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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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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현도100년 기념학술대회, 주제: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

김경재(전 한신대교수, 신학)




I. 논제의 지향성과 연구방법

주어진 논제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에서 ‘종교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한정어의 지향점을 먼저 언급해야 하겠다. 필자는 이번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다른 논제들과의  중복을 가급적 피하기 위하여 위의 한정어를 종교단체로서의 천도교 신앙생활에서 본질을 이루는 한울님과 사람이해, 그 상호관계성 이해, 그리고 천도교인들의  구체적 연성(煉性)의 방법인 오관종규(五款宗規)가 지닌 종교적 의미에 한정하여 논하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논구방향을 표현한다면, 도통의 제3대인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1861-1923)시대에 천도교의 종지로서 일반에게 널리알려진 ‘인내천’(人乃天)주의에 입각한 각천주(覺天主) 신앙이 그 보다 앞선 은도시대(隱道時代) 수운 최재우(水雲 崔濟愚, 1824-1864)가 창도할 당시의 ‘시천주’(侍天主)신앙과 강신체험, 그리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이 심화시킨 ‘인시천’(人是天)신앙과 사인여천(事人如天)에 비교하여 어떤 본질적 변화가 하눌님 신앙 및 인간이해에 관련하여 발생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줄여말하면 초기 동학발생당시 조선민족의 종교적 심성에 요원의 불길을 붙여 동학창도 34년만에 ‘후천개벽, 광제창생’이라는 역사변혁의식을 가지고 전무후무한 사회 혁명적 에너지를 발출시켰던  시천주신앙이,  145년의 역사적 시간과정에서, 특히 현도(顯道)시대인 천도교시대에 와서 하눌님신앙과 인간이해, 그리고 그 양자관계성에 관한 이해에서 본질적 변화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발전적 변천인가 아니면 종교적 체험의 철학적 합리적 교리화 과정에서 치루어야 할 신앙적 힘의 원천에서부터 본의아닌 이탈 또는 약화를 초래하였는가 검토하는 일이다.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논구한 논문으로서 김용휘(金容暉)의 『侍天主 思想의 變遷을 통해본 東學연구』(고려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는 최근에 발표된 귀중한 학술업적으로 평가된다.

 자연이 논의 촛점을 현도시대 천도교자료에서 나타난 중요한 종교적 표현인  ‘性․心․身 三端論’, 性靈出世說, 以身換性論, 그리고 천도교의 종교의례라 할수 있는 五款宗規에 집중 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필요상 필요한 경우 부득이 수운과 해월의 동학본질 천명에 나타난 중요한 종교적 어휘들의 개념을 종교학적 시각에서 분석할 것이다. 연구자료는 극히 제한시켰다. 기본적으로 현도시대의 천도교 교리의 집대성이라 할수 있는 『無體法經』 義菴 著, 瑞菴 鄭雲彩 譯『무체법경』,附 聖師法說(명지사, 1985). 『무체법경』의 문헌사적 자료비평문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도시대의 천도교적 신앙의  대표적 집성물인 『무체법경』은 어느 특정 개인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의암의 체험적 신앙을 중심으로한 양한묵등 당시 천도교 지도층들의 ‘집단적 인격체의 종교저술물’로 보고 싶다. 이 저술물에 대한 자세한 자료사적 연구는 학계의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박맹수,최기영편,『한말 천도교 자료집 1』(국학자료원, 1997); 김용휘의 위에 언급한 학위논문 119쪽 참조.
을 중심으로한 의암의 저술물과, 야뇌 이돈화를 비롯한 천도교시대 대표적 학자들의 글을 참조할 것이다.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역사적 흐름에 대한 옳바른 인식이 요청되는바, 『東學의 原流』 革菴 趙基 편저, 『東學의 原流』(보성사, 1979)
에 빚진바 컸다.
 본 논제를 추구해가는 연구방법으로서 종교체험의 현상학적 연구방법을 적용시키려 한다.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 년의 천도교” 라고 할 때, ‘종교적 입장’이라는 어구가 함의하는 의미를 방법론적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한정해서 논구하려 한다. 천도교의 활동 총체가 넒은 의미로서는 ‘종교적’인 것이라는 범주의 생명활동이므로,  천도교의 정치사회적 고찰, 교단사의 변천에 대한 탐구, 철학적 연구등도 모두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적 관점’ 밖에서 논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특히 필자가 논구하는 주제가 의미하는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라는 논제에서 핵심주제를 현도시대에 들어와서의 하눌님 이해와 인간이해, 그 양자관계성 이해,  그리고 종교의식 및 연성수련 방법론으로서의 오관종규를 검토할 때, 종교체험의 일반적 특징인 종교현상학적 관점에서 검증해보려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현상학적 방법론은 특히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그의 명저 『종교체험의 다양성』 William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New American Library,1958)
안에서 밝힌바 있는 ‘신비주의’항목의 종교체험의 특징을 검토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채택하려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본래는 의사였으나 후일 심리학과 종교학에로까지 연구를 심화시킨 대표적 20세기 미국의 석학으로서, 그는 종교체험 특히 신비적 종교체험의 4가지 특징으로서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 이지적 특질(noetic quality), 일시성(transiency), 그리고 수동성(passivity)을 열거하였다. 위와 같은 책. Lecture xvi and xvii. Mysticism, pp.292-293.
윌리엄 제임스가   종교체험의 본질적 특성 속에 신비체험이 있으며, 그것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위의 4가지 특징을 열거한 점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본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이란  종교체험자의 전존재를 뒤흔드는 의미깊은 실재체험 속에서, 그 체험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체험자 당사자는 확신하지만, 종교적 체험의 인식론적 특징이 체험자와 체험대상자의 인식론적 ‘주객구조’를 초월하는 면이 있음으로해서 일상적 언어로서 표현해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교체험은 각종의 상징언어, 침묵, 영부, 비일상적 이상행동, 방언현상, 황홀경험을 동반하기도 한다. 수운의 득도과정에서 보이는 신비체험적 요소는 이를 잘 나타낸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이지적 특질(noetic quality)이란 , 비록 신비체험에서 절정에 달하는 종교체험 안에 언표불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능한 로고스적 요소를 지닌다. 고차원에서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진리란 인간성을 파괴하며 억압 할 뿐이다. 헬라어 ‘노에티코스’(noetikos)는 지성인을 의미한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두 번째 특징인 이지적 특질(noetic quality)은 천도교의 현도시대에 들어와서 종교적 체험의 첫 번째 특징인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을 부정할정도의 합리적 교리화로 진전되는데, 천도교 현도시대에서 ‘각천주’를 강조할 때 ‘각’(覺)의 인식론적 특징은 단순한 이성의 합리적․논리적 이해를 넘어 ‘실재에 참여적인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세 번째 특징으로 말하는  일시성(transiency)이란 종교체험에서는 일상적인 균질적․ 등가적․ 객관적 시간의 흐름관념이 초극되고, 신비적 종교체험이 ‘영원한 현재’안에서  극히 짧은 시간안에서 이뤄진듯한 기분, 특정사건체험에서 사건 전후 인과관계가 초극되는 ‘非因果的 同時性’ 체험을 말한다. 의암선생이 1909년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서 체험한 ‘비인과적 동시성 체험’은 천도교 사생관 및 사회적 공동체 생명관의 바탕을 이루는 ‘성령출세론’(性靈出世論)의 기원이 되는바, 의암의  통도사 내원암의 종교체험은 종교체험의 세 번째 특징인 ‘일시성’의 한가지 사례에 해당한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네 번째 특징으로서 ‘수동성 혹은 피동성'(passivity)이란 하눌님을 만나는 종교체험이나 연성수련 과정을 통해 ‘이신환성’(以身換性)하는 자기존재의 변화과정이 인간 자신의 주체적  참여와 책임을 동반하면서도,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적 능력에 사로잡히거나 초월적 능력을 힘입어 이뤄진다는 독특한 체험이다.  이 네 번째 종교체험의 현상학적 특징이 천도교의 현도시대에와서도 얼마만큼 신묘하게 지탱되고 살아있는가 하는점을 살필 것이다. 왜냐하면 천도교 시대와서는 인간주의 종교, 인본주의종교, 인간주체적 책임성의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도 오관종규의 기본핵심 속에는 주문(呪文)과 기도(祈禱)가 청수(淸水)․성미(誠米)․시일(侍日)과 병행하여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II. 현도시대의 性心身 三端論과 몸의 중요성 강조의미

동학창도 46년만이 1905년 동학이라는 종교단체의 이름을 천도교로 개칭한 소위 말하는 ‘대고천하’(大告天下) 사건의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간에는 다음 세가지 중요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언급하는 것에 대하여 필자도 동의한다. 金應祚, 「천도교의 문화운동」,(성신여대인문과학연구소, 1983), 63쪽 중인용.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東學革命 100年史』(下), 70-71쪽.; 조기주, 『동학의 원류』, 230-232쪽. 천도교역사에서 그렇게도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대고천하’ 사건이 야뇌 이돈화 편술로 된 『天道敎 創建史』속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첫째, 일본의 조선식민지 병탐의 간교속에 휩쓸려 들어간 일진회의 반민족적 이미지를 불식 시키고 동학도들의 혼란을 일거에 수습해야 할 긴박한 정치사회적 응급대치가 필요했다. 둘째, 교조신원운동이후 도무지 변경되지 않는 동학당에 대한 정치세력권과 일반 국민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20 세기에 걸맞는 종교 신앙자유와 교단활동을 정당하게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셋째, 동학종교단체가 사회변혁의 이념운동단체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순수 종교적 단체라는 것을 선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정일치(敎政一致)와 성신쌍전(性身雙全)의 기본입장을 지혜롭게 관철해가기 위해서 사회변혁의 문화적 접근을 통하여  동학 창립당시부터 변함없는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 당시 정치사회적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촌음을 다툴만큼 긴박했고, 당시 동학당들의 지도체계가  수직적으로 전수된 도통을 어받은자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해 운영되는 체계였다 할지라도, 당시 동학의 두목들이나 쟁쟁한 이론정립자들과 최소한도의 협의 과정 없이, 일본 신문에 광고형식을 빌어 선언하고, 국내 『帝國新聞』광고지면을 통해 세상에 선포했다는 사실은 ‘대고천하’의 중요한 사건에 걸맞지 않으며, 후일  동학의 정통성을 둘러싼 당내 내분의 작은 원인이 되지 않았을가 한다. 이 문제는 여기에서다룰 핵심 주제는 아니므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간다.
천도교가 지닌 종교적 인간학에서 귀중한 공헌은 인간의 본래적 존재양식과 본질 파악에 있어서, 관념론적 인간관이나 유물론적 인간관이나, 데까르트류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으로 보지않고, 性心身三端의 상호 불가분리․불가혼돈의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창발하는 역동적 인간이해를 한다는 점에 있다. 핵심은 性․心․身 삼자는 인간 생명을 구성하는 독립된 구성요소라기 보다는,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해 나타날 땐 파동과 굴절각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드러내듯이, 혼원(渾元)한 지기(至氣)가 그 신묘한 영글음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을 현성(現成)해 낸다는 발상법이다. 따라서 性․心․身 삼자는 존재근원에서는 같지만, 존재방식과 존재의 특질은 다르다. 그러므로 삼자관계는 존재근원의 동질성으로 인하여  불가분리(不可分離)이지만, 존재방식의 차이와 존재질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불가혼동(不可混同) 혹은 불가혼잡(不可混雜) 관계에 있게 된다.
 먼저 천도교는 性心身三端을 논하기 전에 성심관계 혹은 하눌님과 사람관계를 논한다. 천도교가 인내천(人乃天)을  표어로 내걸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천명할 땐, 분명히 셈족계의 선천종교가 신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남어지 인간의 위상을 극소화시키거나 비하시켜 신본주의로 전락하거나, 인간과 신을 동격화․동질화 하여 무신론적 인본주의에로 전락하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무체법경』에서 의암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사람의 권능이 한울을 이기면 한울이 사람의 명령 아래있고, 한울의 권능이
      사람을 이기면 사람이 한울의 명령 아래 있으니, 이 두가지는 다만 권능의
      균형에 있는 것이니라. 『無體法經』,22-23쪽: 人之權能勝 天在人之命令下 天之權能勝人 人在天之命令下 此兩端                        只在權能均衡.


한울님과 사람의 주객구조관계는 양자의 ‘균형’관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적 체험에서 말하는 ‘균형’관계란 어떤 형태의 관계인가를 좀더 분명히 해야 한다. 단순한 좌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팽팽한 긴장속의 관계란 말인지 원만한 조화관계란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종교적 체험 특히 인간이 긍극적 실재인 하눌님을 체험하는 경험가운데서 ‘균형’이란 자율(인본주의)과 타율(신본주의)이 동시에 극복되는 매우 변증법적(dialectical)이고도 역설적(paradoxical)인 관계인 것이다. 한울님과 사람의 관계가 ‘변증법적’이라는 뜻은 양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상호 關係的․動態的․相依的 관계성 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관계가 ‘역설적’관계라 함은 변증법적 관계보다도 더 심원한 종교체험의 특징을 드러내는바, ‘역설’이란 ‘일반상식적 견해’(doxa)와 상충하고 충돌하는(para) 형태의 인식론적 이중부정적 반전(反轉)을 통해 ‘반대일치의원리’ 안에서 이해되는 형태를 말한다. 기독교의 사도바울의 유명한 역설적 고백을 예로들어 본다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깊다”, “죄인이면서 의인이다”등이다.
『無體法經』에서 성심(性心)관계와 그 본질적 규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천도교 교리정립과정에서 받은 유교 성리학의 ‘영향사적 의식’(wirkunggeschichtliche Bewwusstsein)을 감지한다. 왜냐하면 성(性)은 리(理)요, 심(心)은 기(氣)라고 보며, 양자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성(性)도 심(心)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체법경』, 26쪽. 性理也 性理空空寂寂 無邊無量 無動無靜之原素而己. 心氣也 心氣 圓                      圓充充 浩浩發發 動靜變化 無時不中者. 所以於斯二者無一非性非心                      也 .
굳이 성리학에서의 성(性)과 천도교에서의 성(性
)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성리학에서나 천도교에서나 성(性)은 인간에게 본구된 천(天)이며 리(理)적인 요소를 갖추지만, 천도교에서의 성(性)은 ‘영으로서의 至氣’ 곧 성령(性靈)이라고 봄으로서 단순한 리(理)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용휘, 박사학위 논문, 124-125쪽.
 성심관계(性心關係)에 관한 논의만을 말한다면 천도교의 교리가 유교 성리학이나 불교나 선도에 비하여 새로운 점이 별로 없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천도교 시대에서 새로운 교리적 발전은 몸에 관한 이해가 좀더 구체화된
성심신 삼단론 (性心身 三端論)에서 드러난다. 『무체법경』에서 性心身 三端에 관하여 다음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성(性)과 몸(身)의 두 방향에 대한 수련을 보여 수도자에게 분별하여
       말하노라. 몸이 있을 때에는 불가불 몸을 주체로 인지해야 한다. 왜 그런가? 몸이
       없으면 성(性)이 어디에 의지하여 그 유무(有無)를 논 할 것이며, 마음이 없으면
       견성(見性)하려는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날 것인가? 그 마음(心)은 몸에 속한 것이           니라. 『無體法經』, 35쪽. 故示性身雙方之修煉辯論於修道者. 身在時不可不認身以主體. 何者.
                    無身性依何而論有無. 無心見性之念起於何處. 夫心身之屬也.


 위 인용글에서 천도교의 性心身三端  관계가 독특한 어조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과 몸은 모두 순수 지기(至氣)인 성령(性靈)의 신묘한 응결물이다. 그러나 마음(心)은 보이지 않은 정신적 실재요, 몸(身)은 보이는 물질적 실재이다. 그렇다면 신령한 순수한 지기(至氣)인 성령(性靈) 안에 정신적 실재인 마음과 물질적 실재인 몸으로 현실화 될 양극성적 잠세태(兩極性的 潛勢態)가 동시에 내재하다가, 일정한 시공연속체적 계기 속에서 지기(至氣)가 어떤 구조적 방식으로 응결되는가에 따라 마음과 몸으로 창발한다고 볼수 있다.
 견성(見性)하는 것은 마음(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신의 근원을 내유기화(內有氣化)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며, 외유기화(外有氣化)하면서 삼라만물과의 유기적 관계성을 총괄적으로 파악 인지하는  사람 생명체안에서의 중추신경계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으면 見性之念이 어디서 생기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천도교의 마음(心)이해는 불교의 이해보다 훨씬 적극적 평가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마음(心)은 몸에 속한다”(夫心身之屬也)라고 갈파한다는 점에 있다. 마음은 몸을 자기초월하는 정신적 능력 속에서 몸을 통어하고 다스리지만, 비유하건데 마치사람의 중추신경계가 몸의 전체 메카니즘을 통제하고 파악하는 조절기능을 가졌지만, 중추신경계는 몸에 속하며 몸의 제반기능이 떠받혀주지 않으면 중추신경계가 존립 할 수 없듯이 마음은 몸에 속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쯤에서 천도교 밖의 론자들은 동학 및 천도교의 실재관 혹은 생며관이 현대 신자연주의철학 혹은 유기체철학이라고 일컫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過程思想)과 닮은 점이 많다는 것에 착상한다. 특히 성심(性心)의 실재성을 말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몸(身)이 그 궁극적 기저(基底)라고 파악하는 발상법은 삼라만물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다른말로 표현하면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말 할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과정사상에서 ‘존재론적 원리’라고 일컫는 근본명제에 의하면 “현실적 존재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이다.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들의 배후로 나아갈 수 없다” Alfred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Edited by D.R.Griffin and D.W. Sherburne(New York: The Free Press,1978), p.18.
성(性)도 심(心)도 현실재(actual entities)들의 한 존재양태이지만, 몸(身)은 보다 구체성을 가지고 자기를 창발시킨 현실적 존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천도교에서 몸의 중요성 강조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천도교의 실재관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적인 미시적 분석이나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자기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몸․물질․밥 한그릇․여성․자연을 중요시하는 발상법은 과정사상과의 친화성을 찾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다.
 한(韓) 철학자 김상일도 그점을 지적한다.“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사실존재들은 서로 비연속적이 아니라 연속적이다. ---- ‘실체’는 배타적이지만, ‘사실들’은 서로 우호적으로 연속한다. 사실존재들도 서로 다른종류의 것들이라면 서로 비연속적일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두 개의 자존적인 다른 영역으로 보는 데카르트 철학은 결코 몸과 마음의 연속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입장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전혀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모든 사실존재들은 보편선상에 서 있는 한 종류일 뿐이다” 김상일,『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서울: 서광사,1993), 60-61쪽.

 현도시대에 이르러 발전시킨 천도교의 인간론과 하눌님 이해는 사실 性心身 三端論에 의하여 좀더 발전한 셈인데, 그 이론은 현대 유기체철학의 대표적 사상인 과정사상과의 대화를 통하여 좀더 미시적으로 섬세한 논리적 발전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으면  성심신삼단론에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계기를 놓치고, 전통적 동양사상의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이나 불교적 일심론(一心論) 철학속으로 다시 함몰되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천도교의 현도시대 이래로, 천도교가 그 종교의 총정신을 드러내는 ‘표어’(標語)로서의 의미를 넘어 ‘종지’(宗旨)‘라고 까지 주장할 때, 동학발생 초기시대의 역동적인 강신경험, 하눌님의 감응을 굳게 믿고 기다리는 시천주 신앙, 인간의 진솔한 탄원에 감응하여 응답하기도하는 ’내재적 초월자’로서의 신령한 至氣, 곧 인격적 하눌님 신앙은 변화되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대두된다. 다시말해서 수운에게서는 분명히 내 안에 모셔져있긴 해도 여전히 나와는 구별된 초월적 영으로서 경외지심으로 받들어 모시며(侍天主), 내 맘에 강령하시기를 간구하는 ‘天的 님’이었는데, 해월단계에 와서 보다 내재적인 범천적 신관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양천주(養天主)․심즉천(心卽天)․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등 파격적 내재화과정을 거친다음, 마침네 의암시대의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선언한 이후로는 종교라기보다는 ‘자천자각’(自天自覺)을 강조하는 ‘인내천 종교철학 체계’로 변질하지 않았는가 문제가 제기된다. 인내천교리를 천명한 교리해설서 라고 말 할수 있는 『大宗正義』(190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水雲大神師는 天道敎元祖라. 其思想이 博으로 從하야 約히 倫理的要點에 臻하니
     其要旨는 人乃天이라. 人乃天으로 敎의 客體를 成하며 人乃天으로 認하는 心이
     其主體의 位를 占하여 自心自拜하는 敎體로 天의 眞素的極岸에 立하니 此는 人界上
     初發明한 大宗正意라 謂함이 足하도다. 『대종정의』,( 『한말 천도교 자료집』1, 국학자료원), 김용휘의 학윈논문,115쪽에서 중인용.


위의 인용구를 검토하면 천도교의 원조가 수운대신사임을 분명히 명기하여 도통이 수운으로부터 이어져온 정통신앙임을  밝히고, 수운사상의 본질을 종교적 영성에서보다는 윤리적 욧점에서 파악하면서 그욧점을 인내천이라고 단정한다. 인내천을 천도교의 객체로 삼고,  그 사실을 인지하는 마음이 주체적 위상을 지닌다. 그리하여 인간 마음에 내주한 하늘의 마음을 스스로 경배경외함으로서 하눌님의 본질적 핵심에 이르는 것이니 이러한 종교적 깨달음은 인류역사상 처음 발명한 대종정의라고 일컬을만 하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신앙인 마음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깨닫는 각천주(覺天主)는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수운의 시천주 신앙이 그 표현만 다를뿐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그렇게 믿고 깨달을는지 모르나, 위의 인용문에서 느끼는 제3자의 소감은 종교성의 약화와 병행하여 인간주체적 자각종교로 변질된 감을 감출 수 없다.  다시말하면, 필자가 본논문 서두에서 제시한바 위리엄 제임스가 종교체험의 본질적 특성으로 제시한 네가지 특성중 언표불가능성(ineffability), 일시성(transiency), 수동성(passivity)는 완전히 살아지고, 이지적 요소(noetic quality)만 남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의암이 천도교지도자들의  연성수련회에서 법설로서 말씀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다음같은 말도 심상치 않게 들린다.

 吾敎의 과거는 依賴時代라. 故로 天이 奇蹟․靈蹟으로 人을 導하였으나 吾敎의 금일은      熙和時代라. 譬하면 白日이 當天에 萬像이 含輝함과 같으니 비록 纖雲이 있다 할지라도     午天에 至하야는 天下大明하리라. 우리信徒는 이제로부터 天主와 神師께 依賴하는 마음     을 打破하고 自天을 自信하라. 만약 自天을 自信치 못하고 天師만 依賴하면 臨事에 自力     을 얻지못하며 진실한 建步를 얻지못하리라. 自天은 侍天主의 本體니 唯我信徒는 主體와     客體를 구별하야 修煉하라. 夜雷 李敦化 編述, 『天道敎 創建史』, 72쪽. 革菴 趙基周 編著, 『東學의 原流』, 331쪽.


위의 인용구를 읽는 기독교 신학도들은 20세기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훼퍼(D.Bonhoeffer)가 그의 옥중서한에서 말한 ‘성숙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책임적으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연상한다. 여기에서 묘미는 인간의 주체적 책임성과 성인(成人)으로서 자기의식을 강조하지만, 그 말의 묘미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조건적 병행어구 이듯이 천도교가 ‘吾敎今日은 熙和時代’  이므로 하눌님이나 神師를 의뢰하지 말고, 자기자신만을 의뢰하고 자신을 하늘로 알고 경모하며 매사를 영웅주의정신으로 척결하라는 천박한 인간중심주의 종교에로 개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천주와 강령지교를 가르치던 대신사 수운의 창도시대와 ‘大告天下’했던 천도교의 현도시대 시간차이가 불과 반세기도 않된 45년 시차임을 감안한다면, 위와같은 ‘人乃天’교리 해석에서 인간주의 강조는  얻는 것 못지 않게 잃는 것이 더 많았다고 보아야 한다.  
하눌님의 기적과 영적을 믿거나 하눌님을 외뢰하는 신앙심을 유아적 인간발달단계의 종교적 심리상태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것은 하눌님과 인간의 상호관계가 역설적 관계이지 못하고 ‘균형’관계이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해석한 천도교 사상에서 그 균형이 현실에서 지속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언제나 인간중심주의로 환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체험에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종교성이란 바로 그 ‘균형’의 긴장관계에서 하눌님과 사람 어느한 쪽에로 중심축을 옮겨가는 단순해법을 추구하지 않고, 100% 하눌님의 하시는 감응과 은혜이면서 동시에 매우 역설적이게도 100%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역설적 반대일치 경험’이 핵심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III. 以身換性說과 性靈出世說에 나타난 천도교의 종교성

여기에서 논할 현도 100년의 천도교의 종교성은 의암이 설법한 以身換性과 性靈出世에 집중하여 살펴볼 것이다. 위 두가지 법설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데, 우선은 두가지가 모두 천도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신심함양 (信心涵養)을 독려촉구하는 매우 실천지향적 기초교리이며, 以身換性할 때 성(性)은 지기(至氣)의 인간내재적 성령(性靈)이면서 동시에 순도한 “수운대신사께서 출세(出世)하신 性靈” 『無體法經』, 336쪽.
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신환성론은  천도교의 ‘중생지도’(重生之道)에 해당하고, 성령출세설론은 천도교의 ‘사후영생론(死後永生論)’에 해당하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종교와 윤리가 차원을 달리하며 갈라지는 분기점이 ‘이신환성’과 ‘성령출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것이기 때문에 위 두가지 주제에 대한 천착(穿鑿)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의암은 1916년 ‘以身換性’이란 주제를 가지고 다음같이 말했다.

  道 닦는자 無常 無上한 肉身의 變化와 또한 無常 無常한 世事의 飜覆에 愛着하지 말고
  大道如天 脫劫灰라고 하는 사람性本源의 大道大德에 合致하고 그 原理와 合一하여 그
  眞理에 順應함으로써 능히 人乃天의 人間格을 더우잡아 假人間으로부터 眞人間의 생활      에 들어갈 수 있다 함이다. 要컨데 以身換性은 生命으로써 主義를 바꾸라 함이니 즉 生      命의 主義化를 이름인데 사람은 主義로서 살고 肉身으로 살지 말라 함이다. 사람은 性      靈이  主體요 肉身은 客體이므로 肉身이 性靈의 지휘를 좆아야 하는 것이다. 『無體法經』, 以身換性과 新呪文, 332쪽.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의암이 ‘以身換性’ 법설을 통하여 말하려는 요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 주제는 종교의 영원한 핵심화두인 것이다. 의암은 우선  性心身 三端論에서 말한 ‘身’과 위인 용문에서 말한 ‘肉身'을 구별한다. ‘身’은 허령창창한 지기(至氣)가 체화(體化)된 신령한 몸이자만, ‘肉身’은 혈기와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탐진치 삼독에 휩싸이는 비본래적 인간존재방식을 탐익하는 인간실존을 말한다. 그것은 假人間이므로 性靈이 삶의 본원이 되며 주체가 되는 생명적 眞人間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적으로 말하면 비본래적 실존상태에서 본래적 실존상태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그 전환 또는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변화를 누가,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에 대하여, 천도교는 道 닦는자의 철저한 자각과 자기수련의 노력을 통하여 달성할 과제로서 본다. “사람은 性靈이 主體”라 한다면, 그 말이 당위적 요청임을 넘어서 주체로서의 性靈이 능동적으로 혈육적 인간으로서의 육신을 감화시켜 眞人間으로 변화시켜간다는 종교적 체험논리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칸트적 도덕명법형태(道德命法)형식으로서만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人乃天主義’가 인간의 주체적 책임성과 성인의식을 강조하는 논리적 귀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도교에서 先天宗敎의대표적 사례로 이해하는 기독교경전 요한복음에 똑같은 주제를 다루는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요한복음 3장)가 나온다. 유대교 산헤드린의 회원이요 지성인 엘리트 니고데모는 어느날 밤에,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고있는 랍비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선생의 가르침의 진정성(眞正性)을 인정하고 예수를 배알한다. 그 때 예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마치 선문답하듯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말한다. 그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거듭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성인이 모태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수 없다고 항변한다. 이 때 예수 대답은 바람이 불고싶은대로 불 듯이 성령으로 난사람은 모두 그러하다고 말함으로서 ‘거듭남의 도’를 가르침에 있어서 인간의 도덕적 精進과 함께하는 성령(聖靈)의 감동감화를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필자는 천도교에서 말하는 ‘性靈’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聖靈’은 그 본질적 차이못지 않게  양자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싶다. ‘性靈’이 무궁한 하눌님의 인간내재적 실재라는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곧 ‘性靈’임을 주장한다면, 기독교에서 ‘聖靈’은 하나님의 현존이면서 인간품성에 내주하고 혈육적 인간을 감동변화 시키는 ‘거룩하신 영’이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를 강조한다면 ‘性靈’ 은 ‘내재적 초월자’요 ‘聖靈’은 ‘초월적 내재자’라는 점이다. 양자의 차이점은 피차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 천도교와 기독교의 각각 종교로서의 특징을 이루기 때문이다.
 현도시대에 들어와 발전한 천도교의 교리중에서 性靈出世說의 발단은 『동학의 원류』에 의하면 의암자신이 포덕50년(1909년) 통도사 내원암 에서 49일기도로 영성수련 하던중 체험한 신비한 ‘황홀체험’이 그 설법의  발단이라고 전한다. 『東學의 原流』, 285-286쪽.
내원암 적멸굴은 대신사 수운이 직접 우거하시면서 수도정진하던 곳인데, 의암이 그곳을 방문하던 날, 그는 적멸굴 앞에 서서 활홀상태에 일시 들어가고  의암자신이 적멸굴 앞에 서있는 일이면서도 이미 순도한 대신사 수운선생의 심령(心靈)이 법신(法身)으로서 의암에게 출현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인하여 성령출세설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 설의 핵심내용을 『무체법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이에 만물가운데 가장 진화한 자로 만리만상(萬理萬相)의 이치를 모두 한 몸에      갖춘  것이다. 사람의 성령(性靈)은 이 대우주의 영성(靈性)을 그대로 품부(禀賦)함과       동시에 만고억조(萬古億兆)의 영성은 오직 하나인 계통으로써 이 세상의 사회적 정신이      된 것이니라. 신사(神師)께서 사람의 근본이 한울인 심법(心法)을 받으시고 향아설위법      (向我設位法)을 정하시니라. 이것은 우주의 정신이 곧 억조의 정신인 것을 표명하심과       아울러, 다시 억조의 정신이 곧 내 한 개체의 정신인 것을 밝게 정하신 것이니라. 이를      한층 뜻을 좁혀 말하면, 전대(前代) 억조의  정령은 후대 억조의 정령이 된다는 점에서      선조(先祖)의 정령은 자손의 정령과 같이 융합하여 표현되고, 선사(先師)의 정령은 후학      의 정령과  같이 융합하여 영원히 세상에 나서 활동함이 있는 것이니라. 『無體法經』, 321-322쪽. 성령출세설중 인용문. 원문: 然而人是萬物中最進化者萬理萬相    之理總俱體者也. 人之性靈是大宇宙靈性本然稟賦同時萬古億兆之靈性以惟一系統爲此世之    社會的 精神也.  神師受人乃天之心法定向我設位祭法是表明宇宙之精神卽億兆之精神也.     此以一層俠義而言之前代億兆之精靈爲後代億兆之精靈先祖之精靈與子孫之精靈融合表顯先    師之精靈與後學之精靈融合永遠出世的活動有之也.
(鄭雲彩譯)

위 인용문을 자세히 숙고한다면, 천도교시대 의암의 성령출세설의 이론적 기초는 특히 해월신사(海月神師)의 향아설위법설에 기초하고 있음을 본문이 말해준다. 이 성령출세설은 천도교의 생사관 곧 사후의 영생론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종교생활에서 사생관 특히 사후생명의 존재방식에 대한 종교적 신념은 해당 종교에 귀의하는자들의 매우 중요한 신앙적 신념체계인바 주목할만한 설법인 것이다.
만일 위인용문에 나타나는대로 선조의 정령은  자손의 정령과 융합하여 표현되고, 선사(先師)의 정령은 후학의 정령과 융합하여 후대의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만 본다면, 그것은 생물학적이고도 사회정신적 영향력을 후세와 후대에 미침으로서 사회적 진화에 공헌하고 사회적 집단생명체 안에서 영생한다는 지극히 합리적 영생관에 불과한다. 거기엔 굳이 종교적 신념이라고 평가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무신론적 사회정신 진화론의 영생관 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점에서 천도교의 성령출세설이 그러한 견해들과 다른가?
첫째는 ‘정신적 생리적 영향’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정령’(精靈)이라고 표현함으로서 인간의 성령(性靈)이 시공간적 유한성에 메이지도 않고 시간의 세가지 경험형태인 과거․현재․미래의 어느 시제(時制)에 제한받지 않고 통시적(通時的,diachronicall)․동시적(同時的,synchronical)으로 영존하는 영적실재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의암이 통도사 적멸굴 앞에서 수운대신사의 신비한 현존체험을 한 것은 그것을 반증한다.
 둘째는 천도교 교리로서의 성령출세설은 앞서 언급한 20세기 유기체철학인 화이트헤드 과정사상에서 말하는 현실적 존재의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 이론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화이트헤드에 과정사상에 의하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자기창조라는 주체적 활동에서 그 존재성이 확보되고 그 종결과 함께, 존재성이 완전히 무화(無化)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생성과정이기 때문에, 현실태로서의 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subjective immediacy)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Proess and Reality, p.28. ; 문창옥,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이해』(통나무, 1999), 44-45쪽.

 종합하면 현도시대 천도교 교리발전 도상에서 以身換性說과 性靈出世說은 천도교가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의 종교철학적 신념체계가 아니고, 일상적 민중들의 종교로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는가 못내리는가의 관건이 되는 교리이므로 앞으로 더욱더 정치(精緻)한 교리적 발전이 요청된다.

IV. 오관종규(五款宗規)에 나타난 현도시대 천도교의 종교성

천도교사에 있어서 3대교주 의암의 공헌을 여러 가지로 말 할수 있겠으나, 천도교를 하나의 공적 종교집단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여러 가지 교단의 필수불가결한 제도와 규칙을 제정정비하고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다진공헌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총부설립(總部設立)과 정비된 교구제 확립, 각종교직규칙제정, 종학강습설립(宗學講習設立)과 출판시설완비, 종단기관지 발행과 보성학원등 사립학교 육성, 그리고 특히 오관종규의 실행세칙을 제정하고 그 종교적 의미를 교도들에게 끊임없이 교육한 점등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수 없다.
의암은 3대교주답게 탁월한 시대적 경륜가적 기질과 깊은 신심과 포용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지도자였다고 판단된다. 그는 교리를 정교하게 정리발전시키는 학자적 이론가라기 보다는 종교체험을 중시한 실천가이며, 비록 교단을 이끌어가기 위해 각종 규칙과 종규를 제정반포했지만 하눌님의 감화, 종교인 자신의 정진하는 연성수련, 그리고 눈앞의 이익을 초월한 신앙인의 고고한 인격을 강조한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오관종규는 천도교 도인들이 이미 실행해오던 종교의식이었지만, 1909년 의암에 의하여 오관종규실행세칙을 발표하고 그 종교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서 도인들의 신앙을 든든한 토대위에 세워지도록 하였다. 주문(呪文), 청수(淸水), 성미(誠米), 시일(侍日), 기도(祈禱)를 일반교인들이 절대실행할 종규(宗規)로서 확정공포함과 동시에 그 실행세칙을 지시 하달한 것이다. 『東學의 原流』, 276-284 쪽.
무릇 종교의식은 보이는 종교교리요, 교리는 보이지 않는 종교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천도교의 오관종규는 특히 몸으로 참여하면서 이론보다는 실천을 통해 誠敬信 삼덕을 실천해가는 대다수 민중 천도교도들에게 있어서 실지로 그들의 종교성을 담보하는 혈관이며 경락과 같았다.
 첫째,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은 한울님과 양위신사(兩位神師)의 감응(感應)하시는  기운(氣運)을 받아드리기 위한 종교적 의식이며 그것은 동시에 주문을 암송하는 도인들의 사사로운 욕심과 망상을 버리게하는 종교적 효험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령주문과 평생주문 21자는 동학창도 당시  수운대신사께서 창작하신 것이 아니라 강화(降話)로 제정하신 계시적 성격의 주문이라고 믿는 것이어서   천도교의 종교성을 입증한다.
 둘째, 청수(淸水)는 매일 하오 9시에, 집안 정결한 곳에 정(淨)한 그릇에 청수(淸水)를 받들어 모시어 놓고, 한울님과 스승님의 감응을 받아  포덕천하 광제창생할 것을 축원하고, 자신들의 다른 소원을 축원하는 의식이다. 종교의식이란 제의적 의식행위(儀式行爲)와 특정한상징물을 매개로하여 이뤄진다. 천도교가 청수(淸水)한 그릇을 가장 대표적 상징매개물로 선택  결정한 것은 청수가 한민족의 오랜 祭天祈神의 의식에서 정화수로서 사용되었으며, 수운의 득도시와 참형직전 청수 한그릇을 봉존한 의식이 있었고, 특히 해월신사께서 각종 의식에서 음식물 진설관례를 철폐시키고 오직 청수일기(淸水一器)만을 모든 의식에서 사용하라는 설법에 근거한다. 해월은 그 이유를 말하기를 물은 그 성질이 淸하고 動하는 것이며 무소부재한지라 가이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말하면 청수 봉존의식은 물이 지닌상징성 곧 淨潔性, 透明性, 柔軟性, 生命化育性, 力動的 可變性, 滲透性, 謙虛性등등 ‘上善若水’임을 공감하는 동아시아적 종교심성을 바탕으로 삼는다.
 셋째, 성미(誠米)는 천도교의 오관중 매우 독특한 신앙적 의식이면서도 교단운영의 물질적 토대를 형성하는 현실적 제도로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성미(誠米)는 家內食口를 위하여   영원한 수복(壽福)을 비는 것이니, 매양반미중(每樣飯米中) 매식구에 한술씩 뜨되 지극한 정성으로 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종교에서나  한가정의 안녕질서와 신앙심은 가정주부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가정주부가 농업과 반식을 주로하는 전통사회에서, 날마다 밥을 짓고 쌀을 씻을 때마다, 하눌님과 선사(先師)들의 감응을 축원하고 가족의 수복을 빈다는 행위는 매우 동아시아적 농업기반의 ‘삶의 자리’에서만 가능한 탁월한 종교적 의식이다. 이 성미(誠米)의식을 토대로하여 3.1만세운동 거사자금이 마련되었고, 중앙총부교당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이 성미(誠米)의식을 의암은 특히 강조했다. 오관중 주문․청수․시일․기도는 精神的 獻誠이요 성미는 物質的 獻誠이니, 精米만이 아니라 비록 가난하여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도 정심․정성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미제도는  한국기독교 초대교회 발전과정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넷째, 시일(侍日)은 일요일마다 천도교인들이 교당(敎堂)이나 전교실(傳敎室)에 나아가서 한울님과 스승님을 至誠으로 생각하고, 說敎하는 말씀을 듣고, 敎理를 공부하는 것이니,  천도교의 정규집회인 셈이다.
 다섯째, 기도(祈禱)의식의 봉존은 주문암송과는 다른 의식이다. 통상기도와 특별기도로 대별한다. 通常祈禱는 매시일(每侍日) 下午九時에 淸水와 精米五合을 같이 奉尊하고 神師呪文 105회를 顯誦 또는 黙誦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特別祈禱는 七日, 二十一日, 四十九日, 百五日등 일종한 기간을 정해 봉행하는 기도의식으로서, 總部에서 전체적으로 실시하기도 하고 개인이 감응을 받아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봉행하기도 한다. 위와같은 책, 277쪽.

  여섯째, 기타 종교의식으로서 천도교 기념식마다 예식에 참석하는일, 식사할 때마다 드리는 감사의 食告, 일상생활의 출입할 때나 무슨일을 시작할 때지극한 정성으로 心告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오관종규의 실행세칙은 천도교가 ‘人乃天’을 표어(標語)로서만 아니라 종지(宗旨)로까지 내걸고서 人間格종교․ 인간주체적 覺天의 종교․自信自拜를 강조 함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신앙집단을  실지로 구성해가는 도인(道人)들의 마음은 동학창도시대의 수운이 체험한 종교성을 여전히 담지해가는 신앙적 종단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돈화를 비롯한 천도교 현도시대 교리정립발전의 이론가들은  근대서양철학의 ‘주체적 자아철학’ 사상이나 ‘사회적 진화론’의 영향을 너무 받아, 초기 시천주신앙의 종교성과 신비체험적요소를 미성숙한 유아기적 신앙단계의 종교양태로 규정하고 지나치게 합리적 교리화를 시도하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들어 대표적인 천도교 이론가 이돈화의 초기와 중기사상은 인간중심적 수운주의였다. 하눌님을 부정하거나 도인의 수련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도리혀 인간성 안에 내재한 性靈의 신성․신력․창조적 천심을 개발함양할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엘리트 지식인들의 이론적 담론이었고, 현실적 실존으로서 일상적 민중들은 교리화 담론에서 종교적 생동력을 얻기어려웠다. 이점을 본인도 인정하였는지 모르나 이돈화의 마지막 교리서로 평가되는 『東學之人生觀』에서는 천도교신앙의 종교성을 중시하고 재평가하는 견해를 나타낸 것은 다행으로 보인다. 예들면 수운선생의 경신년 종교체험과 天主思想은 “學的思索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요 순수종교적 啓示에서 시작된 것이다.... 경신 사월오일에 천주의 啓示的 命敎를 받고 처음으로 頓悟하여 철저한 大覺에 이르렀다” 이돈화, 『東學之人生觀』, 奇蹟. 26쪽.
고 강조했다. 또한 말하기를 “(수운)선생의 神의 관념으로보면 儒道와 심원한 근거가 대동소이한 점이 있다. 儒道는 天을 인정하되 天主에 대한 崇拜와 信仰은 없다. 儒道뿐만 아니라 佛仙 兩者도 역시 직접 天主信仰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은 동학을 ‘유뷸선 합일’이라 단언해 놓고도 유불선에서 신앙치 않던 天主를 신앙의 本體로 하였다”. 위와 같은 책, 25-26쪽.
위와같이 말년의 이돈화는 천도교신관이 지닌 ‘천주’로서의 인격적․의지적․자기계시적 특성을 재평가하고 인정하였다.  

V.  과제와 전망

 첫째, 현대문명의 생태학적위기와 자연파괴의 대재난 앞에서 천도교의 실재관 특히 性心身 三端論에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통찰력을 심화발전시켜 나아갈 과제를 갖는다. 몸의 중요성은 곧바로 물질․대지․자연․여성에 대한 기존의 존재론적 위상을 완전히 변혁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천도교가 공헌 할 수 있는 가장 큰 분야가 바로 三敬思想․性心身 三端論에 근거한 생태학적 윤리(ecological ethics)임을 각성해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윤리학적  과제는 새로운 비젼과 통찰력을 동반해야 한다. 인간을 지구라고하는 온생명체 안에서 ‘중추신경계’로 보는 과학자 장회익의 통찰과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장회익, 『삶과 온생명』,(서울:도서출판 솔, 1998)
필자가 본론에서 누누이 언급한 유기체적 과정사상과도 깊은 학문적 대화를 해야 한다. 더 바란다면 성심신 삼단론은 현대 가톨릭 영성 신학자 라이몽 파니카(R. Panikkar)의 ‘우주신인론적 영성’(cosmotheandric spirituality)과도 상호대화를  통해 서로 배움이 있을 것이다.       
 천도교사상은 21세기에 걸맞게 천도교 진리체험을 재표현하는 과제를 수행해가야 한다. 천도교 신자들이 “吾道 今不聞 古不聞之事 今不比 古不比之法也 ”요, 새시대 우주시운을 따라 후천개벽의 후천종교라는 자의식과 자긍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할만하지만, 수운의 위 대답은  왜 동학의 진리를 훼손 비방하는 자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시대상황적 진리적 언표로서 받아드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동학창도 당시에 조선에 포교되거나 실재하던 불교 그리스도교 유교등 세계종교들의 이즈러진 단면적 인상들을 그 종교들의 본질로서 단정하고 더 이상 세계종교들의 위대한 진리체험을 알아보려는 겸허한 진리탐구정신을 상실하고 독선적 우월의식에 빠져버리게 된다. 차라리 “道則同也 理則非也” 라는 성숙한 해석학적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 천도교의 미래과제는 야뇌 이돈화가 그의 말년작품 『東學之 人生觀』에서  천도교(동학) 논리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反對一致의 원리’(the principle of coincidence of opposites)에 입각한 역설적  논리에 더욱 철저하여, 그것을 신론, 인간론, 연성수련론, 생사론등에 적용시켜 천도교 종교성의 묘법(妙法)을 더욱 분명하게 회복해야 한다.
 ‘반대일치의 원리’란 본래 중세기 니콜라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에 의하여 강조된 진리체험 및 진리표현의 역설적 사실성을 나타내는 논리이다. 예들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실 그것을 모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다. 그처럼 무한의식과 유한의식, 초월과 내재, 一者와 多者, 내재적 초월과 초월적 내재, 인격적 유일신관과 비인격적 범신관, 자율과 타율, 자력구원과 타력구원, 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등등 서로 반대 대치되는 듯한 실재나 체험이 종교적 진리에서는 역설적 일치성을 지닌다는 원리이다.
 예들면 하눌님은 무한절대자요 무소부재한자이기 때문에, 그의 현존장소를 인간의 공간경험에 근거하여 위와 아래, 앞과 뒤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반대일치의 원리를 소홀히 생각하면, 천도교는 인간성의 본질로서 내재하는 ‘내재적 性靈’만을 강조하여 인간 안에 계실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 인간 위에  존재하는 하눌님에 대한 誠敬信 의 종교적 자세를 약화시키거나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야뇌가 강조하여 경고하는 바 곧 “사람 그 자체가 곧 神으로 輕信 誤信하여서는 안된다. 인내천 신앙에서 제일금물은 이점이다” 이돈화, 『東學之 人生觀』,64쪽.
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중심주의 종교라는 과오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인간 앞에 계시는 하눌님’은 내 안에 ’내유신령’으로 계시는 하눌님과 자가당착 충돌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위에 계신 하눌님’이해를  공간상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뉴톤적 물리학에서 말하는 천계의 특정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단순이해하는 천도교가 도리어 문제일 수 있다. ‘인간 앞에 계신 하눌님’은 ‘천사문답’을 가능케하는 ‘영원한 당신으로서의 천주신앙’을 지탱하며, ‘인간 위에 계신 하눌님’은 천도교신관을 포함하여 일체의 신에 관한 인간들의 논설을 초월하여 계시는 무궁하신 영으로서의 ‘경외대상이신 하눌님의 초월성’을 공간상징으로서 언표한 것이다.
 ‘반대일치의 원리’를 以身換性하는 연성수련하는 사람의 내면적 자기변화 가능성 논리에도 심도깊게 적용하여, 以身換性이 단순한 인간주체적․ 자율적․ 도덕적 노력결과임을  넘어서서, 노력하는 수도자의 정진과 신묘하게 병행하여 假人間을 본래적 眞人間이 되도록 감화감응(感化感應)하는 하눌님과 선사(先師)의 초월적 능력안에서 이뤄진다는 역설적 감동체험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도덕적 영웅주의나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천도교도인들을 역동적이고도  감사와 감격을 경험하는 생명적 신도들로 육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가 철학이나 도덕과 다른 본질적 차이는 바로 논리적 명증성이나 도덕적 당위성에 기초한 진리파악이나 실천이론의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일치의 원리’에 기초한 역설적 진리를  찰나적으로․ 수동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도리혀 매우 능동적이며 시간속에서 영원한 삶을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으로 살아간다는 데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참고한 서적]

1. 東經大典
2. 無體法經 附 聖師 法說 (鄭雲彩 譯)
3. 趙基周 편저, 東學의 原流(보성사, 1979)
4. 李敦化 편술, 天道敎創建史 (천도교중앙종리원,1933)
5. 李敦化, 東學之人生觀(천도교중앙총부, 1972)
6. 義菴聖師法說解義. 상.하.(李昤魯解義)
7. 東學革命100周年紀念論叢.상.하.(동학혁명100준녀기념사업회,1994)
8. 金用天, 東學思想展開의 諸問題(동학사상연구소, 2004)
9. 金容暉, 侍天主思想의 變遷을 통해본 東學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 2004)
10.김상일, 화이트헤드와 동양사상(서광사, 1993)
11.문창옥,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통나무,1999)
12.장회익, 삶과 온생명(솔,1998)
13.A.N.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Corrected Edition(The Free Press,1978)
14.William James, The Varities of Religious Experience(New American Library, 1958)
15.R.Panikkar, Cosmotheandric Experience(Orbis,1993)




'종교적 입장에서 본 천도교 현도 100년의 천도교'
(천도교 현도100주년 기념학술대회, 동학학회주최, 2005년 11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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