새로운 세계적 상황변화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변화를 동반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속에서 한국적 삶의 현실은 청년실업,고용불안, 유가상승과 주식시장의 위기, 초국적 국제금융자본의 폭력, 이라크 전투병파병, 일본극우파 공세와의 대결, 남북분단상황의 긴장지속과 6자회담의 난항등을 겪고 있다. 세계화는 부정적인 면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정보화 혁명과 교통통신수단의 획기적 변화를 힘입어, 영화․대중음악․연극등 영상물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의류등 소비재들이 국제적 시스템과 국제분업형식을 뜨면서 지구촌을 시공간적으로 일일생활권으로 만들고, 국민국가시대에 확정시켰던 배타적 국경개념과 영토제한적 행정지배권을 탄력적으로 만들면서 떼이야르샤르뎅에 예견한 ‘초인류의 몸형성’단계를 가속화 시키는 면도 있다.
  요약하면, 세계화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교역․투자․통신․문화교류를 강화시키고, 인류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조직체로 연계시켜나가지만, 세계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이데올로기 주체는 미국․일본․유럽공동체등 자본주의국가를 중심으로한 ‘초국적 기업들’이어서 오늘의 지구적 위기와 비극적 상황에 대하여 ‘책임질 얼굴들’이 없으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무한경쟁과 고속성장 정책이 가속화되어 지구촌의 빈부격차 ․ 지역분쟁 ․지구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 인간성의 황폐화가 가속화 시킨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이다.  더욱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교육과 종교도 이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과 조류에 휩쓸리며, 영합하면서 존속과 번영을 유지하려들기에,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위태롭게 하며  교회의 존재방식을 크게 제약한다는데 있다.    

IV. 양극화된 한국교회의 의식구조안에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복합연계성(complex       connectivity)의 빛과 그림자.  

  앞절에서 우리는 한국의 근현대사에 작용했던 다섯가지 이데올로기의 본질과 특성을 간략하게 고찰했다. 이제 우리논제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한국교회의 양극화 현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검토 할 차례다.  보수교단 연합기구체인 한국기독교총연맹과  진보교단 연합기구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대별되는 두흐름 안에는,  단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복합연계성(complex connectivity of ideologies)이 현실적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보수․진보 양측에 이데올로기 정체성이 모호성(ambiguity)에 휩싸여 있음을 드러낸다.   
  교회는 물론 신앙공동체이지 특정한 이데올로기 신봉집단이 아니다. 마땅이 그러해야 한다.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역사적 이데올로기의 비젼보다 크고 높고 깊으며, 그것들의 한계를 심판하고 온전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절에서  살핀대로 현실적 역사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개인과 집단은 신앙집단일지라도 어느정도 이데올로기 의존적이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기도하고 주기도 한다. 특정 이데오로기에 예속되어버리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신앙공동체는 완전히 탈이데올로기적 이라고 맹신하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거나 자기기만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사실은 신앙공동체가 부지불식간에 신앙적 사고와 결단과 행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더 큰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진보교단이나 보수교단이나 이데올로기적 편파성에 집착하면서도, 자신들의 주의주장이 순수한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신성모독’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개인이나 공동체가, 주도적 이데올로기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의 양가성과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한다면,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측면을 ‘하나님 나라’운동의 방법적 도구로서 활용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연대의식과 하나님나라 운동의 동반자로서 화해․협력을 가속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양극화 현상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분석 하고 극복처방을 제시하려 할 때,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이데올로기의 ‘복합연계성’문제이다. 복합연계성이란 글자그대로, 이데올로기들이 단순형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연계되면서 상호보완, 상호의존, 상호순환구조 속에서 통전적으로 작용하거나 심지어 상호모순적, 상호충돌적 관계인데도  이데오로기가 지닌 허위의식 때문에 집단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과 치장물로서 가면을 쓰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양극화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고찰 할 때, 우리는 어쩔수없이 이데올로기 비판의식을 가지고 수행 할 수 밖에 없다. 한국 개신교 단체들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 민족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다섯가지 범주의 이데올로기들을 복합연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개신교의 이데올로기적 복합연계성 유형의 첫째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인데 조만식․한경직을 상징적 인물로 볼수 있는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의 흐름이다. 이 유형은 기독교복음의 본질로서 개인영혼의 구원관, 근대시민사회의 자유인권 사상, 단일민족의 통일된 근대 국가형성을 지향하는 공동특성을 지닌다. 이 흐름은 ‘기독교 민족주의 우파계열’을 형성하는데, 특히 해방정국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친미․반공주의를 기독교가 취할  기본로선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의 연대성을 포기하게 된다. 한국 기독교의  친미․반공주의적 성향은 해방정국에서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건설과정에서 입은 종교탄압․교회재산 몰수․기독교성수주일 방해․ 종교행사주관의 자율권박탈 ․  공격적 무신론적 유물론자들의 기독교인 박해와 살해등 체험에 기반한 체험적 친미반공주의라는데 특성이 있다. 유아기의 심리적 깊은 상처가 평생 성인의 성격과 행위를 규정하듯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친미․반공적 이념에 집착함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양가성에 대한 통찰을 잃어버리고,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남북화해와 통일운동의 행보에 지극히 조심스러워했고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다.   
  둘째유형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계열인데,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정의및 평등에 대한 정열과 예수복음운동의 가난한자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제하의 민족 해방운동을 이데올로기적 복합연계성으로 통전하고자 했던 기독교계열 운동이다. 이동휘․ 손정도를 대표적 상징인물로 생각 할 수 있겠다. 사회주의운동 및 이념과 기독교신앙과의 관계를 이념적으로 복합연계하려고 시도했던 한국 기독교사 속에서 인물들 이동휘․여운형․김창준․손정도․김준성․최문식․이대위등 인물들의 연구는 최근 한국교회사학계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김흥수,『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1992).참조.
그러나,  초기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은 남북분단과 냉전체계 안에서 좌절되거나 평가절하되고, 그들의 소박한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적 접근은 비판받기도 하지만, 한국교회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예속당하지 않는 성숙한 시대로 접어들수록 그들의 노력과 의도를 바르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유형은 보수주의적 자유주의 유형인데, 이러한 유형은 이데올로기의 복합연계성 개념으로 볼 때, 이율배반적이며 자기모순적인 이데올로기간의 야합의 경우이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란 ‘변화와 개혁’을 싫어하고 가정․ 교회․ 전통마을공동체․ 권위적 위계질서를 보존 강화하려는 지향성을 지니는데 자유주의는 ‘개혁과 혁신’을 강조하고 개인의 불가침적 권리와 자유를 주장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내에서 극우 보수교단지도자들이 취하는 입장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이데올로기 의식은 공백이다. 한국사회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니까 형식적으로  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자처하지만, 성직질서와 교권강화에서 중세기를 능가하며, 신보수계층을 배경으로하여 집권한 미국 부쉬정권에 대하여 지나치게 맹종하며 반공친미적이다. 반공친미적 색깔을 진하게 갖는다는 면에서 첫째유형과 친화성이 있어서, 한국교계가 진보냐 보수냐로 양극화 세대결을 할 땐 보수적 교단집결지에 모이지만, 근본적 차이점은 이 세 번째 ‘보수주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귀속하는 교단에는 ‘민족’이라는 절실한 개념이 없다. 말로서는 ‘민족’을 언급하겠지만, 민족보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더 중요하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게되어  극우적 반북․친미를 주장하게되는데 김홍도․김한식을 상징적 인물로 생각 할 수 있겠다.
  넷째 유형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세가지 이데올로기를 복합적으로 연계하려는 계열인데,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대립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생개념으로 파악하며, 시대사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구도를 극복지양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민족문제는 남북화해와 민중중심의 결속으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상징적 인물로서 문익환과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예로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1970-90 연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깨달음 속에서, 진보적 기독교사회 운동의 선구자들이 되어 투옥과 해직등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한국의 주류교세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판을 받았다. 넷째유형에 대한 평가는 각각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선구자적인 희생과 통찰력있는 행동하는 지성덕분에 오늘날 남북의 긴장이 이만큼 풀리고 남북의 화해․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유형은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복합적으로 연계하려는 계열이다.  신학적 계보로서는 지극히 보수정통적이고 기본적으로 개인영혼구원을 강조하면서도,  교리나 국가경계를 돌파초월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세계복음화를 지향하는 성령운동에 기반하여 세계선교와 교회의 무한성장을 강조하는  기독교 계열이 있다. 이 계열의 개신교 흐름을 보수주의적이면서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연계시키는 이유는, 이 계열의 선교신학과 목회비젼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과 통하는 면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의 목회적․신학적비젼은 민족국가단위를 넘어서   항상 전세계적 지평을 바라보며, 다국적 기업체 경영전락같은 무한경쟁을 통한 성장을 지지하며, 신자유주의 이념의 발원지이자 대부격인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세계평정을 지지하고 찬양한다는 것이다. 대표적 상징인물로서 조용기․ 김장환을 대표적 상징인물로 들수 있겠다.

V. 이데올로기와 에큐메니칼 한국신학의 과제: 역사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고 수렴하는     하나님나라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역사의종언’을 말했을 때, 그가 말하려는 멧세지는 미국중심의 자본주의 이념과 소련중심의 사회주의 이념과의 냉전시대 대결구조가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으므로(1989년), 이제는 서구의 진보사관은 의미가 없어졌고,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실험은 긑났고,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모색하고 추구하던 자본주의적․민주주의 사회가 역사발전의 최종상태라는 것을  주장하는 미국 신보수주의자의 단순한 논리로 끝마쳐서는 않될 것이다.
  신학자 율겐 몰트만은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 대한 신학적 비판에서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율겐 몰트만(김균진역), 『오시는 하나님; 기독교적 종말론』,(대한기독교서회,1997), 387쪽-405쪽,
 후쿠야마의 생각에 의하면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자유민주의’를 통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양식을 통한 ‘지구촌적인 시장화’를 통하고, 문화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문화적 상품화를 통하여, 세계인류는 욕망과 충족의 변증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검증한셈이고, 이제 역사는 그것을 대신할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목적에 도달하고 문제를 돌파하려는 모순극복의 열정이나 창조적 상상력이 고갈된 나른한 시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본다.  몰트만은 과연 오늘의 세계현실이 그러한가 되묻고 있다. 세계화 물결 속에 있는 오늘의 세계현실에서 “시장가치와 인간가치의 모순,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모순, 인류의 개발주의와 생태학적 위기의 모순”등은 제1세계국가들의 자본주의적 세계시장경제가 근본 원인인데, 세계화라고 부르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서는 문제해결의 길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문화나 문명의 가치척도가 제1세계 국가들(특히 미국,일본,유럽공동체)을 표준으로하는데, 만약 오늘의 중국,인도, 제3세계국가들이 제1세계국가들의 삶의 풍요 수준을 누리려 할진데, 지구촌은 생태학적 대재앙을 피 할 길이 없다.
  기독교신앙이 세계현실을 마주보는 해석학적 눈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종말론적 심판을 통한 속량적 구원’을 말하고 있다. 묵시론적 종말신앙의 본질은 우주세계의 대파국이나, 몰역사적 현실 탈출이 아니라, 철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현세계의 불의․고난․ 모순을 저항하고 심판하면서 ‘새하늘과 새땅’의 비젼을 주입하여 현실세계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창조적 에너지로서 작동한다. 기독교 종말론적 신앙에서는 ‘역사의 종언’이나 ‘역사의 파국’이나 ‘역사의 점진적 진보를 통한 완성’같은 비관적․낙관적 단순논리를거절한다. 아무리 약한 ‘적은 무리들’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역사, 새세계의 조형원리’로 삼고 가루서말 속의 누룩처럼  변화시켜가야 한다. 리챠드 니버의 ‘문화변혁설’은 아직도 의미가 있다. 교회는 ‘세상의 등대와 빛’으로 높은 위치에서 빛을 비추어 ‘존재의 밤’이 깊어가는 현대를 존재자들의 ‘내면의 빛’(눅11:35)에 다시 점화시켜  어둠을 물리치고 밝게 인간의 안과 밖을 고루  비취도록 해야 한다.
  역사창조적인 에큐메니칼 신학은 특정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되었던 한국교회의 죄를 ‘이데올로기적 바벨론포로 상태’였음을 ‘하나님의 나라’ 의 비젼으로 밝혀내야 한다.  한국교회가 특정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복음을 흐리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배신하고, ‘성장의 신화’와 ‘황금송아지의 위력’앞에 절하고 춤추었다는 사실을  참회해야 한다.  능동적으로 현실역사의 변혁에 참여했던 진보적 기독교집단은 혹시 우리가 땅 위에 설계한 ‘정의․자유․평화․환경운동’의 프로그램이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땅위에 실현하겠다는 신자유주의신학의 역사낙관주의가 아니었던가 반성 할 필요가 있다.
   한국기독교의 양극화를 극복하여 교회가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하나되고, 민족의 평화통일에 이바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 실현에 밑거름이 되며, ‘역사의 종언’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에 휩쓸리지 않고 새인류미래의 ‘창조적 소수자’가 되려면 한국신학은 특히 이데올로기 포로가 되어있는 한국교회를 ‘복음의 자유로써 해방시키고, 정의․ 자유․평화가 입맞추는 7000만 생명공동체의 부활을 목표로하여 다음과 같은 7가지 신학적 테제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테제1. 복음의 자유는  어떤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역사내재적 시대상황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해온 모든 이데올로기를 역사초월적 복음의 빛으로서 조명하여 이데올로기 솏박으로부터 교회를 자유롭게 도와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독단성을 비판하고  이데올로기들의 창조적 요소는 수렴해가는 두려움없는 이데올로기 비판과 활용의 자유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복음은 영원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시대제약적이며, 복음은 존재의 문제이지만 이데올로기는 방법의 문제이다.
  테제2.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역사현실 속에서 작동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으로 실천해나가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현실과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부정과 긍정’이라는 변증법적․해석학적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한다. 모든 역사적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성을 지닌 상대적인 것이므로, 특정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는 입장을 신학은 우상숭배로 규정하며,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냉소적으로 대하는 탈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영지주의적 관념주의로 규정하고 대결해야 한다.     
  테제3. 한국기독교를 양극화시켰던 보수적 교단의 친미․친자본주의․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 편향성과 진보적 교단의 반미․친사회주의․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편향성은,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 허위의식에 노예가 되게 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고, 성도의 교제를 차단하는 비복음적 역기능을 가속화해 왔음을 자백하고, 회개를 동반한 화해를 이루어 민족을 살려내는 민족교회로서의 한국기독교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테제4. 오늘의 세계현실은 냉전시대가 이미 끝난지 오랜 세계사 시대임을 직시하고, 남북이 지난날 긴장과 갈등 관계 속에서도 민족의 지혜와 뜻을 묶어 이루어낸 민족통일의 대원칙을 굳게 지켜 실천해나가는데 도움이 되어주는 통일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통일에 관한 남북합의 역사적 3대문서인 ‘7․4 남북 공동성명’(1972.7.4),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2.2.19), ‘6.15 남북 공동선언’(2000.6.15)을 성실하게 지키고 실천하는데 한국기독교는 앞장서야 하며, 그 3대 합의문서의 정신을 위반하는 일체의 기독교 집단의 행태를 반복음적이며 적그리스도 행태라고 규정해야 한다. 특히 ‘7.4 남북 공동성명’의 조국통일원칙 3대원칙(외세 의존과 간섭없는 민족자주통일 원칙, 무력통일 아닌 평화통일 원칙,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거듭거듭 재확인하여 실천하는 통일신학이라야 한다.
  테제5. 남북교회 지도자들은 ‘화해’를 더 많이 말하기 전에 과거 역사속에서 저지른 과오와 죄에 대하여 ‘회개’를 더많이 진지하게 수행해야 한다. 지난날  해방정국에서, 동족상쟁의 전쟁에서, 그리고 냉전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기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먼져 충성함으로써, 그리스도 맘을 아프게 하고 형제를 비방하고 살해했던 ‘형제 살인죄’(요한1서 3:15)를 진지하게 서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테제6.  한국교회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이 지구촌을 지배하는 현재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헌신적이었던 선교동역자로서 미국선교사들, 해방정국과 전쟁기간중에 물심양면 도움을 주었던  선량한 미국시민의 휴매니즘, 그리고 엄연한 국가적 실체로서 세계를 재패하고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미국정책, 그 세가지 실체를 각각 구별하여 판단하는 분별력을 지녀야하며, ‘반미,친미’라는 흑백논리를 극복해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양극화는 거대한 이념적 차이에서 유래하기보다는 테제6이 말하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롬12:2)의 결여에서 부터 온다는 단순한, 그러나 심각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테제7.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화가 생태학적 대재앙과 국가간의 전쟁과 갈등,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을 성찰하고, 무한경쟁․ 이윤추구․ 무한확장 지향의 대형화 및 물량화가 도덕과 종교의 문화논리에서만이 아니라 경제논리로서도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생명을 파멸에 이르게하는 ‘광야의 달콤하고 그럴듯한 사탄의 유혹’(마4:1-11)의 현대판임을 알고 저항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효과적으로 촉매하는 미래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생명의 상생의 윤리, 내면의 빛과  영성을 풍요하게하는 청빈의 윤리, 생태학적 유기체 몸의 윤리, 섬김과 나눔으로부터 기쁨이 온다는 대승적 아가페 윤리, 그리고 미학적 상상력이 존중되는 생명경외의 윤리가 크게 강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연세 120주년 연세신학 90주년 및 신학관 준공 학술심포지엄 발제문, [2005.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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